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4 - 위장취업
22,10,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7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소제목이 '선지자로 통한 고발'로 되어있는데, 먼저 제가 그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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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하나님 편의 군사로 등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선지자란 자기 시대의 왕과 다윗에게 약속한 왕 사이의 괴리를 두고 왕 체제를 하나님께 고발당하는 사람이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여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독촉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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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군사들 !!
여기에 보면 "하나님 편의 군사로 등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라고 하는데, 이런 군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게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인데, 이것은 인력(人力), 즉 인간의 힘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구약이고, 그러면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까, 승리한 군사라는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에 비해서 구약은 완료가 아닌 미완료인데, 즉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해볼까?" 라고 하는, 그러한 희망을 가지는 군사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 모든 것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만족스럽지가 않다는 것인데,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신약은 이미 승리를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둘 차이에서 있어서 구약적인 인식을 가지고, 아까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이어서 설명을 해보자는 겁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보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 이것을 구약과 신약으로 각각 나누어서, 1번, 2번, 3번, 4번으로 해보자는 것이죠.
* 구약적 안목,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 !!
첫 번째로, 구약적인 안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자기들 유대나라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이게 구약적 안목인데, 즉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값을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적인 안목으로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생각했던 바라는 것이죠.
이것만 봐도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라고 하는, 즉 아담의 후손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종교성을 이스라엘이 대표적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우리들은 실제로 출애굽을 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그렇게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장을 한다고 하니 좀 이상합니까? 우리는 그게 실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오직 자기 민족만이 홍해의 놀라운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만 해도 믿음이 좋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다 그렇게 주장을 했고, 그래서 그 값을 해야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 돈과 시간을 교회로 모아라 !!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그 값을 한 곳에 모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은 것이 바로 '유대교' 라는 말이죠. 값을 하라는 것은 두 가지인데, 즉 돈과 시간이라는 겁니다. "돈으로 헌신하고 시간으로 봉사하라" 라는 것이죠. 이 두 가지를 모으게 되면, 성전, 혹은 유대교라는 단체의 결집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모든 헌신과 봉사를 어디로 모으는고 하니,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커지면 교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특별히 신천지를 욕할 수가 없는데, 기존의 구천지가 전부 다 신천지라는 겁니다(ㅋㅋ). 교회자체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아직까지는 신약에서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구약만 언급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아이디어에 있어서 방금 이야기한 1번, 2번, 3번, 4번, 그 절차 외에 다른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인데, 그것도 손을 들고서 말이죠. (녹취 구 - 오늘은 목사님이 좀 흥분하신 것 같네요. ㅋㅋ).
이 방법 외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다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생 까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어디에 쌓아두어야 합니까? 물론 목사가 말로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지만, 그 하늘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해서 이 악마의 세계를 하늘나라로 확장을 시킨다는 것인데, 이것 외에 달리 아이디어가 무슨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없는데, 여기서는 성경용어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불교 용어를 사용하든 이슬람 용어를 사용하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온 인류의 대표로서 이미 다 보여주었는데, 종교적인 시스템과 그 핵심적인 사항들을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인 시스템이 그만 누구를 죽이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는데, 이 땅에 오신 진짜 하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 인간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냐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첫 번째 아담의 요소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면, 구원의 본질적인 피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얼른 지나갔는데, "인간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냥 인간들이 생각한 추상적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을 매개로 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동반해서 들추어내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우리는 아담의 이름에 속하는데, 즉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는 세상은 아담의 세계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빨간 팬을 가지고 하나의 명제를 적어보겠는데, "우리 모두는 아담 시스템의 일부로서 작동이 된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담 시스템의 일부라는 말이죠. 우리가 시스템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어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는 중력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특수한 장치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거기에서는 중력이 대기권보다 2배, 3배로 증가하는데, 그것을 파일럿이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러한데, 아담인생에 대한 체험,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이죠.
* 이 세상은 죽음의 미장센 !!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선고를 받은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은 죽음의 미장센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미장센(Mise-en-Scene)은 프랑스어인데, 왜 연극이나 드라마와 같은 것을 찍을 때 보면 그 장면을 위해서 세트를 만들게 되는데, 그 세트의 환경을 두고서 미장센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발음이 비슷한 미장원이라고 해도 되는데(ㅋㅋ), 즉 의도적으로 꾸민다는 말이죠.
