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강-고후 13장 7-10절(진리)1701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7절-10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7-10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찌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바르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들이 어떤 사람인가, 네 소속이 어디인가, 네 뿌리가 어디인가, 네가 원천 자체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람인가, 이런 것을 묻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존재자체에서 풍겨져 나오고 발산되어 나오는 것이 주님께서 작용해서, 주님께서 그 안에서 작렬해서, 일을 벌여서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받을만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을 만드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그 말은, 우리 것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주님 주신 그것이 도로 주님 앞에 순환되어서 오게 함으로서 주님이 자기 즐거움, 자기만족에 스스로 도취되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구약 레위기의 제사의 번제원칙이 그겁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때 그 향기와 냄새를 매끼니 마다 먹는 나의 양식으로 받아주겠다, 그렇게 한 겁니다. 사도의 그 말은 결국 자기가 있는데서 시작해서, 자기가 착한 일을 벌여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자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차단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보자가 빠져 있으니까요. 중보자가 개입되어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인간 쪽에서 다리를 걸쳐버리면, 사다리를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는 겁니다. 그 실습과 실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충분히 했다고 보시는 거예요.
인간을 대표한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함께 했지만 함께 하면서 그들의 속내, 본질이 노출되었어요.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율법대로 징계와 저주받는 것 외에 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인간자체가 처음부터 실패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8장에 보게 되면, 이것은 일반 세상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해서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모형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형이다.
모형이라는 것은 뭔가 만져지는 것이 있지요. 거기에 엎친데 겹쳐버립니다. 그림자다, 이렇게 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높이가 없어요. 2차원적입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아요. 그림자를 어떻게 손에 잡습니까? 손에 잡으려는 너도 그림자라는 말이지요.
그림자의 운명은 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언젠가 하늘의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유보적인 거지요.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인생을 가지고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는 이것, 사실은 인간이 할 수 없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겸손은 뭐냐? 자기를 그림자로 보는 겁니다.
이것은 실체가 없는 거지요.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누가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거기에 그림자가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막 웃고 있다 칩시다. 그러면 그림자도 따라서 웃습니까? 그림자는 그저 흔들흔들, 흔들릴 뿐이지요. 그림자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만약에 실체가 기침을 한다면 그림자도 기침을 합니까? 실체가 에취, 하면 그림자도 에취, 이러지는 않거든요. 히브리서 8장 5절에 나오는 말씀, 이 세상 모든 것이 모형이고 그림자라는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속았지? 너희는 사탄에게 속아 살았어.”라는 그 이야기와 똑같은 겁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은 사라지는 겁니다. 실체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본체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다 했거든요.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드리워진 그림자가 이 세상 만물이라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징후, 흔적으로서 본체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인 것을 주께서 기대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이거예요. 너희들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나는 너희들이 그림자인 것을 아는데 자, 그 그림자를 그림자 되게 했던 실체, 대체 너희는 어디서 나왔느냐를 묻는 겁니다. 바르게 사세요,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바르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성도는 주신대로 사는 거예요. 꼬이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버리면 본인이 실체가 돼요. 본인이 실체가 된다고요. 갑자기 그림자에서 실체로 넘어가는 것을 주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남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쪽 그림자고 이것은 이쪽 그림자에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한 겁니다. 너희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성도라면 세상 사람들이 상대하는 것처럼 너/나, 이렇게 상대하지 말고 진리를 그 안에 꽂아놓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오지요. 8절에 보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당신한테 직격탄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진리를 앞장세워서 나갈 테니 너희도 나한테 이야기할 때는 진리의 사도, 진리를 원했는데 오신 사도, 이런 식으로 나를 받아주라는 겁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진리가 있지요?”라고 지금 사도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묻는 겁니다. 제가 설명하면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성경대로 진리를 이야기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리가 밥 먹여주나?” 그러면 그 사람은 평소에 뭐 때문에 살았느냐 하면, 밥 때문에 산거예요. 밥 먹는 것밖에 몰라.
