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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난 게 아님(갈1;1-3) 171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10. 17:56
2017-12-10 12:38:19 조회 : 30         
   사람에게 난 게 아님171210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사람에게 난 게 아님(갈라디아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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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7-12-10 13:19 

사람에게 난 게 아님 

2017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1:1-3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편지 초반부터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을 보편적으로 설정하지 않는 한, 복음은 설명할 수 없다고 보시는 겁니다. 복음 혹은 진리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쪽에서 전면적으로 거부하게 하는 식으로 복음은 출몰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충실하게 지탱해오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 충실’입니다. 이런 자세가 외부에 있다고 여기는 신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신에 대한 나의 충실’이 신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2인 1조가 되어 신앙의 세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게 아닙니다. 2인 1조가 아니라 3인 1조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부정적인 대상’으로 찍히게 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랍니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자기를 핵심으로 한 세계관을 펼치며 사느냐를 감안한 복음전달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배격입니다. 이 배격으로 인하여 인간은 ‘내 인생’ 자체가 부정당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동안 평생을 살면서 자기 인생을 곱게 유지하려고 가진 노력과 애를 쓴 모든 시도가 다 무익하고 헛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켜왔습니다. 자기 인생이 헛되다는 말은 곧 ‘신에 대한 자기 헌신’도 헛되다는 말입니다. 

복음에 준해서 인간 자체가 이토록 부정적이라면 더 나아가서, ‘인간을 위한 교회, 인간에게 필요해서 만든 교회,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는 교회’도 역사 교회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참으로 참된 교회이기 싶으냐? 그렇다면 인간을 의식해서 만든 모든 요소를 교회에서 빼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는 곧 이 땅에 ‘교회 없다’와 같은 말입니다.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 천국가기 위해 교회를 찾아 나왔다면 그것은 곧 가짜 교회에 출석한 셈이 되고, 이로서 그만큼 그 사람은 지옥에 접근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천국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편안을 위해서 찾는 천국은 ‘인간을 위한 천국’이기에 지옥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배제해야만 하십니까? 그것은 사단과 인간은 변화를 원치않고 과정도 생략한 채, ‘지금 이대로 천국 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현 자아에 ‘최종성’을 부여하고 있는 겁니다. ‘최종성’이란 최후가 되어도 지금의 자아가 유지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 ‘최종성’은 곧 ‘절대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절대성이란 둘을 용납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최종성은 그 누구에게 임의로 내어놓지 않으려합니다. 평소에 교회에 착실하게 나오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더라도, 지갑에 돈 떨어지게 되면 사태를 심각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의가 의미있습니다. “돈 떨어지는 것이 심각합니까 복음과 멀어지는 것이 심각합니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의논된 겁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밀치는 것은 곧 현재의 자기 상태를 최종적으로 그대로 끌고 가겠다고 강한 사단의 고집을 반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조치는 이런 세계에 ‘그물’로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7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투망하는 작업을 두고 말합니다. 변화의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물로 뒤집어씌우게 되면 자아들은 못 빠져나갑니다. 

달아날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아를 절대적인 최종상태로 끌고가기 위해 모든 계급 투쟁은 다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제가 계급투쟁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인간이라는 이유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을 좋고 훌륭하고 성공한 자리로 단정짓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욕하면 바로 그 진영과 계급투쟁을 벌리게 됩니다. 

즉 자아가 설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이 세상에 좋은 쪽과 나쁜 쪽이 상주하는데, 일단 자신이 있는 곳은 무조건 좋은 쪽이고 이점을 정당화 하는 기준은 저 나쁜 쪽과의 차이를 확고히 하는 식으로 자아는 움직입니다.이 차이나는 기준을 정하는 주도권을 본인이 절대 놓치지 않는 식으로 모든 자아들은 살아고 있습니다. 

그물은 이 모든 시도 위에 포괄적으로 그물망을 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만 아시는 그 기준에 의해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최종성을 가지면서 결정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나라를 만드시고, 거기에 쉬지 않고 율법을 퍼부었습니다. 

거기서 나타난 최종적 사실은, 하나님과의 화목은 오직 ‘피’ 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물의 피는 아니다 는 것이 역사 끝에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피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된 바로 그 분의 피만이 화목제물이 됩니다. 

