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5a 울산강의-역대기상(20강) 17장 12절 : 동전판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역대상 17장 10~15절,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 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아멘.
[사람은 큰 사람의 일부다. 큰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큰 사람이 있고 그 큰 사람에 의해서 작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큰 사람이 갖고 있던 성질, 속성을 작은 사람에게 나눠주게 되면 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사이에서 동질이 성립돼요. 동질이란 뭔 뜻이냐 하면 같다는 뜻이지요.
여기 작은 사람 속에 있는 성질, 속성이라 하는데 성격 또는 성질, 큰 사람의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점선으로 돼 있는 성질, 이 두 성질이 동일하면 구별되지 않습니다. 성질이 같으면 동일한 거예요. 큰 사람과 작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서 큰 사람의 성질과 성격, 속성을 작은 사람에게 나누어줘요. 분배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큰 사람이니까 하나님이잖아요. 작은 사람이니까 작게 그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성질을 이렇게 그 사람에게 인간에게 주고 이것을 회수하는 거예요. 이걸 찾아서. 자기 것을 집어넣었으니까 자기 것을 당겨버리면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것을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사람을, 이것 내 거잖아, 잡아당기게 되면 끌려가면서 구원을 받게 돼 있어요.
오늘 본문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이야기할 때 다윗이 굉장히 흐뭇해하고 굉장히 감격해하고 굉장히 감사하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 감사하느냐 하면 여기에 17장 12절에 나옵니다.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한다, 하나님이 만든 집이니까 뭐가 되느냐 하면 성전이 되겠지요.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실만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계시고 큰 사람, 큰 인간과 작은 인간 같이 살 수 있는 큰 집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다윗은 너무나 감격스럽게 감사하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시를 받고 그다음에 16절부터 17장이 끝나는 27절까지 감격스러운 기도를 하게 됩니다. 왜 감격스러우냐 하면 하나님이 저를 사용해주셨다는 그 점에 대해서 감격스러운 거예요.
하나님 것이 들어와서 나를 하나님의 활동공간으로 사용주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활동 거처로 사용하려면 내 쪽에서 무엇이 없어져야 되지요, 무엇을 드러내야 되지요? 내가 나답기 위해서 그동안 모아놨던 모든 것들이 다 쫓겨나가야 되겠지요. 바깥에 버려져야 되는 거예요.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것이 쑥 들어와 버리니까.
만약에 옛날에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어느 허름한 농부의 집을 보고서 신하보고 오늘밤은 저 집에 묵어야 되겠다. 그러면 그 수행한 신하들이 임금님을 모실만한 가구를 그 집에 임시적으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을 때 쾌쾌한 냄새나는 농부의 땀 냄새가 배어있는 가재도구나 침구류는 어떻게 되겠어요?
전부 다 바깥으로 던져버릴 때 그 농부가 기분 나빠할까요, 기분 좋아할까요? 대단히 기분 좋아할 거예요. 왜냐하면 앞으로 임금이 떠나고 남겨진 가재도구나 침대에 본인 눕게 되면 임금님과 자기하고 속성이 같아지고 임금님과 자기하고 동질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럽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을 강탈한다.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을 다 강탈하는 거예요. 내 꿈과 희망과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전부 다 빼앗아버리고 없애버리는 데서 오는 그 감격과 감사, 고마움,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 것으로 나답게 되려는 그러한 시도를 이제는 그만둬도 되기 때문에, 나 이런 인간이요, 라고 남한테 이야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주님의 것이 쑥 들어와 버리면 이거는 내 거였는데, 이거는 내 거여서 귀한 건데, 라고 고집부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흔쾌히 하나님에 의해서 기쁨으로 강탈당하도록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꿈, 내 인생의 목표, 내 인생의 계획, 그것 개나 줘버리세요. 그딴 것은 소용없습니다.
다윗이 감사하는 이유는 어디 또 나오느냐 하면 여기 17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한 번 적어볼게요,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한국에 어떤 학생이 있는데 롤러코스트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이 학생은 세계에 있는 롤러코스트를 거의 다 체험해봤어요. 동남아, 일본, 중국의 롤러코스트는 다 해봤는데, 예를 든 겁니다. 실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소문에 듣기에 이탈리아에 지금껏 지구상에 없는 롤러코스트를 만든다는, 지을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그러면 롤러코스트에 환장한 한국 학생이 가만있겠습니까, 아니면 이태리까지 가겠어요? 당연히 이태리까지 가지요. 그런데 이태리까지 가는 비행기 값이 없습니다. 그럼 학생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서울에서부터 걸어가기로 했어요. 서울에서 일본 가고, 일본에서 러시아 가고, 그러면 되니까. 러시아에서 몽골로 가고, 우랄산맥 건너서 알프스 산,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거쳐서 오스트리아, 스위스 밑에 이태리로 걸어가기로 한 거예요.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가는 거예요.
걸어서 이태리에 도착하니까 그 날 롤러코스트가 완공이 돼서 탔습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다윗 너와 함께 시간을 만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시간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롤러코스트 학생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이태리의 롤러코스트는 조금씩, 조금씩 완공이 되어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하나님의 자기 것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성도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도 안에 집어넣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도가 구원받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고 인류의 마지막 역사가 끝날 때까지 차질 없는 모든 작업과 계획이 이미 성도 안에 들어가 있어서 성도와 더불어서 계속 하나님의 일을 일구어나가는 거예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구원을 따내는 게 아니에요. 따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일에 합세하도록 초청받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세상의 모든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께서 종말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그 일의 일부를 지금 내가 할당받은 거예요. 한국에 있는 학생이 몽골로 해서 러시아로 해서 우랄산맥 건너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그렇게 조금씩 했던 그 일이 거대한 하나님의 모든 일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큰 인간의 작은 내 존재가 일부가 되어 가는 거예요. 일부가 되어서 같이 이 안에서 주의 일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나의 것이 강탈당한다. 그럼 나의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없어진다는 뜻이거든요. 나의 것이 강탈당한다는 것은 나의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럼 나의 것이 없어지면 내가 기대했던 내 구원도 같이 없어지는가요? 없어지지요. 하여튼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없어져요.
그럼 내가 없어지면 뭐가 드러나는가? 나는 없어진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없다. 그럼 나는 없어지면 뭐가 있는가, 뭐가 나타나는가? 이건 빨간 걸로 하겠어요. 나는 없어지면 그 대신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나의 자리가 생겨요. 바둑판이 있거든요. 오동나무, 아카시아 바둑판 이런 것은 비싸요. 수십 만 원 합니다. 바둑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 바둑판에 흰 돌, 검은 돌 수북이 있어요. 바둑 끝나면 뭘 치워버립니까? 돌을 치워버리죠. 돌을 영어로 하면 point, 우리말로 그냥 점.
