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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강(고후13;11-13) 1712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3. 19:40
2017-12-03 12:40:52조회 : 23         
   사랑과 평강 17120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사랑과 평강(고린도후서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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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12-03 13:24 
사랑과 평강 

2017년 12월 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3:11-13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3: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특수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타인에게 강요하기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런 의미에 가장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생각에 대해서 참조는 하겠지만 일치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도 보편적으로 동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늙게 되면 차별없이 모두 ‘죽음’이라는 힘에 눌리게 됩니다. 이 보편성에서 거꾸로 자신의 특수함을 따지게 되면 살아 생전에 ‘혼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그런 특수성과 다른 특수성을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훌륭하게 생애를 보냈다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성령’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보편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개별적 특수성만 진정 특수함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특별남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데서 세상 일반인들과 확연하게 차이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다시 살아나심의 결과로 활동하게 됩니다. 바로 이 복음의 영향권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 이상한 고백을 늘어놓습니다. 고린도후서 4:10-11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자신의 활동은 죽고 난 뒤의 활동이 아니라 ‘진짜 죽음덩어리’ 그 자체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숨끊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참으로 그럴 것같으면 성경을 들척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괴로울 때 번개탄 피어놓고 자살하면 제일 속 편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사단의 죽음’을 말합니다. 

사단의 죽음을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합니다.(계 21:8) 즉 사단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서 ‘축복’ 뿐만 아니라 ‘저주’를 같이 언급하시므로서, 결코 인간 위주의 축복이란 아예 성경에서는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특수하게 사랑하는 분이 오직 예수님 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축복과 저주도 인간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아들됨을 알리기 위해 동원한 환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음으로 그 최후의 죽음에 미리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생명을 전파하는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아 있는 겁니다. 

모든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저주를 퍼붓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3-16에 보면,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세상은 더럽고 추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 더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산 밑의 백성들과 대비하면서 밝혀집니다. 모세 얼굴에게 비취는 영광을 사람들이 마주 대하지 못할 지경에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습니다. 

이제 이 수건을 쓴 모세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못알아 듣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 죄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2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나름대로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죄입니다. 윤리와 도덕적 안목에서 나온 죄입니다. 이 도덕적 안목의 죄가 바로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죄를 알기에 그 죄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고자 예수님을 믿겠다는 바로 그것이 곧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참다운 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 될 대상자라고 여기는 겁니다. 즉 이미 죽은 존재가 새삼 안 죽으려고 발바둥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죄가 됩니다. 구약에서 죄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겁니다. 속죄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제단을 정결케하시는 바로 그 작업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 자리의 거룩이 우선이지 결코 인간 구원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저주 안에다 생명나무를 새롭 심는 작업입니다. 즉 저주를 거두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생시키는 작업입니다. 이는 저주받은 자가 곧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축복받은 자의 등장으로 성사됩니다

이 과정을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데 성도에게 주어지는 사랑은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 자만이 사랑하시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질투하십니다. 이 편애적 사랑이 결과로 성도는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미움의 장이 복음의 영향력으로 발산될 때, 바로 그것이 성령에 의한 교제입니다.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란, 죄의 풍부를 의미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롬 5:20) 성령의 교제는 모든 인간적인 협력과 소통을 부숩니다. 왜냐하면 소통할 대상자는 인간들의 손에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를 파괴시켜 나갑니다. 

교회가 없어지므로서 비로소 교회가 그 현장에 작용했음을 보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님에게만 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6강-고후 13장 11-13절(사랑과 평강)1701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1절-13절입니다. 신약성경 30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11-13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고린도 교회와 사실은 결별하게 됩니다. 그 말은 이 교회가 요구하는 것과 사도가 주려고 하는 것과 달라요. 사람들의 베이스에 기본적으로 깔린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뿐입니다. 그것 외에 인간에게는 아무 계획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듣고 싶은 것은 사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이 전부에요. 

