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9강) 출2:23(부르짖음) 20230626b
(강의:이근호 목사)
60페이지 중간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신명기 9장 4절, 5절 나오지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나의 의로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천국 간다는 것이 네 안에 잠복돼 있다는 사실을 간주하시고 주께서 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침을 놓듯이 네 안에 수상한 것이 어디 있는가, 거기까지 말씀 끝이 도달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실천력이 있어서 우리를 후비는 거예요. 귀이개같이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이 내 안에 이렇게 있었네, 라고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네가 착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나 착해요, 라는 그게 딱 들어있는 거예요. 시그널이 외요. “아하 들켰네. 더 이상 숨길 게 없네.”
그 마지막 도달되는 그것이 여기 신명기 9장에 의하면, 로마서 10장과 연관해서 보면 그걸 이렇게 해요. 자기 의. 이 말은 마귀에 속한 모든 인간들 추구하는 목적점이 이미 악마에 의해서 확정돼 있다. 악마 자체가 굴욕적이죠. 굴욕적이기 때문에 안 굴욕적이고 싶어서 선과 악의 체제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의롭다고 반대로 그걸 추구하게 된 거예요. 자기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선한 쪽으로 나가려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 돼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좀 어렵습니다. 비는 누구 지시로 오는 겁니까? 하나님 빼놓고 비는 누구 지시로 오지요? 하나님 빼놓고는 없지요. 창세기 5장에 하나님께서 햇빛과 주신다하니까 하나님 빼놓고는 어떤 지시도 없이 비가 오잖아요. 비가 올 때 이게 여름입니다. 꽃 피면 봄이죠. 가을, 겨울 이 개념을 누가 정하느냐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줬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이걸 추구하고 있어요.
인간의 자기 의라는 것은 나는 의롭다, 의롭다 광고한다고 의가 아니고 이 세상에 아무 의미 없이 인간에 주어진 것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 의에요. 인간은 왜 태어나느냐? 아무 의미 없어요. 근데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꼼지락 하면서 내가 태어난 이유는 어떻고 저떻고 하고 그다음부터는 소설책 열권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문학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 소설작가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거에요. 뭐냐 하면 아무리 책을 써도 전부 다 이걸 손으로 모아보면 자기 의에요. 같은 인간에 대한 예의. 그런데 여기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조건이 되어서 나온 게 뭐냐? 사회적 결속. 사회적 결속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기성세대의 의미. 기성세대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교육과 양육. 태어난 것부터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거예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여기 인간을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of the money 돈의, 돈에 의해서, 돈을 위해서 자본에 의해서 인간은 노예가 된다. 그래서 여기서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은 의미에서 더 나갈 필요가 있지요. 인간이란 사회적 결속에서 나온 의미에서 양육 받으니까 여기서 뭐가 자극받느냐? 인간의 욕망, 욕심이 자극을 받는 거예요.
그 욕심이 구체화된 게 뭡니까? of the money, by the money, for the money 돈의, 돈에 의해서, 돈을 위하여 나의 대체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과 견주는 반대자리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겸하지 않다는 말이 뭐예요, 겸할 수 없다는 말이 뭡니까? 한쪽을 버려야 한쪽이 나타난다는 뜻이거든요.
돈 모아서 예배당 짓자, 뭐가 문제에요? 예배당을 지어버리면 돈을 버린 게 아니에요. 돈의 집약체가 예배당이란 부동산이 된 겁니다. 예배당 부동산 값, 터 값이 올라가버리면 그다음부터 이사 갈 생각하지요. 이것 팔고 더 넓은 데 가자. 일반 주택을 보는 것과 교회 예배당 보는 시각이 똑같은 시각이에요.
