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2a 울산강의-역대기상(21강) 18장 6절 : 언약의 사람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8장부 19장, 20장까지 하겠습니다.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 또 모압을 치매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그렇게 돼 있어요. 13절에 보면,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9장에 보면 암몬 자손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과 역시 다윗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장에 암몬 자손, 19장 16절에 보면 아람 사람이 또 이스라엘 앞에서 패합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패하고, 에돔 패하고, 암몬 패하고, 아람 나라까지 패했다. 이것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이게 지중해고 이스라엘 덩어리 있는데 이쪽에 블레셋, 이쪽에 에돔, 이쪽에 모압, 여기 암몬, 여기 아람, 지금 시리아. 모압, 암몬은 지금 요르단. 에돔은 이스라엘, 블레셋 역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렇게 돼 있어요.
다윗이 블레셋 치고, 에돔 치고, 모압 치고, 암몬 치고, 아람 치고. 다윗이 암몬 칠 때 자기가 다윗에 시비 건 것 생각나서 돈 주고 아람 나라 용병과 연합으로 다윗에 대적하려다 둘 다 작살났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역대상 18장에서 20장까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역대상 18장 13절에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왜 이기게 하셨는지 그것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다윗이 이런 나라 한 것은 예선전이에요. 예선전에서 이겼지요. 다윗은 같은 인간들과의 이김을 통해서 다윗은 이긴 자가 돼요. 어떤 이긴 자냐? 인간을 이긴 자가 돼요. 인간을 이긴 자는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 최종 결승전에 나갈 자격이 됩니다. 다윗이 이런 나라 다 이기고 그래서 인간나라에서는 최고 승자로 부각을 시켜놓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과 최종 결승을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18장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종을 삼았다고 돼 있는데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겼잖아요. 다윗이 이겼으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긴 쪽을 영웅시하죠. 진 쪽을 악한 자로 규정하는 법, 전쟁을 해서 이긴 쪽, 진 쪽을 여기다가 법적 가치를 부여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졌다는 것을 악해서 졌다는 말이고, 이겼다는 말은 잘나서 이겼다는 셈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을 다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의 모든 다툼은 그 의미는 법적 범주 안에서의 다툼이 됩니다. 법적 법주, 법리적, 법률적 범주 안에서의 다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한테 이기면 그게 구원이 됩니까, 구원이 되겠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기게 하신 이유는 백날 이기고 다윗이 백날 주변 나라를 처부서도 이거는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내가 누구를 종을 삼았다, 누구를 포로를 삼았다, 누구를 격퇴했다. 집에 누가 도둑이 왔다? 그러면 뭉둥이 들고 격퇴했으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입니까,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아니죠. 집에 모기 있는데 모기 잡았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도둑이 들어왔을 때 격퇴하게 되면 자기가 뿌듯해지지요. 이겼으니까. 이긴 쪽은 영웅이 되고 진 쪽은 악한 자가 됩니다. 이긴 쪽이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살만해도 이겼다, 라는 쪽으로 이게 빠져요. 진 쪽은 죽을 몹쓸 짓을 해서 죽어야 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더구나 이게 싸움이잖아요. 다툼이 싸움이 되잖아요.
싸움이 돼버리면, 이 사람이 몹쓸 짓을 해서 죽어야 했다, 여기에 뭐가 추가 되느냐 하면 내 손으로 죽여야 했다, 이렇게 돼요. 여기 내 손으로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영웅이 되고, 내 손에 죽는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반드시 죽어 마땅한 악한 자가 되는 거예요.
애들이 하는 컴퓨터게임에서 전쟁놀이하고 사람 죽이는 게임 있잖아요. 그 게임 놀이할 때 거기에 깊숙이 빠져들 때 인간에 형성되는 마음가짐이 이런 법적인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내가 이기는 것은 무조건 정당하고 나는 져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고 나를 반대하는 자는 조기에 이 세상에서 죽어 마땅한 악한 자가 된다는 의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붙기 전에 하나님과 대결하기 전의 예선전이에요. “인간 대표 나와!” 그 대표자 뽑는 예선전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승자가 됐거든요. 승자란 뭔 뜻이라 했습니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야 될 자로 등장된 거예요. 그 다윗과 하나님과 최종 결승전을 붙습니다.
결승전 붙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월급 받고 떵떵거리고 살아도 그게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 살아서 돈 잘 벌어서 그렇게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가난하면 구원됩니까? 가난해도 구원이 안 돼요. 이래도 구원 안 되고 저래도 구원 안 돼요. 구원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본인이 교회 40년 오래 다녔다고 구원될 것이라고 본인을 속이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거 교회 다녔지 구원된 게 아니에요. 애 잘 키우고 돈 벌었지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구원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겁니다.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그리고 그걸 대표해서 다윗이 오늘 본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다윗은 이겼다, 근데 다윗은 구원은 안 됐다. 다윗은 모든 주변나라를 다 이겼어요. 주변나라를 다 이긴 다윗이 구원이 안 된다면 다른 나라, 블레셋, 에돔, 모압, 아람 나라는 역시 구원이 안 돼요. 인간 나라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 나라를 다 이기고 삼킨 다윗이 구원이 안 된다면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이방민족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경은 인간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거예요. 강의 여기서 끝내야 돼, 끝내버려야 돼요.
그래서 뭐가 돼요? 구원이 왜 불가합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되묻지요. “너, 그러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로 폴짝 뛴다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거는 교회가 사기를 쳐서 그래요. 땅에서 살아봤다 땅에서 살다 땅에서 흙이 되는 거예요. 무슨 하늘로 가요. 언감생심, 바랄 걸 바라야지.
거울을 보세요. 본인이 구원될 사람인지. 내가 구원될 상인가? 아니에요, 구원될 상 아니에요.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은 없습니다. 인생 살만큼 살다가 그냥 공동묘지에 화장터에 가는 거예요. 끝이에요. 게임오버,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 봐도 구원이 안 되는 게 뻔한 데 무슨 억지를 부립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안 된다잖아 안 된다잖아, 안 돼.
“안 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구원됩니까?” “너 좀 맞아야 되겠다. 맞아야 말 통하지.” 구원이 안 된다는 데 무슨 구원을 어떻게 해달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남한테 이기고 잘 살면 승리자고, 가난하면 패배자고 그렇게 승자, 패자 가다가 둘 다 죽는 거죠. 여기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왜 인간은 구원이 불가능하냐?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승리와 자기의 살아남에 대해서 법적인 의미와 엮여져있기 때문에 법구조라는 밀림 속에 완전히 옴짝달싹 못하게 촘촘하게 법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관계가 없어요. 모든 게 법적인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법률사무소 상담해서 “변호사님,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 당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으면 변호사가, “반소하세요.” 반대로 고소하라 이 말 아닙니까. 내세우는 모든 대책이 전부 다 법적이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것 알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어 헤어져야 되는데 꼭 이혼해야 됩니까? 어떻게 합니까?” “상관녀한테 고소하면 천오백 받습니다.” 이 뭔 이야기에요? 법적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가정은 뭐였다? 꼭 일이 터져야 법이 나옵니까? 가정은 평소에 뭐로 엮여져있습니까? 법적 관계로 엮여져있다는 것이 헤어질 때 숨어있는 관련성이 연관성이 그제야 티를 내는 거예요.
