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3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11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c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우리가 성경해석하면서 몸이 있잖아요.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책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우리는 순수하게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왜 십자가로만 이야기해야만 하는지 그것도 십자가와 우리 사이는 사전에 어떤 의논이라든지 사전에 우리가 십자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 어리석은 십자가를 우리 자체에 대해서 나는 이렇다고 규정을 짓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십자가를 배제하고 우리가 순수하게 성경에 다가서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버릇을 갖고 있느냐 하면, 성경 속에서 좋지 않은 나쁜 편과 좋은 편을 나눠요. 성경에 나오는 나쁜 편에는 가룟 유다, 다윗 반대편 사울,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런 나쁜 편과 좋은 편은 사도들이라든지 엘리야, 이사야, 아브라함 이렇게 둘로 나눠요. 악마도 여기 속하겠죠. 선한 천사 가브리엘, 예수님은 이쪽에 속하고.


성경 자체를 둘로 나누어서 악은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하게 되면 나는 선해진다는 의식으로 접근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뭐가 나쁘냐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가 나쁘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다가서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위선이고 위장이에요.


일단 어떤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나쁜 편, 좋은 편을 내가 임의로 나눠놓고 성경에서 나쁜 쪽은 의도적으로 안 보는 거예요. 멀리하는 겁니다. ‘에이 나쁜 놈.’ 착한 것이면 그걸 모방해서 나도 선한 쪽에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고 또 그 사람을 모델로 해서 내가 선하게 접근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선한 쪽으로.


사도 바울도 처음에 사도가 되기 전에는 성경을 그렇게 봤어요. 인간이 순수 그 자체인 줄 알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로마서 2장에서 그런 이야기하죠. ‘유대인들아, 선생들아 너희들이 거짓말 가르치면서 너희가 거짓말하며,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도둑질하며, 간음하지 말라하면서 간음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리고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돼있다 이 말이에요.


선한 것이 무엇이며 악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해서 의도적으로 악 쪽은 거부하고 선한 쪽에 접근함으로 말미암아 내 존재가 보다 선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고 그런 아이디어를 꾸미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이것 자체가 악이란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놀라운 발견이죠.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이렇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준 본래의 취지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진짜 직접 길, 직통 길이 악을 멀리 하고 선을 찾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본래의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가는 회복하는 방식인 줄 알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방식이 아니고 오히려 악마의 노림수며 그것이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갇혀있는 꼴을 더욱 더 갇히게 하는 악마의 나쁜 버릇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이걸 이야기하는데 그 당시 유대사회의 충격이란 말도 못했어요. 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죽이려고 달려들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여기서부터 이런 십자가복음에 철저하지 못한 베드로조차도 사도 바울한테 면박을 받을 지경이었습니다. ‘형님. 그건 아닙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 것은 이해하는데 누구나 그 본성에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이해하는데 어쨌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은 아니올시다.


복음이 아니라면 하나님 영광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오히려 거부하는 그런 쪽으로 계속해서 마구 달려가는 거죠. 마치 귀신 들린 돼지가 바다로 무작정 질주하는 것처럼.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무작정 대가리 처박고 질주하는 그것이 바로 노림수, 악마가 설치한 덫이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개혁주의신학의 풍토 속에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선에 대한 어떤 결벽증 같은 것, 선하지 못해서 환장한 것, 선에 대한 갈급증, 저 사람보다 더 선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데서 오는 열등감 이런 것들이 바로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교회 풍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누가 잘 하나, 잘 하는 게 마귀가 쳐놓은 덫에 누가 더 잘 말려들고 걸려들었는가? 누가 더 심하게 걸려들었는가? 그런 덫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 성화론, 이런 것 지적하니까 저쪽에서 반대로 역공하죠. 십자가 복음의 덫에 심하게 걸린 사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런 역공이 들어왔잖아요. 그 역공이 그대로 기록돼있어요. 로마서 3장에 있잖아요. 그러면 악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하나님 영광이 되겠나? 라는 비아냥거림의 소리를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직접 들었단 말은 복음을 정확히 전했다는 말이에요.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게 되면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필히 그런 역공을 듣는 것이 정상적인 환경입니다.


