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5 12:41:40 | 조회 : 35 | |||||||||||||
용서하지 않으리 171105 |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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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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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강-고후 13장 1-2절(용서하지 않으리)1701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절-2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1-2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용서를 이야기하는 교회에서 사도바울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가 오늘날 현대인들, 교인들에게 먹혀 들어가겠느냐 하는 겁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세일러 문>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아이고, 무서워라. 겁난다. 사도한테 굴복해야지.” 이렇게 위협이 되겠어요? 오늘날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는 이것이 겁나는 소리인가? 아니면 죽여 버린다는 소리가 겁나는 소리인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익숙해 있는가를 봐야 됩니다.
너 그렇게 나오면 법원에 고소할거야, 이것은 겁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놀고 있네. 만화영화 찍나?’ 이런 웃기지도 않는다는 투의 조소와 조롱받기에 적합하지요. 용서하지 않겠다는 이것이 먹혀들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만큼 우리는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보는 현실하고 다른 현실에 우리는 발을 담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아니한다는 이 말은 사도에게 그만큼 깊은 의미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사도를 앞장 세웠던 그 배후, 사도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성령이 있고 성령 안에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예수님이 이미 사도를 통해서 그동안 은밀하게 용서라는 개념을 가지고 수사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용서라는 것을 허접하고 시시하게 여기는 세상이라는 것은 예수님 본인이 절실하게 경험했잖아요. 인간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용서라는 것은 전혀 안 먹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고 이 세상에 유일하게 먹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 힘입니다.
나 너에게 힘을 빼겠다, 이렇게 하게 되면 “살려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용서하지 않겠다, 하게 되면 “웃기네.”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오늘날에도 나타나는 성도라고 할 수 있어요.
평소에 나는 용서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 말에 어느 개가 짖나,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금 다른 것을 보람으로 삼고 다른 것을 토대로 삼고 살아가는 중임을 들통 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를 앞장세워서 내사(수사)하고 있었던 겁니다. 용서라는 것을 가지고 과연 구원될 자와 구원 안 될자를 계속해서 탐색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사도님,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용서를 가지고 우리한테 협박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용서에 대해서 애초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흔히 세상에서 통용되는, 내가 용서받는다는 그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것이 없어요.
2천 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돼요. 십자가로 모든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됩니다. 그동안 교회는 2천년동안 용서 가지고 장사를 해 온 거예요. 용서라는 것이 없어요. 내가 용서받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개인구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그런 개념은 사도바울이나 구약성경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용서함 자체가 우리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그 차이점을 잘 모르겠지요. 사무엘하 12장 21절-24절에 보면 다윗이 그 점을 알게 된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아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다윗이 아들 살려달라고 금식하면서 일주일동안 열심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 죄 때문에 내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주시고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하고 간절히 일주일동안 기도했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 슬퍼해야 되는데 20절에 보니까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신하들이 의아해 하는 겁니다. 다윗이 자기 아들 죽어가는 것을 자기 죄와 결부시켜서 그렇게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아들 죽고 난 뒤에는 그에 죽었나, 할 정도로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왜 그런가 할 때, 다윗은 뭘 알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아요. 다만 다윗 속에다 주님의 용서를 담는 겁니다. 귀한 보석을 함에 담듯이, 컨테이너에 물건 하적 하듯이 용서를 거기에 담아버려요. 주님의 용서를 담아놓고 그 주님에 담긴 용서를 네가 계속 간직하고 있고 유지하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을 미필적 고의로 살해한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원하는 마지막 세계는 용서의 세계거든요. 그 용서적인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가 있어야 그 죄가 주님의 용서적 현실, 주님의 그 낯선 현실을 지탱할 수가 있어요.
다윗이 지금 오해한 것은, 내가 죄지어놓고 죄 지었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용서가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윗 자기착각이고, 하나님은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앞서 죄짓게 해서 인간들이 용서를 구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자기 살기위한 방편으로, 내 죄 없이 천당 가겠다는 용서인 반면에 주님의 용서는 인간의 개인적인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원초적인 용서를 따로 마련해서 그것을 빛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작전이 바로 하나님의 작전이에요.