그 정도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의 일에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자아들의 세계는 이 피, 사람에 의해서 벌어진 죽음을 역겨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피를 투척합니다. 인간들은 거대한 그물망 안에 있기에 그물 밖의 사정과 연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오직 자신만이 살려고 합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풍경은 바로 ‘홀로 사는 식’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식으로 함께 하는 겁니다. 이 ‘함께’로 인하여 더 이상 성도에게는 ‘내 인생’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와 함께 있어 계속 피를 투척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 피의 힘으로 윤리, 도덕을 관통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아를 힘들게 했던 모든 수치스러움에 오는 공포심도, 두려움과 협박도 관통하게 됩니다. 관통하고 난 후의 모습은 ‘공백’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텅텅 비워도 싸다는 겁니다. 

이처럼 피로 이미 구원했음을 알리는 작업을 벌이시는데 그 부산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나는 이처럼 홀로 살 생각이었고 자신의 자아 관리로 구원받을 생각했다”는 악마적 발상을 밖으로 쏟아내는 일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쉬지 않고 계속 피가 우리 안에 투척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7강-갈 1장 1-3절(사람에게서 난게 아님)1701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1절-3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1:1-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람들에게 나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서 나면 말썽이 된다는 거지요.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 사람들의 감정에서 나오는 천국이라면 벌써 이것은 가짜가 된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천국은 사람의 것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서도 안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불교 같은 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 고통에서 어떻게 면제될 것인가, 어떻게 힘든 인생에서 편하게 살 것인가, 그런 욕구에서 나온 복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뭐가? 복음이.

그렇다면 복음 자리에 교회를 집어넣어 봅시다. 사람이 원해서 세운 단체여서도 안 되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세운 단체도 아니어야 그게 교회라는 겁니다. 그걸 천국으로 바꿔 봅시다. 내가 필요해서 가는 곳이 천국이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원해서 만든 천국도 안 되는 겁니다.

정말 사도바울이 목회를 하려는지 말려는지, 편지 초반부터 가려면 가라는 식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을 설명할 때 초반부터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라고 할 때 이 대목을 딱 보면서 우리가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나오면 왜 안 되는데? 사람이 뭐가 문제인데? 사람에게 어떤 안 좋은 것이 있기에 사람에게서는 안 나와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죽 하면 나오겠습니다만, 사람은 본인을 최종성으로 간주해요. 이 상태가 최종상태라고 일반적으로 우기게 되는 겁니다. 계속 이 상태로 가자는 거지요. 지금 내가 아는 이 상태를 세상 끝 날까지, 죽고 난 뒤까지 이 내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뭐가 빠지는가 하면, 과정이 빠져 있지요.

과정이라 하는 것은 뭘 유발하느냐, 변화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천국 넣어주세요, 라고 하면 주님께서 “안 된다. 달라져야 돼.”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재가 최종상태, 최종성이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없어요. 내부적으로 어떻게 달라져요?

회개해도 내가 회개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난 다음의 내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기를 원하고 있어요. 뭐든지 그래요. 반성을 해도 마찬가지고. 지금 내 최종적인 가치, 내 의미를 “에이! 이거 없애버리자.” 절대로 우리는 이러지를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자살하지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현재 내 모습 꼴 보기 싫다고 자진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자살이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가룟유다처럼 자살하지 않는 한 “그냥 대충 이대로 갑시다. 따지지 말고 이대로 그냥 받아주세요. 이대로 줄곧 갑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왜 안 되는가? 1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1절에 보면 주체가 세 명 나옵니다. 하나는 사람,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체가 나오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요. 인물이 셋이 등장합니다. 그 세 명의 인물 가운데서 단 하나가 부정적으로 나와요. 사람은 아니고, 이걸 뺍시다. 손가락 세 개중에서 하나 접고. 인간은 접읍시다. 

인간을 접으면 남는 것이 뭐냐?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만 달랑 남지요. 여기서 3인중에서 하나를 ‘아니야’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둘을 ‘그래야 돼.’라고 부각하기 위한 거예요. 제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아니야’라고 한다면 ‘천국은 누굴 위해서 왜 만들어놓았는데, 그리고 지옥은 왜 있어?’라고 할 때 3항 한 조라니까요.

