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2 - 주님의 녹화물
22,09,0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주께서 내 주에게 !!
오늘은 교재 6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중간에 보면 시편 110편 1절과 2절의 말씀이 나와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성경말씀이 다 어렵지만, 특히 시편 110편 1절과 2절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것이 어려운지를 뽑아보면,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 라는 것은 다윗이니 빼고, 그러면 "여호와께서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해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한 분인 줄 알고 있는데, 그런데 주님이 한 분이 아니고 두 분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렵다는 말이죠.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 인간 배제 !!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주님이 두 분이라면 우리가 두 분의 주님을 섬기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는 인간을 배제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서, 그렇게 두 분의 주님이 계신다면, 여기에서 인간은 그만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인간 배제'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인간을 믿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러한 취지로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 같은 일을 하나님께서는 주에게 다 맡겨버린다는 것이죠. 인간이 아닌 주에게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종교의 일을 담당하는 당사자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의 종교행위로 인해서 구원되는 경우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인간은 여기서 빠져달라는 겁니다.
* 종교란, '나도 할 수 있다' !!
그러면 불교의 경우에는 도를 누가 닦습니까? 물론 모델은 부처가 되겠지만, 도는 결국 자기가 닦는다는 말이죠. 즉 "부처, 당신이 도를 닦아서 열반에 이른 것처럼, 나도 도를 닦아서 열반에 이르겠다" 라는 것인데,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배제가 되지 않으면, 인간이 행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어떤 것이 전제가 되는고 하니까, "나도 행할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께서 내 주에게" 의하면, 이렇게 "나도 행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완전히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배제되는 것을 제가 나열해보겠는데, 그러면 여러분은 그동안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공부, 예배참석, 기도, 찬양, 전도, 선교, 헌금,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배제라는 것이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모이면 종교가 되는데, 그러니 종교가 배제된다는 겁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이런 것이 다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 성당, 이런 것들이 다 허구이고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그러하다는 것이죠.
* 말씀 스스로의 세계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는데, "나는 배제가 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있어야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고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논리를 펼치는데,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성경은 말씀 스스로의 세계라는 말이죠.
시편 103편에 보면,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그 영광은 꽃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러니 풀도 자라고 꽃도 피는데, 하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영원한 것은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움직이는데,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는 요소가 말씀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 울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진다" 라는 것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없는데, 그런데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강의시간에 "나무가 뽑혀 바다에 빠진다" 라는 것과 "내 죄가 사해진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믿음이냐고 질문을 던졌다는 말이죠.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은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인데, 그러면 큰 믿음, 본래 믿음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죄가, 자기가 행한 것도 없이 자기가 배제된 상태에서 죄가 사라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말씀완성의 세계이고, "주께서 내 주에게"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이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말이죠.
* 기이한 일 !!
그러니 첫 번째로 시편 110편에서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 이것을 주일 낮 시간에는 '기이하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마르다와 마리아 오빠가 병이 들어서 죽었는데,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죠.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기이한데, 살아날 자를 주님께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도 역시 기이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기이합니까? 기이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기이하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자꾸 '기이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도저히 믿지 못할 내용만 주께서 일으킨다는 겁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인간이 평소에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모든 믿음조차도, 그게 믿을 수 없는 일들만 발생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21절에 보면,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라고 한다는 말이죠.
(빌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그러니 인간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따로 구분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를 향한 일이 따로 있고, 또한 예수님을 향한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배제시킨 것인고 하니, 예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자기 일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생계를 꾸려나가는, 즉 자기가 스스로 살려고 하는 것이 자기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반대가 되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 된다는 것이죠. 그게 빌립보서 2장 30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빌 2: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여기에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얼마나 비장한 각오로 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각오를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에, 그때가 초대교회 시절인데, 그때 사람들이 '예수의 일' 이라고 하면, "나는 더 이상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 나의 현실과 주님의 현실 !!