죄가 계속 일어나고 계속 지어지고 유지되어야 용서가 유지돼요. 성도는 계속 죄를 지어줘야 비로소 용서가 유지되는 겁니다. 만약에 죄가 없으면 십자가도 날라 가버려요. 주님의 관심사는 내가 죄 안 짓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라 십자가가 중요해요. 십자가를 보좌하는 입장이 우리입니다.
그게 요한일서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요한 일서에 나오는 사도요한의 말투가 어떤 말투냐 하면, 너 자신의 구원과 천국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투에요.
하나님이 너를 용서한 것은 정작 다른 목적이 있는데 요한 일서에 보면 주님께서
흘리신 그 피, 그 피를 값있게,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택한 백성을 통해서 그 피의 가치를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 사람 속에 피가 들어왔고, 성도는 죄용서 받고 난 뒤에도 계속 죄를 짓는데 용서 받기 전에는 피가 없던 상태였지만 용서받고 난 뒤에는 피가 있는 상태에서 지은 죄가 어떻게 피와 만나서 주님의 원래 기대했던 용서가 계속 살아 있는가를 증거 할 때 그 사람은 주의 증인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이 천국갈 수 있어요.
요한복음 3장도 같은 취지입니다. 아까 교독문에 나왔는데 그 중간대목을 읽어볼 테니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가 보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요 3:17)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예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적인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여기까지 하게 되면 아예 심판이 없는 줄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해서 심판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18절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은 이미 이 세상에는 용서라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주어질 용서가 없어요. 인간을 위해서 제공될 용서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용서 없는, 예수님의 피가 담기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것은 개뼈다귀보다 더 못한 겁니다. 짐승보다 더 못한 거예요. 신앙생활의 가장 힘들고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요. 인간도 아닌 것들의 생각을 의식한다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꼴도 아닌 것들이거든요. 인간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용서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에요. 피의 운반체가 아니기에 인간이 아닌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 아닌 것들이 ……, 이걸 의성말로 뭐라 하더라? 방금 잊어버렸는데. 지껄이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아,네 인간도 아닌 것들이 ‘씨부리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를 말아요. 판사가 재판정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게 인간도 아닌 것들이에요. 용서가 빠진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취급 못 받습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것들을 왜 자꾸 의식해야 되는지. 그게 소위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제일 신경 쓰이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어요. 마귀이 결정적 타격이 뭐냐 하면, 네가 수치를 당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제가 몇 주 전부터 이야기했어요. 보이지 않는 사탄과 인간의 만나고 있다는 흔적, 증거는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인간 속에 자기의가 비축되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자기의가 비축되는 이유가, 자기의가 있어줘야 남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마귀가 인간을 마지막 붙들 수 있는, 마지막 파괴시키는,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마지막 무기입니다. “너는 남에게 수치 당하지 마라. 수치스런 생활 하지 마라.” 그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세리와 창기 보세요. 이미 수치를 당했잖아요. 절뚝발이, 소경들, 귀머거리, 그 당시에 다 저주받은 사람들이고 죄인들이에요. 주님 자체가 수치스런 분이에요. 너무 수치스러워서 열 두 제자가 다 도망갔잖아요. 예수님의 그 마지막 몰골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행동을 좀 자세히 보세요. 여러분 평소의 행동이 어떤 기준에서 행동합니까? 남에게 수치 당하지 않기 위해서 행동하는 겁니다.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 믿는데 설마 세상에서 수치 더 당하게 하지는 않겠지요?” 이런 식으로 수치당할까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그게 두려워하는 거예요. 우리 애는 공부도 잘하고, 한 달 수입은 어떻고, 이번에 땅값도 대여섯 배 오르고, 이런 것에 왜 신경 씁니까? 인간도 아닌 것들을 그렇게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성공해야 돼, 실패하면 안 돼, 실패하면 왜 안 되지요? 주님의 의견은 전혀 묻지도 않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평생을 시달리는데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자기 의를 쌓아요.
