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5 - 오는 세대
22,10,1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주님의 시스템 !!
지난 시간에 했던 교재 74페이지를 다시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 안에 남겨진 7,000명이 있었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 7,000명은 주님의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시스템은 조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는 말이죠.
이 시스템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인데, 물론 주님의 존재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지만, 주님이 가동시키는 시스템과는 접촉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스템은 눈에 띄는 것인데, 가시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가 있다는 것이죠.
* 남겨진 7,000명 !!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이것은 점선이고, 그리고 그 주님이 보이는 실선으로, 이것이 곧 남겨진 7,000명이라는 겁니다. 이 7,000명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7,000명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의 실력과 능력과는 무관하게 배후에 어떤 분이 있어서, 그분이 자기를 그분의 일을 하도록, 즉 주님의 시스템에 들어오도록 하셨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남은 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남은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증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증거할 때는 무엇으로 하는고 하니, 그게 바로 '비교' 라는 말이죠. 즉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다" 라고 개인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개인 시스템인데, 집단 시스템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다 그러한데, "너는 잘 하는데, 나는 왜 너보다 못하지?" 라고 하는 것이 바로 개인 시스템이라는 말이죠.
* 개인 시스템의 절정인 '왕 시스템' !!
그런데 제가 지금 성경을 통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개인 시스템이 아닌 주님의 시스템인데, 그런 주님의 시스템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주님 시스템의 반대가 개인 시스템이고, 이 개인 시스템의 절정이 바로 '왕 시스템', 즉 '왕 제도' 라는 것이죠.
지금은 왕이 없지만 옛날에는 왕이 있었는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왕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서 제일 말 빨이 센 누구인고 하니, 바로 왕이라는 말이죠. 지금도 북한에는 왕이 있는데, 말이 인민 민주주의지 왕정체제라는 겁니다. 그렇게 왕이 있으면 밑에는 신하가 있게 되는데, 그러한 체제라는 말이죠.
그렇게 왕이 있고 신하가 있음으로 인해서 국가가 그만 개인용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옛날의 국가구조였다는 겁니다. 왕을 신하들이 투표해서 뽑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왕이라는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이 자기 자식에게 나라전체를 물려준다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오늘날의 재벌기업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회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말이죠. 물론 대형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식은 또 다음의 자식에게 물려주고 말이죠. 남들에게 물려주기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이죠.
자기가 그동안 애써서 키운 기업을, 거기에는 자기 과거의 모든 땀과 수고가 스며들어있는데, 그것이 남들 손에 그냥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남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주게 되면, 자기는 계속해서 그 자식을 통해서 그 안에서 살아 숨쉬게 된다는 말이죠.
* 우리 할아버지가 이 교회를 지었어 !!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물론 저는 우리교회를 물려주고 싶어도 아들이 없어서 곤란한데 겁니다(ㅋㅋ). 그러니 교회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왕 말이 나왔으니 교회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면, 목사는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데, 그런데 목사를 계약직으로 뽑은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를 누구에게 물려주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그 교회의 장로가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데, 목사는 계속해서 계약직으로 뽑고 말이죠. 그러면 장로의 아들이 또 다시 대를 이어서 그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온 사람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냥 발로 차버린다는 말이죠(ㅋㅋ). 그 어떤 권리도 주지 않고, 물론 재정도 맡기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돈을 들여서 이 교회를 지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골의 경우에는 그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든다는 말이죠. 물론 도시도 그러한데, 자기의 가치가 거기에 다 들어있기 때문인데, 마치 정든 고향과도 같다는 겁니다.
이것이 개인 시스템인데, 그러면 주님의 시스템은 어떠할까요? 주님의 시스템은 남은 자를 앞장세우는데, 이 남은 자 속에는 선지자가 있어서 이 개인 시스템을 공격한다는 말이죠. 왕 시스템을 말이죠. 개인 시스템에서 최고의 절정은 왕이고, 그래서 국가는 왕국이 된다는 겁니다. 국가가 왕 개인의 것이라는 말이죠.
* 가짜 이스라엘 !!
주님이 보낸 선지자가 이 왕국을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세운 왕국은 가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여기 교재 75페이지에 나오는데, 즉 '가짜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다 가짜라는 겁니다. 이 안에 개인의 희생과 노력과 봉사와 애씀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합쳐서 '행함'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행함이 들어있는 것이 가짜라고 하면, 그러면 인간이 행하는 것은 다 가짜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와서 공격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듣는 인간은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 어디서 왔어? 너, 뭐야? 도대체 누가 너를 보냈어?" 라고, 대번에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보고 가짜라고 하면 너는 진짜라는 것인데, 네가 진짜라는 근거를 대봐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선지자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현재 왕 중심의 체제는 가짜이고, 거기에 여러분이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죠. 지금의 이스라엘이 왕 중심의 가짜라는 겁니다.