그러니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고, 월요일부터는 열심히 일하자"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오락인데, 즉 교회놀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그런 교회놀이가 아니라는 말이죠.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자기가 중심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정치, 경제, 사회, 그렇게 각 분야의 일이 있는데, 그리고 교회 일도 있고, 그게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는 것인데, 그리고 주부라면 아이를 돌보고 하는 주부의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교회 일도 현실세계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하나가 되고 마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이것도 있지만 이것도 한다. 그래, 나는 제대로 일을 하지. 나는 완벽해"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이게 현실이 아니고 이게 가짜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엉터리라는 겁니다. 물론 욕을 들어도 정치를 하고, 또한 손자를 돌봐주고 하는 것도 좋은데, 그런 것은 바깥에 나가서 하라는 것이죠. 안에서 자기 정당화를 시키지 말고 말이죠.
바깥에 나간다는 것은 "나는 이미 살았다" 라는 것인데, 이미 영생이 있다는 겁니다. 이미 합격을 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선교와 전도를 왜 하느냐는 말이죠. 할 이유가 없는데, 이미 합격을 했으니 복을 받았는데, 그런데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가짜 현실인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면 되는데, 그런데 세상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니, "내가 이번 주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거야"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이미 합격을 한 자의 모습이 아니고, 합격을 하지 못한 자라는 겁니다.
* 이미 합격한 자로서 !!
그러한 사람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것이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죠. "노력하면 천국에 가겠지" 라고 하는데, 무슨 수험생도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합격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고, 이미 합격한 자라는 말이죠.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자꾸만 믿으니, 바깥에 나간다는 것을 어떻게 여깁니까?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주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 주의 일인데,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게 성경말씀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은 이렇게 해야합니다" 라는 차원이 아니고, "이것이 참으로 기이하다" 라는 겁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그런 상식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식 바깥에 내가 따로 생겨버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죽음? 웃기고 있네 !!
그래서 이것은 굉장히 신기한 것인데, 이것은 죽었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 정도가 되어야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번이라도 죽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으면 안 돼" 라고 하겠지만, 한 번 죽었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경우라면 어떻다는 겁니까?
여기 이 자리에 지금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있다고 치고, 그런데 그 나사로가 있는데, 목사가 "여러분, 죽는 것이 무섭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나사로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코웃음을 친다고 코가 줄줄 흐를 지경이라는 것이죠(ㅋㅋ). "당신이 지금 누구 앞에서 죽음을 말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사로의 경우에는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나사로가 이해하는 믿음이 무엇인고 하니, "그때 나는 이미 죽었고, 살아난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 앞에서 나는 배제되었다" 라는 말이 맞다는 것인데, 그렇게 배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언제는 나는 배제된 채로 !!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하는 것은 시편 110편에 분명히 나오는 말씀인데, 하지만 우리는 현실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사로의 경우에는 자기가 이미 죽어버렸으니, 그렇게 자기가 죽었다는 것은, "주님의 구원에 있어서, 구원을 받고자하는 나조차 배제가 되었다" 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나흘만에 살아났다는 것은, 자기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살려주심으로 살게 되는데,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주의 일에 배제가 된다" 라는 겁니다. 이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자기 안에서 주님이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는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더 쉽게 말씀을 해드리면, 예를 들어서, 이렇게 하나 양은냄비가 있는데 그런데 이게 그만 엎어져서 자꾸만 움직인다는 겁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양은냄비를 뒤집어보니, 그 안에 쥐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활동을 한다는 겁니다. 봉사도 하고 선교도 하고 기도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자기가 봉사하고 선교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양은냄비 안에 쥐가 있듯이 말이죠(ㅋㅋ).
* 성도는 기이한 존재 !!
주님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셨는데, 이게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도라는 겁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말이죠.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하게 하시는 것, 그게 성도라는 것이죠. 그러니 성도가 되었다면 자기를 기이하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자꾸 어디서 문자가 오는 소리가 나는데, 국민의 힘의 이준석이 보낸 겁니까? 가상세계의 정치권에서 보낼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모두 다 취미생활이라는 말이죠. 시간이 남아도니 심심해서 하는 것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정치나 경제, 그리고 교회생활, 이런 것들이 모두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아니고, 바깥에 나가서 기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움직일 때, 그것을 "나는 배제가 되었다" 라고 하고, 그것을 두고 "나는 이미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죽었으니 주님이 움직이게 하신다는 겁니다.
