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도의 사랑(고후12;14-18) 1710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22. 21:53
2017-10-22 12:39:03조회 : 34         
   사도의 사랑 17102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도의 사랑(고린도후서 12:14-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TCOwhe22ZY, Hit:0

 이근호17-10-22 13:26 

사도의 사랑 

2017년 10월 2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14-18 

(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2: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2: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사도에게 천국이 계시로 떨어졌습니다. ‘삼층천’입니다. 거기에서 사도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찾고자 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전체가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은 그 당시 일반인들의 천국관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사기꾼’으로 취급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몰리게 된 그 사도의 천국관을 알고자 합니다. 사도가 전하는 천국의 내용은 그 어떤 수모에도 변경될 수 없습니다. 이 천국관 속에는 인간의 자리는 없습니다. 즉 단순히 인간과 예수님이 합작해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에 예수님이 호응하는 식의 천국은 애초에 없는 천국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세계관은 인간의 언어사용의 습관에서 분명히 보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단어를 부여하고 거기서 개념을 구성합니다. 이러다보니 천국에 대해서 필히 자아의 가치나 존재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 속에 ‘오른쪽, 왼쪽’이라는 부사(副詞)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개념은 개체와 연관성을 지니지만, ‘오른쪽, 왼쪽’은 전체를 아우릅니다. 모든 것을 빈칸이나 빈틈이 없이 모두를 다룹니다. 예외없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주님의 오른쪽 아니면 왼쪽 둘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곧 천국행 아니면 지옥행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하는 것으로 지음을 받은 겁니다. 

이것은 특정 중심체를 따로 부여해야 합니다. 즉 ‘오른쪽’ 자체가 뭐냐를 물을 수 없는 겁니다. ‘〜의 오른쪽’이라는 말은 구심이 되는 그 무엇이 아직 밝혀지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곧 개인이 나서서 협의하거나 의논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그 구심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5:32-34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해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지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등대라면 어느 한쪽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의 시선’을 쏘고 계셨고, 다른 한 쪽에서 ‘무한한 저주’를 쏘고 계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결정은 그 시선을 받게 되는 자들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그들은 ‘무한한 사랑’을 받은 티와 ‘무한한 저주’를 받은 티를 발휘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냥 ‘일시적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는 것보고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유도 따지지 않고 그냥 퍼붓는 사랑입니다. 사람하고 의논해서 제공되는 그런 사랑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시간적으로 멀어졌다고 해서 조도(照度)가 떨어지거나 사랑의 능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늘 차고 넘치는 식으로 제공되는 따사로운 사랑의 시선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저주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 지내고 있는 겁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불에 들어간 부자는 할 말이 많습니다. 

저주지역의 특징은 이러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개진합니다.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거짓 나사로에게 물 갖다 달라고 시키라고 하는 것을 봐서 여전히 자기 중심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부자는 아직 이 지옥불에 오지 않는 동생 5명을 걱정할 정도로 책임감이 충출합니다. 바로 이것이 저주지역, 곧 지옥의 특징입니다. 

지옥은 자꾸만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를 세상에다 고집스럽게 피력하려고 합니다. 소위 ‘말이 많다’는 말입니다. 전혀 ‘오른쪽, 왼쪽 관념’이 없습니다. 본인이 인생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버팁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거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세상에 나가 천국과 지옥을 전한다할지라도 그 말을 믿는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고 지옥에 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해서 본인들의 판단에 의해서 천국행과 지옥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오른쪽과 왼쪽에 대해서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누구도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사랑은, 이런 천국 사랑을 현장에 펼치고 있는 겁니다. 

