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8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19

 

2011 겨울수련회(8강)

 

자, 시작합시다. 여러분 표정들이 왜 그래요? 잘 이해 못하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제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을 자세히 해야 될 대목인데 약간 빨리 넘어간 부분이 있었습니다. ‘왜 인자되시는 분이 구름타고 안 오시고 초라한 모습으로 왔는가?’ 하는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어요.

 

이스라엘의 죄를 참여해야 되는 인자. ‘현장 검증’이란 말을 제가 했는데,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빨리 지나갔고, 그 뒤에 하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 예언했는데 왜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지 않으시고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다니엘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는 그런 일을 합니다. 다니엘을 인자라고 하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대변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뭐라고 기도했는가 하면, ‘70년만 끝나면 우리는 돌아갑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죄 지은 것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값을 치르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라고 기도한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하지만 70년만 끝나면 우리는 죄 없는 상태에서 다시 고향으로 복귀할 수 있겠지요?’ 라고 기도하게 되지요. 여기서 다니엘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죄 값을 치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지만 다니엘이 이야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 수준이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런 수준의 죄고, 그런 수준의 죄 값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기를70년 만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네 복역의 때는 70이레가 되어야 끝난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70이레에서 ‘이레’는 뭐라고 했습니까? 창조주의 기능을 보여줄, 창조주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그러한 시간이란 말이지요. 다니엘이 70년이면 끝난다고 생각한 여기에 그대로 복사해서 70이레를 덮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70년 입장에서 봤던 죄와 죄 값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70이레가 들어가 버리면 죄의 문제를 새로 규정해야 되고, 죄 값을 치르는 방법도 전혀 달라집니다.

 

1년, 2년, 70년 이것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년) 대신 ‘이레’ 하나님의 묵시적인 기능이 추가되면 죄와 죄 값도 이 역사란 지평 위에서 새롭게 규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기 인자 같은 분이 곧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인자와 관련지어서 카피(복사)해서 인자의 그 죄와 죄 값이라는 그 바탕,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자격으로 여기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죄와 죄 값은 어떻게 치르는가 하는 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성경의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자기 이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누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살했습니까? 이런 것이 참 어렵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때 주위에 예수님을 판 사람도 있고, 재판장에 의해 사형이 선고 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있고, 군병들이 동원되어 예수님을 죽였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동원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배치된 사람인가 하면, 주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사람입니다. 이 말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스스로’는 사람들로부터 떠나서 혼자 행하는 것인데, 여러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연장을 손에 쥐도록 해서 못도 박고, 창으로 찌르게도 하고 그렇게 해서 운명하셨는데 ‘나는 스스로 죽는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사전에 자신을 죽이는 일에 대해 로마 군인들과 협의를 했습니까? 그런 것도 없어요. 인간은 인간대로 놀았고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하셨는데 결국 전체 구조로 보면 인간들은 예수님 스스로 죽는데 동원된 조연(혹은 엑스트라)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인식함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 속에 들어오셨고, 스스로 죄 값을 치른 겁니다. 이 ‘스스로’ 하신 것이 바로 고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스스로’를 오해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나는 스스로 밥을 먹는다.’고 했을 때, 내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서 입에 넣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스스로’에 견주어 보면 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동원해서 죽으시면서 ‘스스로 죽노라.’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무엇을 의도하는가 하면, 현재 죄와 죄 값에 대해서 그 대상이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스스로 죄와 죄 값을 짊어진 것이 됩니다.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누가 구원 받을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죽으시고, 차후에 성령을 보내주실 때는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습니다.’ 라는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만이 처음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나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줄 알았어. 그 죽음은 내 죄를 위한 죽음이야.’ 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십자가를 예상했다든지 주님의 십자가는 나와 관련 있다고 예상한 사람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누구를 구원할지, 누구를 버릴지 이 모든 것의 결정은 오로지 예수님의 권한이 되지요.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작전을 펴신 겁니다.

