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0강) 히11:4(뒤바뀐 효과) 20230724b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라고 할 때 항상 처음에 나오는 것은 바로 제사부터 시작이 됩니다. 제사에 대해서 63페이지 위에서 보면 아벨이 나와요. [하나님의 약속은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서 의인을 위해 보복하시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계획이지만 인간의 관심사는 천국과 지옥이 아니고 이 땅에 살면서 복과 저주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천국과 지옥은 나중 문제로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천국이나 지옥 가느냐가 아니라 복을 받고 사느냐, 저주받고 사느냐 그게 주관심사에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뒤바꿔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복을 원한다. 인간은 저주를 원하지 않는다. 이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의 이 기반, 바탕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시고 문제 삼으신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되찾아갈 때 그 바탕을 노리고 들어가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음이 자기 바탕을 숨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숨기면서 바깥에 드러난 것은 ‘복 주세요’에요. 저주는 저리가고 복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기도는 뭐예요? 바깥에 나오는 속마음을 그대로 말로 드러낸 게 바로 기도지요. 기도 대상은 신입니다. 인간 있고, 인간이 기도하고 말하고, 그리고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있고. 삼종세트지요. 하나를 빼면 안 돼요. 세 개 다 세트로 있어줘야 기도가 성립되고 그게 제사화 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게 나중에 기도가 될 때 그냥 기도하면 좀 미안하잖아요. 뭔가 좀 드려야 되지요. 바쳐야, 바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바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도 염치없는 게 아니고 당당함이 스며들 수 있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바로 원하는 복을 원하고 원치 않는 저주를 제거하는 하나의 스킬 기술, 방법을 고안한 게 인간의 종교라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있지만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걸 알 수 없잖아요. 그러면 인간에게 한 것은 누구 몫이라 생각한 겁니까? 무한을 관장하는 인간보다 뛰어난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신께 좋은 관계 유지해서 내가 원하는 복을 얻겠다. 이게 바로 이슬람, 불교, 기독교, 유대교 모든 인간의 종교는 여기에 기반, 바탕을 여기다가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숨겨놓은 바탕을 경유해서 말씀을 줘요. 그러면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내가 숨겨놓은 기초가 말씀 안에 들어있겠지요. 그러면 말씀 해석은 어떻게 하면 돼요? 그걸 누비질이라 하는데 누빔이라 하는 것은 옛날 가정주부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솜이불 할 때 굵은 바늘로 누비지요.
이불을 손질할 때 바느질해서 다 하잖아요. 요새는 서문시장 가서 돈 주고 중국산 사면 다 되지만 옛날엔 손으로 일일이 다 했다고요. 그것으로 하루 온종일 다 보내요. 누빈다는 것은 외부에서 뭘 들어와서 떨어져있는 두 부분을 실과 바늘로 강제로 하나로 엮고 묶는 것을 누비질, 바느질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내세우는 괜찮고 고상하고 거룩한 일을 통해서 나와 이걸 받는 하나님과 우리가 누비질해서 꼼짝 마라하는 식으로 붙잡아두는 거예요. 붙잡아둬서 나에게 복 주실 하나님이 나에게 떠나가지 않도록 그걸 항상 고안해낸다니까요, 인간은요. 그걸 흔히 젊은 사람들은 징크스. 축구선수가 경기 전에는 머리를 안 감는다든지 하는 징크스.
내가 머리 안 감는 행동에 대해서 여러 번 실험해봤지만 머리 안 감을 때마다 한 골 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축구의 신은 내가 또 머리를 안 감음으로 말미암아 신도 어쩔 수 없이 나의 성의 표시에 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가 아는 신이다. 내 쪽에 묶어두는 거예요. 신을 달라붙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인간이 고안한 최초의 종교지요. 그러니까 종교인만 종교가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다 종교적이죠. 괜찮은 것 나한테 묶어서 “복아, 나한테 들어왔으면 떠나지 말고, 떠났거든 후딱 다시 오너라.” 이걸 저는 기반이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바탕, 기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걸 개념을 넓히면 자리인데요. 인간의 원래 기반은 어디 있느냐 하면 낙원, 에덴동산이 기반이었습니다. 강제 추방되었지요. 강제 추방이 이건 제거된 겁니다. 처음부터 어려워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제거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제거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홀로 버려지는 것을 인간은 싫어해요. 무서워합니다. 무섭다는 건 공포지요. 공포란 뭐냐? 홀로 남겨진 거예요.
