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넉가래

아빠와 함께 2022. 10. 3. 21:00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3 - 넉가래

22,09,1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하늘과 연결된 선지자 !!

오늘은 교재 6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핍박받는 선지자' 라고 되어있는데, 성경에서 '선지자' 라고 할 때는 하나만을 생각하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연결' 이라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가 않지요? 선지자가 없으면 하나님과 지상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이렇게 연결을 하는 것에는 제사장도 있고 왕도 있는데, 그리고 선지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 분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기름부음을 받았다" 라는 것이죠. 자기가 기름을 찍어서 바르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쏟아 부음으로서 연결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끊어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끊어지면 저주, 이어지면 복",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선 많이 가지면 복이고 없으면 저주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늘과 이어지면 복이고, 끊어지면 저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 받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은, "주님과 계속해서 소통하기를 원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복인데, 그래서 기도할 때는 "속히 많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가 계속해서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기도의 내용을 바꾸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제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과 만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그게 기도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직원으로, 노동자로, 일군으로 사용되어지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복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이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그러면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세상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이어진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그런 사람이 인간들 가운데 있을까요?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라는 말이죠. 이들이 하나님과 이어진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상당히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오시지 않은 분들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되풀이를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이렇게 선지자는 이어진 사람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가짜 선지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짜들은 "나는 가짜입니다" 라고 하지 않는데, 물론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 가짜들이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는 겁니다.

* 국비 장학생, 가짜 선지자 !!

그렇다면 그들이 왜 환영을 받을까요? 이어진 진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가짜 선지자는 자기 행함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양성된 선지자인데, 이렇게 양성시키는 학교가 바로 선지학교라는 겁니다. 선지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ㅋㅋ), 여기에 드는 비용은 국가에서 충당을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종교단체에서 아주 뛰어난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지원을 해주는데,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 조직의 사람으로 암약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주요기관의 요직에 취직해서 일을 할 때는, 그 종교단체의 의도를 그대로 실행시키는 방향으로 하게 한다는 말이죠.

소망교회, 충현교회, 사랑의 교회, 우리나라에서 탑3에 속하는 교회들인데, 그런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이나 로스쿨 등록금을 지원해준다는 겁니다. 로스쿨 등록금이 등록금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비싼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들 교회가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했는데, 그렇게 국가적으로 선지자를 양성해서 왕이 하는 정책에 대해서 백성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왕이 시키는 대로 따르게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선지자인데, 즉 가짜 선지라는 말이죠.

그러면 숫자적으로 볼 때 진짜가 많을까요? 가짜가 많을까요? 가짜가 많은데, 총신이나 장신에 가면 우글거린다는 겁니다. 이들은 국가가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총신이나 장신은 주로 교회이겠지만 말이죠. 이들은 인간이 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즉 생계수단으로서 목사가 된 자들이라는 것이죠.

* 진짜 선지자는 무엇을 공격하는가?

여기서 제가 문제를 드리겠는데, 그러면 진짜 선지자는 무엇을 공격하겠느냐는 겁니다. 국가를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주님의 지시를 받는데, 그러니 국가가 양성한, 즉 인간들의 행함으로 이루어진 가짜 선지자와는 다르다는 말이죠. 그래서 국가가 잘못했을 때는 말씀으로 직접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국가는 이미 준비된 변호인단이 있는데, 그래서 가짜 선지자들이 진짜 선지자를 핍박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재에 보면 그 제목이 '핍박받는 선지자' 라고 되어있는데, 즉 끊어진 자들이 진짜 하나님과 연결된 자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게 구약성경에 그대로 나온다는 말이죠.

* 해가 지면 어둡다 !!

