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제 6강 시작하겠습니다. 선지자라는 인간이 결국 메시아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그냥 기계? 또는 스피커, 또는 신약시대에 오면 소리, 세례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울리는 소리, 스피커다.’ 하지요. 돌비시스템인지 그런 것은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스피커다. 스피커에 불과하니 스피커와 따지지 말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중요하다.’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것처럼 선지자가 마냥 스피커와 같은 기계에만 해당된다면 그들이 자살하거나 반발한다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선지자 입장을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계시 앞에 서 있는 인간들이 기껏 해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자 이 말이죠. 그렇게 볼 때 12페이지에 보면 다니엘도 요나처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글에도 나와 있지만 다니엘이 기껏 하는 것은 ‘나는 이 음식을 먹지 않겠나이다. 느부갓네살왕이 주는 것을 금하겠습니다.’라고 다니엘과 세친구가 그렇게 했는데 그 느부갓네살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틴다고 해서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 됩니까? 음식 하나 가려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어요? 여러분, 술 끊는 순간부터 한 달 수입이 늘어났습니까? 술값으로 나가던 것이 사탕 값으로 나갈 수가 있고 금연초로도 나갈 수 있는 문제거든요. 이 선지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무능한 자예요. 무능한 자이기에 진짜 선지자 값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문제는 선지자 빼놓고는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무능하다고 생각 안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나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다니엘은 자살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항상 다니엘 입장에서는 난감, 대략난감이에요. 그 다음 절차, 그 다음 사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사건들을 자기에게 입혀줍니다. 그러면서도 다니엘 내부에 갖고 있던 생각은 뭐냐,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나 돌아갈래!!’ 하는 어느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어디로, 약속의 땅, 고향으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서 들어가게 하신 그 약속의 땅을 주시마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땅으로 돌아가겠지, 돌아가겠지.’ 하는 그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기한이 몇 년입니까? ‘70년만 있으면 돌아가리라.’ 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마치 아들 군대 보내놓고, 혹은 군에 간 본인이 병장쯤 되면 달력에 빨갛게 가위표를 칩니다. ‘두 달 전이다, 한 달 전이다, 마지막 휴가다.’ 이런 식으로 하지요. 하지만 제대할 날짜가 정말 가까워지면 ‘나가면 뭐하는데.’ 하면서 걱정이 심하게 들지요. ‘나는 언젠가, 70년만 채우면 돌아가리라.’ 하는 이 생각이 다니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다니엘의 생각에 장단을 맞춰주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안 맞춰줬어요. 여기에 또 등장하는 사람이 ‘다니엘밴드’, 다니엘과 세친구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뭔가 계시의 특이성을 나타냈어요. 이 세 친구는 어떠한 특이성을 나타냈느냐, 항상 난감하기 짝이 없게, 우리로 하여금 무장해제 시켜서 어쩔 수가 없게 만들었어요.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한 일관성 있는 이야기가 뭐냐, ‘하나님이 죽이거든 그냥 곱게 죽어버려라. 하나님이 널 죽이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 되도 않는 반항을 하지 말고 그냥 곱게 죽어.’라는 정신이 그대로 바벨론제국내의 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겁니다.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라는 그 법조항에 이 세친구가 말려들어서 결국은 풀무불속에, 포철의 벌건 용광로 속에 들어갔어요. 원래 거기에 들어가야 되는 것은 석탄종류, 원석종류가 들어가는 것이지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 집어넣어서 인신공양 제사할일 있습니까? 거기에 이 사람들이 들어갔습니다. 끝났어요. ‘그들이 들어가면 뒤에 주께서 살려줄 거다.’ 그러한 시나리오는 우리가 익히 해답을 알기 때문이고 그 뒤의 문제는 자기가 유능하다고 생각한 사람 같으면 ‘이렇게 들어가도 뒤에 가면 멋진 9회 말 역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상하는데 다니엘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라는 말을 하는 그 시점에서 세친구가 생각한 것은 ‘그래, 죽자.’ 한 겁니다. ‘죽으면 살겠지.’라고 붙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반칙이에요. ‘죽으면 죽는 것이지 뭐. 