형제가 자식이 둘, 세 명 됐을 때에 애 하나는 공부 잘해서 미국 가 있고, 둘째도 공부 잘해서 싱가포르 가 있고 늙은 부모는 한국에서 누나가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미국에 있는 싱가포르에 있는 동생들에게 “아버지 돌아가셨다. 빨리 오너라.” 가보니까 형제들이 몰랐던 사실, 아버지가 10억짜리 보험과 함께 숨겨놓은 50억짜리 빌딩이 있었다. 그렇게 될 때 형제우애는 좋아질 수 있습니까?
누나가 말하기를 “너희들 외국에 나가있을 때 병든 부모님 내가 다 건사하고 케어했다. 법적으로 친히 봉양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지분이 주어지는 게 보장돼 있어요. 따라서 빌딩과 보험은 내가 챙긴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그 동생 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형님, 그건 아니지요.” 나오지요. 아버지가 유산 없고 돌아가면 그렇게 친하고 사이좋든 그 형제간에 아버지가 재산과 유산을 남기는 순간 그때는 무슨 관계에 들어갑니까? 법적인 관계에 들어가요.
법적인 관계에 대해서 그 부모의 재산에 대해서 자기 지분을 얻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살아남기 위해서, 에요. “누나만 잘 사냐? 나도 넉넉하게 좀 살자. 요새 싱가포르 물가 비싸서 못 살겠다. 아버지 유산 나눠서 나도 같이 넉넉하게 살자.” 누나가 하는 말이, “네가 왜 살려고 하는데?” 살아남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 의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튼튼하고 건강하고 여유롭게 살아남는 것이 인간세계 법적인 세계에서는 영웅이 되는 거예요.
가난하고 병들면 이 인간세계에선 뭐가 돼요? 패배자가 돼요. 패배자는 뭐로 취급된다? 악한 자로 취급돼요. “너 같은 인간은 굶어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굶어죽게 하는 거다.” 악한 자로 규정된다고. 가난한 자는 악한 자, 부한 자는 의로운 자, 정당한 자, 영웅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형제 다섯 명 가운데서 누구 하나 사회적으로 유명인사 되면 그 부모들이 다른 형제들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 뛰어난 형제를 부모가, “내가 너 하나 낳은 것, 그것 하나 잘했다.” 해서 붕붕 막 띄우지요. “말년에 내가 네 덕을 보는구나. 난 네가 될 줄 알았어. 될 놈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내가 알아봤어.” 이렇게 형제 다섯 명 가운데 유독 유명한 돈 잘 버는 걔만 붕붕 띄운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의롭다, 악하다를 인간세계에서는 힘 있다, 힘 없다로 이미 규정을 하고 그런 법적인 범주를 형성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 법적인 촘촘한 관련성이 있는 자는 구원받은 수가 없습니다. 그 세계 속에 들어가고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법적으로 꽁꽁 묶여있는 데 그런 법적인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으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질 않아요. 구원을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법은 인간에게 억압을 주지만 인간에게 또 뭐도 주느냐 하면 보상을 줘요. 그래서 법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힘들어도 법대로 살려는 이유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게 있기 때문에 역경과 어려움을 겪어내어서 그 보상을 실제적으로 오래 건강하고 여유롭게 부자 되어 살아남는 걸 보상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영웅, 어려운 가운데서도 승자가 돼버리면 그 자체로 자기한테 보상이 되고 자기가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본다. 이 체계가 뭐냐? 법적 체계에요. 법률적 체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은 단란한 가정이라 하는데 세상에 단란한 가정은 없습니다. 어떤 가정도 단란한 가정은 없어요. 법적으로 법이 있기 때문에 그냥 참고 견디는 거예요. 단란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법적으로 내심 아주 힘들게 참는 거예요. 조금만 계기가 탁 핀이 빠져버리면 수류탄 같아. 이참에 우리 갈라서자.
디모데전서에 보면 감독자들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린다고 돼 있지요. 그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게 가정 자체가 단란해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법적인 구조는 날아가 버리고 그 가정의 구성원들이 복음적 구조로 대체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법적인 보상을 원하고 그 보상은 어디로 돌아온다?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승리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거는 공식처럼 명심을 해야 될 문구를 제가 적겠습니다. 이거는 명심 안 해도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꼭 외울 필요 없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이 또는 이 사태가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모든 인간세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심지어 부모자식, 가족, 남편아내 할 것 없이 모든 교인들, 교우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오직 이 하나밖에 없어요.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듣는 사람은 그냥 안 들어요. 속으로 “목사님, 이 복음 알면 나한테 무슨 이익 옵니까?” 도대체 왜 이익을 자꾸 계산하지요? 달리 하면 물어보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꾸만 계산하는가? 여러분 계산하는 인간이 천국 갑니까? 천국에 불가능해요. 천국에 불가능해도 인간은 자꾸 계산만 해요. 천국은 가고 싶은데 나는 계산하는 인간, 항상 건드리면 뭔가 말이든 행동이든 스쳐지나가든 무슨 일이 주어지게 되면 제일 먼저 나서서 보여주는 반응이 뭐냐? 이 일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당신과 만남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당신을 남편으로, 당신은 아내로 맞이했을 때 도대체 그다음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 그게 계산이죠. 한 30년 살았습니까? 계산해요. 당신과 30년 살아서 나한테 이익이 계산해보니 얼마 나오는지 보자 이거에요. 왜 계산하지요? 왜 이익이냐 이것부터 먼저 자기가 자기한테 그걸 걸 왜 묻습니까, 묻는 이유가 뭐죠? 복음이고 성경이고 말씀이고 다 핑계에요. 그건 다 가식이고 진짜로 우리 안에 흐르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내가 승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승자가 되면 그건 내가 이익 본 거고, 계산해서 별로 손해 봤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역대상 18장에 다윗이 블레셋을 이겼지요. 그 뒤에 에돔을 이기고, 모압을 이기고, 암몬을 이기고, 그다음에 아람을 이기고, 이기고 할 때에 13절에,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왜 다윗을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는가? 최종적으로 전체를 다 이긴 다윗, 세상을 이겼지요. 그러나 다윗은 구원은 불가능해요. 그 최종적으로 이긴 그 다윗과 하나님 나랑 결전의 마지막 싸움을 붙자.
그래서 다윗의 임무는 뭐냐 하면 인간은 왜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냐, 그걸 보여주는 의무와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신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이기는 자가 영웅이 되는 세계기 때문에. 그래서 이 땅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이길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이길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이 땅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살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켜요. 공부를 하면 무식에서 유식으로 바뀌겠지요. 유식으로 바뀌면 이 땅에서 이길 자격을 획득한 게 되고, 이길 자격이 있는 자만이 살게 된 것이 이 세대의 이 세상의 정의에요. justice 이게 공정입니다, 정의입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활동과 조직의 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체계, 그런 범주의 세계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다윗은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이겼다. 이겼는데 전쟁에 이겼으니까 이긴 자에요. 전쟁에 이긴 자입니다. 전쟁에 이긴 자와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구원에 관계도 없고 구원되지도 못할 짓을 다윗은 왜 평생 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영웅이 된다고 해서 그게 구원이 되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시범자로 다윗이 뽑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걸 이겼는데 결국 다윗은 누구와 패배하느냐? 주님한테 패배하고 그것은 곧 주님과의 결별을 의미하고 그래서 다윗은 이 땅에서 영웅이 되고 이긴 자인데 구원되지 못한 자로 하나님 앞에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그런 역할까지 다윗이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란 그거에요. 이스라엘 역사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법에서 나온 것은 법이다. 여기다 육에다 하나 더 집어넣읍시다.
