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7a 울산강의-역대기상(22강) 21장 26절 : 전체의 전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21장 하겠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1절) 이 한 구절 주어가 사탄입니다. 사탄이 악마가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악마가 일을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 쪽에선 뭐냐 하면,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현상은 나타나요. 현상은 나타나는데 그 현상을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현상을 말로 설명하려면 전에는 이게 원인이었고, 이게 결과였고 말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해야 돼요. 그런데 이 현상이 악마가 일을 시작했거든요. 악마가 일을 시작했다면 인간세계에서는 악마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에 악마를 주민 등록할 수 있습니까? 악마가 어느 동에 살지요, 어느 시에 삽니까? 악마의 소재지가 어디지요? 거주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인간 공동체에서 악마는 없어요. 인간 공동체 내에는 악마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그 현상을 지금 역대상 21장 성경에서는 운을 뗍니다. 시작을 해요. 이것은 악마가 일으킨 일에 인간이 말리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악마가 하는 일에 수동적입니다. 저항이 안 돼요. 그래서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여기에 이스라엘이란 인간이에요. 다윗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냥 악마가 시킨 일에 같이 부대끼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에 놓인 게 인간이에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뭐냐? 신앙생활은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야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 반대말이 불신앙이죠. 신앙하는 사람을 성도라 하고 불신앙을 불신자라 하지요. 지옥 가는 사람, 불신자.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뭐냐? 차이는 불신앙 인들은 항상 인간의 말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됐고, 저랬게 된 것은 저렇게 됐다. 인간의 말로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쪽이 불신앙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겨울이 됐는데 남극에 얼음이 얼지 않는다. 겨울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얼음이 얼지 않습니다. 남극이 지구의 열과 탄소를 15%인가 함유하고 있는데 얼지 아니하면 뭐가 발생되지 않느냐? 남극의 빙하가 녹아버리면 그냥 물이 돼버리죠. 물이 돼버리면 남극 근처의 해류에서 두 가지의 층이 발생되지 않아요.
저층수라 해서 바닷물이 있는데 윗부분 말고 아랫부분, 사천 미터 아래쪽에 저층수가 형성이 안 돼버립니다. 저층수가 형성되는 것은 무거워서 밀도가 높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얼음이 얼지 않고 빙하가 녹아버리면 이게 전부 다 물기가 되니까 저층수, 낮은 쪽의 물이 성립이 안 돼버립니다. 그다음부터 적도까지 순환을 해줘야 되는데 적도 밑의 바다까지 순환을 하면서 기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이게 얼음이 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적도부터 해서 북반구까지 올라오거든요.
올라오면 해류로 인하여 지구의 환경이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걸 라니냐현상이라 하는데 엘니뇨현상과 번갈아가면서 일어나거든요. 태평양 해수면이 온도 높아지는 엘니뇨, 낮아지는 것은 라니냐현상이라 하는데 하여튼 그 현상으로 남쪽의 해류가 흐르지 않으면 기후가 패턴이 다 깨져요.
자, 방금 설명한 것 여기에 사탄이 들어갑니까, 악마가 들어가요? 안 들어가지요. 이게 불신앙적이에요. 불신앙이란 것은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고 설명하려 애를 쓰는 그런 분위기, 그런 세계가 불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묻지요. 성도의 신앙생활이 뭡니까? 이번 기회에 신앙생활이 뭔지 확실하게 정리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어요. 너무 간단해요.
목사님, 신앙생활이 뭡니까? 신앙생활이 뭐고 어떻게 하느냐? 신앙생활은 차이를 보여주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아까 차이를 제가 언급해드렸지요. 무엇과 무엇의 차이였습니까? 성도와 불신앙 인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게 뭐라고요? 신앙생활이에요. 성경지식 줄줄 외운다고 신앙생활 아니고요. 그건 인간의 언어와 언어의 나열에 불과하고요. 지식과 지식의 나열, 전개.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본인에 일어난 현상인데 본인이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본인이 설명 안 된다는 말은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원인이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불신앙 인들은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려고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 원인을 제공해버려요.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원인제공이 돼버리면 이거는 불신앙이 돼버려요. 설명 들어보니까 굉장히 간단하지요. 신앙생활이란 것은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의 결정과 어떤 판단부터 시작하는 것은 불신앙,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거는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요즘 성경이야기해도 영 자신감이 뚝 떨어져요. 맞는지 안 맞는지. 8절 아닌 줄 알았어. 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육적인 세계에서 갑자기 뭐로 도약합니까? 영적에서 어떤 원인이 개시가 되었다는 거예요. 원인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로, 내가 이렇게 했고 어떻게 교회 갔고, 말로 따라 붙이다가 결국 끝에 가서는 현상은 일어났는데 말로 할 수 없는 그 갭이 준비된 사람, 갭이 성립된 사람, 이거 신앙인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 죽이시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어요. 마리아와 또 두 사람 더 갔지만.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에 그것 신앙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정이 있어요. 참 훌륭한 분이고, 좋으신 분이고, 없어선 안 되는 분이고, 나한테 소중한 분이라서 그분의 시체라도 남아있는 우리가 잘 관리해드려야지, 하는 식으로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무덤에 찾아간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최종 기준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 좋아하고, 하나님 아끼고 관심 두니까 이게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자기는 하자가 없고 정당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있어요? 누가 기다리고 있었겠어요, 누가? “오늘 잘 걸렸다. 이리 와.” 예수님께서 옷까지 개어 옆에 놔두고 막달라 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막달라 마리아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막다른 그것과 관계없이 막달라 마리아가 끝까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끝장에서 주님께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 주님 죽으신 데까지 가는데 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은 자기한테 하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습니다. 내가 인간으로서 해야 될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것도 용기 내어서, 죽을 각오하고 갔습니다. 자기가 주님한테 책망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한 거죠.
