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실제성과 모호함

아빠와 함께 2023. 10. 9. 10:37

20231006a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3장부터 하겠습니다. “다윗이 나이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으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1,2절) 23장부터 24장까지 레위 자손이 다윗 왕 밑에서 뭘 했느냐에 대해서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레위 자손이니까 이것은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 하나의 지파가 되겠지요. 열두 지파가 전부 다 평범하게 똑같은 레벨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어느 지파가 위에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두 지파가 레코드판처럼 똑같은 위치를 갖고 있는데 야곱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요셉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 사람이에요.

여기도 나와 있지만 6절에 보면, “다윗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각 족속” 그렇게 돼 있지요. 그 둘째 되는 그핫 아들 이름이 12절에 보면, 아므람인데 13절에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특징을 잘 아셔야 될 건데 야곱부터 열두 아들이 나오거든요. 야곱과 열두 아들은 합치면 이거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또는 일개 가족에 불과해요. 가정, 가족은 숫자가 얼마 안 되잖아요. 숫자를 확대시킵니다. 확대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사백 년 동안 사대 동안 애굽에 가서 그 자손의 숫자를 하나님께서 늘여버립니다. 남성만 육십만 돼요. 남자만 육십만, 엄청난 숫자가 되겠지요.

숫자 되고 인구 있다고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나라가 되려면 구심점이 있어줘야 돼요. 구심점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곧 왕이죠. 왕은 키가 커서 왕 되는 게 아니고 인물 좋아서 왕 되는 게 아니에요. 왕은 이거는 자리입니다. 자리가 왕을 만들어줘요. 근데 다른 나라 애굽 나라 같은 데는 바로 왕이 있잖아요. 자, 바로 왕은 누구와 싸웠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은 누구와 싸웠지요?

바로 왕 앞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바로 왕은 모세와 싸운 적이 있지요. 그러나 모세는 바로 왕을 상대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모세 배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에요? 모세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가 되는 거예요.

모세는 왕이 아닙니다. 왕은 아닌데 이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눈에 보이는 왕이에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왕을 제가 이번 시간에는 이걸 이렇게 하겠습니다. 사물적인 왕, 사물이란 말 알지요. 눈에 보이는 물건 같은 것. 사물적인 왕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 모호한 왕, 모호하니까 사물적인 것이 아닌. 사물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왕과 바로 왕이 대결했습니다.

그 대결은 왕과 왕의 대결이지요. 그런데 애굽은 애굽 나라의 군대를 갖고 있어요. 근데 모호한 왕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없어요. 원래 하나님의 군대는 여호와의 군대는 천사들입니다. 야곱에게 나타났지요. 마하나임. 천사들이 야곱의 꿈속에 사다리 오르락내리락했지요. 수많은 천사들이 있었어요. 그걸 마하나님, 마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군대가 있어요.

하나님의 군대는 천사들인데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에 의하면 천사로 구성된 하나님의 군대를 이제는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바꾼다는 것은 사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이거든요. 사물적인 나라와 그다음에 무엇의 대결이다? 사물적인 왕과 모호한 왕의 대결이죠.

그러면 제가 물어봅니다. 우리는 여기에 어디에 있습니까? 사물적인 왕과 모호한 왕, 둘 중에 어디에 해당됩니까? 성도라면 사물적인 왕에 속했습니까, 모호한 왕에 속했습니까? 모호한 왕에 속했지요.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육체를 갖고 있으니까 육체는 곧 뭐냐 하면 사물성이죠. 만지면 코, 눈, 입 만져지잖아요.

그러면 이 모호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나라와 어떤 다른 차이가 나느냐 하면 육신의 사물성이, 우리도 육신이 있으니까 사물성이 있지요. 육신의 사물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허무’로 바뀌어야 돼요. 허무란 말은 육신으로서는 육신이 왜 있는지를 최종적인 것을 끄집어낼 수 없는 것, 그게 허무에요. ‘내가 왜 있는데, 내가 왜 살지?’

추석 명절에 비가 왔습니다. 대목인데 비가 왔다. 그러면 장사하는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추석인데 비가 왜 오느냐’ 이렇게 했지요. 이 말 굉장히 중요합니다. ‘추석인데 비가 왜 오지?’ 안 왔으면 좋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네가 뭔데 비가 네 말 듣느냐? 비한테 추석 대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자연에 추석 대목은 없어요. 추석 대목은 사물적인 인간들이 자기의 사물성이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도가 추석입니다. 명절이에요.

여러분 길에 가는 사람에게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이 뭐냐?’ 뜬금없는 질문이지요. ‘인생이란 게 뭐냐?’ 인생에 대해서 많은 노래도 나오고 책도 많이 나왔잖아요. ‘인생이 뭐냐?’ 인생은 인간은 사물인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물이죠. 왜 사는지, 추석 때 왜 비는 오는지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아는 게 없어도 아등바등 시도하고 노력하고 애쓰지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최후의 진리에 대해서 모르면서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악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악을 쓰다가 결국은 허무하네, 라고 그걸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게 마지막 요양병원에 갔을 때 홀로 남아 있을 때 인생무상, 허무하구나, 라고 스스로 탄식하면서 인정하는 것처럼 하지요. ‘것처럼’ 아아 인생 참 허무하구나. 이래 죽는구나.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모르니까 허무한 거예요. 죽으면서 죽는 이유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그냥 허무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물성에서 출발해서 인생 끝은 어떻게 되고 시작은 인간 있기 전에 뭐가 있었고,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개뿔도 모르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모른다는 것은 허무를 받아들이는 건데 그게 싫은 거예요. ‘모르는 것은 모르지만 허무하기는 싫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생이 허무한 거는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얘 유학 보내서 박사학위 따오고 하는데, 이게 옛날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따고 KAL기 타고 오다가 러시아 비행기에서 쏜 미사일 맞고 삼십 년 공부한 것 공중에 그냥 날려버렸어요. 공중 분해됐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왜 박사학위 받은 사람까지 굳이 죽어야 되는가? 박사학위가 해답이 아닙니다. 박사학위가 인간의 허무를 되돌리지 못합니다. 추석 대목에 비 오는 이유가 추석 대목 피하고 다른데 비와야 될 하등에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사물은 육신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데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인간들은 사물적인 백성의 동의, 인정을 통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우리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한 장소에 모아요. 모아서 뭘 만드느냐?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웁니다.

당신이 우리를 대표해서 당신 자신의 일, 개인적인 사적인 일 하지 말고 우릴 대표해서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위해서 우리 백성을 위해서 열심히 희생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줘. 그래서 당신을 우리 왕으로 인정해줄게. 정치 잘하면 왕으로 인정해주고 못하면 데모해서 끌어내릴 거야, 라고 이렇게 백성들이 동의와 인정을 해서 왕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사물적인 존재가 사물적인 왕을 만든 겁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있다고 해서 안 허무한 게 아니에요. 왕이 있어도 국무총리가 있어도 대통령이 있어도 허무는 여전히 동일하게 허무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다 허무해요.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 왕은 사물적인 왕이 아니에요. 인간 보기에 모호합니다.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 내세울 때 하나님이 나타난 게 아니고 누굴 앞장세웁니까? 모세를 앞장세웠거든요.

