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우려
2017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19-21
(12: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12: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인간 속에 뭐가 있는지는 인간은 전혀 모릅니다. 그냥 껍질로서의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형성된다고 알고들 있습니다. 바로 그런 식의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각자 알아서 ‘개인구원’을 챙기면 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런 식의 복음은 애초에 없는 ‘다른 복음’이요 ‘다른 예수’요 ‘다른 성령’이라는 겁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전제가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저주받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을 법을 지켜서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도리어 자신의 저주받기에 합당함을 감추고 있고 ‘자기 의’로 덮고 있다는 겁니다.
저주 아래 있는 것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이 ‘저주스러운 세상’ 자체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합당한 무대가 되고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유일하게 ‘죄에서 의’로 나오게 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아무리 해도 ‘죄에서 의’로 나올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이 저주스러운 결정적 상황을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세상 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을 본다면 이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자신이 기대하는 것과 교회가 기대하는 것이 쌍방 다르게 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서, 복음을 밀어내는 힘이 비로소 발견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사도의 이런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악마라는 영적 세계에서도 그의 사명성을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행 19:15) 이런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각가지 죄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이런 죄의 목록은 고린도전서 6:9-11에도 나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리스트가 카데고리, 즉 범주별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이 인간 세상에서 죄마다의 개성과 다양성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죄의 범주가 달라도 모두 같은 불과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이는 곧 이 모든 죄의 목록들이 한 ‘몸’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몸은 이런 죄가 발산되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성경에서는 몸을 가지고 이야기, 서사체계를 구성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한 몸을 가지고 ‘공생애’라는 서사(이야기)와 대비하고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몸 만이 유일하게 죄에서 의로 전환된다고 말씀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주에서 영생으로 전환됩니다. 따라서 그 몸이 우리 몸 중심에 삽입된다면 이는 곧 예수님의 몸의 능력으로 더불어 죄에서 의로 전환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들어온다는 말은, 원천적 죄가 우리 몸이 들어온다는 말이 됩니다.
이 들어온 원천적 죄가 바로 사단의 명줄을 끊어놓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내내 인간들에게 ‘자기 의’를 비축하라고 독려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제안은 오직 하나로 집약됩니다. “너의 의가 너를 천국으로 보내리라!” 하지만 복음은 말씀하십니다. “너를 미워하라!”(요 12:25)
‘너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곧 ‘너의 선택과 너의 결정과 너의 사랑을 미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도 중심에 계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강력하게 적용됩니다. 마치 믹서기나 원심분리기처럼 중앙에서 강력한 모터가 회전을 하게 됩니다. 필요없는 것들은 여지없이 제일 바깥으로 밀려서 유리벽면에 달라붙게 됩니다.
쓰레기에 배설물이지요. 이게 바로 성경 전체 나오는 죄의 목록들입니다. 아담의 몸을 인수받은 우리들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지신 몸이 쳐들어오셔서 믹서기를 가동시키면, 아담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죄들은 죄다 외부로 노출되게 됩니다. 그 중에서는 ‘두려워하는 것’, ‘믿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죄의 범주와 상관없이 모두다 지옥불에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중심에 들어서기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세례요한 당장이라도 세상에 불심판에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의인들만 알곡으로 구원될 줄 알았습니다. 그 기준이 누가복음 3:11-14에 나옵니다.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하지만 세례요한이 제시한 기준은 어디까지 구약적 수준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오실 메시야가 당신 맞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제시한 기준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기준이었습니다.
즉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5-6)입니다. 자신이 소경이며 앉은뱅이 됨을 마땅하며 문둥이 됨을 당연하고 자신이 귀머거리됨을 당연하며 죽어서 지옥가야함을 당연함을 아는 바로 그 자에서는 일방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죄를 의되게 하심이 보이는 바로 그 기준을 말합니다.