예수님께서 딱 와서 뭐로 책망하느냐? 말씀으로 책망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그동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겠어요. 말씀 들을 때마다 말씀 듣는 자기한테 문제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왜? 너무 착실하니까. 말씀 듣는 족족 꼭 노트 필기하고, 여긴 노트 필기 아무도 안 하지만.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꼭 기억해야지. 적고 기억하고 새기는 이 일은 절대로 이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놓친 게 있습니다. 인간으로 다른 인간에게 설명할 게 없어야 돼. 다른 인간들에게 나는 이렇게 해서 주님 믿었다 하는 게 남들에게 말로 설득하거나 설명할 게 자기한테는 이게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신앙인이 불신앙 인에게 이야기하면 신앙인은 사실은 외로워야 돼, 마지막에는. 마지막에 말할 게 뚝 떨어져요. 갭이 성립되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 사이의 갭을 주께서 미리 지상에다 집어넣은 겁니다. 네가 가는 동네, 네가 앞으로 살 동네와 내가 살 동네가 이처럼 이게 갈라져있다, 찢어져있는 거예요. 건너갈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해석을 그렇게 하니까 자기는 말씀 아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존경심을 왔는데 예수님은 말씀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네가 왜 못 믿느냐 했어요. 자,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기적도 같이 보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해석의 시작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평소에 너한테 이야기했어, 안 했어?” 이렇게 되거든요.
여기서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열두 제자를 비롯해서 막달라 마리아까지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예수님만 알지 아무도 믿질 않았습니다. 왜냐? 죽으면 모든 것이 꽝이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능성, 할 수 있는 바닥 자체가 이게 찢어지는 거예요,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뭘 믿어도 이게 물이다, 선풍기다 믿어도 내가 일단 살아 있어야 믿는다는 게 성립된다고 인간들은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죽었는데 믿음은 따로 있다? 그럼 어떤 것을 믿는 믿음의 주인공, 믿음의 주체, 믿음의 결정권자? 내가 죽어버렸는데? 내가 살아 있어야 뭘 믿는다가 되는데 내가 당사자가 죽으면 우린 뭐도 날아간다고 생각합니까?
믿음도 같이 무효가 되어 날아갔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데 믿는 내가 날아가 버렸는데 그 믿음도 같이 날아가 버리면, 그러면 죽은 나는 누가 살립니까? 여러분입니까? 믿는다고 우기는 그동안 믿음생활 50년, 60년 했다고 우기는 내가 그냥 죽어버렸는데 내가 날아가 없어져버렸는데 그러면 내 믿음 어디서 찾습니까? 없지요. 내가 죽는 마당에 내 믿음도 함께 없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부하고 꾸중하는 것은, 왜 너는 너의 믿음을 죽이지 않았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판단과 모든 지식은 일단 내가 안 죽어야 된다는 조건을 유지하고 있어요. 내가 죽지 않아야 하는 조건을. 그런데 오늘 본문 역대상 21장에서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했다 이 말은, “다윗아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은 사탄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밥이야.”
사탄이 실제로 활동한다는 사실에 그것에 일어나는 결과가 뭐냐? 나는 살아 있다, 라고 묻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고 따라서 살아 있는 내가 믿는 믿음도 하자 없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올바른 믿음이다. 따라서 주의 말씀대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나는 구원받는다. 그 작은 믿음이라고 나는 잃어버리지 않고 챙겨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당시 열두 제자, 막달라 마리아, 오늘날 우리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겨자씨만한 믿음도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하는 거예요. 내 걸 일체 안 받아요. 탕수육도 안 받아요. 짜장면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처럼 주께선 주시는 분이지 우리의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에요.
방금 이게 길게 이야기했는데 이걸 짧게 줄여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인간의 모든 (새)의미는 죽음에서 나온다. 이걸 인간들이 몰라요. 오늘 악마가 다윗에게 시킨 게 인구조사였어요.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사탄이 뭐 하나님을 믿지 마라, 그런 것도 할 수 있는데 사탄이 사탄다움, 가장 악마답게, 다윗이 누구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을 시켰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인간들을 그동안 그만큼 악마가 시켰다는 뜻이거든요.
악마가 인간에게 시키는 그 많은 일 중에서 악마의 악마다움, 가장 악마적인 것, 그거는 오늘 본문의 인구조사에요. 희한하죠. 어떻게 인구조사가, 이스라엘의 정점, 인간의 대표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최정점에 있는 자가 왕이고 그 왕 이름이 다윗에요. 그 왕은 누구와 관계하느냐 하면 다윗언약이라 해서 하나님과 상대하는 대상자가 다윗이었습니다. 그 다윗을 악마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상대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악마가 다윗에게 시킨 것이 인구조사란 게, 그 인구조사가 뭐기에 그게 뭔데 악마의 악마다움이 그 안에 전적으로 함축돼 있느냐 말이죠.
오늘 이거 풀어야 돼, 안 풀면 소용없는 강의가 되죠. 그걸 제가 전제로서 방금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의 모든 의미는 어디서 오느냐? 삶에서 오는 게 아니고 죽음에서 와요. 살았다, 어제 살았다, 오늘 살았다, 내일 살겠지 이렇게 해서 자꾸 의미를 이끌어가는 데 진짜 의미는 인간의 죽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비도 오고 막 쏟아졌는데 비는 비고 우리는 할 건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의 그 한계,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떤 것으로 진리체제를 꾸미고 있는데 그 진리체제를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쉽게 하려고 애쓰니까 여러분들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살아 있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는 거예요. 네 칸막이 짓습니다. 논리를 이 네 가지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이 반대말이 뭐냐 하면, “어느 인간도 죄인이 아니다.” “죄인인 자가 존재한다.” 존재란 말도 어려우니까 더 쉬운 말로, “죄인인 자가 있기는 있다.” “죄인 아닌 자도 존재한다/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어느 인간도 죄인이 아니다
죄인인 자가 존재한다/있기는 있다
죄인 아닌 자도 존재한다/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이 말에 대해서 이러한 네 가지의 논리형식 외에 다른 형식 있으면 끄집어내보세요. 없지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어느 인간도 죄인이 아니다. 죄인인 자가 있기는 있다. 죄인 아닌 자도 있다. 이 네 가지 경우 빼놓고 다른 경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게 불신앙 자, 신앙 없는 자, 보통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여기 사탄 이야기는 없지요. 이건 인간들은 사탄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에요. 말을 바꿔볼게요. 사탄은 있다. 이쪽은, 사탄은 없다. 악마 들린 자가 있기는 있다. 이쪽은, 악마 안 들린 자도 있기는 있다.
사탄은 있다
사탄은 없다
악마 들린 자가 있기는 있다
악마 안 들린 자도 있기는 있다
이 네 가지 경우 빼놓고 인간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래서 인간은 망하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기껏 생각해도 반대되는 것, 그것도 모순되는 것, 모순이란 말 생각하지도 싫어요. 너무 생각하면 어렵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이 네 가지 경우 안에서만 인간의 생각은 전부 다 뱅뱅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다가 사탄이 있잖아요. 한 번 더 다른 걸 바꿔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럼 이쪽은? 하나님은 없다. 그럼 이쪽은? 하나님 믿는 자가 있기는 있다. 그럼 이쪽은? 하나님 안 믿는 자도 있기는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 믿는 자가 있기는 있다
하나님 안 믿는 자도 있기는 있다
인간 치고 이 네 가지 경우 말고 다른 경우, 손들어보세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지금 살아 있는 존재가 뭐냐 하면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나올 수 있는 네 가지 경우가 인간에게 전부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인간의 의미는 어디서 온다, 어디서 했어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어디서 온다? 인간의 죽음에서 와요.