육에서 나와서 할 줄 아는 것은 육적인 일, 살아남는 것, 계산하는 것, 나한테 무슨 이익이 오느냐, 그것 하는 것 육에서 나와서 육의 방식으로 살다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나 더 집어넣으면,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갔다가 도로 어디로 옵니까? 육으로 오지요.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 말은 기어이 나는 이 땅에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승자가 되어야 된다. 그걸 어디서 가져오느냐? 법에서 와서 할 줄 아는 게 법적인 조치, 법적인 생각에서 마지막 어디로 가겠어요? 법에서 와서 법으로 가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번에 갈라디아서 합니다, 수련회. 3장에 보면 법아래 있는 자는 어떤 자이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저주 아래 있는 자다. 그러니까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지요.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일이 났더라도 이 일 뒤에 나한테 돌아오는 콩고물은 이득은 어떤 것을 자꾸 계산만 하는 이러한 나는 나 이퀄 곧 뭐냐? 저주 덩어리.
더 축소하면, 나는 곧 저주다. 이 저주, 박 저주, 최 저주, 김 저주. 나는 곧 저주에요. 저주가 저주 값을 하면서 칠십이고 팔십이고 살아가는 거예요.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하면 대번에 나오는 게 참석해서 나한테 이익이 뭔데? 계산합니다.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참석하면 하나님이 복 주나?
성경공부를 하고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출발 자체가 육이고, 육이니까 마지막 어디로 돌아가느냐? 본인에게로 돌아가요. 천국이고 구원이고 관심도 없고 내가 이 땅에서 내가 너한테 이겼잖아. 이겼다는 쾌감과 정복감 다윗처럼. 그 정복감에 도취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18장 13절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다윗도 이기게 하잖아요.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는데요. 우리 애가 공부 잘했어요. 그래 애 공부 잘한 것과 자기 구원받는 것과 자기 애 구원받는 것과 관계있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이런 내가 생각하고 사고방식과 모든 행동은 전혀 모든 게 구원 안 되려고 환장한 행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구원에 불가능한 태도만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모든 게 주변이 법적인 의미로 체계화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저주 아래 있다고, 이왕 말 나온 김에 내가 알기론 갈라디아서 3장 10절인데 요즘 맞는 게 없잖아요. 이건 맞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율법을 대하면서 자기가 바로 하고 싶어도 내 죄가 우세한 것을 보이는 걸 통해서 자기가 율법 아래서 화로다, 내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저주 아래 있는데 무슨 복을 기대합니까? 저주 아래 있어야지요. 그건 당연한 거거든요. 주께선 모든 일을 당연하게 처리해요. 저주 아래 있기에 그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이겼다,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역대상 19장에 보면 거기서 암몬 자손과 전쟁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근데 사무엘하 이 대목에서, 역대상 19장에서 암몬과 전쟁하게 된 경우가 암몬 쪽에서 오해를 해서 그래요. 아버지 죽었다고 조문 보냈더니만 스파이 보냈다고 해서 그 외교사절을 아주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다윗의 화를 돋우어서 어쩔 수 없이 다윗이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게 됐어요.
여러분 번거롭겠지만 사무엘하 보겠습니다. 방금 역대상 19장 1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사무엘하 10장 1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해서 다윗이 좋게 좋은 손을 내밀었는데 오해해서 다윗이 보낸 외교사절을 볼기짝을 자르고 해서 수치스럽게 치욕을 안겨서 돌려보내고 그래서 전쟁하는 이야기에요.
역대상에서는 나중에 19장에서 요압이 암몬 자손을 이겼다고 돼 있지만 19장, 20장에 그렇게 돼 있지만 사무엘하 11장에 이렇게 돼 있어요. 중요합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1절)
그러니까 전쟁 중에 있어요. 전쟁 중에 있는데 계속 다윗 쪽이 승리를 해요. 그러면 인간들 보기에는 이 전쟁에 대해선 다윗이 승리자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을 수 있는데 그다음에 2절에,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사무엘하 11장 2절. 지금 다윗은 여유만만해요. 요압이 전쟁을 잘해서. 그런데 저녁때에 보니까 저 아래쪽에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데 너무 아리따워 보여서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과 함께 동침을 했습니다.
자, 지금 이 사무엘하 11장 이 대목, 한쪽은 전쟁 중인데 전쟁에 승리하는 것과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다윗은 승리자지 구원된 자는 아니에요. 요새 말로 하면 다윗은 부자에요. 하지만 구원된 건 아니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 가난한 자나 부자나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조리 다 구원에 불가능합니다. 구원이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뭘 보이느냐 하면 불가능한 것이 다윗을 통해서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다윗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보디빌딩 하는 사람들 체육관에 이런 운동기구가 있어요. 손으로 무거운 쇳덩어리를 드는 거예요. 캐틀 벨Kettlebell. 캐틀 벨이 지 혼자 방방 뜁니까? 무거운 쇠인데 안 뛰지요. 캐틀 벨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여기에 누가 와서 손으로 이걸 들어줘야 돼요. 손잡이를 들어줘야 돼요. 이게 바로 매개체, 이게 매개자에요. 불가능한 쇠가 위아래로 내려올 수 있다는 이 쇠와 매개자의 손이 연결돼야 돼요. 결합돼야 돼요. 매개자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쪽은 철저하게 뭐냐 하면 구원 불가능함이 도드라지게 등장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도 이 캐틀 벨이 알아서 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런 경우 있으면 안 돼요.
지금 인간세계에서는 다윗이 주변나라를 이겼어요. 하나님이 이기게 해줬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윗을 생각할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대단해요, 영웅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교회도 나오고 장로인데 한 달 수입이 오억이고 너무너무 잘 살아. 사람들은 그 사람보고 뭐라 합니까? 복 받았다, 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자도 지금 구원에 불가능하고 그 부자 장로도 구원에 불가능해요.
다른 걸 봐야 돼요. 넉넉하게 산다고 해서 복 받은 게 아니에요. 복은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성, 구원에 대한 불가능성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게 복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무식한 자는 이길 자격이 없고, 이길 자격이 없는 자는 살 자격도 없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살 자격 없고 무식하다 이 사람들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불가능성을 습득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사람대우 못 받아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주 받게 하는 합당한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라고 받아주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강도질해서 마지막 십자가라는 처형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내리는 정당한 조치를 저에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 눈에 뭐가 보이느냐? 옆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다가오는 거예요.
왜? 내 법적인 체제, 법적인 의미가 이제는 거덜 났거든요. 내 법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제는 기댈 게 전혀 없음을 아무리 계속하고 나의 이익은 뭐냐, 백날 해도 법적으로 너는 더 이상 챙길 게 없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 “저분은 의인인데 왜 우리처럼 죄인도 아니고 의인인 분이 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지? 맞다, 그거구나.”