* 이 세상은 죽음의 세트장 !!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꾸민 세트장, 바로 그 현장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저는 충청도 쪽으로 여행을 가본 적은 거의 없는데, 물론 주례를 하기 위해서 서산에 간 적은 있지만 말이죠. 그래서 생각만 해본다는 겁니다. 서해바다 쪽을 가보고 싶어서 그래서 차를 몰고 길을 따라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다가보니 그만 통제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앞에는 바다가 있는데, 공사를 한다고 그만 가로막아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도저히 갈 수가 없는데,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양 사방이 완전히 가로막혀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어디를 가더라도 죽음이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서해바다는 간척사업이 활발해서 현대건설에서 통제를 하는 곳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놓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그 어디를 가도, 미국을 가던 캐나다를 가던 죽음이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생자체가 갇혀있는 형국이라는 겁니다. 대책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데, 또한 희망이란 것도 바깥을 나가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는데, 막상 나가보면 인간에게는 희망이란 것은 없다는 말이죠. 막혀있고 갇혀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죽음의 세트장인데, 하나님께서 죽음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시스템이고, 아담의 후손들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거기에 갇혀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갇혀있는 상태에서 우리 인간들은 1번, 2번, 3번을 끄집어내는데, 지금 3번까지 했지요? 4번까지인가요? 1번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2번은 구원을 받았으면 입을 닦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 보답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즉 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3번은 유대교이고, 4번은 유대교가 자체적으로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단체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항전을 했다는 말이죠. 그 단체가 종교단체가 될 수 있고,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민족이 될 수 있고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약에서는 군사가 이미 승리를 해서 완료가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신약에서의 1번, 2번, 3번, 4번은 잠시 보류하고, 이스라엘의 경우에 어떤 식으로 자기 집단을 유지했는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투쟁사 !!
이것을 '이스라엘의 투쟁사' 라고 할 수가 있는데, B.C 6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A.D 67년에는 점령을 당한 유대인들이 1차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로마가 이스라엘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성전 자체를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성전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그 어떤 놈들이 와도 이 성전만큼은 불타지 않는다고 확신을 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데, 그게 구약인데, 그 약속의 핵심이 시온산에 있는 성전이라는 말이죠.
시편에 시온산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은 자기들은 지키지 못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스가랴서에 보면 장차 메시야가 이 예루살렘에 온다고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동편인 감람산에 메시야가 두 다리를 딛고 선다는 말이죠.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러면 그 약속에 대해서, 아까 1번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고 하니, "성전은 하나님이 화끈하게 지켜주신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게 그들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 로마에 의해서 불타버린 성전 !!
그것을 로마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만 성전을 불태워버렸다는 말이죠. 그게 A.D 70년인데, 그래서 서쪽 벽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곡의 벽' 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유대인들은 그 벽에 가서 모자를 쓰고 고개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죠. 제가 직접 가서 보았다는 말이죠(ㅋㅋ).
여기에서 질문이 나가는데, 그렇게 그들이 믿던 믿음의 핵심이 그만 날아가 버렸는데, 그러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겠느냐는 겁니다. 성전은 불타버리고 서쪽 벽만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통곡의 벽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언젠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서쪽 벽을 기초로 해서 다 차지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성전이 불에 타버렸다고 해서 믿음이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닌데, 그것을 인간의 불멸성, 혹은 무한성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그런 내부적인 불멸성은, 인간 스스로 지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한, 절대, 최고를 향한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지워지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고 해서, 환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은 환상이 없으면 사는 즐거움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라고 하는 희망, 그것을 붙들기 위해서는 무한, 절대, 최고, 이런 것들을 스스로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지킬 수가 없으면, 그 마지막 선택으로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게 되고 말이죠.
* 디아스포라(Diaspora) !!
그런 와중에 유대인들이 A.D 132년에 2차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데, 로마에서는 그들의 성전을 불태웠으니 이제는 포기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다 쫓아내어 버렸는데, 남아있는 자들은 겨우 3퍼센트 정도였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흩어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 라고 하는데, 주로 서유럽과 스페인 쪽으로 갔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핍박을 많이 받았는데, 서유럽에서는 그들을 예수님을 죽인 원흉이라고 보았다는 것이죠. 스페인은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어서 조금 덜했고 말이죠.
특히 프랑스에서 너무 심하게 나오니까 동유럽으로 갔는데, 그래서 동유럽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유럽에 갔던 자들이, 1888년에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살해를 당하고 난 뒤에, 이 유대인들에게 그 누명을 씌워서 40년 동안 무려 15만명이 죽게 된다는 말이죠. 2차대전 때도 나치에게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르는데, 이것은 그 이전이라는 겁니다.
* 예루살렘으로 하나 둘 모이면서 !!