인간이 존재하고, 그 존재한 인간이 행함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이전에 죄와 의가 먼저 있고, ‘죄를 위한 인간’과 ‘의를 위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지기 위해 창세전에 그 내막이 결정된 겁니다. 주님의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강력한 사랑의 모터를 중앙에서 가동시키면서 말입니다. 이런 자면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1강-고후 12장 19-21절(사도의 우려)17010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19절-21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19-21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하고 고린도교회하고 서로 생각이 맞지 않습니다.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은 마귀나라도 알아주는 사람이거든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마귀나라, 영적세계에서 이미 알아주는 사람인데 이 고린도교회에서는 구차하게 변명을 해야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가 강력하게 사도바울을 의심하고 있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사도가 자꾸 내가 진짜 사도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쪽에서 뭐라고 이해를 하느냐 하면, “아, 또 변명을 늘어놓으시는군요.”라고 강력하게 뭔가 밀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20절에도 나와 있는데요. 쌍방 간에 서로 원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갔을 때 너희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것과 내가 기대하는 것이 서로 안 맞을까봐서 내가 걱정한다, 라고 20절에 되어 있고 20절을 계속 보면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 그리고 21절에 보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 이런 것을 지적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을 지적할 때,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볼 때에 사도바울 편에 서지마시고 고린도교회 편에 서세요. 그러면 이렇게 돼요. ‘왜 우리한테 자꾸 잔소리를 하느냐. 우리도 교회고, 우리도 주 믿고, 예수 알고, 복음 알고, 성령 아는데 왜 자꾸 우리한테 잔소리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잔소리꾼으로 받는 겁니다.
그만큼 자기들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편지하기를, 그게 마귀라는 거예요. 마귀는 보통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습니다. 마귀는 숨어 있기 때문에 들키지 않아요. 마귀는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복음을 전할 때, 제발 좀 잔소리를 좀 그만 하라고 나올 때 마귀가 등장하는 겁니다.
뭔가 속에서 미는 힘이 나와요. 복음에 대해서 미는 힘이 나온다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복음인데 그 복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보실 때에 율법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이미 저주받은 자예요.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자로 태어나요. 이게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에요.
저주를 받은 자로 태어났으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저주받는 모습만 보여주면 깔끔하게 보여줄 것 다 보여준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아담의 자손들은 부모의 죄로부터 타고나서 죄를 짓게 되어 있고, 죄를 지었으면 저주받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 복음이라니까요. 모든 사람은 저주 안에, 죄 안에 있다. 그것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세상 살다보면 이런 생각 들거든요.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그 순간 무엇이 날라 가버리느냐 하면, 스데반집사나 선지자들 고생한 것 다 날라 가버리고 넓은 길 좁은 길 다 날라 갑니다.
멸망 길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요. 그런데 좁은 길, 영생 길은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고생한 것도 다 날라 가버리지요. 성경 전체의 모든 이야기가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순간 다 날라 가버려요. 우리 신세가 왜 이렇게 처참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게 정상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본래의 자리에 찾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위해서 …… 오늘 설교는 아주 사탄의 명줄을 끊어놔 버려야 되겠어요. 사탄의 명줄을 끊어놓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에다 죄를 집어넣으면 돼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거예요. 우리 속에 죄를 삽입을 시키는 겁니다. 죄를 어떻게 삽입시키느냐 하면,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만이 알거든요, 그 아시는 유일한 분이 십자가에서 유일하게 죄를 알아요.
그 예수님이 알고 있던 유일한 죄를 우리 속에 삽입을 시켜 버리면 이것이 독감예방주사가 되는 겁니다. 제가 3만 5천원내고 맞았는데 광주강의에 가니까 보건소에 가면 5천9백 원이면 맞는다는 거예요. 5천9백 원짜리를 3만 5천원에 맞았어요. 이건 설교시간에 엉뚱한 이야기인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독감예방주사를 안 맞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죄를 어디서 견주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죄를 정리를 해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죄를 정리하게 되면 얼추 잘만 하면 내가 착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기결정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착하고 안착하고는 누구 결정이냐 하면,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본인의 선택과 결정하기에 따라서 내가 착해질 수 있고 내가 착해진다면 그 착한사람만 간다는 그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이 보이는 겁니다.