그런데 오늘 편지의 마지막이 뭐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이거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이런 이야기 못 들어서 환장합니까? 로또 되고, 땅 사놓은 것 값 오르고, 남에게 인기 있고, 그러면 와, 하고 기뻐하고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렇게 나오면 벌써 골치 아파요. 주 예수 은혜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다 귀찮아요.

주 예수라는 것이 실적으로, 돈으로 환산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건강으로, 재물의 축적으로 전환될 때 그 때에야 우리는 실감나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 잘 아시고 내 필요한 것 주시는구나. 내가 믿어야지. 이런 하나님을 내가 안 믿고 누가 믿겠느냐.’ 이렇게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는 일체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하고 그냥 떠나버리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혼자 이야기하고 혼자 사라집니다. 참 실없는 인간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를 자기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만 주고, 그 다음에 설득 과정도 없어요. 안 믿으려면 말고, 이런 식이에요.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답답한 것이 뭐냐? 사도가 좋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우리도 여기에 대해서 사도처럼 참 좋아져야 되는데 우리는 지금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요. 가정문제, 애 진학문제, 그런데 팔려 있고 지금 사도가 이야기하는 이런 문제에 우리가 접근하고 싶어도 접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관심사가 엉뚱한 데 가 있다는 말이지요.

낚싯배 엎어져서 사람들 죽는 거기에 신경 쓰고 있고, 월드컵 조 추첨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나,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가 이야기하는데 관심이 없으면 이것은 남의 일이 되는 겁니다. 교회를 한 백번 나왔다. 백번 나오면 백번 설교 듣고 성경 덮어버리고, 백 한 번째 나오면 백 한 번째 듣고 성경 덮어버립니다. 

관심사가 여기에 없기 때문에. 사도가 이런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기 때문에 우리한테 강요하는 느낌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뿐만 아니고 사도를 그렇게 만든 예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잖아요. 

과거 인물의 개인적은 특수한 경험을 우리한테 억지를 부리면서 요청하고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덮어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나의 특수함, 개별자의 지독한 자기에 대한 집착, 이것은 또 하나의 짐으로, 우리가 담당해야 될 내 인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 성경 펼쳐서 성경이 무슨 뜻인가 볼 시간적인, 정신적인 여유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이제 문제가 되지요. 사도나 예수님 쪽이 나름대로의 새로운 운명을 부여받았다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사도가 어떤 보편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나고 너는 너인데 너하고 나하고 결국은 같이 가는 장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런 대목을 보면서 나도 사도처럼 같이 공감하고 싶다, 라고 할 때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보편적인 것부터 출발하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40대 잘 살아도, 50대, 60대, 70대, 가게 되면 잘 산 채로 죽어요. 결국 잘 살았다는 그것 빼버리면 죽는다는 것. 가난한 자도 죽고, 거지도 죽고, 장관급도 죽고, 국회의원도 죽고, 목사도 죽고, 장로도 죽고 다 죽어요.

그러면 그 죽음의 보편성 가지고 죽는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죽음을 느끼고 있는 나, 나에게는 내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나라는 것은 남과는 교체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그게 나에요. 그런데 그 각자인 내가 “예수 당신만, 사도바울 당신만 훌륭한가? 나도 소중해.”라고 들이미는 순간 뭐가 성립되지 않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특수한 개인의 은혜라고 할 때는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 자신의 사적인 견해일 수가 있고 개인적인 체험에 국한 될 수가 있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게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같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어버리면,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죽어버린다는 보편성으로 가기 전에 내 나름대로 나는 중요한 존재고 특별한 존재라고 우기는데, 문제는 그렇게 우긴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서는 안 나오고 성령이 나에게서 안 나온다면 우리는 가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가짜에요. 알아요. 우리는 평생 나밖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게 가짜로 들통 나는 겁니다. 그래서 분명히 예수님 혼자서는 특수한 존재지만 예수님이 몰고 온 그 복음의 영향권은 특수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라는 거지요. 그게 우리하고 차이점이에요.