이거는 성질이 나빠서가 아니고 못 돼서가 아니라 모든 아이는 공포를 갖고 있어요. 엄마가 조금이라도 자기 곁을 떠나면 안 돼요. 울어버려요. 화장실에도 못 가요. 화장실까지 따라가야 돼요. 제거가 주는 공포가 인간 속에 가장 깊숙이 들어있는 공포의 이유입니다. 두 번 다시 제거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누가 내 곁에 있어줘야지 내가 홀로 남겨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친 말이 뭐였습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그다음에 뭡니까? 버리시나이까.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그 경험 속으로 주께서는 풍덩하고 거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왔는데 그 예수님 이름 자체가 예수님 하는 일과 연관돼 있어요. 예수님 이름 자체가 뭐냐? 그걸 마태복음에서는 내용을 따로 떼서 이름을 붙인 게 있어요. 겉으로는 구원이란 예수,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예수지만 내용은 뭐냐 하면 임마누엘이에요.
구원하는데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내가 인간과 함께 할 것이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인간과 하나님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원래 바탕, 낙원에 있을 때 바탕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겁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
여러분들은 복음을 아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안다 치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하나님이 목적이죠. 전부입니다. 이 인간이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버리고 일을 추진해요.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위암 걸리거든 십자가마을에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요.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잖아요. 이런 게 어려운데요. 아담에게 무슨 일을 시켜요. 창세기 2장에서 무슨 일을 시키느냐 하면 나 만들었다. 잘 살아라가 아니라 어떤 일을 줘요. 그 일이 동식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일을 해요. 이름을 지으면 아담이 그 이름 지은 동식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범죄하고 타락했으면 덩달아 동식물도 같이 인간 때문에 다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리한 사명을 맡겼네, 라고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아담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그러니까 생각해보세요. 이름 지음을 받은 자가 이름을 짓게 됩니다. 그러면 아담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름의 기능에 대해서 어떠한 원인과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이름 지으면서 자기가 누구한테 이름 지음 받았음을 항상 생각해야 돼요. 이름 지은 자는 이름 지음 받은 자의 모든 것을 책임지게 돼 있어요.
그럼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느냐? 그거는 바로 우리 하나님이 지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그 인간과 살고 싶은 그 일의 개시점,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망하는 게 아니고. 왜? 이름이 있으니까. 인간은 망해도 이름은 남아 있잖아요. 지어준 이름은 남아 있다고요.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그 이름을 향하여 같이 합치면 그게 하나님 일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나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이름을 구원하려하니까 이름에 달라붙는 거예요. 지남철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그 이름에 달라붙도록 주께서 힘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힘이에요.
나한테 주님이 달라붙는 게 아니고요. 이름에, 그 이름에 달라붙어야 돼요. 이름이 책임자기 때문에 그래요. 이름에서 같이 이름 지어준 그것이 우리의 모든 운명에 책임 있게 보장한다는 그 내용이 이름 안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아버지를 위해서 또 그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고.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기반과 바탕, 다른 말로 하면 자리와 관련돼 있습니다. 에덴동산에게 추방되었어요. 그러면 에덴동산에 더 이상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자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에덴동산에 있었지요. 추방된 거예요. 그럼 인간은 어디를 사모해야 됩니까? I'm missing you, 본래의 내 자리. 본래의 내 자리의 유사품이 가짜가 쫓겨난 땅에다가 가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역사의 시작입니다.