“하나님, 이렇게 착한데 나를 설마 용서 안하지는 않겠지요?” 그것은 애초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든 강의를 하든 최고의 설교나 강의가 뭐냐? 현재 세상 돌아가는 것과 설교 내용과 합치가 될 때 최고의 설교라 했습니다.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모르거든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용서해달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왜 내가 하는 일이 내가 기대한 약속대로 안 됩니까? 너무 분통터집니다. 이제 항복하오니 항복하고 난 뒤에는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라는 꼼수를 부리는 겁니다. 빨리 했으니 천천히 다시 해 볼까요?
인간들이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말은, 자기의 어떤 포부나 꿈이 있었는데 그 꿈에 지장이 있거든요. 지장이 있으니까 “아이고, 좋습니다, 좋아요. 내가 하나님께 항복할게. 그 대신 내 뜻은 이뤄주옵소서.” 흥정하는 용도, 주님을 상대로 흥정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이 왜 그런 사탄 짓을 하느냐 하면, 사탄이 인간에게 집어넣은 것이 있어요.
선악지식을 집어넣었습니다. 선악지식은 무슨 뜻이냐? 그 말 그대로 풀이하면 돼요. 나에게는 선이 있을 수 있다. 그게 선악지식이에요. 나에게 악이 있는 것도 물론 알지만 선악이니까 선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선으로 나에게 오는 악을 상쇄하거나 해서 자체적으로 악을 처리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나는 구비하고 있고 소유하고 있다는 이것이 선악체계에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런 선악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자체가 악이에요. 그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겁니다. 이걸 학교에서 가르치겠어요, 누가 가르치겠어요? 이것은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윤리도덕이 뭡니까? 너는 선할 수 있어, 그게 기본전제에요. 선할 수 있는데 왜 자꾸 선을 안행해서 악해지느냐, 네가 선을 아니까 그러니까 너의 기본양심은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거예요.
개가진 사람은 다 이야기해요. “우리 개는 안뭅니다.” 우리 개는 안문대요. 팔이 안으로 굽거든요. 우리 애는 착하다는 겁니다. 실수를 해서 그렇지. 근본성격은 나쁜 애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따위 이야기를 누가 심어줬겠어요? 마귀가 안 심어줬으면 누가 심어줬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처음부터 그런 마음 주셨겠어요? 그런 마음 안줬습니다.
선악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 안에서 어떻게 처리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구현시켜서, 생명나무를 현실화시켜서 그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가 죄 있는 세상에 왔을 때 그 생명나무는 어떻게 활약하는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라는 그 말입니다.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가 있지만 생명나무는 따먹지 말라는 요소가 없어요. 이것은 거저 주는 겁니다.
생명나무의 거저줌이 선악체제 안에서는 어떤 모습, 모양새로 우리에게 거저 다가오는가를 보는 거예요.
비참하게 조롱받지요. 용서하지 않으리, 하면 ‘흥, 웃기고 있네. 그래, 용서하지 마. 나는 돈만 있으면 돼.’
이런 식으로 조롱의 대상, 빈정댐의 대상, ‘웃기네’ 하는 조소의 대상으로,
생명나무가 주는 그 의가 무시당하는 식으로 우리 곁에 와 있는 겁니다.
돈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은 있지만 십자가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 글쎄요,
우리 교회는 더러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용서, 예수님의 피, 생명나무, 그런 것이 장착되지 않은 인간은 제발 좀 개무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나름대로의 옳은 논리를 펼지라도
‘지옥가기 전에는 쓸데없는 그런 소리 많이 해라.’ 많이 하라고 하고 진짜 개무시 해줘야 돼요.
개무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수요일에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뭐 수요일 예배에 나와야 설교를 듣지요. 얼마 전에 김 주혁이라는 배우가 죽었어요. 제가 광주강의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전국이 애도하고 있습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나이 45세에 죽었는데 불의의 교통사고였지요.