 

왜 십자가의 논리를 그렇게 어렵게 몰고 가는가? 다니엘을 보게 되면 1290일, 한 때 두 때 반 때, 메데. 바사의 전쟁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 많은 이야기를 한 마디로 하면 ‘이스라엘은 고난 받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는데 그 고난의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반 이레’입니다. 1이레는 7년이고, 반 이레는 3년 반이죠. 3년 반을 풀이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 그리고 1290일이 됩니다.

 

이 ‘반 이레’는 이스라엘이 고난 받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290일 동안 고난 받고 이방 민족에게 시달린다는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이것이 분명히 70이레와 연관이 있을 텐데. 만약 이것을 풀이하지 않으면 70이레의 설명이 온전치 못하고.

 

여기서 이스라엘이 고난 받는 것이 스케줄에 나와 있어요. 70이레를 이루는데 반드시 거쳐야 될 절차입니다. 반 이레 때 고난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고난 받게 되어 있는 이야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70이레로 보는 것이 아니고 70년으로 보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고난 받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구원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다 그렇지요. 마지막 때 예수님 오시기 전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인데 그 환란을 견디고 이기는 사람만이 구원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러면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 받아야 구원 받습니까? 다니엘에 보면 ‘고난 받는 자만이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십자가도 믿고, 고난도 받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천국 가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70이레를 다루면서 이런 대목을 거론한 이유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공로만으로는 미흡하고 내가 직접 고난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학생들이 봉사활동 하면 내신 성적에 보탬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대학에서 입학 조건으로 수능 점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 성적도 본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 시켜야 대학에 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로 온 사람은 전부 다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편하게 해결하면 이렇게 돼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고난 받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보니 예수 믿는 사람 맞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고 외치다 보니까 주위에서 이단이라고 핍박을 하니까, 아하 이것이 3년 반 동안 받는 고난이구나. 그래서 예수님 공로로 구원 받는 것도 맞고,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그런 결과가 주어지니까 우리는 고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묻지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는데 아무 고난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칭찬 받으면서 죽는다면 이 사람은 내신 성적에서 고난의 점수가 반영될 길이 없겠네요?

 

이 문제 해결에 힌트를 드렸어요. 뭐냐 하면, 70이레로 때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만 알 수 있지요. 그러면 70이레로 오든 뭐로 오든 사람들은 70이레를 설명 못하니까 무엇으로 대신하는가 하면, 70 x 7이라든지, 아니면 다니엘처럼 70년으로 계산해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490년으로 설명하든 1290일로 하든 인간의 시간으로 해석할 때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바로 본인이죠.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사람들이 다니엘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시답지 않은 시시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할 그 당시에 4파가 주류로 있었습니다. 에센파, 쿰란공동체, 바리새인, 열심당원. 이 4파의 공통점이 뭔가 하면 ‘다니엘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고난 받는 민족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니까 그냥 고난 받자.’라고 한 것이 쿰란공동체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한다.’ 라는 것은 열심당원이고, ‘우리는 신비주의로 나가겠다.’는 것은 바리새인이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언젠가는 메시아가 알아주겠지’라고 하는 것은 사두개인 쪽이고, 에센파는 수도원 같은 곳에서 도를 닦으면서 따로 떨어져 나가고.

 

어쨌든 그들이 해석하는 한계가 뭐냐 하면, 다니엘처럼 자기가 고난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고난 받아야 된다는 말은, 자기에게 고난을 주는 적이 반드시 역사적으로 존재해야겠지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핍박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핍박을 받아야겠지요.