내가 살다 죽으면 나 혼자의 개인적 죽음이 되지만 예수님이 살다 죽어버리면 그 죽음은 예수님 홀로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어야 될 것을 미리 주께서 겪으시고 그렇게 가신 그 자리, ‘세상에!’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성령님이 거기 계시는 거기에 합류한 겁니다. 

그걸 공유(共有)라고 이야기하지요. 함께 있는 것, 공존, 공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차이를 둬야 되느냐 하면, 늙어죽는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벌써부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는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충분히 증거를 보여줬습니다.

뭐냐? 죽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어요. 죽었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창세기 3장을 다시 봐야 돼요.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은 이 저주의 땅에 최초로,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그 사실이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밝혀지는 거예요. 생명나무로 갈 수 없는데 생명나무가 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로 가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합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나는 곧 길이요 진리”니까,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에 동참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죽는 것은 왜 안 되는가? 

개인적으로 죽는 것, 숨이 끊어지는 그것이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명과 반대되는 상황이 죽음이라는 건데 그 죽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유가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두 번째 죽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죽음은 누구의 죽음인가 하면, 사탄의 죽음이에요. 여러분, 악마가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신적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악마가 죽는다고 했는데 악마가 죽는 것은 숨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불구덩이에 저주받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이야기해요.

숨이나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면 차라리 속이나 편하지요. 그게 아니고 안 죽어요. 안 죽는 채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이 이 땅 인간들이 미처 예상 못한, 성경이 아니고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영원한 죽음, 두 번째 사망입니다. 왜 그렇게 사탄이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그 맞은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대조를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쪽은 영원한 축복, 이쪽은 영원한 저주. 이게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언약에 나옵니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쌍으로 짝을 맞춰서 축복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축복만 찾으면 안 되고 축복과 저주가 함께 나란히 세팅되어서 이 땅에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올 때는 구원하러 오신 분도 맞지만 구원에 앞서서 먼저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신 분으로서 알아야 돼요. 저주하러 오신 분입니다. 저주받을만해서 저주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저주받는 이것은 기정사실이고,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그 문제는 저주받은 입장에서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일체 없고, 저주를 내리신 그 당사자의 고유권한이지요. 우리는 저주도 싫고 영생도 싫어요. 그냥 이 땅에서 살다가 숨 끊어지면 세상만사 다 잊어버리고 잠자듯이 영원히 하나의 흙가루가 되어서 날라 가면 그게 제일 편해요. 이게 저와 여러분의 소원 아닙니까?

힘들다? 자살하면 돼요.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하면 그게 간단한 거예요. 이 두꺼운 성경 안 봐도 괜찮아요. 번개탄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좋은 것 가르쳐 주는 거예요. 뭐하려고 종교를 가져요? 예수를 왜 믿어요? 안 죽으니까 문제인 거예요. 죽으면 편한데 안 죽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끈질긴 이놈의 영혼, 이게 안 죽어요. 이 지렁이는 밟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주께서 한 번 만들어진 이것을 없애지를 않습니다. 마지막 때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기 때문에.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그 대표가 사도바울인데 사도바울이 오게 되면 사도바울의 입에서 희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구라 아닙니까? 멀쩡하게 살았는데 자기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아주 고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할 때 이미 그리스도는 죽은 분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말을 추려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음 자체가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생명체가 되어서, 그 안을 뜯어보면 죽음인데 그 죽음이 생명체가 되어서 지금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살다가살다가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이 시작되는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산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시작된 죽음, 진즉에 벌써 출발한 죽음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숨 끊어져서 그 때부터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죽은 육체가 되는데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육체를 포장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껍질로 사용해서 주님께서 거기에 담아서 활동하니까 너희들 보기에는 너희와 내가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이미 죽음을 경과한, 죽음을 이미 다녀온 그러한 입장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다. 나는 성령과, 하나님과 공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혼잣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처럼 너희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우리가 필요해서 요청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택배처럼 주문해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말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나는 이런 입장, 이런 사정, 이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그냥 소개할 뿐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주님의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거예요. 이런 노래 있잖아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시월의 마지막 밤에……” 서로 이야기는 하는데 둘 다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사람은 잘 먹고 잘살고 그것 외에는 다른 계획이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냐, 그것뿐이에요.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하니까 ‘도대체 뭐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있는 겁니다. 우리 외손녀가 집에 와 있는데 외손녀가 밤에 잠자기 전에 특이한 행동을 해요. 