로마서 6장과 3장에 두 번씩이나 그런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당신 주장대로 당신 논리라면 악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더욱 더 악을 저지르자.’라는 무리들이 많이 들끓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는 필히 나타나야 될 정상적인 부작용들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는 성경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와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런 그림을 그립니다. 자기를 두 개의 껍질로 그려요. 바깥 껍질은 선하고 싶은 욕망, 천사가 되고 싶은 욕망을 바깥으로 보고, 내가 원치 않는 악에서 기피하고 싶은데 그걸 의도적으로 알고 넌 악이 싫지? 싫어. 싫으니까 약 올릴 거야. 악을 멀리하고 싶으면 싶을수록 더욱 더 약을 올리듯이 발작을 하는 속의 악을 진짜 자기 내부에다 장착해버려요. 그리고 하는 말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해요. 곤고한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다. 어디에 갇혀 있느냐? 죄의 권세에 갇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는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죄를 지은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 사실을 날마다 반성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보상차원에서 그걸 상쇄하는 방향으로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방향으로 인하여 죄책에 대해서 면책될 가능성을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은 완벽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김종환 씨가 불러 히트쳤던 노래 [존재의 의미]라는 가사를 보게 되면, 지금은 내가 형편상 너와 살림 차릴 순 없지만 그러나 언젠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역사 속에 never ending story,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나를 좋은 쪽으로 굴리니까 언젠가는 주님께서 나를 반기겠지. 인간들의 근원적인 막연한 희망이잖아요. 미완료 상태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절규라 할까요? 아무리 심하게 악하고 사회를 비난하면서 자기 파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타인 파괴로 나갈 때 이걸 범죄라 해요. 그냥 근원적인 범죄가 아니고 사회적인 범죄, 공동체 내에 피해를 입히는 자기 파괴, 타인 파괴죠.


심하게 자기 파괴를 병행해서 나만 파괴하는 것이 너무 손해 보는 느낌이 드니까 내가 파괴하는 장소에 너도 동참하는 식으로 이유 없이 반항하고, 이유 없이 성폭행하고, 이유 없이 도둑질 하고, 이유 없이 인터넷에 거짓을 유포해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 자기 파괴에서 오는 괴로움을 타인 파괴를 통해서 약간은 보상받으려는 심리. 하지만 이렇게 악한 범죄자도 나중에 피해자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고 방송에 나오죠. 그것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고 이런 게 나옵니다.


왜 사죄하는데? 마귀는 마귀다워야 되는데. 왜 갑자기 색조화장을 하고 난리에요? 왜 갑자기 천사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는데? 조사를 했더니 악할 때는 그렇게 악하더니 이제 와서 왜 피해자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면 그 소리가 당신의 어느 부분에서 튀어나왔느냐? 그럼 그 밑에 잠재돼있다는 이야기에요. 안에 있었다는 말이거든요. 범죄 하기 이전에는 왜 안 나왔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범죄를 통해서 비로소 그것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나 하도 많이 해서 헷갈려서. 산과 골짜기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산이 높은 곳에 자연적으로 골이 깊게 돼있죠.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어요. 이것을 장갑을 한 짝을 사는 게 아니고, 운동화는 한 짝만 사는 게 아닙니다. 두 짝을 한 세트로 사잖아요. 그걸 짝패라 합니다. 다 짝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서로 짝을 찾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주무실 거니까 주무시기 전에 중요한 것 해야 되겠어요. 사람이란 유아들 심리를 연구하던지 가사상태에서 막 깨어난 환자가 자기에 대해서 묻는 게 아닙니다. ‘여기가 어디야? 당신 누구십니까?’ 이런 걸 묻죠. 그건 뭐냐 하면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에게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주변에 있는 그걸 지평이라 하는데 주변에 있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속에서 나는 누구냐를 바라보는 겁니다. 내 주변에 누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김춘수라는 시인은 아내가 죽고 난 뒤에 곧장 따라 죽었어요. 왜? 그렇게 무시했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자기가 잔소리할 사람이 없잖아요. 내가 누구냐를 모르겠어요.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가 짝패로 연결돼있는데 한쪽은 죽음에 빠졌는데 자기는 살아있으니까 자기는 가야 될 곳은 평소의 버릇이 상대방 배우자 있는 곳에 내가 있어야 되는데 배우자 없는 나는 그전에 나는 아니었어요. 배우자 없는 세계에 빨리 따라 죽는 것이 가장 자기다운 거예요. 


