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14강) 신5:25(확정된 결과) 20230724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5장 22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 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절,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특히 25절이 중요한 데 24절 보고 25절 보겠습니다.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절,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적어볼게요.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질문이 안 나오지요. 못 나오는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 이런 질문을 우리가 해야 돼요. 그래야 현장감이 있어요. 그 당시 시내 산에서 저 사람은 불속에서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불이 붙은 밑에서 백성들이 보니까 활활 산꼭대기가 불이 탔잖아요. 불속에 기어들어간 건 아니지만 불속에 들어간 거예요. 누가? 모세가.
모세가 들어갔는데 ‘아이고, 뜨거워라’ 하고 금방 튀어나온 게 아니고 사십 일 지나도록 나오지 않지요. 그럼 내린 결론은 간단한 거예요. 불에 타죽은 거야. 화산이니까 불에 타죽은 거예요. 여태껏 안 내려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양식을 사십일 분 올라간 게 아니고 생수 몇 병 가져간 것도 아닌데 사십일이에요. 사십 시간도 아니에요. 사십일입니다.
죽었는데 살아서 왔어요. 사람들이 모세 걱정을 한 게 아니에요. 누구 걱정하느냐 하면 자기들 걱정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살았지만 우리는 살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이제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왜 죽어야 되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왜 죽어야 됩니까?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왜 죽어야 됩니까?
26절,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5절,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그게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녹음테이프 같은 거예요. 약간의 효과음을 부여한다면, 찌지지직, “우리가 죽을 까닭이 뭔데……” 녹음테이프 상태가 별로 안 좋아요.
뭔가 가느다란 시그널, 찌지지직,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그다음 뭔 소리야? 물론 히브리어로 했겠지만. 번역하면. 도대체 우리는 이 테이프 어디서 구했어? 이 테이프에 녹음했던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이야? 이런 SOS 다급한 위기에 터져 나오는 음성의 그 현장에 누가 있었어? 악귀야? 누가 있어서 이러한 벌벌 떠는 음성이 나오는 거야. 이게 신명기 5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명기 5장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 현장감에 같이 동참해야 돼요. 참여해야 돼요. 자, 이제부터 어떤 식으로 참여하는지 슬슬 말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들에게는 불이 보인다. 불이 보인다는 이것을 그다음에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말씀이 들린다고 보는 거예요. ‘불이 보인다’와 ‘말씀이 들린다’를 이퀄로 같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존했다고 이야기했고, 말씀이 들리는 본인들도 생존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다음의 순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생존과 인간의 생존이 겸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현장에서 이구동성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생존한다는 말은 말씀이 있다는 것, 말씀이 위에서 주어졌다는 거고, 말씀이 들리는 곳에 그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생존불가에요. 생존할 수 없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우리가 다 죽었다. 모세는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모세는 모세고, 우리는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라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불속에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 불은 인간이 감당 못하지요. 불이라 하면 데이고 나중에 죽으니까. 감당 못할 불이 동반해서 말씀을 줬다는 말은 말씀 자체가 인간은 감당할 수 있다, 없다? 감당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왜 하나님께선 인간에게 줬지요? 잘 지켜라,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감당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면서 불속에서 말씀을 준 이유가 뭐냔 말이죠.
“불아, 저리 가. 애들 무서워하잖아. 저리 가.” 내가 곱게, “우리 유치원 어린이 여러분, 이리 오세요. 내가 말씀 줄게요” 왜 이렇게 친절하게 안아주면서 감싸주면서 다정하게 보호하는 식으로 왜 말씀을 안 주셨느냐 이 말이에요. 왜 험악한 분위기 조성할 대로 조성해놓고 말씀을 준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이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죽어서 결정되는 것 아니고, 인간이 생존할 때 이미 확정된다. 자,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이 계신 곳. 지옥은 반대지요. 누가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 하나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마귀가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신을 불로 태워버려야 되지요. 불로 공격해야 되지요.
인간들의 오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갈 것이냐, 지옥 갈 것이냐?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찾아왔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인간은 마귀와 더불어 있거든요. 인간과 더불어 있는 마귀가 인간 위주의 신, 이걸 구약에서는 뭡니까? 우상.
