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겨울수련회 (7강)
자,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70’이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이레’라고 했지요. ‘이레’라는 것이 어디에 나왔는가? 7일 천지창조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7은 결국 한 분이, 한 분을 위한 세상이란 것입니다. 한 분을 위한 세상 안에서 이제 그 한 분의 하실 일이 다니엘을 통해서 공개되는 그런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7년은 7년이 아니고, 인간들이 보기에는 7년이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창조가 7일이지만 7일을 7일로 보면 안 됩니다. 만약 7일에 천지를 창조했다면 이런 반발이 가능합니다. “나 같으면 1일 만에 다 만들겠다. 왜 7일이나 걸려?” 라고.
그러기에 7일을 시간적 간격으로 보지 말고, 그 7일 창조는 한 분을 바라보는 피라미드의 바탕들로 보잔 말이지요. 그래야 안식일을 지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천지는 오직 한 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할 천지 창조입니다.’ 라는 고백이 없이는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우리의 존재 목적은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창조의 유일한 목적과 이유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7일 창조였습니다. 그래서 7일은 7일이 아니고 한 분, 또는 한 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행동입니다. ‘이레’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행동을 ‘70이레’라는 역사적 시간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창조 본래의 뜻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이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래 의도가 ‘70이레’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이 있다고 했습니다. 7 + 62 + 1 이렇게 해서 70이 됩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에 7이 나오고, 끝에 1이 나오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실 일을 70이레를 통해서 보여 준다. 이것은 한마디로 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지요. 핵심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7이레에서 하는 그것을 위해서 여기 어떤 때가 있어요. 7이레의 때가 있어요. 사건이 일어난 때(시점)가 있는데, 이것이 뭔가? 성전이 중건된다. 성전을 재건하는 그런 사건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1이레는 뭔가? 그 중건된 성전이 파괴되는 거예요. 세우고 파괴되고. 지난 시간에 이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현장 검증’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허락한 성전이 어떻게 파괴되는가와 동시에 성전 파괴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추방되고 멸망하지요. 그 땅에는 이제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고 성전이 파괴되고. 그렇다면 모든 사건은 성전으로 출발해서 성전으로 끝나는 사건이죠. 성전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지만 그 성전이 깨어졌다.
그 다음 1이레의 후반에 보면 없던 성전이 다시 영원한 성전으로 세워지죠. 그러면 여기서 중건된 성전이 어떻게 해서 깨어졌는가? 그 중간과정 역시 이레지요. 관절이 2개니까. 7뒤에 관절 하나, 1앞에 관절 하나. 그 중간 62이레는 뭔가 하면, 여기서는 성전이 유지가 돼요. 유지되는데 놀라운 것은 성전을 유지하는 주체 세력이 누군가 하면 짐승들입니다. 성전 세우는 것을 누가 도와줍니까? 짐승의 나라가 도와줍니다. 바벨론이 도우고 메데, 파사가 도와주지요.
그 다음에 깨어지는 것도 누구에 의해 깨어집니까? 짐승의 나라에 의해 깨어지죠. 그렇다면 70년 포로 생활 이전에 이스라엘이 성전을 세우고 그것이 깨어지는 모든 과정을 누가 지배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짐승의 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짐승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짐승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러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나라라고 우기고 있었던 겁니다.
1이레에 도착해서 성전 세우고 깨어지고, 깨어진 것에서 다시 또 두 조각으로 깨어지면 반이레가 되고 다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성전 깨어지고 두 번째 다시 성전 세워지고. 이렇게 되면 짐승의 나라와 관련된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되지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배후에 있는 짐승과 상대해서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런 짐승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짐승의 우두머리 느부갓네살이 난데없는 꿈을 꾸게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다니엘에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그 꿈을 깨닫게 한 겁니다. 그 이후 다니엘이 돌아다니면서 꿈 해몽하는 전문가가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꿈을 해몽해도 다니엘은 역시 무능한 자입니다. 단지 다니엘은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에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초청으로 잠시 끼어들었다가 나간 거예요. 그렇다면 이 ‘62이레’는 어떤 역사가 되는가 하면, 성전을 짓는 것도 악마의 도움으로 지어야 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것도 악마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파괴되는 것도 악마에 의해서이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악마가 하나님의 메시야마저 죽일 때, 그 때 비로소 악마는 자기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이 때 가장 마귀는 마귀다운 거예요.