* 은혜로 움직이는 자들 !!
조금 전에 7,000명을 이야기했는데, 이 7,000명이 어떻게 해서 등장한 자들이고 했습니까? 이 행함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라는 말이죠. 행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행하는 것이고, 반면에 은혜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이 없는데, 오직 주님이 원해서 하는 것이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를 자기가 원해서 간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라는 이름의 왕국이라는 말이죠. 자기 중심의 왕국, 즉 인간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혜라는 말이죠. 주님의 시스템, 즉 보이는 않는 세계인 천국을 위한 보이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주님의 은혜로 움직이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몰아붙이는 것인데, 즉 "너는 이렇게 살아라" 라고 말이죠. 자기는 그렇게 살기 싫은데 주님이 살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 행함에 대해서 주님의 은혜가 지적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도대체 너의 본질이 뭐야? 너는 누구야?"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방금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의 시스템은 항상 개인용이고, 이런 인간의 행함에는 자기 가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즉 자기 위신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평생을 살면서 지키고 싶어했던 자존감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행함의 시스템은 항상 남들과 비교하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든다는 말이죠.
산다는 것은 언제나 경쟁이 있기 마련이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아프고 불안하고 초조하게 되는데, 자기는 혼자 있고 싶은데 그만 밀리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밀리지 않고 버티려고 하다가보니 옆집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힘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돈까스 집을 하는데, 길을 하나 건너서 같은 돈까스 가게가 또 생겼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루에도 몇 번을 지나가는 척을 하면서 안을 살펴보게 되는데, 자기 집보다도 장사가 훨씬 잘 된다는 겁니다. 메뉴도 더 다양하고 말이죠. 그러면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죠.
* 한 달 매출이 얼마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비교하고 경쟁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비교한다' 라는 것은, 타인의 행함의 가치와 자기 행함의 가치가 비교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는 곧 가격으로 나타나는데, 시장경제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즉 "당신 가게는 한 달 매출이 얼마야?" 라는 것으로, 그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항상 돈으로 가치를 판단하는데, "월급이 얼마야?" 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것이 자본주의이고 시장경제인데, 이렇게 가치가 수치가 되어서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것이 시장에서 수치화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남들에게 결코 인정받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아이가 뭔가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만화책을 보는데 열심히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나중에 얼마나 돈이 되겠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아이는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중에 시장에서 가치를 가격으로 매겨질 때 어느 쪽이 인정을 받겠느냐는 것이죠. 당연히 영어공부인데, 물론 돈을 잘 버는 만화작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그 시대의 시장에서 요구하는 것을 열심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컴퓨터를 해도 그냥 오락만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된다든지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시장에서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시장에서 뒤쳐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렇지 않은데, 경쟁은 끝이 없는데, 최고가 될 때까지 계속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최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게 바로 '왕' 이라는 겁니다. 컴퓨터 왕, 낚시 왕, 무역 왕, 그렇게 왕이 되는 시대, 이것이 바로 개인적인 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이죠.
* 다시 요약하면 !!
방금 이야기한 것의 전체를 다시 요약하면, 이 전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여럿, 즉 다수라는 겁니다. 이 다수의 세계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다수의 세계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 즉 비교하고 경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세계가 정말로 있다는 것일까요? 물론 있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여럿과는 다른데, 즉 여럿과 경쟁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일본말로 '독고다이' 라고 하는데, 바로 이스라엘이 그러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이 그 시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11장 36절에서 38절을 보겠습니다.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기서 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고 하는데, 독고다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이니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행함으로 애쓰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시대에 독특하게 불쑥 튀어나온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남은 자이고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누구와 경쟁을 하지 않는데, "너는 헌금을 얼마나 했어? 기도는 몇 시간을 했어? 전도는 몇 명을 했어?" 라고 하는, 이 따위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신앙인은 경쟁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 돈 천만원만 빌려주세요 !!
여기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 싶은데 말이죠.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불쑥 와서는 돈을 천만원 빌려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성도지요? 그러면 돈을 천만원만 빌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도인 그 사람은 뭐라고 답변을 해야합니까?
여기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그것은 나쁜 짓입니다" 라는 것인데, 일단 2번 보기는 드리지 않고, 다른 경우가 있으면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라고 한다면, 그것은 1번이라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돈이 없습니다" 라는 것도 1번이고, "돈이 여기 있습니다" 라는 것도 1번인데,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왜 주느냐는 말이죠.
* 주께서 용납하지 않는 일입니다 !!