나를 접는다고 해서 다 깨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는 인간 자기가 죽으면 세상도 함께 의미 없잖아요. 그것은 평소에 인간이 세상을 볼 때 자기중심의 의미로 보기 때문에 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에 내가 없으면 지금 강대상 앞에 날라 다니는 이 벌도 무섭지 않아요.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3항 1조, 복음을 설명하는데 세 개가 한조가 되어서 설명한다는 말이지요. 흔히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2인 1조잖아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면 그게 복음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예수 믿으라고 했고 나는 믿으면 되고.

2인 1조에서는 둘 다 살아 있어야 돼요. 둘 다 부정적이 되면 안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믿으라고 줬으면 ‘예수 믿겠습니다.’ 하는 내가 부정이 되어버리면 모든 일이 파토가 난다는 것이 교회에서 하는 주장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반대로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너의 믿음 아니고, 너의 소망 아니고, 너의 사랑 아니라고 그 손가락을 접으라니까요.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 정말. 손가락을 접으라고, 너의 믿음, 소망, 사랑은 아니라는 겁니다. 인생 살 때 남의 인생처럼 살아 달라, 그 말이에요. 우리가 인생 살잖아요. 내 인생이라 여기지 말고 남의 인생이라고 여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생이 아니고 남의 인생이라는 말이지요.

주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주의 일에 관여하면 안돼요. 그러면 우리 일만 하느냐? 우리 일에 관여할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서 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가락 접는 과정이 있어야 돼요. 내가 내 인생 살아봤자 그것은 무익하고 헛되다 하는 그 과정을 겪도록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3항 1조에서 나는 접고 두 분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이라는 이름하에 주께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복음 외에 아무 일도 안 해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3항 1조가 되어 있고, 나는 접고 두 분만 달랑 있다는 말이지요. 그 두 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에요.

그렇다면 복음은 뭐냐 하면,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만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는 사이에서 우리도 컨닝해서 좀 끼어들고 같이 좀 알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구태여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몰라도 구원되기 때문에.

참 충격적인 이야기지요. 우리가 몰라도 구원돼요. 구원되고 난 뒤에 비로소 우리는 슬슬 알게 되지요. 알아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 이미 3항 1조에 다른 피조물로 가담이 되어서 새로운 3항 1조가 구성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왜 내가 접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수용하면서 아버지와 아들만 창세전부터 아는 내용이 슬슬 우리에게 넘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 되면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 거지요.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해서 내 인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인생은 없는 거예요. 있지도 않은 내 인생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고민들 했습니까? 없는 내 인생 가지고 얼마나 그것 붙잡으려고 고생들 했습니까? 접어야 되고, 없어져야 되고, 사라져야 될 내 인생인데 그걸 붙잡겠다고 얼마나 헛수고를 해요.

여러분이 따사로운 대낮의 밝음이 아깝다고 서산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섭섭한 적이 있지요. 그러면 노을을 따라가서 한 번 잡아보지요.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 노을이 아까우니까 해가 넘어가지 않도록 잡으려면 저 갓바위까지 쫓아가야 돼요. 팔공산까지 따라가야 돼요. 거기 가면 노을이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네 인생은 변화가 일어나야 되고, 변화라 하는 것은 두 분이 돋보이기 위해서 우리를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없앨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태어나게 했는가 말입니다. 처음부터 없어질 것을 만들지를 만들지요. 그 이유가 뭐냐? 아버지 보기에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드는데 있어서 예수님도 변화를 겪어야 돼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 내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시도되는 하나님 자체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은 주님이 되셔요. 하늘나라에서 그냥 사신다고 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경유해서 어떤 변화를 겪어야 되고 그 변화가 하나의 전쟁이라는 형식을 거쳐서 다시 영광스럽게 될 때 그 때 만유의 주가 되고 그 주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배경들, 하나의 무대장치를 세팅했는데 그 무대장치가 우주입니다. 그게 피조세계, 자연세계에요. 제가 지금 이야기 꾸며서 소설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이지요. 그 만물이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힘들게 했지요. 죽게 했잖아요. 그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획 잡힌 겁니다. 설계도에 나와 있어요. 죽음 없는 주가 없다는 거예요. 저주받지 아니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뭘 거쳐야 되느냐 하면, 저주라는 그 통로를 반드시 거쳐야 돼요. 그 저주는 뭘 로 생산되느냐 하면, 죄로 생산되기 때문에 아버지 뜻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죄가 절대로 쓸데없는 죄가 아닙니다. 그동안 여러분이 죄 안 지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실수라 이 말이지요. 죄 안 지으려는 것이 실수에요.

