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5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15

 

2011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제 5강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11페이지의 주의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성전 깨어지는 이야기가 등장하느냐, 그 이야기를 시작할 참인데요.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이 있는 그 성전이 깨어지면서 성전이 깨어진다고 이야기한 그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이었지요. 다윗 언약이 성전에 있다고 우겼던 그 이스라엘 혹은 유다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뭐라고 했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안계시다는 말이냐? 그러면 다윗언약이 무효로 끝나버리는 것인가? 우리가 있어야 다윗언약이 성립되는데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흐지부지되었다는 말인가? 선지자 당신이 대안을 제시해봐라.’ 이렇게 하니까 선지자가 하는 말이 ‘그냥 잡혀 가거라. 잡혀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방법이다.’라는 겁니다.

잡혀가는 것, 성전은 불타버리고 이방민족에게 이 언약민족이 잡혀가는 그것이 언약의 성취방법이다, 라는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 접어버리고 모조리 절에 가는 것이 언약의 성취방법이다, 라는 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이 있어야 제사가 성립되고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의 모세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데 그런 기회마저 박탈시켜 버리고 ‘성전도 없다, 제사도 없다, 그리고 그 위험한 나라에 가봐야 여호와 종교라는 것을 섬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메시아가 올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이야기죠.

그러면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가 ‘너희가 하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안 받았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 드리는 쪽에서 ‘달라면서! 제사하라면서!’ 그렇다면 선지자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제사를 한다고 했지만 제사 하라고 시킨 것은 제사하는 그 행위와 너희들의 마음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 제사를 시킨 것이다.

제사를 드리면서 마음은 엉뚱한데 가 있고 금식하면서도 마음은 오락에 가 있는 이중적인 숨어 있는 너희의 비언약적인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전복을 시킨다는 이야기예요. 전복(顚覆), 조개종류가 아니고 안의 것을 겉으로 겉의 것을 안으로 뒤집는다는 말입니다. 뒤집어 버릴 때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을 제사하고 섬기고 기쁘게 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건진다는 것은 부도수표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서도 찾을 수도 없지 않느냐, 선지자 당신의 대안은 무엇이냐, 라고 묻게 되지요. 그러면 선지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물론 본인의 의견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야기하는데, ‘너희들이 포로 잡혀가게 되는 그 앗수르 바벨론 나라도 사실은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너희들을 다루는 하나의 몽둥이와 작대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너희들이 그 나라에 잡혀갔다가 다시 나올 때는 이 여호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져서 나오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여호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애초부터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동안 너들이 설쳐대다 보니 그것이 가려져 있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인데 이 하나님의 손길과 경쟁적으로 인간이 제사라는, 종교라는 방법을 동원하다 보니까 이 종교나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고 이 종교행위가 자기구원에 무슨 보탬이 된다고 자꾸 오해들을 한 거예요.

 

그 모든 구조와 체제를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를 가지고 해체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껍데기를 전부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겨버리면 그동안 그들이 제사행위를 하고 예배를 드린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게 뭐냐,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서 비로소 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절에 가면 죄가 안 드러나는데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서 비로소 이런 행위들이 의미 없이 이렇게 예배드리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공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볼 때 그 당시 거짓선지자들의 주장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거짓선지자들이 자꾸만 생각하는 것은 뭐냐, 유다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약속을 믿자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것이 복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 될 리가 없다는 것이고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미가, 하박국, 이런 사람들의 내용은 ‘너희들이 구축해 놓은 신학이라는 것이 곧 죄를 구성한 것이다.’ 그 말입니다. 멸망은 기정사실, 더 나아가서 멸망 당하기 위한 이스라엘, 더 나아가서 멸망 속에서 멸망을 이기고 등장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언약의 속살이 보인다는 거예요.