자기답다는 것은 김춘수가 이야기했듯이 사람이라는 것은 뭐든지 의미구성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 의미가 있어야 되거든요. 김춘수가 이야기했잖아요. 꽃이 그냥 있을 때는 꽃이 하나의 몸짓이었어요. 누가 봐도 몸짓이었고 꽃이 자기 나름대로 자기 폼을 재고 있는데 내가 꽃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그 꽃과 나는 관련성이 있고 심지어 그 꽃이 시들어 사라진다 할지라도 일년 뒤에서 내 책상 앞에서 ‘어떤 꽃이 있었지. 나는 꽃을 보고 의미를 알았어.’라고 꽃은 사라져도 거기서 채집한 의미는 계속해서 자아에 하나의 요소로서 남아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사람이란 남을 통해서 반향, 메아리죠.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서 자기를 다시 한번 재구성하는 식으로 자아를 정립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애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가 누구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 할머니. 그럼 너는? 나는 몰라. 그리고 내가 나한테 묻는 것은 시간이 흘러야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엄마가 없으면 나는 없는 거예요. 엄마가 시장가면 자기는 우는 겁니다. 빨리 엄마가 돌아와야 자기가 있는 거예요. 엄마가 자기의 대체물이에요.


있다, 없다. 그걸 까꿍 놀이. ‘영구 없다.’ 하니까 애들이 좋아서 웃고 하잖아요. [라스트갓파더] 영화보고 애들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잘된 영화라고 칭찬이 자자해요. 영화 재밌다고 이구동성으로 하는데 어른들은 재미없다고 하는데. 애들이 아직까지 어릴 때 그런 것이 남아있어요. 자아가 굳혀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멋있고,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 겁니다.


골목 끝에는 신비의 세계, 마법의 성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린애들한테는. 그렇게 해줘야 자기 자신을 신비롭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골목 끝에 가면 깡패 있다고 해도 자기는 골목 끝이 자기의 미지로 남게 된 자기의 비전과 항상 거위의 꿈이 아직도 있는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살만한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골목 끝에는 안 나가봤으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아. 끝에 가보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그걸 전부다 내 것으로 내 영역 안에 집어넣어서 나로 하여금 더 아름다운, 내가 그리던, 내가 계산하던 그런 나의 모습으로 하기 위해선 미진한 것을 남겨두잖아요.


그런데 서 장로님한테는 미진한 게 뭐 있겠습니까? 팔십 일곱, 여덟 되셨나? 하여튼 뭐 미진한 게 있겠어요. 구십 되면 나는 꿈을 꾸리라. 그런 것 아마 없을 걸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타인이 있을 때 비로소 2차적으로 자기를 구축합니다. 그런데 여기 타인이 있다는 말은 사람에게 뭔가 그 사람에게 ‘증여’라 하는데 뭘 줄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통해서 받기 때문에 돌려받을 것을 예상하고 뭘 주는 거예요. 이걸 모스라는 인류학자는 그걸 처음에 인류가 어떻게 권력으로 구성돼있는가를 봅니다. 증여의 순환구조. 논리구조에 의해서 주니만 그 주는 것이 언젠가 내게 되돌려 받을 것을 예상해서 주는 겁니다.