성경을 안 봐서 그래요. 성경을 보게 되면 두 번째 죽음이 있어요. 그 두 번째 죽음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기 위해서 첫 번째 죽음이 있는데 그게 김 주혁이의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 두 번째 죽음은 모르고 그냥 이 목숨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로 알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달리 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할게요. 다윗이 자기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살려달라고 하다가 죽고 나서는 세수도 하고 밥 달라고 해서 실컷 먹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죄를 용서하는 그런 용서는 이 땅에 없다는 거예요. 나와 거래하는 용서는 없어요. 나와 거래하는 그런 주님은 없어요. 내 개인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 용서라는 것을 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 지어야 되고, 죄 짓는 것이 언약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원칙에 부합된다는 거예요.
그래야만 된다는 겁니다. 죄 지어야 된다는 거예요. 죄지음으로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십자가가 계속 살아 있는 겁니다. 용서라는 현실성이 계속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죄용서가 생명나무쪽에서 왔다면 그 모습은 어떤 형태인가? 출애굽기 33장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대목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이 단독으로 만나는 장면인데요.
21, 22절에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날 때 대면을 못하도록 손으로 덮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덮여 있다가 나중에 지나가고 난 뒤에 손을 뗀 뒤에 보니까 등 뒤만 볼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자동세차라고 보면 돼요. 차가 자동세차기 안을 죽 지나가는데 깨끗하게 하고 난 뒤에는 이미 지나간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상당히 의미가 있는데요. 용서라 하는 것은 우리가 요청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주님 자신의 자동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 둘 사이의 밀약, 계약이었습니다.
그것을 언약이라 하는데 그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모세에게 옴으로서 모세는 어떤 혜택을 받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고 얼굴은 보지 못하고 다만 뭐만 느끼는가? 하나님의 손만 느끼면서 ‘수그리!’ 손으로 눌러서 숙여놓은 채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과 누르는 하나님의 손, 하나님자신의 얼굴과 하나님자신의 손과의 관계의 혜택을 뒤늦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나가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무슨 일이 있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얼굴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손은 나중에 피가 묻을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덮어주는 손에다 피를 묻혀서 그 피 묻은 손으로 덮어버리면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영광중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광채라는 겁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갑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천사의 날개가 세상이에요. 두 짝, 두 짝, 두 짝, 해서 여섯 짝인데 밑에 두 짝은 발을 가리고, 두 짝은 몸통을 가려요. 그리고 두 짝은 펄럭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 된 그 자체가 수치에요. 피조 된 그 자체를 가리면서 “우리의 피조물의 기능은 오직 주님의 영광뿐입니다.”를 천사가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 장면을 보는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는 날개가 없어요. 자기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고백을 합니다. 감히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산다고 우기면서, 죽어서 좋은 나라 간다고 우기면서 자기의 수치를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더러운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누가 탓 할 것 없어요. 흔히 복음 아는 교회가 실수하기를, 복음 아는 우리교회는 괜찮은데 복음 없는 저쪽 교회는 나쁘다고, 남의 교회 비판하면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으로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복음의 반대편에 남의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반대편에 우리가, 내가 있어요.
지금 내가, 이 자아가 복음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날개가 없어요. 그걸 날개 없는 천사라 합니다. 자기를 가릴 날개가 없어요. 이런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세상 왜 삽니까, 여러분. 남 의식해서 남에게 수치 안당하려고 사십니까?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십니까?
아니면 주님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그것 때문에 사십니까? 사사기에 보면 삼손과 들릴라가 연애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들릴라는 삼손의 세 번째 여자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삼손 입장에서 들릴라를 보는데 입장을 바꿔보세요. 여러분이 들릴라라고 여기고 삼손이라는 남자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들릴라라면 삼손을 어떻게 봅니까? 나에게 돈을 제공하고, 멋진 남자고, 나에게 힘을 제공하고, 나를 기쁘게 만들고, 나를 행복하게 해죽, 나를 사랑해주는 그런 대상으로 보지요. 그러면 들릴라가 삼손을 보면서 하나 빠진 것이 있어요. 삼손에게 언약이 있다는 사실을 빼놓고 언약 없는 삼손을 사랑한 거예요.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난 자입니다. 계시가 먼저고, 하나님의 예언이 먼저고 그 다음에 삼손이 구체화 된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습니까? 이 땅에 밥이나 먹고 살려고 태어났습니까? 다이어트나 하려고 태어났습니까? 노후대책이나 하려고 태어났습니까? 2억짜리 벤츠 몰다가 차사고 나려고 태어났습니까?