인간은 뭐와 같으냐? 점과 같은 존재, 점이에요. 바둑 끝나면,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다 이 말이에요. 늙어죽으면 내가 죽는 게 아니고 그 원래 자리에 놓였던 하나의 점이었던 것이 그 기능이 끝난 거예요. 점이 사라지는, 하나의 점으로서 기능은 끝나고 바둑돌로 끝나고 그 자리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있었던 내게 하나님의 일을 맡겼던 하나님의 준비된 자리가 내가 사라져도 그 자리는 남는 거예요.
그러면 바둑판에 자리가 있으니까 이런 자리 있고, 요 자리 있고, 요 자리 있겠지요. 이 자리가 우리는 인간으로 수직으로 서있다 하지만 사실은 점이거든요. 없어지고 나면 이차원 평면에 이러한 자리만 있다. 이 자리가 동일한 자리에요. 이 자리를 무슨 자리라 하느냐? 이게 바로 율법의 자리에요. 말씀의 자리, 같은 말로 언약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에 의해서 빛이 생겼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빛이란 걸 만들었어요. 그러면 인간은 왜 만들었는가? 아담을 만든 것은 아담이 죽고 뒤에 아담보다 더 큰 아담, 큰 사람 누구겠어요, 마지막 아담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바둑판의 하나의 알맹이 기능을 하고 늙어죽으면 그걸로 기능은 끝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율법의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인간들을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자리, 인간으로선 자리가 두 종류의 인간이 나와요. 한 종류는 뭐냐 하면 지옥 가는 바둑돌, 이걸 그냥 검은 돌로 보고 또 하나는 어디 갑니까? 천국 가는 바둑돌, 이걸 흰 돌. 흰 돌, 검은 돌, 흰 돌, 검은 돌 이 세상은 섞여있는데, 그러니까 이 땅에 인간이란 없고 그냥 point에요, point. 하나의 점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은. 점 있지만 문대버리면 없어지잖아요. 늙어죽으면 문대면 없어진다고요.
그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율법이에요. 율법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율법세계 외에는 다른 세계는 없습니다. 율법으로 조성된 세계만 세계고 그 외에 다른 세계는 없어요. 모든 것이 촘촘한 전선 망에 얽히고설키듯이 이 세계는 율법의 망으로만 촘촘하게 얽혀있는 그물망의 구조, 그게 이 세상의 구조에요. 하나님의 말씀 바깥의 세상은 없습니다.
이 자리와 관련해서 인간은 하나의 point,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쉬운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십 년 전인가 은행에 갔는데 그때 은행에서 동전 있잖아요. 백 원짜리, 십 원짜리, 오백 원짜리 동전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 뭘 만들었느냐 하면 손잡이 있는 이런 판이 있고 백 원짜리 동전은 어떻게 하느냐? 백 원짜리에 맞는 크기의 홈을 파놨어요.
도대체 백 원짜리 동전이 몇 개가 되는지 은행직원이 동전더미 속에 푹 쑤셔서 끄집어내면 동전들이 그 홈에 박힐 게 아닙니까. 홈에 박히고 여분의 것은 주르르 떨어지겠지요. 그러면 그림판대로 박힌 동전이 10X5=50개 던져놓고, 또 푹 쑤셔서 푸면 홈에 맞게 다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께선 두 개의 동전 판을 만들었어요. 지옥 가는 동전 판, 천국 가는 동전 판. 그러니까 동전의 입장에서는 이게 자리가 되는 거예요. 푹 쑤셔서 지옥 갈 자인데 교회 나온다? 털어버려요. 여기가 오백 원짜리 판에 백 원짜리가 왜 끼냐. 십 원짜리가 왜 껴. 툭 털어버리면 그 자리에 자기 홈에 맞아서 되게 되면 그게 뭐냐 하면 천국 갈 사람들은 거기에 다 승선했지요. 전부 다 배에 올라탔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이 야기.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기 몸에 그냥 동전 판처럼 홈이 패있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그게 자리에요. 그 자리에 딱 규격 맞게 들어오게 되면 그 자리로 인하여 구원받는 거예요. 신데렐라 동화 있지요. 왕자와 열두 시 가까이 춤추다가 종소리에 급히 집에 간다고 신발 한 짝 놔두고 온 사람 있잖아요. 어디 가도 꼭 휴대폰 놔두고 간 사람처럼. 어쨌든 간에 신발 한 짝이 발견됐다 이 말이에요.
왕자가 마을에 찾아가서 이 신발에 맞는 사람은 나와 춤을 춘 내 마음에 든 아가씨인데 이 아가씨 어디 갔습니까, 해서 신데렐라 집까지 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욕심 많은 언니들이 발에 맞지도 않는데 억지로 끼어 맞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갈 동전도 안 되면서 천국 좋은 걸 알아서 구원받기 위해서 억지로 끼어드는 것, 주님께서 뭐라 하느냐? “그만해라. 이게 어거지로 될 문제가 아니다. 저리 가.” 다 흩어버립니다.
기꺼이 흔쾌히 자기 것을 잃어버릴 용의가 없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들어오질 않은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자기 노력한 것 있잖아요. 자기 기도한 것, 전도한 것, 선교한 것, 헌금한 것, 성경 공부한 것, 예배드리는 것, 공부 잘하는 것, 착한 것, 그것 다 끌어 모아봐야 그거는 그건 네 거잖아요. 네가 한 거잖아요. 네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한 거잖아요. 자신만의 자랑거리잖아요. 남의 자랑거리가 아니고 내가 이만큼 잘났다는 그 자랑거리는 그것 안고 지옥이나 가라. 자기가 노력한 것 안고 지옥 가서 실컷 남과 대결하면서 하라 이 말이죠.
그거는 주님과 동일한 게 아니에요. 주님의 것과 속성과 똑같아야 돼요. 그래야 주님의 것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것과 똑같을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 행복하냐? 자기의 목표와 자기의 기대와 자기의 소원과 자기의 행함에 대해서 이게 성취가 될 때, 그때 인간은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행복하면 뭐합니까? 그거는 주님의 것이 아닌데. 주님의 것으로 행복해야 될 텐데 내 것으로 행복하려고 시도하는 것, 그거는 땡 탈락입니다. 구원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은 하나에 서론이라 치고,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의 세계 말고 다른 세계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율법의 세계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이 깔고 앉아 있었던 그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가 율법의 자리인데 그 율법의 자리가 만들어낸 생산된 사람이냐를 봅니다. 말씀이 너를 만들었느냐를 보는 거예요. 네가 말씀을 지키느냐를 보는 게 아니고 네가 얼마나 성실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느냐를 보는 게 아니고, 그런 거는 개나 줘버리세요. 말씀이 너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를 보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고 바르게살기 시도 노력한 것, 이것과 말씀이 우리에게 들이닥친 것, 이게 완전히 다르거든요. 완전히 반대가 돼요. 말씀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우린 아낌없이 이것을 지워버립니다. 이것을 버리게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이 우리에게 들이닥칠 때 다윗이 발견한 게 있어요. 발견한 게 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이닥칠 때 하나님의 것은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빈자리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빈자리를 주고 그 빈자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나가는 거예요.