그리고 그 죽음은 인간의 죽음에서 오는데 만약에 인간이 죽었다. 죽었으니까 인간은 뭡니까? 이 네 가지도 이것 생각했던 인간이 죽어버렸으니까 이 네 가지 생각도 죽는 순간 한꺼번에 저거 날아가고 없지요. 그러니까 없으니까 죽음을 끄집어내는 것을 인간은 기피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죽어버리면 인간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무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미 없는 거니까 말, 이바구도 소용없는 게 되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 잘 있는지 찾아왔어요.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보러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시체 잘 있는지 보러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걸 본다는 것, 내가 시체를 본다는 것은 내가 엄연히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시체를 보러갈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뭘 생각했겠습니까? 여기다가 예수님은 살아 계실까? 예수님은 살아 계실까 생각 안 하지.
예수님의 시체가 있다. 이쪽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 그다음에 있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있다. 이쪽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 확인하러 갔던 거예요. 시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의 시체가 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
예수님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 네 가지 경우지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경우는 이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네 번째 하나 더합시다. 지금 재미있는 게 아니고 저는 심각해요. 마지막 네 번째 하는데 이해 안 된다 하면 곤란해요. 예수님은 부활했다. 이쪽에 예수님은 부활 안 했다. 이쪽은,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자도 있다. 이쪽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자도 있다.
예수님은 부활했다
예수님은 부활 안 했다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자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자도 있다
이 네 가지 경우 빼놓고 부활에 대해서 이 세상에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예 나올 수가 없지요. 인간은 이 네 가지의 성경해석에 갇혀있어요. 이렇게 성경해석을 또는 모든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결국 돌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신앙인 맞는 것 같아. 나 신앙인 된 것 같아. 또는 살아 있는 나는 역시 살아 있어. 자기 확인하는 방법이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뭘 놓쳤느냐 하면 예수님의 시신이 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그것이 모든 인간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인 것을 본인이 그 방식에 문제 있다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여기서 사탄을 빼봅시다. ‘사단이 일어나’를 빼버립시다. ‘이스라엘을 대적하고’도 빼버리고, ‘다윗을 격동하여’에서 격동한다는 것도 빼버리고 다윗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스라엘의 숫자를 헤아렸다. 어떻습니까? 너무 자연스럽지요.
다윗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숫자를 헤아렸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보자. 다윗이, 내가 왕이지만 참 이스라엘 왕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구 많이 불고 나라가 강건하구나. 그런데 숫자가 궁금하네? 유튜브 해놓고 조회수 궁금한 것도 똑같은 거예요. 한 번 헤아려봐, 라고 상상해보라.
그렇게 생각할 때에 3절 봅시다. “요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라고 요압이 이 일을 이야기했어요.
지금 요압이 다윗이 숫자 헤아리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이스라엘로 죄가 있는 일로 그렇게 봤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근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이라면 지금보다 백배나 더할 수 있습니다, 라는 그런 생각에 근거해서 지금 숫자 헤아리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누가? 요압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요압은 믿음이 좋은 거예요,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이 본문이 방금 우리가 펼쳤던 본문 하나하나를 통해서 우리가 불신앙에서 어떤 식으로도 못 벗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돼요. 심지어 요압이라고 주께서는 그걸 신앙이라고 쳐주질 않습니다. 요압은 지금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다윗을 상대해요.
임금님, 지금 이스라엘 인구조사 하는 것 뻔히 아는데 이렇게 숫자 말하니까 본인이 왕으로서 자부심이 많아서 그걸 숫자로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요. 임금님, 그것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이스라엘로 죄 짓게 하는 거예요. 임금님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 거잖아요. 그런데 임금님이 그렇게 경솔하게 마치 자기 나라인양 나서면 안 되지요, 라는 말을 요압이 했잖아요.
그게 신앙입니까? 그게 아주 신앙인의 충고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압을 통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게 하신 거예요? 요압은 신앙이고, 다윗은 불신앙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사탄을 못 이겼는데 요압은 사탄을 이겼다? 요압이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자, 신앙생활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신앙생활이란 차이를 나타내는 것.
근데 이 차이라 하는 것은 어제 차이를 안다고 해서 오늘 그 차이를 써먹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어제, 7월 6일에 차이 나는 생활한 그것 오늘까지 못 써먹지요. 그럼 오늘은 뭐냐? 7월 6이로가 7월 7일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이 차이를 수정해줘요. 오늘 하루 더 살게 함으로서 네가 아는 차이 자체에서 그 차이가 더 뚜렷한 차이로 하루 더 살았다고 어제보다 더 또렷한 차이를 주는 쪽으로 수정이 가해집니다.
그러면 이 차이는 뭐냐? 수정한다는 것은 차이를 안다, 그다음에 차이가 흐릿하게 되는, 오늘 참 어렵다, 정말. 흐릿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 7월 6일 어제 차이를 안다고 했는데 오늘 되니까 차이가 흐릿하게 되는 경우. 분명히 저건 신앙이고 불신앙인데 오늘 일어난 일을 보니까 이게 신앙인지 불신앙인지 모호한 일이 새롭게 추가적으로 발생된 거예요.
그러니까 차이란 것은 뭐냐 하면 나와 너의 차이거든요. 신앙인인 나와 불신자인 너의 차이를 말하지 않습니까? 말하거든요. 그래서 7월 6일 나는 신앙인이라 여겼는데 7월 7일에 뭐냐 하면 신앙인이라고 여겼던 나와 신앙인 나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어렵다 했지요. 어제 나 신앙인이었잖아, 이렇게 되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와 차이가 안 나요. 그냥 어제 나, 우려먹으려는 그냥 계속 끌고 가려는 거예요. 쉽게. 어제 신앙인이니까 오늘 신앙인 쳐주세요. 이렇게 막 우기는 바가 되는 거예요.