그러면 2번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용납하지 않는 일입니다" 라는 것인데, 이게 정답이라는 겁니다.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신앙인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자극이 왔을 때는 반드시 누구를 경유해야 합니까? 당연히 주님인데,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돈을 주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돈은 자기 돈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돈은 주님의 허락 하에서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주님께서 허락한 일인가? 아닌가?
그래서 성도에게는 나쁜 짓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다만 "주님께서 허락한 일인가? 아닌가?" 라는 것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쁜 짓과 좋은 짓은 왜 등장하는고 하니, 자기가 남들보다도 더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성도의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착하게 살래" 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더욱 더 도를 닦아서 완벽에 가깝게 되려고 노력하는 자가 성도가 아니고, "주님께서 허락한 일인가? 아닌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는 주님의 백성이고 주님의 종이기 때문인데, 즉 주님의 소유물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주님으로부터 돈을 주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 안녕히 가세요"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굳이 "당신은 나빠요" 라고 할 필요가 없는데, 즉 "당신은 자기 자신만을 알고 배후에 주님이 없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게 차이점이라는 것이죠.
*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물론 우리가 대화할 때 2번까지 다 일일이 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성도와 성도끼리 대화를 할 때는, "당신은 어떻습니까?" 라고, 이것은 영어로 "How are you?"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 1번보다는 2번의 질문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라고 말이죠. 즉 "당신이 속해있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속해있는 세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이것이 곧 성도와 성도의 대화라는 말이죠. 물론 이렇게 하면 너무 번거러우니 "잘 지내지요?" 라고 해도, 이것은 1번이 아닌 2번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당신이 소속된 하늘나라에서 은혜를 잘 받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뉘앙스를 가지고 대화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2번이 그만 빠지고, "당신은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이 "요즘 많이 아파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이런, 참으로 안타깝네요" 라고 하는데, 물론 속으로는 자기가 건강하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말이죠(ㅋㅋ).
* 많이 아파요 !!
그러니 "많이 아파요" 라는 것보다는 "주님이 나를 아프게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그래도 지금 주께서 조금은 건강하게 해주시네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남은 자 안에서는 자기의 건강이 문제가 아니고, 오직 주님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죠. 7,000명은 바로 그런 모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픈 것이 나쁜 게 아니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그리고 아직까지 아프지 않은 것은 그 다음 순번으로서 대기상태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파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또한 아프지 않아도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는 것이죠.
* 가롯유다의 문제점은?
가롯유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끝까지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고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롯유다는 전형적인 마귀에 들린 자의 모습인데, 목사가 되던지 장로가 되던지 간에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개인적인 시스템이지 남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가롯유다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타인과 비교하면서 끝까지 자기 체면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런 자에게서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느냐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앞에서 "이 세상은 여럿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여럿'의 반대말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간단한데,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이방나라의 여럿에 포함이 되려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 이방나라들처럼 괜찮게 살아보려고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과 그 왕을 공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은 독고다이인데,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그런데 왜 그런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고, 주님이 없는 자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려고 하느냐는 것이죠.
* 한 분의 아버지가 계신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이 되는데, 이것을 칠판에 적어보겠는데, 이게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한 분의 아버지가 계신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이것과 "아버지가 한 분이시다" 라는 겁니다. 물론 같은 의미라고 여길 수도 있는데 말이죠.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한 분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래서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서 "당신의 아버지는 몇 분입니까?" 라고 하면 화를 내지 싶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한 분이라는 것은, "인간은 홀로 태어난 게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없이는 나는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아버지에게 종속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는 한 명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를 한 명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알고 있던 육신의 아버지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이죠.
* 아빠 아버지 !!
그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인데, 신약에서는 그것을 "아바 아버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친근하다는 의미에서 '아바(아빠, 압바, Abba)' 라고 하는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러니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이 육신 그대로 있다는 것인데, 이 육신은 누가 준 것입니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 아버지로부터 있는 자가 '여럿' 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육신의 아버지와 육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신데, 그래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그런 육신의 아버지를 제거하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제거한다는 것은, 자기는 그 아버지로 인해서 태어난 자식인데, 그러니 그것은 자기 육신의 자식됨을 없애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 너는 누구의 자식인가?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면,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가 육신에 속했다면 진짜 영적인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다. 그러니 너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누구의 자식인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상상해서, "그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한다면, 자기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변화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만을 쳐다보다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 더 추가한, 그렇게 행위를 하나 더 보탠 것뿐이기에 말이죠.
