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4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13

 

2011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제 4강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리가 있어요. 그런데 호명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기 자리를 호명하신 분의 본래의 자리가 차고 들어오지요. 현재 인간이 자기 이름이라고 우기는 그 자리가 사실은 자기가 만들어낸 자리가 아니고 포대기같이 쌓여 있는 주변의 자기가족과 인물들이 이미 구축해 놓은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 자리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타자, 남을 통해서 울려 나오는 반향, 그 영향을 입게 되어 있지요. 그 영향을 로마서에서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이라고 했지요. 육(肉) 모든 이름은 어디로 모인다? 육이라는 이름으로 전부 다 사라져 버려요. 누구 이름, 누구 이름 해 봐야 모두 다 육이라는 말이지요. 제일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이름은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 이름이지요. 예수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예수 이름 높인다는 말은 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오직 예수이름을 돋보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예수님이라는 분만이 하나님아버지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고 나머지는 하나님아버지와 관련 없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이름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이 자리가 육의 자리인데 누가 이렇게 육의 자리를 형성시키고 영향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영향이라는 것은 힘이거든요, 누가 힘을 제공하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남 없이는, 왜 사람들은 가족 없이는, 부모 없이는, 이웃이 없이는 홀로 괴로워하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서도 진짜 진정한 대화는 자기와 자기하고만 대화하고. 그래서 특정 인물을 호명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지요.

 

들어올 때 무엇으로 들어온다 했습니까? 언약이 들어오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언약은 장차 그 끝에 주의 이름, 주의 자리, 십자가 안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에 이쪽에 있는 인간들은 여기서 하나의 모델로서 이스라엘이 만남이 형성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육이지만 그 많은 육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접촉이 된 육으로서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게 됩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다 마찬가지에요. 불러놓고 하나님께서는 ‘이름 바꿔!’ ‘어떻게 바꿀까요?’ ‘이름을 바꾸는 그것도 내가 정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브람입니다.’ ‘이름을 바꿔. 아브라함으로 바꾸라.’ 그러면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이 곧 언약이에요. 그러면 ‘이 언약을 내가 무슨 수로 이룹니까?’ ‘네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열심가지고 이룬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 그 사람은 곧 자기이름이 주의 이름과 교체가 될 사람이지요. 그것이 바로 성도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 폼으로 봅니까? 성경 보면 그런 사람이 나와 있지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아서 자기 자신이 부인당하고, 내가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은 깡그리 그 의미가 다 상실되고 오직 그 의미를 상실케 하시는 그 영향, 힘, 그 힘을 주신분만 돋보이는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지 않습니까?

 

자기가 용쓰고 떼쓰는 그것은 성도의 삶이 아니지요. 그것은 엉뚱한 거예요. 그 와중에서 육은 육으로서의 자신의 반발력, 자기 자신도 모르는 그 반발력, ‘나는 이 정도 되는데’라는 그 육으로부터 전에 받았던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새롭게 투입된 주님의 언약과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 반드시 뭐가 있겠어요?

 

한글자로 뭡니까? 피, 피가 발생됩니다. 그 피가 바로 그 시대에 그들을 구원하는 언약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냥 피가 아니고 약속된 피 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피는 무슨 피 입니까? 어린양, 어린양의 피지요. 어린양의 피를 온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피 속에 속해 있습니다.’라는 것을 자기를 쳐들어오는, 자기를 심판하러 오는 심판주 앞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피 있잖아요. 우리는 피 속에 있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냥 피 아니고 소위 RH플러스 혹은 마이너스 그런 것이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피,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피가 있잖아요, 라고 하면서 그 안에 있지요. 그 안에 있으면 ‘오, (피 안에서) 얼었네.’ 하고 그냥 넘어가서 피 없는 옆집에 가서 죽여 버리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염두에 두는 것은 뭐냐, 모든 사람이 다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가 누구냐를 찾아내는 방법, 그것이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언약 때문에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인간들 아이디어에서는 안 나오지요.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안 나오지요.