불을 끄면 방에서 나와서 밝은 쪽으로 와서 몸의 상체만 보이게 해놓고는 팔을 마구 내두르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쏙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해요. 그걸 서너 차례 합니다. 사진 찍어 놨어요. 쏙 나와서 (마구 팔을 내두르다가) 다시 쏙 들어가요. ‘뭐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대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죽었는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해서, 내가 날마다 사는 것이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살고 내 월급이 얼마냐가 아니라 예수의 죽인 것을 내가 짊어짐은……, 너희들 보기에 예수가 죽었다고? 아니야! 지금 내가 너희들 보기에 살아 있잖아. 내가 살아 있음은 지금 예수님이 죽은 몸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하나님과 성령이 나와 함께 있다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그게 창조의 목적이라고요. 그러니 이것은 우리 외손녀의 퍼포먼스와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그거 들으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니잖아요. 기도해서 복 받으려고 오잖아요. 숨 끊어지면 천당 가려고. 

그러나 그런 식으로 천당 갈 것 같으면 사도바울은 이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천당 갑니다.” 그런 소리나 했겠지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느냐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하여튼 사도바울의 편지는 정말 어지간한 사람은 찢어버릴 책입니다. 자,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잠자는 자’라고 했어요. 잠자는 자는 기껏 해봐야 꿈만 꿀 뿐 잠에서 깨어나지를 않습니다. 잠에서 깰 때나 깨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 티를 다 내요. 죽은 자의 티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나중에 주께서 구원해준다는 거예요. 혼자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은 내가 믿거든요. 성경에 보면 나는 ‘잠자는 자’라는 말이지요.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죽은 자가 혼자서 중얼중얼 꿈꾸고 있는데 죽은 자가 꿈속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 백날 해봐야 그것은 자기생각입니다.

잠자는 자가 살려면 누가 외부에서 깨워줘야 돼요. 누가 깨워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딸이 잠자고 있으면 엄마가 깨우듯이 나 말고 다른 분이 오셔서 나를 깨워줘야 비로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세계를 비로소 우리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가 깨우는가? 성령님이 깨우지요.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내가 뭐냐? ‘아, 내가 죽은 자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예수님의 부활을 반복하는 거예요. 우리가 죽은 자들 속에 있었던 거예요. 다 같이 죽은 자들 속에.

누가? 성경이 에베소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네요. 그러면 성경 덮으면? 덮으면 아무도 그런 소리 안하지요. 자기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성경 펼쳤다 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질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죽은 자를 주께서 살릴 때에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죽은 자로 규정하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되는가?

그냥 깨워서 천국 보내면 되는데 구태여 예수님께서 오셔야 될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 내력을 설명해 줍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두 번째 사망, 사탄이 저주받는 상태에요. 인간이 죽었다 하는 것은 자기 숨 끊어지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죽었다거나 살았다는 것을 결정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죽었거나 살았다는 것은 뭐냐?

거룩이 없기 때문에 죽었다, 살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7월 10일에 대 속죄일을 주셨다 할 때 사람들은 오해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는구나.’ 그것은 진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대 속죄일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이전에 먼저 근거부터 마련해요.

근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챙기는 것이 우선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제단을 너희가 부정하게 했다.” 더럽혔으니 따라서 하나님은 그 제단부터 깨끗하게 하고, 대제사장을 깨끗하게 하는 것부터 먼저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수송아지가 동원돼요. 

그게 되고 난 뒤에 수염소 두 마리 잡아서 한 마리는 죽이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발라서 광야로 내보내는 그게 대속죄일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인간들 생각에는 “신이시여, 사랑의 하나님이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부터 성급하게 요구하는데 주님께서는 “네 죄를 아느냐?” “제가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잘못했습니다.” “그게 죄가 아니야. 너는 네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혔고 훼손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라요.