우상을 인간들이 계속 양산하고 생산해왔던 거예요. 우상의 반대는 참된 신이 아니고, 우상의 반대는 불입니다. 자, 불의 특징이 뭐예요? 불의 특징은 있는 것도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사르다’에요, 사른다. 있었네? 없네. 다 살라버려요. 처음부터 없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수상한 것들이 계속 생산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고 저주받을 것, 저주스러운 것이 계속 양산되는 동네가 땅이에요. 그러니까 가인도 생기고, 가인의 후손 라멕도 생기고, 아말렉부터 온갖 우상 섬기는 바알 섬기는 아세라 섬기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 계속 나타나지요. 지금도 218개국이라니 얼마나 많아요, 숫자가. 많은 숫자의 국가가 생겨나잖아요.
주님은 그걸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렇게 봅니다. 있다가 아니라 황폐함으로 봅니다. 황폐함으로 보는 이거는 최종적이에요. 최종적인 것.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뭐냐? 성도란 주님이 하신 결과는 즐기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일상 삶이 이래야 돼요. 뭘 즐기느냐? 주님이 하신 결과를 즐겨야 돼요.
그럼 주님이 하신 결과가 뭐냐? 이거에요. 황폐함. 모든 있는 것들을 있었는데 어떻게 됐다? 황폐해져버린 겁니다. 이게 최종적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다고, 뭐? 말씀은 인간이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이런 것 건너뛰고 마지막 최종점을 향하여 질주합니다.
그게 뭐냐? 전 세계를 불로 싸질러서 황폐화시키는 거예요. 있다는 것들이 전부 다 황폐해져서 없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 질주하는 속도감, 어느 인간이 말립니까? 아무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누가 말립니까? 안 말리면 되지요. 말리지 말고 성도는 뭐하라고요? 즐기면 돼요. 하나님이 하시는 무한 속도가 가속 붙은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일을 그냥 즐기시면 되는 겁니다. 어째 기분 좋지 않습니까?
하신 일의 목적은 있지요. 뭐냐 하면 모든 것을 뭐한다? 황폐화시킨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성도의 인생관은 참 화끈해요. 화끈해서 좋아요. 내 자식 우에 키우고, 이렇고 저렇고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냥 황폐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복음 전파하는 데 보내면서 복음의 내용을 보세요.
복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마지막은, 이래요. 아직까지 복음이 뭐냐? 십자가 지기 전까지 복음이 뭐냐는 안 나오는데 그 끝은 결과는 나와요. 이 제자들아, 너희는 즐기기만 하면 돼, 이거거든요. 마태복음 11장 20절 21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그 뒤에 봅시다.
화가 있을 것이다 해놓고 22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그다음에 보세요.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소돔이란 뜻이 뭐냐 하면 불에 탔다. 불에 탄다는 거예요. 불에 타는 거예요. 물에 홍수 나서 죽는 게 아니고 불에 타는 거예요.
물 이야기는 노아 때로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주께서 거침없는 질주, 돌진이지요. 거침없는 돌진, 어떤 결과를 내는 황폐화된 결과를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것은 불. 제가 이렇게 하면, 불은 못 봤는데요? 그럼 말씀. 말씀이 전부 다 불속에서 나오니까. 말씀을 던져줬는데 결과는 불바다. 김정은이 서울 불바다 된다 했지요. 날아온 것은 미사일인데 서울 불바다, 이런 것.
이걸 어떻게 하자, 성도는? 즐기자. 왜냐하면 주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면 결과를 즐기는 거예요. 중간과정은 인간이 손댈 게 없어요. 손대면 안 돼요. 손대면 그건 방해죄로 수갑 찹니다. 할 것 없어요. 주께서 홀로 하시고 주께서만 하신 일에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 즐기는 내용은 여기에 황폐화되는 건데 그 황폐화된 동일한 안목을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거예요. 회개 안 하면 너희 소돔 된다.
고모라란 뜻은 뭐냐? 파묻혀있다는 뜻이에요. 둘이 합치면 그냥 파묻히는 게 아니고 불에 타서 파묻히는 동네가 소돔과 고모라. 24절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소돔 땅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완전히 황폐화된 지금은 소금바다가 됐지만, 황폐화됐다는 말은 주님께서는 그쪽 사람에 문제 있다가 아니라 지금 열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소돔의 사람, 거주민들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소돔의 거주민이라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춰서 불바다 되겠네, 라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회개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말씀대로 원래 있던 자신의 계획에 원안대로 그냥 밀어붙이게 돼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어버립니다.
