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의미의 그릇

아빠와 함께 2023. 9. 4. 08:16

20230901a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역대상 17장. 17장 아닙니까? 22장. 17장 한 이유가 있어요. 다윗이 성전 짓겠다, 하는 그 마음이 17장에 나와 있고 22장도 마찬가지지요. 17장에 잠시 1절 봅시다.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그렇게 돼 있지요.

여호와의 언약궤. 두 개의 차이점을 생각해야 될 건데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 서로 반대된다는 것은 다 아시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간이 이것까지는 해낸다는 거예요.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비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조차도 인간의 영역에 속해요. 왜냐하면 이래 생각해봅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이렇게 합시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 이렇게 갖다 붙여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다는 이것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덧붙일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그런 마음이 든다고요.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까지는 아는데 이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을 플러스 시킬 수가 있어요. 플러스 시키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전함, 또는 완전성, 완전함, 그다음 절대적인 것, 이렇게 사람들은 그런 아이디어가 생각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철학이고 종교, 과학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런 비교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성경적으론 뭐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그다음에 알 수 없는 것의 차이로 성경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지요. 그러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미지보다도 어떤 여분의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플러스 더하기가 되면 온전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이 와버리면 이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공격하는 식으로 성경 내용은 그렇게 짜여있습니다. 겸손을 떨면서 하나님 제가 이것까지는 하겠는데 이거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 라는 생각을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하게 돼요. 상당히 누가 봐도 겸손해요. 신앙적이고.

그런데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모자란 생각이 아니고 너무 작다가 아니라 아예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의 도래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인간들이 구분할 줄 안다는 거예요. 이게 구분이 돼요, 인간에게.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구분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배척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착해봐야 하나님보다 착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까지 우리가 더 안아버리고 품어버리면 우리는 온전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오셨는데 생각할 수 없는 분이 아니고 인간이 생각해보니까 저 존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용서가 안 돼요. 그러니 뭘 하게 돼요, 인간들은? 배척을 하게 된다고요. 내가 할 수 있다는 이 일 때문에 이러한 자신감 때문에 이런 확고함 때문에 예수님이 배척을 받은 거예요.

열심히 교회에서 기도할 때 문제점이 이거에요. 기도하는 나는 너무나 내가 보기에도 착하고 너무나 대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하는 것을 아마 어여삐 여겨서, ‘기도 열심히 하는구나. 무엇을 도와줄꼬?’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추가해서 복으로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기도를 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사람이 기도하면서 내가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욕 얻어먹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이라는 걸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지요.

역대상 17장에 1절에 보면,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언약궤 나오지요. 오늘 이 시간에 언약궤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방금 한 이 공식 그대로 사용합니다. 언약궤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언약궤가 주어졌으니까, 언약궤를 만들라 했으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언약궤를 생각한다는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언약궤가 생각하는 인간을 공격하는 용도의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언약궤라고 여겼던 것, 인간은 언약궤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언약궤의 깊은 취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내용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학생들이 학원이 갈 때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학원비가 비싸잖아요. 학원 끊으면서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면 일타강사께서 나로 하여금 더 깊은 수학 같으면 수학의 깊은 것을 더 확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학원에 3개월 다니고 수학 성적이 20점 이상 올라간 것을 엄마한테 자랑질해야지, 그런 기대로 학원에 열심히 다닙니다. 그게 인간들의 본성이죠.

아까 저녁 먹으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어요. 짬뽕 그릇이 깊다는 말, 그게 오늘 강의에 너무나 적절하다. 짬뽕을 주는데 양이 많았던 모양이죠. 파도파도 계속 짬뽕이 있었어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각은 깊기 때문에 우리가 서서히 파고 들어가면 깊이를 다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주께서 그 깊이를 마저 채워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성경은 짬뽕을 짬뽕 그릇에 담았잖아요. 짬뽕 그릇을 깨십니다. 깨버리죠. 짬뽕 그릇이 깨지면 안에 있는 짬뽕이 그냥 테이블에 왕창 쏟아지겠지요. 엉망 되겠지요. 하나님께선 언약을 주시면서 언약을 빼시는 거예요. 언약을 빼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종에 언약 보이스피싱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줘놓고 ‘야 약속이다. 이거 붙들고 이거 믿으면 구원받는다.’ 했는데 그 붙든 약속을 주께서 조금씩 빼버려요. 화투에서 밑장 빼기하듯이 살살 빼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고스란히 나락에 빠집니다. 나락에 빠지면 무엇을 우리가 건질 수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서 구원될 그러한 존재가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요.

괜히 헛바람 든 거예요. 내가 본인이 괜찮은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할 만한 그러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괜한 착각을 한 거예요. 짬뽕 그릇이 깨져서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우리 인생을, 짬뽕 그릇이 깨져보세요. 그다음 우린 어떻게 하겠어요? 주섬주섬 국수하고 손가락으로 건지려하겠지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자체에 의미가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의미 챙기는데 평생을 거기다가 투자를 해버려요. 그러니까 벌써 본성 자체가 내 의미 찾는데 진력을 다하기 때문에 성경을 주든지 설교를 하던지 간에 우리는 막 나라는 짬뽕 그릇에다 그 성경말씀을 채우기에 바빠요. 거기다가 언약도 담고 십자가도 담고 노아언약, 율법도 담고 하여튼 좋다는 건 다 담아요.