 

모든 것이 완전히 죽음의 세계인데 그 중에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 경우에만 생명을 얻는다는 아이디어가 일반 논리나 수학에 안 나오지요. 그러면 우리에게서 안 나오는구나, 하고 그냥 말면 안돼요. 그게 왜 안 나올까를 따져봐야 됩니다. ‘그게 왜 안 나오는가?’ 하는 그것을 왜 따져야 하느냐하면, 사람은 뭔가 근사한 것이 나오면 그것이 곧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바깥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쪽으로 비켜 세우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한 그 점입니다. 성령 받지도 않았으면서 옆의 성령 받은 친구와 사귀면서 유사성령의 모양새, 곧 성령 받은 흉내를 내는 겁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찾아내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가짜로 성령 받은 사람, 유사복음을 가진 사람은 ‘이제 나하고는 상관없어. 나는 너무 착한 사람이니까.’ 하고 그것을 자꾸 제켜놓는, 모른체 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그러합니다. 박 윤진 성도님이 썼던 글이 나오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것인데 우리는 칭찬해주는 성령을 원하는 거예요. ‘착하다, 훌륭하다, 대견하다, 이제는 혼자 살아도 괜찮아. 율법시대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못했지만 이제는 네 힘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있어.’ 라는 식으로 어깨를 토닥거려주면서 독려해주고 칭찬해주는, 소위 큰 교회 청년부 목사들이 주로 하는 설교, 사실은 모든 목사들이 다 하는 소위 비전을 품으라는 따위의 설교,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라는 용기를 주는 설교 따위가 다 그런 겁니다.

 

일곱 번 넘어져서 매번 일어나고 여덟 번째 또 일어나도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일어난다는 이것이 아닙니까? ‘힘만 주시면 제가 알아서 일어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일어나면 그것은 뇌사상태가 아니지요. 에베소서에 보면 ‘깨어라’하는 그 말씀이 나와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그것은 말씀이 와서 깨워주는 거예요. ‘때가 되매’ 말씀이 우리 전체를 장악하기 때문에 소위 말씀의 좋은 쪽과 나쁜 쪽이 다 해당이 되는 거예요. ‘깨어라.’ 했기에 우리는 깨어났고 ‘너는 빛의 아들이 되어라.’ 했기에 빛의 아들이 된 거예요. 빛의 아들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이제부터 ‘빛의 아들 되기’라고 써서 머리띠 두르고 용쓰고 애쓴다고 빛의 아들 되는 것이 아니고 빛의 아들이라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미 아들 된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빛의 아들 되었구나.’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빛의 아들이 외부에서 말씀이 와야만 가능한가를, 왜 내 힘으로는 빛의 아들이 될 수 없는가를, 왜 우리 힘으로는 어둠의 자식뿐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계속 어둠의 자식이 어떤 짓을 했는지를 알아보는 겁니다. 이미 받은 것이 있기에, 이미 완료이기에 완료 상태에서 그 깊이를 더 하는 것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부정 적인 설교는 그만!’ 이런 소리들을 하고 ‘긍정적으로 나와야지.’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죽음을 앞장세우신 하나님, 그 외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은 피가 되니까. 진도를 안 나간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서론이 벌써 끝났고 지금 한참 나가고 있어요. 8페이지 들어갑시다.

 

그 ‘억울한 피’ 이야기가 8페이지 중간에 보면 나오지요. 

억울한 피들로 인하여 땅이 저주 받으면 

언약적 보호 장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해제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땅은 바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바다에 자리 잡은 ‘무질서’의 세력이 땅을 점령하게 하는 구실이 되고 

그러면 땅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 혼돈을 감당하는 소관은 땅 위의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개입을 하니까 아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벨에게 제사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은 가인이었지요. 가인은 ‘저 동생의 제사는 받아주고 왜 내 제사는 안받아주느냐.’라고 생각한 겁니다. ‘내 제사는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안 받고 왜 동생의 제사는 받느냐.’ 하고 동생의 제사와 자기의 제사를 연결했는데 사실은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제사수준으로 생각을 해서 결국 동생을 쳐 죽이는데 결국 마지막 녹즙기에서 빠져나온 것이 뭡니까? 피죠.

 

그 피를 뽑아내는데 주께서는 앗싸! 성공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의인의 피를 만들어내는데 가인이 말려든 거예요. 가인은 말려들었고 아벨은 가만있다가 얻어터지고. 이것이 안 우습습니까? 이것이 우스운 이야기가 돼야 돼요. 제가 웃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만 세상에서 여러분들 힘들게 하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은 말려든 거예요.