신앙인이라 여겼던 나와 오늘의 나와의 차이점, 오늘 나의 신앙의 차이점,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가? 새로운 상황, 새로운 경로, 새로운 수정이 들어가는 겁니다. 차이가 흐릿하거든요.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신앙인이라고 우기는 나와 신앙인인 나 사이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선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이 차이는 뭐냐? 7월 6일의 차이가 아니고 오늘 7월 7일의 차이에요. 그러면 이 차이로 인하여 또 다시 순환경로, 순환되면서 내일 되면, 7월 8일 되면 신앙인이라고 여겼던 이 차이가 내일되면 신앙인이라고 억지로 우기는 나로 7월 8일에 맞이하는 주께서 이끄시는 주께서 만들어주시는 나와의 차이가 또 발생되지요. 그러니까 요압은 뭘 모르느냐 하면 요압은 과거 인물이에요. 사탄이 격동해서 다윗에게 뭔가 일을 벌이는데 요압은 과거에 근거해서 임금님 그것 잘못된 일입니다, 라고 충고하고 지적하는 거예요. 그 차이에 요압은 같이 합류돼야 되는 겁니다. 어렵지 않고 쉽게 갑니다, 이거는.
다윗이 알게 된 차이는 뭐냐 하면 몇 절이냐 하면 21장15절,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들어설 사람은 다윗 하나뿐이에요. 요압? 아닙니다. 다윗이에요. 다윗은 인구조사가 없었으면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 오르난의 타작마당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제물이 죽지요. 희생제물이 죽잖아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온다고요? 바로 죽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심지어 사탄의 활동조차도 희생물의 죽음을 통해서 이게 사탄의 일인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 어디로 갑니까? 어떤 사람은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지요. 천국 가는 것도 구멍에 들어가야 천국 가지요. 그 구멍이 무슨 구멍입니까? 예수님과 강도와 같이 달렸던 그 장소가 무슨 장소지요? 십자가. 십자가란 작은 구멍에 끌려가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인간치고 강도 아닌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강도 두 사람이 특징이 있어요. 나중에는 두 강도의 운명이 갈라졌지만 처음엔 한 통속이었습니다. 둘 다 십자가 나란히 세 개 있을 때에 예수님 사이에 두고 양쪽, 마태복음에 나와요. 둘 다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요구했느냐 하면 날 구원해주면 당신 믿을게, 이렇게 나왔어요. “자신도 구원 못 받으면서 어디 남을 구원해.” 이게 강도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의 마음이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탄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격동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다윗의 마음은 다윗에게만 주신 허락한 마음이 아니고 오늘날 누구의 마음이에요?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심지어 다윗을 격동해서 인구조사 할지라도 그걸로 인하여 다윗이 구원이 취소되거나 지옥을 가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천국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새로운 계기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계기.
제가 강남강의에서 한 강의 내용이 생각나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묵살한다. 지가 뭐 승진을 하든지 착한 일 하든지 나쁜 짓했든지 사람이 죽이고 뭘 하든지 완전히 하나님께서는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살해버려요.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 보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은 사탄이 격동을 하더라도 그것마저 구원에 꼭 필요했던 일로 만들어버려요. 베드로가 예수님 배신한다, 예수님을 저주한다하는데 예수님께서 그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 알아요. 사탄이 제자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요. 뻔히 안다고요. 아는데 예수님의 기도로 인하여 그들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에서 어떤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까? 열두 제자를 통해서 사탄이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한 수작들이 열두 제자라고 해서 예외 없이 그냥 다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것도 사후적으로 알아요. 나중에 일이 끝나고 난 뒤에. 7월 7일이 돼야 7월 6일을 알아요. 7월 8일 돼야 7월 7일을 알아요. 주께서 이끄시지 않는 구원은 없다는 것, 주께서 일으키지 않은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모든 주께서 일어난 일은 어디로 데려간다? 다윗 같은 경우에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가요. 거기에 참석한 사람이 누구냐? 다윗입니다. 다윗은 누구의 왕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모든 일로 하여금 다윗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의미가 다윗언약에 의한 희생물에서 비어있는 이스라엘의 내부에 의미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당연히 하나님께선 사탄도 이용하시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설명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까 네 가지 나눠놓고 인간은 그게 전부라 했잖아요. “모든 이는 죄인이다.” 이러한 명제에 대해서 모든 이는 죄인이다, 이걸 통해서 아까 옆에도 붙어있고 밑에도 붙어있고 네 가지 나왔잖아요. 이게 인간이 아는 전부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다가 하나를 더 붙입니다. 모두가 아닌 모두가 있다.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가 있다. 이걸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가 사탄을 통해서 드디어 그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언제? 10분 뒤에.
20230707b 울산강의-역대기상(22강) 21장 26절 : 전체의 전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숫자를 헤아린다는 이 말은 여기에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사탄의 입장에서 대적할 상대가 누구냐?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다윗이고 요압이고 사탄이 하는 일을 이스라엘 어느 누구도 다윗도 말릴 수 없고 이스라엘도 말릴 수 없어요. 요압이 이렇게 다윗을 말렸지만 여기 4절에 보면,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요압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다윗이 뭐가 잘못됐다, 다윗은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이 잘못됐다. 다윗을 그렇게 지적하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에게 인간의 타인은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내가 여기 있기 위해서 먼저 있는 게 있는데 그게 타인이에요. 먼저 있고 그 뒤에 내가 생겼는데 그 먼저 있는 타인이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입니다. 인간은 살아봤자 죽어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내가 왜 죽는지를 몰라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망해요. 어차피 죽으니까 죽음이 망하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알아야 돼요. 죽음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이 죽음에서 나와요. 우리는 죽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과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사탄과 관련돼 있어요. 여러분 잘 아는 창세기 3장에 인간에게 아담에게 죽으리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는데 그게 실제로 아담이 죽게 되었거든요. 창세기 3장에 가면 아담이 뭐로 변합니까? 흙이 되지요. 이게 죽음이에요. 아담이 흙이 된다는 말은 살아 있는 아담이 뭐로 변해간다? 흙으로 변해간다는 말이 되고 같은 뜻으로 아담의 본질이 흙으로 전환되었다는 겁니다.
같은 말로 아담의 자아가 우세한 게 아니고 아담 속에 있는 흙이 아담을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흙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네가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본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안목은 그래요. “너, 흙이야.” 인간은 흙 안 되려고 어지간히 이마에 땀 흘리고 애를 씁니다. 소용없어. 왜? 일상이 죽어가는 일상인데 죽음 자체가 일상인데 그 노력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빼버려요. 빼버리고 여자의 후손과 그다음에 뱀의 후손의 구조로 만들어버려요. 인간사를. 인간 빼고 뱀과 여자의 후손 예수님하고. 장차 메시아와 뱀하고 달랑 대표자 두 사람이 엮이고 그게 실체화되기 위해서 흘러가는 것이 인간역사, 인간세상이에요.
