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버리운 자(고후13;5-6) 171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20. 21:14
2017-11-19 12:38:50조회 : 75         
   버리운 자 171119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버리운 자(고린도후서 13:5-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fmOXd4O3AY, Hit:7
 이근호17-11-19 13:28 
버리운 자 

2017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3:5-6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13:6)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떤 외부 세계로부터 인간이 분류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쪽은 극단적인 저주와 다른 한쪽은 극단적인 복이 주어됩니다. 이 중차대한 일이 이루어지짐에 있어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들의 의견이나 의사는 일체 묻지 않고 진행됩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두 사이를 가르는 규정이나 기준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본인의 개입이 철저하게 차단되어야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고수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는 날에 정녕코 죽으리라”라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 원칙에서 봐서 현 인간들이 과연 이 원칙을 준수할 입장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즉 과연 어느 인간이 ‘선/악’ 기준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기준에 이의를 걸 수 없는 겁니다.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쫓기는 삶을 삽니다. 죽음에 쫓기면서 결과적으로 죽음 속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죽음에 쫓기듯이 사는 것은 성경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사단의 세력에 묶여 있기 때문이랍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도 ‘버려진 자’에 해당됩니다. 또 하나는 과연 이 세상에 ‘무지(無知)’함을 원하는 자가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삶의 지식과 지혜를 원합니다. 

무지에게 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수치스럽지 않는 나날이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수치를 느낄까요? 그것은 보는 눈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출생시부터 벌써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즉 어릴 때부터 인간들은 주변에 자신을 양육하는 자들의 요구에 들러싸이게 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본인이 행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타인의 욕망이 어느새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되어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타인들이 쏟아내는 각가지 욕망들을 주워모아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의 꽃다발로 장식하면서, 그 꽃이 시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 타인의 욕망 들어주기가 원활치 않으면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는 겁니다. 비록 ‘자기’라는 것이 확고하다고 주장하지만 남들의 욕망에 놀아나는 식으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마치 미꾸라지통에 담겨 있는 수백마리의 미꾸라지들이 계속 꾸역꾸역 쏟아내는 욕망들을 상호 목고 마시는 식으로 세상은 형성되어 있는 겁니다. 

이러한 자아상 중에서 ‘버림받은 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여기서 ‘본인을 위해서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본인’이라는 것은 ‘자아’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자아’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동반해서 같이 인식되는 것이 ‘자아’. ‘나’입니다. 하지만 이 ‘나’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때부터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에 의해서 조성된 ‘나’가 시작됩니다. 이 ‘나’는 예수님의 일방적 결심에 의해서 운명이 정해지는 그런 ‘나’입니다. 즉 저주받기 위해 태어나야만한 그런 ‘나’입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복받기 위해 태어나야만 하는 그런 ‘나’입니다. ‘버려진 자’나 ‘남은 자’나 공히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육체와 더불어 시작된 이 ‘자아’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그 균열의 지점에는, 이미 창세 전의 사정까지 모두 알고 계신 분이 계시는 지점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지 전부터 모두를 규정하는 그런 범주를 가지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지옥과 천국 양쪽을 다 참조할 수 있는 최후의 중립지역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 자체가 ‘심판 규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준과 경쟁에 나서는 세력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시기인 신약에 와서 규명된 율법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나는 네가 나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입니다. 즉 ”나는 네가 나의 명령(법)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할 것을 명한다“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받기 위함입니다. 위반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더욱 죄로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도 넘치는 겁니다. 이런 저주와 죄의 확장에 대해서 신앙의 대처는 복음서에서 다음의 두 가지고 돋보입니다. 하나는 백부장에 예수님에게 고백하는 방식입니다.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마 8:9) 

또 하나의 방식은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십니다.” 즉 둘 다 주도권이 본인의 자아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위적 노력에서 육에서 영의 세계를 노리는 그 가운데를 가로막고 일방적으로 결정하시는 주님에 넘이고 있는 겁니다. 이 두 가지 고백의 통합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소대합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이렇게 될 때 성도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사 뿐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겁니다. 

