2008 겨울수련회 (7강)
자, 시작하도록 합시다. 힘드신 줄 알지만 50분만 견뎌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16편 11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그 사람이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해도, 참말을 해도 거짓말,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그런데 그것과 대비되는 것이 뭐냐? 거짓말 안 하는 사람.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고, 이쪽에 거짓말쟁이가 있으면 저쪽은 뭐냐, ‘난 다윗을 선택했다.’ 이것이 나와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거짓말쟁이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그래도 너는 착해.’ 이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그래도 야곱은 구원해서 건진다.’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 중의 괴수다. 그런데 죄인 아닌 사람이 있다.’ 이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층인데, 1층과 2층이 노는 동네가 달라요. 1층은 선악과 따먹고 쫓겨난 것이 1층이라면, 1층에서 자기들끼리 분답게 설치고 누가 잘했니, 못했니 해도 1층 자체는 2층에서 지붕이 내려앉으면 거기에 깔리게 되어 있어요. 누가 잘했네, 못했네 할 것 없이 똑같아요. 2층에서 지붕 내려앉으면 다 깔리게 되어 있어요.
2층의 세계는 누가 잘했나, 못했나 하는 선악체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했느냐 하는 선택에 관한 세계입니다. 선택이 윤리를 이겨요. 선택이 도덕을 이깁니다. 선택이 신학을 이겨요. 그런데 그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선택이 들어오게 되면, 이 세상에는 전부 다 ‘나’밖에 없는데(너도 너의 입장에서 보면 ‘나’가 되지요), ‘나’밖에 없는 여기에 새로운 ‘나’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나’가 등장하면서 기존에 있는 모든 ‘나’가 새로운 ‘나’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거짓말쟁이로 됩니다. 전혀 가치 없는 멸망하는 짐승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 ‘내가 언제 그런 것 받는다고 했느냐?’ 이렇게 됩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모친의 죄 중에 내가 태어나서, 하나님이 번제를 원하셨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주께서는 제사나 번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그냥 심령이 아니고 ‘상한’ 심령입니다.
여러분, ‘상한’ 음식 한 번 먹어보세요. 못 먹습니다. 허연 곰팡이가 핀 것을 어떻게 먹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잘도 먹지요. 곰팡이 핀 나에다가 명품차고 다니고, 속에는 곰팡이가 피어오르는데 머리 염색한다고 난리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꾸며 봐도 이미 그것은 파토 난 나에요. 인정받지 못할 나입니다.
명품차고 머리 염색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웃기는 것은 기도한다고 난리라. 철야하고, 수도원 생활하고, 큐티하고--- 웃기고 있어요. 루터가 그것이 싫어서 뛰쳐나왔어요.
새로운 ‘나’가 오게 되면 너, 나가 모두 없어지고, 이미 ‘나’라고 하나님이 지정해 준, 지목한 그 ‘나’는, 그냥 ‘나’만 달랑 오는 ‘나’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기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나’가 들어와요. 아까 했지요. 하나님이 뭘 선택했다는 말은, ‘내가 선택했으니까 너희끼리 잘 해봐.’ 이것이 아니라, 그 ‘우리’ 안에 하나님이 선택한 ‘나’와(이것은 총괄적인 ‘나’지요. 너, 나 말고 하나님이 선택한 그 사람) 거기에 예수님, 거기에다 성령, 거기에다 성부 하나님까지 더불어서 우리가 한 배치를 이룬다고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을 제가 아까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했지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오게 되면 이런 속성을 주신 분의 소유가 돼요. 속성이 있을 때 속성을 주신 실체(그분)가 오시게 되면 우리는 속성을 통해서 그 실체에 속한 지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엡4:5)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들어오는데 이 ‘나’가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저 다윗을 선택할 줄 알았어.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할 줄 알았어.’ 이렇게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십자가마을 수련회를 하고 있는데, 만약 김대식 성도님만 데리고 간다면 ‘축하합니다.’ 하고 박수 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김대식 성도 다리 붙들고 따라가려고 “나는 요?” 하고 난리 칠 겁니다. 왜 그 사람(김대식) 만이냐? 나는 뭐가 모자라서 안 데려가고.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불러도 하나님조차 날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했단 말이지요. 모든 우상 앞에는 ‘나를 위하여’가 붙습니다. 하나님도 날 위한 하나님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묵사발 만드는 방법이 뭐냐 하면, 너, 나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선택해서, 지목해서 그 사람 중심으로 세워버리니까 다른 사람들은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번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 시험 쳐서 결정합시다. 기도 누가 오래 하느냐, 성경 누가 많이 읽었느냐 시험 쳐서 결정합시다. 그런 식으로 하시면 섭섭합니다. 그런 식으로 결정하시면 인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짐승으로 보기 때문에 “네가 뭔데 내 입시 방안을 마음대로 바꿔? 이건 내 방식이야!”