즉 “나는 너희들에게 그 어떤 이득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른편을 향하여 끊이지 않고 제공되는 ‘무한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성령으로 행한 동일한 보조’가 나옵니다. 이것은 곧 성령받은 사람들은 같은 삶의 리듬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즉 미국에 있는 분이나 한국 있는 분이 전화로 복음에 대해서 나눈다는 것은 각자 그 속에 성령의 북소리에 같이 반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사전에 협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급습’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정탐군의 방문을 맞이해야 했던 기생 라합이 그러했고 천사의 방문을 받은 아브라함이나, 얍복강가에서 야곱이나 삭개오나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즉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들이 아닙니다. 다같이 한 성령으로 인하여 예상 밖의 방문을 받고 그동안 비축해놓은 ‘자기 의’가 박살이 난 경험들을 한 사람들입니다. 즉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꾸렸던 그들이 날아 들어온 ‘무한 사랑’ 앞에서 여지없이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삭개오는 아낌없이 ‘토색한 것의 네 배를 내어놓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사랑으로 형틀을 잡히게 된 그에게 돈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무한 사랑이 받지 전에는 인간은 자기 뜻대로 요령껏 자기만의 인생을 꿈꾸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무한 사랑’은 그런 그 만을 위한 인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주님 중심으로 된 오른편과 왼편의 작용만 중요합니다. 십자가 달린 두 강도를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과 한조가 되어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성된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받은 성도라면 십자가의 적용된 것만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인생, 따로 걱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0-23 16:49 
260강-고후 12장 14-18절(사도의 사랑)17010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14절-18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14-18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하여간 어떤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천국의 내용 때문에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싸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기꾼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천국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천국 말고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천국에 대해서, 사기 친다고 하는 그 사기의 내용에 대해서, 그 거짓말의 내용에 대해서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이렇게 가져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천국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사도바울이 오셨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천국, 그 천국에 대해서 당신이 뭔데 시비 거느냐 하는 겁니다. 

다들 동의하고 있잖아요. 천국은 이런 곳이라고 이미 동의하고 있는, 그 천국의 내용이 이미 구성되어 있는데 사도 네가 뭔데, 또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예수 네가 뭔데 다른 내용을 왜 이야기하느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의 상식이라는 그 상식 속에 우리도 포함되거든요. 우리는 평소에 어떤 천국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주님께서 주님이 오시고 사도바울 보내서 그것에 펑크를 내는가,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이 천국의 내용에 대해서 변경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가 전한 이 복음 안에 있는 천국의 내용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게 뭐로 나타났느냐 하면, 삼층천으로 나타난 거예요. 삼층천의 내용을 다시 보게 되면, 2절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천국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천국가도 내가 나에 대해서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어요. 천국에 가도. 왜? 이 몸 이대로 가니까. 천국가도 나도 한자리 하고 너도 한 자리 하고, 뚜렷하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천국은 그런 동네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천국이라는 거예요. 천국이 다르면 우리는 지금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달라도 조금 다르겠지, 뭐가 전면적으로 다 다를 수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의 버릇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길수가 있습니다. 보통 언어를 사용할 때, 단어나 개념을 사용할 때 ‘철수’ 하면 철수가 저기에 있어요. ‘영희, 철수, 마이크, 강대상’ 단어의 대상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편, 왼편, 이것은 대상이 없습니다. 

관계적부사라 할 수 있고 혹은 방향을 나타내는 부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오른편, 왼편,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막연해요. 왜냐? ‘나는 철수다’ 혹은 ‘나는 철수가 아니고 근호야.’ 이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나는 테이블이 아니고 사람이다.’ 이렇게 나와 대조가 가능한 개념들이에요. 

그런데 오른편, 왼편이 되어버리면 거기에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에요. 낄 수가 없어요. 물론 나의 오른편, 나의 왼편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천국 설명할 때는 나를 생각하지 않거든요. 사도바울이 셋째 아들에 올라갔는데 그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다, 그 말이거든요. 