아, 죽이는 그것이 뜻이구나.’ 그 정도! 제발 그 정도에서 멈춰주세요. ‘들어가게 되면 뒤에 주께서 풀무 불에서 건져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들어가는 당사자들은 절대로 먹은 적이 없습니다. 아마 당사자가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풀무불속에 들어가는 사형집행을 이틀정도 늦췄을 거예요. 그래서 ‘아, 도저히 못살겠구나.’라는 마음을 먹었을 그 때 싹 집어넣어 버려요.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는 전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는 것, 완전히 전적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계속 대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래, 그만큼 산 것도 참 많이 살았다.’ 하고 ‘죽자. 이것은 내가 어쩔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한 번 적어봅시다. 결국 다니엘과 세친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뭡니까?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70년!’ 하는 것은 자기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물거품이 되겠지요. 비련의 공주, 인어공주가 이렇게 끝나잖아요. 현 빈을 좋아하다가 번쩍 번개 칠 때 바뀌어서……, 그런 게 있어요. <시크릿 가든>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조작된 것이다? 일단 내 몸이 살아있다, 내 몸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그렇다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는 것이 결부되어 있지요. 이것은 주님의 일에 관여할 수가 없고 빼야 될 가시 같은 겁니다. 이것 쏙 뺍니다. 내가 죽으면 예수도 소용없고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시면서 빼요. 그래서 이 구원이라는 문제가 내 구원문제에서 내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요. 심지어 나의 구원인데 나의 구원에도 내가 어떻게 손쓸 수가 없는 경우라면 나의 구원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지요. 그러면 누구 구원만 있습니까? 주님의 구원만 있지요. 주님께서 자기숙제를 행하다 보니 내가 구원된 것이지 내 구원이 나의 숙제가 되어서 내가 애써서 예수 믿다 보니까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속에서 계시의 핵심, 언약의 핵심으로 다니엘의 세친구가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니엘밴드, 다니엘과 세친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뭡니까? 우리 몸을 가지고 예상할 수 있는 ‘언젠가는, 70년이 지나면 돌아오겠지.’하는 이런 계획은 물거품처럼 어쩔 수 없이 다 날라 가는 겁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하지요. 요셉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로왕의 신하 두 사람이 같은 감방에 있었지요. 그 신하 두 사람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요셉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겠습니까? 그것이 증여지요. 사람이 누군가에게 뭔가를 그냥 베푸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보상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기대하면서 베풀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그 신하와 자신은 서로 아는 사이, 관계가 수립된 사이, 한 몸이 된 사이,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배신을 때리는 경우가 또 어디 있어요. 분명히 도움을 받아서 하나는 진급을 해 놓고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아무 소식이 없을 때 그 순간 요셉이 갖고 있는 생각은 뭡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어떻게 해주겠지.’라는 생각은 먹지 못하겠지요. 편지를 써서 ‘당신이 날 모르겠나.’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왜 요셉이 그런 생각을 안 먹었는가 하면, 감방에 들어온 사람이 꿈을 꾼 것은 요셉이 밤중에 숟가락 가지고 꿈꿔라, 꿈꿔라, 이렇게 해서 만든 꿈들입니까? 꿈을 꿔야 내가 꿈을 해몽하는데, 이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셨고 꿈 해몽을 소설 쓰듯이 지어낸 것도 아니고 지혜를 주셔서 했다면 그들의 만남은 결국 주선을 누가 한 겁니까?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에 의해서 주선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요셉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언약의 모든 성취, 조치하는 그 때의 모든 결정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하면,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뭔가 언약대로 실시하는 가운데 어떤 차질도 없을 것이라는 것만 믿지요. 언제쯤 내가 여기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지요. 국무총리? 감옥에서 평생 썩다 죽을 수도 있어요. 뭘 그것을 생각합니까? 우리야 결과를 아니까 은근히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 없어요. 