모세는 바로 왕을 봐야 되는데 자꾸 뒤돌아봐요. “안 갈랍니다. 안 갈랍니다.” “가라. 내 백성 건져야 돼.” “저 못해요.” 모세는 자꾸 뒤돌아보면서 모호한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왕이 있을 것 아닙니까. 왕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애굽이 바로 왕은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본인과 이야기하지요. 본인의 의지하고 이야기하죠. 본인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허무한 게 허무함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호한 왕 밑의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맨 육체를 갖고 있잖아요. 육체를 갖고 있는 사물성을 그들은 어떤 사람이 돼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모호한 것처럼 이 사물성을 허무로 만들어서 모호한 자아로 바뀌어야 돼요. 모호한 백성들, 사물성이 아닌 유일하게 허무하지 않는 백성이 되려면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사물성에서 모호함으로 바뀌어야 돼요.

아까 모세와 누구와 이야기한다 했어요? 애굽에 가기 전에 누구와 이야기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했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눈에 보입니까? 아니지요. 떨기나무에서 음성으로 들리지요, 음성으로. 떨기나무 불붙는 걸 보고 음성이 들리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눈과 귀에 자기 말도 아니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닌 낯선 것이 눈에 보이고 낯선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그것은 뭐냐 하면 모세의 육신, 사물성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모세 고유의 것, 모세 자신의 사물성, 육신, 육체는 하나님께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못 받아들여요.

하나님이 모세 말고 동일한 모세지만 사물적인 모세 말고 모호한 모세를 여호와 자신의 나타냄 속에 그 안에 모세의 또 다른 모세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바로 떨기나무 모습이에요. 그 불붙는 떨기나무, 모세가 그걸 볼 때에 어떤 느낌 나겠어요? 모세가 물었어요. ‘어, 불은 붙었는데 타지를 않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불은 붙었는데 어떤 일을 하는데 안 타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모세가 알고 있던 사물성, 육신과는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사물성, 다른 육신을 모세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떨기나무에 있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백성들의 전형적인 모델인 거예요. 그렇다면 모세가 그 떨기나무 봤을 때 모세는 뭘 느끼느냐? 자신의 죽음을, 사물적인 자기의 사물성은 죽어야 될 사물성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죽을 육신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구나.’

죽을 육신이라는 사실은, 사람이 살다보면 죽는다. 그거는 죽음도 아니고요 엉터리고 진짜 죽음은 내가 사물의 최후의 모습을 모세는 미리 떨기나무를 통해서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 사물성이죠. 불붙는다, 사물성이죠. 하나님은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떨기나무의 사물성, 불붙는 눈에 보이는 것에 결합되어 나타났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 속하잖아요. 레위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지요. 그러면 야곱은 누구 말 들었습니까? 야곱에게 지시하고 명령한 자는 누구였어요? 야곱의 하나님이죠. 언약의 하나님이죠. 그 야곱의 하나님이 꿈에 사다리를 내려주시고 천사가 마하나님 하나님의 군대들이 왔잖아요. 이제는 천사의 군대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육신을 가진 사물성 모습으로 군대가 바뀝니다.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 해요. 출애굽기 12장, 안 찾아봐도 여러분 다 아시는 거니까 하나님의 군대에요.

하나님의 군대는 뭐냐 하면 눈에 비록 사물성으로 보이더라도 그 총지휘자, 그 가운데 계시는 임금님, 왕은 모호한 하나님이에요. 사물성 없는 하나님이 사물성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성, 허무함이죠. 허무와 싸움을 해야 될 나라가 드디어 생깁니다. 그게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 모호한 하나님이 그와 동행을 할 때 그 때 그 왕은 사물, 육체가 없어요. 모호하니까.

그럼 뭐가 있느냐? 이 모호함은 뭐로 나타난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함은 자리, 자리로. 인간 보기에는 모호하니까 그냥 자리만 있을 뿐인데 빈자리죠. 성소에 빈자리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있어요. 같은 말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지성소라 합니다.

지성소 들어가 봤습니다. 하나님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하나님은 안 보이고 조각된 수놓은 천사들이 보이지 않는 빈 공터를 지키고 있는 형상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주변을 지키는 천사의 형상만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공턴데 함부로 들어가면 죽어요. 희한하지요. 왜 죽는다? 사물성 때문에 허무한 것들은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사물성, 허무라는 것을 능가한 자들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일하는 곳은 농토가 아니에요. 농장도 아니고 과수원도 아닙니다. 레위 지파가 일하는 곳은 어디지요? 바로 빈터, 공허한 빈터 성전입니다. 모호한 공간. 이 모호한 공간이란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세 사람만 있다면 각자 사물성,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따로 따로 살아요. A, B, C가 있다면 A, B, C가 따로에요. A 따로 B 따로 C 따로 나눠집니다. 이걸 분절, 나누어진다.

그런데 성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전은 나누어지지 않아요. 나눌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한 분이 거기에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에 그 장소에서 일하고 종사하려면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 지파는 어떻게 됩니까? 각자 자기 자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일반 지파의 농사꾼들은 여기까진 네 농토 이건 내 농토, 네 목장, 내 목장 분절, 나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레위 지파나 제사장은 내 공간이 없어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려야 되겠어요. 중요하기 때문에.

허무란 최후의 진실을 본인이 끄집어낼 수 없는 상태, 이게 허무입니다. 간단하게 뭐냐 하면 해답이 없어요, 해답을 몰라요. 욥기 38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오는 대목입니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이 욥과 정면으로 일대일로 만나요. 제가 방금 강의한 대로 하면 욥은 육신을 갖고 있지요. 사물성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호합니다. 사물성이 있는 존재는 허무하기 때문에 뭘 모른다? 허무하다는 것은 최후의 진실을 본인 능력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입장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욥기 38장 18절에서 욥에게 이렇게 합니다.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찌니라”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거든 네 입으로 말해보라. ‘알아?’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욥이 뭐라고 하겠어요? 욥은 모르지요. 그러니까 모르면서 왜 나한테 개기느냐, 반항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 인생이 망가진 것에 대해서 왜 니가 뭣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왜 대드느냐 말이죠. 니 인생에 대해서 왜 그렇게 불만이냐 이 말입니다. 니 알아? 몰라. 모르는데 왜 거기 대드느냐 말이죠.