필요해서 만든 죄에요. 사탄도, 악마도 다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쓸데없는 것을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저주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탄을 주신 거예요. 나쁜 족속들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땅에 나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쁜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이 나빠지지를 않습니다.

이 아래층에 화장실이 있는데 미장원 손님이 많다고 여자 화장실을 열어놨어요. 어느 날 술 마신 남자가 들어가서 여자화장실 거울을 깨놓았어요. 거울이 없어졌지요. 그 다음에 내가 가서 자물쇠로 채워놨어요. 내가 나쁜 짓을 했어요. 나쁜 사람이 없으면 내가 나빠지지를 않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보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이 착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고 이 착한 지금의 상태를 자기의 최종성으로 일방적으로 간주하고 결론으로 맺으려 하는 심성으로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은 자아에 묶였다 보면 됩니다. 인간은 매사에 자아에 묶여 있어요.

무조건 나는 착한 쪽에 있고 그리고 그 착한 것이 계속 이어져서 천국 가서도 계속 착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무슨 중심이냐 하면 나 중심이 돼요. 자아중심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세계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손가락 세 개 해서 하나를 접은 겁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아예 접어버리게 하는 거예요. 너는 네 중심으로 살 권한도, 자격도 없다고 박탈해버리는 겁니다. 그 박탈하는 방법이 뭐냐? 인간이 자아중심이 될 때는 인간이 투쟁을 벌이는데 자기는 일단 무조건 좋은 쪽이에요. 선하고 착한 쪽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잘해주면 그것은 선이라고 봐줄 수 있는데 나한테 못한다면 악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투쟁이 무슨 투쟁이냐 하면, 계급투쟁이에요. 계급투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속해있는 선하고 합당한 계급과 나를 대적하는 계급과 투쟁을 벌이는 겁니다. “목사님, 우리는 착하니까 이미 승자, 이긴 자가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그게 현실적이 아니에요. 현실은 뭐냐 하면, 착한 쪽과 나쁜 쪽의 차이를 내가 만들어내겠다는 그 주도권의 투쟁이에요.

계급투쟁이라는 것은 계급사이의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무조건 일단 승자고 무조건 착한 쪽에 두고 그 다음에 나에 반대하는 쪽은 나쁜 쪽에 두기 위한 그 기준점을 누가 쥐느냐, 누가 만들어내느냐, 누가 만들 자격을 가지느냐, 그 투쟁을 자아가 벌이는 겁니다. 이렇게 말이 어려운 것을 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동네 사는 할아버지가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에 “담배 여기서 피우면 윗 층으로 올라옵니다. 밖으로 나가세요!” 하니까 인상을 확 쓰면서 안 나가는 거예요. 존심이 있으니까. 다시 “나가세요!” 하니까 “알았어요!!” 하는 거예요. 요거 계급투쟁입니다. 

왜냐하면 뭘 로 내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면, ‘여기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하는 법적인 기준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 쪽은 담배를 안 피우는 쪽이고 저쪽은 담배를 피우는 쪽, 벌써 계급이 두 개가 되었지요. 그리고 담배를 안 피운다는 기준을 제시한 내 쪽은 담배를 안 피우기에 무조건 착한 쪽이 되는 거예요.

아까 말을 어렵게 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매일같이 기준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요. 누가 만들었는가? 자아가 만들어요. 내가 속한 교회는 좋은 교회고 내가 다니는 교회를 반대하는 쪽은 나쁜 교회고.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내가 만들어요. 왜? 내가 주도권을 쥐는 승자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자,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방법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두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물. 그물은 고기 잡는 그물인데요. 마태복음 13장 47절에 보면, 천국은 ……,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물이라고 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천국은 그물이에요. 

그물은 포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은 포괄성”이라는 말을 했는데 신은 거대한 그물망이라는 뜻이에요.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진해서 누구의 올무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진해서 누구의 올무가 되어야 돼요.

누구의 올무가 되는 것이 현대인들은 굉장히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계급사회가 지나고 1차 대전 이후에 대중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하나의 입자들이에요. 하나의 개인밖에 몰라요. 누구에게 얽매이고 누구에게 속하는 것은 아주 질색입니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말해줘요. 모든 인간은 반드시 중력에 매여야 됩니다.

