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약하신 예수님(고후13;3-4) 1711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12. 17:34
2017-11-12 12:34:23조회 : 28         
   약하신 예수님171122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약하신 하나님(고린도후서 13:3-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awm_7OjSyjU, Hit:1

 이근호17-11-12 15:49 

약하신 하나님 

2017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3:3-4 


(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사도 바울은 일관성 있게 편지를 이어합니다. 이미 사단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 행세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사람들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있음’과 ‘없음’으로 논할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속성을 지니고 나타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섞일 때 ‘강하신 하나님이냐’ 아니면 ‘약하신 하나님’을 놓고 묻습니다. 사단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사단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꾸준하게 인간들은 사단으로부터 격려와 독려를 받아왔습니다. 

사단의 도움으로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일상살이를 꾸려나갑니다. 하지만 사단은 압니다. 세상의 성격을 결정짓는 에덴동산에 나무가 한 개의 나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나무가 중앙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단의 하나의 나무만 고집하고 거기서 모든 ‘지식’을 출발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의로움을 비축시켜서 그것으로 하늘나라에 가게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천국이란 인간이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어두움 세상에 스스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것도 ‘선악체계’가 아니라 ‘생명체계’로 찾아오십니다. 

이로서 사단이 의해서 ‘오직 하나의 현실’로만 구성되었다고 믿도록 확정 난 것처럼 보이는 세계가 두 개의 현실로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또한 우리 마음 또한 참으로 어떤 현실이 참된 현실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격전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두 개의 프레임(형태)으로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1)현실 속의 현실인가(2)환상 속의 환상인가(3)현실 속의 환상인가(4)환상 속에 현실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호 다른 원리가 생기므로 말미암아 발생된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알프스 산의 정경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 특정 지점을 염두에 두고 그 지점에 막상 가보면, 돌조각 잔풀만 있을 뿐입니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결국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보는 인간의 환상에서 비롯되니, 내가 보는 자연이 환상이라면 그것을 보고 있는 나도 같은 환상의 일부가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음이 심히 아프고 괴로울 때 죽고 싶습니다. 죽게 되면 고통도 같이 없어질 것이라고 여기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5:28-2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처분할 주인장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결국은 창조주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신이 있다 없다”는 말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 속에서 “하나님은 약하신 분이었음”고 미리 고백해야 하는 겁니다. 성도는 마치 공항에서 우연히 수상한 사람을 만난 경우를 당한 사람같습니다. 

공황에서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제 짐을 저 공황 밖으로만 운반해주신다면 돈 10만원을 드리겠습니다”라는 현혹되어 짐을 운반했다가 마약 탐색견에 걸려서 ‘마약 운반책’으로 남의 나라 교도소에서 평생을 보내는 신세가 된 사람과 같습니다. ‘약해 빠진 하나님상’는 악마가 통치하는 이 인간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선호하는 하나님관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우리 자신 속에 예수님의 피를 담고, 성령을 담고, 하나님의 속성이 ‘연약함’을 일방적으로 담고서는 

평생 살면서 이를 운반하라고 명령받게 된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 성도는 ‘예수님의 피의 운반책’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자기 삶이 됩니다. 예수님의 약하심과 관련된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사도 바울이요 오늘날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대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대조적인 삶이 빌립보서 2:5-8에 나옵니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출발지가 지상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끝은 모든 이가 거절하는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바로 이 시작점과 도달점을 성도가 그대로 답습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조종받습니다. 이런 자는 결코 자기 것으로 자랑하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십자가만 자랑하겠끔 인도받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죽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신 코스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선악체계가 파괴되지 않고서는 생명나무가 허락이 되는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 즉 ‘나 믿음, 나 소망, 나 사랑, 불행한 나, 행복한 나’ 같은 개념들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즉 성도는 ‘자아’는 제거 대상입니다. 반면이 그 작업과 더불어 성도라는 ‘주체’는 뚜렷해집니다. 성도의 주체의 원본은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6:67-68에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7-68)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모든 것과 땅의 모든 것과 바다와 숲속의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를 보고 싶습니까? 저쪽에서 귀싸대기 맞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조롱하고 모독하고 하대합니까? 그것은 문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문화의 일종으로 여기는 겁니다. 

