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예수 안 엿보기(박윤진)120905

아빠와 함께 2013. 3. 29. 08:22

고린도후서 역시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고린도후서가 최초로 기록된 현장을 그려봅시다. 성령이 자신의 뜻을 사도 바울의 머리 속에 입력하여 사도바울이 알고 있던 언어를 이용해서 기록케 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리고 원어로 기록된 문자들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각국의 언어로 바뀌어 기록되었을 것이며 이 과정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역시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또 한번의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힘입어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다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고린도후서 11절의 첫 부분인 하나님의 뜻으로라는 구절을 읽고서 내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는 이미지가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최초의 취지이겠는가 하는 의문 또한 충분히 가져볼 만한 하죠. 성령이라는 하나님의 영도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라는 틀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가하는 의문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잘 알고 계시듯이 인간 언어는 고정된 유일한 뜻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해 봐도 전혀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 용어에 관한 정보의 양적 질적 수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공기청정기 임대서비스 계약을 체결했다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이 공기청정기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계약을 체결한 사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단어를 해석할 힘의 차이에 따라 의미 달라지 게 됩니다.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증거라는 용어는 사법부와 피고인이 제시하는 물건 자체는 일치하나 그 물건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서로 다릅니다. 사법부는 증거를 해석하여 확정할 수 있는 힘이 있으나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피고인은 사법부에게 증거 신청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 언어의 주체가 가진 권력의 차이에 따라 해당 단어의 의미하는 실제적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시험을 잘 봤을 때 자랑하고 싶은 성적표와 시험을 망쳤을 때 어머니께서 요구하시는 성적표는 정말 글자만 같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실 이렇게 언어의 의미가 다양하게 파생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언어를 통해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 언어의 주체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도출하고자 관련된 정보와 힘과 상황을 여러 형태로 조작하면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언어의 유동적 다의성을 즐기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의 경우 처음 출발시점이 성령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인간의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의문일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주장이 과연 성경적이냐를 따지지만, ‘성경적이라는 기준 또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게임화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거든요.

  소위 성경학자라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언어를 둘러싸고 있던 시공간적 환경을 대단히 중요시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과학적 접근방법이라고 하죠. 비유하자면, 레몬차는 레몬을 우려서 만드는 것입니다. 레몬을 싸면 레몬즙이 나오죠.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라는 육을 짜면 사도바울의 뜻한 바가 나오지 않겠냐는 논리로써 사도바울의 언어를 시공간적 환경 정보를 통해서 짜내려고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문제삼았던, 우상제물, 소송, 간음, 머리 모양 문제 등은 그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 ,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그들도 알기에 유동적 다의성을 과학이라는 압정으로 고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결국 복음을 개인화 시켜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성령의 감동은 고작 사도바울의 몸속을 맴돌 수밖에 없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먹어도 좋다고 한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을 구별한 이유를 광야의 고온으로 인한 식중독 위험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인간 편의 위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준수한 효과가 인간 쪽에서도 매우 반길 만한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이런 언어의 한계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으며, 나는 늘 나를 위하여 성경을 조작하고 있는 죄인인 것을 알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까지 도달하는 이 논리구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이러한 논리구조가 올바른 성경해석 입니까? 이 성경해석은 하나님 쪽에서 인정하는 성경해석인가, 성령이 사도바울을 처음 감동시켰을 그 감동이 바로 이 논리였을까?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사도바울의 뇌 속에서 이러한 논리구조가 잘 작동된 결과물이 바로 고린도후서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나를 전적 죄인으로 만들고 전적 죄인 된 나를,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죄에 묶여 있는 나를 십자가 피를 통해서 구원하신 예수님만 찬양하자는 식의 논리, 보통 이정도의 논리라면 우리가 별다른 의심없이 복음이라고 평가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하는 시비를 걸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철학자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 정도의 논리는 쉽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후 11절을 한글이라는 체계에 맞춰 한국인 독자가 쭈욱 읽어 내려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 속한 영역을 제대로 조명해 낼 수 없다는 쪽이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의 취지를 십분 이해해서 아멘 한다면 구원받습니까? 고전 16장 마지막처럼 성도끼리 문안하고 시킨 대로, 당부한대로 다 하면 구원된 것이냐? 내가 임의로 해석한 거룩에 적합한 행동양식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구원의 요건이겠느냐? 과연 스데반 집사의 사건을 기록한 그 부분을 잘 해석하면 구원받느냐?