뭐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뭔가 빠트리고 보는 거예요. 언약 빼놓고 보는 거예요. 마치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할 때 그런 사랑처럼 우리 자신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일 중요한 그 기능을 빼고 보는 겁니다. 오늘날 용서를 시답지 않게 보면서 용서 이야기하면 전부 다 도망치기 바빠요. 어디로 내빼는지 다 내빼요. 복음,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도망가 버려요.
“안 들을란다! 나도 많이 들었다.” 많이 안다는 거예요. 그곳에 뭐가 있다고 도망칩니까? 들릴라가 삼손 버리고 도망친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실인은 삼손의 개인적 기능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기능을 삼손이 대표로 보여준 것이 나실이라는 거예요. 삼손은 철이 없어서 여자가 유혹하니까 사랑했지요.
그러나 삼손이 그렇게 철딱서니 없는 순간에도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것은,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그 언약, 약속, 예언, 예고, 나실인, 그 기능, 삼손을 죽여서라도 그 기능을 발휘시키는 하나님. 떠날 사람은 떠나라 이 말이지요. 떠날 사람은 떠나야 돼요. 오늘 본문 이야기가 그거예요. 떠날 사람은 가라 이 말이지요.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요한계시록을 제가 읽어드릴게요.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둘째 사망이 그들에게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손으로 덮은 것은, 앞으로 모세가 해야 될 일은, 이미 너는 구원받은 상태에서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이 주신 그 용서라는 것……, 용서는 흥정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그 은혜, 용서의 여파, 용서의 여진에 모세가 놓여 있는 겁니다. 이미 주신 그 용서, 이미 주신 그 은혜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의 변화를 유발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모세가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사도바울이 활동하고 있고. 아까 요한복음 3장에서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이미 세상은 애초부터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피 묻은 손으로 덮어주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얻게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구원을 얻게 함이라. 죄가 사해지려면 계속해서 죄가 발굴되어야 돼요. 이런 이야기하면서 다시 여러분의 논리를 촉구하는 바인데요.
우리가 “주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는 그것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그래, 내가 용서해줄게.”이렇게 답변하지 않아요. “너 죄지은 것 벌써 안다.” 이렇게 답변해버려요. 주님이 답변에는 ‘벌써’가 들어가고 ‘이미’가 들어가 버려요. 우리는 새삼스럽게 지금 문제를 가지고 벌벌 떠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벌써’라는 말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응답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용서를 구하는가? 인간의 문제가 뭐냐? 우리가 보통 죄를 지었으니 용서 받는다고 하잖아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생각에 죄가 없으면 용서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죄를 짓는다고 할 때는 우리가 아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라고 여기는 그 일이 일어나면서 연관되는 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집합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변수들이 뭉쳐져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창원터널에서 가스통이 폭발해서 3명 죽고 4명이 다쳤다고 할 때 그 많은 변수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볼게요. 어린애도 그 사고로 죽었다는데 하필 왜 그 시간에 차 몰고 가서 사고 나는 그 타이밍이었는가? 나오기 전에 기도 한 10초만 더 해서 10초만 늦게 갔어도 그런 일을 안 당했을 것인데.
그리고 사고차량 운전했다는 76세 된 할아버지, 76세면 벌써 운전하기 곤란한 거지요? 열 번이나 했고, 과적은 왜 했는가? 그 할아버지가 운전을 왜 했는지 조사를 해보니까 할아버지 자식이 용돈을 안줘서 그럴 수밖에 없었고, 말렸지만 극구 한다고 해서 했고, 그런 변수들이 얽히고설킨 거예요.
모든 사람이 이웃사촌이거든요. 모든 변수를 다 모르는 상태에서 “죄 지었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몰라.” 이렇게 돼요. “네가 아는 죄는 너의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만 추슬러서 그것을 죄라고 하는데 너는 죄도 모르면서 무슨 용서를 구하느냐?” 이렇게 주께서 나무라십니다.