이미 버림 받은 자는 구원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어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이 뭐냐?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 입을 자에게만 긍휼을 준다.’ 이것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그 외 다른 속성은 다 엉터리다. 이것이 모세와 독대할 때 하나님이 일러주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보고 구원 받을 자를 고르라고 하면 일단 누구를 집어넣겠습니까? 일단 나부터 집어넣습니다. 나부터 집어넣고 그 다음은 자기 가족, 친지 이렇게 나갑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거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곰팡이 핀 곳에. 곰팡이 냄새가 나는데 왜 들어갑니까? 기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거 안 하면 끝장난 겁니다. 아무리 살림 차려놓아도 하나님이 안 오시면 안 되잖아요. 임금의 은총을 받아서 왕비가 되었지만 3년 내내 임금이 눈길한번 안 주는데 어떻게 합니까? 미치지요. ‘상감마마 납시오.’ 라고 해도, 하도 오랜만에 자기 부인을 보면 “고개를 들라. 많이 삭았구나!”하고 떠나갑니다.
종교라는 것은 바로 나의 주체의 절대화입니다. ‘나’라는 인간의 절대화. 그것이 바로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이방인들이죠. 그래서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숨어 계세요. 숨어 계신다는 것은 일 안 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나’ 중심으로 발생된, 나로부터 발생된 신은 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후설의 현상학에 나오는데, 의식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신을 의식했다면 그것은 취사선택된 나와 관련된 사항만 고려된 신입니다. 옆 사람 신이 아니고 나의 신이에요.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나만의 신이고, 이런 나가 백이면 백 다 있단 말이지요. 그러기에 이것을 평균을 내서 ‘신은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실제 세계는 민주주의란 것이 없어요. 민주주의는 선과 악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의 양이 진리가 되는, 임시적으로 진리라고 간주해 주는 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민주주의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나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러 오셨지 민주주의 하러 오신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평균 낸 신은 각자를 인정해 주는, 나와 동일시 되는 우리 공동체를 인정해 주는 신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 생각이었죠. 그들은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할례 받은 자는 전부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 받은 자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또 오해를 한 거예요. 아브라함의 언약은 예수님보고 이야기한 것인데, 그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나에게도 당겨 와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세계는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나와 관련 되어야 이것이 좋은 말씀으로 받기 때문에 무조건 중간에 도중 차단시켜서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단 말이죠.
골로새서 2장에 보면, 할례란 것은 딴 게 아니고 십자가만이 할례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 진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맞아 죽을 뻔했지요. 문자적으로 보면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이 할례가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그것을 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심을 봤다.’ 고 하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화를 냈지요. ‘왜 우리들끼리 할 수 있는데 예수를 꼭 집어넣느냐’는 것이지요. 우리들끼리 알아서 하자. 우리가 문자를 읽을 수도 있고 해독력도 있는데 꼭 예수 집어넣지 말고, ‘할례 받으면 백성이다.’ 얼마나 쉬우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누구입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잘못 생각한 하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낯선 하나님으로 등장해요. 낯선 하나님이 선택함으로 해서 그 선택 받은 자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선택되지도 않았으면서 선택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확연하게 갈라지면서 진짜하나님과 가짜하나님이 분류가 되는 겁니다.