아팠던 것, 눈물, 살아오면서 모든 괴로움 하지만 너는 언젠가 이렇게 사랑받을 거야. [시크릿가든]에 보면 나와요. 지금 이렇게 아프고 눈물이지만 자기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서 언젠가 둘이 사랑받을 거야. 그게 뭐냐 하면, 줄 때 그냥 주는 법이 없단 말이죠. 상대방 좋아서 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주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당신을 통해서 내게 알려달라는 식으로 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포대기가 없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요. 주변에서 나를 알려줄 수 있는, 알려 줄 때 지저분한 사람 같으면 알려주지도 않아요. 뭔가 멋있고, 내가 되고 싶어 하고, 내가 먼저 가졌으면 좋았던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에게 뭔가 선물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 속에서 나도 그 사람처럼 되는 그것을 새롭게 구축된 주체 또는 자아라고 합니다.


레비나스란 학자와 미드라는 인류학자가 생각이 좀 다른데 우선 미드란 학자를 보면, I와 me, me를 ‘사회적 자아’라 해요. I는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그런 자아라 합니다.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 되기를 요구하느냐? 그것은 내 바깥에 내놓고 실제로 내 안에 있는 것은 왜 이것이 외부로 확장되지 않느냐 하면, 외부에서 올라오는 시선과 내가 되고 싶은 욕망과 정치적 타협이 일어나요. 내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배려해주면 아버지로부터 용돈 얻어내면서 내가 속으로 하고 싶은 걸 꿍칠 수 있느냐?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자아가 형성돼요. 요령꾼으로.


좀 어설픈 아이는 어른한테 다 들키고, 머리 좋은 아이들은 그게 잘 안 들키고. 노인네의 지혜라는 것은 [시편 속의 그리스도]에도 나오는데 다른 게 아니에요. 남을 속이는데 노련해졌다는 것뿐이에요. 뭐, 선도? 선도는 청소년만 선도하는 게 아닙니다. 육십 되도 선도해야 돼요. 팔십, 구십 되도 선도해야 됩니다. 왜? 더욱 더 노련해지기 때문에. 거의 안 들키기 때문에. 그런데 가끔은 들켜요. 십년만 젊었어도. 젊으면 뭐 할 건데? 나중에 팔십 되면 삼십년만 젊었으면.


A에서 B에게 증여하는 것이 초창기 부족들한테는 단순하게 가지만 이게 근친혼인금지라 해요. 같은 친척끼리는 혼인을 금지하는 것은 다른 부족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그쪽에 딸을 줌으로써 서로가 하나 속에, 하나라는 포대기 속에 서로가 서로의 자기 정체성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회가 복잡하면 A에서 B로 가는 것이 아니고 A에서 C로 가서 B로 가요. 그럼 B는 C를 통해서 A로 간다고. 여기 제삼의 C가 등장한다고요. 사회가 더 복잡하면 A에서 C로 C에서 D로 D에서 B로 이렇게 간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북한이 연평도 쳐들어왔다. 연평도 사람들이 지역작목반에서 연평도 주민들 모읍시다. 왜 모였습니까? 우리 빨리 돈 모아서 총 삽시다. 이럴 수 없단 말이죠. 그럼 연평도 주민은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거는 조상 때 내 땅이니까 돈 모아서 탱크 삽시다. 이런 건 없는 겁니다. 탱크 사는 거야 무식한 부모 속일 때 군발이들이 탱크 산다고 돈 달라 하지만. 그럼 탱크는 누가 사야 돼요? 연평도 주민들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해서 우리를 공격했기 때문에 북한과 관계를 끊어야 되잖아요. 끊으면 다른 관계를 통해서 정치하기 때문에 탱크 살 돈을 세금으로 내는 거예요. 세금으로 내는 것이 제삼의 국가가 등장합니다. 국가가 연평도를 지켜주고 자기는 참게, 고기잡이 하고.