이게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이에요. 계속해서 우리에게 행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냐?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거예요. 십자가가 오게 되면 근원적인 우리의 모습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와 더불어서 죄가 우리 속에 삽입이 되어버려요. 삽입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죄에서 천국 가는 의가 바뀌는 것은 오직 한 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예수님만 모든 언약을 이루었고, 그분만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합당하고, 그 합당한 그분이기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그분만이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가 들어올 때 우리는 누가 집어넣었는가 보세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의 근원적인 죄도 들어왔다는 말이 되고 동시에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중심에 들어왔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이 말이에요. 네 중심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힘든 것은 중심이 없어서 그래요. 어떤 20대를 보니까, 물론 30대도 마찬가지인데요, 자격증을 따고, 또 자격증을 따고, 또 자격증을 따고, 계속해서 스펙 쌓는다는 핑계로 온갖 자격증을 따는데 왜 그런데 중독이 걸렸는가 하면, 자꾸 이리저리 박아보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중심이 없어서 자기가 스스로 중심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불안불안 하지요. 꼭 범퍼카처럼 이리박고 저리박고 계속 박는 겁니다. 중심이 없으니까 남에게 이야기할 때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것 외에는 남에게 보일 것이 없어요. ‘난 이만큼 성실했고, 이만큼 살았고, 난 너에게 밑지지 않아. 그런데 나는 오늘날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질문은 하는데 답은 찾을 길이 없네. 답은 찾을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이에요. 중심에 강력 모터가 들어와요. 강력모터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원심분리기나 믹서기 그런 겁니다. 강력모터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거기서 강력하게 모터가 돌아가게 되면 바깥으로 뭐가 퍼지는가 하면……, 믹서기가 유리로 되어 있잖아요.
믹서기로, 강력한 모터로 뭘 갈아보면 안에 뭐가 갈리면서 유리표면으로 들러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강력한 모터를 돌려버리면 바깥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죄라는 것이 바깥에 다 들러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죄를 안 짓는다 하는 거예요. 이단 중에 고수에요. 개혁주의 신학이 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오면 죄 안 짓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식에도 어긋나요. 빛이 오면 어두움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가운데서 강력한 모터믹서기가 회전을 해버리면 바깥에는 전부 다 ‘이것도 죄였어요? 이것도 죄였구나.’ 죄가 다 들러붙어 있어요. 그러면 자랑할게 뭐밖에 없느냐 하면, 죄지은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이 이야기가, 이 잔소리가 사도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를 제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린도교회보고 하는 겁니다.
계속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있어요. 지금 여기에 죄의 항목이 나오잖아요. 죄의 항목이 고린도전서 6장에도 나오는데 제가 6장 9절부터 읽어볼게요.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자, 이 말씀이 강력모터를 달아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에 있는 죄의 항목, 목록이 우리 육을 통해서 바깥에 노출이 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리스트에 해당되는 당사자가 바로 접니다.” 이 말은 지금 그 사람은 짜증을 내고 있다든지 부끄러워하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강력모터가 회전을 하니까 주께서는, 너는 구원될 수 없었는데 강력모터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강력모터가 뭐냐? 죄에서 의로 전환시키는 유일한 분인 예수님이 들어왔으니까 그 강력 모터, 파워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이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의인되어서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 한다고 그게 구원받는 사람 아니에요. “천하에 나만큼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거 자랑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내 신세 왜 이렇게 되었나!” 그런 자기 연민 그런 것 없어요. 죄가 튀어나왔는데도 감사한다면 모든 일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신세타령할 것 없어요.
죄의 목록이 요한계시록 21장에도 나와 있어요.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역시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카테고리로, 범주로 분류를 시켜봅시다.