그 한국에 있는 학생이 롤러코스트 타고 싶어서 걸어갈 때에 지가 몽골이나 러시아 걸어가면서 롤러코스트를 자기가 짊어지고 갑니까, 그 무거운 걸? 이태리에 있는 롤러코스트가 아직 완공되진 않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롤러코스트가 그 학생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서 모든 늑대와 짐승과 공산주의, 이런 것들과 싸워가면서 오직 롤러코스트 타겠다는 일념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롤러코스트가 그 학생을 잡아당기니까요.
그런데 그 학생이 가는데 지금 이야기하다보니까 지어내야 되는데 지어낼 수밖에 없어요. 헝가리 가는데 키 큰 아가씨가 그 학생보고 얼굴 예쁘니까 나와 살자, 하면 하겠습니까? 지금 롤러코스트 타야 되는데 도중에 너 나와 여기서 결혼하고 살자, 하면 저리 가세요, 할 거란 말이죠. 세상 것을 사모하지 않게 돼요. 성경말씀에 있는 것을 사모하지 세상 것을 사모하지 않게 돼요. 세상 것을 사모하지 않게 되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세상 일로 짜증낸다든지 고민한다든지 걱정할 일이 일체 없습니다.
내가 말씀 잘 지키고, 바르게살기, 이게 왜 잘못인가? 이게 잘못된 인생이란 걸 말씀드릴게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 실수하게 되면 반성해서 온전 하려고 해요. “아이고, 내가 그런 실수하다니 다음에 그런 실수 안 해야지.” 실수하면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머저리라 해요. 멍청이. 머저리와 비슷한 말이 모지리. 이 바보야, 멍청이 이러고 있단 말이죠.
“너 왜 그런 실수를 했어? 내가 두 번 다시 그런 실수 안 할 거야.” 이렇게 후회하고 반성하고, “주여, 제가 잘못됐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뭐냐? 내가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해 바르게 살아서 천국 가려 할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런데 말씀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면 내가 멍청이다, 머저리다, 바보다, 실수했다, 앞으로 온전해야지 이런 게 아니고 이게 돼요. 나는 없어요. 내가 없다니까요. 나는 주님인 만드는 거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왜 내가 없는가? 내가 없어야 내 자리가 빈자리가 되고 공터가 되니까요. 왜 공터가 돼야 되느냐? 공터가 되어야 주님께서 자기 것을 거기다 채우지요.
제가 문제를 하나 써볼 테니까 여러분 마음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다윗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내었는가? 이게 질문입니다. 다윗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었지요? 질문이 좀 이상하단 느낌이 안 듭니까, 불신앙적인 느낌이 안 들어요? 다윗은 어떤 식으로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가 만들어냈느냐, 라는 질문이에요.
그러면 신앙 깨나 있던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분노하면서 대들겠어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게 아니고 원래 하나님은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여러분, 인간 치고 하나님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 대해서 숨겨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에요.
인간세계는 하나님이 없어요. 인간이 만든 하나님들만 각자가 자기가 만든 하나님만 우후죽순처럼 퍼져있는 거예요. 좀 솔직 합시다. 신앙 있는 척하지 말고.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내가 간암 말기일 때 또는 가정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있지요. 그런 사람에게 제가 묻고 싶어요. 그러면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 하나님 찾았습니까, 안 찾았습니까? 아무 일 없을 때 하나님 왜 찾지요? 찾을 필요 없잖아요. 지금 내가 하는 일 잘하는 데 찾을 필요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없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있지 하나님 없어요. 아무리 하나님 믿으려고 하나 그거는 하나의 위장술이에요. 혹시 남한테 신앙 없는 걸 들킬까 싶어서 지가 억지로 만드는 거예요. 조작해내는 거예요. 신앙이란 것을.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혹시 남한테 들키면 안 믿는 사람이라 할까 싶어서 미리 연습 정도하는 거죠. 인간에게는 하나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보고, “야 너 중학생 됐으니까 이제 하나님 믿어야지.” 하면 중학생이 뭐라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네 마음속에 있다.” “아버지, 되지도 않는 구차한 변명하지 마세요. 내가 아무리 봐도 아버지 마음에 하나님 없어요. 아버진 지금 나를 훈계한다고 거짓말하는 겁니다. 아버지에 하나님 없듯이 나도 내 마음도 하나님 없습니다. 아버지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내 마음에 하나님 없습니다. 됐습니까? 오케이, 이제 내 마음대로다.”
여러분,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출발은 그것부터 해야 돼요. 그래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만드는가? 그러니까 다윗 너는 원래 이 세상에 하나님 믿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안 들키기 위해서 스스로 숨어버린 거예요.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낼 방도가 없어요.
교회 오십 년 다닌 장로가 결국 죽을 때 솔직하게 말해서 본인은 지금껏 하나님 만나본 적도 없고 하나님 믿은 적도 없고 내가 만든 하나님을 혹시나 보험 하나 들면 좋지 않나 싶어서 없지만 있다 치고 하나님 믿으면 남한테 좋은 인상도 받고 그래서 하나님 믿는 척을 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누가 믿습니까? 있어야 믿지 없는데 뭘 믿어요, 없는데. 미국은 있어요. 가본 사람 있기 때문에. 미국은 가본 사람 있다고요 그러나 천국은 가본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천국은 없는 거예요.
다윗은 도대체, 이 해답 끝내기 전에 첫째 시간 끝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아쉬워서 안 되는데……. 빨리 해답을 내려줘야 돼요. 다윗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맙다고 했는가?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왕이 되어 전쟁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이란 말을 집어넣었잖아요. 그런데 이 하나님이란 말을 일단 감춰놓겠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는 하나님이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전쟁에 임했어요. 첫 번째, 전쟁에 임했습니다. 두 번째,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전쟁에 누가 승리했는가? 다윗이 왕의 자리에 앉아서 승리했어요. 그러면 다윗 입장에서 백성들은 뭡니까? 백성이 전쟁에 참석해서 전사하고 죽고 망하고 또 승리한 백성들은 뭡니까? 이것은 하나의 point 점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전쟁에 나서게 되면 그거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의 바둑돌이에요. 그 사람이 죽든 말든 전쟁을 시작한 그 인간만 멋있으면 되고, 그 인간만 영광 받으면 그만입니다. 이게 전쟁입니다.