그래서 여기 신명기 9장 4절, 5절 계속 보게 되면 지금 [십자가를 아십니까]의 기도 대목이에요.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라고 돼 있지요. 말씀이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슨 체험을 해야 되느냐 하면,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라는 것이 체험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체험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무엇이 선행돼야 되느냐 하면 나는 내 의로움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철저해야 됩니다. 이게 건성건성 아니고 철두철미해야 돼요. 나는 내 의로움에 대해서 보상 없는 것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라는 그런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다음에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라고 돼 있잖아요. 그러면 정직하게 해보는 거예요.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고 정직하게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이것도 아니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런데 의로움도 아니요 정직함도 아니요, 이 두 개의 아니요가 같이 연결이 돼야 돼요. 인간이 정직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정직한 게 아니고 나의 의는 손상되면 안 된다는 점에서 정직하지요. 나의 깨끗함은 어떤 누구로부터 비난 받을 게 아니라는 점에서 정직한 거예요.
그러면 내 의로움과 정직함을 같은 걸로 본다면 이 세상 우리가 평소에 인생 살아가면서 갖고 있는 화와 분노와 그리고 한 맺힘은 결국 어디서 비롯됩니까? 나의 순수성에 훼손 또는 모욕으로 인하여 인간은 한 맺히고 분노를 느낍니다. 너무 분노 느끼고 한 맺히면 자살하지요. 자살하며 얻는 이익이 뭐냐 하면 내가 자살함으로서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순수함과 내 의로움과 정직함은 그게 남아 있잖아, 이러거든요.
어디 남아 있는데? 사회적 결속에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 사회가 뭔데? 의미 있는 곳. 의미가 누구 만든 건데? 인간이 만든 거죠.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주지도 않은 의미체제를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그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은 의미체계가 인간을 죽이게 만드는 거예요. 출구가 없어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하면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말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순간순간 의미 없다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 과연 내가 이 의미를 사용해도 되나, 안 되느냐를 근원적으로 묻지도 않고 말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23장에 나오지요. 34절, 하나님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일하고 있다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근원적인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른다 하면 우린 알아야 되겠지요. 근원적인 건 뭐냐? 근원적인 것이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이 네 자잖아요. 두 자로 줄이면 이게 ‘기도’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61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중간보다 약간 더 밑에. [과거의 구원이 현재로 이어지는 구원이 되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을 주어서 ‘부르짖음’이 배겨 나오게 해야 한다.]
자, 부르짖음은 박탈될 때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스티로폼이라도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데 스티로폼마저 뺏어버리면 거기서 나올 것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없지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기가 졸지에 자기 존재가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어떤 터전이 있었고 이 터전이 의미 있는 터전 위에서 내 과거가 내 기억이 시작이 되게 되면 그 이후에 나의 인생은 의미가 있어요.
이래봬도 내가 왕의 집안이고 내가 귀족 집안이다. 우리 오대손이 무슨 벼슬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나한테 의미를 제공하는 겁니다. 왜? 그게 나의 출생지니까. 토대니까. 근데 어떤 눈치코치도 없는 사업가가 “네 오대손이 뭐했다고?” “영의정 했어.” “그거 간신배인데. 나라 팔아먹었는데.” 하는 순간 때려죽이고 싶어.
이완용이와 내가 무슨 관계있어? 없는데 왜 내 존재를 건드리느냐 말이죠. 내 존재의 뿌리를 건드리느냐? 지금 나를 때리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조상 이야기했다고요. 알렉스 헤일리의 유명한 <뿌리> 있잖아요. 왜 뿌리를 건드리느냐? 네 뿌리와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아니야 우린 뿌리가 있어. 우리의 뿌리 알려드려요? 죄인입니다. 저주받을 죄인, 마귀와 결탁된 뿌리가 우리의 뿌리에요. 죄가 왕 노릇하는 겁니다. 뿌리입니다.