* 나는 죽었으니, 나는 움직인다 !!
이 정도면 성경에서 말하는 '나' 라는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이 되었지 싶은데, 그렇지요? 즉 "나는 죽었으니 나는 움직인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살아계시니 말이죠.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인데,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무엇을 내놓고도 "내가 했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의 경우에는, 손자에게 밥을 해줘도, 그것은 자기를 배제시킨 채로 주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나 죽으나 주의 일이 되고, 주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 대화가 불가능한 두 사람 !!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제가 분명히 정리를 해드렸는데,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죽었다는 조건 하에서 사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다 복음을 안다는 것이죠. 그러면 두 사람에게는 모두 예수님이 계시는데, 복음을 안다고 우기니 말이죠.
왜 우긴다고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자기는 상대방을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남까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왜 자기 자신을 모르는고 하니, 자기가 늘 달라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한결같으면 "나는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하겠는데, 인간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자기도 자기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까, 자기를 힘들게 하는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인간은 돌변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성질을 돋우는 일이 터지면, 분노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화를 폭발시켜놓고 감당을 못하는데, 그래서 "이것은 내가 알던 내가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데, 자기만 모르는 게 아니고 남도 모르고, 그러니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이제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그런데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둘 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다" 라고 둘 다 우기는데, 그런데 대화가 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서로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 일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과연 무엇을 지키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에 대해서 예의주시를 하면서 장벽을 앞에 설치하느냐는 말이죠. 과연 무엇을 침범을 당하면 안 되기에 타인에게 자기를 노출시키지 않느냐는 겁니다. 자기의 무엇을 지키지 싶으냐는 것이죠.
* 그 누구에게도 속아넘어가지 않는 '나' !!
그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속아넘어가지 않는 '나'를 지키고 싶어하는데, 그러니 바보라는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 '나', 그래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이것을 세 글자로서 '간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평생을 간보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차두리가 TV에 나와서 "간 때문이야" 라고 했는데, 물론 그 간이 그 간은 아닌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인간은 평생을 간을 보면서, 맛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버릇을 주님에게도 버리지 못하는데,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평생을 간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 자기 의, 하나님의 원수 !!
이것을 로마서 10장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역시 세 글자인데, '자기 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만 자기 의가 되고 말았는데, 예수님에게 착실하다고 하는 것이 자기 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시편 110편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원수'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다시 시작하면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는데, 주께서 주에게 일을 맡길 때 누구를 배제했는고 하니, 인간을 배제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을 배제했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잽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인데, 즉 낄 때와 빠질 때를 알라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빼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죽어서 천국에 갈 생각만 했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원수지간인데, 그것은 전혀 모르고 자기만 천국에 가면 된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고집을 부리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제하고 자기 아들에게, 그분이 바로 주님인데, 그 주님에게 일을 하라고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그게 시편 110편에 보면 원수를 이기도록 하는 것인데, 그렇게 일을 맡겼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원수를 정복하는 것으로,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인데, 즉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뱀의 후손을 이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하나님의 원수의 등장 !!
그것이 성경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이루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도 말씀대로 등장을 해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래야 시편 110편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라고 하는 말씀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언제 하나님의 원수가 언제 발각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게 '나' 라는 인간인가요? 아닌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는 말씀의 원수야" 라고 지적해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가 폭로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주의 일이고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배제된 상태이고,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일을 하시면 우리 쪽에서 "이것이 주의 원수다" 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을 누가 하시는고 하니, 주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억울해하면 안 되는데, 오히려 반겨야 한다는 것이죠.
*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고 !!
