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1 - 주상절리 해석방식
22,07,1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다윗 왕 중심의 전쟁 !!
오늘은 교재 65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다윗 왕 중심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다윗은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왕인데, 그러니 우리 대한민국의 왕은 아니라는 말이죠.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의 왕이라는 겁니다. 우리와 직접 연결이 되어있는 왕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지요?
*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그런데 로마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1절에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 때문에 부름을 받고 또한 택함을 받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내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3절에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고 하는데, 다윗의 혈통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다윗의 혈통이 복음을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분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분이라는 겁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러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복음이 들어가야만 연결이 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혈통과 지금 우리와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을 옛날 고대의 이스라엘이라는 남의 나라의 왕이라고 여겨버리면 곤란하고, 지금 우리와 관련성을 지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 다윗언약의 연속성 !!
그렇다면 이러한 관련성을 위해서, "왜 다른 혈통은 안 되고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손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내용이 되는가?" 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다윗의 혈통은 곱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여기에 방해꾼이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사울이라는 겁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 대해서 공격을 했는데, 그렇게 공격을 함으로서 형성된 내용이 다윗의 혈통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복음이 없었고, 그때는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 그것을 '언약' 이라고 하고, 앞에 다윗을 붙여서 '다윗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언약의 연속성이 복음을 형성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다윗언약이 어떻게 구성이 되는고 하니, 사울 왕의 공격이 없으면 이 다윗언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해서 언약이 아니고, 누군가가 공격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 사울은 왜 다윗을 공격했는가?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알아야 하는 것은, "사울 왕은 왜, 어떻게 다윗을 공격했는가?" 라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공격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사울이 이렇게 다윗을 공격해주어야, 여기서 언약이 생겨나고, 그 언약의 연속성이 곧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혈통과 우리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는 것도 역시 우리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 그것을 지금부터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여기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런데 성경의 내용이 바로 들어가게 되면 그게 지식이 되어서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라는 것은 붙여놓으면 떨어지고 붙여놓으면 떨어지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것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라는 점이라는 겁니다. 성경과 복음은 잠시 내려놓고, 이것부터 먼저 규정을 해보자는 말이죠. 과연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것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하는데, 즉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그게 어느 지점으로 응집이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은 무엇을 향해서 움직이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움직일 때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을 바라보면서 움직인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무엇을 향해서 움직이는가?" 라는 겁니다. 인간이 움직이는데, 그게 도대체 어떤 지점을 향해서, 어떤 상태를 목표로 해서 움직이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지금부터 이것을 한번 알아보자는 겁니다.
먼저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1) 세상 바깥, 2) 나의 바깥, 3) 나의 안, 4) 나의 옷 안" 라고 한다면, 인간은 움직이는데, 과연 무엇을 향해서 움직이는지, 그것을 한번 찾아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1번이 성립합니까? 즉 '세상 바깥' 이라는 것이 성립하느냐는 것이죠.
* 사울은 어떻게 사는가?
우리 인간에게 세상 바깥은 성립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상 바깥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울은 어떻게 사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 점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데, 그런데 세상 바깥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 안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대구에서 김천으로 움직이고, 그리고 광주로 움직이고, 대전으로 움직이고, 또한 서울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이해할 때는, 우리나라 지명과 그 거리를 비교하면 편리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더베" 인데, 돌아갈 때는 그 역순이고 말이죠. 안디옥이 두 군데이기 때문에, 터기 중부의 안디옥을 이렇게 부른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는 실감이 나지 않는데, 그러면 "대전, 김천, 대구, 포항" 이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움직일 때, 여기에 대해서 우라는 "당신은 무엇을 향해서 움직이는가?" 라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울 왕에게도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라고 물어볼 수가 있고 말이죠. 사울은 세상 바깥이 아니고 세상 안에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말이죠.
* 역시 세상 안 !!
그러니까 우리와 똑같은데, "대전, 김천, 대구, 포항", 그렇게 세상 안에서 움직였고 또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을 지도에 선을 그어보면 어떻습니까? 전부가 세상 안이라는 말이죠. 설령 한국에 있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도, 그것도 역시 세상 안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나의 바깥', 이것은 있습니까? 그것은 있는데, 외출이 그러한 경우라는 말이죠. 자기 몸의 바깥은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나의 안' 이라는 것인데, 이런 것이 좀 어렵다는 것이죠. 이러한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안에 양심이 있다. 마음이 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4번째로 '나의 옷 안', 이것은 어떻습니까? 인정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옷 안에 육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남는 것은 '나의 바깥', 그리고 '옷 안', 즉 육신만 남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자기 안에 들어있는 육신이 바깥으로 외출을 했다가,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우리 인간은 움직이는데, 어떻게 움직입니까? 옷 안에 들어있는 육신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회사에 출근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단장을 하고, 또 다시 출근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할 사람은 없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자기의 바깥으로 왜 나갑니까? 그것은 남들이 자기처럼 육신에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회사에 가면 사장님도 옷을 입고 출근하고, 또 과장님도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근하면 누구를 만납니까? 사장과 과장을 만나고 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세상살이라는 말이죠.