때만 되면 밥 달라고 하고. “밥 묵었나?” 맨 날 밥 먹었냐고. 자식들 교육도 마찬가지에요. “너 그래서는 밥 못 먹고 산대이.” 자녀교육의 기초, 기반이 그거예요. 밥이 답이다, 하는 말도 있지만 밥 못 먹어서 환장한 겁니다. 하얀 이밥에 소고기국 먹는 것, 그게 북한의 마지막 도착지점이에요.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 그것도 한우로 끓인 소고기국 먹는 것이 김일성의 목표였는데 아직도 못하고 있어요. 이걸 보면 성경이 참 잔인해요. 우리가 밥이나 먹고 사는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아는데 절대로 우리의 소원대로 주께서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피해버려요.
왜? 사도는 무당노릇 하기 싫다는 거예요. 무당집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히브리서 8장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9장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어라 이놈아.” 쉽게 말해서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고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간단하게 생각해야 돼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직업, 건강, 인품, 인격, 성격, 전혀 고려 대상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성격 버리고, 인격 버리고, 품위 버리고, 학위, 재산 다 날라 가고 결국 죽는데 응축되어 있어요. 어떻게 죽이느냐는 그게 인간에게 담긴 의미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속성의 그림자라는 거지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기 몸을 주셨다 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준다고, 주님께서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처치할 데가 없어서 “아나, 가져라. 선물로 줄게.” 이런 식으로 평소에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생각한 거예요.
“아쉽습니다.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주옵소서.” “그래. 나 넉넉하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아나 줄게.” 이렇게 했거든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할 때 떡을 먹었던 사람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께서 뭘 제공했다는 것은 네 속에 이런 오해덩어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하나의 수법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수법이지요.
기적 받았다, 병 나았다. 그것은 자기의 더러운 본색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것도 자랑질이라고. 얻어먹은 것이 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임금님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서양 동화에 있어요. 닭을 키우는데 매일 황금알을 낳는 거예요. ‘이상하다.’ 보통 달걀은 깨면 깨지는데 황금 덩어리라서 깨지지 않아요.
계속 놔두고 황금알을 건지면 되는데 욕심이 났어요. ‘계속 황금알을 낳는 것을 보니 속에 황금덩어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라는 과학적사고방식이 동원되어서 닭을 쪼개봤네요. 쪼개니까 그 속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에서 나온 거예요.
오병이어 주시다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하니까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떡 먹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의 살과 피는 외면했어요. 그게 떡이 되는데. 떡에서 떡이 나왔거든요. 영생이라 하는 것, 먹고 마시는 영원한 생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살과 피에서 나왔는데 얻어먹기는 해놓고 여기서 나왔다고 하니 다 도망치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무당집에서 탈피해야 돼요. 달라, 하는 사람들을 나가도록 해야 돼요. 뭔가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십자가가 실체고 우리는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가지고 너와 내가 이야기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진리성이 안 나오는 것은 뭐냐?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그림자 자체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하등의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교회 나오는 사람의 기본이에요.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제대로 마음 낮추고 보게 되면, 히브리서 8장, 9장, 이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가를 알아요.
히브리서 9장 이야기를 계속 해 보면, 28절에 나옵니다. 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거리낌 없이 순하게 받아줘도 되는가? 그 이유가 뭐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이 땅에 와서 죽으셨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심판이야기를 해도 오히려 고맙고 감사한 이유가 뭐냐?
심판을 충분히 견딜만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익히 자기사람을 이미 손을 본 거예요. 한 번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담당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가 필요한데 중보자는 죄를 담당하시러 오신 분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죽는 것도 정해진 것, 확정된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도 확정되었다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돈이 아니고 이 심판에서 어떻게 면제될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주님께서 그 문제까지 친절하게, 준비성 있게 딱 갖춰놓았어요.
