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신령한 유일한 말-고전12장(박윤진)120220

아빠와 함께 2013. 3. 29. 08:05

 

신령한 유일한 말

 

신령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전 12장은 그 신령한 것을 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도출하고 있습니다. 말이라는 기준이 신령을 놓고 경쟁하는 두 개의 편을 짜게 합니다. 한 쪽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요, 다른 쪽은 말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고전 12장을 읽는 독자들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은 가볍게 버리고, 말하게 하는 하나님 영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령하지 못한,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그 우상이 끄는 그대로 인간이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영,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내용은 인간이 배우고 훈련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쪽에서 인간의 입 속에 담아 주지 않으시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방향감각 즉, 우상은 버리고 하나님의 영 쪽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대로 폐기처분 됩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말하지 못하는 우상에게 인간이 그대로 끌려간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우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듣고 싶은 말을 우상에게 보관하여 둡니다. 그러곤 그 말이 듣고 싶어 우상에게 넙죽 엎드립니다. 도대체 인간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은 어떤 것일까요? 그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통해서 토설케 하시는 내용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안목으로 재해석 해야만 합니다. 만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쏙 빼놓고 해석하게 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성과 그에 대한 보충의 관계로 왜곡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럼, 고전 123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위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영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두 가지 말의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말씀의 내용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면 거대한 충돌이 생깁니다. 저주받을 자가 아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이며, 온 우주의 주인(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어째서 종처럼 저토록 처참하게 죽어야만 했는지, 과연 이 일을 초래한 자는 누구인지, 왜 하나님의 영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저주받을 자가 아니고, (하나님)라고 시인하도록 움직이시는지 등등의 충돌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입을 통해 듣고 싶으신 말은 딱 한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그 분은 인간이 저주할 자가 아닌 하나님 그 자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보니 하나님을 살해한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본질이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영이 그 용서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무슨 말을 요구하겠습니까? 바로 위의 말씀, ‘! 예수님은 인간이 저주할 자가 아니신 진정 하나님이셨습니다!’라는 고백말고 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듣고 싶어 환장한 말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마귀의 새끼들이 우상으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하신 말씀과 원수 맺는 대립각의 말일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인간이 저주할 자가 아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주님이시다]라는 말의 원수는 [예수님은 인간에게 저주받을 만 했다. 그 저주 판정을 한 나야말로 진짜 주인이다.]입니다. 결국 [그 누구도 나를 저주할 수 없다, 나는 저주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누가 나를 무시하느냐? 나야말로 우주의 진정한 주인이다.]라는 말을 우상에게 투사하고 되돌려 받으면서 우상의 그림자 속에서 평생 자신의 본질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영으로 말하느냐, 그렇지 않고 내 중심으로 말하는 우상의 영으로 말하느냐의 다툼은 고전 124절 이하에 전개되고 있는 같음과 여러 가지의 부딪힘 속에서 더욱 선명해 집니다.

 

고전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러 가지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은 은사, 직임, 역사 이고, 같음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성령, , 하나님입니다. 어떤 이는 [여러 가지]에 중점을 두고 [나도 은사 받은 것 맞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그 여러 가지를 파생시킨 [같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주장했을 까요? 사도바울이 여러 가지 은사와 직임, 역사를 제시하지만, 같은 성령, 같은 주, 같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토를 달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시는 그 범주 안에서만 여러 가지은사, 직임, 역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말씀을 할 줄 아는 는 저주받을 자가 아니요,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주인적 성격의 존재임을 고집하는 자는 여전히 예수 밖에서 우상이 끄는 대로 그대로 끌려가고 있는 신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저주받을 자가 아닌 근거를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방언하는 나, 예언하는 나, 영들 분별하는 나에게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자신의 입에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능력 행함, 각종 방언의 말씀이 튀어나오더라도 여전히 자신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는 예수 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가 같은 십자가의 영이시므로, 예언 할 줄 아는 나와 병 고치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그것을 내가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심정은 유명한 고전 13장에서 흠뻑 맛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까지 적고 있습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수 안의 세계는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지심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바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 안의 세계, 예수 안의 세계에서조차 신령한 어떤 것을 기능적으로 할 줄 안다고 고집하는 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라는 터는 아무 것도 아님이 되기 위한 장치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십자가 사랑은 온전한 것(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안의 자리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성도를 겨냥하는 자리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지, 그 은사가 바로 나의 구원됨의 증거가 맞는 지, 그 양적 질적 수준이 저하되고 있지는 않은 지 등을 늘 염려하는 자는 여전히 우상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이미 온전한 다 이루심의 세계 안에서 예수님께서 쏘고 계시는 은사와 직임과 역사를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성도는 폐하여 지기 위해이미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평생 교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체가 늘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 나 저주받을 자가 아님, 나 성도 맞음을 확인하는 인간 경쟁의 터전이 되어버린 부동산을 교회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은 십자가만 말씀하게 하십니다. 여러 가지 은사와 직임와 역사는 같은 십자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소용돌이가 바로 사도 바울이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라며 자신있게 말했던 [십자가 사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