분류를 시켜버리면 인간의 행함으로 착한 사람 되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난처하게 되어버려요. 왜냐하면 도적질 하는 그 범주하고 두려워하는 그 범주가 같은 범주가 아니에요. 흉악한 자들의 범주와, 행음자의 범주와, 살인자의 범주와, 술객들의 범주와, 우상숭배자들의 범주가 다 달라요.
제가 하는 말이 지금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실 것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꼭 간음하고, 살인하고, 마술 벌이고, 절에 가고 그럴 필요는 없거든요. 그냥 착실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요. 하지만 단지 두려워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유황불,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를 “주여, 저는 도적질은 안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따로 처리해주옵소서.” 그게 안 된다니까요. 불교에서는 그게 되는데 복음에서는 그게 안돼요. 어렵지요? 굉장히 착실하게 살았어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착실하게 산 사람이 나오는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십계명은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부모공경,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증거, 이런 것 하지 말라는 명령을 다 지켰어요. 도적질도 안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모든 것을 팔아서 다 주고 그 다음에 나를 따르라.” 하니까 두려워해서 못간 겁니다. 그 두려워한 부자는 어디에 갔느냐? 지옥불에 들어가요.
그분이 도적질 안했어요. 그분이 도적질도 안하고 간음도 안했어요. 그리고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옥불에 가기는 마찬가지에요. 결국은 똑같아요.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됩니다. 해결하는 방법은 이래요. 그 카테고리를 하나의 서사구조로, 이야기구조로 만드는 거예요.
결국 지옥불에 들어갈 거 하나의 포텐셜에너지, 잠재성을 갖고 있는,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지금은 안했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는 어떤 잠재성을 갖고 있는 그 본처, 본장소가 어디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몸이에요. 지금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네가 뭘 했는지 안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몸,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몸에서 스토리, 어떤 서사구조, 일종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2017년도에 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몸을 통해서 아담의 몸은 이러이러 한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게 복음이야, 라고 끄집어내는 겁니다. 누가? 강력모터가. 강력믹서기가.
믹서기로는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여러분이 속옷 빨 때 빨래비누로 치댑니다. 치대서 큰 솥에 담고 가스불에 올려놓게 되면, 꼭 해본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게 올려놓게 되면 가끔 뚜껑을 열어보거든요. 그러면 보글보글 속옷은 하얘지는데 시커먼 땟물이 줄줄 나오지요. 온갖 때가 묻는 죄인이면서도 우리는 남들처럼 안사니까 우리는 착한 줄로 알고 ‘내가 착한데 내 신세가 왜 이 모양 이 꼴 되었느냐’ 지금 자기신세한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의 강력모터거든요. 중심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중심에서 강력모터로 속옷 빨래를 해보니까 꼬질꼬질한 때가, 죄의 목록에 나오는 그 때가 다 우러나오는 거예요. 닭백숙 국물 우러나듯이 다 우러나오는 겁니다. 뼈다귀 국물처럼 말이지요. 푹 우러나오는 거예요. 어디서? 중심 때문에.
중심도 없으면 교회 수십 년 다녀가지고 “목사님, 말씀만 하면 내가 지켜서 착한 사람 되겠습니다.” “주의 말씀 순종했구나. 상급 받아라.” “천당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 중심에 강력 모터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그 짓 한 겁니다. 그 짓 한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잖아요.
꼬질꼬질한 때를 계속해서 바깥으로 밀어내게 되면 밀어낸 그 때들이 믹서기의 그 유리표면에 달라붙는 거예요. “진정 너는 누구냐?” 그게 나에요. 달라붙어 있는 것이 나고 중심은 나 아니고 예수 이름이라는 남이고 진짜 나는 유리표면에 붙어 있는 것 죽 긁어서 보면 그게 나에요. 왜 주님을 거부하고 거절합니까?