인간들은 그걸 알지를 못한다고요. 태어나서 평생 자기밖에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남이야 더럽히든 말든 관계없고 자기가 잘되면 되거든요. 주님의 제단을 더럽힌 그 죄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알려면 주님의 자기정화에 투입되는 제물들이 어떤 제물들이 있는가? 대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관리에 우선적으로 철저한가, 그것부터 알아야 돼요. 그것에 근거해서 “누가 그렇게 하나님을 더럽게 했습니까?” “네가!” 그렇게 되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흔히 죄를 지어놓고는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어디 해결할 곳이 없나, 하다가 ‘교회 가야지. 교회 가면 예수 피로 용서받는다고 하니.’ 그리고는 교회에 가서 “주여, 믿습니다.” 이것은 뭐 무당집도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용서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를 말지 왜 쫓아내겠어요?

하나님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에요. 민수기 19장에 보면,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 정한 곳에 둘찌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쓸 것이니.” 암송아지 재를 거두어서 그 재와 물을 섞어서 하나님의 제단을 씻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수송아지는 뭐냐? 그 피를 내어서 그 피로 일곱 번 바깥에 있는 제단에다가,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에 뿌림으로서 일단 하나님의 자기처소를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왜? 인간들로 인하여 더럽혀졌으니까. 인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니까. 

추잡한 그 저주세계 때문에 생명나무가 더럽혀지는 거예요. 그것부터 정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울산에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EM세제라고 했어요. 쌀뜨물하고 막걸리, 요구르트, 소금, 설탕으로 천연세제를 만들면 손에 습진 안생기고 좋다는 거예요. 권사님이 시키는 대로 만들어서 우리 집에도 그게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거룩이 우선이에요. 우리가 천당 가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거룩을 우선하기 때문에 그 거룩을 근거로 해서, “그러니까 너는 나처럼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죄야. 저주받아.”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는데 불결한 것이 있어서 그걸 씻으려고 한다면 굿이나 하세요. 굿이나 하고 나면 맘 편하지요. 그 방법이 고린도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룩한 곳에 단독으로 모세가 올라갔던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거룩한 곳에 갔다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과연 그 거룩한 곳에 가 보니까 백성들과 자신이 40일 동안 머물렀던 시내산 위가 너무나 격차가 나는 거예요.

너무나 추잡한 거예요. 너무 추잡해서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더러운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모세로 하여금 언약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 보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는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냥 이야기를 못해요. 질적 차이 때문에 수건을 얼굴에 씁니다. 수건을 안 쓰면 모세의 말과 표적을 못 봐요. 왜? 너무 빛나서, 너무 거룩해서, 화로다 망하게 되는 그 지경이니까 감히 쳐다보지를 못하는 겁니다.

세리가 예수님 만났을 때 감히 쳐다보지 못한 것처럼. 어디 게임이 됩니까? 잽이 되겠어요, 주님하고 우리하고. 그래놓고도 죄 없다고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이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22절에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무지하게 중요한 문제에요.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간음이 죄고, 살인이 죄고, 그리고 거짓말 하는 것이 죄라고 하거든요. 그거 죄 아니에요.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 죄다. 죄 아닙니다. 우상섬기는 것, 그거 죄 아니에요.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거기다가 움찔 한 겁니다. 주눅이 들고 기죽은 거예요. 죄도 아닌 것을. 인간은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죄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이 피를 흘릴 그 때 죄를 압니다. 