그렇게 핍박을 받자 이들이 팔레스타인, 즉 예루살렘이 있는 곳으로 하나 둘 모여들게 된다는 말이죠. 그때는 예루살렘을 오스만 제국이 다스릴 당시인데, 그때는 그 가나안 땅의 100퍼센트 팔레스타인의 땅이었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에서 기원된 것이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땅에 유대인들이 이주민들로서 섞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에 영국이 아랍 사람들에게 제안을 하게 되는데,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협조를 해주면 각자의 종족으로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1917년도에는 유대인들의 전 세계도처에 있는 풍부한 금융재산을 노려서, 이번 전쟁에 협조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니 일종의 이중계약을 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영국이 국가적으로 부동산 사기를 쳤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이중에 아니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 이전에 영국이 프랑스와 서로 나눠먹기로 했는데, 그러니 삼중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팔레스타인 땅을 누가 차지하는고 하니,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말이죠. 그들의 재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유대인들이 재산이 왜 많았는고 하니, '길드' 라고, 일종의 상공업 조합인데, 이것을 이용해서 이자놀이를 했다는 말이죠. 요즘 말로 하면 금융업인데, 그것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5월 4일, 그들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뒤에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깨어지는데, 그게 1차, 2차 중동전쟁인데, 물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고 말이죠. 그러면서 기존의 팔레스타인은 나라라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그 권리를 차지한다는 겁니다.
* 인간들의 구원은 곧 '땅' !!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땅' 이라는 말이죠. 조금 더 풀어쓰면 "땅+소유" 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욕망인데, 자기가 점유해야할 토지 하나, 즉 "내 것으로 소유된 토지 하나를 건지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인간들이 하는 성격해석의 기본욕구이었음이 밝혀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헌금을 끌어 모으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디아스포라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내 교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또한 교회건물도 고딕건축 양식으로 짓고 말이죠. 아무튼 그런 자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이 목사의 욕망입니까? 교인들의 욕망입니까? 교인들의 욕망인데, 세속적으로는 자기 집이 있고, 영적으로 자기 교회가 있으면, 그러면 양쪽으로 모두 가진 것이 된다는 말이죠. 즉 "이 땅에서는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고" 라는 것인데,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다 밝혀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죠.
* 그러면 신약에서의 군사는?
지금까지는 군사에 대한 구약적인 해석을 했는데, 그러면 신약에서의 군사는 무엇입니까? 이미 승리한 군사라는 겁니다. 신약에서의 1번은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첫째 아담에 속한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미 생명나무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 구원은 없다 !!
그러면 아담에서 속해서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은 사람은, 전에는 첫 번째 아담에 속했다가 이제는 두 번째 아담에게 속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영토가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구원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주의 이름의 구원을 다시 출애굽에 적용시켜서 해석을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홍해를 누가 건너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왔습니까? 주의 이름이 건너왔습니까? 주의 이름인데, 그게 곧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그들의 고백이라는 겁니다. 즉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그 주의 이름이 우리를 함께 건너오게 해주셨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라는 겁니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인데, 제일 먼저 요단강에 발을 담근 것이 인간입니까? 어떤 사물입니까? 제사장이 아니고, 그 제사장이 무엇인가 받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언약궤인데,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는 곳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요단강 물이 멈추었는데, 그러면 이미 전쟁은 끝났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머지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맨 땅에 발을 디디면 되는데, 이것은 이전 홍해에서의 상황이 보다 더 구체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진전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언약을 안다는 것은 맨 땅에 들어서는 용기를 의미하는데, 그런데 그 맨 땅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열린 땅이고, 반면에 인간들이 보기에는 죽음의 땅이라는 겁니다.
* 주의 이름에 소속이 되어야 !!
다시 말해서, "죽어야 산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시스템에 일부로 편성되고 작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고등학교 건물을 구경한다고 해서 고등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고, 2학년 1반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 편성에 합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거기에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면 안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그리고 기도의 목적도 자기의 목적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 다시, 나의 구원은 없다 !!
아까 질문한 것이 답변이 되었습니까? 그러니 소속이고 시스템인데, 주의 시스템의 일부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머리는 주님이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는 말이죠. 우리가 몸의 일부로서 편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구약적인 안목에서 1번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구원을 받은 당사자가 누구인고 하니,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박옥수의 구원파인데, 그런데 사실상 구원파가 아닌 교회는 없다는 겁니다. 장로교든 침례교든 감리교든 전부가 구원파인데, 물론 신천지도 그러하고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의 자기 구원은 애당초 악마의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에 속해있기 때문인데, 아담이 구원을 받아버리면 새로운 아담을 준비한 하나님의 취지가 모독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생명나무에서 내쫓아라" 라고 하는 원칙도 주님 스스로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
이렇게 "구원이 없다" 라는 것은 "자아가 없다" 라는 것인데, 물론 애초부터 없는 것이 아니고 있었다는 말이죠. 야고보서 4장 14절에 안개가 나오는데, 그 특징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그런데 잠깐 있다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말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기 야고보서 4장 14절에서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 그것을 안개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안개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인데, 즉 처음에는 있었지만 결국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을 합치게 되면 "나는, 자아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내년에 1월에 입대하는 사람은, "나는 있으니 군대에 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래서 무엇을 할 건데?"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물으면, 그러면 결국은 "나는 없다" 라는 겁니다. 분명히 군에 갔다온 적은 있는데, 113살을 살고 죽었다는 말이죠. 너무 많이 잡았습니까? 할아버지는 있었지만 없고, 아버지도 있었지만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싸우더니만 없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은 주님의 세계다 !!