부르짖음이라 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빈터, 공백이죠. 빈자리로 만드는 거예요. 나를 빈자리로 만들어버려요. 텅텅 비어 있는. 존재의 뿌리는 뭐다? 없다. 무의미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무의미가 뿌리가 아니고 탈의미가 돼야 되겠죠. 어쨌든 간에 기존에 인간체계에서 통용되고 소용되는 의미는 나한테는 없게 만든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짖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여 애굽에서 못 살겠습니다, 부르짖었잖아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데 부르짖었지요. 그들에게 어떻게든 구미 맞춰서 같이 밥이나 먹고 살려고 애를 썼는데 가도가도 가중되는 압박이 너무 세니까 나중에 그들이 프레스 압력에 의해서 폭발 직전이에요. 견딜 수가 없어요. 견딜 수 없으니까 그들은 누구한테 부르짖었습니까? 언약에다 부르짖어요. 약속에다 부르짖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 Help me죠. 나를 살려주세요. 나는 바닥이 없습니다. 바닥이 세상에 빼앗겼습니다.
이 비슷한 기도를 누가 했느냐? 기도의 원형이 나와요. 시편 22편 1절에 나오지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바로 예수님께서 이 원형, 모든 것이 박탈된 그 자리가 구원의 출발지에요. 스타트 지점이에요. 운동회할 때 요이 땅하잖아요. 그 출발지가 모든 것이 다 박탈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주의 이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할 때 뭐해야 된다? 주의 이름, 모든 것이 박탈된 자리로부터 부르짖음이라는 형식에 의해서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르짖음 박탈됐다는 이 말을 달리 표현하게 되면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럼 아는 게 없는데 왜 기도하느냐? 주께선 아시잖아요. 주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주의 원하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면 오도록 그렇게 조치해주시옵소서, 하고 자기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기는 것, 이게 주의 이름의 가치를 높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기도의 특징이 뭐냐? 기도하기 전에 이미 응답을 챙기고 기도해요. 어쨌거나 저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게 하옵소서.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게 무의미하게 해주시고 탈의미, 의미에서 탈취되게 하옵소서. 기존의 세상 의미에 농락당하거나 놀아나거나 주눅 들지 않게 하옵소서. 그게 그렇게 주께서 기도로 유도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애굽이 도대체 어떤 세상이기에 이러한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특수한 기도를 부르짖음이란 것을 허락하셨는가? 부르짖었다 할 때 이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했겠어요. 성도의 기도는 이미 감사와 기쁨이 보장돼 있는 기도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즐겁습니다. 나로 하여금 내 것을 다 없애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고 감사하게 되거든요.
오늘 신약의 기도 응답은 뭐냐 하면 자꾸 찌꺼기가 끼네요, 주님. 다 이루었는데 이미 주신 영생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면 우리는 더 원할 게 없는데 왜 자꾸 저한테 원하는 게 생깁니까? 적어도 내 며느리 감은 2억 정도는 해 와야 된다. 왜 이 생각이 들게 되고, 우리 아들은 전교 일등은 못해도 이등 정도는 해야 된다는 내가 정말 미워요. 심수봉 노래에 나오지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왜 욕심이 많습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가지고 가져도 이렇게 또 갖고 싶고, 누리고 누려도 더 누리고 싶고. 우리한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지요. 월드컵 4강 갔으면 됐지 왜 히딩크 감독은 아직 배고프다는 소릴 왜 하느냐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 부르짖음입니다. 해답은 이미 챙기고 “해답과 내 마음과의 괴리상태를 주께서 좁혀주옵소서. 주의 이 상황에 감사로 동참하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응답을 받아야 돼요. 응답이 뭐냐? 왜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런 욕심쟁이가 되가는가? 세상이 어떤 구조인가? 그 구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은 인간들의 의미 결속체제에요. 나는 기존 세상에 살기 싫어. 난 지리산에 들어갈 거야, 라는 사람 있지요. 자연인. 개그맨 찾아가서 방송하는 <나는 자연인이다> 있잖아요.
그 사람은 자진해서 무엇을 벗어났습니까? 의미 결속체제에서 진절머리 나서 기도원 같은 데 혼자 집 짓고 사는 거예요. 두 번 다시 나는 산 안 내려간다. 안 내려갈 수 있습니까? 약초 캤으니까 장날에 내려가야지요. 그래서 중국산 약초와 경쟁해야지요. “약초 값이 왜 갑자기 싸졌어. 단가 안 쳐주는데?” “요새 경제가 안 좋아서.” “오백 원 더 쳐주소.”