국가란 포대기로서 국가가 있어야 나는 어느 국가에 속합니다.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인 가인이 무서워했던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알 길 없는 곳에 가면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인을 새겨서 함부로 해하지 못하게 하죠. 다시 말해서 너는 이름이 뭐야? 가인이야. 당신이 어디서 굴러온 녀석이야? 너는 나에게 선물 준 적 없고 우리 공동체에 가입한 적도 없으니까 당신으로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기 때문에 때리거나 죽여도 당신은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선배님’ 하고 한 수 접고 기어들어야 되죠. 그 공동체에 가입해야 그 공동체에서 인정을 해준다는 거죠. 모든 인간이란 자아가 그렇게 돼있어요.


바로 이렇게 뭔가 일종의 선물인데 선물이라는 것이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선물, 이러한 선물 속에서 주체는 그 공동체 내에서 임시적으로 나는 이렇다고 하죠. 그런데 내가 주고 싶은 선물, 내가 되돌려 받기를 원하는 다른 공동체가 있다면,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실망해서 미국에 갔다면, 그럼 이 사람은 한국과 미국이 전쟁할 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죠. 한국에서 필요하면 한국 말 듣고, 미국이 필요하면 미국, 중간에 있죠.


어쨌든 간에 인간은 포대기가 없으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이 말이죠. 프로이드란 사람은 부모로부터 이탈하고 난 뒤에 그 부모 자리가 허전하니까 그걸 끊임없이 채워나가면서 사랑받고 싶은 나를 사랑받기 원하는 그런 쪽으로 상대를 엄마처럼 사랑해줄 사람, 나의 본래 자리를 회복해줄 사람을 찾는데 그 찾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 마리아고, 성령이고, 옛사람이고.


종교라는 것은 어릴 때 결핍된 부모의 사랑을 메울 수 있는 대체물로서 사랑의 종교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럼 제 의견은 뭐냐? 딩동. 맞는 말이죠. 왜 맞느냐 하면, 십자가 바깥에서 다 맞다니까요. 십자가 안에서도 맞아요.


어제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안에서 냉동 동결된 상태에서는 이것이 그냥 냉동 동결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이라는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육이 갖고 있던 옛 모습을 완전히 다 다시 한번 비춰주고 또 몰랐던 것까지 다 새기니까 맞는 거예요. 충분히 그 점에 대해서 동의해야 됩니다. 사랑의 결핍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마음에 모자란 자아를 채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만약에 갑자기 돈을 많이 벌었다. 돈이 사랑을 대체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번 순간부터 주님과 하나님과 십자가를 멀리 하기 마련이죠. 새로운 돈이라는 포대기가 있으니까. 그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죠. 부자가 농사가 너무 잘 됐어요. 그게 문제였어요.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워놓고 하는 소리가, ‘내 영혼아.’ 하죠. 이게 누구에요?


인간은 자기 안에 자기를 하나의 애완견처럼 키우고 있었어요. 인간은 남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진짜 인간의 순수 언어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합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봐라. 곡식이 그득하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이거 언제 먹고 죽지.’ 인간은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참고사항일 뿐이에요. 이것 알게 되면 부부관계 소원하다. 아내와 남편이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다 참고사항이고, 자식이 부모와 이야기하는 것도 참고사항이에요. 잘 들으세요. 여기. 사실은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치적 타협을 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용돈 생기나? 아빠한테? 요새 아빠 돈 없다 하더라. 엄마한테 타 쓴다 하더라. 할 수 없지 뭐.’ 만날 아빠는 엄마한테 ‘아이고. 이 화상아. 돈이나 벌어오지. 집구석에 앉아서 빌빌 돌아다니고. 어디 가서 돈이나 좀 벌어 온나. 미치겠다.’      이게 내가 내 영혼한테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영혼한테 하는 것이 돈 된다고 그걸 컨셉으로 잡은 것이 컴퓨터게임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자기한테 집착하는 거예요. 밥 먹으라고 소리도 안 듣고 거기다 집착하는 거예요. 자기 속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놓고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예요. 이게 악한 놈은 죽고 나는 어디 속한다? ‘나는 터미네이터. 적들아 오라. 죽인다.’ 컴퓨터게임에 빠지는 겁니다. 남자들은 직장인들은 술로 보내고, 애들은 컴퓨터게임으로, 여자들은 수다로 보내고.