 

속살이라는 표현은 의존교회에서 배웠어요. 속살, 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은 맛살입니다. 혹은 영덕대게의 속살이죠. 멸망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면 생명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나오는 그 경험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생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라는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과정을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생명이란 말, 구원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말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옛날의 임진왜란 사건이나 세종대왕 탄생사건처럼 혹은 2차 대전의 사건 같은 과거의 일을 책에 봤다는 식의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지지를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지셨습니다. 옆에 두 사람의 강도만 있었을 뿐 거기에 아무도 가담한 적이 없어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마치 자기가 십자가에 올라간 것처럼 여기는 것은, 그 십자가사건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는 그대로 되풀이되어서 언약 적으로 적용된다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 제2 제3의 사건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다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사건이 어떻게 적용되어서 산출적공정이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또 남아있겠지요. 그것이 뒤에 계속 나오는 겁니다. 미리 이야기하면,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계속해서 적용되는 사건이 될 수 있느냐, 임진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오늘도 임진란이 일어나는 일은 없거든요.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런 것은 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잖아요. 5.16사건도 옛날에 있었잖아요. 그것을 기념해 봐야 그것이 5.16은 아닙니다. 괜히 이벤트를 해봐야 그것은 하나의 풍자지 진짜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옛날 사건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사건화가 되느냐 그 말입니다.

 

어떤 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의 모델로 나온 것이 뭐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는데 바벨론 나라가 짐승의 제국이 됩니다. 바벨론 나라가 짐승의 제국인데 바벨론 이후의 메대, 페르사(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로 이어지는 그 것이 어떻게 같은 바벨론제국에 복속이 되고 연속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머리 부분은 바벨론, 다음에 메대, 바사, 다음에 헬라와 마케도니아, 그 밑에 로마, 그 다음에 여타의 나라로 해놓고는 그 금 신상을 넘어지게 하지요. 어찌되었든 바벨론 나라가 그것으로 끝났는데 왜 계속해서 바벨론이냐 하는 겁니다. 무슨 논리, 무슨 근거로 해서 그것이 정당화 되느냐는 말이지요.

 

한번 바벨론은 영원한 바벨론, 자기가 무슨 해병대입니까? ‘한번 십자가는 영원한 십자가가 적용된다.’ 십자가사건은 2천 년 전에 끝난 것 아니에요? 왜 자꾸 십자가냐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니까 ‘거짓말 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가 산다.’ ‘무슨 근거로? 누가 너에게 알려주던가?’ ‘예수님이 직접 알려줬다.’ ‘그러면 당신이 이야기하는 그 고백, 그 복음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빙긋이 웃으면서 단호하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심지어 나조차, 혹은 우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

 

무슨 말이 이런 말이 다 있습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도 저주받는다.’ 그러면 자기가 전한 복음은 자기 것이라는 말입니까, 주님 것이라는 말입니까? 주님 것이라는 말이지요. 복음을 전하는 나라고 해서 특별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했어?’ ‘성도는 모조리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는 경험을 해야 된단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도라면 ‘내가 고백하는 이 것,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고백이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동결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누가?’ ‘성령께서 우리를,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십자가는 한물 간 옛날 사건이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 십자가를 잡아당기는가? 그러면 그 십자가가 죽 늘어나는 것인가?’ 십자가가 늘어났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요, 그것을 좀 정확하게 하면 십자가가 늘어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몸이 전 역사를 다 덮고 있지요. 유일한 주체로서 전 역사를 다 덮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몸이 그냥 몸이 아니고 ‘주’가 되시거든요. 그러면 주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구약의 주,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벌렸던 모든 일들이 주님이 해야 될 기능입니다.

 

구약의 여호와께서 하셨던 모든 일을 주되신 예수님이 행하셨다는 말은 구약 전체가 처음도 주요 끝도 주라면 구약전체, 시간을 통해서 일어난 모든 일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다 실시가 되는 것처럼 오늘날은 예수님의 한 몸에 의해서 전체역사가 주의 이름으로 다 실시가 된다,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전 역사를 다 커버하는, 다 덮는 십자가가 되는 거예요. 사람의 한 몸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면 부활된 시점에서는 십자가사건은 이미 지나가버린 한때의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음, 이제 십자가는 지나갔어. 이젠 십자가는 생각하지 마. 십자가는 잊어버려. 이제는 부활만 남아 있어.’