“나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했다.” 따라서 이런 메시아를 네가 고대하고 있다면 너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한다 해도 감사, 감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자꾸 정신머리를 딴 데 팔면 안돼요.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 자꾸 그런 것을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했던 이 진리성, 그렇다면 “목사님, 우리 교인들은 다 서로를 그냥 보지 않고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를 가운데 두고 소통합니다.”라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뭐가 되어야 되느냐? 왜 우리가 예수님의 죄 담당하심에 주목해야 되는가? 너나 나나 둘 다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합니다.”에서 멈추면 안 되고 “나의 타락을 감사합니다. 나의 타락이 들통 나게 해주신 것을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데까지 이어져야 돼요. 정말 이것은 이 말씀 듣고 타이밍 맞춰서 웃어야 되는데요. 마태복음 18장, 제자들이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으냐 하는 그 대목이 마태복음 18장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 같으면 힘든 이야기를 또 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듣는 제자들이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스펙들이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느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그 한 가지만 딱 지식으로 포착이 된 것으로 안심을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어느 한 가지를 주게 되면 ‘아, 그래 이것 쥐면 되겠다.’ 한 그것을 쥐었는데 또 새삼스럽게 생각도 못한 다른 것을 추가적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이것 쥔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려요.
나를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했고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고요. 따라가면서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따라갔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그 뒤에 또 다른 군소리 없기, 그러고 있는데 군소리가 생겨버린 거예요. 어린아이같이 천국을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지금 이걸 누구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어른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베드로 어릴 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어릴 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훌쩍 키가 컸어요. 이미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 이미 어른이 된 상태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이 말, 도로 돌아갑니까? 청춘을 돌려서 다시 뒤로 갑니까?
어떻게 이것을 돌이킬 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지요, 주님께서. 지금 구원받고자 애써서 주님 따라다닌 거예요. 예수님 뒤쪽에 천국이 있다고 여기고. 그랬으면 격려를 하든지 뭔가 독려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제공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 조금만 참아. 힘내. 지금 잘하고 있어. 그만큼 따라 붙였으면 이제 다 온 거야.”
뭔가 계속해서 희망을 제공해야 되는데 초를 쳐도 이런 초가 없어요.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이 시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지난 세월 그 모든 것이 뭐가 됩니까? 제가 광주강의에서 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나’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느냐? 예를 들어서 목사가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면, 9퍼센트와 11퍼센트 사이를 알아요. 십의 1조는 10퍼센트니까. 그래서 돈을 계산하면서 뭘 맞추는가 하면, 9퍼센트보다 많고 11퍼센트보다는 미치지 못하는 그 경계선에 주목한다고요.
십일조를 하는 순간 인간은 법을 기억하게 되어 있고 그 법으로 개념화시킨 것들의 수집이 자아입니다. “나는 이 정도까지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법대로 충실하게 지켜 왔습니다.”라는 것이 가득가득 뭉쳐져 있어요. 이런 소리는 우리 교인들에게는 무례하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교회 교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에게 어떤 법적인 것을 이야기하면 왈칵 화를 내는 이유가 그만큼 속에 법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법이 들어있다는 것은 법을 기억한다는 거예요. 법을 기억한다는 것은 안에 법만 가득 들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는 했으니까 또 뭘 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가능성, 가능성의 연속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능성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서 ‘네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는 그것을 지금 어린아이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치원 애들 보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른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거예요. 혼자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 혼자 천당 가려고 시도하는 것, 나 혼자 열심히 해서 법 지켜서, 십일조 지키고 또 뭔가 지켜서 괜찮게 되는 것, 이것은 어린아이 심성이 아니에요.