이런 이야기에 허무하다, 허탈하다 그렇게 느끼시면 안 돼요. 속이 시원하다. 괜히 고민했어, 괜히 고민했어, 내가. 괜히 걱정했어. 모든 걸 다 묵살해주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 행동 하나에 발발 떨고 있었던 거예요. 행여나 죽을까 싶어서. 이미 죽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살 궁리를 합니까? 있을 수 없어요.
이제 오늘 역대상 21장에서 언급해야 될 것은 죽기는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혜가 주어집니다. 어떤 특혜? 죽는 이유가 사는 방식으로 그들이 죽는 이유 곧 하나하나가 너희들을 내가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방식을 집어넣어서 주께서 일하시는 그러한 흔적으로서 이스라엘을 다루신다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는 이유도 모르지 내가 너희에게는 제대로 죽는 이유를 알려줌으로서 그 죽는 이유가 너희를 사는 이유로 내가 전화시켜주겠다는 겁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방식이 우리를 살리시는 일의 곧 그 일이 돼요. 우리를 죽이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일이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간다는 것은 이거는 즐거운 일이고 반가운 일이고 행운입니다.
여러분 일상이 보통 일상이 아니에요. 죽어가는 일상이 사는 일상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이미 다윗을 통해서 다윗언약적으로 이미 구축했고 그 방식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적용시키는 겁니다. 자, 그럼 여기서 죽이는 방식, 사는 방식이 동일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죽이시는가,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살리시는가 보면 되지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내용을 문장을 다시 적어서 다짐해봅시다. 인간의 의미는 어디서 나온다? 죽음에서 나온다. 그러면 새로운 인간의 의미는 새로운 죽음에서 인간의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죽은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능력이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일상 속에 잘 죽으세요. 그냥 죽으시면 되는 겁니다. 왜? 성도한테는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소원이 그거였잖아요. 빨리 죽어서 빨리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빨리 죽으면 내가 이 몸이 떠나면 그때는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만나기 때문에 그게 내가 사는 길이라고 본 겁니다. 죽이는 방식을 아시면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이신다 이 말이에요. 죽이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있는데 그 방식이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전선의 공포, 두 번째가 광장의 공포, 세 번째가 소멸의 공포, 두려움이라 하는데.
첫 번째 전선의 공포는 뭐냐? 줄 세우기. 한 가닥의 전선이 있잖아요. 전선에 새들이 보입니까? 새들이 보이지요. 이 전선 없으면 새는 떨어집니다. 이게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세상이 줄을 세우면 그 줄 앞에 전부 다 합니다. 서서 그 줄을 붙들고 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 줄이 나의 생명 줄이라 여기면서.
수능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이 세상은 모든 게 뭐냐? 줄 세우기에요. 헤쳐모여 줄 세우기입니다. 이 줄에 들어가면 살고, 줄에서 낙오되면 나는 죽는다. 그런 의식으로 가득 차있어요. 이 줄 세우기가 되니까 이게 바로 숫자 셈하기가 성립돼요. 흔히 말하기를 석차 매기기, 서열 매기기, 순서 매기기, 등차 매기기, 계급으로 정리정돈하기.
여러분들이 이 세상 둘러보세요. 줄 세우기 아닌 게 어디 있는지. 전부 다 줄 세우기입니다.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부터 시작해서 너 지금 직장 어디 근무하느냐? 여자들은 인물로 쫙 줄 세우죠. 저 못 생긴 것도 시집갔나, 놀리고. 이쁜 것 순위로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인간을 제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가 결혼정보회사에요.
결혼정보회사의 특징은 등록할 때는 배제대상들이 있어요. 남자 중에서 배제대상 첫 순위가 뭐냐? 탈모한 남자, 일체 등록 안 받아줍니다. 그건 여자 쪽에서 머리 빠진 남자 안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도 전부 다 줄 세우기고, 어떤 결혼정보회사 같은 경우는 연봉 오천 밑으론 돈 줘도 아예 등록도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센 게 돈 아무리 많고 아무리 집안 좋아도 탈모한 남자, 대머리 이거는 여자한테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게 그 시대가 줄을 세운 거예요.
그래서 그 줄에서 삐끗 미끄러지면 인생 끝나는 거예요. 다시 허겁지겁해서 어떻게 거기에 그 줄을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줄을 붙드는 데 또 얼마나 줄을 붙들 때 내가 먼저 저 사람보다 붙들고 발로 차기 위해서 등장하는 사람, 그걸 세 자로 사기꾼이라 하는 거예요. 좋은 자리 있잖아요. 줄 서는 데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 자기 뒤에 다른 사람들을 발로 차서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전선의 공포에서 문제점은 뭐냐? 나의 타인은 나, 세 가지 공포가 다 똑같은 원리에 적용돼요.
나의 타인은 나, 다시 말해서 나의 타인은 나란 뭐냐 하면 나의 이상형이 나의 타인입니다. 아버지 앞에 , 엄마 앞에 내가 자랑스러운 우리 집안의 남자고 여자인 것을 과시하는 것, 부모란 타인으로부터 그동안 양육 받고 교육받은 것의 그 구성물이 뭐냐? 아버지, 어머니가 원하는 그러한 아들 상 되는 것, 그게 자기의 이상형이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그걸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인간은 줄 세워야 돼요. 줄 서기가 되어야 그다음에 뭐가 가능하냐? 숫자가 헤아리는 게 계산이 돼요. 하나, 둘, 셋, 넷…… 숫자가.
첫 번째는 여러분들이 평소에 이렇게 돼 있어 어렵지 않아요. 두 번째가 어려워요. 광장의 공포라 하는 것은 광장 있잖아요. 전선은 선이잖아요. 광장이란 것은 선이 아니고 평면이에요. 평면에 김정은 앞에 군사퍼레이드 하는 것처럼 숫자로 채워지는 거예요. 많은 숫자로 채워지겠지요, 광장에. 김정은이 제단에서 보고 있잖아요. 숫자 계산해서 보고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은 생각하기를 이 많은 숫자의 광장, 나만의 내 소유의 광장을 가짐으로서 자기는 더 이상 헤아림의 대상에서 탈피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거예요. 어떤 선에 매달려서 죽기 살기로 내 생계가 마련됐다는 거기서부터 인간은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면 광장은 뭐냐 하면 내 소유의 면적을 가져서 거기서 내가 그 숫자에 포함되지 않고 나는 따로 나와서 그것을 통일성 있게 바라보는 그런 내 소유의 면적을 갖는 거예요. 면적 알지요, 면적. 가느다란 줄 말고 좁디좁은 줄 말고 면적을 갖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벌 사람들 집의 특징이 뭐냐? 저택이죠. 마당 넓은 집. <기생충> 영화에도 부잣집 마당 넓지요.