아이가 노동해서 부모로부터 장난감을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장난감을 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들의 자기 존재성에 따로 의미를 세우기 위해 제공된 것이 아니라 아예 뿌리 채 뽑아버리기 위해 제공된 겁니다. 상처의 딱지 안에서 새살이 돋아나는 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옥과 천국 사이에 누가 계신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1-20 16:26 
264강-고후 13장 5-6절(버리운 자)1701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6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5-6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버리운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세계에서 전 인류를 분류하고 있다는 징후가 여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분류를 시키는데 그 방법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나와 있어요. 

버리운 자라고 하면 그 버리운 자 안되기를 약간 기대하고 있잖아요. 버리운 자의 반대말이 뭐냐? 남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자 그리고 버리운 자, 이 둘 사이에는 경계가 쳐져 있고 분류를 하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뭐냐? 남은 자와 그리고 버리운 자를 가름하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주목을 해야 돼요. 

“하나님, 저는 남은자 입니까? 저 버리운 자 아니지요?”라고 자꾸 들이대지 마시고 어느 규정에 의해서 이렇게 전 인류가 갈라지는가를 봐야 돼요. 갈라지게 하는 그 균열의 지점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그 균열의 지점에 대해서 로마서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가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있어요. 

그 분류하는, 규정하는 기준이 어떻게 성숙해가고 어떻게 최종점을 향하여 달려가는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여러 가지 사례들이에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애굽과 그들이 분류되었을 때에 오해를 했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혈족에 속한 사람은 이쪽 편, 하나님 편에 서 있고 나머지는 마귀 편에 서 있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구약이니까, 최종적인 규정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처음에 교회 나와서, 안수해서 병 낳은 자는 구원받은 자고 안수했는데도 감기도 안 낳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 우리가 분류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그래요. 

어차피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있어서의 그 육이 자기의 본성을 숨길 수가 없어요. 육의 본성은 뭐냐? 나만 구원되면 된다는 그것이 육의 본성입니다. 관심사가 최종적으로 자기한테 가 있는 것이 육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저는 뭘 계속 이야기하느냐 하면, 관심사를 나 구원받느냐에 관심 갖지 말고, 구원된 자와 안 된자를 가름하는 그 기준이, 규정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을 다 봐야 되는데 구약은 그 기준이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이 안 된 시기를 구약의 시기라고 하는 거예요. 규정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지 않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지옥가고 어떤 사람이 천국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제 3의 중립지역에 서서 양편의 사정을 다 참조를 할 수 있는 최종적인 자리를 확보하려고 우리가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옥 안가고 천국갈래. 천국 갈 기준은 저것이구나. 내가 저걸 잡아야지.’라고 양쪽 다 알 수 있는, 양쪽이 다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제 3의 중립지역을 내가 차지하려는 그 싸움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싸움이에요. 

하나님께서 따로 설정한, 숨겨져 있는 것이지요, 따로 설정하고 있는 지옥과 천국의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처럼 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나를 좋은데 보내기 위해서 천국도 참조하고 지옥도 참조하고 그 기준까지 참조해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기준자체가 이미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 왔던 거예요. 그들이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실패했어요. 여호와 편에 서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실패한 거예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분류하는 기준에 있어서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법칙을 조금도 양보한 적이 없고 그것을 취소시킨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나무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세 가지 항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선악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탈락, 지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잖아요. 내가 잘사는지 못사는지 선악적으로 논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버리운 자 라고 할 때는 어떤 개념이냐? 윤리도덕에서 완전히 개판된 자를 버리운 자라고 일방적으로 엉터리해석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버리운 자라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버리운 자인가 하면, 선악체계가 아니고 예수님한테 버림을 받은 자에요. 예수님한테 버림받은 자라는 겁니다. 

“나는 너 모른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너 누군데?”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을 했습니다.” “보자……, 누구지? 당최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는 너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민 적이 없는데 너는 왜 그래?” 

