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설교 질문 20230626
어제 낮 설교에서 시간 관계상 빨리 지나가는 대목이 요한복음 4장 이야기였습니다. 육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육이 뭐냐? 육은 육이 설명되지 않으면 영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영을 설명하기 위해선 반드시 육이 출발점이 돼야 되겠지요.
세례 요한이 바로 몰랐던 점이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비로소 나타난다는 거, 구원이 죄 있는 곳에 구원이 있지 죄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은 그냥 박살나면 된다고, 유황불로 박살내면 되지 그걸 왜 따지느냐 하는데 인간들이 세상을 박살낸다는 의식은 그냥 박살내는 것만 즐거워하지 죄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박살내버리면 주님의 언약은 죄가 분명히 이것이 죄다, 이거는 의다 분명히 하는 취지로 언약을 주셨단 말이죠.
이게 육이야, 이게 영이야. 분명히 그걸 끄집어낸 게 목적이에요. 그냥 인간 안 되는 것은 박살내시고 인간 되시는 분은 천국 넣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면 그 인식 자체가 육이에요. 주의 뜻은 축복과 저주,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데 있는데 인간은 “나 축복 받고 싶어요.” 중간에 불쑥 엉뚱하게 튀어 들어온 거예요. “나 복 받고 싶어요. 나 저주받기 싫어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서 끼느냐 말이죠. 주님의 일인데.
주님의 일은 내가 주는 대로 먹어. 저주주면 저주 먹고, 복 주면 복 먹어. 그냥 내 주는 대로 먹어. 강도가 두 사람 있는데 지옥 가면 지옥 가고, 천국 가면 천국 가는 것이지 천국 가고 싶어요, 지옥 가고 싶어요, 자체가 그거는 중간에 있는 십자가, 양쪽 십자가 말고 중간에 십자가 계신 주님의 고유 권한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립 안 되지요.
육이 없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육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육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영이 등장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육이 뭐냐?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가족에 물이 없어요. 물이 없으니까 우물에 물 길러 와야 되지요. 지가 생수공장 사장도 아니고. 거기는 하자가 없고 거짓이 없고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자기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진실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진실은 육에서 나온 진실이죠. 육에서 나온 진실은 그 마감이 영으로 도달하지 못하고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육에서 나온 진실은 도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육으로 가버려요. 폐쇄된 거예요. 육의 세계 안에 폐쇄된 겁니다. 육에서 나온 것이 육이라 했으니까 요한복음에.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육 되기 싫어, 영 되고 싶어요, 라고 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과정으로 절차로 사용해버려요. 하나의 흐름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생각하다고, 변화로.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다, 라는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겁니다. 육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싫든 좋든 관계없어요. 육으로 태어나게 해서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육이었고, 육이었고, 육이었고 그래서 마지막에 육이에요. 우스갯소리로 그게 666인가? 그건 아니고요, 농담이고요. 그 숫자 6과 이 육은 다르겠지요.
영은 영이라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식으로 하면 영으로 난 것은 영이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는 어떠한 접합점도 없겠지요. 있을 수가 없지요. 육이 노력한다고 영이 되지 않는다는 어제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은 성령이죠. 예수님이 영이다 이 말이죠. 영이 어떻게 육과 만날 수 있느냐? 오늘 신명기 강의와도 관련 있어요. 어떻게 영이 육과 만날 수 있느냐? 육은 영을 못 만나요. 육은 영을 못 만나는 데 영도 육과 인간적 입장에선 만나지 못하는 데 주께서는 만남이 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영이 육신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모든 시작은 진리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진리라고 돼 있어요. 볼까요? 여기 나오네요.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인간의 육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와 은혜가 어디 담겼다? 죄 있는 육신에 담겨서 오는 거예요.
그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지요. 육신 자체에 한껏 품고 있는 독생자의 영광이 영광이에요. 그 외의 영광은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초라한 영광, 인간들이 기피하는 영광 어떤 인간도 받아들이기가 난처한 영광. 왜 독생자의 영광이 그렇게 왔느냐 하면 철저하게 육을 육으로 해서 영에게 접근하는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이 없어요. 이것은 바로 종교부정이에요. 모든 인간에 나온 지혜와 지식의 결집이 종교거든요.