다 담는데 언약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그러한 의미 그릇을 깨는 식으로 언약이 실현됩니다. 이게 굉장히 알 수 없는 건데 그야말로 알 수 없는 건데요. 알 수 없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하면 알 수 없다는 말은 뭐냐?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알 수 없는 게 달라요. 알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의미를 받아들일 마음자세가 돼 있어요. 인간은 본인이 그릇이에요. 인간은 어떤 괜찮은 것, 자기에게 좋다는 걸 받아들일 그릇으로써 모집할 마음자세가 딱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누가 중심이다? 누가 의미의 중심이에요? 자기 본인이 의미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이거는 묻거나 따지지 말고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나는 의미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옆에서 성경이 뭐라 하던 하나님이 뭐라 하던 듣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고 중요한 것은 일단 나는 의미를 어떤 식으로 올바르게 갖출 수 있는가, 구성할 수 있느냐, 거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epoxy resin이란 것 여러분 아셔요? 안에 여러 가지 단풍잎도 넣고 꽃잎도 넣어서 장식품을 만들잖아요. 거기다가 resin이라 하는 것은 수지, 나중에 굳으면 딱딱하고 투명하게 되는 것. 만들 때 단풍하고 붓고 굳으면 그 투명한 공간 안에 자기가 담았던 아름다운 꽃송이나 꽃 같은 게 또는 바다세계를 꾸며놓으면 장식한 바다세계가 그대로 투명하게 다 보입니다. 심지어 그 안에 램프까지 집어넣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사각형이나 원통도 만들고 하게 되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과물이 되지요. 인간은 본인이 의미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뭔가 하나 성과를 얻어야 돼요. 그 최종 성과가 뭐냐? “그것 봐. 나 천국 간다고 했지. 내가 천국 보낸다 했지. 나 천국 가는 거야. 왜? 내 안에 이러이러한 것들을 긁어모았으니까 나는 천국 가는 거야.” 나는 애초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교회 나오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이건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에게 언약궤가 전달되었습니다. 다윗시대에 언약궤는 어디서 만들어졌느냐 하면 모세시대 때 만들어진 거거든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시 받고 그래서 만든 게 언약궤인데 이 언약궤가 시대 지나서 블레셋 땅에 가 있다가 드디어 다윗이 이스라엘 남쪽 북쪽 통합하고 난 뒤에 언약궤가 드디어 다윗성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다윗을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에폭시레진 이걸 장식하는 거예요. 언약궤를 왜 다윗이 그걸 가지고 성전을 만들 그런 아이디어를 왜 가졌느냐 말이죠.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말이죠. 마치 하나님을 가두는 것처럼. 하나님 꼼짝하지 마세요. 우리와 함께 계세요, 라고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당당하게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국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상식적인 것을 이야기할 테니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에 있어서 국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가 가시적 국가가 되려면 여기 뭐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가시적인 인물이 등장해야 돼요. 그 가시적 인물을 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냥 개념적인 국가가 실제로 국가가 국가 되려면 가시적인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그게 왕입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국가를 치려면 무엇부터 쳐야 돼요? 왕부터 쳐야 되지요. 청나라가 우리나라 치려고 어디 옵니까? 남한산성에 오지요. 남한산성에 누가 삽니까? 인조 살지요. 탤런트 삽니까, 연예인 살아요? 왕이 거기 살고 있지요. 그러니 왕을 잡아버리면 백성은, 백성 자체가, 참 이런 게 인간들의 논리가 얼마나 어설픈지요.

인간은 본인 몸이 있잖아요. 왜 본인 몸이 있는데 그걸 국가에 헌납하지요? 옛날 사람들, 전에 그런 질문했잖아요. 이순신 장군이 누구 때문에 죽었느냐고.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충성한 것은 나라에 충성한 게 아니에요. 그 당시 나라라는 게 없어요. 그 당시는 뭐가 있느냐 하면 왕이 있어요. 왕에게 충성하는 게 나라에 충성하는 거예요.

구조가 이런 구조입니다. 왕이 있고 왕 밑에 백성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백성A, 백성B 있다면 서로서로 힘 모으면 되잖아요. 절대로 옛날 사람 그리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힘 모으면 이걸 가지고 반역죄라 해요, 반역죄.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돼요. 뭘 거쳐야 돼요? 반드시 경로를 어딜 밟아야 되느냐 하면 왕한테 재가 받고 이웃과 힘을 합쳐야 돼요.

왜냐하면 나가 너한테 바로 힘을 모으는 게 아닙니다. 힘은 누구한테 반납해야 하느냐 하면 왕에게 집결돼야 돼요. 지금 이런 나라 있잖아요. 여기서 얼만 안 떨어졌어요. 김정은 나라, 종교단체거든요. 통일교로 보면 됩니다. 신천지나. 통일교나 신천지인데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죠. 이미 옛날에 죽었지만. 그 통일교 교인들이 누구만 쳐다봐요? 문선명이만 쳐다보지 않습니까?

이슬람 종교 마호메트 있지요. 그 사람들이 국가와 종교를 초월해서 마호메트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니까.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꾸란이란 계시를 준 선지자기 때문에 그것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은 미쳤지 똑같은 인간인데 그게 왜 필요해, 라고 하지만 그건 현대인들이 본인이 속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힘의 집결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습니다. 나이 칠십만 넘어도 다 알아요. 옛날 가정에서의 엄마의 위치가 얼마나 가장에 비해서 턱도 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옛날 산 사람들 다 압니다. ‘엄마 이것 해줘’ 하면 ‘너거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이렇게 하지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힘은 하나로부터 나오고 힘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태국에 현재 왕이 있잖아요. 그 왕 앞에 나갈 때는 지금도 그래요. 왕 앞에는 바로 앉지도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서 나가야 돼요. 엎어져서 말할 때만 고개 들고. 왕만 인간 같고 그 앞에 엎어져 있는 것들은 짐승 같아요. 동해안에 오징어 쭉 늘어져있는 것처럼 늘어져있어야 돼요. 지면에서 높이 생기면 안 돼요. 왕 앞에는. 왕실에서의 높이는 왕만 독점해야 돼요.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 없어요. 이렇게 엎어져서 높낮이 없이 이렇게 돼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대의 왕을 이야기하면 ‘미쳤다 저거. 왜 저래.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 아닙니다. 왕이란 것은 똑같은 인간 아니고 나의 존재하는 힘이 어떤 힘의 원천이 있는데 그 원천이 하늘이죠. 하늘에서 힘이 오려면 반드시 왕을 통해서 나에게 힘을 줬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힘은 내가 임으로 사용하면 안 되고 왕의 재가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잡혔다 하면 온 백성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죠. 우리 임금이 잡혔단다. 자기 아버지, 엄마 죽을 땐 안 울어도 왕 잡혔다 하니 다 울고 한다고요. 왕이 나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에 보이는 국가가 뭐냐? 왕이에요. 왕의 존재에요. 그걸 생각 못하면 역대상 17장, 오늘 22장 설명 안 됩니다.

이걸 제가 아까 뭐라 했어요? 이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소속돼 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왕을 주신 그 왕의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의 나라, 내가 속해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잘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역대상 17장 1절에 보니까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언약궤가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다윗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더 확실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한테 약속한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표, 언약궤까지 여기서 플러스 더해서 허락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뭐냐? 내가 지은 왕궁도 있지만 또 무슨 왕궁을 짓겠다고?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이 이름을 모실 하나님의 성전을 본인이 지어주겠다고 구상을 한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다고요? 이게 더하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교인들 힘써서 예배 해놓고 성전 준공식 할 때 헌당, 하나님께 드린다는 취지로 하면서 ‘하나님 이 성전을 예배당을 하나님께 드리오니 이 성전 안의 의자들을 꽉꽉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실은 돈 있는 사람으로 채우게 하옵소서, 이 본색이 되지만 차마 그 말은 못하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부흥 되어서 이 도시 전체가 성시화 되게 거룩한 도시, 울산이 성시화 되게 하옵소서.’ 울산이 성시화 되는 게 아니고 미세먼지로, 공장으로 덮여…….