이제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구원이 없고 자아가 없으니, 그래서 나온 결론이 "모든 것은 주님의 세계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11장 36절에 나오는데, 즉 "모든 것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렇게 이미 주님 안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나의 전쟁'은 없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인데, 그것을 주님이 허락한 적도 없고, 그것을 전쟁이라고 하신 적도 없다는 겁니다.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의 친척집에서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하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잔치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지면 매우 곤란해지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그래서?"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릴 때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에게 야단을 쳤는데, "내가 3일 동안이나 찾아다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되바라지게(?) 대답을 했는데,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하는 줄을 몰랐습니까?" 라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말을 과연 알아들었을까요?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에게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인데, 이 땅의 아버지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아담에 속한 시스템과 하늘에게 속한 시스템이 이렇게 다른데, 대화자체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주장한다면 성경해석은 전혀 막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 왜 4번이 필요한가?
그러면 1번, 2번, 3번으로 다 되었는데 4번이 왜 필요할까요? 1번, 2번, 3번은 인간이 흉내낼 수 있고 따라올 수 있다는 겁니다. "내 구원은 없다. 자아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3번인 "모든 것은 주님의 세계다" 라고, 그게 개혁주의의 주권사상인데, 이것을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들이 다 따라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십자가만, 복음만 전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4번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흉내를 내던 것들이 그만 모두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죠. "'내 구원은 없다. 자아는 없다. 모든 것은 주님의 세계다' 라고 하는 것이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것인데, 즉 감사와 고마움이라는 겁니다.
*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만약 이것이 없다고 하면, 그래서 "내 구원은 없다. 자아는 없다. 모든 것은 주님의 세계다" 라는 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고, 이것을 지식으로 붙잡으려고 한다면, 그게 바로 인간의 오기인데, 그래서 여기서 들키고 만다는 것이죠. 가짜 십자가, 가짜 복음이었음이 말이죠.
그게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에 나오는데,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라는 것도 마귀가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것도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게 과연 기쁜가?" 라는 것인데,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감사하냐는 말이죠. "내가 이것을 써먹어야지"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과연 이게 고맙고 감사할 일이냐는 것이죠. 물론 목사가 윽박지르면 교인들은 "고맙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성령이 없는 자는 왠지 이게 불편하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분명히 "나는 없다" 라고 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있다는 말이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해서, 나의 건강과 나의 재물을 다 빼앗아가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평생 공들인 나의 인생을 어디서 보상을 받지?" 라고 말이죠. 연이어서 쓰레기와 같은 걱정근심이 마구 따라온다는 겁니다. 얼추 따라붙었는데, 4번에서 그만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는, 그게 곧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이, 이미 승리한 군사로서 4번에 도달하는, 즉 이미 승리한 주님의 기쁨에 합류하는, 즉 두 번째 아담의 시스템의 일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따라붙어도, 아무리 자기가 노력을 해도, 아무리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도, 주님은 결국 차단시키고 만다는 것이죠.
* 이 세상은 죽음을 연출하기 위한 미장센 !!
이 세상은 죽음을 연출하기 위한 미장센인데, 즉 죽음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4번에 해당되는 사람은 "야, 신난다" 라고 나오는데, "죽여라, 다 죽여라. 나는 이미 죽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래도 성도는 계속해서 밥이라도 먹여주어야지. 왠지 오늘은 마음이 불편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4번에 걸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여기 교재에 보면 나오는데, 여기에 약간만 더 보탠다고 하면, 이미 하늘나라의 천상회의에 참석한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군사라는 말이죠. 선지자는 기존의 왕 체제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다는 겁니다.
* 선지자에게는 그 어떤 힘도 없어 !!
여기 교재에 보면 "이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힘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약에서도 이미 신약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지상에서는 구약, 하늘에서는 신약,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구약적인 시스템에서는, 4번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모으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힘을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하나의 종교단체를 만든다는 겁니다. 즉 흩어지면 안 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그렇게 노력을 다 했다는 말이죠.
그들이 '6일 전쟁'을 할 때, 처음에는 안식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적들이 좋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공격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전략을 바꾸는데, "명분이 좋으면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가 된다" 라고, 그래서 안식일에 더 열심히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 땅은 힘의 세계 !!