모세의 역할이 예수님 역할이거든요. 예수님이 오니까 거룩과 세속과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처럼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해도 얼마나 거리가 먼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있어도 제자들은 예수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보고 “사탄이 물러가라.” 했습니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께서 모세역할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어요. 쉽게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인간들이 안 섬기고 부처 섬겨서 죄다. 나는 예수 믿으니 죄 아니다.’라는 이 모든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이게 죽은 자의 티를 다 내고 있는 겁니다. 죽은 자의 티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예수님이 오셔서 보고 만지고 해도 죄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자기 피를 자기 몸에서 냅니다. 이걸 유출(병)이라 해요. 레위기 14장에 보면 문둥병자의 몸에서 고름이 밖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으로 자비를 베풀면 문둥병의 고름이 멈추고 자연치유가 되어서 다시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몸속에서 피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유출병이라는, 문둥병자와 똑같은 저주받은 모습, 그런 기능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진짜 저주는 여기 있어.”라고 자기 피를 밖으로 내보내버려요. 그 피는 세상을 향하여 내어버립니다. 그 피가 나오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갈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으로 보편적으로 확정되고 말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가 그 역할을 구약 때 했다면 그것을 예수님이 신약 때 하십니다. 그 수건이 계속해서 인간에게 덮여 있으니까 그 수건을 제켜주는 것이 뭐냐? 그리스도의 영,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거룩과 세속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모세 같은 기능을 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거룩의 입장, 예수님 자신이 이동하는 하나님의 거룩이니까, 저주라는 것, 예수님 자신의 거룩과 관계해서 새롭게 저주의 표본을 내놓습니다. 

그 피를 보고 아, 우리가 하나님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죄도 아닌 것을 죄라고 우기면서 그것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씻어볼까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윤리 도덕으로 무장된, 그것을 럭비 할 때의 스크럼(scrum)이라 하는데요, 윤리도덕으로 스크럼을 짠 그것을 뚫고 예수님의 피가 그 속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그 피가 들어왔다는 말은, 거룩이 그 더러운 곳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돼요. 그 피가 들어오니 비로소 존재자체가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저주와 같이 외부에서 연결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 피가 주님의 제단을 정화하는, 하나님의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피기 때문에, 이 둘이 연결되기 때문에 그 노선을 따라가게 되면, 그 끈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용서가 되고 사죄가 되는 겁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하는데 제가 기본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이 자기자신을 몰라서 그래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피를 스스로 흘리지 않고 바리새인같은 인간들에 의해서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서 피가 나오게 하시는가?

인간들은 자기를 얼마나 모르는지 자기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악마가 노리는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을 제거하는 겁니다. 신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 자신을 앉히는 겁니다. 왜? 사탄이 그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이 노리고 있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없애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거룩한 곳에 앉듯이 인간이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는 나와 줘요. 교회는 나와 주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짜증이 나서 질색하고 거부해버립니다. 

저 인간 내 눈에 안보이도록 좀 치워달라고. 그리고 대표적인 사탄의 말이 있지요.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강력한 저항력이 발동됩니다. 이 말은, 아무리 점잖고 착해도 예수에 대해서는 너 나 없이 이유 없는 반발심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분노로서, 알 수 없는 분노, 이유 없는 분노가 나와요. 누구한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잔소리 하는 것은 거부하지 않습니다. 왜? 착한 분이니까. 하지만 이 피는 너의 죄 때문에 흘린다는 그 피, 그 피에 대해서, 너는 이미 저주받은 자고 죽은 자라는 그 소리에 대해서는,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만 챙기는 존재기 때문에, 그 소리를 견딜 인간은 없어요.

떠밉니다. 나의 고요한 평화를 깨지 마라, 하는 식으로. 내가 나 사랑함에 호작질을 하지 말라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은혜라는 것은 바로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에요. 죄를 더욱 더하는 것이 은혜에요. 죄가 더한 곳에만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주의 은혜가 임했다 하는 것은, 내가 더욱더 죄를 많이 짓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뭐냐? 독단적인 사랑, 폐쇄적인 사랑, 편견적인 사랑, 편애적인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거든요.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순간 이제는 나 외에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일방적인 사랑을 호소하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이 사랑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면 자식은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누가 사랑을 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사랑해놓고 나 말고 사랑하는 것은 다 짓밟아 버리는 거예요. 버지니아에 저와 복음으로 교제하고 있는 어떤 분은 얼마 전에 뇌혈관 터져서 반신불수 되었어요. 복음을 한 시간도 안 빼놓고 다 듣는데, 유 튜브로 다 보는데, 보는데도 터졌어요. 