그게 뭐냐 하면 이 예배당에다 플러스 더하기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도리를 다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이게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한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본성으로 남아있습니다. 본성으로 남아있는 그걸 네 자로 하면 이렇습니다. 교회하기. (※내 의견 : 여섯글자-진인사대천명)교회해서 뭐하는데? 교회하기에서 교회는 가시적이죠.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전에서 알 수 없는 것 그쪽으로 다윗을 통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다윗의 한계를 보여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짬뽕 그릇 깨듯이 이걸 깨는 거예요. 언약궤가 뭘 깨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공격하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누굴 공격한다? 다윗을 공격하는 거예요.

짬뽕을 담는 것은 짬뽕 그릇인데 짬뽕 그릇에 날 파리가 들어온다, 모기가 들어온다? 젓가락으로 빼내든지 안 봤을 때 그냥 후룩 목으로 집어넣든지 이러면 되는데 짬뽕을 담는 그릇 자체를 외부에 있는 그릇 자체를 깬다면 뭘 담을 수 없습니까? 이스라엘 자체를 담을 수 없고 인간이 생각한 교회 자체를 담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릇이 깨진다는 것은 다윗 생각에서 하나님의 언약,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담았다 했는데 언약이 언약 자체적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 담겼다고 생각하는 인간 생각 자체를 여기서 망치로 깨뜨리면서 나와 버리는 거예요. 다 쏟아져버리죠. 구원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죠.

예레미야 21장 13절 보겠습니다.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 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Behold, I am against you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오신다는. 이스라엘의 적이 누구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적이에요. 짬뽕 그릇 깨버리는. 나의 적은 누구라고요? 내가 믿는다고 여기는 그분이 나의 적이 돼요.

언약은 그렇게 해서 완성됩니다. 이유가 뭐냐? 우리는 출생부터해서 내 의미 주어 담는데 본능적으로 내 의미를 주어 담아서 한평생 살고 나게 되면 에폭시 레진처럼 하나의 "나" 라는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해요, 인간들은. 그걸 자기 소설 쓴다고 해도 되는데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하나의 투명한 작품, 그것을 인간은 원합니다.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군대생활 옛날 고참들은 뭘 했느냐 하면 배 조립해요. 그 3년이라는 그땐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3년이에요. 3년 지루해 하면서 뭘 하나 남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다 헤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난 인생 뭐 사는지 모르겠다는 식이잖아요. 그걸 주께선 원한다니까요.

‘왜 네가 굳이 의미 있어야 돼’ 이걸 주께서 물으신다고요. ‘너는 언약의 주인공이 아니야. 언약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약이니까 네가 그걸 긁어모아? 주제넘게.’ 교회 다녀서 복음 알아서 성경공부 참석해서 괜찮은 것 해서 나라는 그릇에 담게 되면 이게 내가 깨어질까요, 안 그러면 더 단단해진다고 여길까요? 단단해진다고 여기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던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에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나를 닮을 그릇이 못 된다. 내가 너희 인간이 지은 집에는 거기 거주할 수가 없다. 언약궤가 조그마해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걸 큰 집 지어서 제일 깊숙한 곳에다 언약궤를 안치하게 되면 하나님을 자동적으로 만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약궤는 요만하지요. 집은 커다랗게 지어놓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개집 짓듯이 개집보다 더 크겠다. 작은 물건 하나가 하나님 만남의 장소라면 큰 집 지어놓으면 주께서 작은 만남의 장소에 오기 위해서 정문으로 들어와서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와 만나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한 겁니다.

우리가 하는 상식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하늘에 하나님 있고, 땅엔 누가 있지요? 인간이 있지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데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대자연이 있어요. 큰 자연 natural. 하나님은 대자연을 만드시고 그 안에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인간은 나가서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게 되면 말씀에 준비돼 있는 저주와 복이 있는데 복이 우리한테 주어진다.

이게 인간들이 아는 상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인간이 알 수 없는 게 아니고, 알 수 없는 건 빼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이런 생각을 문제 있다고 왜 안 하느냐 하면 여기에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가 하나님께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이 만든 나도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 것은 인간보고 들으라고,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신명기에 나오는 듣고 순종하라고 주신 말씀이니까 순종하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뭘 알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약속입니다. 약속이 올 때 이 인간들을 교체, 새로운 인간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말씀이 왔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지 받아들이는 그릇인 나를 다른 그릇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는 거예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인간들이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살아 있다, 살아 있다’의 끝부분에 끝에 가서 ‘인간은 죽는다’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숨 안 쉰다, 죽었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언약을 통해서 내용을 담고 인간을 찾아올 때는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 있는 적이 없었어요. 살아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 있는 모양새를 한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죽음 자체가 살아 있는 모습.

그래서 인간은 결국은 죽게 되는 이유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죽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죽기로 돼 있는 요소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 죽음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지 마세요.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착해도 아무리 선하고 어질게 살아도 죽어요. 악하게 살아도 죽어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이래도 죽게 돼 있고 저래도 죽게 돼 있고 죽음은 내 행동과 상관없음. 죽음을 무엇과 상관있는가?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있어요.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죽는 이유를 아시는 분은 언약을 따라서 언약과 동반해서 같이 내려오는 우리 주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죽음이에요. 그 죽음의 내용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육신이 누구 육신이냐 하면 인간의 육신이었어요. 죄 있는 인간의 육신이죠.

인간의 육신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어떤 말을 해야 될 육신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다시 말해서 버림받아야 될 육신임을 하나님께선 아버지 앞에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분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 하나님 가짜고요. 하나님 가짜인 이유가 인간 자체가 본인이 가짜인 걸 모르는 체 가짜로 가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이 인간, 사람을 뭐로 교체하느냐 하면 언약적 의미를 부여해서 교체해버려요. 인간이 아니고 뭐냐 하면 인자에요. 예수님은 인자로 와요. 인자가 인간인가, 인간이 인간인가? 어느 쪽이 인간입니까? 인자가 진짜 인간이에요. 왜? 아버지와 아는 사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님과 모르는 사이에요. 하나님도 모르면서 기도할 때 붙잡고 ‘하나님’ 하고 찾았던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여기에 역대상 28장 3절에 보면, 다윗이 결국은 본인이 알아요. 아는데 역대상 28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상관있지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주십니다.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번제단, 맨 언약궤입니다. 번제단, 성전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석수들 시켜서 돌을 다듬게 했지요. 지금 다윗이 만드는 게 뭐예요? 자기 딴에 성전을 만든다는 거예요. 성전을 만들 때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드느냐 하면 비 안 맞도록 그것도 화려한 건축물 안에 언약궤를 담으면 이게 뭐가 된다? 성전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성전 짓는데 많은 재료를 준비하고 짓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 왔기 때문에 선지자에 의해서 분명히 언급했어요. 너는 못 짓는다. 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자,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봅시다. 피를 흘리면 왜 성전 못 짓지요? 그거는 이렇게 됩니다. 인간 왕 제거, 하나님 왕 성전 건축. 순서가 이렇게 돼요. 인간 왕,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모든 민족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눈에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을 다 모아서 농사짓는 농부, 농산물, 생산물, 고기 잡는 그런 것, 어떤 상품, 무역하는 사람들 다 힘을 모으고 세금 모아서 뭘 하나 옹립하는 거예요? 왕을 옹립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왕 있다. 무슨 뜻이에요? 내 나라 있다, 이런 뜻이에요. 본인들의 힘을 자발적으로 왕을 옹립하는데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투자하는 거예요. 자신의 힘을.