어린아이는 의지할 든든한 분이 따로 있어요. 어린아이는 스스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자기가 의지하는 그 분 덕분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요. 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문제는 뭐냐? 어린아이에서 점차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는 것이 문제에요. 어린아이 같은 심성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걸 다 놓쳐버렸습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 말도 보세요. 죄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쳐야지 또 다른 토를 달아버려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기쁘시게 못하는 것을 천국에 왜 보내겠어요. 안 보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썩은 고목이 좀 되어다오. 쉽게 말해서 네가 타락에서 요만큼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데 히브리서 8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그림자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말, 그리스도가 실체인데 우리는 그리스도 옆의 그림자가 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이 뭡니까? 나 잘났으니까 너도 잘날 것이라는 그 기능이 아니에요. 나는 너 때문에 죄를 담당했다는 그게 기능 아닙니까? 십자가. 이해되시지요, 이제는. 이제는 이해되시지요?
죄가 있어야 돼요. 죄라는 것을 파트너로 삼아야 됩니다. 죄는 있고 죄가 스스로 죄를 해결 못해야 돼요. 그리고 그것을 담당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이렇게 친절한데.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어요.
죄는 있고, 그 담당자 따로 있고, 그 담당자가 죄를 담당하심으로서 죽는 것도 이미 확정된 것이고, 심판도 이미 확정된 것이고, 남은 것은 아들의 나라, 그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알아줘야 되거든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알아주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고목처럼 의지하면 되는 거예요.
의지하려면 나는 뭐다? 타락되었다. 나는 죄인이다. 뭐가 어렵습니까? 어려운 것 하나도 없어요. 자, 왜 어려운가? 어린애가 되면 되는데 자존하려고 하고, 자립하려고 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님, 저는 예수 믿고 난 후에 성경 봅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게 나는 짜증나거든요. 왜 짜증나느냐 하면, 성경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더더욱 가면 갈수록 타락했음이 노출되어야 되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까 성경을 보면 성경 본 만큼 양적으로 착해지겠지.’ 또는 ‘지식으로 알게 되겠지.’ 이렇게 하거든요.
오늘 본문의 설고 핵심이 뭐냐 하면, 진리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털어내야 될 것이 있어요. 진리 아닌 것들이 진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그게 뭐냐? 지식이에요. 그리고 솔직함, 진실, 이런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사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사실이에요.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니에요.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병이어 먹었다. 맞지요. 먹은 사람이 먹었다는데 누가 이의를 답니까? 맞는데 그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이만큼 컸다.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진실과 사실로 계속 조기 엮듯 엮어왔습니다. 실제로 홍해를 건너왔고, 실제로 여리고성 무너졌고. 특히 이사야 38장에 보면 깜짝 놀랍니다. 저는 이런 대목을 보고 깜짝 놀라요. 이사야 38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보상책으로 15년을 더 살게 하신 거예요. 15년 더 사는데 놀라운 사실은……, 참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어려운데요. 히스기야 입장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앞으로 15년 더 살 거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히스기야는 하나의 그림자에요.
그림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더 산다는 기쁨, 그런 의미의 종결로 준 것이 아닙니다. 일영표, 해 그림자, 해시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것, 그렇게 물러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 사적으로는 “오래 살았다.” 하고 자랑질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고 진실한데 진리는 아니에요.
진리는 뭐냐? 히스기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언이 돼야 돼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으로서 주님께서 그림자로서 히스기야를 사용하신 겁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모르고, 그 15년 사는 동안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해야 되는, 그 예언이 되어야 되는 것은 모르고 그 기간 동안에 자랑질 하다가 다 빼앗겼습니다.
15년 동안 더 사는 동안 바벨론 사신이 왔는데 궁중 창고 다 열어 제켜서 나 이만큼 잘난 왕이다, 나 이만큼 복 받은 왕이다, 이렇게 자랑질 하다가 몽땅 다 빼앗겼어요. 자기가 그림자 인 것을 몰랐어요. 높이와 깊이가 없다는 것을 몰랐어요. 인간은 그냥 습자지 같아요. 납작 엎드리면서 살아야 돼요.
주님의 창조의 무늬,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을 뿐이지 본인 나름대로의 의미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대목가지고 목사들이 설교할 때 기도하면 오래 산다고 해요. 이 따위로 오래 살아서 뭐 할 건데요. 오래 살아서 뭐할 겁니까?