의미체제에 안 온다 해놓고는 돈의 자본체제에서 벗어날 길이 없네. 전기세는 안 내지만 부탄가스 값 오르면 신경 바싹 쓰는 거지요. 지가 뭘 벗어나? 못 벗어나요, 인간은. 인간은 돈 없이는 못 살아요. 사랑 없이 못 사는 것도 일단 돈 챙기고 난 뒤에 하는 이야기에요. 맨날 돈이야. 맨날 돈이야~ 맨날 돈이에요, 돈. 의미 결속체제입니다.
자, 인간들은 의미 결속체제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언어로 만들어내지요. 언어를 주고받으면서 체제를 만들어요. 어떤 체제, 보이지 않는 권력이 형성돼요. 고등학교 동창회 참석해보세요. 처음에는 친목으로 모였다 했는데 나중에는 권력 됐지요. 총무 누굴 뽑을 건데? “ 으로 돈 얼마 쓸 거야, 회원들에게 뭐 해줄 건데?” “가방 하나씩 돌릴 거야.” 이렇게 나오지요. 갑자기 권력체가 됐어요. 가방 나눠주면서 한 번 보자 곱빼기로 받아낼 거야, 이런 식으로.
언어에 의미를 담고 권력체제로 나오는 거예요. 이 체제가 형태를 네 가지의 형식으로 의미체제를 정리한 사람이 있어요. 라캉이란 사람인데 라캉의 네 가지 담론 또는 담화, 담화란 언어를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의미의 증상이다. 감기 들면 콧물 나고 그러지요. 증상이죠. 대상포진 걸리면 아프고 쓰리고 그렇지요. 증상입니다. 대상포진이란 안 보여요. 그러나 증상은 보이지요.
보이는 세상은 뭔가 보이지 않는 의미체제의 증상으로 보는 겁니다. 이 증상은 네 가지가 서로 똑같은 형식으로 순환되고 있다. 그 네 가지가 첫 번째는 주인, 두 번째는 대학, 세 번째는 히스테리, 네 번째는 분석가. 분석가 의미체제, 히스테리 의미체제, 대학 의미체제, 주인 의미체제. 이 주인, 대학, 히스테리, 분석가.
히스테리는 뭐냐 하면 내 문제 해결해주세요, 라고 히스테리 부리는 것 있지요. 누구한데? 아무나 붙들고 내 문젯거리 상담 좀 들어주세요, 해결책 주세요. 붙든 것, 히스테리에요. 분석가, 내가 분석해줄게, 나오는 사람. 대학은 뭐냐? 대학은 지식을 가르치는 거죠. 네가 알고 있는 진리가 뭔데, 라고 요구하는 곳. 너 컴퓨터 얼마나 할 줄 알고 영어 얼마나 알아, 하고 묻는 것.
주인은 뭐냐 하면 대학, 히스테리, 분석가는 그 기준이 뭐냐? 모든 인간은 자기가 욕망의 주인이 돼요. 이게 기본이에요. 주인 의미체제, 이걸 주인담론이라 하는데 모든 것은 인간은 자기가 주인공입니다. 이 세상에. 그러니까 세상을 살면서 인간은 내가 살고 있어요. 세상은 나한테 환경으로 있는 것이지 진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남들 사는 것보다 더 우선적이라는 생각을 모든 인간은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못 살아도. 한 평짜리 집에 살아도 오늘도 나는 내가 주인이다.
그러면 태양이 떴다면 그 태양이 누구의 것입니까? 아무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태양 보면서 오늘도 나의 태양은 떴다. 지 마음대로 태양을 자기 소유화시키지요. 하늘에 유난한 별이 두 개 있다. 같이 자기애인 데려갔다. 아주 사랑을 베풀지요, 동정을 베풀어요. 별 하나 너 하나 별 둘 나 둘. 저 별은 너의 것 저 별은 나의 것. 윤형주, 송창식의 <두 개의 작은 별>이란 노래 있잖아요. 모든 건 주인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사회로부터 욕망을 익혔고 그 욕망이 나로 단일화되면서 그다음부터는 내 욕망을 추구하면서 사회에 나서는 인간들, 그리고 그것이 나만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들 그렇게 하는 그렇게 해서 인간은 의미체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회가 준 의미기 때문에 그걸 추구하는 것도 사회를 떠나서는 계속 추구할 수 없잖아요. 지금 이게 인간들로 하여금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체제입니다.