이것은 "아줌마, 여기에 국밥 하나 더 추가요" 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국밥이 있는데 하나 더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식당 아줌마가, 아니 주님이 어떻게 합니까? 국밥을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놓아야 하는데, 그만 머리에 부어버린다는 것이죠. 그 뜨거운 국밥을 말이죠. 즉 "너는 화상을 입고 죽어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가 있는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영의 아버지를 추가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무엇을 부정하는고 하니, 주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와 그 자식의 관계를 그만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어디에서 그렇게 합니까? 이스라엘에게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이스라엘은 끝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이스라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이스라엘은 없어진다는 말이죠. 언제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이스라엘은 이제 끝이 났다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않는데, 즉 아버지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열 두 제가가 있더라도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들에게 성령이 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이죠. 사울은 자기가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자부했는데, 그런 그에게 누가 찾아왔습니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비로소 자기가 영의 사람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데,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혼자 죽었습니까?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스데반 집사님이 돌을 맞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잘하고 있다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님과 그만 합류를 해버리면, 그러면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적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남겨진 7,000명, 즉 주님의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이 시스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게 아담의 계통이라는 겁니다.
*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그러니 교회에 와서 "하나님, 일주일 동안 바쁘게 일하다가 왔습니다. 삼위일체도 믿고 다 믿습니다. 이제 되었지요?"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종교단체에 소속이 되어서, 그들이 하는 개인적인 종교 시스템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해서, 이게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영화 '친구'를 보면 그런 대사가 나오는데 말이죠. 여기서 제가 재현을 해볼까요? 교사가 시계를 풀어놓고 학생을 불러서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교사가 시계를 푼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학생을 불러서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라고 하니까, "예, 깡패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볼때기를 그만 한 대 때리는데, 교사는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는 겁니다. 한 시간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다리도 아프고 말이죠. 그러자 같은 반 친구들이 "진짜 깡패인데요" 라고 한다는 것이죠(ㅋㅋ).
*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인데요 !!
그렇게 성령이 오셔서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인데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죽음을 가져다가 주었는데, 즉 죄를 심어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과 합류될 수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데, 죽은 자라는 겁니다. 선지자들은 성신을 받았는데, 선지자가 그냥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의 아버지, 영적인 아버지, 그것을 구약에서는 언약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런 언약의 아버지를 두고 있기에 독고다이로 살아야할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러운고 하니, 주변 이방나라들이 여호와를 모르면서도 잘 산다는 말이죠. 벤츠를 몰면서 골프를 치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부러워서 그쪽으로 몰리게 되는데, 이것이 개인적인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너희는 무엇을 해서 그렇게 잘 살지?" 라고 하니까, 그들은 "열심히 하면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열심히 행하면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방나라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성도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부럽고, 그들처럼 되고 싶지가 않았느냐는 말이죠. 교회를 다니더라도,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교인수가 30명인데, 그런데 저쪽은 3,000명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부러운데, 즉 비교하고 경쟁을 한다는 겁니다.
민주당 국회의원은 200명이고 국민의 힘은 100명인데, 그러면 그 민주당이 부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한번 보자" 라고 하는데, 물론 볼일도 없지만 말이죠. 이게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도 아닌 아버지, 영의 아버지가 아닌 육신의 아버지가 남겨준 유업인데, 더러운 상속분이라는 것이죠.
* 여럿 중의 하나인가? 한 분 하나님의 자식인가?
우리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짜증을 내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죄악된 육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남들도 그렇고 자기도 그렇고, 타인에게 지기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럿 중의 하나인가? 즉 다수 중에서 그 다수의 일원인가? 그게 아니면, 한 분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자식인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말이죠.
그 한 분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자식이 되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정작 어떻다는 겁니까? 그 여럿에 대해서 굉장히 탐을 내고 내심 너무나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 역사가 곧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말이죠. 그래서 있는 이스라엘이 없어져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게 성경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 성령을 받아야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정상적인 관계가 됩니까? 그것을 대표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표준으로 볼 때, 성도라고 하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완전히 필수요건이 되고 마는데, 즉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부담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혐오대상 !!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8장 8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혐오대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 '혐오' 라는 말을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데, 혐오시설, 혐오동물 등등,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밀어내고 싶은 것인데, 징그러워서 가까이 하기가 싫다는 말이죠.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혐오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쓰레기라는 말이죠.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니 그런 자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자들을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자기 이야기라는 겁니다. 휴대폰을 들고 2시간 반이나 떠들어대는데, 자기와 자기가 속해있는 세상 이야기라는 말이죠.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럽다는 것인데, 지저분하고 추잡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육신에 속한 인간이었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이 나오도록 이끄신다는 말이죠. 성령께서는 행함을 부정하는 쪽으로, 그렇게 우리가 고백하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이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들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러면 성령을 받지 않으면 끝이네요"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러하다는 겁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어디서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데, 전혀 혐오스럽지가 않은데 말이죠. 이것도 복음의 향기인가요? (ㅋㅋ)
* 사진과 동영상 !!