버리운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쪽에서 예수 믿겠다고 설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생각나는 것이 북유럽에 고딕풍의 집들이 있잖아요. 노르웨이나 핀란드, 독일에 뾰족한 지붕들이 있다고요. 그 지붕에다 기름칠을 했다고 봅시다. 한창 지옥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데 잡을 데가 있어야지요. 

기름칠은 해놓았지, 빨리 꼭대기에 올라가야 되는데 그 꼭대기에 가는 기준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하니까 예수 믿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거예요. 심지어 아플 때도 교회 나오고, 직장 가야 되는데도 교회 나오고, 온갖 노력을 다 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거기다 누구한테 확인도장까지 받아요. 

“저 어때요?” “장로님, 믿음 좋습니다.” “저 어때요?” “집사님, 믿음 댓길!” “저 어때요?” “우리나라에 그런 목사님 없지요. 훌륭한 목사지요.” 남들에게 확인도장 다 받고 다 했는데 자꾸 미끄러져요. 지붕이 경사가 져있기 때문에 붙잡을 데가 없습니다. 기껏 붙잡는 것이라고는 선악을, 윤리 도덕을 붙잡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보면 뭘 해도 선악적으로 보는 자는 아예 천국에 못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백날 몸부림쳐봐야 기름때만 온 몸에 범벅이 되어서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구약 때 율법을 주셨고 신약에 와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를 제가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네가 나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율법을 주신 취지가 “나는,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요구한 것, 순종하라고 지시한 것을 순종하지 않고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율법의 취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어떤 활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간주하시고 그 자유가 속성이 어떤 자유인지를 너희는 모르는데 하나님은 안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자유는 율법에 위반하도록 되어 있어서 결국 미끄러지도록, 결국은 저주받도록, 버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기름칠 한 것이 율법이에요. 안식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하라, 그것이 미끄러지는 거예요. 

십일조 할 때마다 5미터 미끄러지고, 안식일 지킬 때마다 10미터 미끄러지는 거예요. 버려지라고.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요.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이게 화근이에요. 차라리 멋도 모르고 오게 되면 “주여,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올 것인데 신앙생활 한 50년 해서 장로 되고, 신학교 가서 목사 되고부터는 자기가 뭘 아는 것처럼 여긴다는 말이지요. 

창세기 2장에서 선악체계는 일단은 천국에 못갑니다. 손가락 하나 접읍시다. 선악체계는 못 간다. 두 번째,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못가요. 죽음을 무서워하는 자는 못갑니다. 얼마 전에 포항에서 뭐가 있었잖아요. 포항에서 이사 온 사람 잘했어요. 포항 흥해읍의 밭이 진원지인데 5.4인가 지진이 일어났는데요. 

그것보다 사람들이 전부 다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것 접어야 돼요. 요거 버리운 자입니다. 내가 분명히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는 마귀의 종노릇 한다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그리고 아브라함 자손에게 그리스도를 보낸 이유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건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굶어죽겠다고 교회 못나오고, 바빠서 교회 못나오고, 이래서 못나오고 저래서 못나오고, 말을 조심해야 되겠다만 아파서 못나오고,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죽는 것에 왜 떠느냐 하면, 목숨 달아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죽는 그 자체가 마지막 수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지막 수치,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버리운 자들의 특징은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도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를. 이게 표어에요. 오늘도 안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기를. 버리운 자들은 기도를 해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제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면 감사하지요. 응답을 이렇게 합니다. 

“이게 어디서 간섭질이야?” “하나님, 제 인생은 이렇게 가야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도록 했습니까?” “이게 지금 누구 인생을 논하고 있어?” 왜 내가 만든 인생을 네가 논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여, 이것까지는 되고 이것까지는 안 됩니다.” 주님이 같잖아서, “이게 지금 누굴 가르치는 거야?” 

세 번째, 무지상태, 모르는 상태인데, 안다고 껍적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거기에 대한 대응은 하나밖에 없어요. 욕설입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설을 한 것은 피조세계의 한계를 두고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피조세계의 끝은 예수님의 욕설의 끝이에요. 이 사탄의 새끼들이, 독사의 새끼들이,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버리운 자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끝내고 난 뒤에 내놓은 그 역사적 결론이 뭐냐? 남은 자는 이 세상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겁니다.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버리운 자의 반대말은 남은 자에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그 남은자가 어떻게 생성되는가가 나옵니다. 