자신들의 행복의 증대와 보다 더 자아를 강하게 하기 위한 용도로 활동하는 그 기독교라는 종교 문화가 오늘도 십자가를 모독합니다. 배후가 누가 시키겠습니까? 사단이 ‘강한 하나님’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사도는(갈 6:17) 이런 환상을 용납하지 않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야 될 자아 붙들고, 살려주시고 키워달라고 떼를 쓴 우리 자신의 철없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3강-고후 13장 3-4절(약하신 예수님)1701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3절-4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3-4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사탄이 가면 쓰고 설치고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그동안 강함의 가면을 쓰고 사탄이 하나님노릇을 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강함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자동적입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한다는 말은 탈을 쓴다, 가면 쓴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때 사탄이 가면 쓰고 “그래, 하나님 여기 있어. 뭘 도와줄까? 난 전능하신 하나님이야. 나에게 간절히 부탁하면 불쌍한 너희를 다 도와줄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 노릇 하면서 이 세상 신으로서 이 세상을 권세로 인간의 마음까지 장악하면서 통치했다는 겁니다.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진짜 하나님 쪽에서 성령을 받은 사도 본인은 역으로 나가는 거예요. 반대로 나가는 겁니다. 강한 하나님이 아니고 약한 하나님으로 왔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둘 중 하나의 하나님을 선택해야 돼요. 어느 것이 팩트냐, 어느것이 사실이냐. 

나를 이 땅에서 강하게 살게 하는 하나님이냐, 그것 바라고 교회 나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저를 좀 빈약하게 해 주옵소서. 저를 약하게 해주옵소서.” 노골적으로 말해서 “저를 그만 살게 해주옵소서.” 목회고 목사고 다 그것도 귀찮고 “그냥 떠나게 하옵소서.” 그게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냥 이 땅에서 지금보다 더 나로 하여금 일말의 강함이라는 것을 의도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내가 지금보다 강하게 살게 해주옵소서, 라는 생각, 아예 그런 맘조차 먹지 않게 해주시고 이 땅에서 약하게, 빈약하게 살다가 가게 하옵소서.” 그런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인가? 어느 쪽이냐를 가지고 지금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의 격전지니까. 싸움터인거예요.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그 실정에 맞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약한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이유가 사람들이 중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사로잡혀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사탄으로부터 계속 꾸준히 격려를 받아온 겁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더 살 수 있어.” 사도도 그런 줄 알았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고 사울이 바울로 바뀌면서 진실로 들이미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두 개의 현실을 마련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그 두 개의 현실, 영어로 해서 미안합니다만 프레임(frame)이에요. 두 개의 액자, 프레임을 사용한 겁니다.

두 개의 프레임을 사용하는데 그 두 개의 프레임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 경우가 발생돼요. 화투짝이 위치를 달리 하면서 두 개가 있으면 네 가지 경우가 발생되는 겁니다. 2곱하기 2, 하면 4거든요. 현실속의 환상이냐 환상속의 현실이냐, 환상속의 환상이냐, 현실속의 현실이냐, 이 세상에 네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왜 그런 법칙이 주어졌느냐 하면, 에덴동산의 두 가지 나무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선악지식을 아는 나무와 또 하는 생명나무, 나무를 두 개 심었다는 말이지요. 에덴동산에 아담이 살 때는 나무가 두 개였습니다. 두 개였는데 추방되고 난 뒤에는 나무가 두 개가 아니라 절대적 나무로, 선악나무 하나로 고정되었습니다.

인간에 있어서 선악체제 그것이 현실의 전부가 되어버린 거예요. 선악체제에서는, 나의 선함과 의로움을 쌓으면 쌓을수록 천국가기에 유리하다는 인식들이 유일한 현실체제, 정신체제로서 이 땅에 자리 잡은 겁니다. 하나님은 선하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합류하려면 나는 선해야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나는 거룩해야 된다. 하나님은 경건하다. 나는 경건해야 된다.