자신의 힘을 내 것이니까 내가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 그거는 왕이 노하지요. 야, 이리 와봐. 네 땅 누구 거야? 내 건데요. 이 땅 누가 지켰는데, 전쟁에서 승리해서 누가 지켜줬어? 임금님이 했지요. 그러니까 내 거잖아요. 너 딸 있지. 궁녀로 보내. 내 딸인데요. 내 딸 행복을 위해서….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거는 솔로에 가서 찾아라. 이건 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야. 내가 선택하면 이건 무조건 궁녀로 가야 돼요.

여러분 그런 시대가 참 답답하지요. 일본이 노일전쟁, 청일전쟁, 우리나라 점령할 누구 지시 따라 했습니까? 일본 천황 만세잖아요. 일본 천황이 결정했잖아요. 태양신이. 태양신이 어디 있어요? 거기 있잖아, 키 조그마한 사람 있잖아요. 사람은 내가 가진 힘 말고 나라의 온 전체의 힘을 한 곳에 집결돼 있는 일종의 무게중심이죠. 물리학에서 무게중심.

무게중심 되는 그 중심성이 있어야 내가 편하고 대대손손 내가 자식하고 이 땅에서 잘 누리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하면 숫자가 얼마 안 돼요. 우리끼리 아니고 다 모아야 돼요. 다 모으면 뭐가 돼요? 왕이 되는 거예요. 권력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나라 없는 서러움 아시겠어요?

그 우크라이나 청년들 전쟁 일어나니까 총 들고 나갑니까? 그 나라가 자기 나라거든요. 다른 말로 그 나라가 곧 나기 때문에. 내가 나의 나다움을 내가 홀로 있으면 몰라요. 내가 소속이 있든 어떤 나라가 있으면 진짜 나의 나다움의 어떤 희망이라든지 성과라든지 어떤 결정체, 사는 보람을 느껴요, 인간은. 손흥민과 나하고 아는 사이에요? 류현진과 여러분 아는 사이입니까? 그런데 손흥민 한 골 넣으면 뉴스에 왜 나오는데요? 내 조기축구 한 골 넣은 것 뉴스에 왜 안 나오는데? 손흥민은 축구의 왕이거든요. 나는 왕이 아니잖아요.

어떤 비록 나는 못나도 우리 형님이 의사고, 우리 누나가 판사라면 판사도 의사도 아닌 게 지가 왜 힘주고 돌아다녀요? 중매쟁이가 와서 하는 말이 돈 얼마나 모았습니까? 집은 있습니까? 이래 물을 때에 꼭 없는 것들이 그래요. 우리 형님이 강남에 성형외과 의사고요, 우리 아버지 대학교수, 이런다고요. 그것 말고 너, 너 지금 뭐하고 있노? 백수인데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곧 나의 환경이에요. 우린 그 환경 속에 포함시켜서 나를 살아요. 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의 장을 field를 이루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그 범주 안이 곧 나의 세계기 때문에 그래요. 그 나의 세계가 왜 있어야 되는가? 그래야 내가 존재의 의미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 없고 식구 없고 교회 없으면 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내 존재의 의미를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뭔가 무게중심이 되는 그 무게중심에 곁들여야 돼요. 포함이 돼야 된다고요. 그래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정신적으로도 평온을 찾을 수가 있어요.

집 없이 떠돌아다녀 보세요. 잠도 못 자요. 깜짝깜짝 놀래요. 여기가 어디지? 오늘은 영주모텔, 그다음엔 경주모텔, 오일장 다니면서 떠돌이 장사꾼 해보세요. 맨날 담배 냄새나는 여관방에서 잘 때 그 인생 자체가 얼마나 서글픕니까. 그러다가 가끔 여자와 소개팅해서 뭐하십니까? 떠돌아다닙니다. 그럼 뭐 땡이죠. 집은? 집은 없습니다. 이 트럭이 내 집입니다. 이래서 되겠어요. 안정감이 없는데 누가 합세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옛날에 공직자들이 최고였던 거예요. 왜? 공직자는 왕이 갖고 있는 힘의 일부를 안배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회에서도 목사하고 최측근 교회에서 힘깨나 쓰는 말이나 하는 거예요. 특히 사모, 사모 최측근 아닙니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사모님 통해서 이야기하라고. 어디 집사가 장로 통해서 이야기해야지. 어디 집사가 함부로 목사한테 말을 걸어. 우리 장로를 통해서 해야지. 당회를 통해서 하라. 이게 바로 인간의 의미의 그릇, 그 속에서 자기 의미를 챙기려는 인간의 더러운 본성입니다. 10분 쉽시다.

 

 

20230901b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하기 전에 대전의 번개특강 동영상 안 찍었기 때문에 궁금했던 것, 동그라미 두 개가 어떻게 배치되었는가? 그것 잠깐 설명할게요.

이렇게 했어요. 팬케이크 두 개, 구멍이 뚫려서 구멍 뚫린 여기서 이 세상이고, 이게 인간에겐 없는 세상이에요. 인간에게 천국은 이 세상에서 추가할 수 있는 미지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지옥도 마찬가지고. 미지의 나라가 지옥인데 이건 인간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 더하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 빼놓고 또 추가해서 있는 세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라는 게 이렇게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오셔서 이 종교를 비켜갑니다. 인간이 배척해줘야 돼요. 인간이 저리 가, 하고 싫어하고 빠져나와요. 빠져나와서 세계가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지옥이 돼버리고. 팬케이크처럼 두 개의 동그라미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음성으로 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그림이 오늘 울산강의에서 분명히 제가 보여드렸습니다. 딴 생각하기 없기.