 

예수님의 몸을 한 몸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그냥 몸이 아니고 무슨 몸으로 한다? 주의 몸으로 올라선 거예요. 주의 몸으로 올라서니까 여기에 있는 몸이라는 것은 구약에 있는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을 품은 몸이 되는 거예요.

 

그 몸은 바로 머리가 되시고 온 천하를 커버하시는 몸이 되고 그 몸 안에는 십자가사건을 전체로 다 적용시키는 겁니다.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없도록 하는 어떤 조치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논리가 신약에서는 되는데 논리가 너무나 복잡하기에 그 근거는 구약에서 가져와야 되겠지요.

 

구약에서 가져오려면 그 준비 단계로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의견이었는가, 다시 말해서 ‘성전 없다. 땅에서 쫓겨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러한 암담한 처지에서 선지자가 유일하게 제시한 대안은 뭐냐, ‘차라리 멸망당하면 그것이 사는 길이다. 차라리 곱게 잡혀가자. 주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단, 몇 년의 기간이 있는데 70년 만에 돌아온다.’라고 조건을 준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이 희망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 어느 인간이 70년 동안 버티고 살 사람이 있습니까? 다 죽지요. 자기는 죽고 자기 후손들이나 돌아오면 자기한테 돌아오는 혜택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 자식을 아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이 내 장례비용 때문에 염려하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마지막 해줄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험에 가입해서 마지막 내가 죽었을 때 장례비용이 한 2천만 원 나오게 되면 ‘아, 역시 죽는 순간까지 장렬하게 죽는 아버지.’ 하고 칭찬을 하겠지.” 하고 보험하나 드는 것 정도는 되지만 실제로 구원문제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문제이기에 자기는 포로 잡혀가서 죽어버리고 나중에 자식들이 돌아온다고 해 봐야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다나라, 이스라엘백성이 점차로 멸망당해요. 그런데 점차로 하나님의 선지자의 계시 속에 ‘멸망당할 때 너희만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도 같이 멸망당한다.’는 아이디어가 삽입되게 됩니다. ‘구원자도 같이 멸망당한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지요. 구원자가 멸망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구원자는 홀로 멸망 안 당해야지요.

 

구원자가 멸망당하면 누가 승리하느냐, 멸망시키는 이방민족이 승리하고 우리는 싹 다 패배인데 그것은 게임 끝이잖아요. 축구 3대0으로 지고 난 뒤에 약이 올라서 퇴장하는 선수들 보고 ‘골목 앞 초등학교에서 한 판 더 붙자.’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FIFA와 아무 상관도 없는 동네 축구가 돼버리는데 의미 없잖아요.

 

구원자가 멸망당한다는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거예요. ‘다 양 같아서 없어졌지만 대신 나는 채찍에 맞고 내가 버림을 당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종이 버림을 당해야 된다는 거지요.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의인이 악인에게 지느냐, 그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이 ‘진다.’는 겁니다.

 

‘지는 것이 이긴다.’는 거예요. ‘왜 져야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지금 메시아 구원자를 붙들고 있는 그 손길이 메시아를 치는 손길 못지않게 더러운 손길이거든요. ‘예수여, 살려주소서.’ ‘놔라, 이 더러운 것들! 어서 놔라.’ ‘아닙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살려주세요.’ ‘저리 꺼져!’ 자기 주제파악도 안된 상태에서 메시아 붙들고 구원받겠다는 시도, 그 시도가 주님 보기에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시도, 종교적 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제자리로 돌아가. (구원되고 싶은 사람들) 손들지 말고! 다 손 내려! 나도 멸망당할 거야. 다 손 내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다 잡혀가게 되지요. 거기서 등장하는 선지자는 여기서 뭘 느끼느냐, 절망을 느낍니다. 이 절망은 메시아가 느끼는 절망을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절망이에요.

 

 

그 절망 중에 하나가 11페이지에 나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합니다. 이때가 저는 참 재미있더라! 다시 설명해보면 선지자가 안고 있는 그 메시아는 사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기 백성이 아는 것과 다른 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살 궁리를 찾는 일반적인 메시아종교, 하나님의 말씀해석은 진짜 메시아한테는 다 거부당하고 사람들이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새로 출발하는 아이디어가 제공됩니다.