사진과 동영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동영상은 음성이 있고 움직이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신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스냅사진 하나를 자기 뇌리에 박아있는데, 즉 "이게 나다" 라는 생각을 사진으로 찍어서 꿈속에서나 일상에서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자기가 소유하는 식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하면, 그야말로 스냅사진과도 같은 자기의 모습을 이상적이라고 모습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내 모습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성령이 임한 자는 사진이 아닌 동영상인데, 이 동영상의 특징은 고정된 '나'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오늘도 아침 9시가 다르고 10시가 다르다는 것이죠. 향기가 좋으면 또 달라지고 말이죠(ㅋㅋ). 사람은 고정적이 아니고 수시로 달라져서, 그래서 어떤 것을 꼭 집어서 "이것이 나다"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라고 해야지, "이것이 나다" 라고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고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위라는 겁니다. 요즘은 권사도 그러하고 말이죠. 하지만 날마다 바뀌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느 시점에서 목사, 장로, 집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이것을 그 어느 누구도 규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아버지가 안정적이니, 아들도 안정적 !!
그러면 이렇게 동영상과 같은 '나' 라고 하면 불안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즉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불안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버지가 안정적이라는 겁니다. 굳이 자기가 안정적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가 안정적이 되어버면 자기가 그만 우상이 되고 마는데, 하나님은 이런 우상을 제일 싫어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미 고정된 존재가 아버지로 확정이 되어버린 상태에서는, 즉 하나 밑에 있는 7,000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7,000명이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말이죠. 한 시스템에 의해서 같이 움직이고 있는 7,000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가 책임을 지는 것이지, 7,000명 각자가 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이번에 카카오톡의 지하 배전반에서 화재가 나서 카카오톡이 먹통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그야말로 난리가 났는데, 그러면 카카오톡의 사장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이지, 직원들이 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대로 된 시스템이라면 말이죠. 그것이 바로 고정된 존재로서의 아버지라는 것이죠.
* 아들에게는 죄책감이 없어 !!
이것을 크게 써보겠는데, "주님은 나에게 그 어떤 죄책감도 허락하신 적이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자기의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죠. 죄책감을 왜 가집니까? 그것은 그 순간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인데, "내가 바르게 살았어야 하는데. 그때 기도를 더 하고, 헌금을 더 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좋은 결과를 얻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성도에게 좋은 결과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는 말이죠. 거기에 더 추가할 좋은 결과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래서 자기에게 그 어떤 동영상적인 변화가 계속해서 오더라도, 그 하나 하나의 변화 자체가 무엇을 증명하는고 하니, "그러니 내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그것은 "나는 여럿이 통용되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서 벗어났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여럿 중에서는 너는 몇 등이야?" 라고 하는, "당신은 상류층이야? 중류층이야? 하류층이야?" 라고 묻는, 그런 물음 자체가 성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럿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물음에는 벌써 계급이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이죠.
* 성령은 아들의 영 !!
그래서 그런 이 세상의 여럿에 속하지를 않고 오직 하나, 즉 영적인 아버지 한 분에 의해서 하나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들의 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갈라디아서 4장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 5절의 속량한다는 것은 빼내준다는 것인데, 우리를 율법 속에서 실컷 저주하게 하시고 끄집어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 아들의 영이 나오는데,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이바지라고 해봐라. 옳지, 그렇지" 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는 확정이 되었는데, 즉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라는 겁니다.
* 그래도 너는 아들이야 !!
그리고 그것을 사후적으로 계속해서 되뇌기는 작업을 바로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돌아서면 성령께서는 "너는 아들이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바바리를 입고 "이제 가을이구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그래도 너는 아들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ㅋㅋ).
우리는 변화되는 계절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변화되지 않는 것을 확인시켜주신다는 겁니다. "봄이 되던 여름이 되던 가을이 되던 겨울이 되던, 그래도 너는 나의 아들이야" 라고 하시는데, 이게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죠.
우리교회에서 대표기도를 시키면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고 하니 부담이 되는데, 그래서 나름 준비를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막상 기도를 하게 되면 긴장이 되어서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도 너는 아들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ㅋㅋ).
* 성령과 악령 !!
그러면 성령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개인적인 육신은 빼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악령이라는 겁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악령도 같이 있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성령은 확정된 사실을 알려주고 변화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는데, 그러면 악령은 어떠할까요?