그럴 때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꿀 줄이야. 바로 왕이 꿈을 꾼 거예요. 바로의 사촌동생이 꿈꿔도 소용없어요. 바로의 처제가 꿈을 꿔도 소용없다니까요.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 꿈의 해석은 요셉 본인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꿈의 해몽을 해 줄때는 비로소 바로왕은 요셉의 명을 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명을 받습니까? 요셉에게 해몽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약속의 땅에 있는 요셉일가를 돕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똑같은 방법이에요. 다니엘을 보면서 우리가 알 것은 뭐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식으로 현재 우리가 놓여있는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언약의 자리라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도 때가 되매 주어지는 언약 적사건의 작은 파편들이고 조각들이라는 것을, 모자이크의 하나의 모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큰일이 될 수 있어요.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리는 이런 것이 ‘해봐야 욕만 얻어먹는다. 사람들에게서 실력 없다는 소리나 듣는다.’ 하겠지만 그런 글들이 어디서 누구에게 은혜를 줄 수 있는 글들이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비난의 글은 올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비난의 글마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지요. 하나하나가 전부다 누군가에게 은혜가 되는 글들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참석을 안 하든지 자든지 뭘 하든지,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믿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큰일도 큰 일 했다고 우기지를 않게 되고 일이 없을 때도 예수님만 자랑하고 소위 남들이 큰 일 했다고 우길 때도 큰일을 믿는 것이 아니고 평소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라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니엘이 큰 일 했어요. 다니엘이 무슨 큰 일 했습니까? 바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했지요. 이것은 큰 일 한 거예요. 큰일을 저질렀어요. 마치 판도라상자의 뚜껑을 연 것과 똑같은 일을 한 겁니다. 닫아 놓은 뚜껑이 다니엘의 손에 의해서 열림으로 말미암아 다니엘 같은 이스라엘이나 바벨론 제국이나 모두가 실상은 악마의 권력 밑에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공개됩니다. 그 비밀의 상자, 열어서는 안 되는 그 상자를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손으로 열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것을 여는 순간 ‘언젠가는, 70년이 지나면 돌아간다.’는 그 생각은 이미 끝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논문발표회장에서 제 옆에 있던 교수가 시비 걸 것이 없나 하고 보다가 뭘 하나 건졌어요. ‘다니엘은 70이레를 아는 순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그것을 딱 잡아서 ‘성경 본문에 그런 것이 어디에 나오나?’ 한 거예요. ‘70년이 지나면 돌아가겠다.’고 다니엘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돌아가서 성전을 개축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것은 70이레지 7이레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7이레 다음에는 무슨 이레가 있습니까? 62이레가 있어요. 62이레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1이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은 옛날로 돌아가는 성전이 아니고, 옛날에 있었던 성전이 깨어진 그것을 다시 한 번 압축해서 재현하는 기간을 다시 이스라엘에게 허용한 거예요. ‘너희가 이렇게 하다가 망했잖아.’ 하는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 해주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만에 다시 돌아가서 ‘아, 이래서 우리가 당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하게 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네 자로 ‘현장검증’이라 합니다. 현장검증이라는 이것이 좋은 일이겠어요, 안 좋은 일이겠어요? 안 좋은 일에 현장검증을 하는 겁니다. 이웃주민들이나 가족들이 몰려와서 ‘죽여라. 저런 인간 재판 필요 없다.’하고 손가락질도 하고 행패도 부리지요. 경찰들이 ‘아저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러시면 법집행이 안 됩니다. 법정에서 해결해야 됩니다.’ 하고 말리지요. ‘저 인간 죽여라. 저 인간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이야.’ 그 때 고개 푹 숙이고 ‘제가 이렇게 죽였습니다.’ 하고 현장검증을 하잖아요. 그거 해보시렵니까? 그 현장검증을 하는 기간이 바로 70이레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현장검증을 어디까지 해야 됩니까? 역사 끝날 때까지죠. 이 현장검증의 마지막 이레가 1이레지요. 7이레에서 했던 현장검증이 1이레에 메시아중심으로 다시 벌어집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진짜 이스라엘이 되고 가짜 이스라엘이 진짜 메시아를 죽여 버리는 죄의 가장 진수를 보여주는 현장검증을 하게 되지요. 