이번 비 올 때 대구에서 서울까지 성경모임 있어서 가는데 갈 때 사십 분 늦게 갔어요. 그땐 기반이 아니고 지반이지요. 철도지반이 뭉개지면 안 되니까 보호해줘야 되니까 사십 분 늦었어요. 올 때 아홉 시 차타고 오는데 그때 방송에 한 시간 삼십 분 연착되어 기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반이 흔들렸으니까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홉 시에 출발할 기차가 열 시 되어 출발했어요. 한 시간 늦게 집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도 바탕이 얼마나 단단하냐, 기반 또는 지반이 지반이란 땅이니까 땅에 내 자리가 확보돼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인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땅에서 신에 복을 달라고 하는데 인간 자기 자체가 이게 가짜에요. 인간의 땅 자체가 아무리 노력해도 촌에서 아무리 해도 장마 졌다 하면 뭐가 확 올라옵니까? 빠른 속도로 숲을 이루지요. 그냥 하나둘 올라오는 게 아니고 그것도 눈에 안 띨 때 잘 때 잡초가 확 올라오지요. 이발했는데 돌아서면 또 이발해야 돼요. 다 깎아야 되잖아요.
저주 안에 인간은 자기의 바탕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마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바탕은 옛날에 제거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삭제되기 전에 있었던 그 몸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저주야 가라, 해서 저주와 치열하게 살다보면 누가 망가져요? 우리 몸이 망가지는 거예요. 아담이 망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아담, 사람에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흙으로 바꿉니다. 바꾸면서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바로 저주를 바탕으로 삼았다는 거예요. 저주가 땅에서부터 올라오게 되면 인간 자체가 잡초에요. 나훈아 말이 맞아요. 인간 자체가 잡초에요. 하나님의 제거 대상입니다. 황폐, 제거대상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이 아니에요. 저주받은 땅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저주받을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 지어준 하나님은 끊어졌고 관계가 끊어졌어요. 그러니까 버림받은 거예요. 이젠 내 이름은 내가 건사해야 되고 내가 지켜나가야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싸우는 것은 내 이름에 시비 거는 것은 전부 다 내가 가만있지 못하고 공격하게 돼 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가인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벨의 제사만 생각하지 마시고요. 가인이 먼저 제사 지냈다는 데 주목해야 돼요. 가인이 제사를 왜 드립니까? 신에게 뭘 하소연하기 위해서 제사 드립니까? 돌리도 내 자리. 몸이 뭘 감지하느냐 하면 저주를 감지해요. 저주를 알아채요, 몸이. 힘들다는 걸 알아채요.
그리고 주변상황에서 내가 가만있으면 안 되고 싸워야 겨우 먹고 산다는 걸 누가 알아채요? 이 몸이 알아채요. 몸이 나한테는 몸이 자아한테는 원수에요, 원수. 몸이 원수라니까요. 조금 적게 먹으면 힘없고 많이 먹으면 살찌고, 이게 원수 아닙니까. 맛있는 건 좋은데 많이 먹으면 아랫배 나오고 그걸 빼려하면 밥 먹지 말아야 되고. 이게 모순관계에 포함돼 있거든요.
내가 나한테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내 소원은 뭐냐? 내가 복 받았던 그 시절로 빨리 복귀하는 거예요. 그럼 복을 받아야 돼요. 저주는 멀리 하고 복은 받아들일 때에 가인이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살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주자. 그게 바로 가인의 제사 또는 다른 말로 가인의 간절한 기도지요. 그냥 생각 없이 제사 드린 게 아니에요.
그 기도 내용은 이겁니다. 받으소서. 여러분 무당제사 본 적이 있어요? 굉장히 화려합니다. 일반제사와 달라요. 엄청납니다. 무당제사 크게 하면 돈 천만 원 받을 수밖에 없어요. 왜? 음식 값이 백만 원 이상 드니까. 굿 한 번 하는데 최하가 오백만 원, 최고는 이천만 원, 삼천만 원, 사기꾼 무당은 일억까지 요구하지요. 사람보고 하는 이유가 원가가 많이 들어가서 그래요.
시각적으로 뭘 하느냐 하면 신을 현혹시켜야 돼요. 신은 어디 안에 있느냐? 인간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 신을 현혹시키고 청각적으로도 현혹시켜야 돼요. 징을 만들 때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다듬어야 돼요. 빛이 나야 돼요. 쟁쟁. 시각적으론 뭐냐? 옷을 과일 먹고 싶은,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먹고 싶다는 것은 곧 누가 먹고 싶다? 신이 먹고 싶은 거예요. 그 논리가 뭐냐 하면 인간 안에 신이 다 들어있는데 신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줄 때 우리는 저주가 떠나고 복이 오는 거예요.