 

‘너는 우리교회에서 나가라.’ 하면서 추방하는 목사, 그런 사람들은 다 말려든 거예요. 우리는 가만있다가 얻어터져야 됩니다. 녹즙기에서 야채가 으스러질 때 야채가 그걸 가지고 슬프다든지 허무하다고 느끼면 안 됩니다. 지금 일 잘 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산출적공정’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려운 말인지요, 제가 추가적으로 관주를 뒤에 달기는 했습니다만 달아놓고 제가 후회했어요.

 

이것이 너무 길어요. 알랭 바디우의 사건과 주체의 관계성을 이야기한 거예요. ‘산출’이라는 것은 뭔가 뽑아내는 것이고 공정이라는 것은 제조과정, 메커니즘을 말한 겁니다. 주체라는 공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주변의 사건이 터진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체가 나의 주체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건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상치도 않는 사건이 터져버리면 거기에 맞추어서 전에 있었던 사건에 의한 내 자아상과 다른 색다른 자아상이 새롭게 뽑혀져 나오는 것을 가지고 ‘산출적공정’이라 한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나는 항상 대기상태라, 또 무슨 사건이 터져버리면 나는 갑자기 어제와 다른 자아로 돌변될 가능성이 항상 농후한 겁니다. 그것도 며칠 못가지요. ‘어머니, 앞으로 제가 공부 잘하겠습니다.’ 그것을 믿는 엄마도 없고 그렇게 말을 해도 당장 잔소리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위장을 할 뿐입니다.

 

진짜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자기가 공부 잘하는 줄 몰라요. 그저 공부하기 바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공부하기 바쁜 애가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어떤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신앙 좋으냐, 하는 것은 이미 신앙이 없는 사람이에요. 신앙 좋은 사람은 그냥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에요.

 

하다가 중간에 쉬면서 ‘신앙이 지금 어디까지 왔지? 좀 더 밀어줘야 되겠다.’ 이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고 그냥 ‘나는 매일같이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이 못났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은혜입니다.’하고 신앙생활 하면 되는 거예요. 자꾸 자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멈칫거리고 스톱하는 거예요. ‘이만하면 되었을까?’ 이만하면 되었으면 어쩔 건데요?

 

‘그동안 마이 묵으따, 고마해라.’ 해서 신앙생활 안하려고요? 좀 쉬었다 하려고요?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다루는, 내 안의 또 하나의 나라는 괴물을 내가 사육하는, 참한 바비 인형을 내가 키우는 이중적인 인격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언약 적으로 산출 공정이 있어요.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정, 옛 피조물을 새로운 피조물로, 의인으로 만드는 공정이 있어요.

 

죄인을 의인 만드는 공정에 뭐가 들어가느냐, 언약이 들어갑니다. 

언약 안에는 뭐가 들어가느냐, 예수님의 한 평생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의논했던 것, 그리고 마지막 재림까지의 예수님의 한평생이 

언약으로 들어가 버리면 

이 죄인이라는 자리에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를 집어넣어요.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말로 표현했어요. 이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성령이 임한 사람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기업을 입을 것이다.’ 했어요. 이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 복이라 했어요. 

복인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 복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약속의 자손이라고 하는 거예요.

 

약속의 자손인데 약속의 자손이 오게 되면 여기에 뭐가 딸려오느냐,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서 기존의 죄인을 둘러쌌던 포대기, 이것은 칸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안 이숙 씨가 말한 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는 그 시간의 박탈, 시간만 박탈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처소도 박탈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제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그 예수님의 공적이 그대로 우리에게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붕 뜬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뭐냐,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점차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객으로 이방인으로 떠돌이로 텐트 생활하는 식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집 팔고 이사 간다고 하지 마시고요, 혹은 집 팔고 렌트 카 빌려서 돌아다니지 말고요, 혹은 한 ○야처럼 전 세계 돌아다닌다고 하지 말고요,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항상 어떤 거처에 있더라도, 그 집이 전셋집이든 월세 방이든 어느 지방에 가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떠날 장소라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땅에서 죽은 자고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고 우리 생명이 있는 곳은 위에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위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적, 예수님의 의가 죄인인 우리에게 들어오지요. 그러면 죄인은 우리 안에 들어온 예수님과의 사이, 묶여진 그 관계에 의해서 의가 됩니다. 의라는 것은 그 사이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죄인이 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의를 소유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이 없어지고 의인밖에는 남지 않아요. 죄인이 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힘과 능력과 관계 속에 묶여져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냥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다.