1991년에 걸프전이라고 불리던 1차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대량살상 무기로 인해서 계속해서 의심을 받아오던 이라크를 2003년에 미국과 연합군이 침범했다는 겁니다. 그때 이라크군 포로가 13만명이나 되었다는 말이죠. 그때 최전선에서 싸우던 이라크 군인들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고 하는데, 매복을 하고 있다가 스스로 손을 들고 나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급품이 다 끊겨서 굶어죽기 일보직전이었다는 말이죠. 돈이 있어야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하는데, 당시 이라크 국방부에서는 자기 나라의 군인들에게 군수품을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구원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데,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성경에 다 나오는 내용인데, 누가 뭐라도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원수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천부여, 손들고 나옵니다 ♬
그렇게 주님의 원수로서 발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두 손을 들고 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손을 든다는 것은 "나는 당신과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항복을 하고, 그 다음에는 희색이 만연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모습인데, 그동안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간을 보면서 놀았다는 겁니다.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외부에서 주님에 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자기 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러니 점령군이 곧 해방군이 된다는 말이죠. 점령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해방이라는 것은 죄와 죽음과 저주와 속박에서 풀려난다는 것인데, 그렇게 지배하고 해방시켜주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노닥거리는 짓은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옆의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주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는 전혀 무기가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빈손으로 나온다는 것인데, "천부여, 손들고 나옵니다 ♬" 라고 하는 찬송가 가사 그대로라는 것이죠. 즉 "나는 나를 지킬 의로움을 완전히 놓았습니다" 라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에게도 속아넘어가지 않아야 나답고 나는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자아를 놓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이제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것을 다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를 보고 아무리 바보라고 하고 병신이라도 해도 말이죠. 오히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더 기쁜데, "나만 아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라고 하는 느낌이라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이것을 정리하면, 그동안 자기는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말이죠. 시편 110편에서 첫 번째 기이한 것은 "주께서 주에게"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원수' 라는 말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원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동안 "나는 있다", 혹은 "나는 없다" 라는 것만 생각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내가 있다" 라는 것을 생존이라고 하고, "내가 없다" 라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동안에 이 두 가지만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살아있으면 성공이고, 살아있으면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회유하고 속인다고 해도,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지, 다른 사람이 지켜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동안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데 주님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바뀌는고 하니, "나는 죄인이다" 라는 정도가 아니고, "죄가 나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가 의인화가 된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죄가 인간의 형상을 띤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 증거용 인생 !!
왜냐하면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그냥 죄 덩어리라는 말이죠. 이것을 알게 되는데, 그러니 자기가 반드시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죄가 이렇게 만연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용이란 말이죠. 이 땅에는 죄밖에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을 말씀을 입각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즉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내가 곧 죄구나" 라는 겁니다.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데,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죠. 즉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좀 전에 이야기한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 미군들이 이라크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을 때는, 이라크라는 나라가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그것은 미군들과 전쟁을 하면서 알게 된다는 것이죠. 보급품도 제대로 없어서 배가 고파서 죽을 판인데, 전쟁은 무슨 전쟁이라는 겁니다. 싸울 힘도 없었다는 말이죠.
미국이 소말리아와도 전쟁을 했는데, 이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서쪽에 있다는 겁니다. 미국 해병대가 상륙을 하는데, 그때 TV로 생중계를 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면도 있지만, 소말리아 군인들에게 쳐들어간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인데, 그러자 그들이 다 도망가고 없었다는 겁니다.
미국은 전쟁을 할 때 이미 상대방 진영을 초토화를 시키고 들어가는데, 함포사격을 한다든지 폭격기를 동원해서 박살을 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막상 들어가면 싸울 일도 별로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TV 생중계를 사람들이 보면, 소총을 쏘고 하는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꼼짝마, 무장해제 !!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아까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자꾸만 대화가 막힌다고 하면, 그것은 둘 다 가짜이든지, 둘 중에서 하나는 가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무장해제가 되어야 하는데, 지킬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나는 지킨다"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자기 의인데, 그냥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개인적인 사생활을 모두 다 공개해야 합니까? 그것은 어제 낮 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 "남자가 다섯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섯 번째다" 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래서 참으로 기이하다는 말이죠. 왜 다른 남자 앞에서 자기 사생활을 다 이야기하게 되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까발림을 당하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내막을 다 아신다는 말이죠.
* 성도는 예수님의 '녹화물' !!