추석 대목에 비가 왜 오느냐? 지금 답변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반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뭔데 내 인생을 깽판 놓느냐’ 이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이면 다가? 하나님 뭔데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네가 너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알아?” “모릅니다.” “모르는 게 왜 말이 많아. 허무한 게 왜 말이 많아.”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은 전부 다 코미디라고. 웃기는 이야기에요. 전부 다 코미디에요. 코미디란 말은 뭐냐 하면 전부 다 허구란 뜻이에요. 팩트가 아니고 사실이 아니고 픽션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픽션, 자기가 지 마음대로 조작해놓고 그걸 팩트, 사실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게 우리네 헛되고 헛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고집부리죠.

그게 인간의 뭐냐? 인간의 사물성에서 나온 거예요. 모든 것이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를 갖고 있는 하나님은 모호한 데 사물성이 없는데 인간은 사물성이 있으니까 이 육신을 어떻게 지켜보려하는 거예요. 이걸 지키면 안 돼요. 이거는 허무로 넘겨야지 지키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이 육신을 허무로 넘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레위 지파가 어디서 일하는지 보라’ 이 말입니다.

그게 레위 지파는 어디서 일하지요? 성전에서 일하지요. 성전이 바로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장소에요. 다시 말해서 최후의 진리가 거기에 머무는 곳이에요. 성전은 모든 시간을 빨아 당기는 곳. 모든 시간을 최후로 만들어요, 성전 안에서. 성전 안에서 근무하는 레위 지파는 세상의 어떤 유혹거리가 거기 들어가면 없어요. 왜? 그 장소에서 바깥을 보면 다 허무하니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이 누구와 싸웠습니까? 애굽 나라와 싸웠지요. 애굽 나라는 무엇이 있다 했습니까? 모두 다 사물성이라 했지요. 모두가 육신을 갖고 있잖아요. 애굽 나라 왕은 어떤 왕입니까? 사물적인 육신이 자기 보호하라고 뽑아놓은 왕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지파 가지고 인구가 늘어나게 하면 국가를 만드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사물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허무한 애굽 나라에서 분리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일을 벌였느냐 하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이 살아봐도 모르는 자기 최후, 백 년 살고 죽어도 모르는 자기 최후, 그 최후의 진실을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죽는 사건을 통해서 미리 그걸 맛보게 한 겁니다. ‘각 가정에 맏아들 내놔. 내가 죽일 거야.’ 맏아들, 육신 가진 사물성 있잖아요. ‘각 가정에 사물성 끄집어내. 내 다 죽일 거야.’ 이게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지요. 유월절 그날 밤에.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육신이란 사물성 대신 뭘 내놓습니까? 양을 내놓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모호하냐 하면 분명히 양을 죽였는데 누가 죽였어요? 양을 유월절 약속 때문에 죽어나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고 양이었잖아요. 양이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걸 네 맏이는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과 양 사이에 모호함이 끼어있는 거예요.

그 모호함이 확대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시내 산 올라와서 어떻게 양이 인간, 어떻게 인간이 양, 그 선에 가 있는 모호함이 모세의 제사법이라는 율법을 통해서 다른 법을 통해서 그걸 서서히 신약 때 십자가까지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모세와 더불어 한 율법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호함이라 했으니까 이걸 달리 하겠습니다. 사물성에서 뭐로 바뀌었다 했습니까? 모호함으로 바뀌지요. 이걸 달리 말씀드리면 ‘형식에 내용이 담긴다’가 돼요. 우리의 육신은 그냥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뭐가 되느냐? 형식에 해당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이 육신이란 자기의 사물성에다 세상 것을 내용으로 해서 거기에 구겨 넣은 거예요. 변비 걸리죠. 스트레스 받고.

애굽의 사람들이 원했던 그 세상 것, 모호한 왕 여호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의 형식의 내용을 꽉꽉 채우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허무한 형식에 허무한 내용이 결합된 겁니다. 거기에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의 왕이에요. 이게 나중에 다니엘서 후반기에 들어가면 짐승입니다. 옛 뱀이고 마귀에요. 마귀가 배후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지도자라는 것을 위대한 영도자, 인민의 지도자, 민족의 태양의 아들 이런 것을 계속해서 형식에다 내용을 채운 거예요.

옛날 고대국가는 토지를 근본으로 해서 생존했던 나라들이에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 백성들의 지도자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물을 다스려야 돼요. 관개시설을 하려면 거대한 토목공사의 지도자가 필요하잖아요. 솔로몬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건물을 짓는다든지. 그러니까 물을 다스리고 토지를 개간하고, 왜냐하면 농경시대니까 땅과 관련되어서 살았어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도 역시 그런 나라였어요.

그런데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지고 난 뒤에는 농경으로 밥 먹고 살지는 않았어요. 농경으로 밥 먹고 살려면 여호와 하나님께 기댔던 그들이 이제는 장사하고 살려는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게 솔로몬 이후에. 솔로몬이 외국여자와 많이 결혼했잖아요. 솔로몬 시대에 무엇이 유입되었습니까? 장사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들의 공주들이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왕은 그 공주들을 위해서 그들이 믿던 바알 신들, 각종 종교들을 심어준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수입한 게 종교입니다. 종교로 시작해서 결국은 허무로 끝나지요, 인생은.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형식적으로 종교인이다, 교인이다 하지요. 그러면 그 내용은 뭐로 채웁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해요. 나는 목사로서 복음 전하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걸로 채운다고 하지요. 여러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을 보게 되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형식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다 실천해보는 거예요. 목사로서 복음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많이 했지요. 그런데 이게 뭐로 끝났어요? 불법을 행한 자로 규정됐지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내 형식이, 다시 말해서 내 사물성이, 다시 말해서 내 허무함이, 내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내가 끌어당겨서 내 안에 이것으로 채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였다고요? 두 자로 해서 그게 뭐였다? 합법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불법’이라는 거예요. 네가 왜 네 인생에 대해서 네 것으로 채우느냐 이 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뭐로 끝나야 돼요? 허무로 끝나야 됐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모든 시간은 누가 빼앗아간다 했어요? 성전에 계신 분이 빼앗아가지요. 빼앗아가면서 믿음이라는 걸 빼앗아가야 하는 거예요.

믿는 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에 대해서 안 믿는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종교인입니다. 인간은 뭘 믿어요? 자기 자신을 믿잖아요. 인간은 뭘 사랑합니까, 인간은 누굴 사랑하지요? 자기를 사랑하지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혹시 아는 분 말씀해주세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민망하지 않게 내가 후딱 정답을 대야 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목사랍시고 온갖 것 집어넣고 선지자 노릇하고 복음 전하고 구원될 줄 알아요? 누굴 속이려고요? 그래서 목사들이 복음을 전한다, 설교한다 할 때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저주하지 않는 자기 믿음을 버리지 않게 되면 어떤 사람들이 그 목사한테 찾아오느냐 하면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뭐를 더 챙기고 뭘 얻으면 됩니까, 라는 사람들만 모일 거예요. 그게 바로 이단과 이단의 만남, 허무와 허무의 만남. 이게 뭐냐? 주일 낮의 허무개그에요. 전부 다 코미디에요.