자, 무당이 볼 때 우리에게 저주받는 이유는 신이 싫어하는 게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신이 싫어하는 걸 어떻게 아는가? 내가 싫어하는 게 신이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악귀가 들어왔다, 귀신이 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건강을 좋아해요. 안 아프면 좋겠어요. 그런데 위암 말기가 들어왔다. 굿 한 번 벌여야 되는데……. 이거는 아픈 건 싫어. 내가 싫다는 말은 내 속의 신도 싫다는 시그널 신호를 보낸 거예요.
그러면 건강할 때 뭘 먹어요? 맛있는 걸 많이 먹지요. 그러면 건강한 신이 원하는 걸 맛있는 걸 많이 준비해요. 펩시콜라까지 준비해요. 요새 신이 달라요. 맛있는 건 다 해요. 요새 신들은 펩시콜라 좋아하고. 진짜 동영상 보면요 완전히 도배를 해놨어요. 큰 장례식 꽃 장식 이상으로 음식으로 장식해놨어요. 그렇게 밑천 들여야 천만 원, 이천만 원 돈 낸 사람이 사기 당했는지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오색 깃발 있잖아요. 오방색 다섯 가지 색 쫙 깔아놔요. 복장 새 옷 입고, 목욕탕 가서 때 다 밀고 와서 깨끗함이 거룩함이죠. 거룩함이 더러움을 압도하게 되면 치고 들어오는 거룩함에 시각적, 청각적 공격에 내 속에 있는 시커멓고 더러운 것들은 못 견디겠다고 뛰쳐나가는 그게 무당논리입니다. 그래서 무당되기 전에 신병 걸리죠. 원치 않는 악귀가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건강을 원하는데 그게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그걸 다루는 방법은 괜찮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고상한 것으로 대비시켜서 빼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거룩한 걸 누가 만드는가? 본인이 성의껏 신에게 성의를 다 표시하면 되지요. 가인의 기도와 제사는 뭐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의를 보여주는 거예요. 정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만큼 자기 제사에 자기 행동에 집요함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아까 했지요. 복과 저주를 어떻게 한다? 바꿔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지옥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거꾸로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가장 저주받는 게 합당하다는 그게 복의 출입구가 돼요. 복을 만나는 접점지점이 돼요. 내가 저주받아도 합당하다는 것.
그래서 가인은 실수한 거예요. 가인은 그냥 죽어야 했어야 했어요. 지금 가인은 뭐가 잘못됐냐 하면 죽음에서 도망친 게 잘못이에요. 저주에서 도망친 게 잘못이에요. 그러면 안 돼요. 저주에서 도망치면 칠수록 그것은 더욱더 저주스러워요.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제가 문장을 쓸 테니까 이 문장의 의미가 보세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천국 왔지? 네가 길이 없는데 어떻게 천국을 와? 이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게 먼저 구원받은 장로들이 일부러 놀리려고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 드는데 요한계시록 7장 13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이걸 풀이하면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지?
저주에서 저주받고 살아야지 왜 천국에 와. 어떻게 왔어, 라고 질문한다는 것은 뭐를 유도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 고백하고 있느냐를 지금 확인하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니까 길이 있다, 없다? 천국 길은 없습니다, 라고 그걸 고백하게 만들어요. 내가 천국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요한이잖아요.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에 보면 21장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지요. 베드로가 뭐라고 묻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하는 방법이 질문을 방향을 되돌려줘 버려요. 아시고서 질문하잖아요, 라는 거예요. 뭘 아는데? 내가 주님을 사랑 안 한 거는 천하가 다 이야기인 걸 아시잖아요. 그리고 내가 찾아오지 않았잖아요. 주님이 알아서 찾아오셨잖아요. 알아서 찾아온 분과 알아서 찾아짐을 당한 자의 대화 내용이 그거에요. 질문을 돌려버리는 거예요.