그게 바로 역대상 17장에 나와요. 17장 10절에,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적들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적들이 백성을 노립니까, 다윗을 노립니까? 다윗을 노리지요. 그러면 적들이 다윗을 노리니까 이 전쟁의 명분, 즉 전쟁의 이름은 다윗의 자리를 빛낼 전쟁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있습니까? 왕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왕이 숨어있는 왕이었어요. 여호와가 왕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왕인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들한테는 하나님이 있다는 그런 풍문, 그런 소문, 그런 상상력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하나님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없지요.
자, 인간들이 있는데 인간들 눈에 이스라엘이 있지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다는 그런 풍문은 있어요. 모세가 와서 그런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이 없습니다. 없음은 있음과 짝이 되거든요. 하나님이 없다면 있는 건 뭐예요? 이스라엘만 있어요. 이스라엘만 있지요.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지점에 왔습니다. 내가 있으면 누가 없어요? 하나님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있으면 누가 없어요? 내가 없어요.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게 오게 되면 내가 색깔 구분을 할 능력이 없어요. 왜? 그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강한 타인이 와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그 타인 앞에서 없는 것이 돼요. 따라서 인간은 내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좀 없어줘야 돼요.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그 이스라엘 어떻게 됐는가? 이스라엘은 주변에서 이스라엘을 노리고, 이스라엘은 있으니까 주변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방민족들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말고 이방민족들이 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땅이 있어요, 없어요? 땅이 없지요. 이방민족은 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없음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된다? 주인이 있는 땅을 뺏어야 되겠지요. 주인 있는 땅을 뺏을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은 감 잡는데, 감 잡아야 돼요, 여러분.
없는 쪽이 전쟁을 벌일 경우는 뭐냐? 없음이 나도 있어, 라고 등장할 때 전쟁이 일어나지요.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장세워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잡이입니다. 앞장세워서 이스라엘을 땅 없게 만들었어요. 땅 없게 만들었으니까 이스라엘 관심사는 하나님이 누구냐는 관심 없어요. 뭐가 관심 있느냐 하면 땅이 없으니까 가족들 기거할 땅이 없잖아요. 부동산이 없다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동산등기등본 알아보고 집을 샀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집이 없어요. 보니까 부동산등기등본에 기재되지 않은 숨어있는 근저당이 와버리면 내 집 홀라당 다 날아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땅이 있는 민족이어야 돼요, 없는 민족이어야 돼요? 땅 없는 민족이요. 땅 없으면 인간세계에서 그 인간도 없는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은 내가 여기 있다, 라고 우기기 위해서라도 땅이 있는 다른 민족한테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영광 돌리기 위해서 전쟁 한 게 아니고 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방나라 땅을 뺏었지요.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방민족이 내 땅 내놔라, 해서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또 전쟁입니다. 이방민족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니까 이스라엘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고 뭐고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되겠지요. 이게 사사시대였잖아요. 그게 모세시대였고 사사시대였습니다.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다 뜯겨나갔어요.
그렇게 이방민족한테 땅을 빼앗길 수밖에 없고 압제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36년 일제 압제하듯이 압제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항일투쟁했어요, 항일투쟁. 무슨 전투? 청산리전투. 김좌진 장군, 양세봉 장군 이런 사람들. 게릴라 전쟁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전쟁에서 세상에 전쟁을 하는데 이게 승리가 되네요. 승리가 돼요. 누가? 이스라엘이 승리했겠습니까, 다윗이 승리했겠습니까? 다윗이 승리한 거예요.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니까 다윗이 승리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하면서 그 다윗에게 뭘 줬느냐 하면, 너는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전쟁은 승리케 해놓고 너는 성전 못 짓는다는 거예요. 역대상 22장 8절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역대상 28장 3절요,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전쟁에 승리케 해놓고는 네가 성전을 짓지 못한다고 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남들을 하나의 point 점으로 간주했다는 말은, 점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필히 뭐했느냐 하면 인간은 점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인격체지요. 인간이 있지요. 인간은 인격체잖아요. 짐승보다 소중한 인간이잖아요, 존엄한 인간. 인간인데 인간이 바둑돌이 되려면 여기서 뭘 흘려야 돼요? 피를 흘려야 돼요. 어느 인간이 자기 피 흘리는 걸 취미로 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골프를 너무 쳤더니만 손바닥에 피가 나네.” 그런 피 말고, “바둑을 너무 뒀더니 손바닥이 좀 아파.” 이런 것 말고, “아예 내 존재가 누가 내 존재를 없애줬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 봤습니까? “어디 음주운전 차량 없나? 있으면 음주운전 차량 앞에 가서 한 방에 내가 공중으로 붕 날아가서 이 땅에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변했으면 소원이 없겠네.” 이런 사람 봤어요, 안 봤어요? 그런 사람 없지요.
모든 인간은 남은 죽어도 자기는 버티고 살고 싶은 게 인간이에요. 남은 칼로 죽여서 남을 시체로 만들어도 자기는 감옥소 가면 인간대우 받으려한다 말이죠. 그게 인간이요. 그런 인간을 아예 말살 내는 것, 사그리 말살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전쟁이에요. 전쟁에서 인격은 날아가 버립니다. 전쟁에서 그걸 용납 안 해요.
다윗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다윗은 많은 백성들을 하나의 point 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전쟁하면서 이등병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그런 것 없어요. 네가 총알받이 돼주면 좋지 않겠나, 이렇게 돼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금 얼마 죽었어요? 얼마 전에 십만 명 죽었다 하거든요. 그런데 푸틴은 지금 죽었어요, 살았어요? 푸틴은 살아 있잖아요. 군사들이 전쟁 일으켰습니까, 푸틴이 일으켰습니까? 푸틴이 일으켰지요. 군사들이 일으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러시아 장정들, 십만 명 죽은 장정들 그 사람들은 취미도 있고 고향 가면 애인도 있고 부모도 있고 가족도 있고 자기 집에 가면 키우는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포부도 있고 희망도 있고 자기 인생의 계획도 있어요. 지금 고향에서 자기 약혼녀와 임신한 아내는 어서 고향으로 전쟁 끝나고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Tom Jones, 1967) 고향의 푸른 잔디 그리워하는데 그 사람들 지금 3월 달 우크라이나 진흙 판에 전부 다 한줌의 흙이 되어 날아가 버렸어요. 십만 명이나. 그게 뭐라고요? 그게 전쟁이죠.
전쟁은 몸은 있는데 이름을 뺏어가요. 이름이 없어요. 바둑 두는 사람은 푸틴이지 바둑돌이 바둑 두지 않아요. 푸틴이 3연대 여기, 5연대는 여기. 혼자 몰살당해버렸어요. 2대대는 저기, 대마 다 잡혀버렸어요. 군사들 더 뽑아. 군사 더 뽑아서 집어넣고, 북한에서 고장 난 쓰지도 못할 무기 집어넣고. 시간만 때우고 거기서 총알받이로 죽어라.