 

‘여호와 증인’같은 사람들은 핍박 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는 건지 시비를 거는 건지 구분이 안 돼요. CCC같은 경우도 그렇고. 옛날 박사교회에서 시무할 때 젊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자신들은 유랑 선교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찾아왔습니까?” 하니까 “밥 주세요.” 라고 해요. 그들이 당당하게 밥 달라고 하는 근거는 ‘전도자를 잘 대접하면 평안이 있을 것이고, 쫓아내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10:11-15).”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실습을 하러 나왔다는 겁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까 성경 말씀을 모방해서 행동하면 신앙인인 것처럼 보여 약간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에요. 옛날이 이런 경험들 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현재 진행형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역사 속에서 내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하면 증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라고 종교 지도자에게 묻고 싶은 거예요. 티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의 시선을 모아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되고, 확인 받고 싶은 육적인 본성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채색된 겁니다. 여러 사람이 알아 줄 때 비로소 ‘나는 신앙인인 것이 틀림없어.’ 라고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다니엘 해석을 주님이 손대기 전에 인간들이 먼저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왜 주께서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는지 감 잡지 못합니다. 주님이 스스로 죽는데 협조한 사람들이 아까 이야기한 4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난 받음으로 진짜 아브라함 자손이고 구원 받은 사람이다.’ 라는 사람들의 손에 메시아가 죽어요. 희한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을 누가 핍박합니까? 로마인들과 이방 헬라 민족들이 핍박을 해서 ‘맞아. 우리는 고난 받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임 당합니까?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 당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의 성경 해석이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폭로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스스로 죽으심 앞에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겠지요. “우리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네가 생각하는 우상이 뭔데?” “바알을 섬겼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우상인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직 너는 나를 안 죽여서 그래.”

 

예수님을 죽여 봐야 ‘아, 내 자신이 바로 우상이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죄의 개념은, 이방 민족이 섬기는 우상을 섬긴 것이 죄가 아니고,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이미 죄를 물려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겁니다. 이런 소리를 해서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개, 돼지 취급하는 이방인에게 가서 나는 복음을 전하겠다’고. 왜? 지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죄의 개념에 대해서 예수님이 스스로 죽으시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를 알아서, 스스로 예수님에게 합세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육으로 자신들은 ‘우리는 고난 받고 있는 거야.’라고 까불어도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주님! 교회 간다고 시어머니한테 핍박 받았습니다.’ 이것이 고난입니까? 이런 식으로 고난의 흔적을 손에 쥐는 것으로 설명하면, 엉터리 이스라엘이 다니엘에 나오는 고난을 현재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고, 그 오류가 오늘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고난 문제의 오류로 번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다. 고난 받는다. 666. 이런 것이 나오면, “맞아. 이런 고난 가운데서 신앙생활 바로 해야 돼.”라고 객기를 부려요. 집구석에 가만히 있다가 구원 받으면 되는데 괜히 나서서 요한계시록처럼 한다고 발광을 해요. “회개하라. 666을 조심하라.” 666이 뭡니까? 상품 포장지에 찍힌 바코드요? 그러면 자기는 라면 안 사먹나?

 

세상에 어떤 바보 같은 마귀가 사람들이 눈치 채도록 활동합니까? 마귀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보다 수가 높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마귀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요. 훗설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모든 것을 선입감을 가지고 보는데, 그 판단을 중지하고 순수하게 사태 그 자체를 바라보자.’ 라고 했어요. 이것을 현상학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선입감을 가지고 뭔가를 보는데, 그 선입감 빼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자고 했는데,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그것이 불가능해요. 아무리 바닥(근원)을 본다고 해도, 그 밑에 또 바닥이 있어요. 육적인 존재가 마귀를 알아요? 마귀는 우리보다 훨씬 수가 높기 때문에 우리가 지배를 받는 겁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마귀의 정체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도 없는데 우리가 무슨 영적 싸움(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 자신이 하나의 영적 무기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무능성을 고백할 때, 무능성을 고백한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투구가 되고 영적 싸움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내세우면 우리 자신이 영적 싸움의 훼방꾼이 되고 주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고난을 사람들이 다니엘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거기에 보면 마지막 때에 7년 대 환난이 나와요. 7년 대 환난을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첫째 성경은 항상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해야 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그 시점에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그 사건 속에서 사도와 초대교회 교인들은 환난이 있었다. 계시록 기록 연대는 BC70년 이후다. 이렇게 쭉 나오고.