 

성경구절을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알지도 못 하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 되지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사람 속에 우리가 들어가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예수 믿고 죄 없다고 하면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여전히 예수 믿고도 죄 없는 분은 누구 뿐 이어야 됩니까? 예수님뿐이어야 되지요. 우리는 육이 있는 한 계속 죄가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도구, 시료,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돼지고기가 바뀌어서 돈가스가 되지요. 돈가스 되기 위해서 우리는 돼지고기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더 쉽네. 그런데 돼지고기가 계속해서 ‘나 돈가스죠?’ ‘네가 무슨 돈가스야. 그냥 돼지고기일 뿐이지.’

 

‘그러나 나 없이는 안 되잖아요.’ 돼지고기가 없으면 돈가스가 안 될지라도 어디까지나 죄인으로서 돈가스 되기 위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왜, 돼지고기가 돈가스 되는 그것이 초점이 아니라 죄인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나 참 의롭지, 그지?’ 이런 뜻이에요.

 

‘너 같은 죄인도 구원하는 것을 보니까 나 정말 의롭지, 그지?’ 그런 뜻입니다 . 그걸 영화롭게 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산출적공정이라 합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 같이 만들어내는 그 공정이 있어요. 그 공정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유대인처럼 개혁주의처럼 말씀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예수님의 공생애와 전 생애가 우리에게 그냥 계속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뭐냐, 윤리적인 죄가 아니에요. ‘왜 건방지게 당신이 왜 들어와.’라고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그런데 그 반발이 심하면 심할수록 주님은 더 즐거워요. 그 큰 반발도 이겨낼 때에는, 그 반발 곧 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님의 의는 더 확실해지니까. 죄가 많은 곳에 뭐가 많다고 했습니까? ‘은혜가 더 한다.’고 했어요.

 

이런 말을 하는 사도바울 주변의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산술적공정에 의하면 우리는 더욱더 많은 의를 생산하기 위해서 더욱더 많은 죄를 지어야 되겠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굳이 죄를 짓지 않아도 죄다. 우리가 가만있어도, 숨만 쉬고 있어도 죄다.’ 그 말이죠.

 

‘왜 새삼스럽게 죄를 지어? 가만있어도 죄인데, 착한 일을 해도 죄고 뭘 해도 죄인데.’ 이런 소리를 해서 저나 여러분이나 욕 많이 얻어먹습니다. 모든 것이 죄라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되는데? 말을 좀 해 다오. 뭘 해야 되는데?’ 계속 그 소리만 하면 돼요. 이제 8페이지를 봅시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발생적 성전관의 주체’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발생적’이라고 해놓고 (7)의 관주표시가 되어 있는데 거기를 찾아가 봅시다. 관주가 뒤에 붙어 있어서 약간 불편하지만 그런 수고는 하십시다. 왜 이런 관주를 두었느냐, 이런 논문을 발표하게 되면 이 논문에 시비꺼리가 없는지를 찾아요. ‘발생적’이라는 말을 설명 안 해놓으면 ‘어이, 발생적이라는 것이 뭔데?’라고 시비할까 싶어서 관주를 달아준 겁니다.

 

이렇게 친절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약이 올랐겠어요. 〚‘발생적’이라는 말의 취지는,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방적인 선(先)이해적이고 우월한 의미결정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채 숨겨진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상황을 표현한 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런 말입니다. 내가 편집하고 내가 골라잡겠다는 생각을 추월한다는 겁니다. ‘뒤차가 나를 따라오는데 내가 안 비켜줘야지.’ 하고 있는데 벌써 휙, 하고 뒤차가 나를 추월해서 앞에 가더라는 말이지요. ‘내가 저 사건을 요리해야지.’ 쉽게 말해서 ‘내가 이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야지.’ 하고 있는데 이미 은혜가 내 생각을 추월해서 예상치도 못한 은혜가 왔을 때 그것을 발생적이라고 합니다.