여기에 동원된 몇 몇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왕입니다. 헤롯왕은 동방박사가 왔을 때 메시아를 찾았습니다. 왜 찾았습니까? 메시아를 죽이겠다고 했지요. 그것이 1이레 가운데서 일어날 일이 되는 겁니다. 1이레라는 사건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일어나야 돼요. 동방박사 아주 아슬아슬 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안 나타났다면 동방박사는 그 때 완전히 죽었어요. 그리고 그 때 천사가 안 나타났다면 마리아와 요셉의 가족은 아기예수와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와서 애굽으로 그들을 빼돌렸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피신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이스라엘은 뭐가 돼요? 짐승의 나라지요. 다니엘의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열어보니 이스라엘이든 바벨론이든 모두가 짐승의 나라지요. 짐승의 나라노릇을 톡톡히 하는 쪽이 누구다? 왕이 되겠지요. 유일하게 짐승의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는 가족이 누구의 가족입니까? 예수님 가족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가족은 유일하게 도피를 받은 유일하게 남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한 가족이잖아요. 그 한 가족부터 다시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다시 나사렛 동네에 갑니다. 그 빛이 없고 어둠만 있는 동네에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처음 홍해를 건너왔던 이스라엘은 밑에 층, 홍해를 건넌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살면서 BC 586년에 망했던 그 이스라엘 밑에 층, 그것이 첫 번째 죄고, 그 다음에 다시 7이레에 돌아와서 죄지은 현장검증을 하게 되는 그 이스라엘이 또 한층, 그 위에 그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또다시 반복하는 또 한층, 완전히 지하 삼층이라. 꼭 지하철 같아요. 완전히 삼층을 형성해서 죄라는 죄는 모두 다 공개시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냐, 죄가 이것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뽑혀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없습니까? 구원은 있어요. 왜? 산이 깊은 곳에 골이 있다고. 구원과 심판, 심판과 구원은 같이 붙어 있어요. 구원 있는 곳에 심판 있고 심판 있는 곳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심판 속에서 비로소 구원이 비치는 거예요. 전 세계가 악마의 나라였다는 그 사실, 그 밥상을 받는 순간 그 밥상에 십자가가 담겨오고 그 십자가 안에 감추어진 채 우리의 구원이 수표 한 장으로 오잖아요. 꼭 구원을 수표로, 돈으로 이야기해야 좋아! 심판밥상을 받는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이스라엘의 현장검증을 통해서 밝혀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판도라의 상자, 그 뚜껑을 안 열면 세상은 마귀의 나라로 아주 평화롭게 살아요. 그 뚜껑을 여는 순간 ‘누가 뚜껑 열리게 했어.’라고 설치는 거예요. 꼭 요한계시록 같아요. 무저갱의 뚜껑이 열리잖아요. 확 열리면서 다니엘은 죽게 됩니다. 죽게 된다고 하니까 ‘그래도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어도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아서 살려줬잖아요.’ 합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말라니까요. 다니엘은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중요해요. 다니엘은 왜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감히 내가 누군데, 내가 세상의 제 2인자인데 감히 나를 체포하다니, 무엄하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 금지의 기간에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그 법조항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악법도 법이다.’ 한 소크라테스도 아닌데 그냥 보란 듯이 문 활짝 열고 기도하니까 시기하는 적들이 달려들어서 캠코더를 가지고 촬영하면서 난리 났어요. 어떤 사람들은 부끄럽다고 모자이크 처리하는데 그런 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보란 듯이 기도했어요. 세계 통신사들이 다 취재하고 인터넷에 동영상이 다 유포되었어요. 청와대 컴퓨터에도 동영상이 다 올라왔어요.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으로 다니엘은 죽었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려야 돼요. 결국 다니엘은 뭡니까? 이미 자기 손으로 뚜껑을 연 이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다, 없다? 마귀의 세상을 개혁한다든지 전복한다는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사자 굴에 들어가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이미 죽었어요. 그 뒤에 살아나는 그것은 다니엘로서는 자기생명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겁니다.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고요. 