구약에 요나 선지자 있지요.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를 왜 방문했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처음에 니느웨를 안 가려고 했잖아요. 왜 안 가려 했지요? 안 가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물에 빠진 사람 끄집어내서 강제로 니느웨 성을 가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요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이미 확정됐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요소가 뭐냐? 확정이 기본 요소입니다. 확정된 거예요. 인간이 새삼 손댄다고 결과가 달라질 게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확정됐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게 사명이에요. 만약에 여러분 가정에서 여러분만이 식구 가운데 복음을 안다면 식구들에게 식사 때나 수시로 확정된 것을 언급하면 돼요. “아빠, 오늘 일요일인데 치킨 시켜먹자.” “그래 치킨 사줄게.” 맛있게 치킨 먹고 콜라 따르고 있는데, “치킨 먹으면 뭐하겠노. 확정됐는데.” “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 “아아 그런 게 있어. 먹어, 먹어. 확정됐는데 치킨이나 먹어. 나중에 치킨 못 먹고 지옥 갔다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먹어라. 실컷 먹어.”
남편은 복음을 알고 아내는 모른다면 아내가 있다가 하는 말이, “여보, 우리 이혼하자.” “그래. 이혼해주지 뭐. 이혼하면 뭐하겠노. 확정됐는데.” 그 시답지 않은 이혼, 그 시시한 일, 해도 확정됐고, 안 해도 확정됐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고. 도장 찍어줄게. 우리 이혼하고 다시 만나자.” 왜? 어차피 아무 의미 없거든요.
회개하라 그러면 이혼하게 해줄게, 이런 것 없어요. 회개의 내용은 울고불고 아니라 주께서 확정된 걸 왜 그동안 내가 몰랐던가, 왜 주의 확정이 나의 확정으로 안 되었던가, 그걸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즐거움이 회개에요. 내 안목으로 살아온 인생 경험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확정된 것을 언급하는 것. 왜? 결과를 즐기는 사람이 돼야 되니까.
그 선지자 자체가 도망치기 바빠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선지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다시 이스라엘에 파견 근무시키기 위해서 니느웨를 들렀다 오게 만들었어요. 아직까지 요나는,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있고 니느웨는 이방나라기 때문에 너희는 망한다 했는데 안 망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가 누굴 대드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들어요. 왜? 확정된 대로 일 안 되니까. 확정된 것을 왜 무산시킵니까?
요나의 이 대듦이 요나서의 핵심 포인트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있음을 더 괜찮게 있음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에요. 있는 것은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하면 반드시 없음을 거치고 난 뒤에 새로이 새롭게 있어야 돼요. 새롭게 있는 게 바로 요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 몰라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갈 때 이스라엘 있다고 여겼던 모든 해석은 다 깨지고요 없다고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오직 주께서 주시는 긍휼과 은혜의 작용만이 있어줘야 없음에서 새로이, 그냥 옛날처럼 있는 게 아니고 새로이 있음이 은혜와 긍휼로서 주어지게 돼 있어요.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이겁니다. 전부 다 황폐해져야 돼요. 이게 말씀이에요.
황폐해지고 난 뒤에 그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천국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업을 예수님이 해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보내면서 그 열두 제자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십자가 길로 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길을 가는데 도중에 누가 다 빠져버립니까? 열두 제자 몽땅 다 빠지지요.
그게 실패가 아니고 그게 바로 현재 있음, 제자 있음 그 자체에서는 주님의 최종적인 확정된 것에 접근불가가 된 거예요. 접근이 안 되는 겁니다. 말씀은 예수님이 홀로 지고 가야 되지 그 말씀을 여럿이 다 지키고 그런 경우는 주님이 그걸 거부하지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말씀을 지킬 수 없다.