여기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쓰겠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을 해보시라는 겁니다. 그게 "해가 지면 어둡다" 라는 것인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전혀 틀렸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뉘앙스가 어떻습니까? 희망적이 아니고 암울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선지가가 언제 등장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국가가 더 이상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침몰하게 되는 그 현장에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저물어간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어두워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가 지면 어둡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가짜 선지자가 아니라 진짜 선지가가 나타나서 하게 되는데, 즉 "말씀이 희귀하니 세상이 어둡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으니, 이 세상이 어둡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현상에서는 해가 지면 어두운데, 그런데 진짜 선지자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고, "말씀이 없어서 어둡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개를 결합시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빛이 사라지면 세상은 어둡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 빛과 소금 !!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라고 하셨는데, 소금이 없으면 이 세상은 썩고, 빛이 없으면 어둡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을 암울하게 보신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이 세상 자체를 그냥 그대로 두면, 이 세상은 어두움이 점점 더 어두운 쪽으로, 그렇게 침몰이 되어간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그러한데,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너희' 라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뽑혀 나온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 모르는데, 온통 어두움밖에 없는데 빛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일단 자기에게는 영광인데, 그런데 구약을 보면 그 당시 선지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까? 전혀 그게 아닌데, 그들은 오히려 핍박을 받았다는 겁니다.

* 핍박을 받는 것이 복 !!

특히 이번에 우리가 수련회 때 에스겔서를 하면서, 선지자가 핍박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복들 중의 하나로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데, 그게 하늘나라와 연결이 된 선지자와 같은 계열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어짐, 이어짐,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이지? 너도 이어짐" 이라는 것인데, 즉 "선지자가 이어지고 이어졌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누가 하나님과 지어진 선지자이지? 바로 너희다" 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라는 것이죠.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다시 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다시 해보겠는데, 선지자의 특징은 연결인데, 또한 복은 이어짐이고 저주는 끊어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내용은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과 연결이 되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즉 주님과 소통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왜 기도할 내용이 없다고 합니까? 그것은 평소에 끌어 모으는 기도만 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모아졌다고 여기니까, 재산도 좀 있고 몸도 건강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고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는 겁니다.

* 나도 선지자 노릇이 싫어 !!

우리가 선지자를 간단하게 정리를 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이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진짜 선지자의 경우에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즉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자기 위주라는 겁니다. 진짜 선지자도 자기 위주인데, 그런 일은 짜증이 나고 귀찮다는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 노릇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데, 그만 두고 싶다는 겁니다.

* 놀림감은 견딜 수가 없어 !!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것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에, "하나님, 제가 언제까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굶고 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사실은 이런 것이 더 힘든다는 말이죠.

어렵더라도 이 이야기는 좀 해야하겠는데, 인간의 자아는 타인이 없으면 생겨나지를 않다는 겁니다. 즉 "타인이 없으면 나도 없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옷을 벗고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데, 남들의 눈이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벨 소리가 우리면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이 있을 때 내가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루에 한 끼를 먹어도 그것을 라면으로라도 때우면서 참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들이 와서 놀린다고 하면, 그러면 성질이 급한 사람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예레미야서 20장에 나오는데, 7절에서 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렘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미리 보여주는 선지자 !!

여기 7절에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자기가 놀림감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더 깊은 의미로 보면, 이렇게 예레미야가 놀림감이 된다는 것은, 장차 예레미야를 보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예언인데, 불교나 다른 종교는 노력을 하면 되지만, 그러나 복음은 예언과 예언으로 연결이 되고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성취해나가는 세계가 바로 예언의 세계이고 천국이고, 또한 그게 지옥이고 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선지자가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인데, 선지자는 그것을 미리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경우에 자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 9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광기(狂氣)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만 자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즉 미치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 글자로 '광기(狂氣)'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세상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낼 때, 그 선지자가 광기가 충만한 자로 보이게 했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 자체가 말씀이 없어서 어둡고, 또한 소금이 없어서 썩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반대의 인물을 투입하게 되는데, 그게 예레미야라는 말이죠. 이것은 예레미야가 비정상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아무리 멀쩡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했는데, 그래서 "너는 악마의 대장이다" 라는 소리도 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예쁘장하게 포장된 모습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린아이들의 친구라고 하니까, 산타클로스나 스머프 정도로 여기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16세기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철학자이자 과학자라는 겁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미신을 추방하자. 비이성적인 것은 모두 다 제거하고 이성적인 것만 남기자" 라고 해서, 그 방법을 연구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것이죠. 프랑스 사람인데 말이죠.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렇게 미신을 추방하고 합리적인 것만 추구하겠다고 했는데, 그런 이성적인 노력이 그만 광기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인간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러한데, 즉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 인정사정 없이 모두 다 잘라내고 !!