“목사님, 평소에 그렇게 살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우리는 못삽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래요. 자기를 사랑하는데 너무 사랑해요. 자기를 집착하는데 너무 집착해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래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면 안돼요. 그 사람을 미워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선택이고 내 결정이기 때문에. 지금 앞뒤를 연결해 보세요. 이 모든 사단이 우리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안 미워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미워하지 않고 내가 집착하고 사랑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선택한 것도 내가 안 미워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했잖아요. 그 예수는 미워해야 돼요. 그런데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사랑해버려요. 내 결정을 내가 사랑해버려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세요. 예수님 말씀에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제가 이렇게 곱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예, 이제부터 제가 그 말씀을 믿겠습니다.” 자기가 믿겠다고 한 자기결정을 자기가 사랑해 버려요. 대체 소통이 안돼요.
저는 믹서기 표면에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중심에 계신 분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여러분 중심에 계신 분 이야기를 제가 대신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자식을 미워해야 돼요. 내가 자식을 미워하면 그 자식이 저주받고 지옥 가잖아요.
그게 복음이에요.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겁니다.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나라 할지라도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모든 서사구조, 이야기구조가 거기서부터 풀려나와야 돼요. 나만 미워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다 풀립니다. 나만 미워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 중심을 소개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미운데 내가 미워한 그것을 주께서는 도리어 사랑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증거하는 증인 아닙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녹여버립니다. 쇠도, 돈도, 출세도, 명예도, 내 팔자, 내 신세, 사랑은 다 녹여서 오직 사랑으로만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강력모터입니다. 사랑의 강력 모터.
내가 따로 내 인생을 관리하거나 간수할 것을 일체 남기지 않았습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지킬 것 필요 없어요. 그것도 사랑 안에 녹여버리세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랑 안에다 녹여버리세요. <터미네이터>에 보면 로봇이 마지막에 “I`ll be back!” 하면서 용광로 속에서 녹아지거든요. 그래서 영화가 그대로 끝난 줄 알았어요. <터미네이터> 속편이 또 나왔어요.
여러분, 각설이 노래가 이래요. “작년에 왔단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의 문제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고 난 뒤에 와야 돼요. 죽지 않고 오게 되면 내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은 분이 내 안에 중심에 들어와야 돼요. 죽은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물귀신 작전입니다. 물귀신 작전이 뭔지 알지요?
같이 따라 죽자는 겁니다. 못의 중심으로 자꾸 잡아당기는 거예요. “주님, 저 죽기 싫어요.”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구나. 너에게 집착하는구나. 죽자 이놈아!” “싫어요.” 믹서기 돌려버립니다. “이런 죄의 항목들이 나오는데도 아직도 너는 너를 사랑하느냐?” 결국 인간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자기 죄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뭔가 사랑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악마가 심어준 그 심보와 사상과 정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언젠가는 신처럼 되리라.’ 그것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에요. 어떤 분이 이야기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들 하거든요.
이렇게 죄를 지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무슨 죄를 지었다, 음란, 호색, 살인, 도둑, 이렇게 하는데요. 여러분이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680억 가진 재일교포 노인이 있는데 나이가 99세에요. 재산이 부동산만 해도 680억입니다. 그런데 그의 장남과 장손이 그걸 빼돌리려다가 안 되니까 그 노인의 장손이 송 선미 씨 남편 되는 사촌 형제를 청부살인으로 죽였거든요.
최근에 벌어진 사건 아닙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항상 우리는 생각할 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680억이 아니고 68만원 있었으면 죄를 지었겠습니까, 안 지었겠습니까? 안 지었어요. 그 99세 된 노인, 참 오래도 살아요, 진즉에 죽어 없어졌으면 그런 죄 지을 일 없지요.