그래서 "주께서 내 주에게" 라는 것은, 이것만큼은 여러분이 놓치면 안 되는데, 그것이 세 글자인데, '녹화물' 이라는 겁니다. 이 녹화물이란 것이 무슨 뜻이죠? 왜 TV 프로를 녹화해서 나중에 다시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이미 다 마감이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이 그러한데, 우리는 주님의 녹화물이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몸부림 만부림을 쳐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이미 다 녹화를 떴다는 말이죠. 즉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연속극을 보다가 보면 놓치는 장면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보면 다시 보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녹화를 해놓으면 다시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도는 예수님의 녹화물인데, 그러니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왜 태어났는지, 그것을 당사자는 몰라도, 그런데 이미 시나리오를 만든 작가나 연출자에게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말이죠.
* 베드로도 녹화물 !!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야, 앞으로 너는 원하지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베드로는 녹화물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앞으로 베드로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이미 다 아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데, 즉 시작과 끝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리고 "우리가 무슨 로봇입니까?"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녹화된 필름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이렇게 녹화물이라고 하니, "그러면 거기서 주인공 역할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 녹화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 성도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님을 감사해야 !!
이것을 성령을 받은 사도는 한꺼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나 죽으니 나는 주의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이 자기 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녹화물이라는 겁니다. 자기 주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런 주님의 녹화물로서,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멘!)
그래서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도 주인공이 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이 모이게 하셨기에 말이죠. 즉 "너희들이 모인 것은 내가 지시를 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너희들은 그 지시를 따르든 말든, 그것이 분간도 하지 못하면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이고 보니 어떻다는 겁니까?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이런 모임이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주님의 녹화물로서 필름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느 시점에 태어났고, 그렇게 각자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에 같이 모였다는 말이죠.
* 이미 시작된 천국 !!
그렇게 해서 "주님이 하셨다" 라는 결론이 나오고,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현장화를 시킨다는 겁니다. 피조물인 우리를 통해서 현실에 드러나게 하신다는 말이죠. 바로 그 일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이미 시작된 천국'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치를 하고 경제가 어떻고. 그리고 손자에게 밥을 해주는 것들은 다 노닥거리는 것인데, 자기 위주로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노는 것도 주님의 녹화물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천사를 통해서 녹화를 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에 언젠가 죽게 될 때, 자녀들이 "우리에게 남길 유언은 없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주님의 녹화물이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게 사도바울의 고백인데, 이게 얼마나 기이하고도 괴이한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 인간의 믿음으로 이룰 수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과물이고, 오직 성령이 찾아오셔야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자꾸만 지키려고 하는데, 무엇을 지키려고 합니까? 남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 '나', 단도를 잘하는 '나',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람으로 삶는 '나', 즉 '나다운 나'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 '나다운 나'를 '주님다운 나'로 나로 바꾼다는 겁니다.
* 이게 어디서 꿈틀거려, '콱' !!
여기 시편 110편에 보면, '주님다운 나'는 무슨 일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원수를 등장시켜서 발등상이 되도록, 즉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꽉 눌러버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지금까지 왜 살아있는 겁니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숨을 쉬면서 살아있느냐는 말이죠.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님이 "이게 어디서 자기 의를 드러내?" 라고 하시면서 밟아버리는데, 그러니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즉 "나는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어" 라고 하는 고집, 그것을 폭로시키는 일을 주께서 하실 때, 그럴 때 가장 주님다운 주님이 된다는 겁니다.
* 또 다시 정리하면 !!
그러니 이 시편 110편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로는 "주께서 내 주에게" 라는 것인데, 이게 특이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 인간은 배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온 것은 '원수' 라는 것인데, 그 원수의 특징은 '자기 의' 라는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가 있는데, 그게 '오른손' 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게 제일 어려운데, 신약에서는 '예수 안' 이란 것이 어렵고 말이죠. 이게 장소개념으로서 울산강의에서 했는데, 구원이 왜 인간에서 장소로 바뀌는지, 그게 바로 '장소 만들기' 인데, 인간이 아니라 왜 장소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느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 인간을 상대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 이라는 장소에서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죠. 혹은 '성령 안', '십자가 안'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장소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이 '오른손' 이라는 것인데, 왼손이 아니고 왜 오른손이냐는 말이죠.
* 왜 오른손인가?