그의 주장은 "똑똑하고 논리 정연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가라" 라는 것인데, 나머지는 인정하지를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잘라낼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눈물은 왜 흘리지? 잘라내라. 사랑이 눈에 보이나? 잘라내라" 라고 해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돈이 되는 것만, 쓸모가 있는 것만, 합리적인 것만 남기는 작업이 너무나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모두 다 잘라내고, 미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도 다 잘라내고, 깔끔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만 하도록 남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바로 미친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정신병자와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데, 쉽게 말해서 '만남' 이라는 말이죠. 그러한 만남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만 골라서 만나면, 그 만남은 성사가 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토끼나 개와 같은 짐승과 만나는 것은 아니기에 말이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진실된 것만 엑기스로 뽑아서 만나면 결합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만 빠지고 만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그만 잘라낸다는 겁니다. 종교도 잘라내고 마귀도 잘라내고, 그렇게 다 잘라낸다는 말이죠.

물론 데카르트가 종교를 잘라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종교가 권력이기 때문에 건드렸다가는 자기가 잘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눈치를 보면서 진실된 것만을, 즉 "우리 인간들끼리 만나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라고 하는, 그것을 시도했다는 말이죠.

* 실용주의의 극단이 곧 자본주의 !!

이것을 서양철학에서 '합리주의' 라고 하는데, 이 합리주의에서 과학주의로 나아가고, 이것을 요즘에는 실용주의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극단이 바로 자본주의인데, 그러니 실용주의가 미쳐버린 것이 곧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자본주의가 되면 어느 정도로 미치게 되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은 없어지고 돈이 스스로 돈을 만드는데, 거기에 자기가 끌려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된 것이 자본주의인데,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구입한다는 말이죠. 즉 "저 상품을 구입하면 나중에 얼마나 더 벌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이 바보야 !!

그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인데, 주거를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는 것이 아니고, 아파트가 투기목적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목적도 없이 집을 사면 주위에서 뭐라고 합니까? 바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빌라와 같은 것을 사면, "이 바보야, 그것을 팔 때 얼마나 남는지 알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부가 다 미쳐있는데, 합리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들이 발달을 하면서, 여기에서는 인간보다 욕망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주체할 수가 없는데, 욕망이 그냥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행복, 만족, 이런 것은 없는데, 욕망이 계속 커진다는 겁니다.

* 인간보다 강한 욕망 !!

그러면 이 욕망은 어디서 유입이 됩니까? 타인, 즉 남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욕망이 주어지니, 자아, 즉 '나' 라는 것을 남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아무리 가져도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남들이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가친척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만나면 "너거 딸은 이번에 어느 대학을 갔노?" 라고 하는데, 그것을 왜 묻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떨어졌다. 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는 남들을 잘라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그런데 잘라내고 자기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을 가고 하는데, 그렇게 피하고 도망치고 한다는 말이죠. 남들의 강력한 시선과 평가에 시달리다가 시달리다가 이민을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민을 가지 않은 사람은 무엇인가요? 돈이 없어서 남아있는데, 물론 용기도 없고 말이죠(ㅋㅋ).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미쳐있는데, 전혀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그러니 뭐라고 하겠습니까? "돈을 주세요"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끌어 모으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기니 말이죠. 그래서 매일같이 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 저주받은 자

지금부터가 어려운데, 이렇게 데카르트를 다루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쉽게 하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있던 그 당시의 항목들을 제가 적어보겠는데, 즉 "절름발이, 소경, 벙어리, 고아, 과부, 나그네, 죄인, 가난한 자, 죽은 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저주받은 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은 자가 저주를 받은 자를 광기가 들린, 즉 미친 자로 본다는 말이죠. 이렇게 저주를 받은 자들 전체를 두고, '마귀가 들린 자'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조금 전에 주님과 연결되면 복이고 끊어지면 저주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벌써부터 저주라는 기준이 세속적으로 달라지기를 시작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1장을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1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마 11: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라고 묻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5절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6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방금 우리가 이야기했던 항목들, 즉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가 나와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저주받은 자라고 했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작업현장 !!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러분은 이 항목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빠지고 싶습니까? 물론 우리는 빠지고 싶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들어가셨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광기가 들린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들로부터 귀신이 들린 자라는 평가를 받는 자리에 들어가셨다는 것이죠.