주께서 이야기하시는 대신,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께 부여받은 그 일이 불가능한 것을 들어 올리는 중보자, 매개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것이 눈에 싹 들어오지요. 눈에 들어오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나는 절대로 구원될 생각도 없고 구원되어서도 안 되고 천국 가서도 안 되고 난 지옥 마땅한 존재란 것을 이게 기쁨으로 확 느껴져요.
비로소 그 강도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동시에 천국 갈 길도 알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알았던 거예요. 나는 내 계산할 가치도 없는 존재, 나는 이미 하나님과 단절돼 있다. 단절돼 있으니까 중보자가 와서 캐틀 벨을 잡아당기듯이 주께서 잡아당길 때만 비로소 나는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강도가 이야기했어요. 땡겨주이소.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땡겨주이소. 오천 땡기라, 그런 것 말고 그냥 땡겨달라는 거예요.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지? 강도 주체에. 네가 니 땡겨줄게.” 그래서 구원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합니다, 백날 외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요. 그거는 하나의 이렇게 하면 일종의 꼼수거든요. 저의 겸손함을 봐주시옵소서,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꼼수엔 주껜 통하지도 않아요. 꼼수 쓰고 금식하고 낮추고 하는 것, 그것 또 계산하는 거예요. 이런 기도가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올까? 법적인 의미.
사무엘하 11장에 다윗은 제3의 인물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왕이죠. 밧세바는 왕은 아니에요. 신하 부인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튼 왕은 자기밖에 없어요. 그리고 자기는 승자입니다. 최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승자는 다윗이에요. 왕이에요. 왕이라서 밧세바가 어떤 여자든 관계없어요. 왕이 지시하고 명령하게 되면 무조건 밧세바는 여기에 순복해야 돼요.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다윗은 다윗과 밧세바의 2자 관계, 두 사람의 관계 그것을 생각해서 나는 너보다 승자고 나는 너보다 높은 자인 것을 인식합니다. 나는 더 오래 살아야 되고 나는 더 정당해야 되고 나는 항상 의로워야 된다는 것을 밧세바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은 어디로 들어옵니까? 법을 실시하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게 어디로 들어와요? 법으로 들어오지요.
아까 제가 했지요. 법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나는 기어이 뭐가 된다? 기어이 승자가 돼야 된다. 오직 이 일념 외에는 다른 일념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지금은 어렵게 살아도 이 일념만큼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합니다. 어디 버릴 수가 없어요. 딱 들어붙어 뗄 수가 없어요.
누가 막 때리면 “너는 이렇게 얻어맞으니까 패자잖아.” “아니야. 나는 맞으면서도 때리는 네 주먹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는 나는 도인 같은 마음이 점점 더 생기는 걸.” 이런 쓸데없는 이야길 왜 합니까? 비록 육체적으론 약하지만 정신적으론 이겨보려는 그런 심보잖아요. 그걸 계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부부사이든 가정사이든 모든 인간은 모든 의미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단독자들이고 개인플레이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모든 현실의 최종 승리자가 자기가 될 것이라는 그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겁니다.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 1931)라는 영화에 보면 어떤 눈먼 소녀가 힘들게 살 때 그걸 불쌍히 봤던 뜨내기 머슴아가 지가 힘들 게 힘들게 돈 모아서 소경이 구걸하는데 가서 조금씩 도와줘요.
부자가 아니니까 조금씩 도와주고 하는데 어느 날에는 진짜 목돈이 생겨서 그 소녀에게 줬고, 그 소년은 왜 돈을 주느냐 하면 수술만 하면 눈 뜰 수 있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서 수술 못해서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 소녀가 아무것도 보이질 않을 때 돈을 쥐어주는 거예요. 그 돈 모아서 소녀가 수술해서 눈을 떴어요. 그런데 그동안에 부자 돈 훔쳤다는 오해를 받아서 뜨내기 소년은 교도소 가버렸어요. 그동안에 소녀는 수술하고 번 돈으로 꽃집을 세웠단 말이죠.
눈을 뜨니까 소녀가 나한테 이렇게 눈 뜨게 도와줬던 그분은 분명히 익명의 자비심 많은 부자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부자께서 이제는 눈 떴으니까 날 찾아와서 만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풀려나와서 찾아보니까 소녀가 이제는 말짱히 눈 떠서 아담한 꽃집해서 잘 먹고 잘 살거든요.
차마 말은 못하고 있는데 소년이, “당신이 잘 된 것 보니 기쁩니다. 악수나 합시다.” 그러니까 소녀가, “어디 뜨내기가 허름한 게 나한테 어딜 악수를 청해.” 그래도 소원이니까 악수나 해보자. 악수하는 순간 전에 눈 감았을 때 있던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돈 줬던 그 돈의 감촉이 살아나잖아요. 그때 소녀가 하는 말이, “당신이 그 사람이었어요?”
차라리 눈이 감았으면 차라리 소경 되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어요. 소경이 눈을 뜨니까 환상을 하는 거예요. 어떤 부자가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요. 인간은 눈 떴으니까 도로 눈 감으세요. 그리고 내가 아무 능력 없고 나는 눈 뜰 수 없는 구원에 불가능 자에게 주께서 나에게 찾아와서 구원을 해줬을 때 우리는 바로 당신이군요, 나를 소경으로 간주해주신 유일한 분, 나로 하여금 무능한 자로 유일하게 간주해주신 분, 나로 죄인 중의 괴수요, 천하의 강도로 인정하시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10분 쉽시다.
20230602b 울산강의-역대기상(21강) 18장 6절 : 언약의 사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겼던 다윗, 맞아요. 표면상으론 이겼습니다. 그리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지금 이기고 있는 중입니다. 요압이 전쟁을 잘하거든요. 전쟁을 잘한다, 똑똑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똑똑하지 못한 자들은 굴복 당한다. 그래서 요압에 속한 이스라엘은 승자가 되고 다른 나라는 패자가 된다. 법적으로 보는 인간세계 안목은 그것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서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산다. 그것까지입니다.
그것의 최고 자리에 앉았던 자가 누구냐? 다윗이죠. 다윗은 느긋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으니까.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후 결전,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갖고 있었던 법적인 체제는 구원에 아무짝도 소용없었고요 도리어 방해가 된 거예요. 그것이 사무엘하 11장, 12장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요. 나단 선지자가 누굴 공격하는가?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은 최고자에요. 모든 걸 이기게 해서 승자에요. 자기를 더 이상 공격할 어떤 위인이 없습니다. 인간의 포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유일한 소망은 뭐냐? 자기가 최고의 자리에 앉는 거예요. 어떤 것도 자기 적수가 되지 않는 상태, 인간은 비록 자기 처지가 어떻든 그건 고려하지 않고 어쨌든 간에 저 높은 곳을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야심이란 그래요.
그런데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은 당연히 방어하지요. 임금님, 어떤 사람이 자기는 양떼가 많은데 양이 하나밖에 없는 종이 있었는데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자기는 부자고 종은 가난한데 자기의 많은 양은 놔두고 하나밖에 없는 그 양을 잡아다가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런 인간에 어떤 조치를 내리시겠습니까? 이스라엘 왕으로서 조치를 내려 보세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악한 자가 있다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했어요.