분류되는데, 그 선택 받은 사람은 속에 뭐가 들어가는가? 자기만 달랑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의 철없음을 함께 가야될 운명으로 선택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버림 받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버림 받은 것이 아니고 멋도 모르고 까불어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받다보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은, 버림받아도 천번만번 지옥 가도 마땅한 그런 엉터리 신이었음을 제대로 하나님 앞에 고하면서 제대로 아는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겁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다시 말하면 “이렇게 버리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버리시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 십니까?” 라고 물은 것은, ‘세상 사람들은 미처 예측하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던 그 하나님께 오히려 버림 받았으니까.
그러면 시편 22편이 예수님께서 인용을 하셨으니까 예수님과 연결되는 사건이란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그 중에 시편의 다윗 시대에서 예수님 십자가 시대로 그냥 흘러가느냐? 아닙니다. 다윗 이후에 다윗에게 복속된, 다윗 언약에 의해서 구원될 사람 혹은 선택된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 속에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그러한 속성들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흐르게 되면, 자기가 믿는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 일들이 벌어져요. 이게 고난의 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여기에 특수한 ‘나’가 등장하지요. 아무 죄도 없이 당해요. 누가?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애가 1장 14절에 보면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라고 되어 있고, 15절에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쭉 나오면서, 2장 1절에 보면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시온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기거하시는 거처지요. 그런데 그 시온이 어떻게 됩니까? 박살나지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서 있고 거기에 조명을 쫙 비추면 여기에서 그림자가 나오지요. 그 그림자가 구약 때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림자 안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이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애매한 고난과 징벌을 받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로 접근 됩니다.
그 다음에 빛을 저쪽에서 비추면(아까 빛을 비춘 쪽에서는 구약의 그림자가 생겼다면 이제 반대로 비추면) 신약이 나오겠죠. 신약의 성도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합격증을 받은 자로써 ‘어떻게 해서 나 같은 인간이 구원 받았는가’를 경험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지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느니라.(롬5:3)”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난에 동참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의 길을 본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장 21절.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개인을 편하게 하는 삶은 없습니다. 없고 속성만 들어오지요. 무슨 속성? 십자가로 가는 길이 우리에게 속성으로 자리 잡습니다.
속성이 자리 잡으면 하나님의 고난이 들어오고, 우리는 그 때마다 하나님께 반발을 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예레미야가 반발하듯이 ‘내가 믿는 주님한테 이렇게 당하다니 억울합니다.’ 라는 소리를 매일같이 하는 거죠. 왜 그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어떤 생동하는 분을 의식하기 때문에. 내 안에 누군가 계시고 내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내 안에서 그러한, 남들이 모르는 투쟁과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여, 저로 하여금 왜 이렇게 힘들게 살도록 합니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지요. 안산 강의에서 많이 했습니다만,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 내가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죽으나 산자 같으니 내 안에서 주님이 만날 나를 죽이지만 나는 죽음을 통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점검하고 확인한다.’