이걸 여러분들의 즐겨야 돼요. 두려워하면 안 돼요. 그럼 말씀을 지킬 수 없다 했으니까 못 지키면 우리는 저주받잖아, 라고 벌벌 떨 것 아닙니까? 이미 저주받았고 이미 죽었는데 더 저주받을 것도 없고 더 죽을 일도 없어요. 주께서 하신 ‘다 이루었다’의 결과를 즐기고 참여하면 되지 새삼스럽게 지킬, 전에도 못 지켰는데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아서 하면 지킬 수 있다고 교회마다 그렇게 사기를 치잖아요. 그거는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누가 지키는 거예요? 성령이 지키는 것이죠. 주체가 바뀌었지요. 성령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그 짝을 이루어서 나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고마운 일이 벌어집니다. 결과는 받아들이는 데 결과를 낳은 어떤 거기에 원인에 우리가 어떤 일도 보탤 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에요. 즐거운 우리 집이에요. 아무것도 한 게…….
이미 저주받았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인데 저주받고 죽어있는 상태에 성령이 와서 계속 매일같이 살려내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유대인들이, 우리가 죽을 까닭이 뭡니까, 하는 것은 아직까지 십자가 지가 이전이기 때문에 구약이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죽을까 해서 겁내고, 저주받을까 해서 겁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의 남은 역할은 뭐냐 하면 이제는 말씀을 주께서 협박에다 겁박을 했기 때문에 십계명 줬잖아요. 그걸 이제는 지킬 것은 우리 몫이라고 열심히 지키는 일만 남아있는 거예요. 결국 지키다가 말씀을 지키지 못할 정도가 아니고 누굴 죽였어요? 예수님이 누구 손에 죽었습니까? 말씀 지킨다는 그들 손에 죽었잖아요. 그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도해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이거에요. 너무나 무섭게 말씀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면 살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산다, 또는 내가 구원받는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할 때 여기 내가 산다, 구원받는다, 함께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결과에 본인이 보탰어요, 안 보탰어요? 보탰지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이게 아직까지 불을 무시해도 아주 옴팡 무시한 거예요.
하나님의 불은 결과용입니다. 모든 것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태우는 용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잘 지킬 테니까 남들은 불태워도 우리 이스라엘만큼은 건사하게 해주시고 건재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겁니다. 이거는 예수님 보내신 취지와 완전히 대립되지요. 안 맞아요. 이게 인간들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왜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까? 왜 이스라엘이 이런 생각을 하느냐? 그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은 그렇게 말씀 지키다가 어디로 돌아섭니까? 바알과 아세라로 돌아섭니다. 북쪽 이스라엘 그랬다, 남쪽도 오염돼요. 북쪽부터 시작해서 다 오염됐어요. 심지어 솔로몬 왕부터 오염됐으니까요. 솔로몬언약이란 게 없잖아요. 다윗언약이지. 다윗언약은 다윗 이후에 황폐화되게 돼 있어요. 황폐화되는데 모든 게 황폐화된다는 말은 결국은 다윗언약을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이 지켜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말씀은 멈추지 않는 질주하는 본능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겠어요? 황무하게 되고 황폐하게 되겠지요. 몇 년 동안요? 칠십 년. 이게 수요 설교에서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칠십 년의 의미. 내 땅 좀 쉬고 싶다는 기간이 칠십 년이에요. 그들이 자진해서 칠십 년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이방민족의 재촉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온 게 자기 힘으로 돌아온 게 아니지요. 자기 힘 다 빼고 돌아온 거예요.
와보니까 황폐해도 너무 황폐하고, 이건 뭐 다시 옛날로 다윗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없다? 못 돌아갑니다. 특히 유념할 것은 그 칠십 년 성전 짓는 사람이 그 땅에 그냥 있었던 거주민이었던가요, 아니면 포로 잡혀갔던 사람이었던가요, 어느 쪽입니까? 포로 잡혀갔던 사람이 왔어요.
사만 구천 명, 어떤 데는 사만 삼천 명, 하여튼 사만 구천 명 가까이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그만한 숫자 되지도 않아. 돌아왔을 때에 그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포로 잡혀갔던 사람이죠. 그렇지요. 약속의 땅에 없는 사람이죠.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땅에 왔거든요. 참 이런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식사하시고 졸음이 오더라도 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없애버려요. 안 없애면 자꾸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가 뭐 보탰다, 나도 애썼다, 노력했다, 말씀 지키는데 다는 못 지켰지만 이 말씀은 착실히 지켰어. 자꾸 되지도 않는 마귀가 달라붙은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구원받았는데 자꾸 뭘 했다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요.