 

그 다음에 상징적 해석을 해야 된다. 왜? 상징적 해석을 해야 해석이 그 당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설명할 수 있는 교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 역사와 상징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자기에게서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해석을 자기가 쥐고 싶은 거예요. 그건 욕구의 발산입니다.

 

아까 바리새인이 행동하는 기준이 있다고 했지요. 그 기준이 뭡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이 기준에 뭐가 빠집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기준에서 빠집니다. 왜? 직접 칼 들고 죽이는 사람만 살인이라고 했을 때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납득이 되는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면 이런 기준을 용납할 수 없지요.

 

이처럼 역사라는 것도 역사를 골라내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이죠. 그런 내용이 이 논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하나의 예를 들면,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역사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 편집하는 그 기준이 자기에게 내장되어 있는 역사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그 역사관은 어디에서 구축된 것입니까? 주변에 있는 남들의 시선과 남들의 의견을 들어서 구축된 거예요.

 

여러분, 사법고시 준비해 봤습니까? 공무원 시험에 반드시 들어가는 과목이 뭡니까? 역사(국사)입니다. 왜 역사를 시험 칩니까? 역사는 정통성이잖아요. ‘너는 미국의 공무원이 아니고 일본의 공무원도 아니고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공무원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됩니다. 대한민국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죠. 진리도 아닌데 왜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내 몸이 대한민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이스라엘을 위하여 살아야 된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그들은 성경에서 뽑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다. 구원을 주실 것이다.’ 모두 뽑아봤자 그것은 자기 몸 중심의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신약에 보면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놀고 있네. 너희들이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쫓겨난 빈자리를 이방인이 차지할 것이다.’ 누가 이야기하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스스로 죽는다는 의미는 뭡니까? 이스라엘 중 어느 인간도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없으면 어느 인간도 다니엘의 70이레를 풀 수 있다, 없다? 못 푸는 거예요.

 

다니엘 70이레를 풀어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래서 구원 받고. 이런 인간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해석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해석도 항상 주의할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고난 받고 환란 받는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환란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재산이 좀 있는 사람, 하루 용돈 100만 원 정도 사용하고, 집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했고, 애인이 비행기 티켓을 못 구했다고 전세기를 보내서 타고 오게 하는 그 정도의 사람이 하는 말이 “여러분, 환란을 받아야 됩니다.” 전세기 보내는데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애인의 환심을 사는데 큰 환란이 있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애인 마음을 얻기 위해 돈 많이 들여서 전세기 보내는 것이 환란이라면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환란과 너무 차이가 나지요. 부자의 환란이든 가난한 자의 환란이든 이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란의 개념을 인간이 자기중심의 환란으로 해석해 버리면 사람 각자가 요한계시록 해석이 다 다르겠지요. 이것이 바른 해석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계시록에 나오는 환란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내 몸이 환란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환란 시켰던 그런 세력들이 비로소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숨어있어서 우리가 도저히 정체를 밝힐 수 없었던 악마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심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한테 없고, 왜? 우리는 십자가 자체를 오해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와서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다고 할 그 순간 비로소 환하게 밝혀지는 주변의 정체들. ‘십자가 피로 모든 것이 완료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 순간 비로소 환하게 밝혀지는 그 주변 인물들. 그 인물들은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서 사전에 어두운 세계에 배치된 사람들이죠.

 

