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4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사랑을 따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고전 13장에서 밝혀진 사랑의 실체,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라는 틀 안에서 고전 14장이 전개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그 이후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지를 읽는 자들에 의해서 반드시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사모하되, 하려고 하라’라는 말씀들의 목적물인 [신령한 것]은 [사랑에 따라]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따라]라는 말씀을 찢어버리고 이 말씀을 읽으면, 인간들의 머리 속에 저장된 기존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구하라, 사모하되, 하려고 하라’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신령한 것은 더 이상 예수님에 의해 이미 성취된 것이 아닌, 신령한 어떤 인간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잡힐 듯한 가능성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의해 확정되고 독점된 신령한 말씀이 인간의 힘을 비러 점령되기를 바라는 식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식민지가 되어 버리는 과정에서 인간은 보다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욕심에 충성하게 됩니다. 욕심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을 씹어 삼키고, 그 결과 성도들은 더 이상 한 몸으로서가 아닌 각자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행위에 나서게 됩니다. 각자 자기의 몸은 각자 자신의 머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며 그 머리는 각자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각자의 혀, 즉 각자의 말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고전 12장에 의하면 각자의 혀가 내뱉는 말의 내용은 [나는 저주받아서는 안 되는 하나님 같은 존재]이므로, 결국 ‘구하라, 사모하되, 하려고 하라’라는 말씀들은 자신이 왜 저주받지 않아야 하는지, 자신이 왜 하나님인지를 증명할 용도로 활용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고전 14장을 읽으면서 싸구려 방언보다는 명품 예언을 하고 싶어합니다.
과연 그런지 한 번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 보도록 합시다.
구분 |
예언 |
방언 |
비고 |
말하는 대상 |
사람 |
하나님 |
-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음.
-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음. |
말하는 내용 |
덕을 세우며 권면, 안위의 내용 |
영으로 비밀을 말함 |
말하는 목적 |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
통역필요 여부 |
필요없음 |
필요함 |
예언과 방언의 가장 큰 차이는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는데,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통역이 없다면 무슨 악기를 연주하는지 알 수 없는 꼴이 되고,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감사를 할 수가 없고 결국 방언하는 사람 자기 혼자의 덕을 세우는데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권장하면서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예언)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단정합니다. 상황이 이 쯤 되면 독자로서는 당연히 예언을 하고 싶고 이왕 신령한 것을 주시려거든 말씀해 근거해서 예언을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셨다(고전 12:11)는 취지에 정면배치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고전 12:18)는 것을 훼손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구별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각 사람에게 그대로 행하신 결과물이지, 누가 더 신령한가를 판정내리기 위한 업적의 누적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도 예언은 우등한 것으로, 또 방언은 열등한 것으로 본능적으로 취사선택 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은 [온전함]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뿐 임을 영원히 강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소개된 사랑의 속성, 그러니까 오래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등의 것들이 피를 통해서만 비로서 구체화된다는 의미는 피를 제외한 우리의 속성은 이미 성질 급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며 무례히 행하고 불의와 기뻐하고 진리와는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까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주심까지 사랑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예수의 나라이며, 예수의 피공로만을 찬양하는 아들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안목은 사도행전 2장 2절에서 성령의 강림하시는 모습을 갈라지는 불의 혀로 표현하신 것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예수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혀)는 각 자 성도의 입장을 고수하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예수 안의 언어는 그러한 인간의 언어를 불로서 소멸하는 성령의 언어입니다. 성령의 혀는 인간의 혀를 정결히 태우고, 오직 단 하나의 언어인 사랑의 언어로 교체해 버립니다. 그 교체된 혀에서 나오는 고백이 바로 고전 12장 3절에서 확인된 내용입니다. 즉, [예수는 내가 저주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고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나야 말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의 괴수로 확정되는 것이고, 이로서 지금의 나를 나로서 인식하게 되는 유일한 틀은 [은혜]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죠.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은 바로 이런 뜻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예수 안의 세계는 나의 죄인됨을 고정시키는 동시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랑 또한 확증함으로써 구원하심은 오직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의 피로서만 가능하다는 찬양이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런 찬양의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예언이요, 방언입니다. 그래서 모든 예언과 방언의 내용 또한 예수님은 저주할 자가 아니요, 예수님은 주이십니다(고전 12:3)라는 범위를 결코 넘어설 수 없게 됩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예언과 방언의 특성은 인간이 소유해야 하는 서열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행하시는 이미 성취된 주의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언(말씀을 깨달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하는 이유가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의 사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방언의 통역 또한 인간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언과 방언 역시 하나님의 영이 하게 하시는 말씀이므로 귀 있는 자만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언과 방언은 예수 안과 밖이 얼마나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위의 말씀을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통역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방언만을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23절). 그럼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통역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어 24, 2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같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되어야 하지, 믿는 자를 위한 표적은 될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2절에는 분명히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함이고,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 안과 밖이 얼마나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능을 예언과 방언이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로서 방언의 벽에 부딪혀 예수 안의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여야만 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언을 통하여 자신이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 때문이라는 사실을 들어 늘 평생 깨달아야 합니다. 예언하는 자와 믿는 자 역시 예언의 내용(십자가 사랑)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방언하는 자와 예언하는 자가 믿는 사람을 양산할 수도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믿고 믿지 않음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그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지 방언이나 예언에 의해 더해지거나 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방언과 예언의 내용이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시기에 십자가와 동일한 역할을 예수 안에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형제들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라는 말씀(35절)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절) 반문하는 취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34절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유독 여자를 분리해 내고 35절에서 무엇을 배우려거든 남편에 질문하도록 함으로써 여자는 남편의 개념 속에 있을 때 비로서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구조가 성립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개념에서 여자를 분리해서 남편이라는 존재를 생각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방언과 예언의 관계는 예수 안의 세계가 십자가 피로서 형성되어 있음을, 성령께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게 함을 통하여 성도는 그냥 성도됨이 아니라, 피흘리신 예수님 때문에 성도되었음을, 남편 안에서만 말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여자로 구조화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예언과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이 여자는 남편 안에서만 말씀을 듣게 된다는 의미로서의 성도의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6:8) 성령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와 의와 심판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항들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기에 혼쭐을 내시는 겁니다. 죄와 의와 심판이 모두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흡수됨에도 불구하고 각자 나름의 죄와 의와 심판 개념에 늘 절어 있는 [여자]로서 십자가 사랑으로 창조된 교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답을 가지고 책망하시는 [남편]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늘 지적받아야 할 위치의 이름이 바로 [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힐문합니다.
고전 14: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난 것이 아니며, 인간에게 임한 것도 아닙니다. 특정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 예언한다, 나 방언한다가 자랑일 수 없습니다. 여자가 감히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가를 남자 목사들이 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피로 창조하신 예수 안의 세계에서 항상 화평을 유지하시는데 그 화평은 피의 결과물이기에 전쟁을 늘 수반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전쟁과 화평을 피를 통해서 적용받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