주께서는 포로 잡혀갔는데 ‘정신 차리자. 우리 돌아가야지’ 해서 돌아온 자들이 아니에요. 재촉했다니까요. 이방민족이, 왕이, 우상 섬기는 자가 재촉한 거예요. 치욕스러워요. 치욕스럽고 무안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불도가 심한 아파트주민이 있다고 합시다. “뭐합니까, 성경공부 빨리 안 하고?” 이러고 내려가는 거예요. 누가 시켰어요, 배후에 누가 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시켰어요. 그런데 불도가 심한 그 사람을 이사야 45장에 보면 주님께서 메시아라 해요(1절). 불도 심한 메시아.
너희들이 메시아 기다릴 자격과 쨉이 못 된다는 거예요. 메시아는 하나님 손에 달려있지 너희들이 메시아 기다린다고 너희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내가 보내주지 않는다. 너희들이 기다리지 않는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없음을,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없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엄연히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만 생각하거든요. 구원이고 뭐고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어? 없지요. 그런 생각을 인간은 못해요.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아주 치욕스럽게도 우리가 반대하는 쪽에서 우리를 도와주면 나는 그 앞에서 뭐가 됩니까? 이건 뭐 정말 구원받을 가치도 없지요. 내가 무시했던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아보세요. 한꺼번에 자기의 의미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든 인간이 죽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야 돼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나 십자가까지 알았어.” 이렇게 까불대고 촐랑대지 말고, “제가 죽였나이다.” 제가 죽인 분이 오히려 구원하러 왔다는 그러한 의미를 다 담고 있어야 십자가에요. 나는 나 있음을 포기한 적이 없는 고집스러움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해도 내 있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봐야 주께선 받지를 않아요. 주님을 자기를 포기했는데 우리는 포기할 줄을 모르는 존재에요. 그런 인간들이 예수를 찾는다고? 그 예수 수상한 예수입니다. 가짜에요. 내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일체 없음을 알게 하시면서 십자가가 다가오는 거예요.
어떤 노래의 가사를 적어볼게요. “내가 내리는 소리, 님이 오시는가보다” 이 가사 혹시 생각납니까? 송창식 노래에요. 여러분들이 어제 밤에 비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비 오는 소리 들어보세요. 꼭 발자국소리 같아요. 처벅처벅처벅. 그런데 이 가사 쓴 사람은 비 오는 것을 자기의 여망을 담아버려요, 자기 마음의 소망. 헤어진 임이 얼마나 기다렸으면 비 오는 소리가 임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겠습니까. 그렇게 되겠지요.
인간에게는 뭔가 인간은 본인을 지울 수가 없어요. 본인이 본인을 없애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인간은 뭔가 그리워해요. I'm missing you. 최고의 사랑 표현이, 나는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항상 너무나 그리워하는 거예요. 이 그리움 때문에 인간이 망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직도 메시아를 그리워한다고. 지가 죽여 놓고. 자기 마음에 드는 메시아를 원해요.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쳐들어온 메시아는 진짜 우리를 구원한 메시아는 우리가 그리워한 임이 아니었습니다. ‘너, 죽었다’ 이러고 오시는 거예요.
요나가 스스로 생각했던 선지자 직은 멋있게, 말발 써서 “너 다 죽어. 회개해.” 하고 자기는 팔짱 끼고 산위에 올라가서 망하기만 기다리는 거. 그러니까 결국 선지자 인간성이죠. ‘나는 하나님과 한 패 먹었고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그걸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게 최고의 어떤 성도, 성도가 아니지. 교인, 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의 최고의 희열이 바로 그거에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어제 설교 시편 이야기했지요. 118편 6절,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하나님이 내 편 되시니 그다음에 사람이 어찌하리요. 그때 ‘나’가 누구냐 말이죠. 인간? 아니지요. 나? 아니지요. 누구십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어떤 누구도 인간은 천국 가면 안 돼요. 그냥 인간은 황폐해져야 돼요.
왜? 말씀의 불이 인간보다 더 우세하기 때문에. 불로 싸질러야 돼요. 그리고 황폐해야 돼요. 너나 할 것 없이 다 황폐하고 약속의 장소에는 아무도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다시 우리의 본래의 자리, 약속 없는 자리로 전부 다 원상 복귀시킵니다. 이게 말씀의 효력이에요. 말씀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말씀도 없고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돌려보내고, 그 돌려보낸 위력으로 다시 되찾는 겁니다.