6, 7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이 남은자라 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악한 자에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남은 자는 은혜로 남은 자에요. 

그리고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눈에 보기에 이스라엘이 인간으로 보이냐.” 그런 뜻이에요. 

이스라엘로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너의 행함으로 너 자신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안다고 여기고 챙기려고 하는데 율법은 위반하라고 준 거예요.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죄도 안 짓고 은혜를 받으려고 해요. 순서가 뭔가 빠졌어요. 여러분, 정강이 깨지면 나중에 거기에 딱지가 앉지요. 

기존의 살, 이 피부는 새살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미 옛날 구닥다리 살이에요. 점점 죽음의 표징, 죽음의 흔적이 계속 나타나요. 그런데 언제 새살이 나오느냐 하면, 놀랍게도 구닥다리 피부에 상처를 입어서 딱지가 앉았을 때 그 딱지 밑에서만 새살이 나와요. 다른 살은 새살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최종적인 규정, 최종적인 기준, 그 기준을 경유해야 됩니다. 

버리운 자의 대표자가 나오는데요. 참 성경은 얼마나 친절한지 몰라요. 버리운 자의 결정적 대표자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나오는데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가룟유다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출생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 정말 어려운데. 어려운 것을 어렵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태어나는 시점까지 아울러 모든 것을 다 알지 아니하면 그 기준에 미달되는 겁니다. 최종적인 남은자와 버리운 자의 기준에 미달되는 겁니다. 

태어나는 지점까지 몽땅 다 알아야 돼요. 그리고 태어나는 지점을 모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해서 ‘자기’라는 것이 나와요. 지난 시간에 자아를 다뤘지요. 인간은 자아라는 것이 태어나면서 동반해서 나오는데 그 자아는 왜 태어나기 전까지는 모르고 태어나면서 동반해서 새롭게 생긴 자아기 때문에 죽을 때는 날라 가버리는 자아에요. 

그 자아를 영어로 self, 또는 I라고 하는데 이것은 허상이고 이것은 환상이에요. 어렵지요.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양육하는 사람이 주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잔소리 듣고 명령을 듣게 돼요. 

그러면 어릴 때부터 내가 누구냐 하는 규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내가 얼마나 일치되느냐에 따라서, 내가 나를 양육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면 그것이 바로 나다, 라고 여기는 겁니다. 타인을 통해서 자아를 다시 구성하는 식으로 나를 만들어요. 그런데 그 타인이 누구냐? 

여러분이 시장에 가보면 대나무 발 엮은 통 안에 미꾸라지나 장어를 모아놓았어요.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요. 수백 마리의 미꾸라지가 저마다 그 통 안에서 거품을 막 내밀어요. 그러면 거품이 어디로 가느냐? 미꾸라지는 통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남이 내민 그 거품을 이쪽 미꾸라지가 먹고 또 자기가 내놓은 거품을 저쪽에서 먹고, 엉망진창이거든요. 

이 세상은 하나의 미꾸라지 통이지요. 내가 쏟아낸 욕망을 내가 주워 먹고 그게 나라고 우기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아름다우냐?” 백설 공주에 나오는 이야기가 딱 그 이야기에요. 나라는 것은 혼자 있으면 나를 몰라요. 혼자서는 나를 모르고 남들이 나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느냐가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울고불고, 그리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이것은 뭐냐? 남들이 쏟아내고 뱉어낸 그 욕망 추슬러서 그것을 내 주머니에 담아놓고, 남들이 나로 인하여 부러워하지 않을 때는 내가 걱정거리가 되고 고민거리가 되는 거예요. 남의 욕망에 장단 맞춰서 살아가는 그게 인간이고 그게 나라는 겁니다, 나.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지나 개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똑같은 인간이라고요. 평생 동안 남들이 보는 안목과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 미꾸라지 통 안에 들어 있으니까. 미꾸라지 통 안에 들어 있고, 내가 안다는 것은 기존에 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예요. <알쓸신잡> 그런 거 있잖아요. 여행가서 밥 먹어가면서 인문학을 논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유 시민하고 몇 명 나오는 것 있어요. 그 이야기가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은 서로 아는 것으로 살아야 이게 사람이 아니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버리운 자에요. 그게 버리운 자라고요. 그 통 안에 들어 있는 미꾸라지들이에요. 미꾸라지가 작은 규모를 가정이라 하고 약간 큰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도 미꾸라지 통이에요. 