우리를 마지막 때 쓰레기처럼 여기시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 이것이 진정한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고 거짓 사도며 삯군이며 이단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자가의 속성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활개 친다고 보시면 성경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구체적인 계시가 뭡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내 안에서 활개 치는데 감사한 것은 그 개미군단이 와서 나를 뜯어먹는다 할지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돌멩이가 날아온다 할지라도 이미 합격된 것이 돌이 날아오면 날아올수록 더욱더 합격증의 위력은 오히려 빛을 발합니다. 대단한 합격증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날 위해 은혜를 주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지요.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그런 자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새 노래로 찬양하라!’ 새 노래가 나와요. 이미 시편 자체가 주님의 그림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기뻐해야 되는데, 축 처져서 침울하고, 슬프고, 아이고 이제가면 언제 오나 --
이제 시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은 선택 받은 자 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아까 한 것 다시 정리해 봅시다. 선택된 자 안에 어떤 프로젝트가 있지요. 그 작업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다윗처럼 다윗의 자손에게 예속되어서 같이 구원 받아야 될 자들을 입구에서 누가 대신 죽으심으로 그 효과를 보는 사람들. 이것이 무슨 언약? 이것이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은 뭐냐? 왕 한분 잘 만나서 백성이 공짜로 구원 받는 방식.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에 “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대단한 신학자처럼 보여요. 보통 소경은 따라오면서 “한 푼 줍쇼. 한 푼만 줍쇼.” 이렇게 따라와야 정상 아닙니까? 왜 그래요. 재물이 있어야 자기 주체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한 푼 줍쇼.”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어요. 제가 이 소경을 대단한 신학자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진짜 이 사람이 신학을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성경에 기록된 것이 뭐냐 하면, ‘왕 한분 잘 만나서 우리, 이 땅에서는 초라하게 살지만 영생 얻어 횡재한번 해 봅시다.’ 이런 뜻이에요. 원래 우리는 저주받은 버린 몸이니까, 소경이 되었다는 것은 구약에 보면 저주 받은 자이거든요. “나 저주받은 사람 맞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경과 똑 같은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야기하지요. “귀신들린 내 딸을 고쳐주소서.” “나는 개 같은 이방인에게는 안 간다.” 그러니까 여인이 하는 말이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상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이 말은, ‘저는 개 맞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이런 자들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이르리라”
어느 인간이 자아가 있는데, 자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뻔히 알면서, 그 소중한 자아를 개 같이 취급합니까? 이것은 인력으로 안 돼요. 천하하고도 안 바꾸는 그 귀한 자아를 개 취급하는 것은 정말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미워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미워할만한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누구냐?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우리는 무조건 개다.’ 이 신학적인 관계를, 테마를 아는 사람만이 주님 앞에 ‘나는 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그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앞에서 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하란 말입니다. [십자가마을]은 아무것도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너, 나가 있을 수 없어요.
자, 이제 ‘너, 나’를 따져봅시다.
‘우리’라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나오는데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여기에 ‘우리’가 나오지요?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에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나오지요.
이것은 ‘나’를 인정해 주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창조된 것이 인간이죠. 그래서 여기는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에서 출발한 그러한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라는 것은 공동체를 강조하는 ‘우리’가 아니라 그 중심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까? 진짜 선택 받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할 때 자연스럽게 그것은 ‘우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한 ‘우리’는 아니고 예수님 한 분 만을 이야기를 할 때 제대로 된 하나님의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시온산이 성립되는데, 그 시온산은 예수님이 오실 때가지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이 이야기 좀 더 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니까 자기밖에 몰라요. 그런데 여기에 강제로 언약 구도가 뒤덮였지요. 쉽게 말해서 율법을 뒤집어썼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를 했지요. ‘야, 우리 좋으라고 율법을 주셨구나.’ 전부다 자기 위주로 해석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시온산을 세우고 성전 짓는 것을 허락을 했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에게 성전만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나라가 된다.’ 라고 자기중심으로, 나 중심으로 또 오해를 한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새로운 것이 오면 그 새로운 법을 자기와 동일시해서 그것을 확고한 나의 주체로 해서 안정감 있는 주체를 일시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성전만 있으면 무조건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46년 간 짓고 있는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 내가 성전이다.’고 했어요. 에스겔에 보면 성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물이 흘러나옵니다. 물이 흘러나와서 성전 인근에 있는 모든 마을들은 성전에서 나온 물로 천국을 이룬다, 에덴동산을 이룬다는 대목이 있어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봅시다.