 

이사야 7장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분을 메시아라 하라. 그 메시아가 하늘을 덮을 것이며 그 메시아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서 구원한다.’ 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유치원 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애들 중에서 하나 골라서 메시아 시키면 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왜 기존의 아줌마가 낳은 자식들은 다 버리고 처녀가 애를 새로 낳아야 됩니까?

 

그 말은 뭐냐, 기존의 것은 가라는 말이거든요. 기존의 것은 가라, 육적인 것은 가라, 같은 말입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가라.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붙이지 않습니까? 그 임마누엘,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와 다른 아이와 차별화시키는 거예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차이는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잘 알고 있겠지요. ‘그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 남편 되는 내가 관여할 수 없었다.’를 고백하지요. 아기예수 태어나는 일에 요셉은 아예 배제 당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그 아이가 비로소 성경말씀대로 메시아라면 그 다음부터 어떤 육도 그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없다?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그동안 인간들은 믿을 만한 메시아만 성경을 참고로 해서 고대했지 믿을 수 없는 메시아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는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오셔서 구원하시는 능력에 의해서 믿을 수 없는 메시아에게서 나오는 성령에 의해서만 믿어지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완성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많이 들었다는 표정들로 놀라지도 않네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오실 때까지 몇 년이나 기다려야 됩니까?’ 할 거예요. 교회 다녀도 소용없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 안다녀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면 몇 달 기다려야 주께서 오십니까? 몇 달? 몇 년? 그게 70년이라면 우리는 보약 먹어가면서 70년 버틸 사람들입니다.

 

아주 깨끗한 물 마셔가면서 메시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런데 70년이 아니고 70이레입니다. 70이레는 490년이 아니에요. 70이레에서 그 ‘이레’가 뭐냐 하면 사람이 계산하는 이레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준 사건의 단위이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찾아오시면 그 때가 그 사람한테는 70이레가 되고 그 순간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모든 말씀의 성취 성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 성취 성을 한글자로 이야기해서 ‘’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인간이 숫자를 계산하고 율법으로 때를 기다리는 모든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가 다 묵살당하고 그냥 성령이 찾아오면 그 찾아온 그 자체로 완료요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왜냐, 예수님께서 나름대로 구약전체를 다 이루어서 다 이루었기에 생겨난 결과적인 의가 우리에게 의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사건 안에서는 절대로 모자람이라든지 아직 미진한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예수님 재림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미진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달의 앞면이 뒷면이 시간상으로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달은 원래 뒷면이 있어요. 당장 보이는 것은 앞면이지만 로켓을 타고 뒷면으로 가 보면 뒷면이 보일 텐데 그러면 그 뒷면이 보일 때까지는 달의 뒷면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인간 쪽에서는 없는 것이 되는데 사실 보니까 있는 거지요.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은 앞의 십자가만 보이지만 이미 그 안에 포함이 된 상태입니다. 이번에 크리스마스 때 애들에게 종합선물을 만들어서 줬어요. 비닐봉지 안에 여러 종류의 과자를 넣어서 나눠줬어요. 애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랐는데 애가 그것 받고 너무 좋아서 설치다가 소시지 하나를 떨어뜨렸어요.

 

‘아, 소시지가 종합선물 안에 들어 있었구나.’ 그런데 그 애는 소시지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고 젤리 먹는다고 바빴다는 말이지요. 그 소시지가 재림이라면 젤리는 십자가입니다. 같이 들어 있는 거예요. 같이 들어 있기에 십자가를 받는 순간 그것이 종합세트가 되어서 약속한 것은 다 주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모두 다 한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났고 또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몽땅 그 안에서 일어난 일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화장실이 급해서 어떤 건물에 들어갔다. 들어갔는데 옆에 수위실이 있더라. 그래서 뛰어 나왔어요. ‘어이, 그 쪽 건물에 화장실 있더냐?’ ‘아, 내가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깜빡 잊고 그냥 나왔구나.’ 그래서 또 들어가는 거예요. 처음에 건물에 들어가서 화장실에 안 들어갔다고 해서 화장실이 없는 것이 아니고 건물 안에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그 건물 안에 들어왔다, 그 말은 십자가에 들어가서 주님 안에 거처했다는 말은 주님께서 약속한 것이 거기에 다 함께 같은 공간으로 놓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나 챙기고 또 하나 챙기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미완료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미완료라고 하면서 구원이 아직 되었다고 여길 것이 아니고 아직 남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시간에 대한 미완료 때문에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자 어쨌든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선지자 본인부터 하나님의 그 계시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게 11페이지에 나옵니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이런 시간 구조를 지니고 주체적으로 자신을 인식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 맞서서 자살을 시도한다.(욘 4:3)〛