남들 보기에 자기 믿음이 괜찮아 보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안보이고 교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말이지요. 주일 오후예배 때 기도하고 난 뒤에 남들이 뒤에서 얼마나 씹을까, 하는데 어릴 때부터 남이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한번도 ‘주님 없으면 저도 없습니다.’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남들이 없으면 내가 없고 부모 없이는 내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식 없으면 내가 없고. 서로서로가 손을 못 놓고 있습니다. 12월에 개봉하는 영화가 있어서 예고편을 봤습니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개봉한다는데 지옥의 일곱 단계를 거친답니다. 잔뜩 궁금하지요. 세상에서 버리운 자들이 만드는 천국과 지옥은 얼마나 교회의 내용과 합치될까, 그것을 확인하려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고편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내 부모가 지옥 간다면 차라리 나도 천국가지 않겠습니다, 하는 내용이 막 나온다니까요. 내 그럴 줄 알았어요. 도대체 한번 쪼개보자. 네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주고받고 하는 것처럼 서로 속고 속인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여기서 구약을 다시 한 번 봐야 돼요. 그래서 구약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물속에 잠겨 있는 세상, 그 사이에……, 이게 분류잖아요. 노아는 남은자, 건짐 받은 자, 그리고 물속에 있는 자들은 버리운 자에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세계에서 분류당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아무 혐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분류를 시킵니다. 

버리운자와 남은자. 오늘 본문에 보니 그걸 믿음으로 결정하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태어난 지점부터 마지막까지 몽땅 다 알고 있는 그 내용이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습니다만, 차라리 너는 나지 않았으면 네게 좋을 뻔 했다, 했는데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꼭 이 땅에 있어야 되느냐는 말이지요. 

욥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이 그거예요. “하나님, 저 없어도 되는데 왜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한 2천 5백 년 동안 철학가들이 그렇게 연구하고 또 해도 아직까지 풀지 못한 해답을 욥이 내뱉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되잖아요. 없어도 되는데 왜 존재합니까? 내가 왜 있습니까? 있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이야기해요. 

있으니까 고통이 오고 있으니까 아픔이 오고 그러니까요. 불교에서는 욕심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데 욥은 더 나가요. 아픈 내가 왜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 뭐가 있느냐. 있음과 없음 사이에 균열이 있는데 그 균열 속에서 예수님이 서 계셔요

이걸 노아 때는 잘 몰라요.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방주 바깥 물속에 잠긴 ……, 잘 먹고 잘 살았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다가 물속에 다 잠긴 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데 창세기 6장에서는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있음으로서 방주안의 노아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자기의 뿌리가 뽑혀 버렸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뿌리가 뽑혀야 돼요. 무릎 아래 다리가 없어져야 돼요. 좀 끔찍한 이야기지만 다리가 잘려야 돼요. 흔히 우리가 뿌리라고 여기는 두 다리가 잘려야 된다고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 하잖아요. 모래 위에 짓지 말고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인데 반석위에 집을 지으면 안돼요. 