개인의 개성이요? 나, 어느 학교 출신? 왕년에 초등학교 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 상장 받은 것, 그런 아름다운 추억? 자기만의 소박한 행복? 전쟁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냐? 피 흘리고 흙이 되어라. 전쟁은 인간을 피 흘리고 하나의 사물체로 만드는 게 전쟁입니다. 10분 쉽시다.
20230505b 울산강의-역대기상(20강) 17장 12절 : 동전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강렬한 타인으로 나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 그 강렬한 존재가 율법으로 이미 세상을 결정났어요. 율법 밖에 다른 현실은 없으니까. 율법에 의하면 땅에 피 흘리는 것은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합니다. 제거대상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율법에 나와요. 레위기 17장 4절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은 처음도 자기뿐이고 끝도 자기뿐이에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좀 압시다. 우리는 처음도 나를 위해서, 에요. 끝도 나를 위해서, 에요. I am looking (전치사) a person. 영어선생 앞에서 미안합니다만 영어에서 for라는 것이 흔히 ‘위하여’라는 말이 있다 하잖아요. 맞아요. 그 말 말고 ‘교환’이란 의미가 있어요.
내게 유리한 것 주셨으니까 당신을 위해서 Thank you for라 하지요. looking for 그다음에 또 하나 ‘방향’인데 교환과 같은 뜻으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니 당신한테 제 성의를 표합니다. for라고 이야기해요. 또 뭐가 있느냐 하면 ‘~동안’이란 그런 뜻도 있어요. Thank you for your help. 당신의 도움에 나한테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for 들어가지요.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출발점이 자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 게 언제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줄 때, 그때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물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암몬, 모압 나라. 암몬은 이스라엘, 지중해 있고 여기 갈릴리 바다 있고, 사해 있는데 모압, 암몬이거든요. 지금은 요르단이란 나라에요. 위에는 시리아고. 붙어있어요.
암몬 나라에서 몰렉이란 신을 섬기고 모압 나라에서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는데 이 몰렉, 그모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신공양이에요. 죽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닙니다. 산 사람을 바치는 거예요. 왜? Thank you for 감사하기 때문에. 신에게 감사하고 또 내가 이렇게 성의를 표했으니까 신 쪽에서도 내 소원을 들어주라고 내가 성의껏 희생과 정성을 다 보여주는 것, 이게 하나님이에요. 이게 우상이잖아,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인간이 끄집어내는 신은 다 우상입니다. 자기한테 손해 보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 신을 믿어요.
그렇다면 for라는 건 방향이니까 출발점은 나에게서 나오거든요. 그러면 보세요. ‘나’가 여기 있고 ‘신’이 여기 있다면 내가 신에게 나아갈 때 여기 무엇이 만들어지느냐 하면 여기서 어떤 법칙이나 법이나 규칙을 만들어요. 규칙, 법칙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들지요, 내가. 내가 왜 만듭니까? 내가 행할 수 있거든요. possibility, 내가 행함이 가능하거든요. 내가 가능한 행함을 나는 규칙으로 만들어놓게 되면 그 규칙에선 내가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뭐냐? 의인이 되고 착한 사람이 되고 착한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한테 복을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주겠지요. 그게 뭐라고요? 그게 신이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우상이죠.
이스라엘 주변에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뭘 믿는 나라입니까?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요, 우상을 믿어요? 우상을 믿지요.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 우상 다 떼면 남는 게 뭐냐? 신을 믿고 있는 민족이 신을 믿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죽자고 누구한테 기도하겠어요? 여호와한테 기도하겠지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도대로 승리케 합니까, 승리케 안 합니까? 질문 곤란하지요. 승리 안 했다 하기도 뭐하고, 승리했기도 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케 합니다. 하고 이스라엘을 버립니다. 이스라엘로 승리케 하고 이스라엘을 버려요. 특히 이스라엘 왕이 누구에요? 다윗이죠. 전쟁에 승리한 영웅이 누굽니까? 다윗입니다.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버립니다. 너는 하나님과 함께 할 성전 짓지 마. 왜? 전쟁한다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아까 첫째 시간에 봤지만 레위기 17장에서 땅에는 절대로 피를 흘려서는 안 돼요. 그러면 고기 잡지 말란 말인가. 염소고기 먹지 말고 소고기 먹지 말란 말인가? 잡을 때는 반드시 뭘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성소, 제단이 있는 곳을 경유해야 돼요. 그게 레위기 17장 14절 말씀이에요. 뭘 잡거들랑 푸줏간에서 뭘 잡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제단을 경유해서 잡아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은 촘촘히 율법으로 바둑선이 그어진 나라거든요. 더 알기 쉽게 이 한 마디만 하면 여러분 확 올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표로 인간나라와 전쟁하고 있어요. 확 오지요.
하나님이 전쟁할 때 내세운 법칙이 뭐냐? 율법이에요. 그 율법으로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인간들은 사그리 point 점이 돼야 돼요. 다 죽어야 돼요. 더 이상 인간이란 말을 붙이면 안 돼요. 나 인간이다, 란 말을 하면 안 돼요. 나름대로의 개성 있고 나도 꿈과 희망이 있고 나름대로의 포부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그냥 물체야. 너는 흙덩어리야. 사람 아닙니다. 그냥 쇠붙이와 똑같은 거예요. 그냥 바둑돌처럼 돌멩이에 불과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지가 거할 땅 없다고 다른 이방민족의 땅을 뺏을 때에 그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불렀어요. 여호와를 불러서 그들은 몰랐습니다. 여호와를 부르는 이것이 이방나라가 우상을 부를 때 그 심정과 똑같은 심정이란 사실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는 여호와 부르니까 괜찮은 거고, 저들은 몰렉이나 그모스 우상 섬기니까 나쁜 거고 이렇게 착각한 거예요. 큰 착각이었던 겁니다. 둘 다 본인들 살기 위해서 불러놓고 자기들 여호와의 뜻을 맞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다음에 사무엘 선지자 오니까 사무엘 선지가가 기도해서 전쟁에 이겼거든요. 사무엘상에 나오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를 응답하사 우리에게 승리를 줬다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입장이냐는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인 거예요. 자기의 꿈만 달성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그걸 여호와 믿는 참된 신앙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무엘 죽고 난 뒤에 그들은 뭐가 생겼습니까? 빈터에요. 이 머리 상처 나서 머리카락 빠져버리면 뭡니까? 숲속의 빈터가 되지요. 중간에 빠져버리면. 이게 뭐냐? 기계충이라 하지요. <여로> 드라마에 나오는 영구 없다. 젊은 사람들 아나? 옛날 드라마. 빈터가 생긴 거예요. 왜? 사무엘이 늙어가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다시 자기를 대신해서 전쟁 승리하게 해줄 그러한 효과 있는 선지자 찾다보니까 사무엘 자식들에게 주목했어요. 교회 세습하겠다는 거예요. 한데 보니까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사무엘에게 윽박지르느냐 하면, 당신의 하나님에게 부탁해서 우리에게 뭘 달라? 왕을 달라 했어요. 짝짝짝~ 드디어 이스라엘이 바로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훅하고 폭로된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아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탄로 나는 순간이에요. 원래 인간이 이래요. 남 욕할 것, 이스라엘 욕할 것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원래 이래요, 인간은. 아쉬울 때 찾는 게 신이에요. 그게 우상이고 신이고.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걸 채워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왕을 찾는 것은 바로 내가 왕 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왕 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시면 돼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과의 전쟁에 돌입해서 하나님을 내쫓았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내쫓은 자리에 들어온 왕이 누구냐 하면 사울 왕이고요. 그 사울 왕을 대신해서 들어왔던 왕이 누구냐 하면 다윗 왕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법칙만 죽자고 쥐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착한 일에 내가 충실했으니까 설마 나를 지옥 보내겠나, 이것만 생각해요. “내가 성심성의껏 하나님을 섬겼으니까 설마 지옥 보내겠나.”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율법이 뭡니까? 몰라요.