선지자 계열의 마지막 완성은 예수님인데, 선지자들에게서 조금 조금씩 그 낌새가 보이더니만,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하나님이 어디서 자기 백성을 만나고 어디서 일을 하시느냐가 중요한데, 즉 예수님이 작업현장을 어디로 정했느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곳인데, 그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이 들리게 하시고, 소경을 보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걷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데, "복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과 연결이 된 것이 복인데, 그러면 주님이 어디에 오셨습니까? 광기가 가득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이 무엇입니까? 복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인데, 그러니 복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라고, 그렇게 예수님과 연결이 되면 그게 곧 복이라는 말이죠.

* 하지만 그곳은 기피대상 !!

처음에 제가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그것이 선지자고 또한 복이라고 했는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그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과 연결되면, 그것이 바로 복이고, 또한 천국이고, 그리고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어디를 바라봐야 합니까? 그것이 하늘이 아니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다가 땅으로 오셨는데, 그 땅도 어떤 땅입니까? 그것이 바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라는 것인데, 그곳이 곧 예수님의 작업현장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죄인들이 있는 곳인데, 하지만 그곳은 우리 인간들의 기피대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고 하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리는 타인의 자리에 누구를 넣었습니까? 예수님을 새로운 타인으로 맞이했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놀림감이 되는 자리, 바로 그 타인의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이죠.

* 타인의 교체 !!

그렇게 되자 어떻게 됩니까? 평소에는 그 자리를 보면서 놀리는데, 즉 "나는 너와 달라. 나는 똑똑해"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인의 자리에 와서 그것을 지적하실 때,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들의 괴수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타인의 교체인데, 이미 연결된 자이고, 즉 오늘날의 선지자라는 겁니다. 복을 받은, 즉 타인과 연결되어있다는 말이죠. 주님과의 연결인데,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죠.

* 아모르 파티 !!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왜냐하면 같은 인간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거기에 대해서 평생을 골몰하면서 대응을 해왔기 때문이란 겁니다. 즉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요즘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백세인생'과 '아모르 파티'와 같은 노래를 보면, 그 주제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라는 겁니다. 물론 말장난에 불과한데 말이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생을 즐길 수 있고, 자기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모르 파티가 라틴어로, '운명을 사랑하라' 라는 의미인데, 파티를 즐기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ㅋㅋ).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을 자기 소망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남들의 소망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들이 그런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야 자기가 남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들 인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교육이 어디를 향합니까? 어떻게 하면 남들의 놀림감이 아니라, 남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지, 그것이 우리 인간의 평생목표라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얼마나 특이한지 모르는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런 세상에서 도저히 발을 빼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맞춤인생 !!

그런데 세리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 옆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남들이 요구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나는 십일조를 했고, 금식을 했고, 구제를 했고, 간음을 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남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즉 남들의 평가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맞춤인생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그렇게 남들을 의식하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급급했는데, 그런데 세리는 어떠합니까? 남들에게 맞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에 딱 맞추어서, 즉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오셨지요?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이 이어짐인데, 이게 복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이렇게 세리 이야기가 나와도,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뭐라고 합니까?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 맞기는 맞는데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그게 문제지" 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이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 유리공장 견학 이야기 !!

제가 독일에 갔을 때지 싶은데, 유리제품을 만드는 조그마한 공장을 갔었다는 겁니다. 거기서 복음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는 현상을 목격했는데, 길다란 파이프에 입을 대고 부니, 그 끝에서 뭔가 볼록하게 생기더라는 말이죠. 그것이 유리로 된 제품을 만드는 과정인데 말이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예수님은 불고, 그래서 끝에 볼록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성도가 될 수 없는데, 아무리 남을 제치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도, 그런 멘트를 백 번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죄인이 아니고, 죄인 흉내를 내면서 거들먹거리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훅' 불어버리면 파이프를 따라가서 끝이 볼록하게 되는데, 그것이 나중에 굳으면 '톡' 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포도주 잔이든 뭐든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도인데, 즉 주님이 직접 생산한,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파이프와 볼록하게 된 것을 '연결'로 보고 싶은데, 비록 떨어져도 역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게 오늘날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걱정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목사님 말씀이 맞기는 맞는데, 그런데 주님이 불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말이죠(ㅋㅋ).