* 인간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
그리고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은, 옷을 입고 가게문을 열고서 누구를 기다립니까? 손님을 기다리는데, 즉 자기와 똑같이 옷을 입고 있는, 자기와 닮은 타인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인데, 왜 그렇게 움직입니까? 그것은 남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남을 만납니까? 그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인데, 주어진 생존의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타인과 만난다는 말이죠. 옷을 입고 그냥 가만히 침대에만 누워만 있으면 심심한데, 그래서 움직이게 되고, 또한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앞에 있던 것들, 즉 세상 바깥은 날아갔는데, 하늘나라고 뭐고 간에 모두 다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마음이 있다는 것도 다 날아갔는데, 왜냐하면 이런 것은 실제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해서, 그래서 이런 것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 인간의 욕망은, 모방에서 !!
그러면 현실적인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의 옷 안에 있는 육신이, 그 옷을 입고 나의 바깥에서 나와 꼭 닮은 사람과 만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타인을 만납니까? 그것은 바로 '모방' 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모든 욕망은 모방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원한다. 하고 싶다. 기대한다" 라는, 이런 모든 것들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만약에 두더지처럼 동굴 안에만 있다고 하면, 물론 두더지도 동굴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렇게 TV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를 않는다고 하면, 아무도 없는 동굴 안에서 태어나서 혼자 살다가 죽으면, 그러면 그런 사람은 욕망도 없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아닌가요?
* 아리스토텔레스 - '모든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다' !!
그렇다면 욕망은 왜 생깁니까? 누구를 만남으로서, 즉 "나도 옷을 입고 너도 옷을 입고", 그렇게 서로 만남으로서, 서로를 닮아가게 되고 모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다" 라고 했는데, 즉 타인을 모방한다는 겁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고 하는 것은, 비단 얼굴 생김새만 닮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본 따서 자라나게 되는데, 그것을 가정교육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모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아이는 "아하, 싸울 때는 저렇게 하는구나. 힘도 중요하지만, 고함을 더 크게 질러야 이기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하면서 아이는 부모를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아이가 시간을 보내는 움직임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부모가 하는 행동이 아이에게 그대로 스며든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방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끼리라도 경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 새로운 욕망을 찾아서 !!
잠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은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움직이는데, 어디를 향해서 움직이는고 하니, 모방의 대상을 찾아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자기가 더욱 더 닮고 싶은 대상을 찾아서, 즉 새로운 욕망을 개발하기 위해서 인간은 움직인다는 말이죠. 이렇게 옷 안에 있는 우리 육신이 움직일 때는 다 목적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과거의 상투적인 욕망이 아니라, 자기를 보다 더 짜릿하게 해주고 자기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줄 수 있는 욕망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를 닮아야할 것인지를 모색하게 되고, 그러한 새로운 욕망을 찾아서 인간은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성경말씀도 하나의 지식이 되고 마는데, 그런 지식은 응집하려는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내가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실질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숨쉬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성경말씀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무튼 인간은 경쟁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경쟁하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을 '쟁점실존현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쟁에서 이게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남들을 모방할 때, "저 사람은 내가 더 근접해서 따라 닮았으니, ???"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이때 누군가가 들어옴) 어서 오세요 !!
우리가 지금 "사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타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인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만나서 모방해야 신선한 욕망이 새롭게 자기에게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만든 욕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남들이 자기를 은연중에 약을 올리는 욕망이라는 말이죠. "너는 어떻게 이렇게 괜찮은 놈이 되었어? 야, 살짝 약이 오르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잠자던 욕망을 일깨워서, 그리고 그게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말이죠.
* 쟁점실존현상 !!
그러면 여기서 경쟁이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자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주위에 보면 그런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줄줄이 깔려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경쟁이 되면서, 여기서 쟁점실존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은 왜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십니까?" 라고 하면, "국가와 국민을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는데, 나온 후보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쟁점이 되는데, 그런데 막상 그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되면 쟁점은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 시기와 질투, 그리고 다윗언약 !!
그렇게 경쟁을 하면서, 여기서 시기와 질투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죠. 시기와 질투,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은 언약이 아닌데, 그런데 사울 왕이 개입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이 다윗언약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언약의 최종점이 복음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언약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스스로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는 자를 모방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당신만 신자가? 나도 신자다" 라고 하면서 모방을 한다는 말이죠.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는데, 그러면 다윗은 그 이전에 골리앗을 이긴 사람을 모방했습니까? 모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 골리앗을 이긴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윗은 모방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다윗은 모방하지 않고 골리앗을 겼다는 겁니다.