여성들이 연예기사 보는 것은 반드시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보는 겁니다. ‘저것도 연기라고.’ 누구하나 나오면 뿅 가요. 원빈인지, 현빈인지. 아저씨, 뭐. [아저씨] 영화를 못 봤다니까 난 그걸 티비로 봤는데 그 영화를 보게 되면 아무 대사도 없고 그냥 원빈만 나오면 와~ 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머리 이러면 와 하고, 깎아도.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전부다 가는 거예요. 송승헌 나오니까 숯 덩어리 해서


이게 바로 인간은 자기 속에 자기를 다룰 수 없어요. 그걸 곤고한 존재라. 곤고한 존재란 말은 그냥 살짝 불안하다는 게 아니고 갇혀있다. 어떻게 자기한테도 못 빠져나오는 주제가 누굴 믿어? 뭐, 예수? 십자가? 그건 프로이드의 말이 맞아요. 그냥 자기 안에서 그걸 녹아버린 거예요. 바깥의 진짜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라는 언어를 사용해서 평소에 자기 욕망에서 그리고 싶은 이미지와 결부시킨 겁니다. 예수님은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노래 부르고 울고 은혜 받았다 하고, 돌아서서 싸우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여기 선과 악이 분명히 있어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 있어요. 그것이 한꺼번에 다 들어와요.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이 안에 다 들어온다고. 그러면 우리는 죄에 갇혔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죄에 갇혔다고 죄에서 못 빠져나온다고 곤고할 때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걱정하지 마. 너는 말씀에 갇혔어.’


애초부터 말씀에 갇힌 게 정상이고. 왜? 말씀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 창세기 1장의 원리를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된 거예요. 갇혀있기 때문에 빠져나올 것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갇혀있는 그 자체가 인간인 것을 거기서 벗어나면 악마인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갇혀있으라고 만든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담아놓고 있는 껍질인데 껍질이 자기가 내용을 담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탈출 또는 자유. 모든 종교로부터, 모든 미래로부터 모든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으로부터의 자유 그걸 외치면 그게 바로 마귀입니다. 차라리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에 갇히고 용서에 갇힐 때 용서의 그릇이 되고, 긍휼에 갇힐 때 긍휼의 그릇이 되고, 사랑에 갇힐 때 사랑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거의 안 갇힌 존재가 없어. 인간 자체가 처음부터 갇히게 돼있으니까. 문제는 진노에 갇혀있고, 저주에 갇혀있고, 심판에 갇혀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 인간은 어차피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선과 악 어느 한 쪽을 증거하라고 만들어진 하나의 도구들이에요.


탈출을 포기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는 자유라고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게 되면 비로소 선과 악 때문에 그 딜레마 속에서 고민하는 네가 뭘 해도 주의 뜻을 아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독자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경외하고 숭배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바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주님의 자리에 주님의 터에서 인간의 자기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게 또 하나 삐져나온 결론입니다. 여러 가지 결론이 삐져나와요.


설교를 할 때 여러 가지 삐져나오는 결론들이 있어요. 설교할 때는 삐져나온 결론을 미리 알면 같은 본문이지만 오늘은 이 방향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 방향으로 들어가고 방향이 달라요. 다른 방향이 있습니다. 다른 방향에 대해서 십자가의 교류가 되죠.