자, 첫째 시간에 공부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승자가 된다는 것, 승자는 마땅히 살 자에요. 마땅히 산다는 것은 마땅히 의로워야 돼요. 마땅히 의로운 자에요. 승자는 마땅히 살고 마땅히 의로운 자에요. 그러나 승자가 승자되기 위해서 반드시 승자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에 패자가 있어줘야 돼요. 패자는 마땅히 뭐가 되겠어요? 반대니까 마땅히 죽을 자고 마땅히 죄인이어야 되고 살려두면 안 되는 거예요.
이 승자와 패자의 구조가 어느 구조라 했습니까? 율법, 법의 구조에요. 법의 범위 안에 들어있을 때 반드시 나오는 인간의 의식이고 사고방식이 이겁니다. 잘된 자는 잘될 만해서 잘됐고, 못한 자는 마땅하게 비리비리해서 죽어 마땅해서 그만큼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거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승자는 동시에 의인이라는 그런 호칭까지 얻게 되고, 패자는 가난 플러스 가난해서 가난할 만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이걸 뒤바꿉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부자가 가난한 자를 이렇게 학대했습니다. 하니까 임금이 그 부자를 마땅히 죽여 버려야 된다, 라고 여기서 다윗을 투입시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이 말한 율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법이에요. 하나님의 법, 다시 말해서 인간 대 인간의 2인 관계, 2자 관계, 두 사람의 관계에서 율법은 제3자 관계로 형성하는 것이 우리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기능이다, 역할이다, 위치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알고 있었어요.
마치 교회 좀 다닌 사람이 하나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 있는지 아는 것처럼, 중보자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중보자, 예수님, 십자가, 나 예수님 좋아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는 받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자기 위치가 어느 위치입니까? 자기 내부 안에 그런 고백을 할 때 자기가 어느 위치에 마땅히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땅히 구원돼야 되고, 마땅히 승자가 되고, 마땅히 의로워야 된다는 그런 의식을 지니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개념들을 자기한테 다 끌어당기는 거예요.
우리는 부족해서 천국 못가지만 주님이 중보자 되셔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시비 거는 거예요. “너 누구야? 네가 너를 알고 있어?” “나는 마땅히 구원될 자지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해? 누가 마음대로 그렇게 생각해? 네가 마땅히 구원될 자란 걸 누가 이야기하던데?” 그건 내가 이야기하죠. 인간은 내가 그런 마음 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다윗을 뭐로 바꾸느냐? 다윗언약으로 바꿔요. 다윗은 다윗언약으로 바꿔집니다. 여기서 다윗₁과 다윗₂가 결별해야 돼요. 헤어져야 돼요. 내가 나하고 자아가 자아와 나와 나가 헤어져야 돼요. 갈라서야 돼요. 법의 구조, 법의 범위 안에 있던 나와 새로운 나가 갈라서야 된다고요. 십자가 강도는 법적으로 마땅히 강도질했으니까 죽어 마땅하지요. 거기서 구원되려고 하면 안 돼요.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면 이제부터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런 짓하면 안 돼요. 강도 짓했으니까 마땅히 죽어야 되고 죄 지었으면 저주받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주어지냐? 언약이 주어져요. 그다음에 다윗이 어디로 갑니까? 다윗 홀로 있다가 다윗언약으로 나아가야 된다고요. 여러분, 명절에 동그랑땡 하잖아요. 동그랑땡 그냥 만듭니까, 계란으로 피 막 입힙니까? 전 구울 때. 다진 고기에 밀가루 입히고 동그랑땡에다 계란을 입혀줘야 이게 맛이 나잖아요.
다윗이란 그 죄인, 여기에서 주님의 다윗 때문에 희생된 자, 우리야 장군의 피막을 발라버리면 다윗은 자기로 인하여 자기 죄로 인하여 희생과 만남이 이뤄지는 겁니다. 나와 희생의 만남이 그게 언약이 돼요. 무슨 언약? 다윗언약이 된다고요. 전에 어떤 강의나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노아 홍수 일어났을 때 노아 살던 가옥과 전토에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들어왔지요. 이 말은 노아 너도 마찬가지에요. 너도 물에 잠겨야 될 인물이에요.
그러면 노아도 마찬가지로 심판 속에 있는데 노아 역할은 뭐냐? 우리가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임무 때문에 방주 안에 있는 거예요. 그 방주가 신약에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 성령 안.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주께서 캡슐로 계란 막으로 동그랑땡을 휩싸듯이 휘둘러버린 거예요. 이것을 예수의 증인이라 해요.
예수의 증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돼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돼요. 혼자 까불락 대고 예수 믿고 소용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돼요. 혼자 구원받겠다는 것은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다윗이 율법 거론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나라에 그런 못된 사람이 있어? 그거는 용서 못하지.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이렇게 하니까 거기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17절에,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내가 그 인간 잡아 족치지. 내 눈 뜨고는 그 인간 도저히 용납 못한다. 당신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체포하세요, 범인으로. 체포하고 당신은 당신과 결별하세요. 승리하기 때문에 의롭기 때문에 내가 구원돼야 된다는 그 발상 버리세요. 당신은 율법 안에서 저주받는 사람이었지 당신은 율법덩어리였지 저주덩어리였지 결코 구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손잡이 와서 캐틀 벨을 쥐어야 돼요.
다윗에게 누가 왔는가? 이거는 2자 관계, 다윗과 밧세바, 아랫사람 밧세바와의 관계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우리야 장군, 밧세바의 남편이 끼어들었어요. 남편이 여기 끼어든다는 것은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고 확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타인이 통해서 우쭐대고 싶은 것이 인간의 타고난 품성인데 그 우쭐대는 것을 주께서 우쭐대게 허락을 해요. 평생 육신이 있는 한.
우쭐대고 싶은데 우쭐대는 그걸로 인하여 오히려 나의 높아짐을 인하여 낮아지신 분을 서로 가는 쪽이 다른 차이를 느끼면서 발견케 하는 거예요. 나는 높아지는 이것이 구원 불가능성이고, 낮아진 주님을 주께서 부활시켰다는 것은 저렇게 낮아질 때 이것이 바로 구원으로 가는 쪽이 저쪽이구나. 높아지는 쪽이 구원 쪽이 아니고 낮아지는 쪽이 바로 천국이 거기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에 있었던 거예요.
다윗은 자기 손으로 우리야 장군을 죽였습니다. 이로서 우리야 장군과 본인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쉽게 말해서 우리야 장군의 피가 다윗을 선택하고 다윗에게 찾아든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가 우리를 지목하고 우리에게 터치한 거예요. 우리를 잡아챈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래서 성도는 오직 피만 쳐다보고 사는 거예요. 주님과의 떨어진 그 단결된 관계에서 피만 연결돼 있으니까요. 마치 동방박사가 별 찾아왔지요. 별 보고 왔잖아요. 딴 거 안 봤어요. 우크라이나 전쟁 그런 것 신경 안 썼어요. 오직 별만 보고 찾아왔다고요.