그러면 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있음에서 나온 거예요. 호색과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여인네가 있는데 너무 아름답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음란죄를 품었다. 주님께서 “너는 마음속으로 음란을 품었으니 간음죄다.” 했을 때 우리는 할 말이 많습니다. “왜 그 여인의 각선미를 좋게 했습니까?” 여러분 이야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왜 내 눈앞에 띄게 하십니까? 왜 존재케 하십니까? 왜 있습니까? 죄 짓도록 한 그 나는 왜 있습니까?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의 책임자는 하나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하나님을 안 믿어요. 동양철학에서는, 모든 죄 때문에 벌이 온다는 것은 감은 잡았기 때문에 신은 안 믿고 우리끼리 알아서 하면 잘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있는 인간을 가지고 죄 지었으면 지옥 보내고 있는 인간 착하면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있음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있음 이전이 있어요. 죄부터 먼저 있고 의부터 먼저 있어요. 죄에 의해서 그 다음에 인간을 만들고 의에 의해서 인간을 만듭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무슨 착한 일도 하기 전에, 있음이 있음 되기 이 전에 주님께서는 저주받도록 하기 위해서 에서를 있게 했고, 한쪽은 천국 가게하기 위해서 야곱을 만든 거예요. 내가 있고 난 뒤에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뭔지를 알리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들어갈 사람들을 따로 만드시고, 천국이 무엇이라는 것을 만들어두시고 그 천국에 합당하도록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따라서 에서는 진짜 착하게 살아도 그 하는 모든 것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의 일들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본인의 결정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살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 결정은 누가 하느냐? 주님이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못 알아 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4,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참 우리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왜 반항하느냐. 반항하는 것이 마귀에요. 강력 모터가 돌아갑니다. “내 팔자 왜 이렇게 되고 내 신세 왜 이렇게 되었느냐?”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내 것 가지고 하는데 왜 네 것이라고 하느냐?” 주님 것으로 시작할 때는 죄와 의, 두 개밖에 안 나와요. 천국과 지옥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중심에 내가 있다면 우리는 내 나름대로의 자기주장이 나와요. 세상은 그런 인간들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저주받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꽂혀버렸거든요. 예수님이 와버리니까 의견의 충돌이 일어난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 “아니! 구원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 구원은 내 소관이다.”
중심문제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말을 이해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그것이 사도바울 복음 안에,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좀 가더라도 중요한 것을 마무리 지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을 제가 풀이하게 되면, 만약 인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것이 다라면 불쌍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신자야, 너희들만큼은 세상밖에 모르는 자들이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지 알게 아니냐.”라고 다그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처럼 못살아서 아주 안달이 났어요.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안 되는가. 자꾸 세상이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지옥가고 멸망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 불쌍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망상 속에 있는, 그 망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부럽더냐, 그 말이지요. 집단적으로 지옥가고 있는데 그렇게 부럽더냐 그 말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주께서 자기사람들을 건질 때 그 건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건지는 겁니다.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고요. 마태복음에 보면 건질 때 그냥 건지는 것이 아니고 조를 맞춰서 건지는데 그 맞춰서 나온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오면서 도끼 이야기했고 이 세상은 유황불로 다 멸망한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요. 세례요한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하고 열매 맺지 않는 자는 찍혀서 불에 던지운다고 하니까 무리가 물었어요. 10절에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니까 누가복음 3장 11절에 보면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라고 했다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그 레벨, 구원받는 수준을 세례요한 나름대로 그 시대에 맞도록, 구약에 속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의 도끼에 안 찍힐 열매로서의 레벨은 된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그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분명히 심판을 해야 돼요. 쭉정이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곳간에 넣어야 되는데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그 기준에 의해서 보면 너무 조용하거든요. 조용하니까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전갈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고 질문했다고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 레벨 같으면 새치기 구원이 일어나요. 새치기 구원이 뭐냐 하면, ‘아, 두벌 옷가진 자는 한 벌 주면 되겠구나. 그 정도 같으면 내가 아브라함자손에 합당한 열매를 맺힐 수가 있지.’ 이렇게 새치기해서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세례요한의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구약적 기준이거든요.