자기 원칙을 스스로 깰 수밖에 없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내었는데, 그러면 그 논리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땅은 힘의 세계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을 모으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자" 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교회의 원리가 신천지의 원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이만희 보혜사가 가르쳐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기존 교회가 아닌 신천지 제단에 바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통일교, 대순진리회 등등,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겁니다. 천주교와 여호와증인도 그러한데, 종교단체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천주교에서는 십일조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죽을 때 부동산을 내놓으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마리아가 대리기도를 해서, 믿지 않는 가족들을 연옥에서 천국으로 뽑아서 내어준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주교가 곳곳에 병원을 짓고, 그렇게 덩치를 키웠다는 겁니다. 그들은 푼돈이 아니고 부동산을 노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땅에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명분의 기초는 돈인데, 즉 돈의 힘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더 노골화가 되었고 말이죠. 돈이 명분을 살려주는데,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돈의 힘은 어디까지나 미흡함인데, 아직 완료가 되지 못한 상태라는 말이죠. 그러나 천상회의는 묵시적인데, 즉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이미 확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확정된 신분인데, 어제 감독을 직분이라고 했는데, 무시간이고 이미 확정적이라는 말이죠.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각만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 이미 확정된 신분 !!
어제 낮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은 궂은 날씨가 된다면, 즉 계속해서 비가 온다든지 해서 색깔에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무엇이 강렬하게 깃드는고 하니, 자기 생각이 거기에 뛰어들게 되면, 시간의 흐름이 그만 중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에 창 밖을 내다보면, 갑자기 옛 생각에 잠기게 된다는 겁니다. 헤어진 첫 사랑이 떠오른다는 말이죠(ㅋㅋ). 저만 그런가요? 우리 인간은 동일한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에 생각이 반응해서 잊어버린 과거가 생각나게 된다는 것이죠.
* 지상에서 떼어놓는 힘 !!
아무튼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면 확정적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새 언약의 그때 그 시간이 역으로 흘러서 구약에까지 확장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선지자는 자기를 지키는 힘이 필요치 않게 된다는 겁니다. 신약이 아닌 구약에서도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상을 유지하는 힘이 아니고, 지상에서 떼어놓는 힘이라는 겁니다. 자아를 편하게 지켜주는 힘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를 자기에게서 떼어놓는 힘이라는 말이죠. 자아를 자기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왜냐하면 자아도 자기고 자기도 자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시스템에 놓여있는 나를, 주님의 시스템 안에 있는 나와 떼어놓는 힘",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힘이고 능력이란 겁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즉 그런 능력 안에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이죠.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은 주님의 지시에 달려있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자유' 라고 하는데, 즉 "나로부터의 벗어남", 그것이 자유라는 말이죠. "더 이상 자기 욕망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더 이상 자기 꾐에 휘둘리지 않기, 더 이상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미에 놀아나지 않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나와 이별하기 !!
그러니 "나와 이별하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패티김의 '이별' 이라는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녹취 구 - 방금 패티김의 이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습니다. 이제는 정말 나이를 먹어가나 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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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1973, 패티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수는 없을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꺼야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 졌건만
바다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수는 없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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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헤어진 자기는 어쩌다가 생각이 날 수 있지만, 지금은 주님에게 속한 '나' 라는 겁니다. 1번, 2번, 3번인데, 이미 승리한 '나' 인데,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께서는 지옥에 갈 자와 천국에 갈 자를 분리시키는데, 십자가에서 나온 힘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나는 죽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리고는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런 안개와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서 참고내용이 하나 들어가는데, "나는 왜 나를 아쉬워하는가? 나는 왜 나를 지키고 싶어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남이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알면 이 세상의 철학을 다 아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나는 왜 그렇게 나를 지키고 싶어하는가? 내 안에 왜 그런 마음이 드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주위에 관련이 된 사람들, 즉 아버지, 아들, 남편, 아내, 동료 등등, 그들이 자기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났는데, "얼굴이 왜 그렇게 변했노? 몰라보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삭았다는 겁니다(ㅋㅋ).
* 일주일동안 잠을 자지 못해 !!
거기에 대해서 대범하게 "니가 먼데 내 인생에 대해서 이렇쿵 저렇쿵 간섭하노?" 라고 했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일주일동안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터넷으로 잘 땡기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곤 한다는 겁니다(ㅋㅋ). 자기가 그동안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완전히 들킨 기분이라는 말이죠.
동창생, 즉 남이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자기는 일주일동안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 안에 자기의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식으로, 그동안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고 살아왔지만, 정작 자기 인생은 없었고, 남들이 요청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동창회에 나갈 때는 꾸미고 한다는 겁니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었다고 하면서 명함도 나누어주고 말이죠. 그러다가 떨어지면 감감무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남들이 요구하는 바가 자기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교인들이 요구하는 바가 목사 안에 들어있고, 그리고 목사가 요구하는 바가 교인들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 서로가 서로에게 얽힌 타래, 풀 수가 없어 !!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얽힌 타래와도 같은데, 우리 인간은 그것을 도저히 자기 능력으로 풀어낼 재주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남의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뽑아내게 되면 모든 타인을 부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한 놈은 얼마든지 부정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잘 해주신 분들에게는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어머니인데, 위대하신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껴주신 아버지,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자기의 성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소주를 한 병 들고 가서, "이 자식놈의 합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다니" 라고 하면서 펑펑 운다는 겁니다. 이게 다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죠.