두 번째 시간 해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피를 흘렸는데 왜 성전을 못 짓는가? 피 흘리면 군인이에요. 군인이 피를 흘리고 승리를 일으키게 되면 모든 백성들이 그 피 흘린 군인, 피 흘리면서 장렬하게 싸우고 있는 그 장군이 영웅이 돼요. 그러면 의미의 원인이 된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이 사람이 세운 성전 같으면 뭐겠어요? 이 성전은 위대한 장군의 본인의 실적이 되고 업적이 돼버려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고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스라엘 왕을 제거해버려요. 인간의 왕을 제거를 해버린다고요. 제거를 할 때 여러분 아시다시피 뭐가 주어집니까? 여기서 죄가 주어져야 되지요. 시편 51편.

이스라엘 왕에게 죄가 주어지고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무슨 노선으로 나가느냐 하면 죄인의 노선으로 가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 죄가 주어졌기 때문에 제거가 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다윗이 자손이 등장한다고 돼 있어요.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육의 자손 말고, 이건 죄인으로 되고,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그다음 언약이 스스로 원인이 되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결과로서의 자손, 다윗의 자손.

인간의 육신에서 태어난 자식 말고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자손, 다윗의 자손 이게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에요. 솔로몬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다윗에서 나온 게 아니고 다윗의 죄에서 나와요. 다윗에 약속한 언약,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인데 솔로몬은 다윗이 죄를 짓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왕이 솔로몬이에요. 이게 생각할 수 없어요.

왜 생각할 수 없느냐? 인간은 자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데 죄 지어버리면 뭐냐 하면 나는 의미 없이 죽어 마땅함이 되거든요. ‘나는 살아도 살 의미도 없어. 나는 죽은 게 나아’ 라고 할 때 비로소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죄 많이 지으세요. 죄 많이 지으셔야 돼요, 여러분. 그것도 내가 아는 죄 말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죄가 나와야 돼요. 내가 아는 윤리도덕 죄 말고 다른 죄가 나와야 돼요.

그걸 제가 인간은 의미 있다 하는 자체도 그 중에 하나가 돼요. 인간은 자길 부정 못하니까요. 자기가 부인 못하고 자기가 부정 못하고 십자가를 자꾸 받아들일 생각하지 십자가 앞에 깨질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자체가 인간은 본인이 아직도 본인에게 미련 갖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솔로몬은 성전 짓는데 아무런 보탬 되지 못했어요. 자재, 어떤 돌, 나무 그건 우리 아버지가 만들었다 하면 안 돼요. 죄 많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거예요. 그러면 그 자재를 모일 때마다 죄 많은 아버지의 업적, 아버지가 한 저지른 짓을 모으는 거예요. 죄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이게 만남의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천국 갈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천국 가게 되는가?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한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를 생각하란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냐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내 보기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 빠지지 말고 내가 지금 어디 안에 살고 있느냐? 천국 안에 살아야지요. 내 안에 살지 마시고 천국 안에 살아야 돼요. 이걸 사도 바울 편지에선 뭐냐? 내가 예수 안에 살고 있단 이야기해요. 이 말은 나는 내 안에 살고 있지 않고 예수 살고 있는 거예요.

진즉에 어제부로 죽어야 되고 몇 달 전에 이미 죽어야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나를 계속해서 무의미한 나를 살려내는 그 자체가 주님에게 의미 있는 일이고 언약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은 의미 없어요. 그건 죄의 번식이에요. 그런데 나는 안 살고 싶은데 주께서 계속 살게 하셔요. 이게 의미 있는 거예요. 이게 자율적이 아니고 피동적이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삶.

가룟 유다는 쓸 때 쓰다가 나중에 버려진 존재가 가룟 유다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미 버려졌는데 주께서 쓸모 있다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루하루 삶이 우리는 우리 의미를 위해서 살 순 없어요. 성도는.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그 나라 의를 위해선란 뭔 뜻이냐 하면 주님이 하신 일에 그 필드, 그 영역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엄청난 큰 차이가 나는 거예요.

솔로몬이 자기가 태어난 것부터 그리고 왕이 된 것부터 모든 것이 아버지 다윗이 생각했던 다윗의 생각을 주님께선 언약으로 이걸 깨뜨리면서 다윗의 생각이 하나의 석고상이라면 석고상을 깨는 거예요. 깨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생각지도 못한 왕이 등장해요. 솔로몬이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을 깰 때 언약적으로 깬다는 말은 다윗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우리야 장군을 만나야 돼요. 우리야 장군이 누구냐 하면 다윗의 아내의 전 남편, 확 오지요. 다윗의 아내 밧세바의 전 남편. 전 남편과 맞닥뜨리면서 다윗은 자신의 의미 있는 체계, 내가 이스라엘 왕이라는 체제 자체가 이게 죄로 그냥 허물어져야 되는 거예요. 허물어지게 되면 다윗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냐 하면 다윗의 손에 의해서 죽어버린 우리야 장군의 나라가 돼버려요.

여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 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죽어 마땅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갈 자격도 안 되고. 인간이 천국 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죽여야 돼요. 그러면 죽이는 방법은 흉기 들고 술 먹고 사거리에서 너 죽고 나는 살란다, 이렇게 설친다고 죽이는 게 아니고 나의 의미를 그걸 고집하고 고수하는 겁니다.

인간은 나는 의미 있다, 의미 있다 그렇게 헛소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없어요. 미친 사람 아니고서는. 미쳤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정신병자인데 정신병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나폴레옹이다’ 하는 거예요. 나는 나폴레옹이라고 정신병자가 사거리에 나가서 ‘나는 대통령이다’ 이런 소리를 왜 하느냐 하면 아무도 본인에게 말을 안 걸어줘서 그래요. 말은 안 걸어주니까 속에 있는 본인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정신병자가 아니고 일반인들은 뭐냐? 일반 사람들은 만나줘요. 만나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커피 값 내가 낼게’ 이게 나폴레옹이에요. 머리 나쁜 사람 모른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스톱, 소톱. 커피 값 내가 낸다.’ 이게 뭐예요? 남이 오니까 비로소 나는 평소에 의미와 가치를 지키는데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 들통 난 거예요.

그런데 정신병자는 정신병자 폼 보고 아무도 말도 안 걸어. 미친 인간이라고 안 거니까 본인이 터질 거예요. 그런 노래 있어요. 본인이 참질 못해서 칼 들고 설치면서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한테 덤비면 죽여 버린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왜? 아무도 말 안 걸어주니까. 말 안 걸어줘서 나폴레옹이라 하는 그 인간이나 누구 만나면 허세 떠는 인간이나 둘 다 정신병자에요. 에브리바디 다 정신병자에요.

사람 만날 때는 다들 점잖은 티를 낸다고요. 배려해주고 선한 사마리아인 어디 들은풍월은 있어서 아프냐? 돈 더 들면 나한테 이야기해. 병원비 대납해줄게. 걱정하지 마. 난 자비를 베푸는 자야.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것 정신병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이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근처도 안 갑니다.