*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보자 !!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가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정말로 주님이 '훅' 불어서 생산하신 천국백성인지,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달달 외워서, "저는 죄입니다. 저는 주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가짜 천국백성인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거기에는 각각의 특징이 있는데, 여기서 야고보서 4장을 보겠는데 말이죠. 진짜 주님이 만든 작품과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생산한 가짜 제품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겁니다. 자가발전을 해서 스스로가 성도라고 하는 자들과 주님의 작품과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안개'가 아니고, '보이다가' 라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서 가짜 성도는 '보이다가' 라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 뒤에 나오는 '없어지는' 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잠깐'을 집어넣어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진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냥 보인다고 하면 자기가 보이는데, 그런데 잠깐을 넣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보이는 것은 맞는데,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은 맞는데, 그래서 코로나에 걸리면 기침이 나고 입맛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실제로 체험이 되는데, 하지만 무엇을 빠트리면 안 됩니까? 코로나에 걸려서 생고생을 하는 자기도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게 '잠깐'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없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바다에서 파도를 치는 운동 에너지와 같은데, 잠깐 찰싹거리다가 사라진다는 말이죠.

* '보이다가' 라는 것을 우기는 인간들 !!

그런데 '잠깐'도 지우고 '없어진다' 라는 것도 지우고, 다만 '보인다' 라는 절대화를 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여기에 성경의 모든 지식을 다 집어넣는데, 즉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하늘나라는 너무나도 아름답군요. 주님이 보고 싶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런데 잠깐도 지우고 없어지는 것도 지우고, 안개도 지우고, 오로지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나' 라고 우기면서, 그 보이는 것을 계속해서 끌어 모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대단한 보이는 것'으로 만들 때,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가짜라는 말이죠.

* 인간은 혼자가 아냐 !!

그러면 "잠깐, 없어지는, 안개", 이런 것을 잘라낸 자가 있는데, 우리의 마음에서 과연 누가 잘라내었습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혼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진짜 광기가 있는데,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가 다 미쳤다는 것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겠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함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이 아니고 마귀의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알아서 독자적인 행동한 것이 아니라,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라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과 악마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이미 결탁이 되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지적을 하신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지금 여러분이 힘이 들어도 참으셔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을 보고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느냐는 말이죠. 지금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좀 복잡하더라도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무슨 취지인고 하니, 귀신이 들린 자를 예수님이 멀쩡하게 하셨는데,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나가는데, "바리새인이 귀신이 들렸는가? 그게 아니면 귀신이 들린 자가 귀신이 들렸는가?" 라는 겁니다. 문장이 좀 이상해 보여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멀쩡한 인간들의 통치구조 !!

제가 데카르트를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를 다 지운다고 했습니까? 미신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그렇게 미친 것들을 제거해서 멀쩡한 사람들끼리 살자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멀쩡한 인간들의 통치구조'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멀쩡하다는 인간들 중에서 아이큐가 가장 높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소위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란 겁니다. 물론 최근에는 의대에 좀 밀리지만 말이죠. 법조인들이 가장 똑똑한 인간들인데, 의사는 인간의 육신을 만지지만, 법조인들은 인간의 정신을 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더 똑똑해야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서울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도,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매일같이 TV에 나왔던 분이 있는데, 정은경 질병청장이라고, 의사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국회의원들이 다스리는데, 그들이 대부분이 다 무슨 출신들입니까?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라는 겁니다. 윤석열도 검사 출신인데, 그들은 합리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미신과 같은 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ㅋㅋ)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계산이 맞아야하고, 자료가 정확하게 구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인간의 판단을 신뢰하는데, 즉 인간의 미래는 그 판단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미래성을 믿는데, 즉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는 말이죠. 확률이 아닌 가장 확실한 미래만을 믿는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을 고쳐주시지 않았는가?