사도바울이 삼층천을 보면서 “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나 좋으라고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일반사람들의 천국은 천국을 구성하고 그 천국에 자기가 하나 더 추가되면 나는 천국에 와 있다고, 천국에 와 있는 자기 자신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과연 진짜 천국과 일치되느냐, 그 말입니다.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망상 속에 있어요. 신앙생활 헛돌고 있고 헛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금 교회 나오고 있어요. 천국이 뭔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천국, 사기적인 천국을 천국이라고 우기시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해야 돼요. 

오른편, 왼편 이야기를 제가 거론한 이유는요, 마태복음 25장 33절에 보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 심판 때에. 오늘 본문이 사도바울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천국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천국의 본질, 내용이 지상에서는 사랑으로 이 땅에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내용과 일치되는 사랑이 지상에서 참된 사랑이어야 하는 거예요. 만약에 천국의 내용과 관련 없는, 천국 가지도 못하는 사랑이라면 우리는 지금 잘못된 사랑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사랑은 뭐냐? 일대일 대응, 개인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오른편, 왼편으로 상대해서 이야기를 해버리면 여기에는 모든 인간의 고유적 가치는 묵살이 되는 거예요. “저 어때요? 개인적으로 저를 상대해주세요.” 그런 것은 허락이 안돼요. 누구의 오른편이고 누구의 왼편이니까 그렇다 이 말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등대가 여기 있다면 등대가 양쪽에 불빛을 비추잖아요. 불빛을 비출 때에 등대 오른편이 있고 등대 왼편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 천국은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오른편과 나의 왼편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한쪽은 무한한 사랑으로 펼쳐지게 되고 한쪽은 무한한 저주로 펼쳐져요. 

등대가 불빛을 비춰버리면 등대의 불빛 그 에너지의 한계 때문에 어느 정도 가다가 광도가 떨어지거든요. 그러나 주님의 오른편과 주님의 왼편은 끝도 없이 그 광도가 떨어지지 않아요. 십자가 이후에 수천 년이 지나도 주님의 사랑은 떨어지는 법이 없고 계속해서 무한대로 무한한 사랑이 주어지는 겁니다. 

저주 쪽은 지옥이죠. 천국 쪽은 무한한 사랑 쪽이고 지옥은 무한한 저주 쪽입니다. 무한한 사랑이에요, 무한한 사랑. 무한한 사랑 앞에서 주님이 우리하고 상대할 이유도 없어요.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을 왜 따집니까? 그 조건보고 사랑 줍니까?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 놓친 것이 있어요. 아주 근원적인 것을 놓쳤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무한한 사랑이라는 거예요, 무한한 사랑. 이렇게 나쁜 짓도? 이야기하지 말라니까! 무한한 사랑이라니까, 무한한 사랑! 사람을 죽이다니!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주 앞에 할 필요도 없어요. 

주님이 관심 있는 것은 무한한 사랑이에요. 무한한 사랑이 뭐냐 하면, 하나의 불빛이거든요. 하나의 시선이라는 말이지요. 사랑은 시선입니다. 그냥 주시하는 거예요. 어떤 내용을 담고, 무한한 사랑을 담고 주시하는 게 천국이에요. 왜 인간은 자기를 주시합니까? 

오늘 본문 보면서 ‘아, 사도바울은 천국 이야기하는데 이 땅 지상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는구나. 아, 천국이라는 공간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자.’ 보통 그렇게 생각해요. 