 

발생적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주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고 주체가 ‘나는 이렇게 살 거야.’라는 자기주관이 뚜렷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묵살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발생이라는 말을 한다는 말이지요. ‘나는 이렇게 목회할거야.’라는 교회관이 있었는데 휙, 하고 추월해서 생각지도 못한 교회가 등장할 때 그 교회를 발생적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추월이라는 말을 했지요. 뒷 차가 앞에 가던 차를 추월할 때, 특히 남자가 앞에 가고 있는데 여자가 운전하는 차가 추월할 때 뭐라고 합니까? ‘집에서 밥이나 하지.’라고 하지요. 주체가 주체를 생각하지 않고 있는 상태, 별 생각 없이 그저 이런 저런 생각하면서 운전을 하고 있다가 추월을 당하게 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나는 지금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순간이 되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로 하여금 운전하는 자아상을 유발시켰습니까? 뭔가 추월당하는 발생적 사건으로 인해서 그렇지요. 그러면 그 사건으로 인해서 그 다음부터는 주체가 발생되니까 ‘저놈 따라잡아야지.’ 라고 저쪽과 나와의 도발관계, 경쟁관계에 들어가겠지요. 그것이 발생적사건의 노림수입니다. ‘네가 뭐 점잖다고? 어느 정도나 점잖은지 한 번 보자.’ 하고 휙 추월하니까 ‘나도 한 성질 한다.’ 하면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따라오려면 따라 와봐.’ 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항상 뭡니까? 발생적이라서 우리를 그냥 점잖은 인간으로 두지를 않아요. 약을 올려서 우리를 화나게 만들어서 ‘어찌하여 나에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을! 나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보통 사고 난 유족들 인터뷰하면 그런 소리들을 하잖아요.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고.

 

발생적으로 등장한 일 때문에 점잖은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 ‘나도 파괴당했으니 너도 한번 파괴당해봐라.’ 하고 나오지요. 그래서 시체를 붙들고 보상금 더 내놓으라고 항의에 들어갑니다. 이게 뭐냐, 자기파괴가 무엇파괴로? 사회 파괴로 나아가는 겁니다. 내가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그동안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봤는데 기껏 돌아온 것이 자식의 죽음, 가족의 죽음이기에 나의 공동체를 파괴해야만 약간이나마 위로를 받을까 싶어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자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문제에요. 그것을 로마서에서 한글자로 뭐라고 한다 했습니까? ‘육’, 그것이 육이에요. 우리가 육에서 나왔으면서도 우리가 나온 그 동네를 다 몰라요. 그 육의 자리를 십자가마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좀 심했습니다만, 하여튼 어느 마을이나 다 그래요.

 

그 육이 모인 곳, 그게 가족이라는 겁니다. 평소에 아버지의 존재가 무의미했는데 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가 용감하게 배트맨처럼 나타나서 그 딸을 용감하게 구했을 때 비로소 ‘난 가족이 중요하고 아버지가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잖아요. 그것이 몇 달 가겠습니까?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언제까지 까느냐, 그 다음의 발생적 사건이 터질 때까지 만입니다. 그 다음의 새로운 발생적사건, 다시 말해서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새롭게 등장한다면 그때부터 아버지는 남자친구에 비하면 영 시답지 않지요.

 

‘나는 그 남자와 살래.’ 하지요. ‘아빠가 너한테 어떤 아빠냐.’ 하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내 남자친구가 더 좋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 알랭 바디우가 하는 이야기가 “인간의 주체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있지 사건을 해석해서 ‘이것이 나다’라고 완전히 고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주체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주체를 가지고 ‘액체적주체’라고 했어요. ‘주체는 액체다.’ 그릇을 이렇게 기울이면 이쪽으로 쏠리고 저쪽으로 기울이면 저쪽으로 쏠리는 일종의 흐름이에요. 주체는 뭐가 왔다 갔다 하면 달라지는 흐름입니다. 그런 주체를 가지고 누굴 믿어? 하나님? 내 주체 달라지면 하나님도 달라지지요. 예수님도 달라지고.