당연히 악령은 그 반대라는 겁니다. 그래서 악령은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데, 즉 "모든 것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의 1년 뒤가 달라지고 10년 뒤가 달라진다. 그러니 열심히 행해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이룰 수가 있다. 행하지 않으면 너는 빈손이야. 알았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악령이 계속해서 이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육신은 거기에 대해서 친근감을 느끼는데, 즉 동질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악령의 말을 듣게 하는, 그게 개인적인 시스템인데, 바로 왕 제도라는 것이죠. 그게 오늘날의 교회이기도 하고 말이죠.
* 악령이 들린 이스라엘 !!
그러면 그 악령의 일을 누가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이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런 짓을 했고, 그런 왕의 시스템 아래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죠. 엘리야 때는 그 숫자가 850명이었는데, 또한 미가야 선지의 경우에는 400명이었다 겁니다. 이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엘리야는 '850 : 1', 그리고 미가야는 '400 : 1', 그렇게 되는데 말이죠. 이렇게 계속해서 하라고 격려하는 역할, 그것이 바로 개인용 시스템인데, 그러면 오늘날 이런 거짓 선지가 역할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바로 교회의 목사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들려서 말이죠.
* 그래프를 한 번 그려봐?
목사는 교회가 자기 자존심인데, 그래서 교인들이 많고 헌금까지 많이 나오면 목사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교를 준비해도 단풍놀이를 간다고 절반 이상이 빠지고 나면, 그렇게 교인들이 빠지면 당연히 헌금도 빠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는 장로와 다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장로들이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장로들은 매일 한다는 말이 "나 때는 말이야" 라고 하는데, 소위 '라때' 라는 말이죠. "그때는 목사가 설교하면 울고불고 했는데, 그리고 자리도 모자라서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리고 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을 바꾸면 "지금 당신이 와서 이 꼬라지가 뭐야? 어디 그래프로 그려볼까?" 라는 것인데,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데, "내년에는 계약이 없어. 나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더 젊은 목사를 찾고 하는데, 그래도 젊은 놈이 낫다는 겁니다. 그런 장로들의 부인을 권사라고 하는데, 그러니 권사도 역시 한 편이라는 말이죠.
권사들이 모여서 신천지를 씹고 안상홍을 씹고, 그렇게 열심히 이단들을 잘 씹고 있는데,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면 기존 교회는 말씀대로 잘 가르치고 있나?" 라고 하니, 그만 입이 쑥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결국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자기가 다니는 '내 교회' 라는 시스템, 거기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신약에서의 가짜와 진짜 !!
지금까지는 구약입장인데, 그러면 신약에서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먼저 가짜는 무엇인고 하니, 가짜의 특징은 이 생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저 생은 부록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여기에 해당하는 광고문구가 있는데, "가시는 길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보람상조의 광고내용인데, 이들은 어디까지 잘 모시겠다고 합니까? 그게 천국까지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니고, 화장터까지만 잘 모시겠다는 것인데, 리무진으로 말이죠. 그렇지요? 그 다음은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가짜1'이고, 그러면 '가짜2'는 무엇인고 하니, "이 생에서 복을 받고 저 생에서 천국에 갑니다" 라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가짜인데,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것이 가짜라고 하면 의아해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내가 믿었던 믿음의 내용자체인데 왜 가짜이지? 그러면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믿었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생에서는 복을 받고 저 생에서는 천국에 갑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단연코 없는데,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죠. 특히 절에 다니다가 교회로 바꾸어서 나온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몹시 어리둥절해한다는 겁니다.
* 이 세대에 이미 와버린 저 세대 !!
그런데 3번을 보면 2번이 이해가 되는데, 이게 진짜인데, 진짜는 1과 2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 세대부터 저 세대까지 다 알려준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진짜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생과 저 생, 그리고 이 세대와 저 세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인데, 이 생과 저 생은 전부가 개인적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인고 하니,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해있는 새로운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어디 소속인가?" 라는 것인데, 즉 어떤 환경, 어떤 영역에 들어있느냐는 것이죠.
* 너는 어디 소속인가?
그 영역 안에는 함께 몰려가는데, 그러면 개인적인 노력과 행함과 같은 것은 전혀 무시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 안에서는 그 어떤 비교나 경쟁도 없는데, 하나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대에서 저 세대까지" 라고 하면, 그것은 "이 세대가 끝나면 저 세대가 온다" 라는 의미가 아니고, 저 세대가 이 세대를 덮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대 속에 저 세대가 이미 와버렸다" 라는 것인데, 그게 성경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3차대전이 발발하고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대에 오는 세대가 같이 합류가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성령이 오심이란 말이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나와있는데, 거기에 에녹시대, 노아시대, 아브라함 시대, 모세 시대, 다윗 시대 등등, 계속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각각 시대마다 주님의 시스템에 해당되는 자들을, 거기에 믿음의 선조로서 주께서 꽂아 넣어놓았다는 것이죠.