‘사도바울이 사랑 받아서 사랑 받은 사람 천국 집어넣으려고 사도바울이 이렇게 희생적으로 돈도 밝히지 않고,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사랑했음을 알아다오, 하는 식으로 계속 나가는 모양이다.’라고 오늘 본문 내용을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삼층천과 관련 없는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무한한 천국과 관련된 사랑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안 된다는 말을, 다른 성경구절을 통해서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하고 부자가 같이 살았는데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있어요. 부자는 천국가고……, 아니지요. 큰일 나지요. 거지 나사로는 천국가고 부자는 지옥 갔습니다. 자,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 대목인데 여기서 굉장히 강조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부자가 이야기하기를 내가 이왕 지옥 온 것은 할 수가 없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생 다섯 명이 있으니까 이미 천국 간, 극락에 간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보내서 “이 사람들아!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더라.” 하고 내가 가봤다고 소개시켜주게 되면 동생들이 정신을 번쩍 차려서 ‘아이고, 잘못 살았구나.’ 하고 회개해서 이 형이 있는 곳에 오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는 그 대목에서 우리가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는 그 대목입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와 닿지를 않아요. 누가복음 16장 31절에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왜 죽어서 천국 갔다가 구경하고 돌아온 사람의 말을 왜 우리는 …… 제 말을 잘 들어봐야 돼요. 천국 다녀와서 천국 있더라, 지옥이 있더라, 하는 그 사람 말을 우리가 ‘아, 과연 있구나.’ 하고 그 말을 듣고 따르면 왜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까? 이게 어려운 거예요. 

제가 죽었다. 천국 갔습니다. 다시 세상에 왔습니다. “죽어서 가보니 이런 천국이 있더라. 그리고 지옥이 있더라. 정신 차려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내가 네 말 믿을게.” 이래서 믿은 사람들이 왜 천국에 못 가느냐 그 말입니다. 이 본문이 엄청나게 어려운 본문이에요.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할게요. 등대입니다. 등대에서 불빛이 비추거든요. 구원이란 오른편 왼편이에요. 나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등대에서 나온 불빛이, 사랑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무한으로 갑니다. 무한입니다. 일시적 사랑이 아니에요. 나쁜 짓하면 거두어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쁜 짓 하는 그런 것은 보지도 않아요. 자기에서 나온 무한한 사랑, 오른편 사랑이라니까요. 오른편이라는 것은 어떤 개체를 무시해요. 아우른다 이 말이에요. 오른편 왼편이라는 것은 합쳐서 전 우주를 아울러요. 아우를 때는 개인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집에서 만두 빚을 때 홍두깨로 밀가루반죽 밀어서 평평하게 하잖아요. 그 다음에 밥공기로 만두피를 찍습니다. 저도 어머니 정신도 온전하고 젊을 때 만두피 많이 찍었거든요. 동그랗게 만두피를 찍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자투리가 어릴 때 제 여린 심정으로 보기에는 참 측은했어요. 

‘다른 것은 다 뽑혔는데 너는 이렇게 자투리로 남았구나. 어쩌면 좋지?’ 어쩌기는요. 우리 어머니가 확 우그려서 다시 뭉치지요. 모든 것은 전체로 아우르는 겁니다. 전체로 아우른다는 것은 내 앞에서 개체라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저 어때요, 착하게 살았어요, 못 되게 살았어요, 이런 짓거리 했습니다, 하는 것들, 내 앞에서는 그 입 좀 다물라는 그 말이지요. 

나는 전체를 보고 무조건 오른쪽은 무한한 사랑을, 왼쪽은 무조건 무한한 저주를, 끝! 이게 천국이에요. 그래서 삼층천에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니까요. 사도바울의 삼층천, 천국에서는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지옥에 간 부자이야기가 많은데, 첫째는, 부자가 지옥에서 반항을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지옥의 특징은 개인적인 견해가 많아요.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지옥의 특징은 본인이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자기 인생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 지옥 갑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 개판이 되어도 책임 안집니다. 진짜 이거 아멘, 해야 돼요. 다 아멘, 해야 돼요. 혼자 하면 안 되고. 

자기 인생 책임지는 사람, 진짜 이 사람은 아직 개체, 개별자를 꾸준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의 세 친구 유황불에 들어갈 때 불에 손가락만 대충 넣었습니다. 손가락 보면서 ‘화상 입었나?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지.’ 이랬습니까? 몽땅 자기 몸 그대로 다 들어갔잖아요. 개체, 개별자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속에는 다 들어가야 돼요. 어떤 일은 내가 주님의 은혜에 맡기고 이 일은 내가 알아서 내 의지로 처리하고? 왜 이걸 구분합니까? 죄용서는 교회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처리하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직장일 내가 하고, 왜 이것이 분리가 돼요. 왜 사견이 왜 그렇게 많아요? 개인적 의견이 왜 그렇게 도드라지고 계획이 왜 그리 많습니까? 