그 별만 보고 찾아온 거기 동방박사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왜? 헤롯 왕이 동방박사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동방박사는 자기가 죽는 자리인지 어떤지 모르고 또 그런 것 알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내가 죽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오는 거예요. 별 따라 주님만 찾아온 거예요. 지금 누가 날 수배령을 내렸는지 그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가는 거예요. 왜?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요. 최종 승리가 나한테 와야 된다는 그 따위도 신경 쓰지 않아요.
인간은 법으로 해서 법으로 말미암아 법으로 돌아가고, 그 앞에 뭐라 했습니까? 육이라 했지요. 육은 육 같은 행동을 하고 육으로 돌아오죠. 그 육의 행동이 뭡니까? 항상 뭘 해도 나한테 돌아올 이익이 무엇이냐, 늘 계산하는 이런 속성을 유감없이 감출 길이 없어. 그냥 가족관계라도 튀어나와요. 참 오죽 했으면 이런 말씀 했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제가 왜 가족 이야기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0장 35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께서 왜 굳이 이 말씀하시느냐 하면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이요 그 인간의 육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집안이란 상황 속에서 인간의 육이 단결돼 있어요. 참 이거 시간이 가더라도 우리의 육의 구조를 제가 지금부터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모 밑에서 인간은 땡땡하게 자아를 형성합니다. 이 자아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물들이 뭐냐 하면 부모형제의 따가운 시선이에요. 이걸 언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언어의 반응하는 신체를 갖게 됩니다. 언어에 반응하는 신체.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어도 누가 옆에서 밥 먹는 걸 쳐다보면 갑자기 신체가 반응을 나타내요. 누구의 시선에 반응을 나타내서 동일한 영양소를 먹어도 야위어가요. 바짝바짝 에벼갑니다. 15년 동안 군만두 먹은 사람, 살졌겠어요? “누구야 너?” <올드보이> 영화에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을 때에 그게 맛있겠어요? 누가 줬는지, 그러니까 군만두를 보는 게 아니고 누가를 의식하면서 군만두를 보는 거예요.
인간은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줬느냐? 누구와 함께 밥 먹고 식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왜? 어릴 때부터 육신이 신체가 그런 식으로 반응과 발작을 드러내는 신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으로 신체를 파악해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과학은 눈물의 화학식은 밝혀내도 왜 저 드라마 보고 찔찔 짜기는 왜 짜느냐 말이죠. 실제로 저거 가족은 울지도 않으면서. 드라마 나오는 것 보면 감정이입 해서 폭포수처럼 우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몸은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른이 되더라도 어릴 때 그 감정에서 한없이 마음 터놓고 울고 웃고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해요. 그것이 인간의 신체 내부에 정보화돼 있는 겁니다. 각인돼 있는 거예요. 자아가 따가운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나중에 한 45세 되어 어디 카페에서 누굴 만난다. 누굴 만날 때 누가 봐도 그 사람은 한 사람이고, 저 사람도 한 사람 만나고 이렇게 돼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눈에 점선에 보이지 않는 온 식구들 대동하고 만나는 거예요. 저쪽 사람은? 저쪽에 살아오면서 만났던 친구와 친척, 가족들 온 식구 대동하고 만나는 거예요. 집안과 집안의 배틀이에요. 그냥 누가 봐도 사진 찍어보세요. 혼자 일 대 일이죠.
여기 가까운 식구만 해도 형제간이 여덟 식구가 되고 삼촌까지 합해서 20명이라면 이쪽은 단출해서 세 명밖에 없어. 이야기해보세요. 20명과 살아왔던 그 이야기들 털어놓지요. 이쪽에는 달랑 세 명 살면서 털어놓을 게 없잖아요. 한쪽은 엄매 기 살아, 이쪽은 엄매 기죽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럴 때 우린 이 사람의 내부 마음을 들여다보자.
이쪽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 많은 사람들, 그림이 좀 흉측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가족이 많은 사람들은 애가 커나가면서 자아가 커나가면서 외부적인 정보 같은 게 오잖아요. 새로운 지식이라든지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꾸 플러스, 혹처럼 불어날 때에 부모가 “그거 마약이야 하면 안 돼. 술 하면 안 돼. 옳지 좋은 친구, 공부 잘하는 친구는 사귀어야 돼.”라고 조정을 해주니까 이게 불룩불룩 튀어나오다가 대패처럼 이걸 밀어줘요.
밀어줘서 우리 집안에서 선망하는 우리 집안 기대하는 하나의 일원, 집안의 일원으로서 다듬어지는 거죠. 다듬어지니까 이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일을 만났을 때는 잘 다듬어진 걸로 자기 뜻이 아니고 자기 집안의 후원을 받으니까 잘 대처가 돼요. 그런데 집안 식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정보는 받아요.
이걸 구획별로 나눈다면 현재 내가 어릴 때 이랬었는데 A라는 정보도 받고, B라는 정보도 받고, C라는 정보도 받고, D라는 정보도 받는데 누가 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게 중간에 무슨 뜻인지 의문표가 일어나는 거예요. 여기 C 있고 D가 있고 여기 또 E가 있고, 의문표 있고. 의문표가 있으니까 나중에 의문표 모르니까 지워지는 거예요.
지워지게 되면 모습이 어떠냐 하면 흉측해요. 이거는 가족이 많으면 땡글땡글하죠. 이거는 정서적으로 찢어져요. 이렇게 안정감이 없는 거예요. 이 빈자리는 빈자리 채워야 동그랗게 되는데 빈자리가 허전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과도한 방어, 방어력, 대항력을 갖고 돼요. 그러니까 뭡니까? 인생을 심각하게 자기 인생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봐요. 이쪽은 뭡니까? 어떻게 돌아가도 편안해요. 누가 만나도 싱글벙글 감사하고. 이쪽은 저 사람이 나를 해코지할까 심각하지요.
인생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것은 지금 그 사람은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요. 빈자리를 놔두지 않고 메우잖아요.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면 메우는 것이 다 증발하고 없어요. 다시 울퉁불퉁하게 돼요. 이쪽은 땡글땡글하게 돼서,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둘 다 구원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쪽은 화목하게 지옥 가고, 저건 찢어진 채 지옥 가는 것뿐이에요.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너의 원수가 누구다? 집안 식구니라. 보세요. 이렇게 화목하고 단란하고 땡땡한 게 이런 가정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무능하고 아무 쓸모짝 없고 천하 죄인인 것을 본인이 자각하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마냥 행복한데요? 다윗이 마냥 행복해요. 못하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용납되고 허락되는 자기 세계에요.
주님께서는 다윗을 찢어버립니다. 그게 뭐냐? 다윗과 언약의 만남 또는 다윗과 다윗언약의 만남. 그걸 구체적으로 다윗과 하나님과의 만남. 다윗이 아는 하나님,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나를 건드리는 하나님, 나를 찢어버리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었어요. 내가 승자, 내가 패배자가 아니고 승자가 되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고, 남의 모범이 되고. 모범 되는 나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말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여기 제가 ‘모범’ 썼잖아요. 모범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범적인 인간, 이것 주님이 용납 안 합니다. 훌륭한 인간, 용납 안 해요. 남한테 칭찬받는 인간, 용납 안 합니다. 수요일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 맞아죽었는데 그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그 맞아죽은 하나님 앞에서 어디 지 자랑하고 있어요. 지금 엉뚱한 하나님 찾고 있는 거예요.
