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17 말씀에 등장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새롭다’라는 것은 무엇과 비교해서 얻은 결과값 일까? 둘째, 피조물이라고 하니 창조주도 있을 터,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주는 새로운 창조주일까, 아니면 옛 창조주와 동일한 창조주일까?
그러나 사실상 위 두 가지 질문은 실타래처럼 서로 뒤엉켜 있는데, 왜냐하면 창조주를 떠나서 피조물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주가 새로운 창조주와 옛 창조주를 분할된다는 생각은 궁극의 일자 개념에 오랜 동안 노출되어 온 옛 피조물에게는 생뚱맞기 그지 없다. 결국 옛 피조물의 가장 큰 구식 스타일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낡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롭지 못한 옛 피조물이 생각하는 창조주는 과연 어떤 창조주일까?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창조행위를 생각해본다면, 그 차이가 극명해 진다. 그 분은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셨는가? 이에 관한 적절한 비유가 고후 5:4에 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생명으로서 죽을 것을 삼키시는 방법으로만 창조하신다. 죽을 것만 재료로 삼는다. [죽을 것]이란 지금 살아있는 것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결국 죽음으로 정체가 탄로날 운명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보다 정확하게 [죽은 것]이라고 적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다. 죽을 것이라는 표현 속에는 죽음의 본질 위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넘쳐 흐른다. 살아있는 척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행위가 한껏 담겨있다. 즉, 자신의 살아있음을 근거로 해서 유일하신 진짜 생명에게 공격을 감행하고 싶은 조짐이 포착되어 있는 셈이다. 죽을 것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짜 생명을 진짜 생명에게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그 근거로 제시된 수많은 교리와 법과 행위로 말미암아 진짜 죽을 것으로 계속 고발당하는 처지에 있다. 결국 죽을 것은 마지막으로 참 생명을 살해하고자 한다.
십자가 사건을 바로 그 증거이다. 죽을 것이 거짓 생명으로 참 생명을 살해하고자 한 피할 수 없는 증거 말이다. 그러나 참 생명은 죽음에 매몰되지 않는다. 부활을 통해 자신의 참 생명됨을 자랑하면서 죽을 것들을 꿀꺽 삼켜버린다. 참 생명 안에, 예수 안에 들어온 죽을 것들은 그 생명 덕분에 산다. 그 생명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의 새로운 창조주의 창조방식이 오직 십자가 말고는 없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을 삼킨 생명만이 길이요 진리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나는 길이 아니요, 진리 아니며 생명이긴커녕 오히려 죽을 것임을 기쁘게 증거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참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킨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늘 자신의 몸에 지니게 되며, 예수님만을 참 하나님이시요, 주(主)라고 찬양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를 부정한다. 나를 죽을 것으로 취급하시는 분이 자신의 창조주임을 안다.
그러나, 옛 피조물이 생각하는 창조주는 이와 정반대의 양상을 띤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내가 의미있고 가치있기에 나를 창조했다는 자기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우주의 원인되시는 궁극의 일자께서 그 형상에 따라 창조한 나이기에 나를 긍정해 주시는 창조주만을 사랑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걸작품인 나는 아프거나 가난하면 안된다. 살아남아서 그 분의 뜻을 온 우주에 널리 전파하고 죽어서는 천국에서 그 분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인생역정이다. 어느 한 구석, 대신 죽으신 참 생명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 한 순간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접수되지 않는다. 죽을 것을 삼키신 생명은 그저 괜한 쓸데없는 짓을 해버린 망나니에 불과하다.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움은 새로운 창조주이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출발하고 매듭짓게 된다. 나를 긍정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시는 하나님은 사실 처음부터 우상이었다. 원래 창조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우주 구석 구석 내장시키기 위한 설계에 있었지, 죽을 것을 위한 따뜻한 조물주의 배려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쯤되면 새로움을 사적으로 유용할 가능성이 완전히 봉쇄당한 형국이라서, 허무하다며 예수 안을 박차고 나올 법도 한데, 죽을 것은 죽은 것이라 생명의 가두어 두심에서 스스로 나올 수도 없다. 생명되신 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죽을 것들을 항상 기쁘게, 쉬지 않고 기도하게, 범사에 감사하게 조치해 나가시는 비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 전 존재가 죽을 것으로 들키는 기쁨이다. 그래서 내 생명이 참 생명 안에 비밀로서 숨어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자에게 십자가 말고 자랑할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