“목사님, 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목사가 말하기를 “나처럼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둘 다 지금 뭐하는 작당들이에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요 인간이 이미 자기가 자기를 믿잖아요. 자기 행함을 믿고, 자기 의와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믿고 있습니다. 그걸 놔라 이 말이죠. 자기가 믿는,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는 예수님을 놔라 이 말입니다. 왜냐? 나와 예수님 사이에 내 믿음이 거기에 개입돼 있으니까요.

주께서 성전에서 하는 일은 내 믿음을 강탈하는 거예요. 박멸하는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강탈하고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돼있거든요. 천국은 그냥 믿으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 빼앗김이 있어야 돼요. 나를 위한 천국은 주님에 의해서 빼앗겨야 되고, 그 빼앗김을 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23장에서 전에 모세 때 레위인과 제사장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누구 밑에 있는가? 어떤 왕? 다윗 왕이라는 그 예하에 있어요. 그러면 그 성전의 자리는 결국 누구 자리냐 하면 제사장의 자리, 레위인의 자리로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 자리냐 하면 왕의 자리입니다. 그 성전이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인데 그 왕의 자리에 누가 있느냐? 모호한 왕이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윗이 이방나라 막 쳐부수고 포고 잡고 승리했지요. 그러면 다윗이 승리한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해선 어떻게 됩니까? 자기 백성한테는 봐주기 한 거예요, 자기 백성한테도 이긴 겁니까? 자기 백성한테도 이긴 거예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보이는 소년 다윗이지만 골리앗이 사물성으론 굉장히 웅대해요. 일본말로 스고이すごい, 대단하다. 뭔가 엄청나다 할 때 스고이란 말하잖아요.

골리앗이 대단해요, 사물적으론. 그래서 다윗은 그것에 기죽었습니까? 스고이한 그 육체를 보고. ‘야아 허무치고 대단한 허무구나’, 이래 느낀 거예요, 허무치고. 다윗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 골리앗의 뭘 봤느냐 하면 골리앗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할례가 뭡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을 때도 할례고 또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뭐냐? 할례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이죠.

그다음에 제가 질문할 차례지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사물성과 만나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사물성 플러스 하나님의 율법이 만나면 여기서 뭐가 나와요? 허무가 나오지요, 허무가. 허무하잖아요. 허무함이 율법과 만나면 이게 허무, 어떤 허무? 최후의 형편에 속한 허무가 나오는 겁니다. 이걸 율법이 뭘 하느냐? 이걸 생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걸 가지고 죽었다. ‘너 죽었어.’ ‘율법 앞에서 너 죽었어.’

그럼 율법 앞에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 앞에서 살아 있는 사물성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갔을 때 모세는 기존의 사물성과 다른 사물성을 보여줬습니다. 40일 동안 물도 안 마시고 40일 동안 양식도 먹지 않고 얼굴 좋아, 훤하니 해처럼 피어서 내려왔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이 땅이 생각하는 그러한 허무한 사물성이 아닙니다.

그건 왜 그래요? 최후를, 제가 했지요. 허무란 뭡니까? 최후를 못 끄집어내지요. 이 말은 율법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인간의 최후의 사정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아까 최후의 사정은 제가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야기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가 모든 율법의 완성, 십자가 안에서 나온 법이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활동은 무엇을 하느냐? 그 최후의 상황 속으로 모든 백성들을 끌어당기는 일들을 누가 하는가? 레위인들이 하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죽었어. 우리는 다 허무한 존재야.’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믿음, 소망, 사랑 다 허무한 거예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아무 소용없어요. 자꾸 믿음으로 티켓인 줄 알고 뭘 하려고 해요. 믿음 갖고 천국도 들어가고, 믿음 갖고 기도해서 응답도 받으려하고 믿음이 없으면 안 되니까 믿음이 마스터키 같은 그런 줄 알고 꼭 간직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마스터키 같은 믿음을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은, ‘그걸 갖고 와. 빼앗아버릴 테니까.’ ‘허무한 게 허무해야지 왜 안 허무해지려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인간은 허무한 줄 알면서도 허무 안 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가 뭐지요? 인생 살면서 허무하다, 가을 되면 허무하다, 온 소린 다하면서도 요양병원 허무하다하면서도 자식 오게 되면 또 불만이 많아요. 하나도 허무 안 했어. 본인이 허무하다하지만 허무 안 했어요.

왜 인간은 허무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버티는 도대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자리 때문에. 형식이 버티고 있는 내 자리를 그 자리마저 빼앗길 때 인간은 진짜 살 이유 없는 허무해지니까요. 내 자리. 그래서 진짜 허무한 이야기를 예를 이렇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병 걸려서 죽었어요. 식구들이 가족 죽었다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완전히 안 죽었어요. 지 장례식에 듣고 거기서 깨어났어요. 깨어나 보니까 본인 장례식하고 있는 거예요. 의식이 돌아오니까 기겁을 했지요. 이 장례식 꼴 보기 싫다고 허겁지겁 혼돈의 거리로 뛰어나가 트럭에 받혀 죽었어요. 그래서 식구들은 그 장례식을 계속 치를 수 있었답니다. 약간 미뤄진 것뿐이에요.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었단 사실을 알고, 이게 싫은 거예요. 싫어서 까불다가 늙어죽었을 때에 처음부터 죽은 장례식을 다시 치르는 겁니다.

성전은 뭐냐 하면 유월절 취지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성전이고, 그 취지가 이어오는 거예요. 죽은 자를 죽은 자로 장례 치르는 자리가 그게 유월절 사건이었고, 그 유월절 사건의 연장이 바로 성전입니다. 인간의 사물성이 죽지 않고서는 모호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뭘 죽여야 되느냐? 내가 나를 믿는 나의 믿음을 내가 놔버려야 돼요. 자기 믿음을 없애는 곳에 가야 돼요. 없애는 그 경우를 그 사건을 당해야 돼요. 나 같은 것은 믿음조차도 가질 필요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성전 안에 거하는 세상의 어떤 유혹도 거기 물들지 아니하는 고정된 자리, 하나님의 자리,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10분 쉽시다.

 

 

20231006b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성전은 자기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자기를 버리는 곳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공간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아까 자기 자리라 했잖아요. 자기를 만든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하나님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에요. 하나님께서 거절하는 공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물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보인 것 같이 인간의 사물성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를 않으면서 결국은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뭘 했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내세운 사물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 뭐가 됐어요? 육신이 되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면,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지금 우리가 역대상 이야기란 말이죠. 그럼 역대상 23장 1절에는 뭐냐 하면 여기서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이란 인물이 사물성으로 등장해요.

그러면 다윗은 죄 짓기 전에 다윗과 간음과 살인죄 짓기 전의 다윗과 그 후의 다윗이 달라요. 계속해서 달라지지요.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일이었다는 거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난 자, 이것은 내가 평소에 몰랐던 나의 출생의 비밀이었지요.

