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가장 좋은 길-십자가 사랑-고전13장(박윤진)120227

아빠와 함께 2013. 3. 29. 08:08

 

가장 좋은 길 - 십자가 사랑(고전 13장)

 

 

하나님의 영이 성도의 입에 담아 주시는 말씀의 내용을 고전 12장에서 확인했습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저주할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이셨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볼 때 이와 원수되는 인간의 말은 [나는 결코 저주받을 자가 아니요, 내가 바로 주인이며 하나님이다.]라고 정리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창 3장 5절 뱀의 유혹 즉,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가 그대로 적용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성령은 이 고백의 범위 내에서 여러 가지 은사와 직임과 역사를 [같은] 십자가 사건 속에서 펼치고 계십니다. 이 때 성령께서 펼치시는 역사들은 십자가 사랑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과 같습니다. 즉, 십자가 사랑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불쑥 불쑥 피어나고 또 사라지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은 바로 그 십자가 사랑이 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 13장의 전체 구조에서 볼 때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나”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하는 점입니다. 십자가 사랑과 만나 소멸되고 폐하여지는 나에서 출발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온전히 아는 나로 전환되는지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십자가 사랑의 실상이 보입니다.

 

 

고전 13장 1절~3절까지의 주어는 “내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바울은 나로부터 시작한 모든 것의 극한 값을 상상합니다. 말도 인간의 말 뿐만이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합니다. 비밀도 그냥 비밀이 아니라 모든 비밀이요, 믿음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입니다. 구제도 돈 조금 삐죽 내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 극한 값(최댓값)을 너무나 담담하게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최댓값을 깨끗하게 [없음]으로 톡 털어 넣는 외부의 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그 어떤 것도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순순히 무릎꿇게 합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라고 시작한 모든 것은 [사랑 없음]에 매몰됩니다.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밖에서 그렇게 넉넉하게 없음의 자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처절히 인간을 삭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4절부터 8절까지는 사랑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위의 말씀들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 참기, 모든 것 믿기, 모든 것 바라기, 모든 것 견디기가 진짜 사랑이 하신 온전한 것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사랑(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속성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내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나를 죽이지만, 사랑이 주어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를 살립니다. 오직 사랑 안에만 있는 것을 내 안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낱낱이, 사사건건 비교하는 이유가 바로 나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교해서 차이나는 만큼 보충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해서 인간은 가짜였음,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였음을 폭로하시겠다는 살해의도에서 사랑의 속성을 시시콜콜이 적고 있습니다. 죽여놓고 살리시는 방식이 진짜 하나님다움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랑의 살해의도는 유통기한이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죽이시고 살리십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죽이고 살리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령한 것이라 애지중지 하면서 갈고 닦았던 예언과 방언과 지식을 [폐]하여 버립니다. 내가 포함된 우리를 [부분]으로 몰아붙이시는데 이 부분이라는 것은 온전한 것과 비교해서 다소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온전한 전체의 어떤 한 부분을 정당하게 차지하고 있음이 아닙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함의 자리로 쏙 들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제거될 부분입니다. 어린아이의 일처럼 버려져야 할 죄입니다. 용서의 대상입니다. 보충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십자가만 빼버린다면 보충이라는 단어가 더 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는 보충이라는 단어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 앞에서 해야 할 역할은 삭제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한 인간의 최댓값에 해당하는 오래 참음과 온유와 투기 하지 않음으로 성화되기(예수 닮기)를 연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를 통해서 피사랑만을 재차 삼차, 단 번에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나(A)]는 아무 것도 아니고, 폐하여져서 버려지는 나만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고전 13장 12절에 등장하는 [나(B)]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나로서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B) 온전히 알리라

 

 

내가 온전히 안다고 합니다. 당연히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의 [나]는 무엇이냐, 결국 성화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 성도의 삶이라는 것의 목표치를 만난 듯 화색이 돕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서의 나는 [내가 나를 나라고 고집할 수 없는 나]입니다. 즉, 내가 차지했던 주어의 자리를 사랑에게 빼앗긴 후, 그 사랑이 빚어낸 나입니다. 여기서의 나는 내가 뿜어낸 모든 것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알고 있는 나입니다. 이러한 내가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아주 똑같은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B)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A)는 (B)를 소유할 수 없는 나입니다. 왜냐하면 (A)는 사랑에 의해 폐하여진 나이기 때문입니다. (B)는 [주께서 나(A)를 아신 것같이]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B)는 [주께서 능력주시는 자 안]의 그리스도의 몸된 나(B)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B)의 실존은 성경의 또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고후 12장 2절~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B)는 (A)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습니다. 따로 저장해서 기억할래야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조차 중요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왜일까요? 나(A)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아시는 나(B)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나(B)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굳이 나라고 고집할 수 없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시는(아시는) 경우는 없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면 어떻습니까?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는데.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 뭐 어떻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고전 13장의 사랑의 속성을 독차지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알고 사랑하심으로 나는 나만 사랑하는 존재, 즉 죄인으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생명되신 분의 사랑이 없으면 죽은 자로 판명되는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하는 자로 완성됩니다.

 

 

이러한 나(B)와 하나님의 관계는 (A)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친절하게도 두 분 사이의 대화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 12장 7절~9절

바울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 :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참 고약한 하나님과 미치도록 낯선 [나(B)]의 대화입니다.

 

 

삼층천까지 갔다 온 끝발있는 경험을 했는데 그러한 나는 나를 나라고 하지 않고 [그]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그토록 신령한 인간에게 사단의 사자를 보냅니다. 천국 경험과 사단의 사자가 한 몸에서 동거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세 번이나 합니다. 그 대단한 몸에서 나온 기도, 거절당합니다. 거절당한 그 몸의 고백, 미쳤습니다. 기쁘답니다. 그것도 크게 기쁘답니다. 왜 기쁠까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성도의 삶이란 다시 죄인의 괴수의 자리로 기쁘게 첨벙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2장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다시 고전 13장 12절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주께서 나를 아시는 방식, 즉 십자가를 통해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앎은 내가(A) 소유한 앎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하신 영생이 성도에게 적용되기 위한 앎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 안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단 한 걸음도 없는 그 길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가장 좋은 길, 영생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