제가 약간은 충격적인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남아연방 아프리카 제일 남쪽에 있는 남아연방의 15%의 백인이 나라의 80%를 다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요. 그 도시의 사진 나오는데 고속도로가 있고요 여기는 널찍이 면적을 갖고 있어요. 정원에다 수영장에다 백인들의 저택이 있어요. 반면에 이쪽에는 전부 다 점이에요. 좁디좁은 주택을 갖고 있는 흑인들의 집단촌이 쫙 나와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사진을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거는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여기는 널찍널찍해요. 여기서 자기 소유의 면적을 보는데 이거는 뭘 하느냐 하면 바로 이걸 일자, 일자라 하면 너무 어렵다. 어려운 건 내가 싫어. 단일자.
단일자라는 것은 내려다보고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자기 자리가 위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다윗이 숫자를 셌다는 말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국가의 면적에 대해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따로 떨어져있는 자리에 내가 놓였다는 것, 이것조차도 어디서 나왔다? 공포심에서 나왔어요. 자, 이 공포심은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자신의 죽음이 타인이 안 되고 내가 버젓하게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타인, 남이 된다 이 말이죠.
이 타인이란 말이 여러분들이 타인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그런데 생각보다 어려운데 따지고 보면 쉬운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날 내가 있기 전에 많은 타인들에 둘러싸여서 우리는 교육받았고 양육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내 생각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나한테 기대를 갖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둘러싸여있어요.
제가 몇 년 전에 서울의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간 적이 있어요. 조문객이 몇 명이냐? 나까지 합쳐서 세 명이었습니다. 누가 돌아가셨는데 제 아내까지 합해서 네 명이었어요. 한 분은 돌아가신 분의 아들이 오셨고 그다음에 거기에 문상 간 사람은 우리 둘에다 한 명 딱, 하루 종일 있어도 그 네 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만큼 뭐가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을 알아주는 타인이 없지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녀들 결혼식 하는데 하객이 두 명 왔다. 어떻습니까? 갑자기 뭐가 깨져요? 광장의 공포가 확 밀려오지요. 나 인생 이래 살았냐? 평생 살아서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 이토록 적었단 말인가,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요새는 환갑잔치 안 하지만 옛날에 환갑잔치할 때는 온 동네사람 다 와서 애들 여섯 명 낳아서 전부 다 넙죽 절하고 해보세요. 마을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칠복이 놈이 복 받았다고 이야기하지요.
장례식장에 복도에 화환이 꽉 차있는 그런 집안도 있고, 화환은 하나도 없고 2박3일 동안 세 사람, 네 사람 있어보세요.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경하러 옵니다. 도대체 저 집안 우에서 사람이 이래 적나. 걱정 막 해줘요. 인간은 나라는 것은 남이 만들어요.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다윗이 나 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왕 되게 했다는 거예요.
자, 다시 첫 번째 강의로 돌아가 봅시다. 사탄이 악마가 가장 악마다운 방식이 뭐냐?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 몇 명인지 숫자를 헤아리게 했다는 거예요. 다윗이 숫자 헤아리고 싶네, 우리 인구 얼마인지 알고 싶네, 했다면 이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를 완전히 드러낸 거예요.
결국은 사탄은 뭐냐 하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숫자를 헤아리고 임금이 되어서 자기 이스라엘 나라 이만큼 많다고 숫자에 흐뭇해하는 이 일을 했다면 다윗이 노리고 있는 바는 달성이 된 거예요. 사탄이 노리는 것은, 네가 당당하고 엄연히 살아 있다 이것이 네가 존재하는 의미라는 거예요.
뭐 마귀가 찾아온다 해서 시커멓고 뿔 달린 게 아니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 악마가 격동해서 우리에게 늘 각인시키고 설득하고 독려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것 너무나 잘된 일이고 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아, 라고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면 사탄은 자기 업무가 달성된 거예요, 그게.
요압이 누굴 지금 비난했습니까? 다윗을 비난했지요. 요압이 다윗을 비난할 때 어떤 심보가 작용하느냐 하면 임금인 주제에 너무 잘난 체하지 마소, 그게 들어있어요. 임금이면 임금다워야지. 자기가 아는 성경지식, 신앙지식에 의하면 하나님 건데 네가 뭔데 왕질 한다고 저 많은 숫자의 많은 백성을 봐. 다 나를 왕으로 섬기잖아. 나 이 정도야. 그것은 임금님 잘못입니다, 라고 한 거죠.
요압은 뭐가 빠져있습니까? 요압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요압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임금은 이런 짓을 하면 안 되다는 거죠. 그런데 요압이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요압의 타인은 뭐예요? 요압을 자기 되게 했다는 타인을 요압은 누구라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방금 나왔잖아요. 요압이 뭘 믿는다? 요압의 자기 타인은 하나님이라 믿지요.
그런데 현재 다윗은 하나님 안 믿어요? 믿잖아요.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를 뭐한다? 수정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날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하는 일은 날마다 우리를 수정하는 거예요. 어떻게 수정합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결국은 뭡니까? 나를 잘되게 하는 하나님으로 그런 식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를 지닌 것이 바로 인간이에요.
그 인간을 지금 하나님이 어디로 집어넣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죽음의 의미, 모든 의미가 나오는 하나님의 죽음에 자기 백성을 거기다가 합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뭘 부추기지요? “너 지금 임금으로서 참 큰 일했다. 박수 쳐줄게. 대단하다 대단해. 너 인생 살 만큼 보람 있어. 너 성공한 거야. 출세한 거야. 잘된 거야.”
그러니까 요압이 있다가 “왕이 잘된 것을 너무 잘난 척하지 마소. 하나님 계신데 잘난 척하면 됩니까?” 하나님을 거론한 요압이나 다윗이나 기본적으로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날마다 스스로 우리에게 수정시켜 나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지금 다윗이 인구조사 하는데 여러분들한테 정식으로 묻는 거예요. 답변해보세요.