그런 식의 종교들이 확보된 거예요. 그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정신체제에 맞춰서 꾸준하게 십계명을 다 지켜왔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남보다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영생에 가까운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어떤 선한 선생이라는 소문난 사람이 있어서 마무리확인 작업에 들어가려고 그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방식을 먼저 제시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선악체제에서 생명체제로 바꿔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살던 이 분위기, 이 정신세계에 푹 잠겨 있는 이상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지요.

그러면 들어갔다가 빠진 분을 찾아야 돼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아, 내가 이 더러운 구석에서 살았구나.’하고 버려두고 누굴 따라가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예수님은 진실 되게 이야기를 해 줬거든요.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소리를 듣고 ‘빠이빠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쉽게 했는데 저는 실력이 없어서 어렵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자아말고 새로운 주체가 있어야 된다는 식의 어려운 말을 지난 시간도 했습니다. 자아도 나고 주체라는 것도 나인데, 자아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들었던 풍얼 가지고 만들어내는, 종합한 그것이 나고, 주체라 하는 것은 subject라 해서 밑에서 받쳐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관련시키는 그게 주체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약함과 나의 약함과 관련된 나니까 예수님이 약하니까 이 땅에서 약하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공생애의 답습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세상에서는 이 땅에서 저 천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접근(approach)이라 하는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야기한 것은 뭐냐? 창세전에 있었던 사실이 원천이에요. 거기서부터 오히려 이 땅을 향하여 내려오는 식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직까지 이 근호 목사에게 들을 것이 있느냐고. 빨리 빠져나오라고. 아주 강권해서 이야기해요. 그래서 제가, 영이 다르다고 하지 말고 제 책을 보고 성경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는데요.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땅에 내려왔어요. 내려와서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에 복종했어요. 그리고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약해지신 하나님과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아직도 거기에 속아 넘어가고 있느냐’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가를 어제 내내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생각해 보니까 오늘 본문과 딱 맞아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뭐든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겠지.’

이미 마귀로부터 형성되어 있는 선악체계, 이게 유일한 현실이고 유일한 팩트라고 여기는 인간에게는 주체가 아니고 자아, 나에요. 나를 강하게 해주는 하나님 같으면 제가 두 말 않고 믿겠습니다, 가 유포된 그 세계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도바울에 의하면 강함의 가면을 쓴 사탄, 악마에요. 악마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행세를 해온 겁니다.

“교인들을 좀 강하게 만들고, 교인들로 하여금 위로받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부정적으로 한다면 빨리 빠져나오라.” 이렇게 한다면 정말 저는 감사하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딱 이 문장이에요. 왜 실속 없는 짓을 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실속 없는 사랑, 실속 없는 구원,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 말이지요.

믿고 구원받고 무슨 실적이 있어야지 백날 믿고 따라봐야 실속 없잖아, 라는 것이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저는 이야기합니다. 실속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사탄을 믿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고 어떤 실적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고 사탄이에요. 뭘 더 얻고자 교회 온다면, 서울강의에서도 했지만,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도 대나무 달린 무당집이에요. 

근본적으로 지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의 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달라요. 하나님 자체가 다르다니까요, 하나님 자체가. 현재 나를 키워줄 하나님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짓게 만드는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 그런 하나님이냐, 그 하나님이 달라요.

2천년 동안 교회가 어떻게 가르쳐왔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다 무시합니다. 지금 우리들 문제에요. 나를 완전히 빈약하게 만드는 하나님이냐, 나를 풍성하게 만드는 하나님이냐, 그 차이라니까요. 

누가복음 18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왜 다 떨어져 나갔는가가 나와요. 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이미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분이 예수님이에요.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선지자들이 한 목소리로 오실 분이 오시는데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고한 거예요. 이것 때문에 베드로도 삐졌고 열 두 제자가 다 떠났습니다.

그들은 전부 다 자아에요. 쉽게 말해서 나에요, 나. 그런데 예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뭐냐 하면, 인자가 이방인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는 그 희롱과 관련성이 있는, 그 예수님만 희롱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희롱 받고, 예수님만 침뱉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침뱉음을 당하고, 예수님만 모독 받고 하대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대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본뜻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밀어붙이는 주님의 자기고집이고 자기 뜻이에요. 이걸 그냥 담는 거예요. 흔히 사람들이 교회 오면 믿어서 구원받는다 하지요. 믿음이 뭐냐 하는 거예요. 믿음이 뭐냐 하는 것은 일반 목사들이 이야기해요. 믿음은 그냥 맡기는 것이다.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냥 맡기는 것이다.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맡기면 편하지요. 여러분, 머리 손질할 때 그게 괴롭던가요? 머리 손질해주니 편하지요. 그러나 머리 손질하는 것과 문신을 새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문신 안 새겨 봤습니다마는. 머리손질은 머리카락 잘라봐야 별로 안 아프거든요.