그런 다윗이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고 환영을 받으니, 바로 그런 모습을 사울 왕은 모방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백성들에게 자기도 다윗처럼 인기를 얻고 싶은, 그러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다윗의 움직임이 그렇게 실시가 된다는 것이죠.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말이죠.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제 다윗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이해를 하시겠지요? 다윗의 주변에 이렇게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자" 라고 하는 본래의 쟁점은 모두 날아가 버렸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너로 인해 나는 불쾌하다" 라고 하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죠.
* 나는 백설공주가 될래 !!
이게 '신데렐라' 라는 동화에 보면, 그리고 '백설공주' 라는 동화의 경우에도, 여기에 계모가 등장해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동화' 라는 것이 왜 아이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있고, 또한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가 않는고 하니,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그런 동화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모방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즉 자기 움직임의 목표로서 동화의 등장인물이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백설공주가 될 거야" 라고 하는데, 일단은 백설공주가 예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여자에게 있어서 예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구약성경인 에스더서에 나오는 것처럼, 남자의 힘을 능가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에스더가 그렇게 예쁘지가 않다고 하면, 아하수에로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다는 말이죠.
요즘 김건희 여사 때문에 나라가 좀 시끄러운데, 그런데 김정숙 여사가 옷을 입었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따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건희가 입으면 난리라는 말이죠. 자기는 그렇게 예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모방해서 옷을 입으면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김건희 여사가 대한민국의 영부인으로서 국가와 민족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쟁점은 모두 다 사라지고, "당신이 뭔데 나보다 더 예뻐? 옷을 왜 그렇게 잘 입어?" 라고 하는데, 즉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잡을 때까지 따라잡아 본다는 말이죠. 전혀 아닌가요?
* 다윗은 경쟁이 없어 !!
아무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나서 인기가 높았을 때, 사울은 시기심이 극도로 올라갔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악신'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건들지 말아야할 자를 건드렸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윗은 모함과 시기와 질투가 없는데, 즉 경쟁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에게 일어난 일은, 다윗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처음에 질문을 했던, "1) 세상 바깥, 2) 나의 바깥, 3) 나의 안, 4) 나의 옷 안" 라고 했던 것 중에서, 어느 것이 현실적인고 하니, '2) 나의 바깥' 이라는 겁니다. 옷을 입고 바깥에 나간다는 말이죠. 이 세상이 전부인데,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니, 세상 바깥은 없다는 겁니다.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에 가도 역시 세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나의 안', 즉 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마음은 하루에 12번도 더 바뀐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옷 안에 들어있는 자기의 육신이라는 말이죠. 즉 "내가 아픈가? 아프지 않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어디로 외출할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고 말이죠.
* 하나님의 개입과 악신 들림 !!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다윗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공격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사울은 세상 바깥은 없다고 여겼는데, 우선을 타고 우주로 가더라도 여전히 세상인데, 그런데 그 세상 바깥이 그만 등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 이라는 말이죠.
그와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방금 인간의 마음은 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 마음에 그만 악신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는데, 그만 그 마음이 악신의 보금자리가 되어있었음이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2번과 4번만 중요하다고 여겼던 이스라엘의 세계가 그만 "1번, 2번, 3번, 4번", 이것이 전부 다 현실세계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개입으로 현실의 범주가 넓어졌다는 것이죠. 교회에서 간증을 할 때 보면, 그게 무엇인고 하니, 2번과 4번밖에 몰랐던 것이, 그게 1번과 3번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는 겁니다.
*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에서 나았습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암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의사는 도저히 안 된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암에서 다 나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이 계시는 새로운 영역이 그 사람에게는 확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기가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병에서 나았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신이 들었다" 라고 판정을 내려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1번, 2번, 3번, 4번", 이것은 간증하는 그 사람에게는 생생한 현실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현실의 범위가 더욱 더 넓어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처음에 제가 강의를 하면서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반복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인간은 뭔가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두고, "오늘 시간을 무엇으로 때우지? 손자나 보러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악신에 들린 인간들 !!
그렇게 움직이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즉 손자에게 놀러가서 밥을 해줌으로 말미암아서 "손자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는 자기 욕망, 즉 다른 사람이 잘 된 것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자기 모방성에서 나온, 즉 "우리 손자는 더 잘되어라" 라고 하는 경쟁의식이 자기 움직임의 초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인데, 즉 인간은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자기 욕망에 부응하도록, 자기가 남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악신이 들린 것인데, 건드리지 말아야할 자를 건드린 것인데, 즉 하나님의 택한 자를 건드리면 악신이 들리게 된다는 겁니다.