시껍했다(혼나다)는 것과 진짜 죽었는데 깨어난 것과는 달라요.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날 때 그 환자가 깨어나는 일에 무슨 도움을 준 것이 없잖아요. ‘아이고, 간지러운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다니엘 세친구나 다니엘, 이런 사람들을 두는 것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은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라. 이스라엘이 죄짓는 것은 그 배후에 악마가 지배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이스라엘에게 물을 수가 있다, 없다?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거예요. 죄를 짓도록 되어 있어요. 죄짓지 말라고 해도 죄짓고 죄를 지으라고 해도 죄짓고.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사정입니다. 인간이 그런 사정에 속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순진합니까? 성전 있다고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박하고 순진한 것, 교회 다닌다고 구원된다고 여기는 이것, 이것은 정말 순박의 순도가 100퍼센트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고 성만찬 했다고 구원받고 모태신앙이라고 구원받는다는 생각들. 모태신앙이라고 구원받는다면 모태솔로라고 해도 구원받겠다. 얼마나 순박한지,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믿으라고 하지 말고 우리보고 행하라고 해주세요. 다 할 테니까.’ 자기의 바탕이 이미 어쩔 수 없는 입장인 것을 모르고 있어요. 십자가를 아는 순간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한 그 말은 ‘내가 죄인이라도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나는 죄고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순간 ‘아, 내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마귀의 사고방식이었구나.’라고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위의 적들이 ‘그러면 하나님이 법은 왜 줬겠느냐.’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법을 준 것은 저주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줬다.’고 하지요. 법의 냉동상태, 법을 줘버리면 우리는 저주에서 ‘꼼짝 마라.’ 하고 어쩔 수 없어요. 거기서 몸부림쳐봐야 벗어날 수 없어요.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저주를 양산할 뿐인 겁니다. 그것을 만원지하철처럼 빡빡하다고 하지요. 어떤 사람도 ‘나는 졸음운전에서 이겼다.’ 하는 사람은 없어요. 졸음운전을 하게 된 것은 진짜 제대로 잔 게 아니라서 그래요. 진짜 제대로 자버리면 운전자체가 안됩니다. 껌을 씹으니까 잠이 깨더라, 그것은 덜 졸아서 그래요. 진짜 졸음운전은 껌을 씹어도 소용없고 콧 털을 뽑아도 소용없이 그냥 자야 그게 졸음운전이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그러면 지키지 말아야 되느냐.’라고 하는데 그 사람 주장은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도의 명령은 지키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지키지 말라.’라를 지켜버리면 이것을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너는 이렇게 못하는 존재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찌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다니엘이 판도라상자, 열어서는 안 되는 뚜껑을 연 거예요. 그러면 다니엘이 그 뚜껑 여는 것이 취미입니까? 열고 싶어서 열었습니까? 다니엘의 특징은 나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요. 자기가 믿음이 좋은 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에게 ‘내가 꾼 꿈을 풀어보라.’고 먼저 요청받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들이 다니엘 말고 다른 신하들이었잖아요. 교재에 다 나와요. 꿈이라는 것은 뭐든지 개꿈이기에 잊으면 그만인데 느부갓네살이 최고로 높은 권력자고 더 높은 권력자가 없어요. 그렇다면 자기가 꿈을 꾸고 난 뒤에 자기 선에서 무시해도 돼요. ‘잊자. 개꿈이라고 여기자.’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인데 느부갓네살 본인은 압니다. 이것은 나보다 더 세신 분이 이 제국과 나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서 꾸게 한 꿈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꿈의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나와 관련된 꿈을 꿨는데 그게 감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무실에 회사원들이 죽 있는데 자기가 화장실에 잠간 다녀오려고 나가다가 좀 더 있다 가자, 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니까 직원들이 속닥속닥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속닥거리다가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사람이 등장하니까 갑자기 직원들이 쉿, 쉿, 하면서 서로 눈짓들을 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들어온 사람이 ‘뭔데? 뭔 이야기야?’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해봐라.’