문신을 새길 때는 따끔따끔 할 게 아니겠어요? 피부를 찌르니까. 주님은 우리를 복음의 비밀의 운반책으로 사용해요. 새기는 거예요. 그걸 주님의 피가 새긴다고 해도 돼요. 또는 다른 말로 피의 운반체라고 해도 되고요. 또 다른 말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할 때 성령을 운반하는 성령의 운반체라고 해도 되는데 오늘 본문대로 하면 뭐냐?

예수님의 무시당함의 운반체, 예수님의 빈약함의 운반체로서 너도 동일한 주체로, 자아가 아니고 주체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아프지요. 아파요. 아픈데 무슨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공항에서 자기 짐도 아닌데 남의 짐 들어달라고 할 때 조심하라고 하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돈 2십만 원 줄 테니 여기서 저기까지만 운반해 달라.” 해서 돈이 궁한 대학생이나 아줌마나 이런 사람들이 그 짐 운반하다가 공항 탐색하는 개한테 걸려서 보니 자기는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몰랐지요. 운반하다 걸려서 가방 열어보니 마약 들어있다는 말이지요.

십자가를 운반하는 것은 우리 소원 아니에요. 이것은 예상 못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 십자가를 넣어놓고 운반책으로 삼았는데 세상의 마귀는 냄새도 잘 맡지요. 킁킁거리면서 ‘우리하고 다르네. 종류가 다르네.’ 이래가지고 핍박하는 거예요. 거기에 빠지지 말라고, 그리고 빨리 나오라고 하면서.

우리도 맡기고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맡긴다고 할 때 더 좋은 생각은 뭐냐? 목욕탕 때밀이입니다. 때 밀 때 그냥 맡겨요. 너무 편해서 그냥 잠만 자요. 마사지 할 때 맡기잖아요. 주께서 지금 우리보고 마사지 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그거 가짜입니다. 마사지 하는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 때는 모조리 다 벗겨내는 주님입니다. 

신앙생활, 교회 5십년 다니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목사, 장로가 되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짝도 의미 없어요.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나 건드리지 마라. 예수님의 흔적 가졌다.” 운반책이지요. 십자가를 가졌으니 건드리지 말라. 나는 너하고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6장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자기 오래 사는 것 자랑하고요. 자랑질들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자랑질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해요. 자랑할 것이 없어서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신세타령하고 있어요. 총으로 쏴 죽이고 싶지요. 성경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잖아요. 십자가만, 오래 산 것 자랑하지 말고. 

연세 많은 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래 산 것 자랑하지 말고,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지 말고, 그렇게 십자가만 자랑하라 하는데 왜 오래산 것,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느냐 하면, 이게 자아기 때문에 그래요. “부럽지?” 이러고 있다고요. 성경에서는 심판할 때 바람에 나는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냅니다.

이 쭉정이의 특징이 뭐냐? 시편 1편 4절에 보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했어요. 아무것도 운반할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운반할 것이 없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다리, 그렇게 보면 돼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바람에 휙휙 날리는 비닐봉다리, 그게 뭐가 귀하겠습니까?

그 실속 없는 인생살이, 그런 것을 주께서 가려내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가 오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 처지를 자기보기에 수치스럽게 본인이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 밖에 안 되나? 난 왜 지경으로 이렇게 돼버렸지?’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보니까 이게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죄가 뭐냐를 알아야 돼요. 죄라는 것은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고 죄가 아닙니다. 벌거벗은 것이 죄가 아니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순간 이미 죄 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가리개가 없으면 그것은 저주받는다. 가리개 밑에서는 모든 것이 죄다. 