 

또 밑에서 열 번째 줄도 봅시다. 〚‘개혁’과 ‘쇄신’은 사실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이 이야기를 개혁주의신학회에서 했어요. 한 번 해보겠다는 뜻이지요. 개혁주의신학회거든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이 멘트를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개혁과 쇄신은 사실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십자가마을에서 한다면 ‘십자가마을은 사실은 거짓말이요 위선이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왜 개혁과 쇄신이 위선인가?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 층을 생성시켰고 수시로 변화하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뿐이다. 아무리 쇄신해도 몽상에 불과하며……〛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개혁자들이 개혁하려는 그 건더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건더기를 가지고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은 개혁하고 난 이후의 소위 그 나아졌다고 하는 사정은 어느 것과 연결됩니까? 과거와 연결되겠지요. 이게 동질성, 또는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것인데 그 동질성을 유지하겠다고 짜 맞추는 그것은 누구입니까? 인간인 주체지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과거와 내가 생각하는 미래를 연결시키겠다는 주체적이 동질성을 이미 갖고 있잖아요. 이렇게 갖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이것은 과거에다 집어넣고 이것은 미래에다 집어넣어서 그것을 가지고 개혁해야 된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그 미래의 동질성이라는 것이 너 자신이 갖고 있는 주체의 균열된 사정과는 안 맞다는 거예요.

 

잠시 침묵하는 시간? 인간의 주체자체가 균열이 되어있어요. 인간의 다리가 온전하게 연결된 다리가 아니고 끊어진 상태에요. 지금 이 순간과 두 시간 뒤에 나와 연결점이 없어요. 왜, 새로운 사건이 터져 버리면 곧장 수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연결점이 없다 그 말이죠. 귤이 여기 있는데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맛있어요. 그런데 또 누가 떡을 해 와서 떡도 먹고 하다 보면 귤이 별로 맛이 없어요.

 

그러면 엄마가 ‘야, 귤 먹어라.’ 하면 ‘먹기 싫어.’ ‘너는 왜 일관성, 동질성이 없어. 아까는 귤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 떡이라는 새로운 사건이 등장했잖아요. 귤의 맛있던 그 맛이 지금 먹어보면 맛이 없어요. 그러면 동질성이 어떻게 됩니까? 동질성이 없어졌지요. 한결같이 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그때그때 적응하는 거지요.

 

요령을 피워서 그때의 상황에 맞게 적응하잖아요. 그러니까 동질성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주체에서는 다 깨어져서 파편화되어 있어요. 깨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자기가 이 과거를 본드로 붙입니까? 본인자체가 깨어진 상태인데, 깨어진 상태에 뭘 가져다 붙여보세요. 다 일그러지지요. 모든 것이 다 일그러져 있게 되지요.

 

이 이야기가 단순히 철학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 맞서서 자살을 시도한다.(욘 4:3)〛 선지자가 자살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치면 절대로 자살 안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외쳐버리면 그 외치는 내용에 누구도 저촉 받아야 돼요?

 

본인 자체도 저촉 받아야 되겠지요. 아까 한 갈라디아서 1장 8절을 다시 봅시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구도 저주 받는다? 자기도 저주받지요. 그러니까 진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자기가 연구하고 지어낸 것, 자기 삶의 정황(the Sitz im Leben)이나 자기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대로 전하는데 듣는 사람만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오류를 일으켜요? 전하는 본인도 오류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런 예는 교회의 예를 들어야 실감나는데 너무 실감나는 예를 들면 상처 입는 분들 있을까 싶어 겁나서 예를 잘 못 들겠는데……, 빙빙 돌리는 것도 이제 싫고 그냥 실감나는 예를 들어봅시다.