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아니야. 분명히 나와 관련되어 있어. 무슨 이야기야?’ 나중에는 막 패고 싶을 정도죠. ‘이야기해라. 할래, 안할래?’ 윽박지를 수밖에 없지요. 그게 느부갓네살의 심정입니다. 못 견디는 거예요. 이게 뭔지 풀어야 되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제국의 미래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풀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왕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기한 내에 이 꿈을 풀지 않으면 너희들 다 죽인다.’ 라고 했어요. 어떤 A라는 사람이 꿈을 꿨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 A의 꿈을 풀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풀 수가 없어요. 왜 풀 수가 없는가? 아까 말한 것을 다시 해 봅시다. I와 ME가 있어요. 이 ME를 뭐라고 했습니까? 사회적 자아(나)라고 했지요. 사람들이 평소에 남과 사귀고 의사소통할 때 본래의 자기(자아 I)를 보여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본래의 자아(I)가 밖에 나올 때는 뭐로 바뀌느냐, ME로 바뀌어서 보여주는 나하고 안에 따로 꼬불쳐놓은 자아가 구분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꿈은 공개적으로 생중계하려고 꾸는 것이 아니잖아요. 꿈꿔놓고 깨어나서 생중계하고,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물론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본다고 그런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꿈꾸면 깨어서 꿈 이야기 해주고 다시 자고, 또 드라마 하듯이 제 12화 이야기하고,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꿈이라는 것은 ME에 속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 속한다? I에 속한 거지요. 내 속에 있는 나가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뭐로 나타내느냐하면 언어를 통해서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이 언어가 순수하게 그 모든 진실을 담아낼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냐, 이 언어를 이야기할 때는 이 사회적자아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던 그 약속체계, 소쉬르는 언어를 약속이라고 했는데, 그 체계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속마음을 끄집어내서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네! 정말 참 좋은데!’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점쟁이들이 ‘저, 왕이여, 말씀해주시면 우리가 풀겠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뭘 말을 못합니까? 말을 해서 푸는 것은 누구나 다 한다는 말이지요. ‘지금 너희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것도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당시의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 당사자도 잊어버린 꿈을 당사자의 자리에서 그대로 꿔서 기억에 담아서 나한테 이야기하란 말이다. 내가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이야기를 못하는 것을 네가 내 대신 내가 되어서 네가 나의 이름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라고 느부갓네살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성경이 쉽다고 했습니까? 과연 누가 성경을 쉽다고 이야기했습니까? 누가 성경을 윤리라고 봤습니까? 이 책을 누가 윤리 책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게 윤리입니까? 이게 허무맹랑이지 윤리입니까? 깡패도 아니고 김정일도 아니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김정일보다 더해요. 애도 아니고 떼를 써도 이런 떼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신하들이 ‘임금님이여,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 때 느부갓네살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박하지요. ‘평소에 너희들이 뭐라고 했느냐? 평소에 뭔가 나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할 때 네 이름으로 했느냐, 아니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나?’ ‘계시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너희가 믿은 신(신의 계시)은 완전히 사기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죽여도 너희는 할 말이 없지? 처음부터 너희는 하나님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라고 사기를 쳐왔기 때문에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다니엘에게 왔어요. 그런데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꿈을 해석해라.’ 다니엘이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시면 합니다.’라는 순간 느부갓네살은 이 문제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본인이 믿고 있던 하나님과 다니엘이 믿고 있던 하나님, 어느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가 결판날 상황에 도착한 거예요. 