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그건 누가 압니까? 그거는 당신이 알지 않습니까, 하니까 장로가 하는 말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들의 무엇의 피에 희게 되었다? “어린양의 피” 그러니까 천국 오는 사람의 특징은 씻을 게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씻을 게 있다는 말이에요. 씻을 게 있다는 말은 씻기 전에는 안 씻길 때에는 뭔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 있었던 게 뭡니까? 저주받아 마땅함이죠. 지옥 가도 마땅함이죠.
이게 돌려놓는 방법이에요. 결과 주고 구원시켜놓고 그제야 면접하는 거예요. 합격되고 난 뒤에 면접하는 거예요. ‘너, 낙하산이지’ 이런 것 있잖아요. “너 같은 게 호텔의 오너가 될 수 있어? 니가 누구 빽 쓰고 이렇게 된 거야?” 드라마에 이런 것 좀 나와요. 비로소 성경이 합격된 자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일을 말씀을 이룬 게 아니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잽싸게 질문지를 반대로 돌리면 돼요. 마치 주께서 저주와 복, 복과 저주를 돌려놨듯이 돌려놓으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돌리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이것까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중국식당에 갔습니다. 점심 때 갔어요. 열한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하는 코스요리. 코스요리하면 제일먼저 뭐부터 나오지요? 게살스프도 나오고 하지요. 그다음에 유산슬 나온다 칩시다. 유산슬 나오니까 한 사람이 상을 대번 돌려버려요. 유산슬 저 혼자 다 먹었어요. 이건 축복이죠. 이쪽은 뭡니까? 한쪽이 먹었으니까 저주되는 거예요. 주께서 오셔서 유산슬 빼앗아 도로 갖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거는 저주 쪽이에요. 빌립보서 2장에 나오지요.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거예요. 왜? 저주도 그런 저주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모두 기피하는 것. 저주 쪽에서 주께서 가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유산슬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유산슬인데 그걸 아무도 몰라요. 왜? 전부 다 복 받는데 미쳐서. 왜 복 받는데 미칩니까? 몸이 저주를 싫어해요. 몸이 위암을 싫어해. 나한테 악귀 들었어. 뭐 굿을 하든지 돈 천만 원 들여서 무당 불러서 뭘 하든지 쫓아내야 돼. 쫓아내면 나는 다시 내가 원하는 복 받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걸 바로 이 사실을 이러한 육신의 본능 때문에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도망친 겁니다. 주님께서 성경에 이렇게 돼 있지요. 아무도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니라(요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런 대목도 나오고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다 도망쳐버렸다(슥13:7, 마26:31).
그게 이사야 53장의 이루심이에요. 우리 무리의 죄를 주께서 짊어지셨다, 라고 하면서 그 이사야 53장 그것이 바로 유산슬이다. 진짜 그게 맛있는 복인데, 갑자기 유산슬이 끼어들어서, 양장피로 바꿔야 되나. 하여튼 중국집에 가면 그런 사람 있어요. 맛있는 것 보면 테이블 휙 돌려서 다 먹고, 먹을 것도 없는데 먹으라 하는.
예수님께서는 저주 쪽에 가버렸어요. 제자들이 턱이나 갈 리가 없지요. 내가 무슨 팔자로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돼. 말도 안 돼. 우리가 십자가? 미쳤나 십자가를 왜 져요. 나는 복 받아야 된다는 게 육신의 본능이거든요. 가인의 본능이에요. 지금 제가 가인이 제사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를 이런 식으로 설명 안 하면 아벨의 제사를 설명 못해요.
주님 쪽에서 멀리 도망쳤던 제자들을 이걸 그냥 옵니다. 올 때 비로소 알지요. 내가 도망친 그 자리가 바로 저주의 자리란 사실이고 주께서 그 저주의 자리에 친히 찾아오셨다는 취지를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두 번째, 세 번째 베드로에게 찾아온 거예요. 내가 이런 취지로 너에게 찾아왔다. 너는 도망치고 나는 너희를 찾아다니고. 이게 바로 사람 낚는 어부다.