주님의 관심은 네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림막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우리는 피조물인데 피조물의 존재의미는 뭐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림막 때문에 천국가게 되었다는 그 가림막에 집중하고 그것만을 자랑하는 것,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자아에서 주체로 만드는 본래 목표고 목적이에요.

그래서 그 가림막, 가죽옷이지요, 십자가지요, 그 가림막만 자랑해야 돼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그 가림막만 자랑할 자냐,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검은 비닐봉다리냐, 그것으로 구분하는 겁니다. 가림막이 있으면 마약 운반책이 되겠지요. 십자가인데 그게 오늘 본문대로 하면 약하신 그리스도에요. 약하신 하나님.

약하신 그리스도라는 이 말,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약하신 그리스도라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가 있느냐, 이 문제를 따져야 돼요. 그냥 하나님 믿자, 내가 믿는 것이 진실한 하나님이다, 그러면 되는데 약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미 이 세상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강하신 하나님을 신봉하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게 표현해서 뭐냐?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걸 이 세상에서는 대리 표상해 버리면 약하다, 강하다, 이렇게 표현이 돼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 문제가 이 세상의 존재의 세계에서 표현할 때는 성질을 집어넣어서, 속성을 집어넣어서 그것을 표상,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명하는 내가 더 어렵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강한 하나님 안 믿고 약한 하나님 믿겠습니다.”라고 시도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온전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있다, 없다, 대번 알잖아요. 그런데 있다, 없다, 이걸 안다는 자체가 엉터리에요. 

왜 엉터리냐 하면 예를 들겠습니다. 어려워서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프슨 산에 놀러간다고 해 보면 그 산이 굉장히 아름답지요. 그런데 어떤 지점을 정해서 거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막상 그 아름다운 지점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딱 들어가 보면 거기에 돌 몇 개, 잔풀 몇 개, 그것뿐이에요. 

멀리 보면 아름다운데 가까이 가보면 거기 가기 전의 이 동네와 똑같아요. 그러면 ‘아름답지 않다.’ 가 아니라 ‘아름답다.’가 없어진 거예요. ‘아름답다, 가 없다.’가 돼요. 이 모든 것이 환상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여기 있잖아요. 이게 환상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환상이라고 하면 세포가 몸에 모여 있는데 이게 무슨 환상이냐? 내 자식이 옆에 있는데 내 자식도 환상이냐? 그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니냐? 

그게 왜 환상이냐,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게 있으니까 실제고 없으니까 환상,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있다, 없다, 그 주어진 속성과 성격을 가지고 그걸 판정한다는 말입니다. 주어진 성격을 가지고. “아, 내 자식이 귀여워.” 그러면 그것은 환상이에요. “주여, 내 자식이 있어도 나중에 늙어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현재 내 눈앞에, 자아 앞에 어떻게 보이는 가로 결정짓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일방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되어 있어요.

여러분, 하나도 안 무섭지요. 저는 이게 왜 무서우냐 하면, 자살해도 안 사라진다는 겁니다. 자살해서 사라질 것 같으면요, 힘들면 자살하세요. 변 검사처럼.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동네 플래카드 붙이고 아들 검사되었다고 자랑했잖아요. 나이 얼마 들지도 않았지요. 40대에요. 국정원 댓글수사에 걸려가지고 변호사사무실에 갔다가 창문열고 뛰어내려서 자살했잖아요. 그 앞에 국정원 소속변호사도 자살하고.

이틀 전에 어머니가 암투병중인 친구 돕는다고 빚보증 섰다가 대신 빚 뒤집어쓴 울산의 26세 청년도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하고요. 자살하는 이유가 뭐냐? 나 여기 괴롭게 있는데 괴로움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팍 죽으면 그만 아니냐는 거예요. 문제는 안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래. 너는 교회 다녀라. 나는 절에 갈게.” 절에 가시든 다 좋은데 그게 다 호출, 소환이 되는 거예요. 절에 간다고 해서 인자의 음성을 안 듣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은 다 “이리와, 이리와!” 다 호출해서 심판을 받게 한다니까요. 하나님은 한 번 만들어진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게 왜 무서우냐 하면요. 내가 나를 처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섭다니까요. 내가 나를 처분할 수 없어요. 내가 나를 처분 못하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이 돼요.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안보이고, 이게 미치는 거예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무 두 개 심어놓았잖아. 나무 두 개인데 손가락 하나 꺾었어요. 나무 한 개 남았어. 선악과나무 한 개만 남은 너희들 죽여 버릴거야.” 그런데 그 죽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수치에요.