우리가 지식으로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그 십자가가 내 의미를 구축하는데 이게 보탬이 돼요. 원인이 되고. 내가 의미를 상실하는 게 아니고 갈수록 의미가 더 커져요. 내가 이 정도까지 복음을 아는데, 이렇게 나온다고요. ‘네가 감히 태클을 걸어?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왜 자꾸 교인들을 만나게 해주는가? 사람은 내가 점잖은데 누가 등장하게 되면 체면 차리는데 갑자기 에너지가 집중돼요. 우사 당하지 않고, 우리 집안 욕 얻어 먹이지 않고, 우리 가족 나로 인하여 비난받지 않도록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 통제에 들어가요. 위선이죠, 위선.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망해요.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 있고 인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 주시고 지킨다. 이게 인간들이 보통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관계잖아요. 인간은 다치지 않고 그냥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방민족의 신이었어요. 이걸 성경에서 뭐라 합니까? 이걸 우상이라고 해요, 우상. 이방민족의 신은 뭐냐? 인간과 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은 무슨 신을 믿어서 망했다 해요?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망했다 하잖아요. 그걸 좀 더 자세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됨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온 하나님과 만나는 게 성전이에요. 그게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누가 있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과 만나는 거예요.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둘만 아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장소제공자고. 우리는 죄인으로서 장소를 제공할 뿐이고.

우리의 의미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우리 의미를 대신하는 거예요. 십자가 믿고 바르게 사는, 이거는 하나님이 안 쳐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의미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심이 우리한테 들어왔지요. 들어오면 언약의 망치로 우리의 껍데기, 십자가 질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 하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의미 그릇, 의미 주장 이걸 고맙게도 하나님이 언약궤에서 매일 삶을 통해서 톡톡 깨줍니다.

깨주는 중에 하나가 머리가 희어지는 거고, 관절이 오십견 드는 거고요. 이제는 내가 나를 허겁지겁 의지하고 싶어도 별 의지할 게 점점 이게 맥이 빠져요. 전에는 필라테스 하면 오래 갔는데 이제는 오래 가지도 않고 돌아서면 또 해야 되고. 전에는 링거 두 방 맞으면 감기 후딱 나았는데 나이 칠십 넘어서 링거 맞아도 얼마 가지도 않아요. 점점 더 뭔가 허물어진다는 것, 무너진다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겉모습 말고 속 보자는 거예요. 네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언약으로 깨는 거예요. 언약으로 깨주는 겁니다. ‘네 안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 들어있었구나’ 하고 깨주는 겁니다. 못난 미완성 말고, 미완성 깨뜨리고 안에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턱하니 들어있는 겁니다.

이런 이미지가 도움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여름에 찬 물 먹으려고 그릇에 얼리잖아요. 처음에는 전체가 다 얼음이죠. 이야기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플라스틱 표면과 가까운 그곳은 녹아버리고 안의 얼음이 홀쭉하게 이렇게 돼 있지요. 끝부분이 이렇게 남지요. 바로 이 겉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신체라면 그리고 우리의 정신이라면 안의 안쪽에 십자가 들어있는, 그리고 죽을 때는 이것이 다 허물어지지요.

십자가는 원래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그래 보이는 거예요. 죽을 때 꼭 ‘십자가만 있다’ 한 소리하고 죽고 싶은데 그 소리 ‘시입’ 하다 숨이 막혀 죽어버리면 지옥 가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요. 평소에 이 차이를 발견하는 거예요. 이 차이를 말하는 거예요. 나는 의미 없고 주님이 의미 있다. 나는 죄인이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고 주님은 그 죄를 사했다. 이게 언약의 효과잖아요. 이게 성령님이 오신 효과 아닙니까.

그런데 살다보면 자꾸 예수님 이걸 모르고 플라스틱 투명해야 될 이것이 투명한 것이 아니고 이 자체에 어떤 질량을 갖고 실체를 만들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깁스지요. 우리 표준말로 기브스. 예수님 십자가, 자기 잘남으로 다 가려버리는 거예요. 내가 헌금을 얼마하고 전도를 얼마하고 강의로 얼마나 돌아다니고, 자기 자신이 십자가를 가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가정이 얼마나 화목하고, 이런 걸로 다 가려놔 버려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은 서론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22장. 맨 22장이나 17장이나 똑같은 걸 22장 1절에서 5절까지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성전에 다윗이 성전 세우겠다는 의미가 뭐냐? 이거 지우고 크게 쓸게요. ‘우주의 중심을 건설’합니다. 누가? 다윗이.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우주의 중심을 건설하는 쪽으로 하나님과 계약이 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면 이 다윗이 죽은 다윗이냐, 아니면 다윗의 자손이냐? 이것을 성경에서는 그걸 구분하고 있어요. 에스겔 37장 24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이렇게 돼 있지요. 여기에 누가 나옵니까? 다윗이 나오지요. 다윗이 왕이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결국은 성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저지하느냐 하면 우주의 중심을 건설하는데 인간은 왜 이런 성경말씀을 이해 못하느냐 하면 시간이 하나의 직선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화살처럼. 과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고깔 콘 뾰족해요. 하나님은 현재와 계속 현재만 이동시킵니다. 현재가 오게 되면 현재에서 지나간 것은 과거가 되고, 현재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뭐가 되고? 미래가 되고. 이게 현재 꼭짓점, 꼭짓점, 꼭짓점 그냥 연속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뭐가 이해 안 되느냐 하면 현재라 하는 것은 한 지점이 되는데 하나님은 현재로만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 될 때 현재로만 이어진 선과 과거-현재-미래로 된 선과 이 둘 사이에 합치가 안 돼요. 이게 의미 연결이 안 됩니다.