* 모방, 경쟁, 그리고 폭력 !!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무튼 우여곡절을 겪고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울이 다윗을 공격할 때, 사울은 다윗이 어떻게 되기를 원했습니까?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 없어지길 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방, 경쟁,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것이 폭력이라는 말이죠.
물론 시기와 질투는 마음의 폭력이지만 그게 실제로 폭력이 되고, 그렇게 폭력이 되면 희생양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방을 통해서 삶의 활력소가 되는 새로운 욕망이 생산되고, 그러면 "내가 저렇게 되어야지, 당신이 저렇게 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경쟁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치킨집이나 카페를 하면, 다들 자기 가게를 이용해주어야지 다른 가게를 이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경쟁인데, 그렇게 해서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마음의 폭력이 실질적 폭력으로 이어지는데, 즉 경쟁자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해서, 서로 주먹이 오고 가고 한다는 것이죠.
* 희생양의 발생 !!
그러면 이 폭력으로 인해서 희생양이 발생하는데, 사울의 경우에는 그 희생양이 다윗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심으로서, 언약의 최종내용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의 후손이 이 땅에 와서 모든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희생양이 되는 것, 그게 복음의 내용이란 것이죠. 이 복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간들이 기여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을 죽이는데 기여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해서 기어이 희생양의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죄인도 구원할 수가 있는 희생양을 말이죠. 그래서 모든 죄인들을 총동원시키는 것을 허용하셨는데, 즉 악마의 활동을 허용하셨다는 겁니다.
다윗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이 죽기 전에 사울이 먼저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울은 왜 죽었습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의 경쟁자인 블레셋의 손에 사울이 죽었다는 겁니다. 블레셋은 그 땅을 자기 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땅을 놓고서 이스라엘과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경쟁을 하다가 사울이 그만 죽었으니, 통일이 된다는 겁니다.
* 사울을 따라하는 다윗 !!
그러자 길르앗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사울을 희생자로 간주해서, 정숙하게 사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말이죠. 이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자들인데, 우리나라로 말하면 강원도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었는데, 그러자 다윗은 사울 왕이 했던 그 일을 똑같이 따라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다윗이 언약을 가졌다" 라는 것이 맞습니까? "언약이 다윗을 가졌다" 라는 것이 맞습니까? 어느 것이 맞습니까? 언약이 다윗을 가진 것이 맞는데,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까, 자기가 왕이니까 언약을 자기가 가졌다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똑같은 응용문제를 하나 드리자면, "내가 성도가 되었다" 라는 것이 맞습니까? "성도로서 나는 다루어진다" 라는 것이 맞습니까? 어느 것이 맞습니까? 자기가 성도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그것을 자기가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 우리야 장군 !!
이것은 신약이라서 조금 어려운데, 그렇다면 구약에서 "다윗이 언약을 가졌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그 언약이 다윗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누구인고 하니, 그게 우리야 장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즉 다윗이 아닌, 우리야 장군이라는 말이죠.
암몬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는데, 잠시 이스라엘의 지도를 살펴보면, 갈릴리에서 사해는 약 100km정도가 되고, 그 크기는 사해가 갈릴라의 10배가 넘는다는 겁니다. 여기 요단강 동편이 길르앗인데, 그 밑에 암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지금의 요르단이라는 말이죠.
이 암몬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전쟁을 걸어왔고, 우리야 장군이 맞서서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우리야 장군이 전쟁을 하는 전쟁터에 있는데, 반면에 다윗은 여기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이죠. 사해의 꼭대기와 같은 위도, 즉 사해 바로 왼쪽에 예루살렘이 있다는 겁니다. 8km 아래에는 베들레헴이 있고 말이죠.
*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이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은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했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라고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야 장군을 언약궤를 지키는 언약전쟁에 참여를 시킴으로서, 그 우리야 장군의 그림자, 즉 우리야와 관계가 있는 자를 예루살렘에 남겨놓았는데, 바로 그의 아내인 밧세바라는 겁니다.
그 여인의 주인은 지금 암놈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다윗이 그만 그 여자가 목욕하던 모습을 보고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여인을 건드린 것은 지금 언약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야 장군을 건드린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욕구와 욕망으로 인해서 발생했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다윗이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왜 차지하려고 했습니까? 보기를 제시해 드리겠는데, "1번) 예뻤다, 2번) 못났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입니까? 이번에는 1번인데, 즉 개인적인 욕망이라는 겁니다. "예쁜 것은 내가 가지고 싶어. 남들이 갖는 것은 싫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쁘다는 것이 새로운 자기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쟁이 되는데, 즉 남들과 경쟁해서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죠. 그렇게 경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전쟁 중인 우리야 장군에게 강제로 휴가를 주어서 부인과 함께 지내도록 유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야 장군은 어떻습니까? 그 누구와도 경쟁할 마음이 없었다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골리앗과 전쟁을 할 때 소년 다윗이 누구와도 경쟁할 마음이 없었던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방할 마음도 없고, 시기와 질투를 할 마음도 없고, 경쟁할 마음도 없었다는 것이죠.