구약에서 그렇게 깔아놓았던 그 모든 예언들이 한 초점에, 마치 볼록렌즈로 빛을 모으면 한 초점에 모이듯이, 그 한 초점에 모이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어요. 참 이 말씀보다 더 어려운 말씀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이미 진리를 지식으로 그 사고방식이 전환되어 있어요. 지식은 어떤 용도냐 하면, 소유용도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그것이 소유가 돼요. 소유가 된다는 말은 자기 것이 돼요.
자기 것이 되면 관심사가 너/나 그 중간의 진리에 관심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많이 아나, 네가 많이 아나, 내가 기도를 오래 하나, 네가 오래하나, 이렇게 되어버려요. 중간에 뭐가 빠져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 나 자리에다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개인이 여기에 박혀 버린 겁니다.
“너 나 이렇게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진리)하고 비교해. 나 진리인데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음이라.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이겁니다. 나 진리인데 진리 아니라서 죽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아니라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아니라서 이 땅에서 처참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진리이기에 처참하게 살아요, 진리이기에.
사람들은 지식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한테 빼먹을 생각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은 자기 가진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자기를 주신 것인데 그 자기가 뭐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거예요.
그러면 그 처참하게 망가진 몰골, 허접한 몰골이 은혜, 최고의 선물이라면 어떤 경우에 그 인간이 파악되느냐 하면, 자기가 타락을 해도 도저히 손도 못 댈 정도로 완전히 타락되었을 경우에만 그것이 은혜인줄 아는 겁니다. 그 죄사함이, 죄사함이 은혜인줄 알아요.
여러분이 인생 살아가 보세요. 점점 더 죄만 짓습니다. 너/나 이야기를 할 때 중간에 진리를 두고 이야기하자는 것은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학이 타락되었음을 알아야 돼요. 삼위일체라는 이론은 타락된 거예요.
교회에서 그것도 모르고, 그것 모르면 지옥 간다고 해가지고 삼위일체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는데, 모든 과학적지식과 모든 신학자체가 타락한 몸에서 나온 타락된 내용들이에요. 왜? 그게 소유용이기에 그렇습니다. 더러운 인간에서 나와서 더러운 인간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으면 질적인 변화를 모르고 물리적, 양적 변화를 통해서 자기가 천국을 돌파하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하면 그들이 믿느냐?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있어요. “내가 전해도 너희는 못 믿는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했어요.
자신감인지 배짱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뭐냐? 누가 예수님과 관련된 그림자냐 하는 것은 자기소관이 아닌 것을 알아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은 어떻게 들어왔지요?” 그걸 묻는 거예요. “당신은 이 세계에, 영적세계에 어떻게 들어왔습니까?”를 묻는 겁니다.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라고 묻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라는 질문의 반대말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는 그 질문이에요. 이 두 가지 질문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규정해주는 겁니다. 내가 만약 천국에 왔으면 “당신은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거든.” 당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예수님 때문이지요.”라는 이것이 같은 이야기가 돼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말은, 이것은 못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에게 해줄 말은 우리는 이미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할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 때문에 들어왔지~롱.” 이제부터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지요. 완전히 약 올리기에요.
이것을 광주강의에서 ‘아쿠아리움’이라고 했어요. 막혀 있는 유리벽 사이에 건너편 상어는 상어 이야기하고 이쪽 사람들은 사람이야기 하는 거예요. 사람 이야기 백날 해봐야 상어 쪽에서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원도 못 받으면서도 받은 척을 해야 돼요.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분 한분도 안계십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 가면 다 있어요.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하고, 교회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온갖 것 하면서 얼마나 구원을 안 받았으면 남한테 들킬까 싶어서 구원받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위장 다 버립니다. 커피도 못 마시면서 맨 날 커피 달라, 커피 달라.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 마시고 꺼억꺼억, 하고 다 토하고, 위장약까지 먹고 말이지요.