안 죽이고 계속 수치스러운 저주를 받고, 또 받게 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죽이지. 목 졸라 죽이든지 죽여 버리지. 왜 멀쩡하게 살게 해놓고 온갖 수치는 다 당하게 하십니까? 그래서 인간들이 어렴풋이는 알아요. 알아가지고 수치를 면하려고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그 다음에 성령 믿고 삼위일체 믿고, 복음 믿고, 경건, 거룩, 십일조, 봉사, 목사섬기고, 온갖 좋다는 것은 다 해요.

보약이란 보약은 다 먹듯이, 오메가3, WX부터 로얄제리, 홍삼 등등, 하루에 다섯 번 먹어요. 그거 믹이가 우얄래. 먹여서 죽이려고? 그렇게 하는데 그게 문제가 뭐냐 하면, 내 믿음 된다는 거예요. 갈수록 그게 화근이에요. 이게 설치면 될수록 내 믿음 돼요. 박 용기 쪽에 가서 그거 듣고 여기서는 이거 듣고, 자꾸 보약 먹듯이 하는데 그게 내 믿음이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수님 믿음과 우리 믿음을 분리시켜 버려요. 제가 자꾸 믿음을 포기하라고, 믿음을 버리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이게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에요. 빈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은, 주님의 뜻은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 있잖아요, 이걸 죽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을 놈이 무슨 신앙을 갖고, 죽을 놈이 무슨 사랑을 하고, 죽을 놈이 무슨 소망을 갖습니까? 흔히 말하기를 불행한 나라는 거예요. 그리고 행복한 나,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이 다섯 가지가 성경에 없는 용어입니다.

성경에 그런 것이 나오던가요? 성경에 이 근호 목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나오던가요? 안 나오지요. 이 근호 목사 믿음 좋다는 것이 성경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누구 불행해야 되겠다는 그것이 성경에 안 나오지요. 변 검사 자살했다는 그런 것 안 나오잖아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각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입 다물어야 돼요. 신앙생활 몇 년 했습니다, 입 다물어야 돼요. 내 인생 이렇게 처참하게 꼴아 박았습니다, 입 다물어야 돼요. 입 다물지 않고 까불다가 주님 앞에 당한 사람이 누구냐? 욥이에요. 

나불나불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진짜 입만 물에 뜨겠어요. 이렇게 고생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하다가 주님 딱 등장하니까 수그리! 푹 수그렸어요. 왜 그리 말이 많아요? 자아를 가지고. 우리는 운반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운반책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무슨 운반책인지 모르지만 그게 온 몸에 암세포처럼……, 그게 만약에 배꼽 부분에 운반되었다면 나중에 한평생 살다보면 배꼽의 암 조직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암 조직으로 다 퍼져 있어요. 그게 하나님 뜻이에요. 이 자아를 완전히 박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기도를 이렇게 해야 돼요. “당회장에서 어린아이까지 축복……” 이렇게 하지 말고 “당회장에서 어린아이까지 온 전신에 암세포가 퍼지게 하옵소서.” 온 전신에 죄라는 죄는 모조리 뒤범벅돼야 돼요. 

칼빈이라는 이상한, 이상한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얼마나 사탄적이고 악마적인지요. 우리 성도에게는 선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조차 거짓말이지만. 우리가 선할 때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해놓고, 이제 성령 받았으면, 성령 안 받았을 때는 못했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선해야 됩니다.

선해야 되기에 이런 것이 선하다고 가르쳐요. 선을 가르치려면 악도 가르쳐야 되잖아요. 이게 선하고 이게 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문제가 달랑 있거든요. 그러면 다시.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거 가려서 적당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숟가락질을 오른손으로 하느냐 왼손으로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이냐 악이냐를 묻지 않으니 알아서 하세요.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가르치는 교단을 장로교단이라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교.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가리개 밑의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숟가락질을 왼손으로 하든지 오른손으로 하든지 그 가리개 밑에서는 주께서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죄로 만들어버려요. 왜냐? 그래야 그 가죽옷, 십자가만 돋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연약함, 예수님의 간 코스가 하늘에서 지상까지 내려오잖아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가 그것을 답습할 때 출발점이 창세전부터 이미 구원하기로 예정함부터 돼요. 