그렇다면 타락한 천사 마귀의 목적은 뭡니까? 모든 만물은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주를 위해 움직이기에,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마는 악마의 짓을 해야만 되는 겁니다. 악마가 하나님을 배반할 때는 바로 이러한 구조를 목격해서, 나도 메시야처럼 되어보자고 해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처소를 벗어난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가 자기의 처소를 떠난 후에도 결국은 처소를 떠났습니까, 못 떠났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그 성질을 그대로 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더욱 돋보이게, 찬란하게 장식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한 번 피조물은 영원한 피조물. 모든 피조물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 다 동원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왜 70이레인가? 65이레도 아니고 45이레도 아니고 왜 70이레인가? 다니엘이 포로 된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기도한 것이 있어요. 어떤 내용인가 하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에 의하면 70년이 되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다니엘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기도합니다. ‘언제 우리가 죄 값을 다 치르고 돌아가겠습니까?’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70년은 죄 값을 다 치루고 당당하게 흠이 없이 다시 옛날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메시아의 왕국을 이룰 수 있는 그 기간으로 70년을 약속했어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다니엘은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어떤 기도를 했는가? 빨리 70년이 지나서 죄 값을 다 치르고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니 70년은 복역의 기간입니다. 그들은 지금 형무소에 갇혀 있는데(바벨론에서 포로로 있는데) 70년만 복역하면 풀려난다고 생각하고 다니엘은 기도한 겁니다.
그 기도 가운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을 내려주십니다. 70년이 아니라 70이레라는 겁니다. 70년과 70이레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70년은 누가 죄 값을 치러야 됩니까? 지금 이방 나라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값을 치르지만, 70이레가 되면 70이레는 창조주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70년과 같은 구조로 다 죄 값을 치르는 그런 기간이 아니고 그런 사건을 위해서 예비 된 기간이 70이레가 된다고 본 겁니다.
70년은 인간들의 달력에 의한 시간이지만, 70이레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 용서에 필요한 갖가지 일들이 다 일어날 때 그 때 충족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건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이기에 죄 없으신 분이 먼저 죄의 경험을 하고, 그 이후 죄 값이 치러져야겠지요? 여기서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가 하면, 첫째 죄를 경험하고, 두 번째 죄 값을 치르기 때문에 그 죄가 없는 상태가 되지요. 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죄 값을 치를 수가 있습니다.
70년이 되면 죄는 누가 저질렀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지었지요. 그러면 죄 값은 누가 치르는 거지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죄 값을 다 치르면 죄가 없어져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분이 들어와서 죄를 경험하게 되면 70년 복역하고 돌아가 봐야 이것은 의로운 상태가 아니고 무죄 상태이기에 여기서 또 세월이 지나면서 죄를 지으면 또 죄 값을 치러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죄 지은 것은 본인이 죄를 짓고 싶어서 지은 것이 아니고,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세상 신’의 영향을 입어서 죄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었단 말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돌아가 봐야 또 마귀 지배 하에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 없으신 주님이 죄 값을 치름으로 말미암아 죄의 원인까지 다 제거하는 거예요. 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그 근원까지 다 해결하는데, 그 때는 죄 값을 치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죄의 원인(마귀)에게 심판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죄 지을 수 있는 바탕을 아예 제거하는 겁니다. 악마를 처벌해 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배후에 숨어 있는 놈 나와!’ 해서, 처벌해 버립니다.
소위 이런 것입니다. 학교에서 불량 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괴롭혀요. 때려서 돈 빼앗고. 그런데 불량 학생은 원래 그런 짓을 할 학생은 아닌데 알고 보니 학교를 졸업한 깡패 선배가 계속 그런 일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불량 학생을 불러서 ‘앞으로는 그런 짓하지 마라.’ 하고 타이르면 문제가 해결 됩니까? 아니지요. 깡패 선배가 있는 한 이 학생을 그런 짓을 멈출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처음 에덴동산에 침범했던 뱀(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옛 뱀’ 또는 ‘용’이라고 함)과 대결하겠다는 창세기 3장 15절(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우겠다는) 그 약속을 사람은 이룰 수 없어요. 왜? 마귀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여자의 후손이 직접 관여해서 이스라엘 멸망과 더불어 세상을 아예 끝장을 내 버립니다. 더 이상 세상을 지속시킬 이유가 없어요.