다윗은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 에스겔 37장에서 이미 다윗은 죽었거든요. 이순신 장군 이미 죽었잖아요. 그런데 예언하기를 ‘이순신 장군이 너의 장군이 될 것이요’ 이러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미 죽은 사람이 왜 등장하느냐? 이게 구약 말라기에도 나와요. “내가 엘리야를 보내리니”(말4:5) 엘리야 이미 왔는데? 이미 와서 죽었잖아요. 엘리야 다음에 누굽니까? 엘리사잖아요. 엘리야 와버리면 이건 뭐 시간여행인가요? 엘리사 출생은 무효가 돼버리는 겁니까?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엘리야는 이미 왔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시간을 통해서 인간은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인간은 의미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간의 의미를. 인간의 모든 단어 속에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 이래 되는 거예요. 늘 현재에 꽂히는 시간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이 시간개념을 하나님이 쓰시는 시간개념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서 블랙홀이 필요한 거예요. 구멍을 파버려요. 거대한 구멍을. 거대한 구멍을 파버리고 그 구멍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알던 사람이 그 구멍 깊숙이 그냥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적으로 봤을 때 뭡니까? 과거에 살다가 현재에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발목을 잡고 블랙홀 속으로 빠뜨리죠. 빠뜨릴 때 옆의 동료들이 뭐라 합니까? 이걸 인생 실패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니엘 3장 2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그다음에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블랙홀이잖아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을 누가 질렀습니까? 같은 그 당시 현재 그 시대를 살았던 그 느부갓네살 왕과 지시 받은 공무원들이 불을 질렀잖아요.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다니엘 세 친구는 그 불속에 들어가기 전에 옆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모양새가 똑같지요. 같은 인간이지요. 너는 의미 없고 우리만 의미 있어, 라는 말을 같이 살던 왕 쪽에 붙은 공무원들은 그런 소리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뭘 합니까?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죽여 버린다 했지요. 그 배후에 누가 그걸 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시켰겠지요. 하나님이 왜 시킵니까? 언약은 의미 그릇을 깨면서 언약 자체가 성취 쪽으로 나아가거든요. 인간이 든든하게 믿을만한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믿을만한 힘의 관계들 있잖아요. 그걸 하나님께서 허용을 한다고요. 허용을 하게 되면 인간들은 안 죽기 위해서 왕이 시키는 대로 하겠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 자체적으로 뭘 결정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경유해서 부여받아요? 의미를 부여받습니까? 왕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부여받는 거예요. 김정은 지도자 동지의 은혜를 입고서 지금 북한 주민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곧 굶어죽어도 김정은 동지의 뜻이고, 김정은 지도자 동지가 하는 것은 다 옳아요.

왜 그러냐 하면 그나마도 나라가 북조선인민공화국이 김정은 때문에 이 정도로도 밥 먹고 사는 태양 같은 이런 은혜가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지금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 왕조를 살고 있어요. 북한은 왕조라니까요. 종교단체고 왕조에요. 정명석 그 단체가 아가씨들이 몸을 바치고 하잖아요. 왜 그래야 되는데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시아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눈에 보이는 메시아.

바로 그런 기능은 다윗이 했잖아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말고 다른 왕을 찾겠어요, 안 찾겠어요? 안 찾지요. 하나님이 지정한 왕은 우리에게 다윗 왕뿐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그 말이 드디어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이 실현하는 것을 우리가 생산한 대로 생각한 대로 되어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거,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이걸 파악할 수 없는 거예요. 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니엘 세 친구 밑에다 블랙홀을 준비한 겁니다. 언약을 준비한 거예요. 언약을 준비해놓으니까 세 친구는 언약을 알아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절하지 않습니다(단3:18). 당신들은 인간의 왕의 말을 듣지만 그게 의미지만 나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언약의 최종점을 향하여 지금 진행되고 있는 그 진행에 본인이 거기에 합세되고 참여된 거예요.

언약을 알아서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언약의 흐름 속에 같이 다니엘 세 친구는 언약의 증표, 시그널로서 거기에 묻어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언약의 구체적인 모습본인의 모든 모습이 언약의 구체적인 모습이에요. 그 모습이 뭐냐? 실패에요. 인생 실패입니다. 대 실패에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와 똑같은 거예요. 그걸 그들은 맛본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상 만들고 섬기지 않으면 불에 타죽는다는 그런 법들을 주변에서 허용했습니다. 그런 법에 의해서 다니엘 세 친구, 유능한 세 친구는 졸지에 그 시대에서 의미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완전히 몰락해버립니다. 뒤에 불속에 예수님이 같이 있어서 춤췄다는 이야기를 그걸 위로삼아 덧붙이지 마시고요 요 선에서 보세요. 요 선에서 보면 인생 망한 겁니다.

그야말로 후회해도 소용없고 탄식해도 소용없고, 그거 뭐 고개 한 번 끄덕하면 살 걸 왜 무모하게 그런 짓을 했느냐? 다니엘 세 친구에게 ‘절하면 되지 절한다고 여호와 안 믿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 유도리가 있어야지. 융통성이 있어야지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하느냐?’ 그러면 다니엘 세 친구는 뭐라 하겠습니까? 내가 어제부로 진즉 죽어야 될 인간을 오늘까지 끌고 가고 있는 것은 이런 죽음 죽기 위해서 주께서 오늘까지 살려줬다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오늘 살려준 것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려준 거죠. 그래서 죽고 말았어요.

이게 뭐다? 우주의 중심이에요. 이 안에 들어가니까 그거는 현재가 된 겁니다, 현재. 다니엘 세 친구가 사실은 여기서 인생을 마감했으면 좋을 뻔했어요. 그런데 이게 불에 안 타고 살아나서 치매에다 중풍까지 지상에서 또 오해 받으며 살게 되잖아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걸. 그거는 하나님의 뜻은 죽었다가 다시 살려냄으로서 다니엘 세 친구 속에 뭐가 있느냐? 다니엘 세 친구 속에 진짜 하나님이 언약의 주인공이 거기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가 뭐냐?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인간의 시간성을 넘어서서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 현재성, 그 현재성을 푹푹 꺼지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시나리오를 내가 쓴다면 다니엘 세 친구가 드디어 죽었는데 거기서 불에 타지 않고 왕이 놀래서 다시 살려 놨다. 그래서 다니엘 세 친구가 하는 말이, ‘거봐. 우리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함께 있어’ 이러고 그다음 날을 산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히 현재라는 블랙홀에서 하나의 우주의 중심에 있다가 각자 살아나니까 서로 뭘 시작하겠습니까? 여기서 갑자기 인간 시간이 적용돼버리면 다니엘 세 친구에서는 없어야 될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이거는 용서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다니엘 세 친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제부로 인생 제대인데 이거 참 무슨 일이고? 나 끝났어, 끝났어. 마땅해. 그때 불에 어깬 좀 뜨거웠어. 하지만 그 불에 죽어야 마땅하지.’

그런 마음으로 사시면 자기 의미가 나오는 게 아니고 언약의 의미가 그런 고백을 통해서 나오겠지요. 그것 때문에 다니엘 세 친구를 계속 살려주는 겁니다. 언약이 살아 있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 있다?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방식,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십자가가 살아 있는 방식으로 성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주의 중심이라 했으니까 이 주제를 계속 이어나가보겠습니다.

우주의 중심이 뭐냐? 우주의 중심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여기 앞에 쏟아지지요. 영화 같은데 보면 주인공이 있는데 악당/킬러가 들어와서 주인공을 총으로 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킬러가 총 쏘는 걸 먼저 알고 대비해서 총으로 이 사람을 쏴버렸어요. 이 사람이 창가에 커튼이 있는 곳에 총을 쏘았다고 합시다. 주인공이 총을 쐈고 쓰러지면서 ‘분하다. 또 실패했구나’ 하고 쓰러지면서 무엇을 잡느냐 하면 여기에 있는 커튼을 잡고 쓰러지면서 잡아당기겠지요. 두둑하고 커튼 찢어지겠지요.