이미 한 것을 다시 해 봅시다. 말씀은 누구를 겨냥한다? 예수님. 그런데 인간은 나에게로 잡아당기는데, 왜 잡아당기는가? 내 주체에서 언어의 틀이 나오지요. 언어의 나의 세계고 나의 의식이니까. 따라서 이 말씀은 누구 좋으라고? 내 좋으라고 있지요.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내 안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전이 있고, 에스겔에 보니까 성전에서 뭐가 나온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생수가 나오니까 성전 인근에 있는 모든 마을이 거룩한 천국이 되고, 그 천국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기거한다. 이것이 에스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볼 때 이런 해석 외에는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성전이다.’ 그리고 ‘내 배에서 성령이 나오고, 심지어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도 성령이 나온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그걸 듣고 어디에 가겠습니까? 에스겔로 가겠지요. 에스겔을 펴놓고 보겠지요. ‘예수 당신 말이 여기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율법을 위반한 자’라고 나선 겁니다.
‘안식일날 나무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하지 말라는 것이 퍼진 현장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이 말하는 노동 항목에 해당되는 일들을 함으로 법을 위반케 한 것입니다. 위반케 하니까 “누가 너더러 안식일을 위반하라고 하더냐?”그 사람이 겁이 나서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 그분이 내 병을 고쳐주었는데 그분이 그렇게 했다.”고 할 때, 자연적으로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이 옳으냐 아니면 예수님이 이야기한 안식일에 노동하는 그것이 옳으냐를 서로 마주치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일을 하신 겁니다. 둘 중 하나는 가짜지요.
마주치게 해서 그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치도록 의도해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침을 받고 죽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낯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따라다니는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있지 않고 저주하고 도망치도록 그렇게 만들고.
그러니까 전 인류가 누구 하나를 상대로 싸웁니까? 예수님 한 분을 상대로 몰매를 치는 양상으로, 일부러 구도를 그렇게 깔아놓은 거예요. 그렇게 깔아놓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 이름이 아니면 구원 못 받지 롱”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싫어하는 것이 뻔한데, 예수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싫어하는데, 예수라는 용어가 싫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싫어하는 이야기만 하셨기 때문에. 그냥 공연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예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이것은 우리보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하는 거예요. 결국 뭔고 하니까, 계속해서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영원한 나로 남게 하는 거예요. 늙어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남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나와 주님과의 충돌을 일으켜서 ‘아, 나는 죄인 맞구나!’ 달리 죄인이 아니고 역시 나는 나밖에 모르는 고집쟁이고 욕심쟁이라는 것을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걸 들춰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것은 이미 없는 ‘나’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나’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것을 바깥으로 토해내도록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바깥으로, 하나님의 속성이 바깥으로 나오면 ‘나는 죄인이었지만 주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시죠.
그러면 아까 긴 그림자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미워해서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우리를 미워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님, 나는 복음 믿는데 사람들이 나를 안 미워하던데요. 좋아하던데요.” 기다려보세요. 기다리다보면 “저 인간은 뭔가 소통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사람의 모든 이야기는 전부 다 제 자랑인데, 저 사람은 지 교회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설교해도 죄다. 결국 예수님뿐이다.’ 이렇게 나오니까 ‘저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종용히 끊고자 합니다.
종용히 끊고자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마리아와 사귀었던 요셉 아닙니까. 그 요셉이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어느 남자가 자기 애인이 배 불러오는 것을 보고(자기는 같이 동침한 적도 없는데)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애 아빠 누구야!” 이렇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더 웃기는 것이, ‘하나님이 잉태케 하셨다.’ 이렇게 나와요. 이 여자가 미쳤지 정상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임신케 했다니 미친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천사까지 동원해서 “그 여자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사실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그때부터 요셉은 고난의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천사를 만났지만 자기 가족들은 천사를 안 만났거든요. 그래서 집에 가면 사람들이 만날 놀리는 것이 ‘네가 더러운 여자를 만났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리 해명하고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네가 돌았구나.’ 이렇게 나오지. 그래서 예수와 결부된 사람은 미친놈 아닌 자가 없고, 욕 안 얻어먹는 사람이 없어요. 그 마을을 ‘십자가마을’이라고 해요.