인간은 자기가 허무한 것도 모르고 그냥 느낌 상 허무한 데 자기 육신을 지키려고 했지요. 다윗은 특히 뭘 지키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리를 자기가 지키고자 한 거예요. 밧세바와 간음한 거나 우리아 장군을 죽인 것도 다 이유가 어디서 나옵니까? 본인이 왕이라는 지위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일반인이면 그래 하지 않아요. 왕이기 때문에 한 거예요. 왕이기 때문에 자기 부하를 시켜서 죽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다윗이 느낀 것은 뭘 느꼈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을 내가 모르는 근원, 나의 원천적인 나. 그걸 알리기 위해서 주변에 사건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그 사건 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뭐냐?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대신 누가 죽은 거예요? 그게 밧세바와 자기 사이에 생긴 아이가 자기 대신 죽었어요. 그리고 자기 대신 죽어야 될 아이는 밧세바의 본남편 우리야의 죽음,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계속해서 영구히 영원토록 나한테 그 죽음을 내 속에 삽입시킨 조건 하에 나를 구원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없애버리고 주님의 믿음을 우리 속에 형식 속에 내용물로 집어넣을 때 그냥 ‘믿습니다’가 들어오는 게 아니고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내용으로 해서 우리 형식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 소망, 사랑은 어디서 온 거냐 하면 모호한 데서 온 거예요. 모호한 왕으로부터 주어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설 때 이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욥기 38장 18절에 하나님이 욥에게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네가 모든 걸 알아’ 이랬지요.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욥 보고 ‘너 모든 걸 알아?’ 모르지요.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모든 걸 알아요.

모든 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하는 그 일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관련돼 있습니다. 기껏 다윗 하나 살리기 위해서? 아니요. 다윗과 똑같은 팔자를 갖고 태어날 분이 모든 것, 그게 뭐냐 하면 다윗처럼 죽었다가 산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죽었다가 근원적인 죄로부터 가장 근원적인 의로 태어나지요.

그러니까 결국 이건 뭐냐? 부활인데요. 부활 안에 뭐가 있다? 최후의 심판을 내용으로 가질 때 이게 부활이 되는 겁니다. 방금 잘 들었습니까? 부활은 안의 내용이 뭐라고요? 최후의 심판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면 뭐가 부활됐다? 최후의 심판이 부활된 거예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저주의 부활, 저주의 양산, 생산, 그게 바로 성도의 해야 될 사명입니다. 기쁜 저주를 유포하는 자, 즐겁게 저주를 전파하는 자 이게 성도의 할 일이에요. 여러분 앞에 누가 돈 많다고 껍죽대거든 그땐 즐거운 일이 생기지요. ‘저주나 받아라. 네가 최후를 알아? 네가 심판을 알아? 네가 저주를 알아?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 걸 알아?’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7장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22절)라고 할 때 이러한 고백이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근거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돼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 그렇게 건너뛰지 말고요,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불법이란 사실을 그 이유를 필히 아셔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정답 나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때, 강의 때 요 근래 여러 번 한 게 있어요. ‘악’ 다른 말로 죄지요. 악은 무엇이냐? 자기를 소환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불러내는 게 악이에요. ‘가을이다, 허무하다.’ 이게 악이에요. ‘네가 뭔데 가을 없애야 돼?’ 이래 나오거든요. ‘네가 모든 걸 알아?’ ‘모릅니다.’ ‘모르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탄식하는 거야?’ ‘인생은 허무합니다.’ ‘허무하다는 소리하지 마. 네가 알기나 알고 허무해? 네가 허무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안 돼.’ 그 정도로 허무해요.

자꾸 우리의 육신 안을 나를 위한 자리, 나를 위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어요, 인간은. 이걸 평생을 다하여 내 공간을 꽉꽉 채울 일만 생각하고 그걸 누굴 만나도 그 이야기만 대화로 나와요. 우리 따뜻한 대화해봅시다. 대화하면 뭐합니까? 그 안에 나는 이래서 허무하지 않다, 그 이야기만 나올 건데요.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를 하고, 그 이야기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나올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이러면 되지요.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증인 했는데 그게 죄였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간단하지요. 뒤에 뭐 붙이면 돼요. ‘나는 주님을 믿고 십자가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엉터리입니다.’ 이렇게.

내 자체 안에 반드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신 죽었어야 할 내용을 내 안에 이미 담겨있는 티를 성도는 감출 길이 없습니다. 왜? 그게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게 모든 것이거든요. 뭐 빛에 대해서 연구해서 노벨상 타고, 화학상 타고 모든 것은 그게 다 노벨상 타도 그게 죄고 안 타도 죄고 가만 놀아도 죄고 설쳐도 죄고 죄 아닌 게 없다는 것, 이게 모든 것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서 불법을 행한 자란 이 말은 내 것을 가지고 지고 들어가야 그게 불법이 아니고 비로소 의가 되는 거예요. 주의 것. 그런데 주님의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란 것은 네 죄 때문에 내가 희생되었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눈을 떴잖아요. 소경이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였던가요?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고, 소경은 눈 뜨게 해줬지요. 그러면 눈 뜬 사람은 새삼스럽게 본인이 뭘 알게 된 겁니까? ‘나 눈 떴다’ 이걸 아는 게 눈 뜬 게 아니에요. 눈 떴다는 말은 내가 누군지 아는 거거든요. 나는 소경이 되나 안 되나 나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한 이게 눈 뜬 거예요. 모든 것에 눈을 뜬 거예요. 나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말썽꾸러기 나 때문에.

아까 세상나라의 왕 제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어요. 세상나라에 왕이 있다 했지요. 애굽 나라에 왕이 있다 했지요. 그게 아까 사물성부터 시작합니다. 사물성에 사물성을 제곱을 해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나온다면 인간의 왕이 되는 거예요. 허무하지 않은 육신이 있는 육신을 육신의 극단, 육신의 극한, 최고의 영웅이죠.

우리나라 핸드볼 선수 가운데 국회의원 된 사람 있지요? 여자 핸드볼 선수 임오경, 국민의 영웅이었지요. 국민의 영웅이니까 유명한 게 돼요. 유명하다는 말은 내 사물성으로 해내지 못한 보다 더 수준 높은 다른 더한 것을 추가적인 보여줄 때 그걸 영웅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못하는 데 그걸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인간은,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간은 왕이 최고의 영웅이잖아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미국 대통령 할 사람도 없다, 나이 팔십 넘었는데 또 나온다더라. 그럼 니 해봐라. 나 안 해. 난 못해. 왜 못 해? 나는 기타 쳐야 되니까 못해. 미국의 국무장관이 국무장관하면서 밴드해요. 둘 다 놓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뭐냐 하면 인간은 왕이 있잖아요. 영웅. 영웅에서 일정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특정거리, 특정한 자기만의 거리. 회사 운영하는데 국가가 간섭하면 싫지요. 내 돈 버는데.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의 인민군이 와서 회사를 다 빼앗았다. 그럴 때 뭐라 합니까? ‘우리도 든든한 나라 있었으면 안 빼앗길 텐데’ 이러지요.