여자의 후손이 직접 여기에 개입하시는 겁니다. 직접 옛 뱀, 악마에게 개입하시는데,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는가 하면, 다니엘에 보면, 멀리서 인자 되시는 분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건진다고 나와 있고, 인자의 나라는 영원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실 그분을 ‘인자 같으신 분’이라고 했어요.
이 ‘인자 같으신 분’은 하나님의 보좌에 선재하시는 분입니다. 이 보좌는 하늘나라 성전의 원형입니다. 이것은 사람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 성전의 원형을 어디에 집어넣는가 하면, 7 + 62 + 1에서 마지막 1이레에 집어넣어서 세상을 끝장내는 겁니다.
끝장내는데 ‘인자 같은 분’이 와요. 그러면 ‘인자 같으신 분’이니까 우선 ‘인자’가 있어야겠지요. 그 이후 ‘인자 같은 분’이 하나님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서 폭격기를 보내 마귀를 작살내지 않고 사람 같은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의 튜빙겐 학파에서 많은 뛰어난 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난제가 뭔가 하면 ‘왜 하나님이 꼭 사람으로 오셔야 했는가?’ 하는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오신다면 하나님답게 오시면 되는데 왜 사람이 되어 오셨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질문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하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말이 ‘인자는 선재하시는 분이고,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셔서 심판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이런 분을 메시야로 기다리는데, 예수 당신 구름타고 왔어?’ 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 당신 다니엘 성경 읽어봤어?’ 이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구름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는데 ‘당신은 구름타고 오지도 않았으면서 왜 인자라고 우기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함축시켰어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겁니다. 그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그냥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오시면 되는데 왜 전혀 하나님답지 않은 사람으로 오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 이 문제를 한 번 풀어봅시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묘책이 있습니까? 그냥 하늘에서 심판하시면 되는데 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복잡한 작업(산출적 공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 누가 풀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풀었어요. 어떻게 물었지요? 성경에 풀어놓았는데도 못 찾지요?
사람의 이성으로 시간을 인식하면,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지요. 이러한 시간관으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에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지요.
지금 신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못 벗어나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시간관을 뒤집어 버렸어요. 사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각이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부터 새롭게 출발해요. 그러니까 구약 전체가 로마서 5장의 말대로 ‘모형’이 되고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모형’과 ‘그림자’란 말은, 실체가 아니고 모형물이란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모형 가운데 뭐가 포함되었는가 하면 인간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구약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인간은 유일한 인간의 모형물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짜 아담은 몇 명입니까? 1명뿐인데 그 아담은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 아담은 뭡니까? 예수님의 모형이죠. 첫 번째 아담은 두 번째 아담(예수)의 모형입니다. 보통 첫 번째, 두 번째 중에 누가 더 권한이 있습니까? 첫 번째가 원형이고 두 번째는 복사판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아서 말하기를,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을 복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원형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원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원형이라면 결국 인간은 타락하려야 타락할 수가 없어요. 마귀가 인간은 유혹해서 선악과 타먹어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었어요. 마귀는 좋다고 차질을 냈는데, 마귀가 선악과 타먹도록 유혹한 것과 유혹을 받아 따먹어서 훼손된 선악과 이 모두를 하나님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멋진 모형물로 거듭 태어나게 했습니다. 마귀는 이것을 몰랐어요.
집에서 아이들이 저지레를 해 놓으면 엄마는 얼른 치우지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라는 예술가가 저지레를 해 놓으면 그것은 튀어난 현대미술이 됩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2)”는 말씀이 있지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5-36)”라고 했잖아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그냥 아담(흙)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원형으로 해서 자기를 재 복사할 경우에만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의 자격을 얻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주장을 하면 이런 질문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왜 인간을 공격하는가?’ 라고. 인간이 있어야 인간을 공격하지요.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벌레요 짐승이며 구더기만도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하는데, 호흡하는 코 막으면 죽습니다. 코를 막지 않아도 50년만 기다리면 숨 거두게 되어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숨 거둘 때까지 우리가 한평생 살아온 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하루살이처럼 50년을 살아도 중요한 것은 지난 삶은 사라지고 오늘 하루치 삶만 부여받은 겁니다. 내일 되면 또 몰라요.