여러분들이 주일 오후에서 그런 설교했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예수님의 몫이에요. 내가 아버지께서 택한 자는 주께서는 친히 건지신다. 주님 홀로 일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저 사람을 꼬셔서 신자 만드는 그게 아니고 내 자신과 내 자신이 분리되기 위해서, 복을 좋아하는 나를 저주받아 마땅한 나로 이걸 테이블을 돌리기 위함이에요. 복에 미친 인간을 저주받아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이걸 인식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야기하지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여기 요한계시록 7장에 보니까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초가 어디 있나? 아벨의 제사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언제 끝나느냐 하면 양 잡고 주께서 받았다고 제사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제사 드린 아벨을 죽여야 제사가 끝나요. 제사 드리고 형한테 맞아죽은 아벨, 그래야 제사가 완성되는 거예요. 우리가 관제가 돼야 돼요, 이 땅에서. 제사 트레인, 제사 기차. 그 제일 마지막……
(카메라 때문에 잠시 중지)
아벨의 제사 끝은 아벨이 죽어야 돼요. 아벨은 이왕 버린 몸이에요. 아벨에게 가치 있는 것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그 시대에 그 가정에서 나타내는 것, 그게 바로 기능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면서 죽는 그 기능이 그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가인 제사와 아벨 제사 부분에서 전부 다 아벨 제사 드린다는 거예요.
‘너 이제 죽었어’ 그것도 지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맞아죽는 거예요. 누구한데? 성의 있게 복 받기 위해서 온갖 노력 다하는 믿음 좋은 최고의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맞아죽는 그 자가 바로 복을 추구하는 모든 행동과 몸짓이 오직 복만을 추구하는 자에게 얻어맞는 방식으로 아벨 제사가 그때 구현이 돼요. 성취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들 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예수님은 이방민족에게 얻어맞아죽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 누구한테 맞아죽었어요?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회개하면서 성의 있는 그들에게 맞아죽었잖아요.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가 복 받아야 되겠다는 노림수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신 거예요.
인간이 복을 노림수에는 쉬는 시간도 없어요. 심지어 꿈속까지. 여러분 꿈속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꿈의 내용을 함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거에요. 거처 찾아가기. 내 쉴 곳 찾아가기. 항상 꿈은 이걸로 마감됩니다. 왜냐하면 전에 서울강의에 했지만 엄마 보고 싶어, 그다음에 어디 갈래? 집에 갈래. 이 집, 내 쉴 곳, 내 최종적인 내 바탕 여기에서 제거될까봐 불안해서 꿈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나를 편안하게 안락하게 보존시킬 자리에서 행여나 떠날까 싶어서 그 자리가 날아가 버릴까 싶어서 평소에도 불안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제거 불안이에요. 제거되는 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프로이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세공포증’이라 하는 거예요. 제거공포증.
프로이드가 사람들 꿈을 이만 가지 사례를 조사했어요. 이만 가지 꿈을 보면서 거기서 가장 원천적인 원리를 찾았습니다. 그게 딱 찾아낸 게 뭐냐? 인간의 불안의 원인은, 불안의 원인이 정신병으로 이어지거든요. 불안의 원인은 뭐냐 하면 거세공포증입니다. 내 자리에서 제거되는 것. 나는 있는데 내 몸 하나 쉴 곳 없는 것.
그냥 내 몸 쉴 곳 없는데 그 쉴 곳이 어떤 곳이냐? 나만 쉬는 것? 아니에요. 누가 있어야 돼요? 엄마가 있어야 돼요.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날 지켜주는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시절이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드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의 어릴 때 그 무의식은 아무리 어른이 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바로 정신병과 모든 꿈의 원인이다. 이게 꿈의 해석입니다.
그럼 인간의 의식은 뭐냐? 그걸 억누르는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이걸 억누르는 거예요. “나 외로우면 안 돼. 나 외로우면 안 되는 거야.” 이걸 억누르는 거예요. 그게 무심코 행동, 의식적 행동 세계에서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해서. 부부간에 말하다보면 갑자기 분노 나오지요. 내 고요한 거처를 네가 뭔데 방해하느냐 이 뜻이거든요. 내 고요한 거처. “나는 엄마를 원하는데 너는 왜 내가 원한 엄마가 되지 못해?” 그에 대한 불만이에요. 이거 너무 중요한 것 이야기했는데, 아깝다.