* 다윗언약과 우리야 장군 !!
그러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야 장군에게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만 있으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말이죠. 시시한 인간들과 경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의 실질적 성취자는 누구입니까? 다윗이 아니고 우리야 장군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성경에서 확인해보겠는데, 마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평범하기가 짝이 없는,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과 접촉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부정적 의미를 띄고, 즉 주의 일을 훼방하는 입장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라고 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장을 보겠는데, 5절에서 7절입니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이새는 다윗의 육적인 아버지인데, 그래서 6절에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솔로몬의 엄마는 다윗의 아내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말이 되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맺어서 솔로몬을 낳았는데, 그러면 솔로몬의 엄마는 다윗의 아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야는 이미 죽고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밧세바의 남편은 다윗말고는 없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야와는 사별을 하고, 현재의 남편은 다윗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다윗에게서' 라고 하든지, 그게 아니라면 '다윗의 아내에게서' 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왜 죽은 우리야가 들어가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솔로몬의 아버지의 자리에서, 그리고 밧세바의 남편의 자리에서도 그만 탈락이 되었다는 말이죠.
* 언약은, 우리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어 !!
바로 이게 언약인데, 그러니 언약이란 우리 자신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고, 그 빈자리에 우리를 탈락시킨 예수님의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우리를 그 예수님의 자녀로 삼아버린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이고, 옷 안에 있는 자기 육신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세상 바깥은 잘 모르겠고, 그리고 마음이고 양심이고 간에, 자기 육신 하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육신이 잘 되면 되는데, 즉 감각적으로 즐거우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맛집도 찾아다니고 한다는 것이죠.
이민을 가던 무엇을 하던 간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즉 눈이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에게 편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억지로 신앙을 짜내고 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살면 된다는 겁니다. 무더운 여름이면 휴가를 가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복음과 연결이 되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 보내기, 그것을 주님께서는 주의 일로 전환을 시킨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한 짓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너는 그런 짓을 해야만 했다" 라는 쪽으로 전환을 시킨다는 말이죠.
* 자아를 능가하는 그 무엇 !!
그렇게 하면 여기에서 욕망의 근원이,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아를 능가하는 그 무엇' 이라는 겁니다. 이 자아에서 욕망이 나오고, 이 욕망은 눈에 보이는 현실, 그리고 자기 육신, 이것말고는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자아를 능가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것이 자아를 공격해서 자리를 비우게 만들어 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 만들고, 거기에는 죄인과 희생양이 같이 자리를 잡게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언약이고, 이게 연결되어서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면 복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속에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것이죠. 그렇게 복음 속에서 움직이면,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두가 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우리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경쟁심, 그런 것으로 야기되는 우리의 죄성, 그런 것들이 전부 다 복음을 생산하는 재료가 되고, 거기에 우리가 편입이 된다는 말이죠.
* 나의 의를 주님은 용납하신 적이 없다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나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을 주님은 용납하신 적이 없다" 라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나' 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과 자기 육신이 전부라는 겁니다. 이 세상과 자기 몸이 '나'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이 만든 의는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런 의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래서 남들보다 더 착해지려고 하는, 그런 경쟁과 시기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죽여버리려고 한다는 말이죠.
* 1,000가지 반찬 : 750가지 반찬 !!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평소에 자기 남편을 위해서 열심히 음식도 만들어주고 하면서 잘 살았는데,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남편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TV를 보는데, 그 TV 속에 나오는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을 위해서 무려 1,000가지의 반찬을 만들어주더라는 것이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여자는 어떻게 됩니까? TV 속에 나오는 여자를 그만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등장으로 인해서 자기는 착한 여자의 자리에서 그만 탈락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자기는 남편을 위해서 750가지 반찬밖에 만들어주지 못했는데, 그러니 더욱 더 센 여자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 차라도 고장이 나버려라 !!
흔히들 자식이 많은 것을 두고 복이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말이죠. 아무튼 자식이 많아지면, 특히 아들이 많으면 당연히 며느리도 많아지는데,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시아버지가 80순 잔치라도 하게 되면, 며느리들이 와서 서로 봉투를 내민다는 말이죠.