그럼 체제에 대해서 하나씩 여기서 표시를 해보겠습니다. 주인체제라 하는 것은 주인, 주체, subject, 제일 첫 번째 주인이니까 1로 하는 거예요. 자, 숫자로 1이라 하는 것은 1과 대비가 되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사물이 있기 때문에 1이라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데는 숫자를 못 붙입니다. 0이라는 숫자는 허구에요. 없는데 무슨 숫자를 붙여요. 숫자 붙일 때는 1로부터 시작해야 돼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있고 너 있고 하는 거예요.
1이 주인이 여기서 시작점, 발신자, 1이 뭐하느냐 하면 대상을 찾아요. 나와 상대해주는 사람을 찾습니다. 2가 돼요. 이 2의 역할은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줘야 될 2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나한테는 의미가 생겨요. 왜냐하면 인간은 어릴 때에 주변에 있는 부모와 어른들이 나한테 규정한 게 있기 때문에 그 규정한 것이 ‘나’가 되었어요. “너는 착한 아이야, 너는 공부 잘해.” 그것이 잊어버리고 계속 시간이 세상 살아가면서 유지가 되는 거예요.
너는 개망나니야, 이러지 않았거든요. “너는 잘 될 수 있어. 너는 지금 공부 못하지만 나중엔 성공할 수 있어.” 그래 맞아. 성공할 수가 있어가 나한테 오게 되면 나는 성공하고 있는 중이야, 라고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게 의미에요. 내가 주인이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내가 주인임을 증명해줄 사람을 내가 구체적으로 찾는 겁니다. 이 관계에서 사람들은 이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한테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고 반대로 이야기해요. “너 싫어. 너는 못난이야.”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때는 사랑과 더불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그런 것을 뭐냐? 증오라고 해요. 증오한다는 말은 난 사랑할 사람 너 말고 따로 있어, 라는 뜻이에요. 누가 증오한다는 것은 너 말고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고,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니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내가 너처럼 안 되면 나는 증오할 거야, 라는 마음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에요. 이 뻔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이야기하고.
누굴 마음에 든 사람을 만났잖아요. 마음에 들어서 빼먹어야지요. 빼먹을 게 뭐냐 하면 거기서 a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생산’하는 거예요. “역시 내가 너 만나길 잘했어. 내가 너를 선택하길 참 잘했어. 내가 애 안 낳으려하다가 세 번째 낳았는데 세 번째 낳길 잘했어.” “둘만 낳고 그만두려했는데 어쩌다가 낳아버렸어.” 맨날 이런 핑계대요. 모른 사이인데 애 낳는 게 어디 있어요. 남편이 정관수술 싫어해서 싸우다가 그때 태어난 거지 뭐.
생산을 뭔가 실적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주인임을 증명해줄 뭐. 내가 저 사람을 사랑했잖아요. 사랑하니까 저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저 남자를 사랑했는데 자기 사랑해서 고맙다고 덜렁 외제차를 사주네. 그 외제차가 뭡니까? 생산물. 역시 나의 결정은 보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보람이 있네. 이게 모든 인간의 주인의식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런데 그다음의 문제, S가 처음의 S(주체)₁인데 이게 쪼그라들어요($). 차 사주고 나한테 잘해주고 설거지 다해주고 그 남자가 다해준 건 좋은데 왜 화장실에 서서 오줌을 누느냐고? 야 저것만 고치면 좋겠는데 그게 딱 마음에 안 드네, 우리 헤어져. 양말 뒤집지 말라고 몇 번 말했어. 뒤집네, 우리 헤어져. 그것 내 마음에 안 들어. 너는 왜 내 지시에 안 따르는데 내가 주인이잖아. 너의 존재 자체가 내가 주인임을 반영해줘야지. 네가 내 남편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집의 주인인 것을 네가 그때 호응을 왜 안 해줘? 이러려면 헤어져, 갈라서자.