티비에서 오늘 낮에 영화를 봤어요. 흑백영화를 봤어요. 1960년대 영화인데 구봉서가 주인공이고 문희가 여자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요. 영화제목은 <수학여행> 어린이날 특집이라고 옛날 한국영화 틀어줬는데 1969년도에요. 시골에 있는 애가 서울에 수학여행 와서 모든 게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내용이 나와요. 시골에 있는 아이들이 서울에 와서 높은 빌딩건물, 차 많이 다니는 것, 어느 것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는 너무너무 신기해서 기거에 완전히 푹 빠져있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아이들 좋아해요.
자, 제가 묻습니다. 이 시골 아이들이 자기를 비웁니까, 아니면 자기를 채우고 있어요? 어느 쪽입니까? 서울에 와서 너무 서울이 살기 좋다고 기뻐하는 아이들이 기쁨과 행복감이 자기를 비우는 거예요, 자기를 채우는 겁니까? 자기를 채우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21세기 모든 인간은 자기를 비워내기 위함이 아니고 더더더더,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 더 돈 많은 것, 더 행복한 것,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출세하는 것, 계속 채우는 데 급급하고 있어요. 자기를 비워내질 않습니다.
자기야망을 채우는 데 모자라니까 교회 와서 기도하는 거예요. 성의껏 열심히 할 테니까. 율법이 뭐냐? 율법이 뭔지 몰라요. 율법은 우리를 제거하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를 저주하는 거예요. 심판하는 겁니다. 어떻게 심판하는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생명나무 멀쩡하지요. 선악과나무는 훼손 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쫓겨나갔지요.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와 인간들 사이에 뭐가 있지요? 뭔가 생명나무를 둘둘 돌면서 지키는 게 있지요. 뭡니까? 심판의 불이죠.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불로 태우는 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뭘 지키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은 이 세상을 완전히 선악과부터 해서 이 세상을 불로 태워요. 그래서 천국에는 선악과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어요. 선악과는 없어요. 주께서 훼손된 것은 불로 심판해서 없습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 외에 다른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금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신약에선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인간은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 성령 받은 자와 악령 받은 자, 악센트가 강조점이 성령에 있고 악령에 있어요. 신약에는 성령과 악령의 싸움입니다. 인간은 빠져요. 성령이 승리해서 속한 사람은 성령 받은 자고, 악령이 승리한 자는 그대로 있는 자는 악령에 속한 자에요. 신약에서는 인간의 기능은 없어요. 없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걸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해서 하나님의 자기의 속성을 다윗에게 주는 거예요. 주게 되면 다윗은 한국에서 롤러코스트 타고 싶어서 환장한 아이처럼 하나님께선 다윗과 함께 시간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 등장하는 그 순간 드디어 천국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이에요. 롤러코스트를 타기 위해서 걸어 다닐 때까지 이태리에 롤러코스트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이태리에 당도할 그때에 롤러코스트가 이태리에 생기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다윗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이것을 다윗이 발견한 거예요. 알게 된 거예요. 이게 다윗을 통해서 만들어내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윗도 다윗을 빈자리 만드는 거예요. 자, 빈자리 만드는 방법, 적을게요.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어 거기에 백성들을 만들어서 집어넣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리를 따로 빈자리로 만들어요. 뭐로? for ~향하여, ~위하여, 어떤 방향성을 줘요. 그 방향성이 하나님에게는 방향성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오른손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빈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스스로 전쟁을 통해서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 전쟁의 전리품들을 여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9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이렇게 돼 있지요.
자, 묻습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①산 밑에 싸우는 여호수아의 전쟁, ②산 위에 지팡이 들고 있는 모세의 전쟁, ③지팡이의 전쟁, 몇 번입니까? 모세가 위에서 명령하니까 야 2연대 빨리 빠져야지, 모세가 위에서 명령합니까, 어떻게 해요? 안 하지요. “아하 내가 지팡이 하려니까 힘들다. 쉬었다 하자.” 이럽니까? 모세가 쉬지를 못해요. 왜? 주변에 아론과 훌이 모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지팡이가 내려가면 안 되니까 지팡이를 올리지요. 그러면 지팡이와 모세 사이에 강조점이 어디 있어요? 지팡이입니까, 모셉니까? 지팡이지요. 그럼 모세 자리는 뭐냐? 모세가 빠져있는 자리가 지팡이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빈자리에요. 주께서 성도를 빈자리 만드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우리를 하나의 모세로 만드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집어넣어야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다윗에게 “성전 짓지 마. 성전은 네 후손이 짓는 거야.” 그러면 성전 담당자가 누굽니까? 이것 참 질문도 어렵다. 하나님께서 다윗보고 “성전 짓지 마, 너는 못 지어. 너는 이 땅에 피를 많이 흘렸어. 그럼 성전은 네 후손이 짓는 거야.”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성전 담당자가 누구냐? ①다윗, ②솔로몬, ③다윗의 자손, 몇 번입니까? ③번이죠.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잖아요. 왜냐하면 이 다윗의 자손에 뭐가 빠지느냐 하면 다윗이 빠지고 그다음에 솔로몬이 빠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던 롤러코스트 좋아하는 애가 몽고 지나다가보니까 몽고에 큰 롤러코스트 있어요. 그래 이것 타고 이태리 롤러코스 포기해야지, 이럽니까? 아니지요. 솔로몬이 돌로 멋진 성전 만들지요. 그게 성전의 최종 모양새입니까? 아니지요. 솔로몬이 그 성전 지었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솔로몬 성전은 왜 짓는가? 비워지라고, 깨어지라고, 물새라고. 나는 왜 죽는가? 내가 죽어야 내 고집과 꿈이 날아갈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죽이는 그 현장이 바로 천국이에요. 내가 죽어가는 내가 비워지는 현장, 내가 사라지는 현장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어라 이 말이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뭐하고? 부인하고.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없애고, 자기를 부정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것이 다윗에게도 적용되고 솔로몬에게도 적용되고 저와 여러분에게 다 적용되는 말이죠. 이게 감격이에요. 이게 감격과 고마움과 감사였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이것은 비단 다윗뿐만 아닙니다. 이게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또는 15장에 나오는 할례 있잖아요. 그 할례 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는,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뭐든지 제단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저주하겠다는 거예요. 아까 배웠지요. 저주는 어떤 경우에 생긴다? 저주는 하나님과 무엇과의 전쟁, 하나님은 누굴 상대로 전쟁합니까? 인간을 상대로 전쟁할 때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에 준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뭐 받게 돼 있어요? 저주받게 돼 있어요. 사그리 죽어요.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전쟁할 때 이방민족은 이스라엘한테 사그리 죽었어, 다 죽었어요. 이스라엘과 푸틴의 러시아와 전쟁하면 러시아 군대 어떻게 됩니까? 사그리 죽어요. 죽을 때 이스라엘이 이렇게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어서 하나님이 우릴 도와줘서 적들을 이겼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 아니었어요. 자기 언약 편이었고 자기 율법 편이에요. 왜? 세상은 율법 외에는 다른 현실이 없기 때문에.