왜?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은 다리가 잘려야 가능해요. 딛고 서 있는 이 부분이 날라 가버려야 돼요. 노아방주의 특징은 노아는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없는데 노아방주 나오면서 노아에게 없는 뿌리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정결한 짐승을 제사하면서 정결한 피가 노아의 뿌리를 장식하는 겁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서 언약이 노아를 붙여줘서 노아는 남은 자 덕분에 남은 자가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이야기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구원받는 사람은,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서 버리운 자인가? 버린 자 맞아요. 버리운 자가 맞는데 주님께서는 그 남은자 됨을 남은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 우리의 기초로 개입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딱지는 떼 내고요, 새살이 돋아야 되는데 딱지 없이는 새살이 안 나와요. 버리운 자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될 자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은 가지면 안돼요. 믿음이 없어야 된다니까요. 자아의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자아는 딱지라는 말이지요. 자아는 남들 시선에 맞춰서 생긴 것이 자아에요. 

우리 가정에서는 용납 안 된다. 우리 가정은 이래야 돼.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세뇌 받은 그 모든 것이 자아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게 안 맞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살해요. 제가 자살을 꾸준히 탐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가 자살했기 때문에. 그렇게 복음 전한다고 열심 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 목사가 왜 자살했을까. 

자살의 이유는 저는 거의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의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과 계속 교제하기 싫다는 거예요. 주님은 나와 계속 교제하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이렇게 우울증에 걸렸는데 이런 인생을 왜 만들어놓았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만들어놓았는데 네가 왜 거기에 시비를 걸고 거기에 관여하고 난리야? 우울증에 걸리든지 뭘 하든지 너는 내가 죽일 때까지 기다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 

그게 교제 아닙니까, 교제. “주님, 저 딱지 같은 인생입니다.” “딱지가 되어야 새살이 나오지.” “남들 보기에 우세스럽고 꼴이 이게 뭡니까?”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네가 딱지의 대표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아무것도 아닌데요. 인생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대에 따라서 윤리도덕이 다 바뀌고요. 시대에 따라서 인간은 이래야 된다는 규정도 흐름이 달라져요. 우리는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시대 21세기의 윤리도덕으로 하다 보니까 이게 전부인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해서 모든 시간에 걸쳐서 모든 시대에 이야기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아? 못 받아. 구원 안 돼.” 

그것이 주님의 욕설을 통한 피조세계에 대한 규정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구원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 다시 한 번 구약을 봅시다. 모세가 어린양 피 바르고 남자만 4십만이 되는 이스라엘 대군을 끌고 홍해에 왔어요. 다른 길도 있는데 굳이 홍해까지 인도해 왔어요. 

애굽에서 그것을 뒤늦게 알고 군대가 들이닥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난리냐 이 말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힘들지만 노예로 살면서 밥이나 먹고 그냥저냥 행복했었는데 무슨 난리를 이렇게 쳐가지고 집도 절도 없게 만들더니 푸른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인지, 원망들을 얼마나 했다고요. 

왜 하나님께서 가만있는 우리인생을 이렇게 들쑤시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모세한테 대들었지요.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집단공동묘지 만들려고 여기까지 왔느냐, 라고 할 때에 그 대목을 보세요. 그 때에 그 애굽군대와 홍해 사이에 하나님의 뭐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어요. 

버리운 자와 남은 자 사이의 균열에 반드시 주목해야 돼요. 거기에 뭐가 있다니까요? 그게 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게 나와요. 육에서 영으로 가는 통로는 주님의 심판에 의해서 막혀 있습니다. 막혀 있다면 영의 세계, 영생의 세계에 가는 사람은 다른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육에서 영으로 못 넘어가요.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무서워했습니다. 그 틈새시장을 놓치지 않고, 거 봐라 하면서 요한계시록 언급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목사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이 시간에도 지금 많이들 그런 소리 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물리적인 압박을 가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까? 목 졸라서 “예수 믿을게요.” 했다면 돌아서면 그만이지요. 물리적인 압박이라든지 호의, 교회 나오면 십만 원 드리겠습니다, 교회 나오면 맛난 식사 제공하고 김장 김치도 주고 은혜로 마지막까지 남은 자들에게는 돼지수육도 드립니다, 그런다고 정신적으로 회개해서 예수 믿을 수 있습니까? 