탱글탱글하게 화사하게 웃고 늘 안정적인 정서적으로 안정된 마음을 가진 것, 그것과 구원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건 어릴 때 그런 가정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늘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어려울 때 찾아와. 다 도와줄게. 모든 걸 도와주고. 애 낳았나? 내 키워줄게.” 세상이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내가 다 키워줄게. 푼돈 들어가는 것 내가 다 해줄게. 집 없어? 집 사줄게. 차 없어? 차 사줄게.” 그런 부모, 최고에요. 애 키워주고 집 사주고 차 사주고 최고 아닙니까, 최고. 지는 뭐고? 쇼핑만 하는 거예요. 지는 지중해 산토리니 섬, 하얀 집 있는 거기에 놀러 가면 되겠지요.
육에서 온 게 육으로 가고 육으로 마지막 가게 되고, 법으로는 법 안에서 법으로 가요. 주께서는 언약이 와서 어디로 가겠어요? 언약으로 시작해서 어디로 갑니까? 언약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오시지 않고 독수리가 낚아채듯이 우리를 낚아채서 자기 집으로 가요. 언약으로, 언약의 집으로. 이게 바로 중보자입니다. 죽은 우리야가 다윗의 중보자에요.
최근에 상영된 영화에 <분노의 질주:라이드 오어 다이>가 있어요. 분노의 질주에 보게 되면 그 악한 자가 엄청나게 큰 쇠뭉치든 폭탄을 로마 시내에 굴려버려요. 높은 데서 굴린다고. 그러면 그 영화에서 착한 쪽, 머리 홀라당 깎고 우락부락한 착한 쪽, 맨날 차 운전만 하던 그 주인공 쪽에서 팀을 만들어서 이 폭탄을 정지시켜야 되는데 로마의 높은 산에서 굴린 폭탄의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바티칸 성당이에요.
거기 나온 대사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이 폭탄을 로마에 굴려서 바티칸을 작살내는 이 아이디어 멋지지 않나.” 악한 대장과 부하들과 저희들끼리 대화하면서. 그러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티칸을 폭파하는 데 신나는 일 아니야?” 그런데 이 폭탄을 개발한 자는 지옥 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저희끼리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대사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티칸 성당을 부수는 게 왜 지옥 가지요? 악한 자가 왜 그런 마음이 들지요? 바티칸 성당을 부수는 게 농담이지만 왜 지옥 간다고 왜 그런 생각을, 그런 약간의 공포심을 왜 갖는 겁니까? 인간은 이미 구원받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냈어요. 거룩한 것을 만들어놓으면 거룩한 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런 희망 같은 것을 인간들이 이미 설정해놨거든요.
그리고 그 설정해놓은 종교적 희망을 비록 악하지만 옛날에 어린애 어렸을 때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가정이니까 외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나쁜 짓하고 성당 신부님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땡글땡글하게 들었겠지요. 그러니까 비록 지금 나쁜 짓해서 바티칸 성당을 폭파시키는 그 폭탄을 제조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면서도 마음속은 뭐냐? “야 이거 바티칸 성당 부셨다고 날 지옥 보내는 것 아니야,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그런 감은 느끼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그러면 교회 부수면 지옥 갑니까? 물어봅시다. 어떻게 하면 지옥 갑니까? 우리가 무슨 수를 하면 지옥 갑니까? 무슨 수를 하면 천국 가냐는 그런 질문은 많이 했으니까 하지 마시고 질문을 바꿔보는 거예요.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지옥 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이렇게 돼 있어요.
뭔 뜻인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끝부분에,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그러면 지옥 가는 방법은 절대로 불의한테 지지 않고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아니하면 어디 간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남자건 여자건 태어난 본성이 지고는 못 살잖아요. 속고는 화가 나서 못 견디지요. 불의한 인간들에게 당한 것만 생각해도 울분이 터지지요. 사람이 승자가 되면 자애를 베푸는 게 아니에요. 승자는 더 심하게 패자한테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악마성입니다.
지옥 가는 방법은 누구한테도 속지 아니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나한테 속지 아니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불의한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불의한 자도 지옥 가고, 지도 지옥 가고 둘 다 지옥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 가는 방법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어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다윗이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는 걸 보고 생각하기를 다윗이 그때 저녁 때 산책을 안 갔으면 좋을 뻔한 것 아닌가. 산책 가더라도 위만 주님만 쳐다보지 아래를 안 봤으면 좋았을 것 아니냐. 아래를 보더라도 여자가 옷 다 입고 봤으면 좋았을 걸,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안 속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속으면 나만 쪼다 된다는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내가 남한테 지면 그게 굉장히 속상한 겁니다. 남한테 지고는 못 살고 속상한 것은 용납 못해서 사람들은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남한테 속아 넘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 겁니다. 참 이런 쉬운 이야기를 해도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모르겠다.
주님의 언약은 이 세상을 다 둘러서 폭탄처럼 다 뭉개버려요. 바티칸 성당이고 다 뭉개버려요. 물론 영화에선 바티칸 성당 부수면 안 되니까 테베레 강에서 주인공이 차를 이렇게 운전해서 멈췄어요. 거침없이 달리는 것, 그러니까 언약 자체가 이 세상 모든 것이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침없이 달려요. 그걸 저는 분노의 질주라 해요. 언약이 벌이는 분노의 질주, 분노의 질주 제12탄.
굴러가는 폭탄을 누가 감당합니까? 언약 앞에 누가 감히 거기다 멈춰요? 그 언약에 깔렸기 때문에 다윗은 구원받은 거예요. 주께서 다윗이 산책할 때 벌거벗은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게 하셨고, 반하게 하셨고 동침하게 하셨고,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감추고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휴가내서 밧세바의 남편 있는 걸 알고 암몬 나라와 전쟁 중에 불러내서 동침하도록 주선했지만 우리야 장군은 지 부하와 술 먹는다고 집에 들어오질 않고 합궁했다는 어떤 증거가 없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플랜에이가 실패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플랜비가 동원된 거죠. 플랜비가 뭐냐? 다윗은 기어이 요압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내용이 뭐냐? 이 편지를 지니고 있는 자를 죽여라. 내용이 편지 안에 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자를 죽여라.
주님께선 성경으로 우릴 죽이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 모든 성경은 인간을 위한 성경이 아니고 내게 대한 성경이다. 나 예수에 대해서 쓰인 책입니다. 이 성경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필요한 예수님의 자기의 자서전이에요. 자기 책이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죽는다.
지금 암몬 전쟁 중이고 뭐고 관계없어요. 다윗은 언약과 마지막 최후의 결승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느냐, 다윗이 이기느냐?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했을 때 다윗은 깨끗하게 자기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이거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태어난 것을 이제야 발견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지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죽인 우리야 장군 앞에서, 요새 같으면 십자가 죽은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내가 누구인 것을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으셨는가를, 피 흘리셨는가를 사실을 예수님 앞에서 단독으로 발견한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은 훌륭한 사람 되는 게 아니고 다윗은 다윗언약이 되는 겁니다. 노아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방주 안의 사람인 것처럼 이제는 다윗은 다윗언약 속의 다윗이 된 거예요.