이것을 설명해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었다" 라는 게 아니고, 그 하나에서 둘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에서 둘이 되면서 내부순환도로가 형성된다는 말이죠. 이번 수련회에서 원주근처에 있는 소금산의 구름다리를 언급했는데, 그 구름다리의 특징은 밑으로 축 쳐져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다리는 수평인데, 그런데 구름다리는 늘어져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께서 내 주에게", 즉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아들까지, 그렇게 둘로 나누어졌을 때, 거기에서 내부순환도로가 생기는데, 그게 구름다리처럼 축 늘어서 어디를 적시는고 하니, 이 세상을 적신다는 겁니다. 죄악된 이 세상을 적시고 올라간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복종 !!
그게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데, 하늘의 영광을 받아야 마땅한 주님이지만, 자기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렇게 하심으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겁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이 현실을, 즉 세상의 끝을 모른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아담은 죄도 모른다" 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행동이 어떠한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죠. 선악체제로 구분하는 것은 다 엉터리인데,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 이 세상의 한계점,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까지 내려가심으로 말이죠.
*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음, 곧 십자가 !!
내부순환도로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음,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 십자가라는 것이죠. 그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오는데, 예수님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율법의 저주라는 연못 속에 누가 들어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이왕 갈라디아서 3장을 보았으니, 21절도 한번 보겠습니다.
(갈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여기에 보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살게 하는' 이라는 것을 유념해서 보면, 이것은 "율법이라는 것을 주게 되면 살아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게 몽땅 다 죽어있는데, "율법으로 살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오게 되면 단 한 명도 살아있지 않고 다 죽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죽어있다는 것을, 즉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곧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무엇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이었다고 하면, 하지만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성도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권한이 없어 !!
그러니 어느 인간도 자기가 의롭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끼리 장애물이 없이 통해야 하는데, 무엇을 지키고 말고 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죄인인 주제에, 아니 죄밖에 없는데 지키기는 무엇을 지킨다는 겁니까? 그런데 왜 굳이 나서서 커버를 하고 하느냐는 겁니다. 누구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죠.
갈라디아서 3장 21절에서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라고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22절에 보면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이것을 '봉쇄되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가 다 죄를 이길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교도소인데, 갇혀있다는 것이죠.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 그래서요?
예를 들어서, 혼자서 자식을 무려 4명이나 키운 어떤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라고 하면, 그 아주머니는 울먹이면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래도 아이들이 이 어미처럼 무식하면 안 되니 억척같이 해서 대학까지도 다 보내고, 이제는 결혼도 다 시켰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주머니에게 "그래서요?" 라고 할 수밖에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죄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그렇게 나오면 같은 인간들끼리는 감동을 받는데, "나도 고생을 제법 했다고 여겼는데, 저 아주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나님도 참으로 무심하시지, 왜 저렇게 착한 아주머니를 그렇게 고생을 시켰을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괜히 가만히 있는 하나님까지 건드려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 아주머니는 신이 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이제 죽더라도 전혀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그 아주머니는 "나는 자식들을 열심히 키우는 것만 알지, 그런 것까지는 몰라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자체가 바로 지옥의 모습인데, 자식들을 열심히 키운 것이 어느 새 자기 의가 되었고, 그게 주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제하신다는 것을 몰랐는데, 인간은 때려 죽여도 자기 의만 고수하는데, 그게 지옥에 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가 되려고 작심을 했다는 것이죠.
* 비어있는 오른손의 자리 !!
다시 내부순환도로를 해보면, 그런 내부순환구조가 하나님의 '없는 자리'를 만들고 말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는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중심이동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자리를 주의 자리로 이동을 시켜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십니까? 저주받은 이 세상을 거쳐서 이동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동하는 자리가 바로 '오른손의 자리' 라는 말이죠. 그래서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지는데, 그런데 이 새로이 만들어진 주의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중심은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섬기는 모든 신은 우상이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은 텅텅 비어있는 그 자리를 두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고 하면서 섬기고들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나는 신을 믿는다" 라는 것은 모두 다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보지 말고 이동경로를, 즉 주님께서 낮아지신 그 이동경로를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출렁거리는 구름다리인데, 그 출렁다리에 합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녹화물로서 말이죠. 이 오른손의 자리, 그 자리는 주의 이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이 세상에 없는 자리는 겁니다.