* 아버지, 불효자는 웁니다 !!
그러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왜 아버지에게 달려갑니까? 그동안 자기 이름으로 산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서, 그 아버지에게 맞는, 그렇게 아버지의 칭찬에 맞추어서 그동안의 자기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게 30이 되던 40이 되던 말이죠.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시장에서 반티장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머니인가요? 반티장사가 무엇인지 알지요? 이게 경상도 사투리인지는 모르겠는데, 간이로 만든 운반용 선반이라고 할까요? (ㅋㅋ) "너거 아버지 세상을 버리고, 너거들을 먹여 살린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한 집당 백만원씩 매달 부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러한데, 이런 굳건한 힘의 관계, 이것이 나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베여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교회에 와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런 인간관계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서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는데 있어서, "주님께 봉사하고 헌금할 테니, 이 인간관계를 주님이 후원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금요철야기도인데, 그러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위한 하나님인데, 당연히 가짜라는 것이죠.
선지자는 그 어떤 힘도 없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지자가 자기 힘으로 자기를 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또 기쁜 소식인데, 말씀이 "선지자처럼 살아라" 라고 했을 때, 그게 율법화가 되어서 짐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선지자 자신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7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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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들과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진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는 정상적인 의식주조차 해결을 받지 못했다. 까마귀가 와서 먹을 것을 던져줄 정도였다. 이렇게 비참한 생활 속에서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좌인 불 보좌와 늘 함께 했던 자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인 가뭄이 3년 6개월 동안 계속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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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5)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까마귀가 배달을 해주었는데, 그러니 가지와 봐야 얼마나 가지고 왔겠느냐는 겁니다. 겨우 배고픔을 면할 정도였다는 말이죠. 배달통을 입고 물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산 엘리야였지만, 그러나 그는 죽을 때 하나님의 불 보좌를 탔다는 말이죠.
* 위장취업 !!
이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인데, 하나님이면서도 하늘의 영광을 마다하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자성어로 하면 '위장취업' 이라고 할 수 있는데(ㅋㅋ), 오늘 강의제목인데 말이죠. 모든 성도는 모두가 다 위장취업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옥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주님, 돈이 좀 필요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상을 쓰면 4번이 아니기에 가짜고, "우리 아버지가 간암 말기인데, 간절히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좀 낫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웃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 나는 웃고, 너는 울고 !!
그러면 왜 웃으면서 그런 기도를 해야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모든 욕구와 욕망, 자기 믿음, 자기 종교,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떨어져 나가야하는 쓰레기라는 직접 자기가 체험하는 기쁨, 그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왜 필요한고 하니, 그래야 타인에게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전도인데, 그들과 똑같이 하면서 웃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웃고 있는데, 그들은 울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차이, 그게 바로 전도라는 것이죠. 똑같은 상황인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다윗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다 끌어 모아서 !!
지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다윗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기도를 하는데, 태어난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예 뱃속에서 죽이든지 하지 않고, 분명히 살아서 나오게 해놓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다윗의 자존심을 모두 다 끌어 모아서, 기도라는 것으로 구체화시킨다는 말이죠. 그 아이가 살아야 다윗의 자존심이 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한 짓이 있는데, 그러니 자기가 죽어야지 아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존심, 책임감이 되는데, 그래서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그 아이를 살리게 되면, "나는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다" 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을 하셨는데, 그래서 아이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을 죽인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기도의 응답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식이 죽을 때 다윗은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1번, 아니 2번인 자아가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성취를 시켰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다윗아, 앞으로 너는 없다. 다만 새로운 시스템 속의 두 번째 아담만 있을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왕 자리이고 직분이라는 말이죠. 또한 그것이 감독의 직분이고, 그것이 오늘날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 직분이 성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죠.
다시 엘리야로 돌아아와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불 보좌와 함께 했는데, 하지만 정작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짜장면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사람도 아닌 까마귀와 음식을 나눠먹어야만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것이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7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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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인 가뭄이 3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이 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다. … 하지만 그 당시 민중들과 백성들은 도리어 선지자의 잘못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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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 !!
여기에 "가뭄이 3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이 엘리야를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전쟁을 하시면서 엘리야를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에게도 돌아간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에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엘리야에게 대들었던 이스라엘은 망하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엘리야 편이니 말이죠.