그럼 그 인간들이 교회 간다, 성당 간다.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절에 가면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제발 복을 주셔서, 복이 뭔데요? 외롭지 않고 나를 늘 칭찬해주고 나를 늘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내 거처가 안정적일 때 어떤 외환위기나 어떠한 경제가 오더라도 태풍이 와도 비껴지나가도록.
그걸 옛날 사람은 이렇게 했어요. ‘그저 내 새끼 남산 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놀게 해달라’고 종이 태우면서 중력을 어기면서 올라가요. 비나이다. 이걸 우리나라 토속신앙에 연결시키면 ‘그저 내 자식한테 악귀가, 악귀야 물러가라.’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서 오늘날 종교가 되는 겁니다. 종교가 무엇인가?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주의 뜻은 종교는 필요치 않아요. 그냥 죽어. 죽는데 어린양과 함께 죽어. 어린양에 보여주면서 죽어. 이게 유월절이었어요. 그 유월절의 선배가 바로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양을 잡을 생각 없었어요. 왜냐하면 목축하는 자기 때문에 원래가 양 키우기 때문에 양을 잡은 거예요. 누구 흉내 내고? 형 보고.
형은 농사지었기에 농사 진 것 바쳤는데 삐이익, 하늘나라에서 안 받는답니다. 천사가 벌써 나팔 불었어요. 우리 주님이 안 받는답니다. 원래 안 받아요. 인간이 드린 것은 어떤 것도 안 받아요. 가인도 안 받고, 아벨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하나님께서 안 받기로 작정하고 땅으로 추방시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받아버린 거예요. 조건은 뭐냐? 아벨이 믿음 좋으네. 아벨이 믿음 좋다, 안 좋다 결정은 이제부터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결정해요. 아벨을 죽임으로서. 아벨의 제물이 믿음 있는 제물 되게 하는 내용을 채우는 것은 아벨 요소, 인간적인 요소를 게워내고 그걸 갉아내고 뜯어내고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미리 당겨서 담아버리면 그게 받는 제사가 돼요. 응답받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끝으로 누가복음 18장 이야기 여러분 잘 아시지요. 얼마 전에도 설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바리새인이 기도하지요.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에요. 제가 저 사람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토색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십일조 꼬박꼬박하고 구제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아까 했지요. 하나님을 꽁꽁 묶는 거예요. 나의 착함, 진선미, 나의 장점에다 하나님을 꼼짝 마라 묶어서 하나님이 내 시키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돼요. 얼랄라, 알랄라, 할랄라 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의 이름 부르는 게 주의 이름 불렀으니까 무조건 해내라는 뜻이에요.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저 죽었는데 주께서 기도 없이도 살려냈잖아요. 그런 뜻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돼요.
이제는 내 이름을 주의 이름에 보탠 게 아니고 애초부터 내 이름을 삭제시키고 삭제하는 게 당연하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게 당연하듯이 삭제되고, 삭제되고, 삭제되고 남겨두지 않고 왜 주님 이름이 찾아와서 그 빈곳을 주의 이름으로 채운 거예요. 주일 오후 설교처럼 그걸 채운 거예요. 채운 것을 채웠다고 이야기하는 게 기도에요. 그게 예배고 감사고, 그게 영적 제사고. 그저 내 몸에서 십자가 향기만 뿜뿜 뿜어져 나오길 바라옵나이다.
그러면 주께서 응답을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 내 네 몸 하나 모든 것을 발걸음을 인도해서 기어이 너로 하여금 십자가만 알게 할게. 몸 아파라. 또 몸 아프게 하면 약은 먹어야지. 삼십 분 후에. 식사 후. 왜 그걸 어겨. 이것 보약 먹어라. 그러니까 소급해서 따져보면 모든 내 일이 누구 일이 돼요? 주의 일 아닌 게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게 이미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이 어떻게 우리 일과 바뀌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복에 환장한 인간인 것을 들춰내면서 주님의 저주받으심에 함께 참여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이미 복 받은 자로 만들어내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 이 감사가 우리들 생애를 통해서 수시로 늘 뿜어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