 

언약은 바로 내 주체를 고정시키는 것이 언약이 아니고 ‘평생토록 네가 어떻게 달라지고 또 달라진다 할지라도 영원히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는데 왜 너는 십자가를 보지 않고 왜 자꾸 왜 확보된 너 자신의 자리만 유지하려고 집착하느냐.’는 말이지요. ‘왜 너의 것만 꼭 쥐고 있느냐. 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너만을 사랑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 말은 ‘제발 너의 너 사랑에서 너를 아예 포기해버려라.’는 것입니다. 이 포기에서 적당한 성경구절은, 물론 모든 성경구절이 다 적당합니다만, 지혜서, 전도서입니다. 중고등부 전도서 하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아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아무리 사람이 죽도록 일해서 돈을 벌어도 결국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간다. 바로 이것이 세상인줄 알아라.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라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 만족할 줄 알았는데 내미는 손이 더 많더라.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써봤자 소용없는 그것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지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서를 붙이고 시작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그 헛됨 속에 인간이 살면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집어넣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지혜는 다 헛된데 헛되지 않은 지혜는 뭐냐, 맨 끝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만은 헛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아, 심판은 네가 달려있지 않고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깨달아라. 그것이 보여줄 수 있는 지혜다.’ 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거기에 없어요. 하여튼 ‘헛된 줄 알면 그것이 지혜인줄 알아라. 헛된 줄 알고 심판 날을 기다려라. 그게 네가 할 처신이다.’라는 것이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솔로몬이라고 하니까 맨 날 돈 빌릴 궁리만 하지 말고 그것이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발생적’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성전 관’이지요. 인간은 주체가 아니고 발생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발생적 주체가 아니고 발생적 성전입니까? 성전은 가건물이지요. 가건물이라는 것은 곧 철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철거대상인데 그 철거대상을 하나님께서 인간 손으로 짓기를 허락했어요. 만약에 가옥이 불타버린다면 그 가옥에 살던 사람들도 같이 불타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외출해 있는 동안 빈집에 불이 났을 때 누가 가슴 아픕니까? 자기가슴이 아프겠지요. 자기가 돈 주고 지은 집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사람 손으로 집을 짓는다는 말은 사람과 집이 곧 동체, 일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는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어디서 나온 하나님이겠습니까? 사람한테서 나온 하나님이겠지요. 그러니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을 내놔야 그것이 가짜다, 라고 볼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려 할 때에 짓게 하는 거예요. 백성들이 왕을 달라 할 때에, ‘네가 왕을 구하는 동시에 진짜 왕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왕 주는 이유가 뭡니까?

 

왕을 줘야 왕을 때리는 것이 곧 누구를 때리는 것이 되기에? 곧 왕을 구했던 백성들을 때릴 수 있는 모델이 되기 때문에 왕을 주는 거예요. 그리고 왕을 저주하면 결국 백성들의 저주가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왕을 버립니까, 안 버립니까? 왕이 그만큼 맞았으면 왕을 버릴 만도 한데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집이 내일 모레 불탄다 해도 자기 집이 항상 아깝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 손으로 나온 것은 절대로 헛된 것이 없고 다 귀한 것입니다. 사람의 손가락은 다섯 개이지만 이것이 아주 길고 길어요. 내 손으로 만든 집이든 교회든 다 아까워요. 아깝도록 주께서 허락을 하신 겁니다. 이렇게 긴 이것 전부 다 부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네 마음대로 사세요.’

 

왜냐하면 우리 자리라는 것은 육이 있는 한 포기를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육이 만들어내는, 우리 살이 만들어내는 자존심은 절대로 확장을 시도하게 됩니다. 확장을 시도하는데 제가 단서를 달았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확장을 시도하는데 ‘항상 십자가로 돌아오시면 됩니다.’라고 했지요.

 

문제는 그거예요. 십자가로 돌아올 때 그냥 돌아오는 법이 없고 그동안 내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을 잘린 채 돌아온다는 거예요. 조금 나와 있으면 조금 잘릴 텐데 많이 나와 있으니까 많이 잘리는 거예요. 다 잘리는 겁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들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의 육은 새로운 전략이 생겨납니다.

 

가난해도 못가고 부자 되어도 못가는 데 이왕이면 부자한 번 되어보겠다는 전략이 나오지요. 그러면 주께서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부자가 안 되더라도 부자가 되려고 하는 그 애는 한 번 써 봐라.’ 충분히 그렇게 하지요. ‘바빠서 교회 못나옵니다.’ ‘알았습니다.’ ‘오후에 문 열어야 됩니다.’ ‘예, 문을 열든지 알아서 하세요. 그냥 원대로 하시되 십자가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험을 해 보면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 번쯤 오다가 그 다음에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다가 나중에는 미안해서 안와요. ‘인터넷으로 듣지요, 뭐.’ 생중계로 설교를 방송하잖아요. 몇 개월 있다가 ‘혹시 생중계 보셨습니까?’ ‘다음에 녹화한 것 듣지요.’ 그 다음에 ‘녹화한 것은 잘 듣고 계시지요?’ ‘바빠서 그것도 많이 미뤄졌습니다.’