그 계획이 누구를 위한 계획이에요. 개별자 지키기 위한, 자기 것 지키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것은 지옥 가서 많이 하세요. 그리고 개인적인 인생 계획이 있으면 꼭 책임을 지려고 해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어디 간다고요? 천국을 가요? 

인간의 모든 언어는 개체와 일대 일로 대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 가운데서 개체와 대응되지 않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른편 왼편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근원적입니다.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것은 바로 오른쪽 왼쪽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이것을 약간 눈치 챘어요. 돌이나 책상이나 전부 다 단어를 다 붙여요. 모든 언어가 그러니까. 마이크, 피아노, 그렇게 붙여놓고 그 다음에 더 깊이 나가요. 대조를 시킵니다. 나쁜 피아노, 좋은 피아노,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이게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언어층보다 더 내려가게 되면 대조가 나옵니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음양사상이라고 해요. 여자 있으면 남자. 선이 있으면 악. 미와 추. 기분 좋음과 나쁨. 모든 인간의 머리로서는 그 선에서 끝납니다. 며칠 전에 노벨문학상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지은 책 <남아 있는 나날>의 서평을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았습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작품이에요. 그 사람의 주장이 뭐냐? 평생을 후회 없게 산 사람, 어떤 명분 가지고 산 사람과 명분 없이 그저 결혼하고 애나 낳는 사람. 존재의 이유를 찾는 사람과 그저 그렇게 산 사람을 나눠놨어요. 인간의 발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기껏 그거에요. 

부자가 지옥에서 그걸 내뱉는 겁니다. “나는 이미 지옥 왔지만 동생들이 불쌍해서 미치겠다. 내가 마지막 희생, 불꽃을 태우리라. 주님, 나사로 보내서 동생들이 이곳에 오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장렬하고 대단한 희생정신입니까? 그런데 그 희생정신이 지옥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주님은 말합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모세와 선지자는 개개인으로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동생 다섯 명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 상대해서 예수님을 하나의 신호등, 등대로 만들어요. 

등대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을 그냥 좌우로 펼쳐버려요. 이유 없이 무조건 우하면 사랑, 무한한 사랑,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한한 사랑. 이쪽은 참 억울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한한 저주, 자기가 어떻게 살았든 뭘 했든지 간에, 자식 열 명 키운다고 고생했든지 관계없어요. 

그거 보지 않아요. 일체 무엇을 했는가를 보지 않고 무한한 저주에요. 오른편과 왼편,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세상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천국도 지옥도 그렇게 만들어 세운 겁니다. 

교회 와서 아직도 자기의 지난 날, 자기의 아픔, 그런 것 질질 끌고 오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눈으로 본적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봤답니다. 마트의 남자직원이 설탕부대를 옮기는데 설탕부대가 터져서 줄줄 흘리는 거예요. 직원이 보니 설탕이 흘려져 있거든요. 화를 내면서 “내가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는데 누가 설탕을 질질 흘려!” 한 거예요. 

가만 보니 자기가 메고 있는 설탕부대에서 설탕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 땅에서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마구 저주티를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사랑 받은 티, 그것도 그냥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고, 행한 대로 보상 주는 사랑이 아니고, 무한한 사랑을 계속 질질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랑이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본문 들어가는데 이렇게 서론이 길어요. 지난 가락교회 때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어떤 목사님이 물었다 했지요. 지난 오후 설교에서 했지요.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지요.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을 모릅니다. 