신약의 예수님에게 넘어오게 되면 오히려 누가 의아해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의아해해요.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기준을 보세요. 예수님의 기준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하면 멀쩡한 인간도 소경이 되어야 되고, 앉은뱅이 되어야 되고, 문둥병이 되어야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야 되고, 심지어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가 될 때만 예수님이 건지시는 그 기준, 최종기준, 마지막 최종기준이 비로소 밝혀집니다. 새치기 구원은 없습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하지 않는 이상,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이상 어떤 기준도……, 두벌 옷 줬다고요? 남에게 착한 일 했다고요? 정한 세외에 더 받지 않았다고요? 다 탈락입니다.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죽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 됩니다. 내가 아파 죽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 돼요.
이게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 기준을 수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는다 하거든요. 예수 믿는다 하지요.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으면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그 안목과 같이 동조를 해야 됩니다. “정말 제대로 세상 보시는군요. 나도 그렇게 세상 봅니다.”라고 같이 동의를 해줘야 돼요.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아래 있다고, 모든 인간은 죽은 자라고 할 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인생, 제 평생 이렇게 개판이고 엉망이 되었는데 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믿는 자가 돼요.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을 사람 없잖아요. 아무리 둘러봐도 교회 나오는 사람들, 목사라고 하고 복음 안다고 해도 그렇게 믿는 사람 없던데요?”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믿지 않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모든 사람이 교회 나와도 다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그 말입니까?”라고 한다면 오늘 설교를 여러분은 잘못 이해하신 거예요. 믿지 않는 것이 믹서기 유리표면에 달라붙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아, 정말, 이야기를 끝까지 좀 다 들어보세요.
‘나 이제 믿었으니까 구원받는다.’ 그런 식의 것은 사탄의 짓이에요. 계속해서 믿지 않는 것이 나와요. 그 리스트, 목록이 나와야 된다니까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주님이 구원받으니까 같이 딸려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안돼요.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미워해야 돼요.
그런데 왜 이웃사랑이냐. 그 사람 속에 성령이 있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겁니다. 그 속에 있는 강력한 모터가 소중한 거예요. 그 표면에 달라붙는 …… 꼭 모션까지 취해야 됩니까? 백날 이야기해도 해도 안 믿어요. “내 인생,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팔자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주님, 저는 마음속으로도 간음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도둑질 한 적 없습니다.” 그게 두려움 아니고 뭡니까?
“주님, 도둑질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발언을 왜 합니까? 이 고백을 왜 쏟아놔요? “저 지옥 보내면 안 되는데.” 두려워하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두려워하는 자는 어디에 간다? 지옥 불에 들어가요. 개인구원 아닙니다. 예수님의 현장성이에요. “예수님이 너에게 있구나. 네 안에 예수님이 중심으로 잡았네.” 제가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보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중심에 그런 강력 모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발 평생에 나쁜 짓 좀 하면서 사세요. 정말 부~탁해요. 어떤 사람은 도적질을 안했다고 하거든요. 예수님의 기준이 이겁니다. “도적질 안 했다고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사는데 도적질 안하고 살 수 있어요?
주님에게는 도적질 안한 것이 뭐지 알아요? 모든 것을 다 팔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도적질 안한 거예요. 남의 것 안 훔친 것이 도적질 안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용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이제는 “도적질 할 수밖에 없고, 간음할 수밖에 없고, 안 믿을 수밖에 없고, 예수는 개코나 나는 나만 사랑하고, 나는 줄곧 나를 포기 못하고, 이러고 있는 그것이 바로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 덩어리자체 이겁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런 중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밤에 죽어도 그 사람은 천당 가는 거예요.
“나는 주님 안 믿습니다. 나는 벌벌 떨고 살아요. 나는 세상만 좋아할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사탄의 무기는 자기의 밖에 없다고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지킵니다. 내 선택이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오죽했으면 심 수봉이가 “남자의 약속은 미워요.” 했겠습니까? 노래 제목도 <미워요>에요.