안돼요. 요한계시록의 지진이 아니라 화산이 터져도 인간은 오히려 더 강퍅해질 뿐이지 절대로 정신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포항이 아니라 대구에 지진이 나고 어떤 일이 터져도 인간은 이미 심판으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심판당해야 마땅함을 모르면 절대로 영적으로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이 경로가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들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지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해서 죄인을 모아놓고 그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통과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이라는 것, 골로새서 1장 14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있으면서 그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생명나무 체제를 가지고 선악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 선악체제 안에서 생명나무의 그 세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제일 큰 문제가 있어요. ‘그거 참 쉽네. 그러면 나도 죄인이니 예수 믿어야 되겠네.’ 보통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게 제일 어려운 대목이고 첫 번째부터 어려워요. 이미 육적인 인간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 그 레벨에서의 죄지 예수님 앞에서의 죄는 일체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죽은 뼈다귀가 간지럽다고 까부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죽은 자는 절대로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지를 못해요. 

이걸 하지를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주여,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내가 버리고 싶은 사람은 버린다.” “저를 왜 구원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건질 사람은 건진다. 이것은 예수님 나의 고유권한이다.” 모든 게 이걸로 끝나요. 이것이 로마서 11장에 죽 나옵니다. 로마서 9장에도 나오고요. 

로마서 9장에 보게 되면 21절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해서 토기장이가 토기 만드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결정해 버렸어요. 이 결정이 되어버리면 죄인 되어서 예수님의 죄용서 받으러 나오는 것도, 이것도 가짜란 말입니까? 예, 그게 가짜입니다. 

그게 왜 가짜가 되는가 하면,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태어난 시점 이전까지의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최종적인 범위, 범주가 믿음의 내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네 안에 믿음이 있는가를 확정하라는 말은, “그 믿음이 있습니다.” 하면 안 되고 믿음의 내용 속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제가 이렇게 예수님을 알도록 태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네 안에 들어 있는지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예, 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있습니다.”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뭘 제키고 뭘 떼 내느냐 하면 “제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것을 전부 다 분리해서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예정되어서 구원되었다면 네가 태어나서 나라는 것이 생성되어서 내 손에서 뭘 한 것이 있잖아요, 헌금 드렸습니다, 전도했습니다, 강의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전부 다 강제로 떼 내는 거예요. 딱지기 때문에. 딱지를 떼 내야 새살이 보이지요. 그 작업을 네가 감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떼 내는 작업을 감당할 수 있으면. 

그 떼 내는 작업을 하게 되면 그 떼 내지는 것이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남들이 주시하고 있는 내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관여해서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너는 개야. 개만도 못해.” 이런 것, 또는 여자 같으면 “못돼 처먹은 가시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좀 위로받고 싶고 나도 좀 사랑받고 싶어요.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해. 예쁘다 하면 기분이 좋고, 밀치면 기분 나쁘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본성이 남들에게 위로받고 싶고,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고, 공동체 같은 것을 해서 어울리고, 놀고, 김장도 맛있게 담고 싶어요. 더러운 손 가지고 김장 하지 말라고 밀어내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아침에 눈만 뜨면 수치당하지 않는 인생 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도소 왔다 갔다 하고 그러면 부끄러워서 못나오잖아요. 그 부끄러움, 누가 그렇게 했느냐?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세리 만들고, 강도 만들고,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들게 만들고요. 여자로서는 수치스런 병이거든요. 날 때부터 소경되고. 