그러니 엘리야가 기대할 것은 전혀 없는데, 즉 그에게 돌아올 욕망은 없다는 겁니다. 엘리야는 희생물이고 승리는 하나님이 가져가신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하면 곤란한데, 오히려 여기에 대해서 감사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가져가고, 나는 떨어지는 떡고물도 없네" 라고 하면, 그것은 아직도 육이 죽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그런 상황을 발생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본색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1번, 2번, 3번, 4번을 거쳐도, 구약적인 1번, 2번, 3번, 4번을 우리 육신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시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담이 시스템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주어야, 비로소 새로운 시스템인 예수님의 시스템이 그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 아니, 백숙 맛이 왜 이래?
그러니 혼자 도를 닦고 "나는 끝났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육신 속에 아담의 습성이 배겨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꺼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복음을 들을 때는 기쁜데, 강의가 끝나고 나서 백숙을 먹을 때 "맛이 왜 이래?"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말이죠(ㅋㅋ). 아니 그게 당연한 것인가요? 아담의 요소가 또 다시 나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교재에 보면 "하지만 그 당시 민중들과 백성들은 도리어 선지자의 잘못으로 돌린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백성들이란 겁니다. 여기에 민중이 나오는데, 제가 책에 이 '민중'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목사직에서 잘렸다는 말이죠(ㅋㅋ). 좌파라고 해서, 물론 이 책은 아닌데 말이죠.
* 여호와가 세운 이스라엘을 믿자 !!
그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모함해서 죽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적이 있어주어야 자기의 정치적 구조가 정당화되기 때문인데, 그런 희생물로서 유대인들을 그렇게 핍박을 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그런 짓을 하는데, 팔레스타인을 압박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래야 지금의 이스라엘이 정당화된다는 말이죠.
현재 이스라엘에는 무신론자가 60퍼센트가 넘는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서 무신론자가 가장 많다는 겁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세운 이스라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동성애를 가장 정당화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그러니 완전히 개판이라는 겁니다.
*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Sapiens)' !!
'유발 하라리' 라는 이스라엘의 대학교수가 쓴 유명한 책이 있는데, '사피엔스(Sapiens)'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사상을 보면 얼마나 더럽고 추잡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책의 대학의 교재로도 사용이 되고 있는데, 물론 세상 자체가 그러하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죠.
이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교재가 가장 잘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사각형 박스를 만들어서 그 안에 성경말씀을 집어넣은 점이라는 겁니다. 물론 내용은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죠(ㅋㅋ). 여기에 보면 열왕기상 18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 너는 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느냐?
이 말씀이 오늘 강의한 것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엘리야야, 너는 왜 4번을 괴롭게 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 4번이 구약의 4번인데, 즉 집단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죠. 힘을 끌어 모아도 모자랄 판인데, 그런데 왜 괴롭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부목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당회장 목사가 종용히 부르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교회를 괴롭게 하느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똑같다는 것이죠.
그리고 혹시나 복음을 전하는 권사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권사를 당회장실에 불러서 "4대째 순교자의 피로 세운 이 교회를 왜 괴롭게 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권사님은 그런 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지요? 그러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ㅋㅋ).
그 다음의 박스칸에 보면 예레미야서 44장 15절에서 19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간상 생략을 하겠는데, 그게 교재 74페이지에 보면 요약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렘 44:15)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렘 44: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렘 44: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렘 44: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렘 44:19)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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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우상을 섬기니까 모든 만사가 풀렸지만, 그것을 철폐하고 난 뒤에 살기가 더 힘들게 되었다고 예레미야에 대들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일반 백성들의 정신상태는 참으로 비언약적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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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이 선지자를 핍박한 근거는?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천상회의에 참석한 진짜 선지자인 예레미야에게 이 지상에서 어떤 경험을 하도록 하십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정도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게 어떤 경험이냐는 말이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서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대든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대들 때, 그 방식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냥 선지자를 박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선지자를 핍박한 근거가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 그러니 물어내라 !!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사방이 바다로 막혔다는 겁니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다 막혀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예레미야 시대에는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인간이 그 무엇을 해도 우상, 신, 종교에 막혀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그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밝혀졌는데, 그가 복음을 전하니 그들이 뭐라고 하면서 예레미야에게 대들었습니까? "내가 옛날에 신을 섬길 때는 만사가 형통했는데, 그런데 당신의 말을 듣고 신을 바꾸니 만사가 다 쪼개지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그래서 "그러니 물어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래서 복음을 안다고 하면, 그것이 복음을 아는 목사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자는 감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는 가정과 직장에서 이런 체험들을 해봐야 한다는 말이죠.
* 가짜 신의 등장 !!