중력에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크레인이 무너지고 배가 뒤집어지고 낚시 배가 엎어지고, 모든 것이 중력이에요. 중력을 거슬러서 가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매일 데에 매이는 것이 자유에요. 그런데 그물을 쳐버린 겁니다. 누가 기준을 세우느냐, 그 투쟁을 하다가 그물을 쳐버리니까 외곽에 쳐진 그물자체가 “입 다물어! 내가 기준이야.” 주님이 기준으로서 쳐들어오신 거예요.

3항 1조에서 우리를 접어버리고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고 있는 그 기준이 이 세상에 그물형식으로 덮쳐버린 겁니다. 그물을 던진다는 말을 뭐라고 합니까? ‘투척’이라고 하지요. 어떤 집 담벼락에 치우고 또 치워도 계속 개똥이 또 있으니까 방송국에다 제보를 했어요. 아침마다 개똥 치우는 게 힘들어 죽겠다고.

그래서 방송국에서 살펴본다고 cctv를 달았지요. 개가 그러는 줄 알았는데 개가 아니었어요. 앞집 사는 노부부의 어떤 분이 그렇게 똥을 투척을 해요. 남의 집 담벼락에 이렇게 개똥을 투척해도 되나 싶어서 개똥분석에 들어갔는데 개똥이 아니었어요. 사람 똥이었습니다. 사람 똥 중에서 여자 똥이었습니다.

나는 남자 똥과 여자 똥이 다르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앞집 여자 분이 치매에 걸렸는데 여기서 포인트는 자기 집안은 깨끗하다는 거예요. 그 대신 옆집 담벼락에는 자기 똥으로 완전히 도배를 한 겁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 나왔던 모양이지요. 

지금 주님이 이 그물 속에다 피를 투척해요. 사람 피를 투척한다고요. 개피도 아니고 염소 피도 아니고 소 피도 아니었습니다. 사람 피를 투척한다는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확정된 계획이 이 물질세계, 자연세계에 어떤 실체성, 물질성으로 나타날 때는 딱 하나로 나타나요. 그게 에요. 

피라는 그 한마디, 창세전에 예정된 모든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뜻은 이 땅에 피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피는 인간들이 제일 역겨워하는 거예요. 계속 배척하지요. 그런데 피가 계속 날라 들어옵니다. 그물 안으로. 예수님의 피가 날라 들어온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먼저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종족을 만들고 그동안 꾸준하게 거기에 말씀을 투척해 왔던 그 결론이 뭐냐? 피였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화목제물 없이는 아버지께 나가지 못한다는 원칙을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걸 역사적 사실로 만든 겁니다. 프레게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보다 법칙이 먼저라고요. 20세기 초반의 논리학자인데 자기가 평생 연구해보니까 법칙이 사실보다 먼저다.

먼저 어떤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이 현실화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만족스러운 나라가 천국인데 그 천국의 원리는 법칙화되어 있고, 그 법칙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날 때는 화목제물인 거예요. 화목제물인데 그 화목제물이 실제화 될 때는 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피가 누구 피냐가 중요한 거예요. 신약 마지막에 와서. 누구의 피냐? 하나님이 직접 화목제물이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화목제물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요. 하나님이 직접 화목제물이 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화목제물 될 자격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은 안 받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것도, 어떤 것도 안 받아요. 인간의 정성, 순종, 맹세, 믿음, 사랑, 헌금, 전도, 열정, 어떤 것도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마무리 짓습니다. 인간에게 맡겨줘 버리면 인간은 변화를 싫어해요. 지금 이 상태 이대로 천국 가고 싶어해요.

왜냐하면, 어떻게 변화해야 됩니까, 하는 그 변화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인간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왜 모릅니까? 그물 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물 밖과 연락이 안돼요. 자체적으로 열심히 하는데, 자체적으로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하는데 아무리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해봤자 자아가 만들어낸 그 기준이 있잖아요, 그 기준에 도달하게 되면 자기는 착하다고 우기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그물 밖에서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그 원리에 미흡합니다. 도달되지를 못해요.