그런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인데, 그들은 율법 외에는 다 제거를 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린 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왜 바리새인들에게 있는 그 악마는 쫓아내지를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저의 질문인데, 여러분은 이것이 궁금하지 않던가요? 그들을 고쳐주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보고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욕을 하시지 말고 고쳐주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말이죠. 그들은 고쳐주지 않고, 그런데 연약하고 힘이 없는 민중들은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하신 겁니까? 다같이 구원을 받아야 할 영혼들인데, 누구는 불쌍히 여기고, 누구는 그렇지 않게 여기셨느냐는 것이죠. 어려운 사람이 교회에 오면 좀 봐주고, 돈이 있는 자가 오면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물론 요즘 교회가 그렇게 할 리가 만무한데, 오히려 정반대라는 말이죠.

* 넉가래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저는 오늘 아침에 이 단어를 찾아보고 나서 처음 알았는데, 그게 '넉가래' 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눈을 치우는 특수한 삽을 넉가래라고 한다는 말이죠. 앞에 좁은 것이 아니고 넓은 삽인데, 그것을 가지고 도로 위의 눈을 치우면 훨씬 수월하게 치울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름은 몰라도 아마 다들 보셨지 싶은데 말이죠.

지금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구원자는 맞지만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는 구원자는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는 가난하니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 물론 부자가 되게 해줄 수는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요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

여기 3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이죠. 제가 조금 전에 야고보서 4장을 언급했는데, 14절에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라고 했을 때, 만약에 "저는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소원을 들어주는 주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너희들은 무조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잠깐, 없어지는, 안개, 이런 것은 모두 다 제거해버리고, '보이다가' 라는 것을, 즉 '보이는 나'를 가지고 교회에 가서, 성경을 열심히 보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인데, 그런데 거기에서 '보이다가' 라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나' 라고 우기면서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들어서, 그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7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천국에 가고자 하기에, 갈 수가 없어 !!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 라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데, 이렇게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 라는 것이 가고자 하는 곳이 진짜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천국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말이죠. 교회에 백년을 다녀도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가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서, 그렇게 맡기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싫다는 겁니다. 자기가 결정해서, 그런 자기의 판단력이, 이성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있는 이 기회를 놓치기가 싫다는 말이죠. 자기가 치매에 걸리기 이전에, 그래도 총기가 있고 똑똑할 때 성경을 보고 공부해서 자기를 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 법조인 바리새인들, 그러나 !!

바로 그러한 짓을 바리새인들이 했는데, 그들은 똑똑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의 법조인들인데, 즉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한 방에 날렸는데,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들은 악마의 새끼라서 악마의 일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나 소경이나 벙어리는 고쳐주시면서, 왜 그들에게는 이렇게 심하게 나오시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바리새인들을 고쳐주면, 즉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문둥병자가 낫고, 소경이 앞을 보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죠.

* 그 길은 있어도 없는 길 !!

인간이 아무리 구원을 받고자 시도를 해도, 그게 전혀 소용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요한복음 7장 34절의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시지, 그 나머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가는 길을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 "나는 죽어도 좋은 곳에 갈 거야" 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 상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까 유리공장에서 파이프를 불면 그 끝이 볼록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생산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파이프에서 떨어져서 유리컵이 되어도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서 엿가락을 늘어뜨렸다고 보면 되는데, 예수님이 엿을 먹다가 흘려서 땅에 닿으면, 그게 선지자가 되고 성도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예레미야서 14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렘 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여기에 보면,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결코 보내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거짓으로 예언을 한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는 예레미야서 23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렘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 하늘나라의 천상회의 !!

여기에 하늘나라의 회의가 나오는데, 이것을 천상회의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예레미야가 초청이 되어서 참석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역대하 18장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도 천상회의에 참석을 했다는 말이죠. 기존의 400명의 선지자가 아니라, 한 사람만이 초청을 받았다는 겁니다.

(대하 18:18)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그렇다면 천상회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악마가 이스라엘에 가서 장난질을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는데, 거짓말을 하는 영을 400명의 선지자들의 입에 다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 영을 받았으니 설치게 된다는 말이죠.

* 악마는, 악마의 일을 해야 !!