용서 구하지 마세요. 개코나 죄를 알고서 용서를 구해야지 죄도 모르는데 무슨 용서를 구해요. 살아가는 자체가 죄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벌써, 이미 십자가 피 안에 있는 사람은 벌써, 이미 용서 받은 거예요. 우리가 용서 받을 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용서를 잊어버리고 자기 행위에 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보지 않고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설치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보배합을 또 놓쳐버리고 마귀에 속아서 딴 데서 나를 나답게 하려는 욕심을 부렸군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철거된 담벼락에는 줄을 그을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철거된 담벼락에 선과 악을 긋는다는 것, 윤리도덕을 적용시킨다는 것, 이미 담벼락이 철거되었는데 어디에, 허공에 줄 긋습니까?
성도에게는 윤리, 도덕, 선악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미 용서로 철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피 묻은 손바닥을 봐야 돼요. 이 피 묻은 손바닥을 봐야 되지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습니까? 졸고 계시는 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어디를 쳐다봐요, 우리가. 우리가 왜 사는데요? 우리 인간은 왜 삽니까?
값없는 용서라고요? 값없는 용서 제켜버리면요, 이유 있는 저주 나옵니다. 덮어주니 그냥 덮어주는지 알지요. 값없는 용서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제켜버리면 뭘 해도 저주받는 것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래도 우리교회 교인들 용서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꾸 세상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잖아요. 복음도 멀어지고, 말씀도 안 들으려고 하고, 교회도 안 나오려고 하고, 그저 돈 벌려고 설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는데 그 사람은 지금 벌 받는 중이에요.
십자가에서 눈이 멀어지는 그 자체가 벌이에요. 벌이라고 해서 아프고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장차 지옥이 있음을 그 사람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장차 지옥이 있는데 지옥에 갈 인간들이 지옥이 있음을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옥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용서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점점 용서가 좋아지지 않아요. 십자가가 안 좋아져요. 그게 별로 귀하지 않아요. 인간은 선과 악을 어디에 긋느냐 하면, 자아에 긋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인데요. 자아를 담벼락이라고 여기고 자아에다가 선을 그어서, 이것은 선했고 이것은 악했다, 자기가 스스로 평가해요.
그런데 인간의 자아라하는 것은 이게 없어요.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자아가 아니고 주체입니다. 예수님이 주체에요. 예수님의 주체를 다윗에다 담아버리면 다윗언약이 되고, 노아에 담아버리면 노아언약이 돼요. 모세에 담으면 모세언약이 되고. 성도에 담으면 새언약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주인공으로 살아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이제 우리의 주체는, 모든 운명이나 팔자는 주님이 책임지지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자꾸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여러분이 책임지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선하면 복 받겠지. 복 받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아가 되겠지.’ 자아라 하는 그것은 껍데기에요. 자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임시적으로 기억을 모아놓은 기억의 덩어리에요. 기억의 집합체고. 돌아서면 망상이고 죽으면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지금 김 주혁이라는 자아는 없어요. 가루되어서 날라 가버렸어요. 가보세요. 흙 파보면 없지요. 어떤 사람이 죽는다는 말은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첫째 사망이라는 징후로서 나타나듯이 ‘용서하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한 것은 장차 용서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고린도교회에게 사도바울은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한 겁니다.
세 번째 가겠다고 한 말은, 율법에 보면 증인을 세울 때 두 세 증인 세운다는 그 법칙에 의해서 했는데 사실은 사도바울은 세 번째는 못 갔어요. 어쨌든 간에 구원이라는 것은, 용서라는 것은 덮어주는 겁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라는 것을 만들게 했습니다.