그리고 그 자아라 하는 것, 사탄에 인간의 자아가 매여 있기 때문에 백날 인간이 선하고 윤리적으로 착해봐야 그것은 사탄이 요구하는 악마적인 모습에 부합될 뿐입니다.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피로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피 흘리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여러분, 돈 떨어지는 것이 다급하던가요, 복음 멀어지니까 다급하던가요? 어느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까? 사람이 교회 와서 예배드린다는 것, 아직도 자기는 에어포켓의 여유가 있다는 겁니다. 에어포켓이 뭐냐? 이번 낚싯배 뒤집혔을 때 세 명 살았잖아요. 뒤집힌 배 안에 공기가 약간 남아 있는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목 내놓고 스마트 폰으로 연락해서 살아남은 거예요.

아직도 교회에 나올 힘이 있고, 아직도 하나님 찾고, 예수 찾는 것은 스스로 내 힘으로 숨 쉴만 하고 살만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안 죽으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가서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아직도 자아가 내가 설정한 기준을 놓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그 기준이 살아 있는 한 나의 이 모습 이대로를 계속 받아달라는 거예요. 건전한 모습으로.

그물이라는 그 기준을 모르고 기준을 내가 생산해요. ‘이만하면 괜찮겠지. 이만하면 내가 잘 살았다고 우길 수 있겠지.’ 그러잖아요. 하여튼 연말 되면 내가 짜증이 나요. 12월에 캐롤송 흘러나오게 되면 “한해를 돌아보면서 올해 어느 지점에서 내가 바르게 살았고, 어떤 점에서 미흡했는가? 우리 다 같이 돌아봅시다.”

뭘 돌아봐요? 돌아볼 것이 뭐가 있다고. 돌아보면서 그 차이를 내는 그 기준을,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그 것, 그래서 자기 뽐내는 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올해 참 열심히도 살았다.’ 연말 되면 짜증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연말 되면 모든 인간이 불신자 됩니다. 신자는 없어요. 

“오랫동안 사귀었던……” 한해를 보내는 노래 불러가면서 자기연민과 자기단도리. ‘올해도 참 힘들었지만 힘내자 장그래! 오늘도 열심히 살았어.’ 지금 우리 마음속에 여자 똥이 투척돼야 정신 차려요. 나는 착하고 싶은데 똥이 들어온다니까요, 똥이! 그것도 여자 똥이! 예수의 피가 계속 날라들어요.

그물 바깥에서 성부와 성자가 의논한 것이 물체로, 실체로서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피에요.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잘 못살아도 봐주세요.” 자아가 자아 지키는 그것 외에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교회 나와서 빌면서 “내 것, 이 상태 지켜 주옵소서.” 

주께서는 변화를 원하는데, 변화라는 것은 과정이거든요. 계급투쟁이라는 과정이라는 말이지요. 주님도 그 안을 뜯어보면 사탄과 싸웠던 과정, 그 싸움이 가득 들어 있어요. 그걸 이기시고 승리하신 거예요. 그게 1절에 나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이거 설명하는데도 몇 시간 걸립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에요.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빠졌다고 생각하지요. 본문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소생이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드디어 죽은 자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그 죽었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물이 정하지요. 그물이 정하고 그 그물은 아버지와 아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시는 그 두 분만 아시는 그 기준으로 봤을 때 그 관계에서 끊어진 자는 이미 다 죽은 자가 됩니다.

그 죽은 자 속에 오야붕이 있는데요. 그 오야붕이 사탄이에요. 죽은 사탄을 중심으로 완전히 결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야기할 때는 피 빼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투척된 그 사람, 똥 빼고 이야기하자고 하듯이 투척된 피 빼고 우리 이야기하자.

남녀가 선보러 갑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여자 쪽에서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여자는 살짝 늦게 갑니다. 한 30분쯤 늦게 도착해서 “많이 기다리셨지요?” 그러면 “아니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여기 앉아 있습니다.” 하면 선 보면서 2초 만에 깨져버려요.

이 세상은 피 빼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똥 빼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합리적 협의체가 뭐냐? 그걸 두자로 ‘회사’라고 합니다. 회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피 빼고 구성돼요. 과학적 현실관이 뭐냐? 피 뺀 현실이 과학적 현실이에요. 그 과학적 현실, 우리는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았다고 다 같이 이 상태를 확정지읍시다, 이 세상의 철학이고 학문입니다. 뭘 해도 살았다 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개의 그물을 준비했습니다. 다 같은 그물인데 하나는 뭐냐? 역사를 마감시키는 그물을 준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3장의 그물입니다. 그물을 쳐서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를 주님이 제시한 기준에 의해서 골라낸다. 그것이 천국이다. 쉽게 말해 천국은 과정이다. 