실제 이래서 이혼하진 않잖아요. 그러면 ‘갈라진 S’($)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떻게 하지요? 우리 내부에다 안 들키는 쪽으로 깊숙이 발 밟고 집어넣어요. 서랍 제일 밑에 안 들키는 데 해놓고 마치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없는 것처럼 영어로 as if~ 아닌 것처럼 이렇게 위장하지요. 우리의 깊숙한 곳에 집어넣지요.
집어넣다가 상대방이 뭔가 실수했을 때 “내 그럴 줄 알았어.” 해서 집어넣은 걸 그 순간 다 튀어나와요. “내가 너거 아버지, 너거 엄마 닮아서 그럴 줄 알았어.” 갑자기 시댁 이야기, 친정 이야기 다 튀어나와요. 그러다가 내가 성질대로 했구나. 미안하다, 하고 브레이크 밟아서 다시 한 번 다음 기회를 노리고 또 집어넣고.
주인인데 돌아오는 이게 생산물의 자리인데 생산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결국은. 이게 뭐냐? 진리의 자리에요. 진리는 항상 진리에서 주인이 되려는 인간은 진리 앞에서 나는 진리를 얻을 수 없는 진리를 담을 수 없는 깨진 쟁판 같은 존재가 됐다. 라캉이란 사람이 이걸 정신을 분석해서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이게 주인담론이에요. 여기서부터 기본적으로 가는 거예요. 나머지 세 개는 여기에다 주인담론의 담론이라 하는 의미체계의 변화입니다. 거기서 전부 다 변신을 시도한 거예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대학담론. 대학담론이란 이상하죠, 제목이. 대학담론은 뭐냐 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뭘 하냐? 나에게 a생산을 요구해요. 너 뭐할 줄 알아, 이런 거예요. 회사에서 “야 너 오늘 저녁까지 정리 다 해.” 타인이 어떤 그가 원하는 생산물을 나에게 요구하죠. 그럼 나는 밤 근무한다고 인간 찢어질 판이에요. 왜? 이건 안 하면 회가 그만둬야 되니까. 나쁜 사람, 나도 나중에 과장 되면 보자, 이래하죠.
그래서 기대하는 건 뭐냐 하면 나도 언제 주인이 될 거야, 이거에요. 주인이 되는데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현실에서는 자꾸 나에게 내가 나를 힘들게 한 일들만 생기게 마련이에요. 안 그러면 회사 그만두고 자연인 되어 산에 가든지. 가봤자 오일장에 내려와서 중개상과 약초 가격경쟁 붙여야 돼. 도대체 이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자꾸 나한테 요구를 하는 거예요.
“엄마, 나 남자친구와 헤어졌어. 이제 엄마와 살래. 나 엄마가 너무 좋아.” “그래? 엄마와 살려면 설거지 다 하고 빨래 다 하고 집세 내.” “옛날 엄마가 아닌데?” “네가 옛날 네가 아니잖아. 옛날 초등학생 아니잖아. 그땐 도와줬지만 너는 네 힘으로 나이가 사십 가까이 된 게 결혼도 안 하고 혼자서 이 무슨 짓이고?” “나 엄마와 살고 싶어요. 엄마 돌볼게.”
“돌보는 건지 나한테 개기는 건지 분간 확실히 하자. 너 세상 나가서 남한테 당하니까 속이 상해서 더러워서 안 한다 이것 아니면 밥 못 먹고 사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해서……. 아버지, 엄마는 마지막에 호사롭게 살려고 하는데 이건 뭐 노처녀 들어와서 방 하나 차지해서 속옷 벗어놓고 빨래 안 하고. 도대체 이 나이에 이젠 딸 시집살이…….” 이게 대학담론입니다.