 

우리 이 한례 성도님이나 박 온정 성도님이 부지런히 녹취해서 올리면 처음에는 꼬박꼬박 다 봐요. 나중에는 미뤄집니다. 백날 올려봐야 소용없어요. 나중에는 몇 달씩 밀려 있어요. 결국 나중에는 아예 올라오는 그것마저 귀찮게 여깁니다. ‘왜 자꾸 올려서 숙제를 만드나?’ 합니다. ‘시간들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이렇게 자꾸 올려서 뭘 어쩌라는 거야? 나중에 보기는 다 볼 건데…….’ 그렇게 나와요.

 

아직 발생적 사건이 안 터져서 그래요. 발생적 사건이 터져야 돼요. 잘릴 때 마다 화내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공들였는데!’ 하고 잘릴 때 마다 화내게 되어 있어요. 결국 다 잘리게 되면 밀고 당기고 잘리고 하는 그 모든 것과 관계없이 이미 십자가 안에서 동결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 성경속의 현실이 진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아, 성경이라는 것이 나와 상관없지 않고 실제로 날 가지고 만들어낸 실제 사건’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성전을 구상했고 그 아들인 솔로몬이 그것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 다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아, 이 성전 얼마 못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전이 깨어져서가 아닙니다. 성전을 지을 때는 자칭 순수한 마음이에요.

 

부흥사 꾐에 속아서 성전 짓는다고 목요일 저녁에 목돈 낸 사람들, 그 때는 누가 뭐래도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한 거예요. 그렇게 순수했으면 그 돈은 주님의 돈이라고 했으면 그 다음에는 사기꾼 목사가 와서 다 가져가도 아무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내가 낸 돈을 네가 왜 가져가느냐.’ 하고 따질 때 이미 발생적 사건이 벌어졌어요.

 

순수하게 여긴 그것이 그 사기꾼목사가 나타나기 전에는 계속 순수했어요. 그런데 그 목사가 와서 ‘이게 웬 눈먼 돈?’ 하고 가져갈 때, 갑자기 누군가 그렇게 추월하면 ‘손대지 마. 내꺼야.’ 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 말 오랜 만에 다시 합니다. ‘진리란 위반을 통해서 윤곽이 드러난다.’ 그냥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누가 그것을 건드리면, 위반하면 ‘뭐가 진리지?’ 하고 새삼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성전이란 그런 것입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해놓고 불태움으로 말미암아 성전이라는 그 목재건물, 기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 애 닳아 했고 성전자체가 있음을 축복의 증거로 삼았던 그 모든 허위적인 신앙, 헛방신앙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멋진 시료, 실험실의 재료로써 성전이 필요한 거예요.

 

나중에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도 멸망하지요. 진도 나가봅시다. 11페이지를 봅시다. 성전에 애 닳아 하고 성전에 애착을 갖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의 신앙이 무엇 중심이었다? 성전 중심이었다. 성전 중심이었는데 왜 성전중심이냐? 다윗이 승리했기에 다윗언약대로 했기에 성전중심이었어요. 성전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왜, 성전에 누가 계시기에? 성전에는 주의 이름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거할까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전쟁하기 위한 기능이 이름입니다. 그게 어디 나올까요? 출애굽기 15장에 나오지요. 그들이 홍해를 건너왔을 때 ‘주의 이름이 용사시라.’고 했습니다. ‘쓸 만한 용사 하나 우리에게 장착 되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이 거하는 것은 우리 이스라엘을 넘보는 자들은 전부 다 그 이름이 알아서 나서서 물리치실 겁니다.’라는 신앙심이 유대와 이스라엘에게 있었어요.