천국은 이 땅에서 과정이고 천국은 작업이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천국은 완료된 존재가 아니고 지금 계속해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그 상태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작업인데요?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기준에 의해서? 인간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인간에서 나온 것도 아닌 다른 기준을 가지고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를 분류하기 때문에 누가 나쁜 고기냐?

자기 기준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이 갖는 기준, 쉽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겁니다. 아직도 그걸 포기 못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윤리와 도덕의 통을 피가 묻은 채로 관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끝까지 윤리도덕을 빠져나와 봐라. 빠져나오면 뭐가 있겠습니까? 공백, 빈자리가 나옵니다. 아, 처음부터 이 세계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고 있어서는 안 될 자리였구나. 오직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질 자리, 그 자리를 가지고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 천국에 대한 내용이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나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첫 번째 그물은 뭘 마감하느냐? 인류의 역사를 마감시킵니다. 그 그물이 우리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까지 들어와요. 내부까지 들어오게 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는 이런 상태까지 하나님의 기준이 차고 들어옵니다. 

오늘 설교 이해가 되는지 표정들이 없어요. 날씨 탓인가? 기분 탓인가?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 속에서 절대적인 것은 둘이 될 수가 없어요. 항상 나 위주에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것은 뒷전이고 나 위주라니까요. 아까 그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돈 떨어지는 것이 다급한 거예요,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다급한 거예요? 

돈 떨어지면 다급해요. 왜? 돈 떨어지면 내가 굶어죽으니까. 주님을 위한다고 백날 해도 지갑에 만원밖에 없으면 그 때부터 다급한 겁니다. ‘하나님이든 예수든 셰퍼드처럼 나 지켜 달라고 내가 도용했구나. 그리고 예수 믿는 그 기준도 내가 정했구나. 이 못된 인간.’ 

종말에 사라져야 될 내 존재가 마치 종말 너머까지 살아남는다고 스스로 우긴 거예요. 그 자세가 바로 사탄의 자세였습니다. 사탄은 변화도 필요 없고 과정도 필요 없어요. 지금 이대로 계속 하나님과 개깁시다, 이게 사탄의 요구에요. 그 사탄의 마음이 오늘날 각자의 마음속에 각자의 입자 속에 다 심겨져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사탄의 마음이에요. 자아중심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내가 절대에요. “목사님,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 돼요? 나는 나보다 내 자식을 더 좋아하는데요.” 그게 자기자식이니까 좋아하지요. 남의 자식 같으면 좋아합니까? 뭐든지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개도 내 개라니까요. 남의 개 안 지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요, 여러분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밖에 모르는 체로 사시라는 이야기를 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수정한다는 자체가 더 못됐어요. 안 그래도 못됐지만. 수정을 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수정하겠다는 그 의지, 의도자체가 어디서 나왔는가?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냥 내 인생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면 되는데 괜히 손대. 괜히 내 인생에 손을 대요. 자기 인생 손대지 맙시다. 처분에 맡기세요. 처분에 맡기려면 나는 나만 있으면 안 됩니다. 함께 있어야 돼요. 지난 주 낮 설교에 했는데 반응들 보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해서 다시 한 번 지난 주 한 성경 대목을 말씀드릴게요.

누가복음 23장입니다. 4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그 다음에 중요한 전치사가 나와요. “함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함께” 자아는 본인이 절대자에요. “함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함께 있는 것, 물론 주도권은 우리가 아니지요.

주님이 주도권을 쥐지요. 주님이 주도권을 쥐니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대로 자진해서 올무가 되세요. 자진해서 주님한테 매이세요. 마치 인간이 중력에 매여야 그것이 자유인 것처럼. 가끔은 낙하산 타고 비행기 타는 것 좋은데, 비행기 타고 살아봤자 힘들어요. 결국 땅에 내려와야 돼요. 비행기 타는 것 위험해요. 땅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좋아요.

중력이 우리의 팔자에요. 마찬가지로 중력이 우리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재미는 있겠지만 죽어요. 우리는 중력에 매인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중력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매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날라 가고 없어요.

내 인생이 날라 갔다는 말은, 내가 구태여 걱정할 일도 내 인생 날라 갈 때 같이 날라 갔어요. 그리고 내가 관여할 내 인생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놀면서 라면이나 끓어먹다 늙어 죽으면 되겠네.’ 주께서 그렇게 시키시거든 그렇게 하세요. 날마다 주님의 몸이고 주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주께서 이끌어 줄 거예요.