그다음에 히스테리담론. 이게 뭐냐 하면 완전히 쪼가리난 내가 누구한데 근사한 어른들, 정말 저 사람은 자립적이고 저 사람은 모르는 게 없어 다 알아. 나에게 도움을 줄 거야, 하는 사람에 요청합니다. 좀 도와달라고, 내 처지에 대해서. 요청을 하는데 그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나한테 상담 받으면 당신은 나와 닮은 괜찮은 온전한 S₂ 새 사람 될 겁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이거는 뭡니까? 종교 같지요. 종교 또는 교회, 성당, 절간, 신을 찾는 사람.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새 사람 될 겁니다. 이게 생산물의 자리니까. 이건 대상이고. 시작은 이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진리 자리에서는 내가 새 사람 됐다는 자체가 결국 아무것도 해결 못해요. 왜?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이 둘 관계가 소외된 관계에요. 소외된 관계란 갈라진 관계, 떨어져나간 관계, 상관없는 관계. 분명히 새 사람인데 내가 진리가 아니었어. 새 사람 된 내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는 따로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예요.
열심히 종교생활 목사 시키는 대로 다 하는데 진리와는 점점 더 무관한 진리가 점점 떨어져있고 다가설 수 없는 동네에요. 이게 뭐냐? 종교 히스테리 환자. 뭐라 하느냐? 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또 설교 듣고 성경공부 참석하고 해야지. 그러나 진리와 내가 합치되지 않는데? 소외됐다 하는 것은 떨어져나간 거예요.
벌써 세 번째지요. 주인 할 때 주인 잊어버리지 마세요. 대학담론 잊어버리지 마세요. 대학담론은 직장생활 생각하면 되고, 주인은 뭡니까? 자기 자신이 모든 인간이 다 주인이니까. 네 번째가 그 사람이 정리한 게 분석가담론, 분석가담화. 분석가담화라 하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굴레에서 빼내줄게 하는 것처럼 이것은 아까 본인이 찾아오는 히스테리 환자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분석가가 먼저 찾아가는 거예요.
분석가담론 봅시다. a에서 분석가가 깨진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a→$) 이게 시작은 분석가지요. 이거는 대상, 이야기를 들어야 될 대상, $ 이게 무슨 자리라 했어요? 생산, 업적, 실적, 생산한 자리. S₁ 네가 주인이야. 너는 나한테 의지하지만 네가 주인공이야, 라고 만들어놨는데 그런데 이 주인공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결핍을 느끼면서 또 어떤 진리의 자리를 내가 혼자 주인공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남이 인정해줘야지요. 다른 사람이 타자가 나를 인정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이게 분석가담론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 원인이 뭐냐? 이렇게 이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원인이 뭐냐? 원인은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의미체계지요.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인간은 뭐냐? 나를 만드신 분을 모르고 더 나아가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나를 만드신 분을 몰라요.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만들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내가 너를 만들었다를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면 내가 너를 단호하게 심판하겠다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창조자에요.
그래서 그게 뭐냐? 출애굽 경험이에요. 출애굽 경험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뭘 원했어요? 자기가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누굴 부르짖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짖었잖아요. 자기가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쪽이라고 생각해서 막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는데 누가 조르르 왔지요. 그 부르짖는 자에게 누가 왔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왔잖아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왔는데 아까 네 가지 담론의 원칙에 없는 게 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부르짖는 자를 쳐버려요. 누가 반발하느냐? 이번에는 부르짖는 자가 누구한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제발 모세와 아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해요. 이게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릴 찾아요. 왜냐하면 내가 의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의미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너무나 가치 있기 때문에. 무슨 담화? 주인담화, 내가 주인이에요. 누가 뭐래도 내가 못 나고 못 배우고 돈 없어도 나한테는 내가 주인이에요. 이거는 노숙자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푸틴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에요. 이번에 유명한 사람 프리고진, 일리야 프리고진이 노벨화학상 받은 학자인데 이름이 또 동일한 이름이 되어, 자기가 주인공입니다.