그렇다면 이제 본론 들어갑니다. 이제 책 교재에 들어가는데 서론 이만큼 해놓고. 들어갔다가 나올 수도 있는데. 다시 정리합시다. 우리는 말씀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될 수 있으면 악 쪽은 안 서려하고 선한 쪽으로 가게 되면 내가 선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보다 많은 영광을 돌릴 것이다. 성경에 하라 하는 게 많으니까. 그것 자체가 주제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지요.


구원이란 외부에서 건져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스스로 탈출하는 것은 유사 구원, 그걸 제는 성대묘사 또는 표절이라 했지요. 나훈아 가수의 모창가수는 나운아 또는 너훈아. 조용필은 조영필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내부에서 유사 천국, 유사 지옥을 만드는데 반드시 주인공은 누굽니까? 자기는 꼭 좋은 자리, 스스로 지옥 가는 사람 없어요. 스스로 천국에 가놓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성령 받아서 구원받은 사람과 성령 사람 옆자리에서 강의 참석했는데 성령을 못 받았는데 옆자리에 있던 동기생, 오랫동안 옆자리에 같이 있는 친구로 살았던 사람이 옆 사람보고 모방해서 만들어낸 복음의 차이점이 있어요. 친구가 구원받으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가까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친구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증여지요. 내가 친밀하게 대하면 그 친밀이 나에게 구원으로 뽑혀 나올 수 있겠다는 그런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구축하려는 그런 시도가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얼굴을 잠깐 보니까 잠 오는 게 아니고 걱정스러운 혹시 내가 유사 복음에 스스로 조작해내지 않았는지, 진짜 성령 와서 하는지 빨리 기준점 찾아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아요. 기다려보세요. 순서가 있지.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여기 말씀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말씀의 주인공이 주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여기 ‘주’는 뭐고, ‘이름’은 뭐냐? 하나님은 뭐고 하나님의 이름은 또 뭐냐? 여호와는 뭐고 여호와 이름은 뭐냐? 여호와 이름과 하나님 이름과 주의 이름과 주와 이름과 그 차이점은 뭐냐? 이 모든 관계는 말씀이 뽑아내는 기능에 따라서 적절하게 이름이 달라져요. 왜냐하면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여기에 유사 말씀, 유사 진리가 있어요. 유사 말씀과 유사 진리 사이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이 전쟁은 나중에 끝에 가면 이 전쟁이 예수님과 누구와의 전쟁이냐 하면, 악마, 악마와 같은 말로 용, 옛 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마나 옛 뱀이나 숨어있죠. 숨어있으니까 이 사람과 예수님이 숨어있는 존재가 돼버려요. 양쪽 다 배후에서 영적으로 숨어있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숨어있었지요.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 계셨지만.


그전에 나타날 때 숨어있는 채로 기능은 벌이는, 보이지 않는 악마가 인간들이 비언약적 행태라면 악마처럼 숨어있는 분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행세할 때 인간들은 누가 너희에게 그런 일을 시키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시켰다고 하는데 악마가 하나님이라고 섬기죠. 비언약적인 하나님이죠. 이걸 우상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도 동원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하셨습니다. 주의 오른편이 계신 분이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하셨습니다. 너희들의 우상은 그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나타난 하나님이 여호와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면, 이 차이점을 언약을 자기가 던져놓고 그 언약을 자기가 회수하는 식으로 성취해나가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주가 되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을 던져놓을 때 그 언약을 만드는 시점이 창세전이 되고, 그 완성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떤 이스라엘도 관여하거나 사전에 타협하거나 사전에 의논한 적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또 주님과 갈라섭니다. 갈라서면서 그 안에 숨어있던 진짜배기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그런 방식이 되는데.


어쨌든 주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언약이라는 것이 이 지상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이 언약이 얼마나 융통성이 없느냐 하면, 이것은 일체 언약성취자가 손대야만 이뤄지는 거예요. 그럼 언약성취자가 누굽니까? 장차 십자가 지실 그분이 언약성취자거든요.