왜? 살아있다는 그것, 내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죽음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죽음을 이야기해도 살아 있다는 내가 생각하기에 죽음을 모릅니다. 그러면 죽음은 뭐냐? 죽으면 그 죽는 순간에 확 하고 저주의 열기가 와 있어요. 본인은 까불고 찧고 판사니 검사니 잘났다 하지요. 하지만 저주는 못 느끼는 거예요. 

등대의 왼편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이 저주의 티를 팍팍 쏟아내면서 살아 있는 것도 몰라요. 육이 죽고 난 뒤에 지옥의 열기 있잖아요, 그게 얼굴에 확 오는 거예요. 처음부터 이미 저주받고 있었던 거예요. 이미 죽어 있었던 거예요. 죽어 있는 자에게 죽음을 말하면 모르지요.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오른편 왼편이라는 이 마태복음 25장의 천국의 내용은 우리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안 오려 하거든 너 숨 쉬는 것 다 반납하라는 이야기에요. 회수할거야, 이게 바로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는 원리거든요. 주님의 긍휼로 숨은 쉬고 있으면서 이게 주께서 주시는 설탕부대인 것은 모르는 거예요. 

아까 교독문 봤지요? 함께 읽었잖아요. 건성으로 읽었습니까? 그 나라 의를 구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은 그 나라의 의를 일치감치 몰라요.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은 ……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돌아서면 화투장이 다 뒤집혀 있다고요. 

내가 죄를 지었는데 돌아서면 의로 바뀌었어요. 주께서 나를 통해서, 나의 죄를 통해서 무한한 사랑을 그 현장에 질질 흘리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설교하는데 설교 하는 것도 힘들지만 준비하는 그것도 힘들어요.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설교 준비하는 데 도와주십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 경기도 파주에서 어떤 여자목사님이 공동체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유튜브를 보라고 저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질문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서 봉사를 했는데 복음 알고 거기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기에 답변을 해줘야 되니까 이십 몇 분짜리 내용을 봤어요. 

파주에서 50여 가구 되는 노인들 돌보면서 공동체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 반찬도 만들어주고 자기도 소아마비인데 예배도 함께 드리고 열심히 봉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목사님이 하도 갸륵하고 착하다고 기독교방송에서 다큐로 찍은 거예요. 인터뷰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할아버지는 “그동안 술 먹고 싸돌아다니면서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겠어요.” 이런 게 나와요. 

그 교회 문제점이 뭡니까, 하는 거예요. 다 보고 답변을 해드렸습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온 실적 앞에서는 절대로 인간은 죄의식을 가질 수가 없어요. 실적 앞에서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분발하자, 더 이 일을 키워야지, 이겁니다. 

안되면 ‘분발하자’ 하고 ‘주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거예요. 실제로 다큐에서 그 목사가 하는 말이 4년 동안 예배당 지으려고 기도하고 있는데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기에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는 일이 죄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왜? 그 목사는 한 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몰라요. 

계속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떤 실적을 주겠지, 하는 거예요. 실적 앞에서 인간은 ‘분발하자. 열심히 하자.’ 와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 그 두 가지 내용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기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두 번째, 주님께서 자선사업 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까? 십자가 지러 왔어요. 

자선사업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전담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려고 오셨어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혼자 졌습니까? 양쪽, 왼쪽 오른쪽이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왼쪽 오른쪽과 예수님이 한조를 이뤘어요. 

이게 뭐냐 하면, 전세계를 새롭게 아우르는 겁니다. 나 여기 있고 왼쪽과 오른쪽이에요. 그런데 왼쪽에 있는 사람도 살인강도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도 살인강도에요. 둘 다 인간 같지도 않은 거예요. 그런데 한쪽 강도 보고는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소개한 천국 우리가 아는 상식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우리의 상식은 지옥 간 부자가 이야기를 다 해버렸어요. 개인적인 의견이 왜 그리 많아요. 개인적인 성경해석, 개인적인 신앙, 개인적인 행위, 개인적인 자기생각, 왜 그리 말이 많아요? 거지 나사로 시켜서 물 한 방울 찍어 달라고. 왜 그리 중얼중얼 말이 많습니까? 