그게 과연 맞는지 출애굽기 15장을 살펴보겠는데, 미리 이야기를 했다시피 이 오른손의 자리가 매우 어렵다는 말이죠. 15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 15: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출 15: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주의 이름의 등장 !!
여기에 3절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라고 하는데, 여호와가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것도 참 어려운데, 이름란 것은 피조물에게 붙이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는 말이죠. 물론 예수님은 이름이 있어도 피조물이 아닌데, 이름은 세상 사람일 때 붙여준다는 겁니다. 호칭이 가능할 때 이름이 붙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에게는 호칭이 가능하지 않는데, 그런데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둘로 갈라지면서, 한 분은 이 지상에 내려오신 분이란 겁니다. 그분은 이름으로 오신 분인데, 그 이름이 무엇을 하는고 하니, 원수에게 시비를 걸어서 전쟁을 수행하신다는 말이죠. 즉 하늘의 전쟁을 땅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주의 오른손'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계시인데, 인간은 몰라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애굽군대를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해서 때린다는 말이죠.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뿐이라는 겁니다.
애굽이 이스라엘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할 자들을 건드렸다는 말이죠. 언약의 백성을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는데, 그것을 가려낸다는 것이죠. 양과 염소를 말이죠. 그래서 염소를 쳐버렸는데, 즉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중에서 나쁜 것을 쳤다는 겁니다.
* 양과 염소 !!
그러면 좋은 고기가 등장하면서 나쁜 고기를 치게 되는데, 그런데 나쁜 고기의 경우에, 그게 나쁘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은 십자가를 만나기 이전까지 자기가 왜 죄인인가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아이를 네 명이나 키웠는데, 그런데 제가 왜 죄인입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 즉 복음을 모르면 무조건 저주를 받을 자인데, 그런데 그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득이가 아니고 납득이인데, 납득이를 모르십니까? (ㅋㅋ) 그렇게 이 세상은 모르는데, 그런데 주님이 지나가신 그 흔적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본질이 다 드러나면서 진리가 진리 값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는 다 바로 병신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생명이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선악과를 관통해버리면 그 정체가 다 탄로가 났다는 겁니다. "아, 이게 다 오락이었구나.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던 것이 취미생활이었구나.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복을 따내려고 한 짓이었구나" 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말이죠.
자기가 녹화물인 줄도 모르고, "내 것은 내가 지키겠다" 라고 하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인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 빼내어서, 그것을 남들에게 자랑질을 해대면서,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우겨왔다는 겁니다.
*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오른손의 자리 !!
주의 이름 자체가 오른손인데, 그 오른손에 자기 정체를 드러냈는데, 그것이 시편 110편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서, 하나님은 하나가 아니고 둘로 갈라졌다고 한다는 말이죠. 오른손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로 하나님은 이동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시작하신 그 일의 열매에 하나님이 합류하는 것을 두고 '임마누엘' 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 나라에 아들의 나라를 만들고, 그 아들의 나라에 아버지가 가서 사신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백성들도 같이 살고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이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획인데, 그렇게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계획은 모두 다 거짓이고 엉터리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다 완벽하게 실행이 된다는 말이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면 없는 오른손의 자리가, 그렇게 십자가에 죽어서 인간들의 현실세계의 한계를 다 드러낸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마지막 지점인데, 그래서 그들은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죠. 죄 아래에 놓여있으니, 그렇게 갇혀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이게 이미 다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만이 홀로 빠져나와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이란 것은 예수님 구원이지, 인간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이 되지 않는데, 전혀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예수님이 오른손의 자리에서 성령을 주심으로서 !!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에게는 어떤 권한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택한 자들에게 성령을 주는 권한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주의 자리에 앉을 때 비로소 성사가 된다는 것이죠.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바로 그 주의 자리에 누가 앉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앉으셨는데, 십자가로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그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을 무엇을 하십니까? 자기가 택한 자에게만 성령을 주시는데, 그게 주의 자리, 즉 오른손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아버지가 택한 것처럼 나도 나의 사람을 내가 택해서 성령을 준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저렇게 성령세례를 받으신 분이 장차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주실 분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성령을 받은 당사자만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달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여러분,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앤트맨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파이더맨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은 받은 사람은 그 스파이더맨과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미줄이 끊어지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8장을 보겠는데, 33절에서 39절입니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끊을 수 없으리라 !!