언약궤라는 것은 7월 10일 대속죄일에 덮어주는 거예요. 덮어줄 때 피 묻은 두 손으로 덮어줘요. 보통 제사장이 안수할 때 한 손으로 안수하는데 두 손으로 합쳐서 안수하는 경우가 딱 한 경우밖에 없어요. 7월 10일에 아사셀 염소라 해서 염소를 두 마리 잡아요. 두 마리 잡는 이야기는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두 마리를 잡는데 한쪽은 희생시키고 희생된 것으로 값없이 이쪽을 살리기로 하자는 그 염소를 따로 만드는 겁니다. 두 마리의 염소, 두 마리 새, 두 마리의 수 양을 마련해서 번제로 드리는 이유는 희생 했고 날라 가버린 그것을, 희생의 피를 묻힌 자가 계속 돌아다니면서 “희생했다. 벌써,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는 그것을 유포하고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일종이 미친개라고 할 수 있어요. 미친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에 미친 자에요. 어떤 윤리도덕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어떤 책임도 자기가지지 않으면서 그냥 사랑에 미쳐서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 대구서문시장 동네 사는 사람은 다 알아요. 비산동에 살았는데 건달녀라고 하면 대구시민은 거의 알건데요.
머리에 꽃 꽂고 있는 미친 여자가 있었어요. 아침에 출근하면 서문시장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미친 짓 다 하고 있어요. 우리보기에는 미친 여자에요. 그런데 그 미친 여자가 보게 되면 이 쪽, 우리들이 이상한 거예요.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게 뭐가 무서운 말이고 그게 뭐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두려운 말입니까? 세일러문, 애들 만화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밖에 더 됩니까?
주님의 용서가 철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습자지 투명한 종이를 가지고 대면서 용서받은 사람인지 검색해 보는 거예요. “맞나 보자……아니네. 이 사람은 어떤가 보자.” 이렇게 점검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 담길 그릇들을 아니면 아니라고 제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도 아니고, 이건 용서를 담을 자격도 없고, 너는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자아는 그대로 있는데 주체가, 주님이라는 주체가 지금도 부지런히 활약하고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너한테 적합한가 한 번 보자, 하고 딱 맞춰보는 겁니다. 교회가 외쳐야 될 것, 전해야 될 것은 뭐냐? 그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내가 너희에게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죽은 자가 이미 장차 올 둘째 사망을 이야기하듯이 현재 용서라는 말은, 장차 영원한 용서의 세계가 있음을 미리 앞당겨서 체크하게 하는 겁니다. 그 둘은 끊어질 수 없게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의 죄를 늘 발굴합니다. 성경말씀대로 움직여서 계속 발굴하는 겁니다.
발굴할 때 새롭게 발견되는 그 죄에 대해서 늘 감사하고 늘 고마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나 인간도 아니군요. 이런 존재였네요.” 늘 생각하는 거예요. 남에게 수치를 당하고 인생 실패라는 소리를 들어도 “당연합니다.” 물론 그런 소리에 기죽으면 안돼요. ‘너나 잘하세요. 너도 똑같아.’ 아주 개무시 해버려야 돼요.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자기를 꾸밀 수 있는, 자기를 의롭게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한 번 제가 구호를 외칩니다. 예수 믿으시고 이제는 죄를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많이 지으시고 그리고 웃으면서, 그것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죄지으시기 바랍니다.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 벌벌 떨지 마시고. 들키기는 누구한테 들킨다는 말입니까? 이미 십자가 앞에서 들켰는데 더 누구한테 들키는 것이 겁납니까? ‘이래서 경찰에 체포되는 것 아닌지.’ 경찰서에 좀 다니면 어때서요? 어떤 자식이나 부모나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마세요. 여러분이 오히려 자아를 굳건히 하는 겁니다. 그 자아는 있어봐야 악마덩어리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아를 팽개치고 주님 짊어진 자기 주체와 우리가 계약을 맺었기에 삼손하고 똑같아요. 삼손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뭐냐? 그런 삼손도 주님은 자신의 그릇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주어졌기에 삼손은 아, 자기 자아를 포기하고 주체로 등장하면서 끝까지 주님의 주체됨을 드러냈던 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정말 귀한 것 들어 있고 우리 머리위에 피 묻은 손으로 주의 얼굴을 보게 하셨다는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세상에 돈 번다고, 그저 밥 먹고 산다고, 자식 키운다고, 다 내팽개쳤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그 말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면서 우습게 봤고,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천리만리 내 뺐습니다. 주여, 이제는 마귀 들린 인간들에게 잘 보이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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