이제 시온이야기 아시겠지요? 너, 나가 삭제되고 그냥 우리만 남는 것. 그리고 진짜 나는 하나님이 인정한 시온, 다윗만 남고 --
그 다음에 교재 10페이지 봅시다. 아, 그 전에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 전에 것을 봅시다. 진도 빨리 나간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시편 전체의 사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
시편 2편 1-3절을 봅시다. 보고난 후에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질문 던집니다. 글쎄 그들은 왜 그렇습니까? 열왕들이 왜 그래요? 다른 나라들이 왜 그렇게 나옵니까? 왜 그렇게 민감합니까? 왜 세상의 군왕들이 딴 것에는 반응을 안 보이다가 왜 기름 부은 자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면서 공격하려고 합니까? 정답은, 우리는 모르지요. 왜 모르는 줄 알아요? 우리는 내 생각만 하지 열방까지 간섭할 수 없거든요.
우리는 하루 종일 나만 생각하지 열방이 어떻게 하고, 예수님과 열방의 관계가 어떠한 것은 남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하시는 일 자체가 우리가 평소에 예상한 일을 피해 가신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해할 수도 없고.
그걸 제가 이 교재 10페이지 중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왜 이러한 체제에 발작하듯이 반발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지 않아야 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왜 군왕들과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등극하는 것을 싫어하는가? 여기에는 필시 시편에서 말하는 ‘악’이라는 그 본질과 ‘하나님 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영적 세계의 원류, 원천이 뭔가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관심이 없지만, 관심 없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드러내거든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우리 세상사의, 신문 지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악마’라는 용어 ‘사단’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그 정체를 노출시키는 계기가 바로 예수님이 등장해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복속, 부하들이기 때문에 손댈 것 없는데, 예수는 손 좀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이미 시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0페이지 (3) 죄인인 ‘나’라고 할 때, 이 나는 죄가 나를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시편 51편에 나오는데, 죄가 나를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죄를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고 죄가 나를 지배해서 하나님이 택한 다윗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이긴다고 까불지만 진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죄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최초로 우리에게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죄가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65:3)”
안 믿는 사람 들으면 완전히 약 올리는 소리지요. 죄가 나를 이겼지만 주께서 용서하면 날 이긴 죄보다 주님이 더 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악마가 우리보다 세지만 주님은 악마보다 더 세다.’ 그걸 알고 있는 악마가 주님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듭니다. 그것은 우리 외곽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투쟁입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말했잖아요. 여호와께서 오셔서 뭘 하신다? 전쟁을 하고 승리하실 때 영원한 문들은 승리의 증거로써 문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간다고 문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승리자가 입장해야 ‘웰컴 왕이시여’ 하고 문이 들리게 되어있고 우리는 그 뒤따라 전리품으로 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는 사로잡힌 자예요. 사로잡힌 자로 뒤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가면서 누구에게 영광 돌립니까? ‘우리 왕이시여, 다윗의 자손이시여 당신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쫓아가는 거예요.
이런 구조란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구조를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누가 제일 싫어하는가 하면 마귀가 제일 싫어합니다. ‘그냥 이대로 살자. 이대로 살다가 신이 네 마음 편하게 하면 복 주신 줄 알고, 너를 불편하게 하면 죄 지은 줄 알고 회개해서 또 복 받고 그렇게 살아. 뭘 따로 예수의 세계가 있어.’ 그냥 우리끼리의 세계를 살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나온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자, 이제 시편 5편 8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이 대목도 어려워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를 그동안 점령했던 점령군이 누굽니까? 주님의 원수이죠. 주님이 등장하니까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 주님의 원수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주님이 등장하니까 그 원수가 주님께 달려들고, 주님께서는 나의 원수를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서 곧게 하시고.
이러한 영적인 시스템은 우리가 평소에 편하게 내 위주로 살 때는 이런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편 7편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서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과 시편은 영 다르지요? 원수가 나오고, 주께서 심판을 하시고, 이것은 뭔가 영적인 층을 눈치 챘다는 겁니다.