여기 39절에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하는데, 거미줄을 끊을 수 없다는 겁니다. 33절과 34절에 보면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정죄하리요?"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끊을 수 없는 거미줄 때문이라는 말이죠.
사랑하시는 분은 주님인데, 그런데 사랑도 하지 못하는 놈들이 어디서 비난하고 까부느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고 마귀라는 말이죠. 주님이 용서했으면 다 끝났는데, 그런데 주님도 아니면서 건방지게 어디 목사랍시고 장로랍시고 함부로 나서서, 남들을 보고 지옥에 간다고 정죄를 하고 난리를 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주신 성령을 그 누구로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이 주신 그 선물, 즉 거미줄만 내놓으면 된다는 겁니다. "나에게 이게 도착했어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 애굽에서 나왔다, 바다에서 나왔다 !!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있는데, 어려운 것이 아직 하나가 남아있다는 말이죠. 출애굽기 자체를 모형틀, 혹은 구조틀, 그것을 영어로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구약의 출애굽기의 특징이 "애굽에서 나왔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바다에서 나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애굽이란 나라가 범위가 큽니까? 바다가 범위가 큽니까? 당연히 바다가 범위가 큰데, 그것은 바로 세상 모든 나라를 짐승이 올라온 바다로 간주해서, 그렇게 바다에서 유일하게 올라온 나라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두 군데를 살펴보겠는데, 먼저 18장 21절입니다.
(계 18: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 큰 성 바벨론 !!
여기에 보면 힘이 센 천사가 큰 맷돌을 어디에 던집니까? 바다에 던지는데, 그게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큰 성 바벨론이 아닌 다른 성이 있습니까? 없는데, 마지막 때는 큰 성 바벨론이라는 하나의 도성으로 다 뭉쳐진다는 것이죠. 이 세상은 하나의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무역을 해서 돈이 많은 큰 성 바벨론으로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여러 개의 돌들이 커다란 하나가 돌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힘센 천사가 그 큰 돌을 그만 바다에 던져서 빠트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즉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것이 큰 성 바벨론의 운명인데, 그것이 21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한 군데를 더 보겠는데, 20장 12절과 13절입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바다야, 굿바이 !!
이게 마지막 심판인데, 13절에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최후라는 것이죠. 그렇게 단일화가 된 짐승이 있던 자리, 그 자리를 바다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다로 보았을까요? 그것은 조금 전에 살펴본 그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을 어디서 나온 민족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까? 바다에서 나온 민족인데, 즉 "바다야 안녕!, 짐승은 굿바이!" 라고 했던, 그 유일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 성도는, 성령을 주셔서 만든 녹화물 !!
왜냐하면 그 민족 안에는 누가 있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고, 오른손의 자리에서 성령을 주셔서 만들어진 녹화물이 바로 오늘날의 성도라는 겁니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이 나는지,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될까요? 우상에서 나와서 주께로 가는, 그렇게 이미 합격된 자는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죄고 무엇이 자기 의인지, 그것을 충분히 간파하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라크 군인들이 쳐들어온 미군들에게 입가에 미소를 띄면서 항복을 하듯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굶어죽는다는 것이죠.
그런 경험을 우리는 매일같이 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지독한 '자기 의' 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자기 잘남을 지키려고 하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그것을 충분히 충분히 겪어야 한다는 말이죠.
* 부자 되세요 !!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라고 하는, 즉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자가 됨으로서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돈도 벌고, 자기 방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체험하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돈이 많은 것이 복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하다가보니 강의결론이 조금은 이상하게 되고 말았는데(ㅋㅋ), 아무튼 그게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의 녹화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악마가 정죄할 수 없는, 주님이 쏘신 성령의 거미줄로 인해서,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에 항상 감격하면서, 그 십자가 앞에서 양손을 들고 항복하는, 그런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9,23 오후 5시에 마침.
요즘 장사가 조금 잘 될 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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