 

지지난 주일에 이상규 집사님께서 저에게 광고해달라고 하기를 ‘예결산 광고를 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러면 계시자가 누굽니까? 이상규 집사님이 계시자가 되고 나는 선지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전합니다. 전하면서 저는 아주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이 예결산 같은 귀찮은 것, 보통은 ‘가하면 예, 하시고……, 목사 월급은 왜 이렇게 많이 올리나, 누가 이렇게 정했나, 당신들 맘대로 정하나……, 선교비 비율은 왜 이렇게 낮은지…….’ 말들도 많고 귀찮습니다.

 

그런데 그걸 광고해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역시 우리교회는 달라. 목사가 간단하게 1분에서 2분 내외로 발표만 하면 끝나는구나.’ 하고 이 선지자가 계시자의 말을 오해해서, 속으로는 희희낙락하면서도 겉으로는 표는 안내면서 ‘신년 예산은 이겁니다.’ 하고 광고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 말은 그냥 속으로만 했지요.

 

‘됐지요? 예결산에 관한 사항은 끝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말씀에나 신경 씁시다. 하여튼 우리 교회는 좋아. 이런 쓸데없는 것은 빨리 처리하니까.’라고 혼자 생각했지요. 그런데 강 장로님이 전달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예결산에 관한 사항을 다음 주에 다룰 거니까 미리 알리라고 한 것인데 깨끗하게 처리했다고 혼자 좋아한 거예요. 그래서 자살했잖아요.

 

이게 바로 요나의 자살이라니까. 왜, 전달자도 못 알아먹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지요. ‘전달자, 너도 알아먹는 이야기를 하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전달자에게도 안 알려주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전하면 40일 만에 망하게 되어 있는 니느웨성이 중간에 회개하면 취소된다는 사실을 왜 하나님은 같은 동업자인데 동업자에게 왜 안 알려줬느냐? 자살하겠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차 올 메시아 되시는 분이 해야 될 일입니다. 주님은 자살은 아니지요. 그러나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요나의 죄를 위해서 주님께서 요나대신 자살 아닌 자실을 스스로 십자가에서 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십자가의 효과가 미리 이 땅에 살았던 요나까지 소급해서 적용시키는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십자가 이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이전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다 적용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서의 몸이기에 그 몸에는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묵시적시간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단위는 일반적인 시간 단위인 년, 월, 일이 아니라 ‘이레’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에요.

 

그 이레를 7로 분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70이레를 70*7=490년, 이런 식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계산하듯이 계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계산하는 것 보면 웃기지도 않아요. 아주 가관입니다. 490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맞추려고 드니까 어릴 때 이불 한 개 가지고 형제 넷이서 같이 덮고 잘 때의 해프닝하고 똑같아요.

 

큰 놈이 이불 말아서 저쪽으로 구르면 이불이 다 그쪽으로 당겨가고 작은 놈이 당겨서 몸에 말면 그쪽으로 이불이 다 가버리고 위에서 당기면 발이 나오고……, 안 맞아요. 안 맞는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이 바로 세대주의, 여호와의 증인, 개혁주의, 이 논문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 하배, 캘빈 같은 사람들 다 그런데 나중에는 신학자들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70이레는 구약해석의 늪지대요 함정이니 손대지 말자.’라고 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저희들끼리 손대지 말자고 해요. 70이레는 손대지 말자고 신약성경에 나오면 우리도 손대지 맙시다. 십자가로 이미 모든 비밀은 다 알려졌으면 70이레는 십자가와 연관되어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숨겨진 비밀은 십자가와 연관될 때 풀리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그들은 역사적 방법으로 풀었기 때문에 이 논문 제목을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고 한 겁니다. 그 신학회의 해프닝이 참 웃기지도 않았어요. 와, 돈 5만원 받겠다고 참! 12페이지 봅시다. 70이레의 역사적 해석은 메시아를 또 죽이고 반대하는 악마적 해석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역사를 붙들어야 돼요. 역사를 붙들어줘야 인간이 자기주체를 포기를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 몸을 위하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몸과 주님의 몸의 대결상태로 몰아넣는 것, 그것은 하나님도 그렇고 마귀도 그러한 전투의 장, 전투의 공간을 예상했어요.