나이 60도 안되었는데 혈관이 터져가지고. 공부도 얼마나 많이 했다고요. 독일어교수까지 하신 분인데 이게 터져버렸어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멀쩡하게 나왔지만, 혹 감기가 들렸는지 멀쩡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우리가 나왔을 때……, 지금 그 이야기 하지 말라고…….

이거 감당해야 됩니다. 감당해야 돼요. 정말 감당해야 됩니다. 이 복음 이야기 우리가 밀어내면 안돼요. 이 이야기 이거 자꾸 밀어내면 안돼요. 이러면 ‘교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화합과 소통이 되어버려요. 화합과 소통은 교제의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끼리, 아는 사람끼리, 이러면 안돼요. 

언제까지 밀어낼 겁니까! 이 복음을! 입장 바꿔서 생각하세요. 자기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나보고는 욕 안하지요. 예수 보고 욕하겠지요.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지만 예를 들면. 당신이 와서 내 인생 엉망진창 만들어놓고, 일은 당신이 다 저질러 놓고, 수습은 내가 하고. 당신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복음 좀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쳐들어오면 돼? 내 사적인 공간은 없잖아.” 그러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인생 우짜꼬! 아이고 불쌍한 내 인생 우짜꼬, 우짜꼬!” 저 인간 좀 죽여 버려라, 해서 예수 죽은 거예요. 그동안 여러분 교회 놀러 다닌 겁니다. 여러분, 인생 그냥 오락으로 산거예요. 

안에 마귀 들었습니다. 극렬하게 떠밉니다. “나는 나만 사랑할 테니까 좀 간섭하지 마세요. 나한테 얼쩡거리지 말라니까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그걸 뚫고 들어와요. “나는 이제부터 네가 사랑하는 것을 용납지 아니하겠다. 나만 사랑하게 만들겠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갖고 있던 이러한 모든 평화를 깹니다. 나 중심의 평화 있잖아요. 나 중심의 평화를 깨는 그것이 교제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나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거 우리가 요청한 것 아닙니다. 우리가 이거 기대한 것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뭐냐? 나 홀로 조용하게 사는 것이 소망이에요. 사탄이고 뭐고 그 이야기도 듣기 싫어요. 

사탄도 인정 안하고 예수님, 하나님도 인정안하고, 예수님도 옛날에 죽은 분이고, 지금은 나 홀로, 나 혼자 여기 손에 만져지는 이 세포, 나는 이것만을 진실로, 이것만을 실제상황으로 보고 잘 먹고 잘 사는 이것 외에 다른 계획이 없는 것이 우리의 숨길 수 없는 바닥의 본성입니다.

여기까지만 쳐들어오고 그 다음부터는 쳐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29절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이미 주님께서는 그게 바로 우리가 악마에 사로잡힌 현상이라고 보고 거기서 강제로 우리 속까지 침입해요. 

침입해서 우리를 보쌈을 합니다. 그 보쌈 하는 것을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나무 옮겨심기, 나무를 옮겨 심는 거예요.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나무뿌리만 쏙 뽑아내면 안 되고 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멀리 파내요. 포장된 물건보다 포장재가 더 귀해요. 멀~리 파서 그 멀리 판 그것을 뭉텅이로 들어서 옮기는 겁니다. 본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게 뭐냐 하면,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이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마음이에요. 잠자고 있는 자에게 주무시지도 않고, 베개 베워주고, 이불 덮어주면서, 토닥토닥 하면서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예쁘기도 하여라.” 주께서는 데려가는 거예요. 

제가 설교를 마치면서 정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주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로 해서 사랑이 들어왔습니다.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사랑이 들어왔거든요. 사랑이 들어왔으면 주님이 우리를 예쁘게 봐요. 주님이 예쁘게 보는데 우리가 평소에 안 믿던 습관들이 있어가지고, ‘내가 누굴 미워하다니, 내가 예배시간에 늦다니, 내가 이렇게 돈을 사랑하다니, 내가 이래도 되는가?’