정말 가만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옆에서 투척 들어옵니다. 밑에서 담배연기 올라와요. 주께서 시켜서 계단 내려갔고, 가보니 할아버지가 담배피고 있었고, 주께서 시켜서 나가라고 했고, 그 사람도 주께서 시켜서 나를 꼴아보게 했고, 그래서 나는 한마디 더 했고, 끝! 

여러분, 우리 인생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자기가 깨달음을 얻는다고요? 어떤 사람은 닭 튀기다가 닭이 죽고 또 죽는 것을 보고 윤회를 깨달아서 출가한 사람이 있어요. <너의 등짝에 스매싱>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내하고 닭을 튀기고 있었는데 아내가 사라져서 알고 보니 중이 되어 있어요.

“혹시 이수영씨라고 계십니까?” “제가 수영스님입니다.” “여보 돌아와요.” “안 돼. 나는 닭 튀기다가 윤회를 깨달았어.” 윤회 깨달은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누구 좋으라고? 자기 좋으라고. 그러니까 그 불교신자는 혼자 살고 있어요. 그런데 혼자 사는 훈련을 누가 하느냐? 오늘날 대중사회, 현대인은 전부 다 혼자 사는 것을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또 교육시킵니다.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유치원졸업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에까지. 혼자 못살아서 환장한 거예요. 그리고 60넘으면 졸 혼. 졸 혼을 해도 괜찮아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그러니까 제 결론은 뭐냐 하면, 함께 있는 어떤 분은 날마다 우리의 변화를 유발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데 함께 하면서 나오는 것이 있어요.

함께 하게 되면 뭐가 나오는가? 혼 밥 있지요. 우리는 술 안하니 혼 술은 없으니까요. 혼 밥, 혼자 살던 버릇이 우리의 배설물로 남에게 투척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내가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아느냐? “함께 있습니다.” 백날 해도 그것은 거짓말이고요. 혼자 사는 그 모양새가 점점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걸 서울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속옷이 겉으로 나오고 겉옷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속옷을 겉에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슈퍼맨입니다. 주님께서는 뭘 바꾸냐 하면, 우리의 속에 있는 것, ‘나는 모든 것을 나 위주로 삽니다.’를 밖에 노골적으로 노출시킵니다.

노출시키면 그 속옷에 뭐가 덕지덕지 묻어있는가 하면,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공포가 묻어 있습니다. ‘이런 짓 하다 들키면 우세하는데. 이런 짓 하다 걸리면 남에게 몰매 맞는데. 무섭다, 무서워라.’ 나 위주로 살기 때문에 악마한테 그동안 시달렸던 것이 겉에 걸개처럼 밖으로 드러내도록 합니다.

속에서 누가 그렇게 하는가? 우리 주님께서, 이미 구원시킨 주님께서 그걸 바깥으로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인간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거든요. 그 불가능, 그런데 네가 어떻게 천국에 간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할 때 우리는 속에 있는 것을 두고 그저 손가락질을 하면 돼요.

피 입니다. “언제 네가 피를 키웠지?” 피는 키운 것이 아니고 투척된 겁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 그것을 두고 출몰이라 해요. 어려운 말로 생성.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의 복음은 뭐냐? 너라는 존재냐, 아니면 그 속에 침투한, 투척된, 출몰된 성령의 힘이냐? 

계속해서 그걸 대비하면서 진행합니다. 존재는 행함을 내놓고 출몰은 성령의 선물, 믿음, 그것도 우리 믿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우리 앞에 내놓게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두고 계속해서 갈라디아서는 마지막까지 이어져 나갑니다. 그 이어져나가는 첫 구절이 뭐냐? 

자아와 그리고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는 그 세계, 세 개의 요소 중에서 하나를 접어서 ‘너는 아니고’를 계속 지적하면서 그것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뜻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돋보이게 하는 그 편지 내용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또다시 우리에게 출몰했습니다. 출몰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복음을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거부했고, 배척했고, 내 생존에 도움 안 된다고 얼마나 귀찮아하고 역겨워했습니까? 주님, 이제는 그 역겨움이 오히려 반대가 되어서 우리 자신을, 나밖에 모르는 나 자신을 역겨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