 

마귀도 인간의 몸을 앞장세워서 ‘네가 예수 아니라 어떤 누구라도 네 몸만큼은 포기하지 마.’ 하고 딱 내밀고 그 점은 이미 주님도 아시고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님을 몸으로, 무시할 만한 연약한 몸으로 보내셔서 저쪽 몸에 의해서 쉽게 죽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몸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누가 떠밀었어? 누가 죽였어?’라고 그것을 되묻는, 그것을 어떤 학자는 복수라고 합니다.

 

진짜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죽였다고 해서 화가 나서 복수하는 내용이다, 라고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했어요. 상당히 간결하게 이야기를 잘 했지요. 그런데 그것을 화내면서 이야기 한다는 게 문제예요.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화가 나는 거예요. 왜 화가 났을까요? 아직도 무엇의 가치를 포기 못 하겠다?

 

이런 거예요. 내 몸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내 몸 구원받고 안 받고를 내 몸이 선택하도록 나한테 자유의지를 좀 넘겨달라는 거예요. 내 몸 구원하는데 남이 와서 구원하지 말고 내가 잘 살피고 내가 잘 알아서 물건 살 때 잘 골라잡듯이 ‘아 적당하다.’하고 고를 수 있는 권한의 정당성을 보장하라는 말이지요.

 

아마 천국 문에 가면 그런 플래카드 붙일 거예요. ‘보장하라. 구원의 방식을 보장하라. 우리도 자유의지가 있다.’ 그런 식으로 했을 거예요. 그런 것은 요새 감리교회에서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가 자살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선지자조차도 메시아다, 아니다? 메시아가 아니고 결국 요나 선지자조차도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면 구원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노림수는 우리가 죽기를 원하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알고 죽기를 원하지요. 그렇다면 이 요나 선지자가 자살했습니까? 자살직전에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지요. 개입할 때 죽으려고 하는 요나에게 ‘요나야, 죽지 마.’ 하고 살려냈으면 요나는 고개 푹 숙이고 아무 성과 없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런데 요나를 죽이지 않고 누구를 죽입니까? 박 넝쿨을 시들게 해요. 요나 대체물로 박 넝쿨을 죽입니다. 졸지에 요나는 이스라엘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되느냐, 니느웨 사람이 되어버려요. 요나는 자기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적으로 보였습니다. 왜 니느웨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했을까요?

 

자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라고 우쭐대고 저 니느웨 사람들은 언약이 없으니까 망해도 싸다, 하고 자기는 마땅히 하나님편이고 저쪽은 하나님편이 아니라고 자기중심으로 편 가름을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입장을 바꿔놓게 했지요. 니느웨 사람이 되게 한 거예요. 그냥 ‘너는 니느웨 사람 해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자살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때 니느웨 사람으로 바뀌게 하지요.

 

그러면 니느웨 사람들이 뭘 생각합니까. ‘아하, 하나님이 심판이 왔을 때 은혜 없이는 살수 없구나.’ 하고 짐승들마저 다 회개했지요. ‘은혜 없이는 못산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사는 민족이 아니라 날마다 은혜와 긍휼이 있어야 돼.’라는 그것을 왜 진작부터 이스라엘은 놓쳐버렸느냐는 말이지요. 그걸 빼버린 이스라엘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은혜 받을 필요도 없는 니느웨 사람에게 너를 대신해서 은혜를 줌으로 말미암아 진짜 우리의 본자리, 우리 본래의 자리를 저 멀리 니느웨 성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 요나 선지자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어떤 모습이며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 그 모든 모습을 예수님에게 다 일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약속에 의해서 살리는 거예요. 우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의해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하고의 약속은 없어요. 하나님과 예수님하고의 약속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된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됩니까? ‘이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지요. 그런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뭐냐 하면, 죽어 마땅한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살았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사건은 예수님의 사적인 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나의 몸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효과를 주는 몸이 되었지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고 하고 더 쉬운 말로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는 주님의 ‘사지’라고 합니다. 아주 더 토박이 용어를 쓴다면 ‘뾰루지’ 툭 튀어나온 것, 솟아오름,