다윗이 인구조사 하려하는데 요압이 간청해서 인구조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지금보다 열배나 백배나 더 해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듣고 다윗이 인구조사를 안 했으면 무엇이 안 바꿔질 뻔했습니까? 7월 6일에서 7월 7일 가야 되는데 도로 어디서 제자리걸음하고 있어요? 7월 6일에서 계속 제자리걸음하는 거예요. “나 하나님 안다,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지. 그래서 영광 돌려야지. 하나님 앞에 죄 지으면 안 돼.”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타인은 내가 나 되게 한 것은 누구다? 하나님이다. 맞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타인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 죽음에 가야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 죽음은 여러분 예수님만 죽으신 죽음이 아니에요. 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타인은 나를 나 되게 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그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합류가 되니까 나는 이미 예수님 죽었을 때 이미 죽은 자라는 인식을 목표로 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너 죽었으니까 네 행동에 대해서 일체 입 다물고 묻지 않을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일체. 왜? 이미 죽었으니까.
십자가를 알려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까, 어느 쪽이에요? 십자가 하나님이죠. 요압이 얼마나 뒤에서 했겠습니까. “임금님 인구조사하지 말랬잖아. 안 해야 됐잖아.” 그런데 해서 몇 명 죽었느냐 하면 사흘 동안 죽은 자가 14절에 칠만 명.
여기 5절에 보면 숫자 나왔어요.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일백 십만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사십 칠만이라” 이 백성의 숫자는 다윗의 왕 됨을 높여주는 광장에 모인 사람의 숫자로 보면 되지요. 임금이 아닌 자는 광장이 될 수 없어요. 광장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줄에 매달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임금이나 다윗이나 줄에 매달린 사람이나 모두 바들바들 죽기 싫어서 떠는 데에는 똑같아요. 여기서 숫자가 얼마냐 하면,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일백 십만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사십 칠만이라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이렇게 됐지요.
여기 21장 1절 봅시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한다 했지요. 사탄의 목적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거예요.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누굴 대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스라엘을 계수해서 하나님 손으로 이스라엘을 몇 명 죽였느냐 하면 칠만 명 죽게 했다면 이거는 하나님의 승리에요, 사탄의 승리입니까?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주에서 양평까지 고속도로 뚫는데 거기 김건희 일당의 토지가 있었다. 민주당에서 김건희 가족의 땅 값 올리려고 고속도로 냈지, 라고 하니까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그러면 내가 찢어버릴게, 할 때 누가 승리한 거예요? 국민의 힘이 승리한 거예요, 민주당이 승리한 거예요? 민주당이 승리한 거죠. 그렇지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양평에 우리가 땅이 없으니 우린 편하게 이야기합니다만 여러분 집사님 집에 땅이 만 평 있다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잖아요. 소유 아닙니까.
인간세계에서 졌다, 이겼다를 뭐로 판정돼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죽으면 진 거고, 살아 있으면 승리한 거고. 땅 있는데 땅 값 올라가면 승리한 거고 땅 값 내려가게 되면 진 게 되지요. 이게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 사탄이 우리의 타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그동안 우리를 교육시켜서 그래요. 하나님은 악마를 사탄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탄 너 죽었어, 이게 아니고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너 죽었어, 이래 되는 거예요. 참 우리가 우리 평소의 생각들이 너무나 잘못됐기 때문에 이게 하나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자꾸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 있느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칠만 명 죽여 버리면 이거는 인간 생각에서 누구 좋은 일 시켰느냐 하면 이거는 사탄 좋은 일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에 부응했던 이스라엘이 교회라면 교회가 부흥했는데 하나님이 쳐서 완전히 교인수 반 토막 나게 만들었다. 하나님 좋은 일이라 생각하겠어요, 마귀 좋은 일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마귀 좋은 일로 생각하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집안에 불났다. 누가 아파 죽었다. 멀쩡한 아들이 죽었다. 그러면 이거는 사탄이 기뻐할 일이지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 아니라고 누구나 생각하잖아요.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하나님이 보세요. 사탄이 그 짓했다는 걸 하나님 뻔히 알면서도 “사탄아 내가 너 이스라엘 칠 줄 알았지. 안 쳐. 열배나 더 만들어버려.”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렇게 돼야 하나님이 사탄에게 넘어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한 게 되잖아요.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사탄에 속아서 인구조사 한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칠만 명을 죽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이번 기회에 이스라엘 속에다가 오르난 타작마당의 의미를 거기다가 집어넣기 위해서 한 겁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은 죽은 사람 조사한 게 아니에요. 산 사람을 조사한 거예요. 요압도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레위인과 베냐민을 빼잖아요. 이것 왜 뺍니까? 요압은 다윗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압이고다윗이고 둘 다 이스라엘 전체 다가 사탄이 격동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버텨낼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화를 낸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사탄이 알고 뻔히 알면서도 인구조사를 시켜서 하나님 손으로 이스라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창세기 2장, 3장에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뱀이 와서 아담을 유혹할 때 하나님이 말렸습니까, 황급하게 선악과 못 따먹게 했습니까, 안 그러면 따먹게 했습니까? 따먹게 했지요. 왜요? 왜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이 따먹으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따먹도록 하나님께서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따먹도록 왜 허용하신 겁니까?
이게 그 비밀을 둘째 시간에 약속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체, 인간들이 이해하고 관찰하고 있는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 이걸 굳이 표현한다면 ‘비-전체’ 비-전체는 결코 부분이 아닙니다. 비-전체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체에다 비-전체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허락하게 만든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에 인간들이 모르는 이스라엘이 모르는 다윗이 모르는 요압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아는 전체가 있어요. 그 전체를 알아야 다윗의 존재 의미가 생겨요. 근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지켜줬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크게 했다. 이거는 인간들이 다윗이 헤아렸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인구조사를 한 거예요.
그런데 요압은 거기서 뭘 뺐습니까? 베냐민 지파, 레위 지파 뺐지요. 그러니까 요압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다윗이 전체 지파를 헤아리라고 명령했지만 레위와 베냐민 빼고 보고를 한 거예요. 그러면 요압에게는 뭡니까? 요압에게는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참 말하면서도 어렵다.
지금 인간들 생각은 요압이나 다윗이나 인간이 전체가 생각하는 게 전체에요. 그뿐이에요. 인간들은 그 한계를 못 벗어난다고요. 제가 아까 칸막이 네 개해서 말씀드렸지요. 그 모든 것이 인간이 그걸 전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시신 잘 있는지 가보는 것,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전체에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은 뭐냐? 내가 죽은 자란 생각은 못한 거예요.