던져놓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애들 놀이기구에 그런 것 있지요. 갔다가 멀리 갔는데 어어 하다가 벌써 걱정하지 마, 하고 쫙 당겨버리죠. 또 보내고 다시 댕기고, 그것. 그렇게 왕복하면서 주의 은혜가 솔솔 합니다. 계속 갈수록 주의 은혜가 커지지요.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하는 거죠.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 맞춰보세요.
어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코끼리를 만났어요. 코끼리가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도망쳤는데 도망치다가 우물에 빠졌어요. 우물에 넝쿨이 있어서 넝쿨을 잡았어요. 손 놓으면 우물이 너무 깊어서 떨어져 죽고, 기어오르면 코끼리가 잡으려고 달려들어서 죽고. 이제 의지할 데는 넝쿨 줄기 밖에 없어요. 그래서 넝쿨 줄기로 버티자 이러고 있는데 세상에 하얀 쥐, 까만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넝쿨 줄기를 갉아먹네. 어쩌나 싶은데 갑자기 얼굴 입 주위가 달콤한 게 있어서 입속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달콤해. 꿀이에요.
바로 이것이 방금 이야기한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불경에 부처가 비유로 했던 것을 모아놓은 책이 있어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예화에요. 거기서 우연히 코끼리를 만난 것은 무상의 세계, 인연을 다 모르니까 질서를 다 파악할 수 없으니까 코끼리를 만나고, 그다음에 하얀 쥐, 까만 쥐는 밤낮을 의미하면서 매일같이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무상의 세계에서 세월이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
그런데 꿀은 뭐냐? 꿀에 대해서는 부처가 다섯 가지 이야기했어요. 첫째는 재물 욕심, 달콤하니까 달콤한 것. 부처는 달콤한 걸 골라봤어요. 재물욕, 성욕, 명예욕(남한테 칭찬받는 것), 식욕(먹는 것) 얼추 다 됐지요. 한 개를 더 보탭니다. 수면욕, 자고 싶다. 부처가 문제를 던지지요. 이렇게 다섯 가지에, 지금 죽는 걸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세월 지나면 나락에 떨어져서 죽게 된다는 지옥 간다는 그걸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돈과 성욕과 명예욕과 식욕과 수면욕 여기에 빠져서 자기의 현재 형편을 감을 못 잡고 있다, 하고 부처가 예를 들었어요.
해결점이 뭐냐고 묻는 거죠. 여러분 해결점이 뭐예요? 부처가 뭐가 잘못된 겁니까? 오늘 신명기와 관련해서. 부처는 지금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어요. 결과가 뭡니까? 모든 것이 불로 싸질러 황폐화된 거예요. 그런데 결과를 모르는 이 부처 이야기, 부처는 뭐냐? 악마의 화신이죠. 마귀의 화신인 거예요. 마귀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평생 닦달 내며 쫓아오고 있었던 거예요. 심지어 교회까지 쫓아왔지요. 심지어 강대상까지 올라가서 설교하고 있어요. 마귀가.
당신 죽어, 그 말은 거짓말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죽어요. 자꾸 죽어, 똑바로 해 이 말은 뭡니까? 네가 잘 되는 걸 네가 해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부처이야기고, 마귀이야기에요. 어떻게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부처를 통해서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주는지 고맙다 불교야. 방금 이야기한 것 불교이야기지요. 이번엔 작가이야기, 소설가. 유명한 소설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두 새댁이 친구 사이인데 주인공 여자가 자기가 파티에서 인기 있는 옛날 아가씨 때 잘 나가던 그 잘남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직 안 뭉개졌다. 결혼해도 나는 아름답다, 그걸 하기 위해서 파티에 나갈 생각하니까 남한테 주목받을 만한 끌 만한 게 없어요. 보니까 친구한테 다이아 목걸이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친구한테 다이아몬드 목걸이 좀 빌려줘, 해서 파티에서 멋있게 주목 확 받았어요. “잘 사는 모양이다. 시집 잘 갔구나. 다이아 보니까 굵은 게 있느냐.”