* 유한 속에 꽂힌 무한 !!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유한 속에 무한을 꽂아 넣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꽂아 넣는 것을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보이는 형식이 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믿씁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뭔가 덩어리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즉 믿음은 믿는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실체를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말이죠.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예를 들어서, 이렇게 컵이 있는데, 그래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을 때, "이것이 컵인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믿음인데, 그런 것은 탈락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인식하고 인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가 "컵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만 "믿음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웃든지 하는데, 하지만 이 세대에서는 이게 컵이지만, 오는 세대에서는 컵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 예수님은 믿음 그 자체 !!
이 세상에서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인데, 그런데 오는 세대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은 '믿는다' 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 자체가 실체로 등장한 믿음인데, 그 자체를 두고 '실상', 혹은 '증거' 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 자체가 성령이 만들어낸 작품인데, 그래서 성도란 믿는 사람이 아니고, 성도 차제가 믿음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계속해서 나열한 것이 히브리서 11장인데, 제일 먼저 아벨이 나오고, 그리고 에녹이 나오고, 노아가 나오고, 아브라함이 나오고, 그 후손들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나오고, 그리고 모세가 나오고, 기생 라합이 나오고, 기드온을 비롯한 사사들이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사무엘이 나오고, 선지자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믿는 자들이 아니고, 이들이 믿음 그 자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대에서는 믿음의 주인공이 따로 설정이 되어있는데, 그게 '나' 라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무엇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세대와 저 세대, 즉 오는 세대와 중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믿음 덩어리 !!
오는 세대에서는 자기가 믿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나' 자체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만든 작품이니 그러하다는 말이죠. 즉 성령의 결과물인데, 자기가 믿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 따위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믿음 덩어리라는 말이죠.
아벨은 아벨 시대에 믿음 덩어리이고, 에녹은 에녹 시대에 믿음 덩어리이고, 노아는 노아 시대에 믿음 덩어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아무리 술에 취해서 바지를 벗고 스트립 쇼를 하고 해도, 결코 탈락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노아 자체가 믿음이기에 말이죠. 노아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데, 노아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 이 세대와 오는 세대 !!
이것은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데, 반면에 오는 세대에 속한 자는 이해를 한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는데,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오는 세대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오는 세대의 영, 즉 오는 세대의 원칙이라는 말이죠.
이 세대의 원칙은 육신인데, 즉 행함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오는 세대의 원칙은 은혜고 선물이고 또한 성령의 임함이라는 말이죠. 12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도망을 쳤는데, 그것은 이 세대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오는 세대는 누구였습니까? 12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밖에 없었는데, 그러니 그때 오는 세대는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 오는 세대인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게 되니, 제자들은 그야말로 허풍과 내용 없음이 다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자들의 역할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3년 동안 제자들은 이 세대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다는 것이죠. 이 세대의 방식으로 말이죠.
베드로가 "우리가 재산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드렸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오는 세대에서는 그런 것이 다 보상이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들은 기껏 이 세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는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과 동거동락을 하면서 같이 고생하고, 그리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하면서, 그들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가 성립된 줄 알았다는 겁니다.
* 과연 누가 배신을 했는가?
그런데 어제 설교한 내용처럼, 예수님이 자기들을 배신하고 떠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겁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 세대의 사람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 라는 것을 가지고 서로 싸웠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하나 데리고 와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는 세대에서는 누가 높으냐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라 !!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드리고 예수님을 다시 따르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지, 네가 왜 관여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자식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결별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하십니까? 영의 아버지를 찾아서 나서는 길에 있어서, 왜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 가정에서 성당으로 !!
이것을 본 따서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될 때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면서 하직인사를 하는 게 있는데, 즉 "아버지, 이제부터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로서 아버지의 자식으로는 마지막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가정이라는 육신에서 성당이라는 육신으로 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성당에 취직을 하러 갔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가는 겁니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 성령을 받아야만 !!
그렇게 성령을 받게 되면, 가정에 충실해도 역시 오는 세대에 속하는 것인데,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떠나지 않아도 예수님의 자기 시스템, 즉 그저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자유함, 그것을 가정에서 보여주면, 그러면 이 세대의 사람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사람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성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긋난 질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오는 세대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그 오는 세대에 관해서 무엇을 달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다만 오는 세대가 덮쳐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이 세대에서 알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목사들이 "성령을 달라고 부르짖으세요" 라고 하는데, 또한 사람들도 그것을 원하지만, 하지만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 오는 세대의 성령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그런 권한 자체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고방식 자체가 이 세대의 것이기 때문인데, 즉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남들이 부러워서, 그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성령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개인적인 시스템, 즉 개인적인 경쟁의식에서 나왔기에 하나님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 성령은 동일한 모습으로 주어지지 않아 !!