죽음이 인간 살아 있다고 우기는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에 죽음은 인간은 숫자 취급을 안 하잖아요. 그런데 이 죽음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고 이 죽음에서 새로 시작한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 돼요. 아이고, 이걸 누가 알겠노.
우리는 죽는 게 일상이에요. 우린 죽어서 좋아요. 살아서 좋은 게 아니고 죽어서 좋아요.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죽음은 변동이 없습니다. 확정 사실이에요. 이런 것을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 아니고 그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이 이미 달성했다는 것, 다 이루었다 할 때 주님만 다 이룬 게 아니고 나도 다 이루었어요. 단 조건은 내가 죽은 자라는 조건 하에 이룬 겁니다.
그 칠만 명 죽였을 때에 칠만 명 죽었다는 말은 이게 무슨 죽음이냐 하면 누구 때문에 칠만 명 죽었지요? 다윗의 인구조사 때문에 했지요. 잘 들으세요, 논리를. 다윗이 인구조사를 왜 했지요? 내 밑에 이스라엘 전체가 몇 명이냐 인구조사하면서 했던 것이 인구 셈 셌잖아요. 그러면 칠만 명 죽었다는 말은 이거는 나머지 전체가 이미 다 애초부터 하나님 보기에 죽은 존재란 뜻이에요.
생각을 반대로 해야 돼요. 칠만 명밖에 안 죽였어요. 다윗부터 다 죽여도 괜찮아요. 다윗은 그 숫자 헤아림에서 자기를 뺀 겁니다. 자기 자신을 뺐는지 안 뺐는지 모르지만 자기는 헤아리는 자니까 자기를 빼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 어차피 보고는 숫자 몇 명인지 보고 받으려면 어차피 자기는 살아 있어야 되니까. 지까지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살리는 방향으로 세 가지의 벌칙을 줍니다. 첫 번째 봅시다. 10절에 보면,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마음대로니까 다윗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겠지요.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12절) 너 셋 중에 어느 것 할래? 이게 다윗이 이스라엘 대표입니다. 다윗의 어떤 결정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 따로 있고 이스라엘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다윗 포함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전체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해버린 거예요.
제일 긴 것, 삼 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괴롭힘을 당한다. 그다음에 네가 석 달 동안 대적에서 피하여 쫓긴다. 그다음에 사흘 동안 이 땅에 전염병 퍼져서 사람들이 죽는다. 삼 년, 석 달, 그다음에 사흘. 다윗을 일은 일찍 마무리 짓고 싶겠지요. 왜? 자기 나라니까 자기 잘못한 걸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서 제일 짧은 시간을 했겠지요.
그러면서 다윗은 아직 어려운 게 남아있어요. 빨리 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이렇게 셋 중에 하나 칠만 명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 지은 것에 대해서 다윗의 징벌을 다 된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이걸로 끝입니까? 아니지요. 지금 이야기가 만약에 벌 받았다. 그러면 칠만 명 빼고 나머지 또 살잖아요. 그렇게 되면 아까 똑같이 돼요. 7월 6일 돼요.
뭐냐 하면 자기가 아는 전체에 그대로 아는 삶이 계속 가는 거예요. 추가적인 새로운 수정조항이 없어요. 성도는 날마다 수정조항이 주어진다는 것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수정조항이 매일같이 주어져야 성도입니다. 성도가 뭐라고 해야 성도입니까? 다 잊어버렸습니까. 성도란 내가 말할 게 없는 것. 말할 수도 없는데 어떤 산다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차이를 증거하는 게 성도거든요.
내가 말 못하는 것 뭐냐? 내가 아는 것은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전체는 이거는 주께서 사건으로, 사건으로 물어다주기 때문에 지금 내가 아는 전체는 내일 되면 또 전체가 아니에요. 또 다른 전체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그 다른 전체는 항상 십자가에 다 이루심의 새로운 요건과 조항들이 추가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날이 갈수록 무슨 은혜와 무슨 기쁨은 무슨 사실만 더욱 뚜렷하게 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이렇게 깊고 넓고 높고 긴지 날마다 그걸 매일 내가 죽는 일상을 통해서 알아가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세 가지 벌칙 가운데 하나를 해서 벌칙을 마감했습니다. 마감했으면 이제 이스라엘 죽이는 것도 끝났고 아까 말씀처럼 다윗과 청산할 것은 다 청산한 걸로 여기는데 그게 아니고 여기 뭐가 되느냐? 여부스 사람 오르난 타작마당 여기서 뭘 하지요? 뒤에 20절 쭉 나와요. 번제를 드리지요. 왜 번제를 드려야 되지요? 벌칙 다 치렀는데.
인간들이 아는 전체 파트에선 벌칙을 다 이뤘는데 지금 무슨 파트가 남았느냐 하면 앞으로 계속 이스라엘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모르는 미진한 남아있는 인간들이 모르는 그 전체의 전체, 그 전체의 전체를 완전히 커버할 수 있는 어떤 짓을 해도 구원이 되는 그러한 한꺼번에 다 이루었다의 제사는 하나님이 친히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베풀어주신 거예요. 화목제를 드렸어요, 26절에.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는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응답했습니다. 불 내린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대표한 제물이 죄 값으로 죽잖아요. 불 내린다는 말은 너희 다 타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다 타죽었다가 내가 타죽어 마땅하다가 마땅하다는 내용을 담아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자가 성도에요.
나는 죽었다를 감싸는, 여러분 보쌈, 쌈밥 쌈을 싸듯이 주님의 십자가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껍질 같은 남자, 여자 인간의 형상, 인간의 모습, 육체로 감쌀 때 이게 바로 차이 나는 것이고,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 되는 거예요. 그게 다윗언약이 갖고 있는 내용입니다. 벌칙 칠만 명 죽은 걸로 이제 청산했습니다, 하지 마세요.
그거는 인간이 아는 전체, “내가 과거에 죄 많이 졌거든. 그런데 어제부로 다 벌 받았어.” 아니지요. “그래서 나 이제 온전해.” 지금 온전한 건 의미 없어요.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온전하려면 앞으로 내가 모르는 것까지 미리 주께서 앞서서 값을 다 치러야지요. 그게 바로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채 하나님 이름을 불렀습니다. 주께서 자기의 사랑, 자기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들을 채택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세운다는 이 계획이 얼마나 오묘하고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한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