그러다 그만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렸어요. 의리는 있고 친구는 잃기 싫고, 그래서 지가 사채업자한테 빚을 내서 그만한 다이아몬드 가치를 친구한테 똑같은 걸 사주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십 년 동안 일하다보니까 완전히 팍삭 늙었어요. 삭아졌어요.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너 왜 그 모양이야. 고생 되게 했다.” “네 다이아몬든 빚내서 사주고 난 고생했다.” 친구가 하는 말이, “그 다이아몬드 가짠데?” 이게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소설이에요.
왜 마귀는 나라는 인생 자체가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라고 이야기를 안 해요? 마귀 지도 가짜거든. 마귀 지가 가짜 신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저 열심히 의리 지키고요 정의 있잖아요. 정의 지키고 사랑 지키고 참되고 바르게살기, 경북여고 교훈처럼 진선미, 참되고 바르고 아름답게. 이게 가짜라니까요. 우리는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열심히 살면 나중에 고생 뒤에 뭐가 나온다? 낙이 있겠지. 그거 가짜에요. 낙 없습니다. 모든 것은 불로서 싸질러버려요. 소돔과 고모라가 주께서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결과에요. 그냥 질주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 새삼스럽게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이게 아무 우리 인생에 방향에 전혀 보탬 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나는 구원 안 받아요. 예수님이 누가 구원받는가? 그리스도 몸이 구원받지요. 결국 오늘 이 시간 다 이야기한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한다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천국과 지옥은 살아서 결정내지는 확정된다.
어떻게? 바로 뭐가 주어지는데? 말씀, 약속으로 이미 확정됩니다. 꼭 죽어봐야 천국, 지옥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 안에 주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그 주님의 계획에 맞춘 주님의 안목에 함께 할 때 이미 그 사람이 주와 안목을 함께 했기 때문에 주와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몰라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 딱 줄 때 불 안에서 말씀 하는 이유를 몰랐던 거예요. 그냥 불 빼고 불 없애고 그냥 좋게, 좋게 다독거려가면서 이런 것 하나 먹고 우리 성경공부하자, 이렇게 착하게 해주시면 우리는 그 하나님에 감복해서 하나님의 다독거림과 사랑에 감복해서 말씀 잘 지키겠습니다. 다는 못 지키지만 최선의 노력은 한다는 그거는 주께서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이 노력한다는 그것만큼은 주께서는 고개 끄덕이면서 그래 약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래 합격,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것이 결국 뭘 낳았느냐? 이스라엘에게서 우상을 낳은 거예요. 나중에 신약에 가면 여호와 이름의 우상, 메시아란 이름의 우상을 낳은 거예요. 결과는 모른다. 그러니까 최선의 노력은 다해야 된다.
공자 말에 그런 것 있지요. 인간의 할 도리는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딱 문자 나오잖아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옛날 국민학교 때 다 아는……. 그게 인간의 할 도리는 다하고 결과는 맡긴다? 주께서 말하기를, 결과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결과 나왔잖아. 소돔과 고모라, 시범 조에요, 시범 조. 베드로후서 3장, 옛날에 물로 망했지만 앞으론 불로 망한다고 분명히 예언했잖아요. 왜 새삼스럽게 다른 생각을 왜 해, 다른 생각을.
뭐 똑똑하다고, 지혜롭다고? 십자가 앞에서 똑똑한 것도 필요 없고 지혜로운 것도 필요 없고 최선을 다한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다 이뤘어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 이야기잖아요. 다 이루었다. 네 것 끼어들지 마라. 끼어 넣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우리 인생이 예수님 움직임 같이 끼어든 톱니바퀴처럼 같이 다 이룬 채로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강냉이도 먹으면서. 그 자체가 다 이루심이에요.
주께서는 말씀대로 저주받았습니다. 저주받기 전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끝부분에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에 불로 심판하고 모든 것이 통곡의 소리가 울릴 것이다. 황폐하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만 너희는 끝났어, 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은 못 알아들어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왜 자꾸 떠나려고 하지? 같이 살면 될 텐데.” 아니에요. 이 세상은 같이 살 곳이 아니고 이미 버리기로 작정된 곳이에요.
주께서 떠나고 없음에서 없던 데서 자기 백성 데리고 다시 있음, 있는 세계를 구상하는 이것이 바로 천국이고 남아있는 이곳은 바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천국, 지옥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 확정되었고, 이 확정을 위해서 예수님 살아 있을 때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은 끝났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가는 겁니다. 그걸로 끝난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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