진선미, 가장 아름다운 것(미) 예술, 선은 윤리, 가장 거룩하고 지혜적으로 가장 진실한 것, 이 세 가지 진선미,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에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통령 부인들이 많이 다닌 경북여고. 그 진선미를 인간은 종교의 이름으로 종교에다 다 집어넣었어요. 가장 선하게, 가장 아름답게, 가장 순결하게 순수하게.
그런데 그 순결하고 진실 된 그 자체가 그들은 진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최종 진리, 윤리적으로 순수, 거룩이죠, 경건. 그다음에 아름다움, 이것이 최종적으로 인간에게는 점선으로 돼 있어요. 지향한다는 거예요.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과거에 있다면 이 중간 과정에, 과거에 선으로 그어도 괜찮아요. 출생해서 가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고 있죠.
이 자체에서는 연결점이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이게 진리가 나를 부르는 거예요. 그럼 진리가 부른다면 진리와 자기 현재 사이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거예요. 노력만 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서 기도하는 데 목이 마르다. 목마를 때 물을 찾지요. 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야곱의 우물 찾든지 요셉의 우물 찾든지 우물 찾아와야 되지요.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야곱의 우물 가봤어요.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와요. 그때 그 현장에 왔지요. 그곳이 아니라는 설이 있어도 난 무시해요. 내가 야곱의 우물이라 하면 우물이라. 왜냐하면 야곱의 우물이라 표시해놓고 전부 다 있으니까 그런 분석은 고고학자들이 하라 하고. 중요한 것은 우물물 길러 온 이게 뭐냐? 이거는 진리니까 오류가 없다. 목말라서 물 길러 왔다.
이게 뭐가 어려워요. 내가 목마르고 싶어서 목마릅니까? 목마르다 이 말이죠. 그럼 목마르면 내 몸이 뭘 요구한다, 이 육이 뭘 요구한다? 물을 요구하고, 나는 물을 얻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서 물동이 들고 우물가에 와야지요. 이 순서에 무슨 하자가 있고, 무슨 잘못이 있고, 무슨 죄라고 규정할 게 어디 있느냐 그 말이죠. 자연스럽게 돼 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선 뭐냐 하면 그 자체가, 그리고 그 여인이 종교를 갖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데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립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질문을 하나 하더라도 자기의 프레임, 종교 프레임에서 안 벗어나요. 내가 안정적인 체계를 다져놓고 안정적인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범위에서 질문이 나오지요.
얼마 전에 광주강의에서 했지요. 광주강의에서 질문을 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속히 망합니까?” 왜 이 내용을 포함시켜서 질문을 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주여, 어떤 방법을 하면 꼭 지옥 갈 수 있습니까?” 그러한 내용을 왜 기도할 때 안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그 자체가 주님 보기에 반칙인 거예요. 진리라 이야기해놓고 일방적이라. 진리라 해놓고 반 토막내버렸어요. 지옥은 나와 상관없고. 누구 마음대로 상관이 없어, 누구 마음대로. 거기에 지가 질문 해놓고 해결책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오류가 없단 말이죠. 목말라서 우물에 오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은 이런 뜻이에요. 네가 왜 목마르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 목마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자에게는 지난번에 우물에서 물 길 듯이 남자 다섯을 건졌어요. 옛날에 물 길러 왔어요. 내가 그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여인은 예뻤다. 매력덩어리였다. 만약에 그 여인에게 이름이 안 나옵니다만 이름을 붙인다면 수산나, 또는 수산나보다 더 고상하게 수잔나. ‘ㅅ’보다 ‘ㅈ’이 훨씬 더 진선미에 가깝지요. 수잔나. 앞에 성은 오, 오수잔나.
출발점을 주께선 지적을 하는 겁니다. 목마른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나한테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는데, 라고 하죠. 그러니까 그 여자가 미끼에 걸린 거예요. “주세요, 그 우물 주세요.” 그 목마르지 않는 우물 달라하지 말고 왜 네가 목말라야 했는지를 문제 삼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목말라서 물 길러 오는 이게 오류가 없는 진리라고 우기는 이 진리체제가 이게 전체가 뭐냐 하면 육에서 육으로 가는 절차에 불과한 거예요. 살다보면 결국은 지옥 가는 거예요. 꼭 지옥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고 살다보면 참기름 발라놓은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그냥 지옥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처음엔 이래이래 가지만 나중엔 쑥 내려가지요.