저는 가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 있는 줄 착각해요. 그러나 점점 그는 잊혀져 가는 거예요. 잊어지면 없는 존재입니다. 없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그를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이었지 있든 없든 나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모형과 그림자로 기능을 부여받은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대결하면서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할 때, 그 말의 뜻은 ‘너희는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죄를 통해서 탄생했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우깁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어떻게 죄를 통해서 났다고 하는가?’ 이렇게 되묻지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브라함도 모형으로 나와 연결되지 아니하면 아브라함도 없어.’라고 하지요. ‘아브라함도 내 때 보기를 고대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이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자신은 오실 분의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너 누구냐?” 라고 할 때, “내가 누군지는 묻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한 자냐?” 라고 물으란 말이지요. “너는 무엇을 위해서 왔느냐?”를 물어야지, “네가 누구냐?” 라고 단독자로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너를 있게 한 분이 누구냐?” 이렇게 질문을 해야지요. “나는 메시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이 말은, 오실 분을 소개하는 일종의 사회자라는 것입니다. 사회자는 소개한 분이 등장하면 무대에서 내려오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했지요.
그리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고 했지요. 하늘에서 주시지 않았는데 신학으로 뭘 할 수 있다고요? 안 됩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란 모형에 충실해야 되고, 죄인의 모형으로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오실 분과 연계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모형이란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모형은 실체가 등장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하겠지요. 모형이 모형을 설명한다? 그것은 도토리 키 재기지요.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 더 우수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갈라집니다. 그게 바리새인 체제예요. 바리새인 자신은 우수한 하늘나라와 가까운 사람이고, 세리나 창기, 이방인들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비교하는 그 기준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새로운 율법을 산상설교에서 도입합니다. 인간의 기준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거기에서 유명한 ‘명령법’이 나옵니다. ‘명령법’은 “~ 하라. ~ 하지 말라.” 두 가지로 되어 있지요. 이것은 평소 인간들이 행동할 때 뭔가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고, 안 할 때도 기준을 가지고 안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기준 자체를 문제 삼고 등장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뚱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감안해서 만든 기준이죠. 오늘날 교회 목사들처럼. “여러분들 열심히 성경 읽으세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보는데.” 이런 의미거든요. 자기는 할 일이 없으니까 보지요. 바빠 보세요. 못하지.
바리새인들이 자칭 뭐라고 합니까? ‘의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라. ~하지 말라.’를 나름대로 성취해 내고 있고, 바리새인보다 못한 사람은 그 기준에 미달했으니까 자기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 기준을 예수님이 인정해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해서, 일단 바리새인과 한 통속으로 묶어요. 그리고는 새로운 권세로 이야기해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이것 지킬 수 있느냐?” 이 기준에 미달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 앞에 “그러면 누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았습니까?” 참새. 들풀.
우리가 무슨 수로 명령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얼마나 잘 지키면 참새, 들풀처럼 될 수 있을까요? 솔로몬이 입은 옷도 들꽃보다 못하다고 하셨지요. 간단히 말하면 ‘더럽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으로 최고의 디자이너가 많은 고급 옷을 입었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도 더럽다는 겁니다. 잡초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사람은 하나의 모형이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모형과 그림자라면 필히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되시는 분을 만났을 경우에만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이 인식 되겠지요. 그리고 산상설교의 보람은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치고 내려오면서 문둥병자를 만나 지시를 내립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때 문둥병자가 어떤 율법을 지켰습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율법을 지켰습니까? 아니지요. 그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했지요. 그게 뭐냐? 제사장에게 가서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건강하게 되었음을 증거했지요. 하나님의 기적 받았다고 그 증표로 드리는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이게 뭔가 하면,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이룬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누구지요? 예수님.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룹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런 것을 지켰다.’고 이야기할 필요 없이 ‘나는 모형이고, 내 구원의 실체는 예수님이다.’라는 것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모든 명령법을 다 지키는 것이고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니엘로 돌아와서, 다니엘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은 뭘 해야 됩니까? 70년 후에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하지 말고, 앞당겨서 먼저 완성된 분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면 모형과 그림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다니엘이 생각할 것은 70년이 아니고, 미리 완성하신, 그분이 완성하신 70이레가 되겠지요.