나를 미워해야 되는데 눈만 뜨면 내가 안 미워지고 내가 나를 보호하고 싶어요. 지키고 싶어요. 참 진짜 꼴통도 이런 꼴통이 없어요. 꼴통인줄도 몰랐지요. 그런데 이 지독한 꼴통의 중앙에서 강력 모터가 돌아가니까 우리가 바깥으로 밀려가지고 ‘아, 내가 이런 꼴통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그것이 성령의 은혜고 사랑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설교 들을 때는 그게 생각이 나던데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납니다.”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워지지는 않아요. 슬픔 뒤에 찾아오는 그리움이라고. 어떤 노래 가사 비슷한데요.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게 지워지지는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아까 장로님이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답을 하면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가 호세아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고 목자가 양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분명히 냄새가 나고, 분명히 복음은 아닌 것인데 단박에 반박을 하려니까 반박이 안 되는데 어떻게 반박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장로님이 그것을 반박해야 된다는 생각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워지지는 않는 거예요. 그런 설교 들어보면 분명히 이상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살리십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시면 구원받습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데, 복음은 아닌데 반박이 안 되는데 어떻게 반박을 하는가. 제가 그랬어요. 구약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 착각이,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아니까 다이렉트로 직접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그 말씀이 자기한테 해당되니까 받아들이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고, 믿으니까 우리는 사랑 받으니까, 이제는 사랑밖에 난 몰라,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유일하게 호세아의 그 말씀이 아버지께서 어떤 취지로 이야기하신 것을 아는 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그것을 알아요. 예수님만 그것을 아는데 그것을 아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단절이에요. 끝났어요. 아하, 인간 속에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에는 장차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력하게 밀어내는 세력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만, 그만, 그만!” 복음에 대해서,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그만해라.” 강력하게 이 복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 교회에 나오든 관계없이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 이야기는 제발 이제 그만해. 듣기 싫어.”라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빛이 오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
아까 교독문 봤지요. 교독문 44번, 아무도 깨닫지 못했지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만 하나님 믿는 자녀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렇다면 호세아에 나오는 사랑받는다는 너희는 누구냐? 예수님께서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새롭게 생산해 냅니다.
생산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영을 줘요. 십자가의 영을 줘버리면 호세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떤 사랑받을 짓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중앙에 있는 강력 모터, 예수님 때문에 덤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만 사랑했는데 주께서는 제대로 아버지를 아셔서 진짜 구원하기 위해서 죄에서 의로 바꾸시는 유일하신 분인 예수님이 내 허락도 없이 내 중앙에 들어오셔서 강력모터로 돌려버리니까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제는 소경 되어도 괜찮고, 귀머거리 되어도 괜찮고, 앉은뱅이 되어도 괜찮고, 더더구나 이미 죽어도 괜찮고. 벌써 우리는 죽은 자 일 수밖에 없는데 강력모터가 우리자신을 죽은데서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불쌍한 자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그 예수가 어떤 예수냐? 벌써부터 우리 안을 천국으로 만들어내신 분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나는 성경말씀 보면 항상 죄 지은 것 밖에 나타나지 않아요. 죄의 항목에서 지킨 것이 없다고 해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영벌로 끝나요.
마태복음 25장 45절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지옥과 천국이 결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구원문제가 아니고 이런 죄의 리스트가 나오거든 반기세요.
“주여, 아직도 이런 배설물과 이런 찌꺼기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라는 죄는 죄다 주님의 강력모터로 인하여 지금도 제 몸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옵소서. 이런 인간을 사랑해주신 그 주님의 사랑이 저에게 가장 소중합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아도 정말 단단히 속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착해지는 것도 내 의지고, 천당 가는 것도 내가 나를 관리 잘해서 천당 가고, 신앙생활 제대로 해서 구원받는지 알았습니다. 이제 그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무한한 사랑, 끝없는 따뜻한 시선만 자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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