그러니 성령이 오신 증거가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물론 "성령은 어떤 식으로 주십니까?" 라는 것은 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을 때 비둘기와 같은 모형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비둘기가 온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리고 오순절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때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불의 혀와 같은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제가 주일학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만약 지금 우리에게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냐는 말이죠. 자기 자랑인데, 자기를 우상화한다는 겁니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이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임한 것도 단 한 번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동영상인데, 그래서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것을 흉내낸다고 하면 이 세대의 사고방식인데, 과거의 것을 똑같이 흉내를 내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오는 세대에서는 그 어떤 것도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상화가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동일한 것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자기에게 우상이 된 상태에서, 즉 이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동일한 것을 추구하게 되면 더 우상화가 굳건하게 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 정도로 자기만 섬기는데, 그래서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 성령은 어떻게 오시는가?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오십니까? 이 동일화를 깨버리면서 오시는데, 즉 다시 자기 것으로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을 제공하면서 오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오심인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기의 것으로 수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우상이 되고 싶어도 될만한 재료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모두 다 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계신 확고한 주의 이름만을 쳐다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곧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자기의 성과나 자기 업적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바람이 불어야 풍차의 바람개비가 잘 돌아가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자기가 바람이라고 하면 잘 돌아가는 풍차를 부러워할까요? 만약에 자기가 풍차라고 하면 다른 풍차가 잘 돌아가면 부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풍차가 아닌 바람이라고 하면, 풍차가 돌아가던 말던 자기는 자기 역할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온 노래가 '나는 바람이려오' 라는 겁니다(ㅋㅋ).
* 성도는 바람과 같아서 !!
성령을 받은 자는 마치 바람과도 같은데, 자기 고유의 목적과 기대와 목표를 주님은 허락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성도로서 산다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염려하고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가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손자가 이번에 1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라고 한다든지 하면, 그렇게 목표와 기대가 있으면 손자가 그만 우상이 되고, 그 손자를 낳은 자기가 그만 손자의 아버지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갑자기 없어진 육신의 아버지 자격을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님은 바쁘다는 것이죠.
* 유한 속에 찾아온 무한 !!
이제 끝으로 어제 낮 설교시간에 한 것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대목을 말씀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유한 속에 무한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무한은 성령이라는 겁니다. 유한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자기가 어디까지인지, 즉 자기의 한계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냥 무한을 향해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는데, 거기에 기대를 하면서 것이죠.
그러니 지금의 이 순간에 감사하지도 않고 기뻐할 일도 없다는 겁니다. 초조와 불안에 매여있는데, "다음 주의 계약이 틀어지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가 봐둔 가게가 있는데, 그 계약이 잘 성사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목표와 기대가 있으니, 불안과 초조가 떠날 날이 없다는 겁니다.
* 성도는 그래야 !!
그런데 성도는 그래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들었던 강의가 모두 무너지는 느낌이 듭니까? (ㅋㅋ)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유한성이니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의 유한성, 즉 한계 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직 우리는 이 땅에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더욱 더 느끼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데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죠.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기대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아니면 할 일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좋은 일만, 자기가 원했던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 되세요" 라는 멘트도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육신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우리의 범주이고 한계라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일부러 우리는 그렇게 만드시는데, 그래서 우리의 소원이 무엇이야 할까요?
그게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데, 21절에서 24절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유한과 무한에 끼어서 !!
여기 23절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유한과 무한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사도바울은 유한이 아닌 무한, 즉 그리스도 소속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소속된 세계가 중요한데, 그것이 오는 세대라는 겁니다. 그 오는 세대가 자기의 육신에 같이 덮쳐졌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여기에 끼어서 지금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떠나는 것을 소망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게 24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너희나 나나 다같이 죄인들이야 !!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육신으로 보여줄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너희나 나나 다같이 죄인들인데, 그러나 나는 이 육신을 떠나고 싶은 것이 소망인데, 그것은 내가 오는 세대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도 그런 세대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도 남을 위해서 유한한 육신으로 보여줄 죄를 마음껏 보여주란 말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죄라고 했습니까?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스케줄을 짜고, 기대를 하고,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제 발견하지 못한 죄를 오늘 또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그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두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에게는 완벽함과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지식으로 복음을 안다고 할지라도 육신에서 뿜어내는 이 죄를 통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역할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10,22 오전 12시에 마침.
주님, 앞에 '김종구 부산어묵' 이라는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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