그런데 그 방향이 어디인고 하니, 진짜 선지자를 비난하고 학대하고 뺨을 때리고 핍박하는 행태로서, 그렇게 악마의 행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거짓 선지자들이 한다는 겁니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을 악마는 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악마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악마의 일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민중들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을 왜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8장 34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나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좋게 사귀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복음 7장 34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인간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 방향은 인간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말이죠. 그러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결과가 천국이 아닌, 악마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바리새인들이 다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넉가래가 무슨 상관이 있는고 하니까, 아스팔트에 눈에 왔다고 하면, 그러면 넉가래를 가지고 눈을 치우는 겁니까? 아니면 눈을 없애는 겁니까? 눈을 치우는 것인데, 그러면 하얗던 것이 시커멓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시커먼 아스팔트를 드러내는 일을 넉가래가 한다는 겁니다. 즉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는 것이죠.

* 돌이킬 수 없는 '돈 맛' !!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원래 우리가 살고 싶던 대로 살고 싶다" 라는 겁니다. 선지자고 뭐고 그런 것은 다 귀찮고, 우리 인간들끼리 통하는 것, 그게 합리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그것이 실현된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라는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을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데, 돈 맛을 보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중국이 돈 맛을 보았다면, 북한이 돈 맛을 보았다면, 그러면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돈 맛을 보게 되면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석유가 나오는데, 그래도 국민들은 빈곤에 시달린다는 말이죠. '아기공장'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씨받이를 해주고 돈을 받는데, 10대 소녀들이 임신해서 아기를 낳아서 넘기면, 부모가 그 돈을 챙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밑바닥에 있는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나이지리아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누가 챙기는고 하니, 그게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되는데, 다시 지지리궁상으로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죠. 돈 맛을 알았다는 겁니다. 이미 "나는 이 정도다" 라고 격상을 시켜놓은 이상, 과거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청소는 뱅글뱅글 돌면서 !!

저의 친척 중에서 80이 넘은 부부가 있는데, 과거에는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지금은 20평짜리에 산다는 겁니다. 자식이 사업을 하다가 망한 것이 아니고, 청소하기가 싫어서 그렇게 산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라는 겁니다.

우리 권사님도 청소하기가 매우 힘들지요? 10평으로 줄이면 되지 싶은데, 그러면 빗자루를 들고 뱅글뱅글 돌기만 해도 모두 해결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ㅋㅋ). 우리 인간이 마음을 낮춘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맛을 보았다는 겁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서 입맛이 잠시 없을 수는 있지만, 그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복귀가 된다는 것이죠. 잘나가던 '나'로 말이죠. 그때의 그 시절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데,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밑바닥으로 내려가시는 주님 !!

그러니 성경말씀을 공부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그 목적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아무도 가지 않는 밑바닥으로 내려가신다는 것이죠.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거기에는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죄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에, 그 인간의 똑똑함으로 그것을 덮어놓았다는 겁니다. 마치 아스팔트에 눈에 내려서 덮이듯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선 죄의 밑바닥까지 찾아가시는데, 어떻게 말입니까? 십자가로서 찾아가신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것을 뚫고 자나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하는, 그리고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서기관들이고 사두개인들인데, 즉 거짓 선지자들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일반 민중들은 권력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12제자들도 다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내려가는데 홀로 내려가셨는데, 아무도 주위에 도와주는 자들은 없었다는 겁니다.

* 오잉, 깜놀이야 !!

누가복음 마지막인 24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두 사람도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에게 실망을 해서, "예수님이 그런 분인 줄 몰랐다. 그러니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걸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 가노?" 라고 하니, "우리가 믿던 예수님이 그만 죽어버려서,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전에 이야기를 했잖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말이야" 하시는데, 그러자 "오잉?" 이라고 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아하, 이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세계구나. 나의 생존을 위한 세계는 허상이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 있다가 없어지고, 다시 보이는 안개 !!