개님이 15년 동안 살았답니다. 내가 보니까 곡기를 끊었어요, 맞지요? 곡기를 끊고 드디어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개나 인간이나 똑같지요. 싸악 미끄러져 이거는 저항할 수 없어요. 없듯이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으로 가는 겁니다. 젊을 때는 경사도가 좀 낮아서 편평하게 가는 줄 알고 이래 생각하죠. 그런데 가는 겁니다. 물론 귀신 붙으면 돼지 떼로 달려가지만.
노선 변경을 시켜주는 거예요. 시작점을 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뭐냐? 영으로 생각할 마음이 없느냐, 영으로. 영으로 해야 돼요, 영으로. 그러니까 여인이 하는 말이, 우리는 종교가 있습니다. 출발점을 종교가 있는데 우리가 어디서 어느 장소에서 섬기면 됩니까, 라는 거예요. 어느 장소에서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라고부터 질문을 던진 것이 그들의 종교의 시작이었지요. 예수님은, 나부터 출발하지, 나부터.
다시 말해서 너로 하여금 네가 감추고 싶었던 육적인 과거사, 그 과거사를 지적을 하는, 지적하는 과거사 몽땅 내가 책임질게와 같은 말이에요. 누가 내 과거사를 안다는 것은 과거사를 네가 품지 말고 주님한테 인수인계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에게 나의 이야기가 있다, 없다? 없지요. 전부 다 예수님의 스토리,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지난번에 대전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과거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는 지금 없습니다. 권사님, 어제 일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어제 샀던 옷은, 몇 년 전에 샀던 옷은 입고 계시지만 그 옷은……. 어쨌든 과거 것을 잊고 있지만 그 과거는 날아가 없어요. 인간은 얼마나 미련한지 없어진 것에 집착을 하고 있다? 이건 귀신 들린 거지요. 주님이 없앴는데 네가 왜 집착하느냐 말이죠.
그러면 하루는 뭐냐? 하루하루 매일같이 선물이 되지요. 그게 샘솟는 샘물이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내가 노동해서 채워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그 출발점으로 영으로 교체를 했다는 효과로서 매일 신선한 물이 신선한 경험이 주님의 이야기, narrative 우리말로 하면 서사에요. 주님의 서사, 주님의 스토리에 담긴 일부로서 우리에게 너한테 줄 이야기는 이거야, 라고 매일같이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 여자가 소유한 게 아니고 여자는 예수님한테 소유 당해버린 거예요. 그러니 아까 질문, 왜 영을 이야기하면서 여자가 물 뜨는 게 왜 육이냐, 왜 네 과거 남자 다섯 명이고 지금 다 헤어졌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고 있다. 그 이야기가 왜 꼭 필요하냐? 그것은 바로 여자를 예수님 자기 이야기에 그 순간에 시발점으로 주님께서 그걸 채택했다는 선택했다는 그것이 우리 속에 도달된 이미 하나님의 영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몰랐던 과거까지 소급해서 전부 다 그걸 치환시키는 거예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일이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과거사, 그때 그래선 안 됐는데 세 번째 애 안 낳으려했는데 낳아버렸으니. 그것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너 같은 남자 만난 걸 후회한다. 아니에요. 만났어야 했었습니다.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의 이야기로 항상 새롭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치환되고 내일 되면 또 과거사까지 다 주의 일이고 매일같이 그렇게 돼야 돼요. 왜냐하면 우린 복음 들을 때는 주의 은혜입니다, 해놓고 무슨 일 하나 터져버리면, “지난번에 잘못했다고 주께서 보복하기요? 주께서 이렇게 뒤끝 있네. 날 또 치시네.” 이렇게 자기의 순서를 못 버리고 또 그렇게 한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다룰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이미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잊지 말아야 됩니다. 질문에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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