70이레는 누가 이룹니까? 인자가 이루지요. 그러면 다니엘에게 이런 계시를 줬다는 말은, 다니엘이 인자 되시는 분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모형을 먼저 보냅니다. 모형 없이는 실체가 안 드러나니까. 모형을 먼저 깔고 나중에 오는 것이 실체거든요.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로마서 5장(14절)에 보면, 모형으로 만들었다고 했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유가 주님의 주 되기 위함이죠. 아까 창조 설명할 때 피라미드 그림으로 설명했지요. 밑에는 창조물이 먼저 있고 위에 창조주가 있지요. 그러니까 창조주가 창조주답게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가 창조주답게 솟아오르는 겁니다.
따라서 모형인 사람이 실체라고 우기는 것을 뭐로 바꾼다? 모형으로 바꾸기 위해서 모형 속에서 자신의 실체됨을 드러내는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20세기 초에 신학자들이 포기한 거예요. ‘하나님은 왜 공개적으로 오시지 않고 숨어 계시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불트만, 몰트만 할 것 없이 다 손 뗐어요. ‘왜 주님은 당당한 모습으로 오지 않고 비참한 모습으로 왔는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습니다. 그 피조물 속에 마귀도 있고 다 있지요. 그런데 이 피조물을 모형으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주님이 모형과 무관하게 오시면 모형과 주 사이에 연계성이 끊어집니다. 예를 들면, 빌딩을 짓는데 어떻게 지을 것인지 설계도를 만들고 모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실체는 양옥인데 모형을 한옥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유사성을 갖추어야 모형과 실체의 관계가 성립 되지요. 그 유사성이 뭐냐 하면,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 역경, 마귀에게 시달림. 이런 모든 것을 친히 체휼하시고, 경험하시고 그것과 연관해서 실체가 드러날 때 앞에 있던 모든 것은 하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주님의 주 되심이 성립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모형 없이는 주 되심이 성립되지 않아요.
방금 이야기한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위하여 앞서서 모형들이 배치된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모든 행동, 공생애에서 매 맞고, 미움 받고, 조롱당하고 이런 모습이 없어야 주가 아니라, 이런 모습이 있어야 주가 주답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신 주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안 흘린 주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피 흘리고, 매 맞고, 배척 받고, 조롱당하는 것이 주인데, 예수야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모형에서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죽음에서 건짐 받았지요.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양의 피가 어떤 효과가 있기에 우리가 죽지 않았을까?’ 이렇게 따질 수 있지만, 이 모두는 모형이고 실체는 처음부터 주님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계획에 따라 먼저 피 흘리는 일(아벨이 피 흘리고, 어린 양의 피를 뿌리고)이 있었고, 나중에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서열상 아버지가 아들보다 높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이 주 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0절에는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 밖에는 관심 없어요. 아들이 주가 된다면 모든 것이 완료되고 완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사람들에게는 안 먹히는가? 사람들은 구체적 인물, 33세 된 예수라는 평범한 청년이 주님이라고는 도무지 상상도 못했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당신은 거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밖에 몰라요. 종교를 불문하고 인간은 출생 때부터 하나님만 섬깁니다.
그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뭘 방해합니까? 33세 된 청년, 진짜 자기 아버지도 무시(“너 어디 갔었니?”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습니까?” 눅2:49)했던 그 예수가 바로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써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4대 성자 중 1명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그러나 예수가 내가 있어야 될 존재의 이유라고 아무도 생각 못했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알 수 없고, 추상적인 하나님만 섬기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 간다는 거예요. 그런 분들에게는 ‘하늘나라 가라’고 하세요. 그들은 ‘아들의 나라’에는 절대 못 갑니다. 그들이 생각한 하늘나라는 지옥이지요.
성경 해석을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목사들이 안 하려고 해요. 왜냐? 손님이 끊어지니까. 손님들이 납득 안 되는 이야기니까. 만약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오직 예수의 영을 받은 사람만 찾게 되는데, 그런 분이 많지가 않아요. 그러니 그런 복음을 목사들이 전할 수가 없지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안 돼도 좋아요. 왜? 여전히 예수님은 주시기 때문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나, 사도 바울의 순교나 모든 순교는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믿으세요.’ 이런 말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는 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복음 전하다가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어요.
저녁 먹고 계속 합시다.
|
첨부파일 : 07강.hwp (56.5K), Down: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