만약에 며느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별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그런데 두 명 이상이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이것이 서로 비교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첫째 며느리는 온갖 아부를 다 하면서 50만원을 넣었고, 그런데 가까이 있는 둘째는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20만원을 넣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시아버지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만약 둘째 며느리가 그것을 알았다고 하면 그만 질투심이 생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차가 고장이라도 나버려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에 조카가 시험을 치는데, 그만 떨어져 버려라" 라고 하든지,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ㅋㅋ).
* 왜 나보다 착하지?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상대방에 대해서 "왜 나보다도 착하지? 왜 나보다도 복을 더 많이 받지?" 라고 하는, 이것은 그야말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당신이 나보다도 더 건강하고, 당신 집안은 왜 더욱 더 화목해? 그리고 남들에게 칭찬은 왜 그렇게 받아?" 라고 하면서 마구 마구 열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산 속에서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장날이 되면 시간을 때우려고 또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갖 소문을 다 듣고는 산 속에 가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런 분노가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이 희생양을 낳게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하나의 사건으로 응집이 !!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동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사건 하나로 응집이 된다는 말이죠. 세상은 이렇게 모든 것이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욕구대로 살아갈 뿐인데, 그런데 그게 십자가와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중들이 절에서 도를 닦는 것이, 그것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그 나름대로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이 있다는 겁니다. 동안거(冬安居)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50일을 한다면 자기는 60일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누가 더 빨리 해탈을 하는지, 그렇게 서로 경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자신의 욕망을 타인으로 말미암아서 키우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욕망에 대해서 자기가 가장 닮고 근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보다도 더 닮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너무나 미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원수를 사랑하라 !!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미움의 대상을 '원수'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원수가 되려고 하는 자가 아니고, 정말로 확실한 자기의 원수라고 한다면, 그 원수와 사랑이 과연 연결이 되느냐는 말이죠. 정말 연결이 됩니까?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자인 예수님을 보내셔서, 모든 자가 다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서 그 원수를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원수와 사랑이 매치가 되게 하시는데, 그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 화목제물 !!
그게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오는데, 즉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가 나에게 대들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의롭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증명을 하셨다는 것이죠. 우리와 같은 죄인을 끌어당겨서 말이죠. 이게 복음이고 이게 진리라는 겁니다. 자기 위주의 의, 거룩,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의, 주님의 거룩만 있을 뿐이고, 거기에 우리는 죄인으로 합류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하는데,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복음 앞에는 그 누구도 분노할 수가 없는데, 그런 자격자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분노하지 말고, 대신 감사하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조금 전에 이야기한 메카니즘을 다시 해보겠는데, 모방에서 경쟁으로 가는데, 여기에는 상대적 욕망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상대를 만남으로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자기에게 새로운 욕망으로 주어지는데, 그게 자기 인생의 목표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어떤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을 분해해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들이 먼저 가졌던 욕망의 달성을 뒤늦게 자기가 따라잡으려고 하는 욕망, 그것이 이제는 자기의 새로운 욕망이 된다는 겁니다.
* 나의 여생을 당신과 함께 보내겠소 !!
예를 들어서, 나이가 70이 넘은 노인네가 돈이 좀 있다고 해서 20살이나 작은 젊은(?)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 그러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느냐는 말이죠. "역시 돈이 최고야"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나에게는 당신뿐이었었어" 라고 한 것은 구라였다는 말이죠. 밧세바를 능가하는 미녀가 등장하니, "나의 여생을 당신과 함께 보내겠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 죽었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서, "네가 나에게 분명히 약속을 했잖아. 오직 나만 바라보겠다고 했잖아" 라고 하는데, 물론 꿈에 말이죠. 하지만 그런 약속은 전혀 의미가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만이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실눈이라도 뜨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ㅋㅋ).
* 복음은,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되풀이가 !!
그렇게 상대적 욕망인데, 그리고 이런 경쟁이 폭력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폭력에서 희생자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복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우리의 일상과 만나면서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인데, 그러니 복음을 먼저 알았다는 말이죠. 그 내용도 모르면서 믿어야 한다고 해서 복음을 믿었다는 겁니다. 신약은 그렇게 복음이 먼저 등장했는데, 하지만 구약은 그것이 아니고 다윗언약이 먼저 있고 복음이 따라간다는 말이죠. 그러나 신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니까, 생뚱맞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 '이루었다' 라는 취지를 도저히 알 길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실생활을 통해서 파급이 되면서, 복음의 전체적인 해석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 그것이 재현이 되고 되풀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의 원칙이 어떠한고 하니, 교회에 가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인 실생활을 통해서 복음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되풀이해서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성도에게는 그러하다는 겁니다.
* 주상절리해석 !!