출발점이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인데, 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가? 칼빈처럼 선을 행해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새로운 패턴, 새로운 양식이 새로운 현실로 주어지는데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팩트다.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 뭐냐? 독생자의 영광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 골로새서 2장 9절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구겨서, 구겨서 그 모든 것을, 조롱받고 핍박받는 그 허약한 육체, 채찍질 받고, 침뱉음을 당하는 육체에다 모든 신성한 것을 다 집어넣었어요.

그 안에 꼬깃꼬깃. 그러면 그 안에서 경계 지어진, 그것 대치되는 모든 신성은 다 악마가 조작해 낸 거예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모든 것들, 교회 나올 때 이유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은 사탄의 미끼에요. 사탄이 발목 잡는 겁니다. 모든 신성한 것은 그 육체 안에 다 집어넣었어요.

그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세요. 어떤 KFC할아버지로 상상하지 마세요. 그냥 왔어요. 처음에는 조용하게 왔다가 나중에는 시끄러운데, 그냥 왔어요. 우리가 찾아갈 수 없는 나라인데 그분이 하늘나라를 대동하고 몰고 일부러, 우리가 못 빠져 나가기 때문에, 그걸 뻔히 아시기 때문에 “빼내줄게.” 하시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오신 그 모습이 채찍 맞는 모습이고 침 뱉음을 당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6장 6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정도로 모독을 받는가 하면, 군병들이 귀싸대기를 날려요. 휘청하지요. 휘청! 이게 뭐냐 하면, 메뚜기, 해바라기, 코스모스, 하늘의 별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날 창조하신 분을 우리는 보고 싶지요. 여러분은 안보고 싶어요? 그분이 저기서 귀싸대기 맞고 있습니다.

천국의 주인공 지금 귀싸대기 맞고 있어요. 그 군병들이 왜 예수님 귀싸대기를 때립니까? 비틀거릴 정도로 왜 때립니까? 때리고 나서 “누가 때렸게? 알아 맞춰봐라.” 이렇게 조롱한 그들이 예수님을 왜 때렸습니까? 문화거든요. 기독교는 문화입니다. 기독교는 문화에요. 문화라는 것은 나를 유익하게 만들고, 나를 이 땅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문화입니다. 종교는 문화에요. 오락이고 취미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그런 식으로 가르쳐 온 거예요. 문화생활 잘 하고 있는데 왜 시비냐, 그런 식이에요. 문화생활 잘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요? 생명? 아이고, 진짜, 여러분, 사람은 욕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신체에 손대는 겁니다. 부부가 싸우더라도 말로 하는 것은 돼요. 

그런데 때리면 이혼입니다. 몸에 손대면 이혼이에요. 손이 올라가다가 ‘아, 참아야 해.’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자가 “때려봐라, 때려봐.” 그렇게 되지요. “아, 씨!” 하다가 때리면 이혼이에요. 그래서 못 때리고 돈 안 되는 휴지, 그런 것 골라서 막 던져요. 비싼 TV는 깨면 안돼요. 딴 것 막 던져요. 그리고 에이, 하면서 집 나가지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얻어맞았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운반해야 될,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내려가야 되느냐 하면, 남에게 얻어맞아야 될 정도까지 내려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게 싫어요. 우리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문화생활이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조롱입니다. 그게 모독이고요. 

그러니까 감사가 안 나오지요. 주여, 문화생활 좀 편하게 해 달라고 하니 감사가 안 나와요. “주여, 이렇게까지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너 아직 더 맞아야 해.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더 맞아야 해. 휘청거릴 정도로 더 맞아야 해.” 주님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맞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발가벗기우고 수치란 온 수치는 다 받았어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수치거든요. 그 수치를 다 견디시고 받으시고, 그 다음에 죽기까지,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으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어야 돼요. 저거다, 하는. 