그럼 다시 역대상 18장 13절, 오늘 몇 번 이야기하지만 다시 한 번 봅시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자, 이 구절 다시 봅시다. 묻습니다. 다윗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지요.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에게 이겨야 돼요, 져야 돼요? 져야지요. 그러면 최종 승자는 누굽니까? 다윗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죠.
그 하나님이란 것을 기념하는 증거가 어디 나오느냐? 바로 여기 18장 8절에 나옵니다. 누구 읽어볼까요? 글자 어렵지만 읽어보세요. 시간 가니까 제가 읽을게요. “또 하닷에셀의 성읍 디브핫과 군에서 심히 많은 놋을 취하였더니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들을 만들었더라” 이렇게 돼 있지요. 솔로몬이. 솔로몬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나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걸 할 땐 솔로몬 이후지만. 다윗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솔로몬 끄집어냈어요.
솔로몬은 뭐한 사람인가? 성전을 만들었지요. 그러면 솔로몬은 성전 중심입니다. 솔로몬 아버지가 누구지요? 솔로몬 아버지가 다윗입니까, 다윗언약입니까? 이제는 여러분 답변해야 돼요. 다윗언약이죠. 다윗언약의 특징은 뭐냐? 자기 아들이 되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돼요. 그게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친히 내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은 곧 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언약이 와야 되고요 언약으로 다룰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이 아들이죠. 그럼 우리가 아들 되고, 그럼 아들이 두 명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아들 안에 들어온 아들, 예수 안에 들어온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우릴 덮칠 때 어떻게 덮칩니까? 예수님의 피로 덮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뭐라고 반항하고 대항하느냐? 나한테는 육신의 가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신의 가족이 있다는 말은 식구가 많다는 뜻이 아니고 이 자아는 누구 작품이다? 태어날 때 육신의 가족이 부모가 집어넣은 내용물로 탱글탱글하게 만든 그 자아를 아직도 이 나이까지 계속 지탱하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모 다 돌아가셨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부모님의 명성과 부모님의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면서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합니다. 이게 자아에요. 우리의 자아라고요. 내가 행동 잘못하면 누구 욕 먹인다? 돌아가신 부모님 욕 먹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걸 생각해서 하는 거예요. 내 안에 돌아가신 부모가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뭡니까? 그거는 법적 체제지요. 육에서 와서 육으로 말미암아 육으로 가는 체제에요. 자아에요. 그 자아로는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그것은 어머님의 기도 못 잊어, 아버지의 기도 못 잊어, 이렇게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한 그 육적 본성에다가 구원을 탐을 내는 방식이죠. 내 부모로부터 받은 육 자체가 우리 집안이 하나님의 원수란 생각이 없고 주께서 나를 삼대 째, 사대 째 기독교 집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란 이런 생각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지 말았어야 돼. 그러면 더욱더 훌륭한 영웅적인 이스라엘 왕이 될 텐데, 라는 생각을 다윗의 밧세바 그 대목 본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우째 이런 실수를 했나, 그 훌륭한 분이.” 성군이라 하지요, 성군. 그거는 성경을 보면서 다윗을 높이는 것은 사실은 본인이 다윗처럼 높고자 하는 자기의 본심을 간교하게 감추는 거예요. 아까 후딱 지나갔지만 강조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세요. 여기서 옛 자기라 하는 것은 남들한테 안 지려고 남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내 잘남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이만큼 살아왔는데 지금까지 남한테 욕 얻어먹을 짓 한 번 안 했다는 그 의젓함, 그게 바로 최종 승리를 결국 내가 최종 승리자로 가져오겠다는 악마의 마음입니다. 성경과 구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자아를 가지고 본인이 대견해 여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빼앗겨야 돼요. 빼앗겨서 동그랑땡을 계란 막으로 휘둘린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찢어지고 개판이고 엉망이라도 그 둘러싼 계란이 이쁜 노란 계란, 그 얼마나 이뻐요. 케첩 쳐서 먹으면 맛있다고요. 그렇게 주께서 가치도 없는 걸 언약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다윗이 되면 우리도 되는 거예요. 다윗이 살인자지요, 간음자지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어디 가있습니까? 사도행전에 보세요, 다윗이 어디 가있어요? 지금 하늘나라 가있어요. 하늘나라에 그런 사람이 가있어요.
주께서 언약의 폭탄이 다윗을 깔고 뭉갠 겁니다. 그 뭉개는 모습이 바로 밧세바로 다가왔고 다윗은 자기 자신이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까 자기는 모범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감추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다하지요. 자기 알리바이를 나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하고 어떤 경우라도 의롭고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욕 얻어먹어선 안 되는 그게 바로 나야. 다윗 본인만 그래요, 우린 안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길을 발견하는 동시에 내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무기력한 강도임을 무능한 강도임을 동시에 발견하지요. 언약 안에서. 마치 노아가 방주 밖에는 심판의 바닷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방주와 관계 지어서 내가 어디 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 믿는다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존재냐를 알면서 예수님과 결합돼 있어요. 연결돼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를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에 놋그릇 다 들어가요. 그리고 자기 왕궁에도 놋그릇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 다 들어가요. 그러면 솔로몬 안에서 누가 계속 승자가 나와요? 하나님만이 최종 승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솔로몬은 뭐냐? 하나님 승자 되는데 필요한 종이, 일꾼이 되는 거죠.
솔로몬은 종이 되고 주님은 다윗 같은 승자가 되고. 바로 그 관계를 미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조로 다른 민족과 연결해서 미리 그걸 보여주고 마지막에 이스라엘 자체, 다윗 자체를 하나님과 대결구조로 가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항복케 하는 겁니다.
그럼 역대상엔 이게 왜 빠져있는가? 왜 사무엘하는 암몬 전쟁에서 11장에서 다윗이 우리야 장군 죽이고 밧세바 간음하는 게 있는데 역대상은 왜 그게 없는가? 있어요. 16장에 나옵니다. 지난번에 했거든요. 16장에 보면 시가 나와 있지요. 다윗의 기도 나와 있지요. 그 기도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에 두고 언약궤 앞에서 이런 시를 지은 겁니다. 그 시의 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승리를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된다는 고백이죠.
그게 16장 25절, 26절, 27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그다음에 33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그러니까 역대상에서는 16장이 사무엘하 12장의 내용을 완성된 입장에서 대체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다윗이 바로 내가 그 사람이고 죄인 맞습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 율법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에요. 율법이 아니고 다른 범주에요. 뭡니까? 자비의 범주, 사랑의 범주, 그냥 용납함의 범주, 그냥 들어와, 들어와 범주, 방주 안에 들어와. 그냥 아무 소리하지 말고 강도라도 좋고 창기 괜찮아. 그냥 들어와.
동그랑땡을 그냥 피 막으로 달걀로 한 것처럼 그냥 들어오는 그거는 그 자비의 범주에서 일체 인간은 법적으로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우리가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언약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과 더불어 일하시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윗이 승리할 때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지만 다윗은 알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승리가 아니라 주를 위한 주님의 승리인 것을 저희들도 같이 공감해서 주님만 쳐다볼 수 있고 별을 찾아온 동방박사처럼 주님만 생각하는 십자가만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