더 나아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내가 전적 죄인이므로 나의 모든 해석을 죄로 인식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해결했습니다라는 구조, 즉 모든 인간 주체를 죄인으로 몰아넣고 십자가를 끌어당겨서 그 죄인을 누구는 용서하고 누구는 용서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주권이 예수님께만 있다고 하면 그것이 복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복음이 뭐냐? 고린도후서를 보기 전에 사도 바울이 지금 어떤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지 놓지지 않아야 합니다. 해석해 보자고 덤빌 문제가 아니구요.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복음은 [해석을 하는 나는 죄인 ---> 그러므로 모든 해석도 죄 ---> 십자가 지신 예수님 구속하심이 필요]라는 논리적 구조에 반드시 이질적인 사건의 개입이 있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지금 이 커피를 다 마시고 이런 논리를 다 안다고 해서 커피 값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리면, 커피집 사장님께서 복음 논리 아시는 분들이니까,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눈 흘기면서 커피 값 내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요구하죠! 왜요? 이런 논리를 안다는 것과 커피 값을 지불해야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복음 구조를 예수님 앞에서 암송하면 예수님께서 통과!!!’ 이렇게 천국입장을 허락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아들의 핏값을 요구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청구금액이죠. 그 앞에서 신용카드 결제 후 서명하듯이 대충 신학 철학 논리를 그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 이해정도와 상관없이 그냥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복음논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은혜가 완벽히 충족된 곳이 바로 예수 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예수가 모든 일을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음 이해 수준은 전혀 상관없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 해석을 어떤 식으로 하든지, 예수 안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용서하심 안에 있기에 네 은혜가 족하다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나열되고 있는 사도바울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해결지침 자체가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제 해결 지침이 교회를 깰 수 있습니까? 성도를 타락시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용서하심 안에 담겨있기에 그 문제들조차 족하디 족한 네 은혜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고린도후서 또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적은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누구죠? 이미 예수 안에 들어온 자들 아닙니까? 그럼 부족한 은혜가 있습니까? 전혀 없죠. 모든 것이 다 반드시 족한 은혜가 되는 영역에 있는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바로 이러한 영역에서 이 편지를 적고 있단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체험한 것이 고린도 후서에 기록된 부분이 있죠. 

고린도후서 12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 체험의 주인공을 흔히들 사도바울 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본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위 경험은 꽤나 영빨있어 보이는 고급 체험입니다. 교회 내에서 영적 영웅이 될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구지 내가 경험했다라고 저장하고 소유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기에 그 경험을 했던, 하지 않았던, 내가 했던 남이 했던, 내가 했다고 기억하던 기억하지 못하던지 다 상관없이 족한 은혜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복음의 논리구조와 연결해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그러한 논리 구조를 암기하고 있던 아니던, 그 논리 구조가 이해가 되던 안 되던, 그 논리대로 성경 해석을 할 수 있건 없건, 그 논리를 말하는 사람이 나이건 내가 아니건 간에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에 의해 그 분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건 자체가 충분한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구원이요, 사건 자체가 복음이죠! 

고린도후서 맨 마지막 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13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자 이제 이 말씀대로 한번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해 보세요. 확증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거나 몰랐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됩니까? 내가 나를 버리운 자라고 확정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 

사실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독자들의 모든 해석을 거부하기 위해 이 편지를 적었습니다. 누구에게 복음의 정보를 더 제공하고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말할 의도는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수많은 해석이 구원에 필요없고 지금 성도의 모든 것이 [족한 은혜]임을 주장하기 위해 편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면, 그 은혜의 증거로 이러저러하고, 예수 밖에 있다면 그 저주의 증거로 이렇다 저렇다라는 눈에 보이는 증거물 찾기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려는 사람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사도라는 바울이 예수 안에 있다면 이러 저러한 눈에 보이는 증거물 찾기, 자기 행위 업그레이드 하기를 설명하려고 이 편지를 기록한 것이 절대 아니란 말씀입니다 

고후 12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약한 데서 온전함,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것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는 말씀을 연결할 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복음적 논리구조를 이용하여 말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여전히 주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 자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우리에게 쏟아 붓는 방법이 바로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것이죠! 

다시 고후 11절로 돌아가 봅시다.

이 편지를 누가 누구에게 쓰고 있죠? 하나님의 사도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쓰고 있는 것이잖아요.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 것을 전달하고 있는 셈이죠. 지금 이런 나의 모습 그대로가 구원에 도움도, 방해도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진행시킨 그대로 심히 좋았더라라는 판정을 받는 상태가 바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성경이라는 인간 언어 속에 담겨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인간에 의해 기록될 수가 없고, 학습될 수 없고, 전도될 수 없는 것이죠. 없고, 없고 또 없어도 충분히 족()한 상태가 바로 예수 안이라는 것을 있고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는 현실과 충돌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해석, 얼굴, 환경을 탓하고 싶은 모든 원인이 그 충돌에 의해 산산히 부서집니다. 십자가 말고는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 말고는 복음의 실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면서 버리운 자인지 구원받은 자인지를 평생 닦달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 이루심의 영역에서 족한 은혜자랑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는 거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해석을 거부할 목적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해석 전체를 거부해도 괜찮은 위치가 바로 하나님의 사도라는 위치입니다. 족하고 족한 은혜의 증언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첨부파일 : 고린도후서 1장.hwp (48.0K), Down:13
 이근호 (IP:220.♡.41.202) 12-09-05 19:01 
취지: 이미 터져버린 사태가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무색케한다는 겁니다. 성도는 사태에 종속된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