 

십자가의 효과가 주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있다면 결국은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우리 머리는 예수님이 되어서 머리에서 공급하는 그 생명의 힘으로 보일러 돌아가듯이 예수님의 피가 우리 인생을 항상 돌아감으로서 그 생명의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사는 것은 네 번 돌아가는 귀뚜라미 보일러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항상 휙휙 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사도바울의 명령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취가 될 수 없고 영적인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주의 말씀으로서 그 말씀이 바깥으로 발산되게 되어 있지요.

 

발산될 때 무엇을 죽이고 발산되는 겁니까? 끓어오르는 옛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꽉 밟아놓고 성령께서 밟히게 하신 그 능력으로 나오기 때문에 나오는 그 열매를 가지고 우리 성도의 열매라 하지 않고 무슨 열매라 합니까? 글자 한자가 틀려요. 성도의 열매가 아니고 무슨 열매? ‘성령의 열매’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열매는 뭡니까? 그 앞에 나오지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그것이 우리의 열매예요. 우리 열매를 십자가에 확 밟아버리고 그렇게 밟았을 때 나오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와 형제우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밟힌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소유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교회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질문하는 그 분의 취지는 그겁니다. 하나교회 지난 모임에서 2부 순서에 참석하신 분이 있었어요.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결국 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목사님의 말이 이해가 되는데……, 하여튼 예수라는 말이 안 나와요, 하나님의 주권입장에서는 이해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말은 또 들었어요, 하나님의 주권입장에서는 이해되는데 왜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를 안 해주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 분 말이 왜 다양성은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조금만 더 내려가 보세요.’라고 했지요. 직업이 뭐든지 자기 형편과 처지가 뭐든지 조금만 내려가 보면 한데로 모인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분이 분이 안 풀렸어요. 결국 그분의 이야기는 가만 들어보니 그 이야기예요. ‘왜 감히 인간을 공격하느냐. 하나님, 네가 뭔데 왜 인간을 공격하느냐.’

 

<왕의 남자> 보세요.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 공격할 필요 없잖아요. 평화로우면 되잖아요.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좋은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주로 천주교교인들이 하는 가게에 현판이나 장식으로 많이 붙어 있잖아요. 동그라미 안에 십자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이 구절을 쓰잖아요.

 

사람들은 평화를 얼마나 원합니까?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서로 공격 안하면 되잖아요. ‘왜 당신은 감히 우리 인간을 공격하느냐, 좋게 지내면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좋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세상 다 좋은데, 그렇게 좋은 것을 알아먹는 우리가 좋은 기분으로 자유롭게 맘껏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면 좋은 관계가 되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인간을 공격하느냐. 동양철학도 서양철학도 다 그런데 왜 공격하느냐.’ 해요.

 

언약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이 피 중심입니다. 자꾸 십자가를 빼버려요. 십자가 없이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십자가 모를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율법에 흠이 없다고, 좋은 관계’라고, 더 나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 봉사하는 더 나은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율법의 흠이 없다고 하는 자가 졸지에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할 때 그것이 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접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중심은 기존의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 몽땅 우상이고 십자가로만 하나님이 자기비밀을 드러내는, 십자가 뒤에만 진짜 계시는 그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에요.

 

십자가로만 계시하는 하나님,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이 와야,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돼야 안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러분이 이 복음 전하시면서 많은 핍박을 받으시면서 ‘아, 옛날에 내가 복음 모를 때, 내가 성령받기 전에 당신보다 더 세게 더 되바라지게 대들었던 사람입니다.’라고 잠시 과거의 자기모습을 감상해보는 그런 서글픔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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