그 다음 시편 9편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여러분, 이 좋은 세계에 구태여 심판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 나를 위한 세계라는 생각 때문에 대한민국을 심판한다면 곧 누구를 심판하는 거예요? 나를 심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딴 것을 심판하는 것은 괜찮은데 나를 심판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라는 것을 시편은 알려 주지요. ‘주여 심판 당해도 쌉니다.’
그 다음 시편 9편 20절에 보면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시편 11편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보좌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그 보좌가 이제 시온성에 내리면 그 시온산에 들어오다가 그 시온산 성전이 불타버리면 다시 하나님 쪽으로 갔다가 다시 예수님 오시면 예수님과 더불어서 성전에 왔다가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시편 14편 1절을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런데 여기 끝(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기의 주체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죠.
그 다음 16편 4절을 보면,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어떻게 된다?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여기에서 한 가지만 더 하고 쉽시다.
예레미아 -- 요새는 제가 자꾸 잊어버려요. 예레미야 십 몇 장인데, 잠시 스톱해 보세요. 지금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저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못 찾으면 제가 아는 대로 그냥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냥 이야기해야겠다. 예레미야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여호와를 믿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길 때에는 만사가 형통했는데, 그런데 예레미야 말 듣고 여호와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만사가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이유를 아시는 분? 왜 하나님께서는 무당 신을 섬길 때 만사가 형통하다가 갑자기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그 약속을 믿는 그런 신으로 바꿀 때 왜 갑자기 일이 꼬이게 하는 겁니까?
야, 이제 찾았다. 예레미야 44장 17-18절 입니다. “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패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늘 여신에게 제사 드릴 때는 그렇게 모든 것이 풍족했는데, 갑자기 하늘 여신에게 섬기던 것을 패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이 핍절하고 일이 안 되더란 말이지요. 그 이유가 뭔지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물었습니다. 답변하고 쉽시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만큼 십자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가깝다는 겁니다. 자기 주체 위주로, 그러니까 나 위주로 신을 섬기던 것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음성이 가까이 들려오거든요. 나는 신을 섬기든, 교회를 나가든, 모든 것을 날 위주로 하는데, 이상하게 교회 가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믿는 신은 만사형통케 하는 신인데, 내가 점점 더 가까이 가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소리가 막 들려오는 거예요. 아하, 내가 믿던 신은 이 마귀가 참된 신 믿지 말라고 그동안 계속 나를 미혹해 왔던 방식이 뭐냐? 이방 신을 믿으면 만사가 형통해. 만사가 형통하니까 이게 향유, 나의 기쁨이 되잖아요. 나를 기쁘게 하니까 이것은 좋은 신이지.
나를 슬프게 하면 나쁜 신이고, 나를 기쁘게 하면 좋은 신이지. 나의 주체를 위한 신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가까이 오게 되면 ‘아하, 만사형통케 하신 신이 가짜 신이었구나. 내 위주의 신이었구나.’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바꾸라’는 소리가 들어오면서 그때부터 우리는 주님의 아픔에 가까이 다가 선 그러한 증거를 그때부터 솔솔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그 버리심에 내가 가까이 가 있는 겁니다. 어디까지 가야 되는가? 그것은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거기까지 가야 되는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속성 따라 다르기 때문에 너무 염려 마세요. 안심하소서! 돌에 맞는 것은 스데반의 몫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돌멩이 맛보려고 하지 말고, 안심하소서! 저처럼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해서 얻어맞는 그런 것은 주의 일하고 관계없고, 주차위반 단속하다가 얻어맞는 것은 주의 속성이 아니고, 나 때문에 내가 맞는, 내가 내 좋으라고 자꾸 거짓 신을 생산해 내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뭔가 일이 잘 안 되어야 된다는 그런 음성, 그 음성을 통해서 주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라는 소리가 가까이 올 때,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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