<황금같은 내 인생>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감추고 싶은 거예요. 내가 영적세계에 못 들어간 것을. “나의 불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그러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얼마든지 안 믿은 척 할 수 있어요.
도덕과 법에서 떠나버린 겁니다. 도덕과 법의 굴레에서 떠나버린 거예요. 그런데 법은 나한테 있지요. 그러니 나로부터 떠나버린 겁니다. 내가 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었음을 내가 하는 것을 통해서 “나는 아닙니다.”라고 증거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나는데 제가 가락강의에서 ‘투자와 희생’이라는 강의를 했거든요.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투자하는 중인데 그것은 신앙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칠판에 글을 쓴 것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조건하에 믿었는데, 믿었는데 /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 내세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가라강의녹취록)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뭐가 방해가 되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을 내가 자꾸 법으로 만들어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규정으로 남아 있는 그것이 정작 나를 구원하게 된 근거, 십자가를 자꾸 훼방질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침을 뱉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되는대로 사세요. 그냥 되는대로. 되는대로 살면서 나오기는 감사가 나오는 것. 되는대로 사는데 약간 불평이 나오고 불안감이 나온다는 그것은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는 사례가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첫째 경우는, 모든 신앙이 육적으로 다 설명이 가능해요. 내가 어려울 때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 예수 믿었다. 예수 믿는 것도 육적으로 차후에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영이 아닙니다. 왜? 다시 육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두 번째 사례가 뭐냐?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될 때는 “왜 나한테 이유도 이야기하지 않고 이런 사태가 발생됩니까?”라고 불평이 나와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대체 네 입에서 불평 안 나오려면 어쩌면 좋은데?” “왜 저에게 허락을 안 받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둘 다 이상해요. 한쪽은 지식이 모자라고 한쪽은, 자기는 믿음이라고 열심히 교회 다녔는데 5년 후에 돈 다 빼앗기고 보니, 교회는 돈 빼앗는 곳이거든요, 개뿔도 무엇도 아니고 나중에 세상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은 결국 뭐냐? ‘내가 무슨 짓 했지?’
그래서 첫 번째 사례는 오락이라고 하고, 두 번째 사례는, 주님을 두고 보자는 거예요. 두고 봐서 나에게 설명이 되면 감사하고 설명이 안 되면 감사 안하겠다는 거예요. 둘 다 감사가 안 나와요. 둘 다 타락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유리벽 속에 육에서 육으로 돌아가는 세상인지, 아니면 정작 이 세상에 영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마태복음 27장 1절부터 나오는 가룟유다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다시 해보고 싶어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놓고 스스로 뉘우쳤다 했거든요.
스스로 뉘우치고 나중에 스스로 목맸다. 스스로가 두 번 나와요.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가룟유다가 뉘우쳤다. 양심적으로 뉘우친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가룟유다는 자살할 때까지라도 이게 사탄의 짓이라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어요.
이것은 내 양심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육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해명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사탄이 들어와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인데 자기는 사탄이라는 영적인 생각을 못하고 육에서 육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서 치우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 자살인 거예요.
자살이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몸은 죽어도 내 몸을 내가 처분했다는 이 자의성, 자율성은 영원히 남아요. “몸은 죽어도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했습니다. 내 몸은 내 몸이라고 끝까지 우기면서 내가 알아서 처분했습니다. 이번 결정은 내가 알아서 했습니다.” 그 결심은 영원히 가요,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지요. 죽으려면 이렇게 죽어야 돼요. “주님,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하고 아예 자기를 끊어버려야지요. 자기의 결심을 끊어야 진정한 십자가 앞의 죽음이지 내 몸을 내가 죽여 버리면 끝까지 내 몸은 내가 관리한 셈이 되어버려요.