저는 이것을 '주상절리해석' 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제가 만들어낸 신종용어인데 말이죠. 저기 제주도에 가면 이 주상절리가 있고, 그리고 경주시 양남면의 후동마을에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주상절리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화산의 마그마가 터져서 지표면에서 빠른 속도로 냉각이 되어버리면서, 그게 시커먼 현무암이란 말이죠.
이것이 주상이니 길다랗게 생긴 막대기라는 이야기인데, 보통 5각형나 6각형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주상절리의 전체가 길다란 육각형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부분 부분을 잘라서 봐도 역시나 육각형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잘라도 육각형이라는 것이죠.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 이 복음이 전체적으로도 복음인데,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예,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복음은 실제 생활에서도 주상절리의 잘린 작은 육각형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나 강의를 할 때,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 물론 성경에 나오는 복음도 이야기를 해야하겠지만,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복음도 같이 만나게 해주는 것이 좋다는 말이죠. 이것이 주상절리 해석방법인데, 그러니 성경해석은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삶 속에 조각 조각이 난 복음이, 하지만 그 복음 안에는 복음의 핵심이 모두 다 들어있어서, 그게 번복해서 나타난다는 말이죠. 회사를 다니던 가게를 운영하던 손자를 키우던 그 무엇을 하던 간에, 모든 방면에서 복음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복음이란?
그러면 이런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는 말이죠.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다.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벌을 내리시는데, 그래서 불바다로 만든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에서 빠져나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게 좀 어려운데, 언약은 인간 세계에서는 만들지 못하는데, 바깥 세상에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언약이 없다면 이 세상, 즉 눈에 보이는 현실에는 모든 인류를 묶는 원리가 있다는 것이죠.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리가 말이죠.
그게 사울의 경우에는 악신이 들린 것인데, 이게 언약이 작용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약이 개입하기 때문에 악신이 발동해서, 그 범주가 넓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서 악마가 이미 지배했기 때문에, 인간은 여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감옥이 되는데, 그러면 출애굽의 경우에, 그것은 탈옥입니까? 출소입니까? 탈옥은 형기를 채우기 않고 도망치는 것이고, 반면에 출소는 형기를 다 채우고 대문으로 나오는 것이란 말이죠.
* 출애굽은 출소 !!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은 출소인데, 왜냐하면 언약의 피로 죄가 없어졌으니 말이죠. 그야말로 만기제대를 한 것인데,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자기 죄에 대해서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죄의 값을 다 치러서 출소를 했기에 말이죠.
만약에 출소가 아니고 탈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고생으로 인해서 "더러운 이 세상을 그만 살아야 하겠다" 라고 하면서 자살을 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지요?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아가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시간을 때우는 것 자체가 절망적이기 때문에, 즉 타인의 욕망을 모두 따라잡지 못해서 자기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여겨서, 그래서 자살을 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절망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비록 힘들어도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죠.
* 다들 고생을 하지만 !!
아무튼 감옥에서의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모두가 고생을 한다는 말이죠. 돈이 없어도 고생이고, 돈을 벌어도 고생이고, 돈을 번다고 고생하고, 돈을 지킨다고 고생하고, 그렇게 고생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시간에 가끔 농담 삼아서 "다들 10억 정도는 다 있지요?" 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지킨다고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 세상에는 고생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신선한 욕망으로 끌어당겨서 자기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으로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 감옥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도는 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탈옥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죄 값을 모두 다 치렀기 때문에 탈옥이 아니라 출소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죄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죠.
*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
그러면 이것을 주상절리해석에 의해서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출애굽과 같은 큰 덩어리가 아닌, 작은 출애굽을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실습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일같이 "나는 죄 씻음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나이가 들면 두뇌의 지시와 근육의 움직임이 다른 경우가 생기는데, 그래서 설거지를 하면 그릇을 깨는 경우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져도 그만 밖으로 나가고 말이죠. 자기가 과거에는 잘 되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감각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그럴 때 "내가 이렇게 사니 뭐하노? 참 한심하다" 라고 할 것이 아니고, "나는 이미 그릇을 깨는 죄를 용서받았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어떤 노인네가 운전을 하다가 그만 두 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그런 죄도 모두 다 용서를 받았음을 일상을 통해서 다시금 주님의 다 이루심을 체험하는 시간들로, 그렇게 우리의 삶이 응집된다는 겁니다.
* 사소해 보이는 일들도 !!