이게 주인공인 이상 내가 아는 이상은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주인공하는 것은 네가 어디서 배웠는데? 내가 태어날 때 마련된 이 사회에서 만든 거죠. 너는 이런 인간이어야 되고 너는 이렇게 바르게 착하게 살아야 되고 자꾸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우리의 존재는 텅 비어야 되는데 텅 비어있질 않아요. 포부가 있고 희망이 있고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어요. 기대가 있고 비전이 있고, 이런 이상은 우린 이 사회에서 갇혀있는 네 가지 담화의 고리에서 도망칠 방법은 탈출구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건져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의미체제 자체에서 그들이 벗어나야 되지요. 나라는 의미에서 내가 벗어나야 되지요. 그럼 벗어날 때 나의 의미는 곱게 안 벗어나죠. 반항하고 난리도 아니죠. 주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그들에게 발라버립니다. 죽어라, 인간아. 하지만 애굽 사람들이 죽는 것은 그냥 죽지만 너희들은 어린양의 죽음과 함께 참여하자.
그래서 어린양과 함께 참여함으로써 어린양 대신 분이 부활할 때 너도 같이 부활해줄게, 라는 것이 하나님이 모세와 맺은 계약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모세 아이디어도 아니었고 히브리 아이디어, 어떤 아이디어도 없어요. 하나님이 그냥 일방적으로 모세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한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이거는 그전에 모세한테 언급한 적 없어요.
그때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만 비로소 심판한다는 걸 기정사실화시키면서 열 가지 재앙에서 마지막 재앙이 무슨 재앙입니까? 장자 죽이는 재앙이죠. 장자 죽이는 재앙하면서 그때 제공된 게 뭐냐? 어린양 피 바르면 산다. 찬송가 가사에 나오지요. 어린양의 피 바르면 우리의 죄를 넘어가준다(199장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그 계약을 하신 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계약을 하신 분은 사람과 계약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과 계약하지 않아요. 이스라엘과 계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본인과 계약을 했다는 것이 드디어 마태복음 26장에 내 살과 내 피가 아버지와 나 사이의 계약이에요. 그 대신 아들은 예수님이 아들이에요.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계약에 들어간 사람은 양자지만 아바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쳐주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의 전모입니다. 수사반장 밝혀낸 바에 의하면 피가 그 피 흘림에서 새로운 세계가 확장되고 개시된다는 것, 이게 새 언약에 담긴 이 세상의 전모입니다. 창조자가 심판주가 되고 놀라운 사실은 그 심판주의 심판 대상이 하나님 본인이라는 사실, 이거는 인간들이 만든 의미체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겁니다.
결국 그럼 우리가 어떻게 벗어납니까? 벗어나게 해주지요. 어떻게요? 요양병원에 집어넣어버리는, 우리를 죽음에 집어넣어버리지요.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늙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깊이 있게 생각한 사람은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매일같이 미치는 사람이 있어요. “왜 나는 어제와 다른데? 아아 미치겠어. 왜 어제와 다른데?”
그것도 못 나게 다른데, 잘 나게 다른 게 아니고 왜 조금씩, 조금씩 나는 못나지는 거야. 누가 이걸 보상해. 보상해줄 사람 누가 있어? 누구야, 여러분? 다 필요 없어, 윤복희도 필요 없어. 도대체 난 절망이야. 왜 자꾸 내가 달라지는데? 그것도 안 좋게. 나빠지게 달라지는데. 그래 내가 나한테 보복 쇼핑을 해야지, 해서 찍어 바르고 좀 나을까 싶어서 빠라바바 백화점 쇼핑해서 자기의 한스러움을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그런 식으로 보상하는데…….
나 안 되거든 자식 대나 잘 돼서 이 어미의 키운 보상을 보람을 해다오. 이런 식으로 자식보고 닦달 내는데 그게 전부 다 네 가지 담화 가운데 갇힌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해답을 가졌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근거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 그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피의 의미로서 피의 의미체계, 천국의 의미체계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 내가 주인공한다고 얼마나 피곤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피곤을 보상받기 위해서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거리를 해왔는지 지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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