그러니까 "그들이 나를 핍박했다" 라는 것에 머물지 말고, 그들이 핍박할 때 도대체 무슨 정신상태로 핍박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게 그동안 그렇게 몰랐던 가짜 신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면서 그런 가짜 신을 믿었습니까? 그러한 신을 믿음으로서, 자기 욕망이 만족스럽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핍박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죽어서는 불 수레를 태워드릴 수 있는데, 아직은 아닌가요? (ㅋㅋ)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자기가 근사해지기 위해서 믿었다고 하면, 그것은 지금도 주님을 핍박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핍박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 책이 그런 내용들로 가득한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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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 왕이 올바르게 살면 온 백성들이 복을 받지만 만약 왕이 범죄 하면 온 백성에게 재앙이 미친다는 약속이다. 예를 들면, 다윗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이스라엘에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대상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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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다윗은 인구조사를 왜 했는가?
여기에 "다윗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이스라엘에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라는 부분을 빼고, 그것이 성경에 나오지만 우리는 모른다고 치고, 그러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왜 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나라는 내 것이다" 라는 것인데, 이 이스라엘이 이렇게 커지고 부강하게 된 것은 자기의 공로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백성들이 왕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왕이라면 왕의 값을 해서, 즉 "왕이 좀 잘해서 우리도 같이 덩달아서 잘 살아보자" 라는 백성들의 욕망이 다윗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 안에는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는데,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회사가 요구하는 욕망이 없다고 하면, 그 직원은 그 회사에 사표를 내야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밥이라도 먹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하는데, 자기의 고집대로 하면 그 집단에서 추방이라는 겁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닌데,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지율을 조사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학생들의 지지율이 24퍼센트라고 하면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내가 담임인데" 라고 하면서 폼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실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고객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데, 인간세상이 이렇게 서로 결부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관계라는 말이죠. 여러분이 평생 경험해온 것을 제가 이렇게 대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구조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왕이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쟁이 나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전쟁을 한다는 겁니다. 백성들 가운데서 돈을 낼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면, 인구조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로마황제의 인구조사, 막상 태어난 것은 구세주 !!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에, 마리아가 자기가 살던 곳인 나사렛이 아닌 남쪽으로 120km나 떨어진 베들레헴에 왜 갔습니까? 거기서 예수님을 낳았는데, 그것은 인구조사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로마의 황제가 인구조사를 했는데, 막상 태어난 것은 구세주라는 말이죠.
(눅 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철저한지 모르는데, 아담의 시스템을 그대로 다 이용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그 속에서 복음을 뽑아낸다는 겁니다. 자기가 행동을 제대로 해서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할 줄도 모르고, 육신의 본능대로, 즉 아담의 시스템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복음을 알아도 개판인데, 일반 사람들과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특이성인데, 즉 주님이 어떻게 아시고 뽑아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낯선 기쁨을 계속해서 맛보게 하신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 그냥 내버려두지만, 성도에게는 '때찌'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때찌다" 라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또 우리는 고집이 있어서 묻는데, "왜 그러세요?"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너는 승리의 전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네 안에 남의 욕망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나의 욕망도 들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니 마음대로 사세요 !!
어제 낮에서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워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 그것으로 땡겨버린다는 겁니다. 즉 "너는 내가 원하는 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상인데, 즉 "네가 원해서 네가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해서 네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 일상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순간순간 확인을 시켜주시는데,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네가 고치지 못해. 그것은 너의 본성이야"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그것마저도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마저 내가 원했던 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스스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되는데, 그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선 "니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백지로 보낸 편지를 읽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인데, 다만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즉 복음을 뽑아내신다는 말이죠.
* 이 시대의 칠천 인으로서 !!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선지자를 너무 우상화하면 안 되는데, 엘리야를 우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여기 교재의 박스 안에 나오는데, 엘리야는 자기 혼자서 구원을 받은 줄 알았지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4장 11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 칠천 인은 용기가 있어서 남은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해서 남은 자인데, 이 남은 자에게 누구도 포함되는고 하니, 엘리야가 그 시대의 메시야의 종으로서 남아있었다는 겁니다. 그와 똑같은 상황이 2023년 10월의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말이죠. 이제 곧 10월의 마지막 날이 올텐데, 똑같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기정사실화' 라고 했는데, 주님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기정사실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 틈새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알고 있는데, 그러니 이게 보통 축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서해바다가 가로막혀서 길이 없다는 것도 아는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길이 막혔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자기 욕망만을 쫓아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웃고 떠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양쪽을 모두 다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유일한 선교사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영적 전쟁의 군사로 뽑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막상 저희들은 영적 전쟁에서는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한 몸 행복하게 사는 것,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줄로 압니다. 그런 모습,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주님이 필요해서 벌인 사건임을, 그것을 위에서 보는 안목으로서, 기쁨으로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10,13 오전 10시에 마침.
너는 왜 네 아내를 괴롭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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