지금 우크라이나가 그 상황 아닙니까. 우크라이나가 전쟁 일어났을 때 젤렌스키 대통령 존경했어요? 별로 존경 안 했어요. 그런데 러시아가 공격하니까 나라가 어떻게 돼요?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18세 이상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어디 간다? 군에 가야 되지요. 하나로 단결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어떤 특정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단 말이죠. 내 자유를 보장해주면 왕이라 할게.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 누가 나서야 됩니까? 여러분? 군대가 나서줘야 돼요. 우크라이나 아줌마들 애들 있지요. 애들 누가 보호해요? 자기가 슈퍼우먼 되어 보호합니까? 남자들이 나서서 전쟁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귀한 내 자식 키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국가라는 것이 필요 없다가 아니에요. 만약에 내가 여자가 되어서 가는데 누가 성추행하려고 달려들 때에 뭐라 합니까? ‘경찰 뭐하냐? 신고하면 빨리 와야지.’ 자, 경찰을 왜 호출해요? 날 보호하라고 호출하지요. 경찰은 자기가 월급 줬습니까, 누가 월급 줍니까? 국가가 월급 주잖아요. 자기가 태권도 5단 쯤 돼요? 아니지요. 여자가 태권도 5단해서 이길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사물성은 나보다 뛰어난 사물성에 뭐가 모였느냐 하면 약간의 거리 양만큼 권력을 양도해요. 권력을 양도한다는 것은, 내가 약간의 자유를 떼어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어디에 사용하느냐? 내가 나를 왕이 되기 위해서 그동안 나의 자유를 활용해왔던 거예요. 내가 하나의 왕이에요. 심지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가족끼리 놀러가서 ‘점심시간인데 중국집에 가서 먹자.’ 아버지가 “오늘은 짜장면으로 통일한다.” 딸이 “안 돼. 나는 반대에요. 난 짬뽕이에요.”

왜 아버지가 짜장면 먹겠다는 데 딸은 짬뽕 먹겠다고 나선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만 왕이가, 누구도 왕이다? 내가 왕이다. 나는 짜장면 먹으면 힘이 안 나. 어제까지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짬뽕 먹을 타이밍인 거예요. 그래야 나의 패턴이 돌아가고 그러면 나한테는 나의 고유의 힘이 채워지는 겁니다. 이 형식의 내용이 ‘나는 잘났다’ 내용이 계속 유지가 돼요. 뭐 먹고? 짬뽕 먹고.

옛날에 선생님은 선생님이 시키면 가는 거예요, 그냥. 하라 하면 하면 돼요. 그런데 요새 선생님은 애한테 물어봐요. 왜 물어봐요, 그걸? 이해가 안 돼. 그걸 왜 물어봐?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생각이 왜 필요한데요? 차라리 선생님으로 내가 보기엔 학원 일타강사를 모셔야지. 선생님이 뭐 선생님이에요? 학생보다 위에 있다고 부모들도 인정해준 자리가 그 자리잖아요.

그런데 선생님 자리를 포기하고 같은 애들 친구 돼버리면 애들은 뭘 원합니까? 나를 지켜주는 선생님 자리를 학원 강사한테 찾을 게 분명하단 말이죠. 무든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 한 겁니다. 왕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내가 왕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왕이란 뭐냐? 권력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나는 힘 모으고 권력 모으고 내 하고 싶은 것,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힘 모으는 그 작업을 하는데 내가 작은 왕이에요. 작은 왕을 지키기 위해서 큰 왕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왕과 어떤 거리?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대통령 필요 없어’ 이런 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도 너무 가까이 오면 나는 표 안 찍을 거야’ 이렇게 하는 것도 나고.

이게 뭐냐 하면 사물성으로 유지되는 현 국가에요. 왕인 국간데 이걸 가지고 성경에선 뭐라 한다? 이걸 짐승이라 하지요, 짐승. 짐승은 마귀의 종이에요. 이게 악마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은 거예요. 교회 이야기해봅시다. 목사님이 계시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한다. 전하니까 존경한다. 이게 뭡니까? 교회 단체가 뭐예요? 짐승이지요, 뭐. 그 어디에도 자기를 폐기처분한 요소가 없잖아요. 내 믿음을 구겨버리는 게 없잖아요.

‘목사님, 제 믿음 어때요? 저 믿음 좋지요.’ 이래 나온다고.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으로 나를 더 강화시키고 단단히 하는데 교회를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일상이고 그게 우리의 삶의 패턴이에요. 사물성의 패턴입니다. 어디에도 그게 밟히고 구겨지고 뭉개지고 괴물 되고 파괴되는 게 없어요. 예수님은 이거 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부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05편 15절에 나옵니다. 방금 이야기. 어떤 교회는 이 대목을 시편 105편 15절을 기둥에다 적어놓은 교회도 있어요. 실제로 제가 봤어요, 옛날에.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기름 부은 자가 대표로 누구냐 하면 처음에는 왕과 선지자였어요. 그게 멜기세덱이 그렇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요 하늘나라의 제사장이죠. 기름 부은 자.

지금 우리가 역대상 23장, 24장을 하고 있는데 역대상 23장에서 레위 지파가 해야 될 것은 뭘 지키는 겁니다. 문지기도 지켜요. 세 가지 요소입니다. 하나는 레위인들 재판, 문지기, 그다음에 찬송. 돌아가면서 찬송하는 것. 제사장들은 뭐합니까? 제사장들이 레위인들을 지휘해서 제사장들은 근본적으로 제사, 제사를 제사답게 하기 위해서 그 공간, 성전이라는 공간을 재판하고, 재판이라는 것은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소환시키는 거예요.

재판, 문지기, 찬송, 이렇게 해서 어떤 특정 공간을 영구히 하는 그 작업을 하는데 이 제사장 위에 누가 있습니까? 역대상 23장에 의하면 누가 있어요? 왕이 있지요, 왕. 그러면 이 백성들은 왕과 일정 특정거리를 유지를 해야 되는 거예요. 이 자리에. 이 말은 나의 자리는 정기적으로 성전에 와서 내 자리를 찢어야 돼요. 나를 위한 공간을 없애야 된다고요. 어디서? 성전에 와서 거기서 율법, 말씀 배우면서. 가르치는 자는 제사장이 가르치고.

또 그들이 어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율법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판결 내리는지 재판도 받아야 되고. 그리고 그 공간이 너무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에 찬송이 되고, 그다음에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문지기까지 필요하고요. 시편 84편에 보면 하나님 집에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라는 대목 나오지요(10절).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제사장 또는 그냥 레위 지파는 왕의 몸통이다. 왕은 모호한 왕 여호와의 왕 되심의 몸통이 되지요. 사물성이 되니까. 이 관계, 하나님이 왕이시고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말씀.