그 율법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아브라함의 할례언약에서 나왔잖아요. 아브라함언약에서 나왔다 이 말입니다. 할례언약이 나왔단 말은 아브라함언약에서 모세언약이 나온 거예요. 한국에 있던 학생이 롤러코스트 타기 위해서 서울에서 출발하잖아요. 출발하면서 처음에 만난 게 아브라함언약 만나고 중간에 모세언약 만나고 그다음에 오늘 본문에 다윗언약 만나고, 마지막에는 무슨 언약? 마지막에는 무슨 언약입니까? 마지막 새 언약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하나님 뭐든지 제단을 경유하라 했지요. 이 제단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을 완성시키는 피가 있어요. 레위기 17장에 이 피를 가지고 뭐냐? 생명이라 했어요. 제단에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는 생명의 모습이 뭐냐? point에요. 하나의 죽는 모습이에요. 누가?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죽는 모습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죽는 모습이에요. 피 흘린 모습이거든요.
누가 읽어볼까요? 레위기 17장 11절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율법의 완성인 생명 나오면 율법 완성된 겁니다. 율법 지키라 해서 생명 아니잖아요. 율법의 마지막 도달점이 생명입니다. 생명나무에 도달점이 돼야 율법이란 말이죠.
생명나무 있는데 여기 두루 도는 불이 있지요. 여기는 인간 있지요. 하나님이 자기 속성을 어떻게 한다? 처음에 속성을 주고,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이 생명나무를 주어먹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주실 때 이 코스가 이 노선이 뭐냐? 율법 노선이라니까요. 롤러코스트 찾아가는 노선이에요. 생명을 얻게 한 노선이 율법이란 말이죠. 그럼 율법에게 생명이 있다는 말은 왔다 가면서 거룩한 희생제물 되신 분이 뭘 흘리느냐 하면 피를 흘리는 거예요.
그 피를 흘리는 장소가 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건물 짓는다는 성전이 아니에요. 성전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스스로 비워진 그 빈자리, 하나님의 빈자리에서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이 피를 흘려줘야 피 흘린 자리가 뭐다? 그게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 피가 있으면 뭐가 있다? 생명이 있는 거예요.
그 피를 그 십자가 피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게 되면 우리 안에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이뤄낸 것이 아니고 열심 낸 게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완성시킨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피가 우리를 잡아당겨서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들어보니 되게 쉽지요.
그 과정 속에서 율법에 의해서 피기 때문에 반드시 그 피가 율법에 포위되어서 율법에 둘러싸여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오니까 그 율법을 마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율법에 합치 되지 않는 것들만 계속 우리에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거대상이 되는 거죠. 율법에 의해서 제거대상이 되고 저주받아야 되죠. 그래서 신약에서는 뭐냐? 성령과 악령의 싸움에 인간은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가만있어. 내가 성령 주면 천국이고, 성령 안 오면 없으면 그냥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지요.
그러면 천국이란 것은 성령이 오게 되면 율법대로 못 사는 우리를 주께서는 제거하고 지워버리죠. 빈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내 자리가 빈자리로 만든다 이 말이에요. 눈부신 태양빛에 정면으로 바라보면 여태 내가 본 것들이 다 뭐가 됩니까? 다 허상이 되는 거예요. 다 꿈이 되는 거예요. 꿈은 해석되지 않는 걸 꿈이라 합니다. 꿈이 해석되면 뭐가 되겠어요? 현실이 되는 거죠. 바로 그 해석자가 누구냐? 다윗이에요. 하나님은 다윗을 보내서 꿈같은 이 세상에 정답을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그럼 이제 다윗을 생각해봅시다.
첫번째,다윗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이스라엘 왕 맞지요.
두 번째,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왕 자리를 빼앗깁니다.
세 번째, 다윗은 뭐가 되느냐? 왕 자리 빼앗겼으니까 빈자리가 됩니다.
네 번째, 그 빈자리에 율법의 완성자가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완성시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감 잡았지요. 다윗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 보기에 이스라엘 왕이에요.
자, 배운 것 복습해봅시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죠. 백성들은 다윗을 왕으로 생각합니까? 무엇에 승리했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전쟁에 승리한 다윗을 뭘 했다합니까? 피를 이 땅에 많이 흘렸다고 돼 있지요. 이 땅을 더럽힌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왕 자리를, 그러니까 백성들은 다윗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고자 이렇게 해서 전쟁 승리했다고 착각했는데 인간 눈에 보이는 다윗 자리를 없애버린 거예요. 없애버리니까 다윗을 통해서는 천국을 갈 수 없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는 거예요. 전쟁은 승리했는데 나라는 있는데 하나님께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세 번째, 바로 그 점, 다윗 자신이 내가 왕이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본인이 접수해요. 내가 성도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나 같은 게 뭔 천국을 가, 하는 순간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말씀으로 내가 행한 어떤 것도 나는 율법에 합당하지 않고 주의 말씀에 부합되는 게 없음을 까발려주셨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단 거예요.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 봅시다. 아까 첫째 시간에 멋도 모르고 54분까지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시간은 약간 짧게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보세요.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제사 드려도 온전한 용서가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양 잡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늙어죽어요. 그들이 또 연약하고 흠이 많아요. 그 이야기거든요.