본인이 본인을 저주해요. 이게 안 맞는 거예요. “세상에, 또 실족했습니다.” 실족 천번 만번을 해도 주님께서는 그런 것 안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기 것이기 때문에 이미 피로 씻음 받았으면, 이미 나무 근처 뿌리 닿지도 않는 그 넓은, 한 50평으로 하자, 50평 전체를 다 삽으로 파서 몽땅 들어내 버립니다. 

내가 미처 관여 못하고 짓지도 못하는 그 범위까지 관여하셔서 몽땅 트럭으로 담아서 천국으로 실어 보내는데 기껏 우리는 나를 판정할 때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면, 내가 실수한 것, 내 마음속에 악한 것, 마음속에 간음한 것, 실례한 것, 그런 것을 보고 “우짜노, 우짜노? 이래가 나 성도도 아니다.” 

교회 안 온지 2개월이 되었다나 뭐라나, 어쩌고저쩌고. 내가 하나님을 욕을 얼마나 했다나 뭐라나. 왜 자기 입장에서 구원이 되니 안 되니, 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합니까? 우리는 그런 권한 없습니다. 예수 믿는 거요? 내가 믿는 것 주께서 찢어버립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찢어버립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소망, 우리의 믿음 안 받습니다. 우리의 행함도 안 받을뿐더러 그런 것 일체 안 받습니다. “있을찌어다.”라는 말은 이미 그렇게 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교회라 하는데 이 교회가 교회를 부숴버립니다. 

진짜 교회를 복음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의 영향권의 교회가 기존교회를 날마다 부숴버리는데 부숴도 괜찮아요. 왜? 그게 교회니까.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자가 주님한테 오거든요. 2인 1조가 돼요. 주님은 문둥병을 낫게 하고 문둥병이 있던 자리에 예수의 피를 집어넣고. 

문둥병자가, 자신이 저주받았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너 저주받은 것이 맞는데 내 피가 네 자리에 가고 너는 내 자리에 가고. 지옥에 간 우리를 천국에 보내고 천국 계시던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지옥체험을 하시고. 그 바꿔치기 하는 것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손댈 것이 없다는 것. 더 이상 선교, 전도, 회개, 이런 것 다 필요치 않아요. 그런 것은 다 결과적인 문제지 우리가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결과로 나오는 것이 회개지요. 

<장고>라는 영화에 보면 관속에 기관총을 넣어서 끌고 오잖아요. 세례요한은 노숙자처럼 광야의 털옷을 입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끌고 옵니다. 미리 끌고 들어옵니다. “따단따다다단따단~” 좍 끌고 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고 하고 도끼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나오니까 “니들이 구원받으면 돌멩이가 구원받겠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욕설을 해 가면서요. 그게 죄입니까? 죄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실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거부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뭐든지 내가 해야 안심이 되고 믿을 만 하다고 여기는 그것이 죄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 속에 십자가를 집어넣고 그걸로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어떤 것도 의미 없다는 말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만이 의미 있는 거예요. 그 피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그 피, 우리가 가야 될 그 제단을 정화시키고 깨끗하게 하는, 그런 이엠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뿌려놓은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설교하지 말고 퐁퐁 세제 가지고 다니면서 다 뿌리고 싶어요. 주님이 만들어놓은 그것 가지고 뿌리는데 왜 내가 어줍지 않게 내 윤리와 도덕으로 끼워 넣습니까? 왜 내 열성과 순종이 거기에 들어갑니까? 거기에 그게 왜 들어가야 돼요? 이렇게 착실합니다, 교회 다녔습니다, 그게 왜 들어가요? 내가 기도했습니다, 그게 왜 들어갑니까? 헌신했습니다, 헌신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주님 세제에나 묻히지 말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영광 돌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자기성전을 정화시켰는데, 그 모든 일들이 우리를 덮쳤고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신 딴 데 팔았습니다. 주님 이제는 주님이 하는 일이 얼마나 일관된 것인지를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