그러니 복음은 지식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작은 조각들이, 즉 단면이 잘려진 작은 주상절리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신약인데, 구약은 십자가를 향해서 달려가지만, 신약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에서 흘러내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큰 복음이 작은 복음이 되어서 우리의 일상생활로 들어오는데, 복음의 조각이 되어서 각자 각자에게 침투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큰 전체 복음이든 작은 조각난 작은 복음이든 간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 안에서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암에 걸렸다가 다 나았습니다" 라고 하는 큰 간증거리가 아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라도, 그냥 버스를 타더라도, 그런 일들 가운데서 애굽에서 탈출해서 약속으로 땅으로 가고 있는, 이 구원의 성공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경험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성경해석이 된다는 말이죠.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성경해석이 삶 속에서 그렇게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만 감옥이 되고 마는데, 그렇다면 이 감옥에 떨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난 일인데, 즉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천국의 삶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주어진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의 이 육신, 이 육신이 바로 욕망의 화신인데, 즉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런 경쟁에서 오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더 나아가서 폭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폭력이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 더 이상 죄가 나오지 않는 '나'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으니 나쁜 짓을 하지 말자"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쁜 짓을 하지 말자" 라고 하는, 그렇게 더 이상 죄가 나오지 않는 '나' 라고 하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게 만든다는 것이죠. 새로운 우상이 또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육신이 있는 이상 새로운 죄가 개발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자기를 몰라도 너무나도 모른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욕망이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죠.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탐심의 근원지가 바로 너야. 너에게서 탐심이 나와" 라고 하면서 우리를 지목해주는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목은 지목대로 받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탈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목을 받은 만큼 기쁨이 더 넘친다는 말이죠.
* 신앙생활의 피로감 !!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우리의 육신은 신앙생활에 피로감을 느끼게 되어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이 피로감은 도대체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에게 쉴새없이 지시하고 명령을 해대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하는 것은 어디서 옵니까? 자기에게 있는 욕망을 따라잡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욕망은 어디서 옵니까? 타인의 것에 대한 모방인데, 그것이 탐욕이라는 겁니다. 타인에 대한 욕망, 즉 "저것은 내가 가져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 기도는 부끄러워요 !!
우리교회에서 여자 분들도 과거에는 대표기도를 했는데, 모두들 너무나 힘들어해서 이제는 그런 기도순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힘들어할까요? 물론 남자들도 힘이 들겠지만, 여자들이 더욱 더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도대체 왜 그럴까요?
자기는 예뻐지고 싶은데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그만 자기 본색이 모두 다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자기는 기도를 해도 예쁘게 하고 싶은데, 그런 고민 때문에 잠도 오지 않고 몸무게도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참혹한 광경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어서 없애버렸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기존교회에서는 여자들이 왜 기도를 잘 합니까? 그것은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남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들을 주워 모아서, 그래서 조금만 연습하면 기도가 잘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만 사기라는 것이 알아버렸으니, 그래서 그것을 다 버리고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기도를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기도순서는 돌아오고, 그야말로 입술이 바짝바짝 다 마른다는 겁니다. 거기에 인터넷으로 생중계까지 되고 하면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저 집사님은 믿음이 좋을 줄 알았는데, 기도를 하는 것을 보니 별 것이 없네" 라고 하는 평가를 받을까 싶어서, 이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나는 몰라 !!
그러면 우리교회의 남자들은 왜 기도를 합니까? 그것은 포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나는 몰라" 라는 식인데, 그래서 기도시간이 어떤 분은 15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게 안 되는데, 그야말로 '백설공주 1, 2, 3' 라는 말이죠. 인생 자체가 백설공주와 백설공주의 싸움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자기가 과거에 기도원 생활도 좀 하고, 그렇게 기도를 제법 했다고 하는 분들도 우리교회에 오면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더듬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제가 땀이 다 난다는 것이죠. "내가 너무 몹쓸 짓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ㅋㅋ).
* 이제 고만 !!
이런 것이 다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육신이 자기에게 지시를 한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욕 듣지 않기, 예뻐 보이기, 기죽지 않기, 내세울 것 계속해서 유지하기 등등, 그렇게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육적인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만 피로감이 생겨서 지치게 되는데, 그러면 "이제 고만!" 이라고 외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시만 쉬겠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라고 하는데, 어디 연기를 하고 조작을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힘이 들어서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침묵모드로 들어가는데, 식사시간에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하는 묵언수행인데, 자기 자신을 바깥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말이죠.
* 감사만 나온다고 하면 !!
그런데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놀랍게도 더 이상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의 지시와 자기가 자기에게 내리는 지시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만 알면 오늘 강의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가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하면 된다" 라는 겁니다. 감사만 나온다고 하면, 그것이 교회의 일이든 가정의 일이든 직장의 일이든 무슨 일이든 간에,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의 일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골칫거리 육신을 우리가 아직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복음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주신 육신인 줄 아오니, 이 속에서 피어나는 죄로 말미암아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같이 느끼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7,26 오후 4시에 마침.
마누라, 백숙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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