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은 자신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바울 또한 받은 것입니다(고전 15:3). 받은 복음의 내용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이미 기록되고 바울이 그대로 받았다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즉, 복음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 전체입니다. 두 사건을 분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1단계, 부활은 2단계가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완전한 일치를 이룹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은 그대로 부활의 몸입니다.
예수의 몸 안에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된 교회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의 현장 속에서 자랍니다. 예수 몸 밖에서 그 몸과 분리된 십자가와 부활을 자기 몸에 치장하는 자는 성도 아닙니다.
성도의 몸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두 가지의 [나]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 중 하나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도]로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서의 나는 사도됨이라는 나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전 15: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하나님의 원수된 나는 성도됨이라는 나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사도됨과 성도됨의 방법과 자격을 묻는다면, 닥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뿐입니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면, 그 일을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플라즈마가 웅웅거리는 예수의 몸 안에서 성도의 몸은 이렇게 나를 나라고 고집할 수 없는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은혜의 그릇에 담길 내용물, 그러니까 복음으로서 전파되어야 할 내용까지 성경에 의해 선점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고전 15:12). 이 내용을 고전 12장의 하나님의 영이 하도록 하는 말의 내용과 연결시켜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은 그 분이 저주받을 자가 아닌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성경과 성령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면서 이에 관여한 어떠한 육체(사도, 성도 등)도 스스로 자신을 자랑할 수 없도록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성령의 출처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뿜어내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요, 십자가와 부활의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을 세상 속 사도와 성도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맞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고전 2:11).
이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창조사역을 개시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아담을 동원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을 살려냅니다, 창조합니다(15:22). 새로운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재생시킨 것과 같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 속에서 빛이 창조된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15:17) 자들이 예수라는 빛이요 생명되신 분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활의 비밀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으심과 연결된,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바울이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차례]입니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①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②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③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부활의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 열매인 그리스도 → ②그에게 붙은 부활 → ③나중 부활
사도 바울이 부활의 차례를 언급함으로써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첫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입니다. 부활의 차례는 [첫]부활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열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부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첫 열매 다음 부활은 이렇게만 가능한데,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단어가 바로 [붙은 자]입니다. 다음 부활은 첫 부활에 붙은 형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형체 또한 하나님이 그 뜻대로 주신 형체를 입게 되는데(고전 15:38), 그 모습이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 15:49)입니다.
나중 부활은 첫 열매가 모든 정사와 모든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만 완성됩니다. 결국 모든 부활은 첫 열매에 종속됩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부활의 비밀입니다. 성도 개인용 부활은 별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첫 열매에 붙은 자로서의 부활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활의 나라를 바쳐야 할까요? 부활의 예수님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고전 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위 구절의 해석을 놓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힘 센 사람이 힘 약한 사람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 수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됨은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힘센 하나님이 예수님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혹자의 이런 주장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 부자유친의 부자지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세상에 이야기 할 때는, 항상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하십니다. 이 같은 표현은 길, 문,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등 아주 많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결정적 논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본인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장이 어떤 뜻인지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니까 복종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예수님보다 힘센 어떤 존재를 상상하고 그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이름짓고 서열화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지위를 무시하고 예수님 자체를 중간 정류장 정도로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진짜 하나님을 알고 그만을 경배하고 있는 [저주받아서는 안 될 나]를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적당히 얼버무리고 기존 하나님관에 복종시켜버리면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종하는 방법 말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아니요, 만유 안에 계실 수 없는가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을 복종시키는 방법의 특이성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이 자신의 아들에게 복종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심으로 만물은 덩달아 언약에 복종하게 됩니다. 만물이 피언약(새언약)에서 새로 창조됨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창조주가 되시며, 처음 말씀 창세 때와 같이 말씀으로 만유 속에 거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만물의 주되심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주 됨을 증명한다면, 이는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말이 모순되게 여겨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깨끗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익숙한
① [만물 → 예수님 → 하나님] 순서에서 갑자기 낯선,
② [만물 → 예수님 → 하나님 → 만물] 로 배열되기 때문입니다.
①번 배열이 가능한 전제는 [내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만물, 예수님, 하나님을 통섭하려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붙은 자로서 살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은 죽은 자의 관점입니다.
②번 배열에서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시고 만물 안에 거하시는 것이 거리낌 없이 술술 읽히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중간과정]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살해의도에 휘발유를 붓게 한 그 동등됨에 대한 불쾌함이 다시 한 번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를 애써 무시하고, 뿌연 유리창을 걸레로 박박 닦듯이 예수님을 박박 문지르면 그 뒤에 짠하고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심보 때문에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시는 것과 만물 안에 거하시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는 진정한 하나님을 엿보기 위한 사다리가 아닙니다. 그 분이 자체가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붙은 부활, 나중 부활이 완성됨으로써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기존 세상에서 통용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추방입니다. 죄인들이 붙들고 있던 하나님은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교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진정한 하나님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뿐, 다른 존재는 모두 우상이라는 전제하에서, 만일 하나님을 언급하려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복종하는 방식으로만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위 고전 15:28은 십자가로 인하여 만물이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가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창조주도 아니기에 만유 안에 계실 방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숨어있던 하나님,
스스로를 감추어진 자로 규정한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내가 만유의 주이며 이제 만유 안에서 함께 살겠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의 복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통일되고 그 분의 복종하심이 진짜 하나님을 밝혀내는 유일한 요건이라면, 실재 누가 하나님일까요?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십자가 사건)에서 벗어나고자 함은 곧 나는 저주받을 자 아니요, 내가 하나님이라는 우상 됨의 연속일 뿐입니다. 기존 창조주 하나님관의 고집은 결국 십자가 사건을 무시하고 나의 하나님 됨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