내가 그렇게 찾던 “주여, 왜 살게 하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십니까? 저는 왜 이렇게 하는 일이 안 됩니까? 지혜는, 참된 지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다가 “오! 저거다!” 그 말이지요. 처참하게 죽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조성해 오신 거예요.

이 얼마나 주님의 보살피심입니까? 저는 그걸 가지고 활주로 유도등이라 하거든요. 밤중에 등불이 죽 나열되어 있지요. 비행기가 딴 데로 가지 말고 이쪽, 이쪽, 이쪽으로 오라는 거예요. 지금 성령께서 우리에게 유도등을 통해서 계속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되고 좁은 길로 가라는 거예요.

좁은 길 자진해서 갈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계속 좁은 길로 가게 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자아의 모든 뜻,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를 남겨두지 않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고, 결국 그렇게 가면서 오직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인데 그 말씀을 봐야 돼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기에 ‘외’라는 말을 집어넣었어요.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목적이고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피 입니다. 

십자가 피를 우리 본의 아니게 집어넣어놓고 우리로 하여금 마약 운반책으로 만드는 거예요. 십자가 피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를 계속해서 살게 합니다. 그 살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날마다 주께서 우리를 목 졸라 죽인다고 생각하며 되는 거예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사는 것이 이게 신앙이라면 죽을 때 우리의 신앙, 우리의 소망도 같이 죽여야 돼요. 불행한 나, 행복한 나도 주께서 같이 목 졸라 죽여 버려야 돼요. 그게 세례라는 겁니다. 영적세례, 성령의 세례가 그거예요. 그게 신앙이에요. 

신앙생활을 주께서 하게 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있는 신앙을 버리게 만듭니다. 진짜 신앙인은 불신앙이 되어야 되고 진짜 불신앙자의 특징이 뭐냐? 자꾸 믿으려고 해요. 주여, 믿음 주시옵소서. 그거 가지고 뭐하려고? 왜 믿음 달라고 해요? 믿음 주시옵소서. 얼마나 안 믿었으면 믿음 달라고 하겠어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얼마나 주님 것으로 느긋하게 소유가 되었으면 그까짓 거 안 믿어도 되잖아요. 그렇게 그 무거운 믿음을 왜 합니까? 믿지 마세요. 사랑하지 마세요. 아예 소망도 갖지 마시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예 완전히 막가자. 

<인간극장> 보니까 어떤 여자 발레리나가 서른 살인데 청각장애자에요. 엄마가 용기 있게 일반학교에 보냈어요. 네가 청각장애자라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일반학교에 가서 수모당할 것은 당하고, 거기에서 대학도 네 실력으로 들어가라. 장애자로 들어가지 말고 네 실력으로 일반인과 경쟁해서 들어가라.

그래서 그 장애자는 일반인과 경쟁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원까지 마쳤어요.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그 어려운 것들을 잘 극복하셨군요.” 하니까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그 아가씨 내년 4월에 결혼한답니다.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고요.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제가 극복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견뎠습니다.” 

극복이란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알아서 챙긴다는 뜻이 있는 반면에 견딘다는 말은 나는 나에게서 손 놨다는 겁니다. 이게 진정한 맡김 아니겠어요? 아파요. 감사 안 나옵니다. 감사가 안 나온다는 것은 아프니까 본능적으로 감사가 안 나오지요. 그런데 돌아서게 되면 이마에 손가락 대고 미는 것이 있지요.

“인간아! 아직 멀었다. 언제 또 자아가 튀어나왔느냐? 

아직도 멀었고 아직도 네 역사생각하지? 네 과거 생각하고?” 

푹푹 쑤셔줄 때 이것이 예수님 증거 하는 겁니다. 

내 믿음 좋다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 증거 하는 겁니다. 

그 능력, 내가 할 수 없는 것,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고 

스스로 소망, 사랑을 다 꺾어버리고, 스스로 나 안 믿겠다 하는 

그 힘이 강하신 주님의 힘으로만 

그런 놀라운, 예수님 가는 공생애를 답습하게 된다


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각을 무슨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습니다. 남하고 비교해서 주눅 들지 않으려고 하는 이 사탄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분도 잊어버리고, 사는 이유도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주여, 찾아오셔서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우리지만 뭔가 담기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