이것은 원망을 해도 굉장한 원망거리에요. 애 수학여행 갔는데 물에 빠져죽고요. 아빠도 미치고 엄마도 미쳐서 둘 다 미치고. 모든 되어가는 일이 왜 이 지경이냐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말합니다. “그 지경 내가 만들었는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 거예요. 네가 믿음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이걸 왜 떼 내야 되는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단 믿어요. 그러면 남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말을 믿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다 남은자와 버리운 자 중간에 서서 “죽어가는 인간 말을 신뢰할래, 아니면 이미 죽었다가 살아온 내 말을 신뢰할래.”라고 했을 때 주님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밖에 없느냐?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과연 죽어보니 예수님뿐이네, 라고 알게 된 사람만 계속해서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말만 신뢰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그렇게 신뢰하게 되어 있어요. 딱지 떼 내고 새살 나온다는 말을 달리 하면, 너의 모든 행함을 죄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행함, 나쁜 짓이나 좋은 짓을 따지지 말고 모든 행함은 내가 이미 생겨난 내 존재에서 나온 행함이기에 일체 거부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는가? 선언이 나와요. 선포한다는 선언. 다른 말로 하면 증언한다, 고백한다, 그렇게 됩니다. 성경에서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 항상 고백하고 선언을 해버려요. 선언할 때 그런 내용이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백부장이 주님한테 이야기하기를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마 8:9) 율법은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요구한 것을 거부하기를 요구한다는 겁니다. 이미 확고한 육 됨을 저주하기 위해서, 네가 내 말에 순종하지 않는 육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거기에 대한 백부장의 대처방법은 뭐냐?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 방법이에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내 인생 주께서 마음대로 갖고 노세요. 엉망진창이 된다 할지라도 저는 그걸로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백부장의 태도고 또 하나의 태도가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주도권을 예수님한테 넘기는 겁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 넘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태초 전부터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게 믿음의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그 두 개를 종합해보면 그 종합한 것이 사도바울에게 나옵니다. 첫째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나이다. 두 번째가 뭐냐?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또 명령을 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인간인지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주도권을 주님께 넘겼어요. 

그 두 개를 종합한 것이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나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예수님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하려면 그 전에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마귀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남들의 시선, 남들의 평가에 사로잡혔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답게 생각하는가, 거기에 나는 울고불고 했었습니다.” 

그게 사탄에게 사로잡힌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게 육이라는 거예요. 교회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이런 일 했는데 착하지요? 믿음이지요? 소망이지요. 이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맞지요?” 자꾸 남에게 묻는 거예요. 본인이 선언하면 돼요.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나는 주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나보고 탓하지 마세요. 주께서 아십니다.” 왜 이렇게 선언하지 못합니까? “교회 가려하니 김 집사가 어떻고, 최 집사가 어떻고, 그래서 그 낯짝 보기 싫어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들을래.” 이런 거요. 왜 미꾸라지 통 그 욕망에 말려드느냐 그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기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에베소서 5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늘 모든 일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한다. 고맙습니다. 

제가 짧으나마 지금 외손녀와 함께 있거든요. 그런데 제 딸이 외손녀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그 애가 무슨 노동을 했는데 장난감을 사주냐고 했거든요. 아무 노동한 것이 없잖아요. 일을 해야 무슨 보상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가르쳤어요. 일하지 않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거든요. 

그 애 굶어 죽여야 돼요. 뭘 했어요? 이것은 뭐냐? 엄마가 원하는 아기를 위해서 장난감을 사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장난감 같은 이 세상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일에 내 노동이 개입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되지요. 헌금했다, 전도했다, 예배 참석했다, 그런 노동은 잘라버려야 돼요. 그것은 삭제시켜 버려야 돼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생은 뭐냐? 딱지를 만들어놓고 그 딱지를 벗기는 작업이에요. 참 부끄러워요. 우리 속내가 다 노출돼요.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뭘 아니되옵니다? 왜 네가 밀치는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육에서 사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남들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교인 한 10 명으로 해서 개척교회 하는데 2년도 안되어서 다 나가고 마누라도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자기혼자 달랑 남았을 때 뭐라고 하겠어요? 주님의 응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느냐? 중간에 분열된 그 자리의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경이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되도록 내가 너에게 장난감 줄 테니 너는 할리우드액션, 이 세상 살면서 엄살 부리는 식으로 살아라.” “주여, 죽겠나이다.” 하고 속으로는 ‘히히’ 웃으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보지 말고 버리운자와 남은자를 가름하는 그 중간에 누가 개입되었는지, 누가 언약의 이름으로 삽입되어서 우리에게 모르는 죄를 이미 완료적으로, 최종적으로 죄 사함 해주는 그 분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