그리고 만약에 다니엘 쪽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이 제국의 최고 권력자는 자신이 아니고 자기 위에 누가 있다? 자기로 하여금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그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이 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하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하지요. 그래서 다니엘이 그 꿈을 알아냅니다. ‘거대한 나무가 하늘까지 닿는 꿈을 꿨지요.’ 라는 이야기부터 해서 ‘당신은 짐승처럼 살 것이다.’라고 꿈을 해석해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니엘의 말이 아니고 누구의 말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지요.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어요. 다니엘이 꿈 해몽을 해서 그 대가로 다니엘과 유다백성들에게 어떤 혜택 같은 것이 주어졌습니까, 안주어졌습니까? 일체 그런 것은 없어요. 왜 그런가, 교재에도 있습니다만 다니엘은 그저 심부름꾼으로 끝나고 제켜 놔버려요. 그러면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짐승 같은 느부갓네살과 상대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짐승 같은 나라에 복속된 하나의 부분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예요. 짐승의 나라와 하나님과의 정면대결, 이것이 다니엘이에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짐승이라고 규정했지요. 다시 말해서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나라가 짐승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 짐승처럼 살아야 된다는 그것으로 결정이 난 것입니다. 나중에는 거기서 금신상이 나오고 그 금신상이 역사로서 엎어져요.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먼저 있고 그 위에 금신상이 꽈당,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따로 없어요, 금 신상 자체가 역사덩어리인데 그것이 옆으로 누워있으면 앞으로 우리가 닥쳐야 될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라는 터전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 땅의 역사는 무슨 역사입니까? 짐승의 역사, 악마의 역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현재 멸망당해야 될 이 땅, 옛 하늘과 옛 땅, 짐승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건지는가? 바로 멀리 하늘에 계시는 인자가 오셔서 짐승의 나라에서 뽑는 식으로 구원을 하는데 뽑을 때는 절차가 있어요. 그것을 아까 산출적공정이라고 했는데, 뽑을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았던 공생애를 되풀이해서 적용시키면서 메시아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뽑습니다. 콩 나물 시루에서 그날 하루치 먹을 콩나물을 쏙쏙 뽑듯이 인자가 뽑는 거예요. 뽑을 때 짐승의 권세, 짐승의 권력에서 뽑기 때문에 그 뽑는 힘은 근거가 반드시 메시아도 짐승의 힘에 복속되어야 되고 짐승의 힘으로 눌려서 지배를 받아야 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힘으로 뽑혀 나오게 된 그 힘을 가지고 다시 그것을 적용시켜야 무사히 뽑힐 수가 있습니다. 이미 죽음과 죄와 율법을 이긴 그 능력이 동원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짐승의 나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 사실을 다니엘 70이레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계시가 어떻게 70이레가 되는가, 왜 60도 아니고 66도 아니고 78도 아니고 하필 70이레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70 그리고 그 다음에 붙어 있는 것이 뭐지요? ‘이레’지요. 70×이레지요. 여기 이레는 7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7이라는 것은 산술적으로 1, 2, 3, 4, 5, 6, 그 다음에 7이 돼요. 그러면 6이 없으면 7이 없고 5, 6이 없으면 7이 없고 4, 5, 6이 없으면 7이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1, 그리고 그 다음에 7 그러면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1, 2, 3, 4, 5, 6, 7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7 앞에 숫자가 없으면 7이 없겠지요.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시간적요소가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순서에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본 겁니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러면 A에서 바로 D로 가는 것은 없고 B, C를 거칠 때만 이 D라는 것이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시간적인 요소가 인간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 7이라는 것은 그 앞에 1, 2, 3, 4, 5, 6이 있어야 7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라고 본겁니다. 