이 커튼이 대자연이라면, 이게 신약성경이나 요한계시록 특징이 나오는 거예요. 모든 대자연은 무너지게 돼 있어요. 마치 커튼이 찢어져 내려앉는 것처럼 그동안 과학의 대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별과 해와 달, 천문학의 대상, 물리학의 대상, 생물학의 대상 거기서 인간들은 의미를 뽑아내는 식으로 문명을 건설해왔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이것이 모조리 전부 다 어디 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비 올 때 맨홀 뚜껑 열어놓으면 빗물이 어디로 쏟아집니까? 뚜껑 속으로 다 쏟아지겠지요. 이게 바로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이번 수련회 에베소서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의미는 예수님만 의미를 지니고 있고 다른 것은 일체 의미 없음으로 주께서 규정을 해버리는 그 중심,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죽음으로서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생각한 의미와 언약의 의미가 매일 삶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 때 성전이고, 무엇이 없을 때 성전이 아니냐 하면 언약궤가 있으면 성전이고, 언약궤가 없으면 성전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전이 불타버렸잖아요. 이스라엘 망할 때에. 그 불탈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됐을까요? 같이 불타지요.

언약궤가 불탔다는 말은 언약궤가 갖고 있는 잠재돼 있는 그 의미가 이젠 바깥으로 불똥이 튀었다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성전이 무너짐으로서 이 세상은 이제는 불 심판을 받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까 그 언약을 건드리면 저주가 당연한 귀결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돼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심판한 장소가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이 세상의 중앙이 되는 장소지요.

지난 수요일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에스겔 48장 8절 보겠습니다. 쭉 나옵니다만 “유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해놓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다.” 결국 그동안 인간들은 그 중앙을 찾지 못하고 본인이 있는 곳이 늘 중앙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온 거예요. 많은 가정이 있지만 우리 가정이 중앙이고, 많은 나라가 있지만 우리나라가 중앙이고, 많은 교회 있지만 우리 교회가 중앙이고.

항상 중심을 자기 의미와 결부시켜서 자기가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 의미 생긴 그곳이 중앙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런 경우에서 인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내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인생 실패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는 언약의 의미와 충돌돼야 돼요. 우리는 내가 의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뭐냐 하면 교회 다니고, 복음 연구하고, 성경공부해요. 백날 하면 뭐합니까? 나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그러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데요.

그래서 주님께서 언약의 의미는 바로 이런 걸로 굳어져 있는 이것을 언약의 의미가 이렇게 공격을 하는 거예요. 공격을 할 때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느냐 하면 시간성을 가지고 공격을 해요. 시간성이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중에 노년 되어 죽는다, 이게 있잖아요. 여기서 이것으로 의미를 찾아내는데 이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분명히 언약으로 보게 되면 생각을 하더라도 과거는 지금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미래는 안 왔으니까 없지요. 있는 건 뭡니까? 현재지요. 누가 현재를 현재에 있도록 한 겁니까? 우리는 과거에 열심히 노력한 그 대가로 현재에 있다고 우린 자꾸 그런 식으로 우기면서 내 의미를 유지를 시키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걸 에스겔에선 작대기라 해요. 막대기. 주님께선 그 막대기를 분질러버려요. 매일같이. 끊어버려요. 막대기를.

옛날에 엿장수가 구멍 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끊고 불지요. 구멍 크다. 의미 없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냥 죽어가는 껍질뿐이에요. 그 의미를 채워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라고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겁니다.

이제 끝으로 해야 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블랙홀 중심 속에서 중심과 더불어 사는데 그 효과가 오늘날 우리 일상의 삶에 어떻게 전달되는가? 이 문제. 실제로 방금 이야기한 것이 이게 말장난도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팩트라면 그 팩트가 우리의 삶에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력을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그게 바로 히브리서 5장 끝부분에서 6장 초반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6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이렇게 돼 있지요. 여기서 ‘초보’ 나오고, 초보는 뭘 못 먹는다? 단단한 음식물을 못 먹는다. 그냥 젖이나 먹는 자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젖이나 먹고 있을 수는 없고 뭐로 나가야 된다? 단단한 음식물을 먹는 그걸 가지고 ‘장성한’ 것이라고 돼 있지요.

자, 어떤 효과를 주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효과를 주는가? 아픔이 감사의 깊이를 더하는 효과를 줘요. 아프다는 말은 육체적인 아픈 것도 있지만 자아의 의미의 지탱이 훼손될 때 정신적으로 아파요. 나라는 의미의 가치, 우리나라가 자살한 사람 많잖아요. 그런데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기분 나빠서 자살해요? 정신적인 상실 때문에 믿는 사람한테 배신당해서,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당해서, 믿었던 사람에게 돈 떼여서.

밥이야 먹고 살지만 많은 돈이 나의 나다움의 의미를 그만큼 구축해왔잖아요. 그런데 돈을 사기 당하면 이젠 내가 허세를 옛날의 나다움이 없어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디에 속했기 때문에? 과거에 구축돼 있는 의미를 현재까지 이어지고 미래까지 이어지려하니까 과거-현재-미래 시간 때문에 인간은 자기 의미를 구축하고 그 의미가 공격받고 훼손되니까 갑자기 뭡니까? 살 기분이 안 나는 거예요.

살 기분이 안 난다는 말은 평소에 감사할 게 없고 늘 초조해 있어요. 혹시 내 의미를 누가 훼손하지 않을까, 떼어가지 않을까, 누가 날 욕하지 않을까. 그런데 언약의 효과는 뭡니까? 바로 내 의미가 훼손되는 그것이 누구의 솜씨다? 주님의 언약이 옆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는 그 말씀이 내가 익혀서 내가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우리에게 절감하고 실감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와서 나의 의미를 망치로 톡톡 부셔주는 겁니다.

부셔주니까 뭐가 효과입니까? 이 아픔이 분명히 아픈데 나의 위신이 체면이 꾸겨져 아픈데 아픔이 뭐로 바뀐다 말이죠? 감사로 바뀌죠. 감사의 깊이를 더하는 것. 역시 짬뽕 그릇이 깊네요. 감사의 깊이를 더욱더 날마다 더하는 사람, 어지간하게 난리 나도 6‧25 터지는 난리 나도 웃을 수 있는 그것, 그게 바로 장성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이미 다 이루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었기에 우리의 죄 사함을 다 이루었기에 어지간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드러내는 고마움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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