그 자살의 징후가 뭐냐? 술 먹는 겁니다. 담배피우고 술 먹는 거예요. 술 왜 먹습니까? 내 기분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아멘이 나와야 될 분에게서는 아멘이 안 나오고……. 자살이라 하는 것은 그 때만 죽은 것이 아니에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한다는 것, 이것이 꾸준하게 잠재되어 있던 것이 나중에 자살로 이어지는 거예요.
밥 못 먹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서 자살하는 거예요. 내가 나 보기에 부끄러운 거예요. 자기 앞에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중보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내가 그려놓은 이상적인 내가 있는 겁니다. 행복해진 내 모습을 늘 그리면서 살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죽어버린 거예요.
우리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실체를 만들어 내다니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아니되옵나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런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어느 주석가도 풀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13장 12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대목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없으면 아예 없는데 없는데서 빼앗을 것이 뭐가 남아있다고 없는데서 빼앗아버립니까? 그러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이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예수님은 이 말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마지막 심판 이후를 가지고 보는 겁니다. 결국은 인간들은 모든 것이 없어져요. 없어지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몸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없어질 것인데 있는 몸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저는 자아라고 붙였어요.
그런데 주체라 하는 것, 주께서 새로 만들어준 것은 마지막 때라도 계속해서 있을 대상이 돼요. 마지막 때가 되면 주께서 그림자로 삼았던 것을 자기 실체로 옮기거든요. 이 땅에서는 그림자지만 그것을 회수해버리면 그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요. 같은 실체가 되어서 함께 영광을 받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말아요.
그 있는 것은 인간들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새로 심어놓은 주체에요. 그걸 주체라 하고 성경에서 새사람이라 해요. 어쨌든 그 새사람이 있는 사람은 그 새사람을 위해서 주께서 계속 주시고 더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없어질 몸 가지고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건강하게 해 주옵소서, 돈 주옵소서, 행복하게 해 주옵소서, 내 자식 잘되게 해 주옵소서. 없어질 것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너는 없어질 것이니까 내가 준 것까지 다 빼앗을 거야.” 해서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겁니다. 없는 것에다가 빼앗아간다는 것, 우리보기에는 이것이 모순되지만 새사람한테는 이것보다 더 간편하고 쉬운 문장이 없어요.
‘아, 나를 위해서 가지는 것은 빼앗길 것이고 주께서 주신 것은 날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든 새사람, 그리스도와 관련성, 십자가와 관련성 때문에 주신 것이구나.’라고 안다면 그것은 영원토록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너/나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꽂아놓고 만나는 거예요.
우리는 그로 인하여 둘 다 타락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자기 타락한 것을 자랑해야 돼요. 어떤 윤리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자아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에 얽매이는 것.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고린도후서 6장 8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이야기고 심지어 사탄의 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던 그 바울이 한 고백인데 여러분과 합치가 되는데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결정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합치됩니까? 딩동!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앞에 것을 다 가져오면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합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습니다. 근심합니다. 그리고 이름이 없고요. 인기가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자 같아요.” 이 복음 자체가 교인들에게 뭔가 사기를 치는 것 같아요. 지금 제 심정이 속이는 자 같아요.
이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바라기는 이왕이면 재산이 한 160억 있고, 160억 가지고 가난해서 미치겠고요. ‘너무 가난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애 전교 또 일등 했어. 공부 그만하라, 그만하라고 해도 또 공부하는데, 공부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또 1등해가지고 지금 고민이다. 법대를 보내나, 경찰대 보내나, 고민이 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실은 기뻐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왜, 우리는 주님 보는 안목, 바로 중보자 안에서의 안목을 우리가 왜 못 가집니까? 성령께서 이제는 중보자 안에서 볼 때 우리는 기쁘게도 죄 짓는 자고, 기쁘게도 날마다 죽을 때까지 타락될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되는데, 구원되지 못한 자기를 관리해서 구원하겠다고 개인구원 시도하는 이 헛짓을 얼마나 헛되게 해왔습니까? 중보자도 모르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흉내나 내는 이 어른스러운 자립적인 정신, 그것이 바로 타락이고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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