왜 그런 이야기합니까? 몽골이나 헝가리나 롤러코스트 스톱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이태리까지 가야 되잖아요. 중간에 뭘 배우느냐?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내가 얼마나 엉터리고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나는 내 이익만 챙기는 인간이란 것을 계속해서 그걸 주께서 복음으로 율법으로 까발려주는 거예요. “나 아닙니다. 주님, 제 행함으론 아니에요.”라는 말을 계속 해내는 거예요.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왜? 내가 아니라 나는 사라져도 내 자리는 남아야 되니까. 내 자리가 나로 하여금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율법의 완성 자리죠.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못났더라도 제사장들은 뭐냐? 율법으로 제사장 됐잖아요. 제사장도 마찬가지지만 다윗의 후손들도 계속 왕이에요. 왕인데 왕 되도 잘리고 왕 되도 나라 망하고 왕인데도 불구하고 좀 된다 싶으니까 또 엉뚱한 짓하고. 그게 유다의 왕들, 열왕기, 역대기에 보세요. 왕들이 좀 섬기고 한다 해서 되나 싶은데 나중에 뭡니까? 끝에는 우상을 섬기고 어떻게 나오죠.
솔로몬이 아까 모압과 그모스 우상이라 했지요. 솔로몬 말년에 얼마나 우상 섬긴다고 우상제단들을 많이 만들어놨는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라를 둘로 쪼개졌잖아요. 솔로몬은 성전 만든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니에요. 우리와 똑같아요. 제대로 율법대로 못 삽니다. 이거는 솔로몬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뭐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사람 아닙니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내가 온전할 수 없음을 아는 거죠.
성경을 안다는 것은 강렬한 태양빛을 눈부신 태양빛을 받는 순간 내가 살든 죽든 이거는 나와 무관한 일이란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죠. 내가 죽든 살든 그것과 나와 상관없다는 것,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와 상관없다는 것, 내가 실수를 하든 멋지게 성공하던 그게 주님과 무슨 상관이에요. 나는 제거대상인데 없어지는 기쁨이 있어야 돼, 없어지는 기쁨.
수학여행 온 시골 아이들이 서울에서 본 것, 보면 볼수록 그 아이들이 무슨 꿈을 꾸겠습니까? “선생님, 저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가서 출세할래요.” 자기 야망과 야심과 욕망만 키울 뿐이란 말이죠. 왜? 한 번 봤거든. 서울이란 동네를 봤거든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시골에서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제일 주목받는 사람이 누구냐? 오르간 치는 시골의 아가씨에요. 왜? 오르간 치기 때문에 앞에 앉았잖아요. 그래서 그 동네 모든 총각들이 교회 나오면 오르간 치는 아가씨가 이뻐서 전부 다 예배드리는지 아가씨 보는지 다 쳐다보고 있다고.
송창식이란 사람이 불렀던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담배 가게 아가씨> 있지요. 들어본 적 있어요? 온 동네 총각들이 담배 가게 아가씨가 예뻐서 그걸 쳐다봤다는 거예요. 송창식이 가사 지을 때는 원래 담배 가게가 아니고 와이셔츠 가게였답니다. 그건 중요한 문제 아니니까요. 온 동네 총각들이 담배 가게 아가씨를 쳐다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상상해봤어요. 그 동네에 담배 가게가 한군데 아니고 열군데 있다면 열군데 전부 다 예쁘다면 그 총각들의 시선은 분산될 거예요. 지금 뭐냐 하면 담배 가게가 한군데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아가씨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골에 있던 총각들이 나중에 서울에 취직하러 인천이나 구로공단이나 서울 갔다. 그래서 대기업이나 기업에 들어가서 안정됐다. 그래서 강남에서 좀 놀았다. 그러고 난 뒤에 십 년 뒤에 다시 명절에 고향 교회에 예배 참석할 때 오르간 치는 아가씨 좋아하겠어요? 역시 물이 다르구나, 물이 달라. 왜 그래요? 서울 가서 자기를 비웠어요, 더 채웠어요? 더 채웠지요.
인간이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겨서 그래요. 내가 하나님처럼 더 대단하고 더 완벽하고 더 온전한 사람 되고자 하는 라이벌로 여겨서 하나님 믿는 거예요. 좋으신 하나님, 착하신 하나님,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나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될 거야, 하는 그래서 하나님 믿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 아니면 악령. 오백 원짜리 동전 판 아니면 백 원짜리 동전 판. 모든 인간은 입 다물라. 입 다물고 내가 홀로 다 이뤄놓고, 주께서 홀로 율법을 이루시고 그다음에 그 빈자리를 채우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벌여놓은 그 빈자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이 빈자리를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출애굽기 15장 6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주의 오른손, 하나님의 for에요. 하나님의 방향성이에요. 하나님은 한쪽만 바라봐요. 오른쪽만 보는데 아들이 있는 쪽이 오른쪽이에요. 왜냐하면 아들이 권능을 행사하니까, 오른쪽. 아버지와 아들의 오른쪽, 예수님이 이 율법을 이뤄서 예수님이 권능으로써 모든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다 성취하셔서 뭐가 되시느냐? 왕이 되셔요.
누가 왕이 된다했어요? 예수님이 왕이 됐어요. 꽉 채워진 왕이에요. 이 땅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생명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다음에 생명 누구한테 주느냐, 안 주느냐는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바로 예수님 손에 달렸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가 왕이 되시고 주가 되실 때 도움 줬던 그 성령, 성령을 주게 되면 이거는 예수님 갖고 있는 영이나 성령이 도달한 그 인간의 영이나 똑같은 속성의 것을 받게 됩니다.
율법 완성을 주님만 이뤘다는 걸 받게 될 경우에 나는 율법을 완성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적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그게 누구라고요? 그게 바로 완전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룬 것이 그 사람의 빈자리에 꽉 차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와의 이 전쟁, 지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전쟁은 뭐냐? 자기의 자존심 건 전쟁이에요. 내가 얼마나 출세하는지 봐라.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아버지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드리는 훌륭한 자식이 되겠다는 되지도 않은 전쟁, 허풍과 허세뿐인 전쟁, 그 전쟁과 하나님이 나를 그 허세와 허풍을 날마다 제거시켜주고 내 꿈대로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데서 오는 감격, 그 고마움, 물 막 새고 비 막 새고.
모든 것이 다 날아가도 좋소. 상관없다는 그것. 그것을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주노니 너희는 땅 끝까지,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 나의 증인 아니지요. 나 잘남의 증인 아니지요. 누구의 증인?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더는 우리 자신의 잘남을 나타내는 증인되지 말고 나를 못난 존재로 만들어주신 그 주님의 증인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