그러니까 이건 뭐냐? 보이지 않는 모호성이 보이는 육신, 사물성으로 나타나는 그 모습을 신약 때의 성도들도 그렇지만 신약 오기 전에 이미 다윗 시대 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자리답게 자기 자리로 여기지 않고 누구 자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모호한 이름이 계시는 자리로 그렇게 확정을 짓고 다윗이 활동을 한 거예요. 그 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고 제사장 레위 지파가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대표 지파였습니다. 왜? 그들만이 죽음이라는 모든 것을 그들의 활동공간에서 처리해내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일에 한 것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어요.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냥 고장 난 죽음이에요. 죽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느냐 하면 진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죽인 죽음만이 진짜 죽음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늙어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요 인간은 죽어도 안 죽은 게 돼버려요.

진짜 죽지 아니하면 진짜 부활에 이르지 못합니다. 진짜 부활에 생명에 이르려면 진짜 죽음을 통과해야 돼요. 진짜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돼요. 그런데 진짜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의 율법, 말씀 앞에서 진짜 죽어야 돼요. 율법의 완성 앞에서 그걸 다윗 시대 때는 왕이 관장하고 있는 제사장의 성전이 바로 진짜 죽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는 호들갑 떨게 없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둘로 이스라엘 내부를 구분해봅시다. 한쪽은 사물성, 인간의 육신이죠. 육신이 농사도 짓고 장사하는 사물성. 이들이 다수지요. 다수인데 하나로 집결돼야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리, 이들은 각자 삶의 자리, 자기 가정이 있지요. 그 가정은 하나의 장소, 하나의 자리, 이 자리가 뭐라 했습니까? 바로 성전. 성전에서 활동하는 자는 누구다, 무슨 지파다? 레위 지파. 지금 레위 지파 이야기에요, 23장.

다수가 하나로 정규적으로 모여야 돼요.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씩 모여야 됩니다. 자기 자리에 의미를 부여받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아요. 규정받기 위해서는 내 자리에서는 규정하면 안 돼요. 이 하나밖에 없는 이 자리에서 규정받아야 돼요. 그러면 이 레위 지파 배후에 누가 있다 했어요? 사물적인 왕, 다윗 왕이 있지요. 다윗 왕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모호한 왕이 계시는 겁니다. 이게 다윗언약이란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오늘날 우리들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의 내용은 주로 어떤 겁니까? 뭐 사돈의 팔촌 기억합니까? 그 사람 어디 사는지 내 일 아니잖아요. 인간은 자기 일만 기억하지요. 그걸 추억이라 하는 겁니다. 추억들이 있어요. 집에 가서 앨범 보세요. 누런 사진 빛바랜 것부터 해서 생생한 것까지 보게 되면 자기역사 있지요. 그걸 보게 되면 다시 기억나지요. ‘춘자, 요새 춘자 뭐하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여고동창생 찍은 것 있잖아요. 소풍 가서 한쪽만 바라보고 있던.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에요? 내 중심에 내 자리, 내 공간 못 버립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인간은 뭐만 기억한다? 자기의 관련성만 기억하지요. 그러면 성전은 뭘 기억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을 기억하지요. 유월절 어린양, 그것도 기억하고 노아 홍수도 기억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다 성전에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전이 불탔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억과 너희들이 분리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포함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네가 기억하는 이 기억이 하나님의 왕 되심의 기억과 특정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요. 언제든지 부를 때에는 냅다 와야 돼요. 전쟁할 때 군에 가야 되는 것처럼. 평소에는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논산훈련소 오라 하면 까불다가도 그만두고 논산훈련소 들어가야 되잖아요.

‘국가가 뭔데 날 불러?’ 못해요. 우리는 국가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국가의 혜택을 입은 게 뭐가 있는데’ 하거든요. 자갈길 한 번 운전해보지요. 아스팔트 누가 깔았는데요? 국가가 깐 거예요. 일기예보 누가 하는데? 국가가 하잖아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의 몸통이에요. 일단은 대통령은 머리로 두고 몸통이라니까요. 이스라엘의 몸통은 뭐냐? 이스라엘이죠. 그럼 머리 부분 임금님은 누굽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뭐가 연결돼 있다? 거미줄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연결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에서 이 다윗, 다윗은 육신을 갖고 있지요.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사물성이죠. 사물성으로 나타난 다윗이 사물성을 갖고 있는 레위 지파를 다스려서 사물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 당시 성전, 솔로몬 때 성전 짓습니다. 솔로몬 성전 안에서 여기서 눈에 보이는 양과 염소, 소를 잡지요. 전부 다 뭐예요? 사물성이죠. 사물성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 되는 겁니다.

어떤 공포물에 이런 영화가 있어요. 새로 결혼한 신랑, 신부가 낡은 집 사서 수리하고 이사를 했어요. 이사한 첫날에 현관문 열고 거실에 들어갔는데 수리했으니까 깨끗해 보였지요. 그런데 옛날 거울이 있어요. 거울은 앞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반사해주는 게 거울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까 현재 자기가 수리했던 집의 모습이 비치는 게 아니고 낡은 집 옛날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 거예요. 공포물입니다. 그럴 때 뭐라 하느냐? 거울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신랑, 신부는 그 집에 살아 있는 것이 누가 살아 있어요? 본인만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또 누가 살아 있어요? 거울아, 거울아. 거울이 살아 있는 거예요. 거울은 사물성이죠. 본인도 사물성이지만. 그러나 거울이란 사물성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공포물이니까 영화 내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거울은 어떻게 돼요? 기분 나쁜 거울을 깨잖아요.

그게 십자가에요. 깨져버리면 조각나지요. 조각들 있지요. 그 조각들이 쓰레기로 쓰레기차가 분리수거해갔는데 밤마다 꿈마다, 갑자기 호러물로 바뀌었다. 밤마다 꿈마다 깨진 거울이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깨진 거울 조각 하나하나가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게 더욱더 무서운 일은 거울이 과거를 유일하게 안다는 것뿐 아니고 그 신랑, 신부가 그 집에 이사 올 것을 이미 거울은 예측하고 있었다는. ‘너는 내 집을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식으로 너는 1982년에 태어났어야 했어.’ 출생까지 오직 이 집에 살기 위해서, 그리고 누굴 만나기 위해서? 거울을 만나기 위해서, 언약을 만나기 위해서, 십자가 만나기 위해서 이 땅에 이사 와야 한다면 이게 정녕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안 그러면 이걸 기쁜 소식이라 이야기해요? 성경에선 이걸 기쁜 소식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와 일정거리 관계에 있었구나, 하는 사실. 내가 세상사람 자기만 소환하는데 주께서는 자기 언약으로 나를 소환시켜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생각하면서 호들갑 떨지 말란 말입니다. 성전 안의 특수한 공간은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있는 농사짓는 사람 누구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곳이에요. 왜? 나를 잃어버려야 되니까.