이건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고집인데 쉽게 말해서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열심히 간구한 것은 절대로 안 들어줘요.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우리 사정을 당황하게 만드는 식으로 투입해서 그 구원의 공로가 우리 인간의 이름에게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언약 밑에서 일반 민족이나 이스라엘이나 전부다 언약 안에서는 한 통속이고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서도 이쪽은 버리고 한쪽은 사랑했다는 말은 이것조차도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코스대로 사랑을 주는 거죠. 이스라엘이 착해서, 의로워서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이스라엘 보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소원 이뤄주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맹세한 대로 이루기 위해서 맹세 자체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보조 연기자들 또는 생활연기자라 하는데 인기는 없고 드문드문 소식 들어오는 사람들, 그렇게 보조연기자로 그때마다 하는 거예요. 때로는 악역도 하다가 때로는 선한 역, 보조연기자로 계속 등장하는 거예요.


장차오실 기름부은 왕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보조연기자로 나오는 게 르호보암, 여로보암 또는 여러 가지 보암들. 아사, 요하스, 요시아. 그리고 장차오실 영원한 제사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론, 여러 가지 제사장들, 단명한 제사장들. 그 제사장들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언약에 기여한 것처럼 계속 착각을 하죠.


대구에 있는 남산초등학교 앞에 가면 수정교회,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당회장실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역대 당회장들 사진들이 액자에 붙어있어요. 마치 도열하는 것 같아. 후임 당회장들은 선배님 덕분입니다. ‘이거는 조상님 덕분입니다. 이것은 신한카드 덕분입니다.’ 하는 것처럼.


바로 그러한 존재들은 사실은 전혀 수정교회 단 한 명도 구원되는데 보탬이 없었다는 걸 통해서 보탬을 주는. 아시겠습니까?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숨어있는 주님께서 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거죠.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액자 걸고 하지 마시고. 이 사진에 붙어있는 사람들은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붙일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그것 안 붙여도 다른 방식으로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쓸모 있는 구석들이 있거든요.


전혀 하나님의 언약은 순수하게 자기 손으로 해서 영광 돌리기 때문에 이방전쟁을 하면서도 사실은 내적으로 이스라엘과 같이 동행하는 그들과의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이 전쟁을 할 때 인간의 이름을 부정해서 인간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어서 이름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뒤따라오는 터, 예수 안이라는 자리를 거기다 집어넣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우리 자리의 공교함과 허술함을 그대로 까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자리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름이라는 것이에요. 이름이란 기능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이삭, 이삭의 이름의 뜻이 웃음이죠. 야곱도 필요하고 이스라엘도 필요하고. 에서, 그 다음 에서에서 나온 에돔, 이 모든 나라들이 뭔가 중심 되는 인물 주변에 배치되는 겁니다. 그 중심인물이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호명된 자는 호명한 자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호명을 받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모의고사가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 이름을 불러주죠. 우리 이름을 불러주면서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불러주면서 주의 이름 안에서 더 이상 우리 이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나사로, 베드로, 요한 있지만 그 이름들이 주의 이름 앞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모아져요. 신약에는. 그게 뭐냐? 아담의 이름입니다. 한 아담으로 부르죠. 한 이름으로 불러줌으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의 이름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나는 베드로야. 반석이야. 이런 반석 봤어?’ ‘나는 요한이야. 사랑돼봤어?’ 나중에 둘이 복음을 알게 되면 에브리바디 다같이 우리는 육. 육을 다른 말로 신체, 신체란 정신과 대비 된 것이 신체라면 현상학적으로 보면, 합한 것을 살, 개그우먼 이영자가 ‘살아, 살아, 내 살아.’ 하는 그 살. 인간의 살의 특징은 뭐냐 하면, I(나) 또 me 사회가 어떻게 요구하던지 간에 또는 내 욕망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나의 살, 나의 육은 내가 손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특징이에요.



이 특징 아시고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c.hwp (55.0K), Down: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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