그러면 50년 간 단짝으로 지냈던 친구, 내가 어려울 때 아무 조건 없이 돈 꿔준 이웃, 나에게 유아세례 주고, 아내를 소개해 준 목사 이 모두가 마귀입니다. 모든 육적으로 인정으로 의리로 맺었던 관계가 다 끊어져 버리고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다시 규정되는 그러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의 교체를 환란이라고 합니다. 이 환란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일부러 친구하고 끊어지기 위해서 복음 전한다고 “친구야, 너는 예수 복음 안 믿지? 그러면 너는 마귀다. 너도 날 미워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학입니다. 환란을 손에 쥐고 싶어서, 환란이 있으면 구원 받은 것이라고 확증하고 싶어서 했는데, 환란은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본의 아니게, 원치도 않았는데, 가만히 있는데, 친구가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친구가 하는 말이 “너 요새 교회 다닌다면서?” 라고 말을 꺼내서 십자가 피를 전했고, 그쪽에서 나를 비웃고 관계를 끊을 때 내가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거예요. 주께서 나의 팔을 벌리고 허리에 띠를 붙잡고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내가 환란을 받기 위해서 친구를 약 올리는 것은 내가 한 것이잖아요. 그것은 자기 믿음 있다는 것을 시험하고 싶어서 친구 한 명 이용한 거지요. 특히 가정에서 자녀교육 할 때, 아이가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님 이야기하면 귀를 막고 짜증을 낼 때(제가 어느 특정 가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는 ‘설치라 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부모 자신의 관점에서 믿음이 있는가 시험해서 가만히 있는 아이를 못살게 굴어요. 밥 잘 먹고 잘 크면 됐지요. 천당,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 소관이고, 그 아이가 아버지 십자가 믿는다고 칼 들고 설치면 이것은 환란이지만, 자기가 자식 예수 안 믿는다고 죽일 놈이라고 윽박지르지 마세요.

 

여러분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주님이 알아서 여러분에게 환란 되게 하시니까 괜히 성급하게 환란을 조작하지 마세요. 그것은 표절입니다. 제발 설치지 말고 주님이 일하시도록 하세요.

 

환란이라는 것은, 환란을 줘도 주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환란을 받을 때에 ‘지금도 주님이 홀로 일하고 계셔서 요한계시록에 있는 대 환란의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구나.’ 하고 환란가운데 기뻐하고 찬송하면 됩니다. 이것을 못 참고 자기가 환란을 조작하니 이것이 문제지요.

 

그냥 사시는 대로 편안하게 사세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 더욱 약 올리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는 십일조도 안 하고 마음 편하냐? 한 달째 교회 안 가도 마음 편해?” “마음 편한데.” “어떻게?” “예수님 공로로” 얼마나 편안합니까.

 

성도가 이만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나중에 진짜 극단적인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입장에서도 ‘이 환란을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느 사도가 억지를 부리면서 찡그리면서 복음 전했습니까? 사도들이 인간적으로는 괴로움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주께서 스스로 일으키신 일입니다. 주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이 오면 항상 스스로 나타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십자가의 효과가 전달된다는 사실을 사도들이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준 겁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기 위해 사전에 고넬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준비한 적이 없어요. 베드로에게는 보자기가 내려오고, 고넬료에게는 천사가 와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 했어요. 그래서 반갑게 만나서 복음 전하고 듣고 기뻐하는 이것이 주님의 전도잖아요. 빌립이 구스 내시를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아니죠. 그냥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는데 병거를 타고 가는 구스 내시를 만났고, 그가 이사야 53장 말씀을 읽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을 때, 빌립이 그 성경에 기록된 분이 예수님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말씀대로 다 움직이는데 왜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을 합니까? 걱정한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자아가 생각한 자기만의 영역을 따로 구축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주께서 말하는 우상이고, 그것이 다니엘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죄를 모르니까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고안해 내는 죄 값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이것이 십일조도 될 수 있고, 40일 금식도 될 수 있고, 성경 기록하기도 될 수 있고 --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죄 값을 치르려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가 죄 값을 만들어내서 자기가 생각하는 죄 값으로 죄를 상쇄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미션]이라는 영화에 보면 절벽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를 달고 올라가요. 왜? 자기가 사람을 죽였기에 스스로 죄 값을 치르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의 인간들이 아이디어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죄를 판정하고 스스로 죄 값을 치르면 주님이 십자가는 왜 졌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 죄 값을 치르는 그들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자기가 스스로 죄 값 치른다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너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하니까 그동안 자신이 고생하고 투자한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소리 한 사람을 핍박하고 싶지요. 그 때가 바로 7년 대 환란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환란이 오게 되어 있어요. 기쁨으로 복음 전하면 환란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때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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