그래서 그 공간은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왕이 이걸 변질시켜요. 이걸 누가 지적하느냐? 왕이 기름 부었지요. 처음에. 제사장 기름 부었지요. 제사장이 제사장답지 못하고, 왕이 왕답지 못했을 때 기름 부은 자들이 등장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거울이에요. 그들 속에 인간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는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성신을 통해서 기억하게 한 거예요.

시편 51편 봅시다.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창조입니다. 기존에 있는 형식에 담은 내 마음 아니고 내 내용이 아니고 다른 내용이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 다른 내용이 어떤 내용입니까? 나로 인하여 꺾어진 뼈, 나 때문에 죽었던 그 뼈가 주인공 되는 그 내용이 다윗이란 형식, 육신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다음에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그다음에 뭡니까?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러니까 나의 기억과 나한테 들어오지 두 번 다시 나가지 않는 주님의 기억의 투쟁장이 오늘날 우리의 사물성이에요. 우리의 육신입니다. 깨끗하게 사는 게 성도가 아니에요. 투쟁하는 거예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 위주의 공간, 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간 있잖아요.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하든 말든 나는 나 사랑하고 싶어. 내 인생이니까 내가 다듬어 나가고 싶어. 내가 이렇게 요모조모로 예쁘게 남한테 자랑할 만한 인생이고 싶어.’ 그것과 그다음에 그걸 털어버리라고 짓밟고 파괴, 그걸 최후의 심판으로 끌어당기어 온 주님의 십자가 기억이 둘이 공존하는 곳이 오늘날 우리의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미쳤다고 하겠지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지 뭐 교회 다니느냐?’ 그 사람들에겐 뭐가 없느냐? 사물성 밖에 없어요. 모호성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사물성을 허무로 만드는 내가 어디서 뭘 하면 어떻게 살아왔든 그게 다 허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새로운 예수님의 희생, 허무한 우릴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희생, 피, 죽으심, 시편대로 하면 꺾으신 뼈, 그것을 다윗은 말합니다. ‘그 뼈의 정신을 내게서 쫓아내지 마소서.’

보통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이라 하잖아요. 성경에서의 기도는 그게 아니고 이 자체가 응답이 기도형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미 안 쫓아내는 게 확정됐기 때문에 쫓아내지 마소서, 란 말이 나와요. 여러분 주기도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완수하고 돌아가신 그 코스가 주기도문이에요. 따라서 주기도문은 우리보고 하면 올게, 가 아니라 이미 다 주께서 이런 내용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주기도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께서 투쟁의 장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의 요소가 이렇게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모호한, 점선이에요. 그리고 사물성, 눈에 보이는 게 어디 있느냐? 이 안에 우리의 투쟁의 장이 겹쳐져있지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내 잘난 것만 기억하잖아요.

우리가 아주 편하게 쉽게 생각하면 내 잘난 것 내가 간수하기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괜찮은 나 간직하기에요. 이게 이 세상요소잖아요.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왔지요. 십자가 영이 들어왔잖아요. 이 가운데 우리가 세상에서는 나를 잃어버리면 안 돼요. 왜?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 합니까?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하여튼 그래서 제가 제일 답답한 것은 뭐냐 하면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합시다, 형제를 사랑합시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 했습니다’ 자꾸 그 이야기만 하는데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너 미워하란 뜻이에요. 왜 미워하란 건 빼버리고 말씀을 국어시간처럼 집어넣고 은혜 받았다, 그런 소리가 왜 나오느냐 말이죠. 진짜 살인충동이 막 일어나…

그거는 사기잖아요, 사기. ‘주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신 쫓아냈습니다.’ 그것 사기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이쪽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성경을 무슨 흉내를 내겠습니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각양 좋은 것은 자기 형식에다 내용을 다 담는 거예요. 담아서 뭐할 건데? 하나님 앞에 압력 넣기 위해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이래도 날 구원 안 할 거요?’ 이거는 청와대에 압력 넣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예수도 믿고 십자가 믿고 피 믿고 다 믿었으니까 이래도 나 구원 안 할 거요?’ 이거는 공갈협박, 이거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겁니다. 이걸 종교라 해요. 결국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쪽으로 다 가게 돼 있어요, 결국은.

온갖 성령 받은 흉내를 다 내도 결국은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자기 자신을 못 미워하니까 자기를 버릴 마음이 일도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진 데 놀랍게도, 이 ‘우리’ 속에 여러분 들어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놀랍게도 그게 바로 죄야. 네가 너를 매일같이 소환하는 게 죄야, 라고 지적하는 게 들어올 때 이게 무슨 나라냐? 육신의 나라가 무슨 나라겠습니까? 짐승의 나라죠. 이쪽은 뭡니까? 천국이죠. 양쪽 다 이것을 겸비한 사람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그 본문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에서 38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오늘 강의에서 처음이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일을 왜 당합니까? 그냥 양보하면 되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지요?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말씀이 나오지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일은 내가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옛날 유대교가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그래서 그걸 알고 로마 안티오크스 4세 그 사람이 헬라 사람인데 일부러 유대인 놀린다가 잡아다가 ‘너 돼지고기 먹을래, 살 껍질 하나씩 벗겨나갈래’ 할 때 ‘나는 돼지고기 안 먹고 벗겨지겠다’ 하니까 지독한 자 해서 살갗을 벗기는 고문을 했다는.

‘이래도 돼지고기 안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나 죽음을 받아들일게.’ 이래서 순교자 된 거예요. 이게 외경에 나와요. 마카베오서 외경에 나온다고요. 어떻게 봅니까? 이게 순교자고 믿음 좋은 겁니까? 지금 천주교에서나 외경 인정하는 곳에서는 난리도 아니에요. 오늘날 이런 순교자가 안 나타나느냐? 내가 보기에는 마귀 짓이에요. 돼지고기 먹으면 되잖아요.

죽음은 아버지가 죽여야 돼요. 내가 거둔 죽음은 인정 안 해줍니다, 하늘나라에서. 나 보고 돼지고기 먹으라 하면 먹지요. 네가 예수님 사진 밟을래, 안 그러면 예수님을 부인할래? 나는 밟지요. 내가 사진 밟는 것과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주의 일인데 주의 일을 왜 선교의 흉내를 내고 있어요. 이것은 바로 자기 믿음을 자기가 관리하려 하는 거예요. 자기 추억을 관리하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한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본인이 감당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공산당이 싫어요’ 하다가 공산당 오거든 ‘나 공산당이 좋아요’ 이야기하면 돼요. 그것과 구원받는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강도질하고 천국 가는 것 상관없어요. 그걸 강도가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은 내 속에서 주께서 일으키는 주님 자신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는 그저 뭘 해도 죄인된 것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인 것을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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