왜냐하면 1 다음에 2가 있는데 그 2는 1+1이예요. 3은 1+1+1이 3이 되는 겁니다. 7은 여기에 1이 몇 개 들어갑니까? 일곱 개 들어가지요. 그러면 7의 요소를 분해해보니까 뭐만 있어요? 역시 1(하나)만 있지요. 그러니까 앞에 1, 2, 3, 4, 5, 6 없어도 1만 있으면 7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없어요? 1만 있어도 7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7을 하나로 취급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방식이 되느냐, 창세기 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지요. 7일 만에 창조하니까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참 재주도 없다. 시시하게 그게 7일까지 필요한가? 나 같으면 이삼일 만에 하겠다.’라고 하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했을 때 ‘신이 천지를 하루 만에 다 창조 못하고 7일이라는 유효기간이 있어야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인간들의 오해가 되는 겁니다. 이 7일 창조가 기간으로서의 7이 아니고, 그 7은 결국 한 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7이 되는 거예요. ‘여기 뭐가 있다, 여기 뭐가 있다, 여기 뭐가 있다.’는 존재를 깔아놓는데 시간이 그만큼 걸렸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만큼 무능한 분이 돼요. 하루 만에 그것을 다 못 깔고 7일 걸려서 깔아놓는 거예요. 술집에서 일하시는 여자분들 손님 없고 심심할 때는 화투를 깔잖아요. 오늘은 패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서 화투를 죽 깔아놓잖아요. 하나님이 그걸 한꺼번에 할 능력이 없어서 ‘아이고, 오십 견인가? 어깨아파서 못하겠다. 첫날은 그냥 빛만 만들자.’ 이런 식으로 생각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7일은 그것이 아니고 이렇게 피라미드처럼 마지막 하나를 지향하기 위해서 밑에 배치되어 있는 순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집결되기 위한 삼각형 구도로서 7을 만든 거예요. ‘빛이 있으매’ 그 빛을 바탕으로 그 다음날 궁창, 그 다음에 땅과 바다, 나흘째는 해와 달과 별, 그렇게 계속해서 피라미드의 꼭지 점까지 가보면 창조주가 있지요. 그 창조주를 묘사할 때 어떻게 묘사합니까? 무엇을 지켜라?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표시하라는 거예요.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예요? 예수님이죠. 마지막 6일째 뭘 만들었습니까? 사람을 만들지요. 사람도 결국 밑에서 받치는 단계가 있어서 그 위에서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사람이 마지막 단계가 아니고 그 위에 누가 계십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계시고 사람은 그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되는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되 그 전에 밑에 뭘 만들었다? 6일이라는 천지창조를 다 한 거예요. ‘천지창조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해서 모든 피조물과 예수님을 순서로 엮이게 하지요. 윗선으로 엮이게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사르트르나 하이데거처럼 ‘나는 여기 존재한다. 그걸로 끝.’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유 있어서 만들어졌고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이 앞에 두 사람 목적이 없는지 어디로 가버렸어요? 이유 있어야 되고 목적이 있는 거예요. 왜, 먼저 나신다는 것은 ‘나 때문에 너는 뒤에 태어나야만 하는 거야.’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위해서 나 섬기라고 일부러 너를 만들어 놓았어.’ 그런 의도가 강하다는 말이지요. 16절에 보면 뭡니까?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것들이 다 최정상에 있는 분을 위해서 다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7일 창조라는 것은 인간들 보기에는 하나의 1, 2, 3, 4, 5, 6이라는 기간이 소요된 것 같지만, 이런 인간의 수평적인 시간적 요소, ‘주님이 참 어지간히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라는 시간적요소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무엇 때문에? 왜 만들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7일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7일 창조의 의미를 되풀이되는 안식일 법을 통해서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과 연계되라고 만들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7이레든 62이레든 1이레든 다 누구와 연관되어야 합니까? 당연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7일 완성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해야 그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구약의 늪이니, 어렵다는 둥, 하지 말고, 모르면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과 연관해서 해석하자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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