 

북쪽 이스라엘도 그 신앙심을 갖고 있었는데 여로보암 왕이 성전에 못가도록 막았어요. 단과 벧엘, 북쪽과 남쪽 끝에 단을 여호와의 대체물로 세워놓았지요. 그 종교를 가지고 정치적 종교라 합니다. 정치 아래 있는 종교입니다. 종교는 허락하되 정치가 허용한 만큼 허락하겠다, 이것이 중국에 있는 기독교, 소위 삼자교회(三自敎會)라고 합니다.

 

저는 삼자교회라고 해서 처음에는 갑, 을, 병, 이렇게 삼자가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하는 줄 알았어요. 공산당 밑에 있는 기독교와 천주교예요. 중국공산당만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요.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명대사가 왜 중복 벗고 머리에 띠를 둘렀습니까?

 

왜적을 물리치는 그것이 불교를 살리는 것이라고 봤지요. 불교 내부에 자체적으로 진리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진리를 동결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의 힘이라고 본 거예요. 이 진리를 내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겠다는 겁니다. 진리보다 더 센 것이 뭡니까? 권력이죠. 진리보다 더 센 권력을 갖고 있는 그 체계를 가지고, 여러분이 들어봤습니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우리교회는 복음이 필요하다. 왜, 그래야 교회가 되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만약에 그 진리가 교회를 부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정신머리가 교회에 가 있으면 진리는 그 아래에 놓이게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육이 갖고 있는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누가 다니는 교회입니까? ‘나’라는 육이 주인공이 되어 있는 교회잖아요.

 

남의 교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교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옛날에 있었던 그 이스라엘의 행태는 왜 있느냐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 동결되어 있는 감춰 있던 우리의 진면목이 그런 식으로 프리즘처럼, 파노라마처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가 성경전체를 통해서 다 나와 줄 때 그 사람은 성경전체가 다 자기에게 적용되는 사람이에요.

 

‘나는 육이 아니고 영이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을 더 해봅시다. 남쪽 유다가 말하기를 ‘북쪽 이스라엘은 망해도 우리는 안 망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주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것은 성전이 아니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으면 안 돌아가실 것인데 어디를 건드렸습니까? 성전을 건드린 거예요. 금강산 관광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것을 가지고 저 평양의 김일성 제단을 뒤엎어 버렸어요. 그것은 즉각 체포되어서 즉각 사형 당하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한 예수님을 지난주일 설교에서 세 글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위반자라고 했지요.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자신도 예수님처럼 위반자가 되겠다는 말이고 그렇게 위반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위반자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위반자예요. 예레미야 선지자 다음에 나오는 선지자가 우리야 입니다. 예레미야는 포로 잡혀 가다가 천사가 와서 뒤로 돌아 갓, 해서 도로 돌아온 사람이고 우리야선지자는 죽었어요. 모레 수요일에 설교하게 되는 예레미야 26장 본문에 나옵니다.

 

선지자가 죽었는데 죽었으면 뭐가 나오지요? 피가 나오지요. 주님께서 앗싸! 하고 성공한 거예요. 의로운 피가 또 나온 거예요. 예레미야 당사자는 답답합니다. ‘주여,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환경이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녹즙기에 들어가게 되면 녹즙기에서는 즙만 빠져나오면 녹즙기 기능은 제대로 발휘된 겁니다.

 

참 살벌하지요. 참 냉정하고 냉혹합니다. 이것이 피조물 된 팔자입니다. 그 피조물 되기를 싫어해서 같이 합세해서 따먹은 것이 뭐냐, 선악과입니다. 이미 선악과는 따먹고 피조물이라는 현실은 안 바뀐 채로 피조물에서 벗어난 양 행세하고 돌아다니는 우리의 모습,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DNA.

 

그래서 성령이 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에 부딪히게 되고 또 대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착각 속에서 내 중심으로 ‘나는 안 죽어야지.’하고 살고, 그렇게 죽 살면서 죽 가는 거지요. 이렇게 성전이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깨어졌으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로 가느냐, 그 문제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성전에 있다고 했는데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가느냐, 날라 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전에 예속 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 손으로 만든 성전을 부수어 버리고 이제는 부서진 그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님의 자기성전을 만들어내는데 그 묵시적인 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모음, 종합이 70이레입니다. ‘7+62+1’ 기간이 아닙니다. 이렇고 이런 사건들이 모아져야 비로소 이제는 사람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영원한 처소가 되고 다시는 불사름이 없을 겁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보석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장의 내용이 그 이야기입니다. 점심 먹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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