다시 야고보서 4장 14장 말씀을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라고 하는, 그 순서를 밟아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있다가 없어지고, 그리고 다시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제가 독일의 몽샤우 지방의 유리공장을 구경했을 때, 그것을 보고 "당신이 유리공장을 구경하네" 라고 하면, "그게 아니야. 나는 죽었는데 주님이 다시 살려주셔서 구경하고 있다" 라고,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응, 구경한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어제 죽었다가, 오늘은 주님이 다시 살려주셔서 유리공장을 구경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말이 길지만 하다가보면 짧아지는데, 그래서 나중에는 "그래, 구경해" 라고 해도, 그 내용이 모두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손자를 키우더라도, "어제 죽었다가 오늘 살아난 내가 손자를 키운다" 라고,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무엇이든지 다 어제로 죽고 오늘 다시 살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말씀이기에 말이죠. 그것이 야고보서 4장 14절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진 안개가 맞는데, 주님이 다시 살려내니,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해서 진행이 될지는 주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덤으로 주어진 인생 !!

옛날에 뻔데기를 팔 때 보면 덤으로 더 주고 했는데, 그것은 주인마음이지 손님의 마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덤으로 주어진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고, 또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이게 말씀의 세계구나 !!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는 것을, 제가 어느 강의시간에서인가 "엎어진 냄비 속에 쥐가 들어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참 여기 대구강의에서 지난 시간에 했지 싶은데 말이죠. 그렇지요? 엎어진 냄비가 자꾸만 달그락거리면서 움직이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안에 쥐가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는데,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게 바로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너희는 나에게 올 수 없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내가 바라는 천국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구나. 가봤지 천국이 아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제가 바리새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기분이 좋게, 즉 "내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라고, 그 말을 마치, 아니 이것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과거의 일인데, 자기가 그렇게 알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구원받지 못할 그 시절의 고백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런 고백들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하면 되는데, 죽을 때까지 말이죠. 그런데 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그것을 기뻐하면서 고백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그야말로 감사하면서 "나의 아비는 악마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다 지나간 것이고,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분리가 되었다가 다시 결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분리가 되었으니 끝이 났는데, 그렇게 끝이 났을 때, 주님께서는 "내가 나갈 게"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건져내어 주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

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하고 마치겠는데, 고아, 과부, 나그네, 귀신이 들린 자, 그리고 가난한 자를 고쳐주셨는데, 옛날에는 가난한 것도 역시 저주였다는 말이죠. 지금도 그런가요? 그리고 문둥병자, 소경, 벙어리, 절름발이 등등, 이런 자들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지가 않은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쳐주었다는 것은 퍼내는 것인데, 즉 넉가래를 가지고 퍼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한 자들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해야합니까? "그게 아니야. 지옥에 가는 이유는 더 깊은 곳에 있어"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넉가래로 퍼내는 것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여기에 합류를 하셨다는 겁니다. 이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이들이든 저들이든 간에,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병이 나아서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라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헨젤과 그레텔' 이라는 동화제목만 언급하고 지나갔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계모가 와서 자기 아이들이 아니니까 키우기가 귀찮아서, 그만 숲 속으로 쫓아내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집이 없으면 안 되는데, 처음에는 돌을 가지고 길에 흘리면서 표시를 해서 다시 돌아왔지만, 그 다음에는 떡을 가지고 해서 그만 새들이 먹어버려서 집에 돌아오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 오직 십자가의 피로 !!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흘린 것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게 새 언약인데, 즉 주님께서 이 지상에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피는 누구를 위해서 흘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인데,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게 예배든 헌금이든 간에 말이죠.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그냥 죄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서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성경공부를 하는 죄인이고, 전도를 하는 죄인이고, 기도를 하는 죄인이고, 봉사를 드리는 죄인이고, 그리고 손자를 키우는 죄인이고, 그렇게 그냥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마치 세리처럼 무엇만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주님의 그 '이루심' 안에서 우리가 각각의 역할을 맡았다는 겁니다. 마치 엿가락이 늘어진 것처럼, 그리고 파이프에 '훅' 불어서 볼록하게 되고 유리잔을 만드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서 이 땅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죠.

그러면 주님이 무엇을 가지고 이루셨습니까? 십자가의 피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복음인데, 그리고 그런 고백을 하는 여러분이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여러분은 하늘과 연결된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정상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힘이 세면 성공인 줄로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어둠이고 부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신 주님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저희들이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9,30 오후 6시에 마침.

주님의 넉가래로 살아가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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