무한한 사랑을 받았으면 그저 “주여,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있어야 돼요. 이 힘든 세상에 여러분, 너무 고맙고 늘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기 모자라는데. 그것도 하셔야 되고 앞으로 이거 하세요. 여러분이 신호등이 되세요. 누가 뭐라 하거든요. “이쪽으로 가면 지옥이고요, 천국이요? 저쪽으로 가시면 되고요. 지옥이요? 이쪽으로 가시면 되는 겁니다.” 

 “지옥은 어떤 쪽입니까?” 말이 많고,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계획을 짜고, 책임지려고 하고, 남한테 미안하려고 하고, 계속해서 ‘이 일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 줄줄 저주의 설탕부대를 계속 흘리고 있는 사람, 세상 일이 내 명분, 노벨문학상 작품처럼, 내 명분을 위해서, 집사라는 내 명분, 목사다운 것, 성도다운 것, 장로다운 것, 신학교수 다운 것, 농사꾼다운 것, 나다운 것, 나답게 살아야 되겠다는 그 사람들, 지옥으로 갑니다. 

이미 지옥으로 가고 있는 티를 내고 있어요. 주께서는 직업을 묻지 않습니다. 나이 묻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것 묻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관심 있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등대에서 그 불빛에서 나온 꺼지지 않는, 사그러지지 않는, 심지어 무슨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 짓 속에서도 환히 밝혀주시는 그 무한한 사랑 있잖아요. 

그냥 사랑이 아니에요. 무한한 사랑이에요. 우리는 유한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이에요. 오늘 본문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끝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8절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이익)를 취하더냐 우리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성령이 뭐냐?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납득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성경본문 잘 보세요. 성령 받은 사람만 납득됩니다. 다시 말해서, 삼층천을 이해하는 사람만 이 말이 이해됩니다. 또는, 삼층천에 합류해야 될 사람만 이 말이 이해된다는 거예요. 

같은 성령을 받아서 동일한 보조, 라고 하거든요. 보조가 리듬이에요. 북치는 소년 알지요. 북치는 가운데 개별적인 리듬은 다 사라져요. 성도가 한쪽은 서울에 살고 한쪽은 대구에 살고, 또 한쪽은 대구에 살고 한쪽은 미국에 사는데 전화를 주고 받으면 동일한 성령의 리듬감, 박동감이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보조 맞추는 거예요. 쿵딱, 쿵딱, 쿵딱, 같이 발자국 보조 맞추는 겁니다. 한쪽은 한국에 살고 한쪽은 미국에 사는데 언제 봤다고 보조를 맞추겠습니까? 이것은 급습이에요, 급습, 성령의 급습입니다. 아브라함이 급습 당했지요. 기생 라합 급습 당했지요. 특히 야곱 같은 경우에 밤중에 얍복나루에서 밤중에 급습 당했지요. 

특히 사도바울,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체포하러 가다가 급습 당했지요. 급습을 당해야 됩니다. 급습을 당해야 그동안 비축해 놓은 자기의가 박살이 나요. 자기 의, 자기계획, 나불거리는 자기책임,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 하는 그것, 급습당해야 박살나는 겁니다. 

기생라합에게 갑자기 정탐꾼이 찾아왔습니다. 본인이 요청한 것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삭개오는 그냥 멍청하게 구경하다가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제 식으로 표현한다면 “무한한 사랑이 있으리라.” 

삭개오가 그 말 듣고, “네 배나 갚겠습니다.” 네 배나 게워놓겠습니다. 그까짓 그 돈 네 배나 게워놓겠습니다. 그래서 네 배 갚아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에요. 무한한 사랑은 돈으로 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다시 말해서 내 행동에 대해서 일체 주께서 묻지를 않고 오직 등대 불빛에서 나오는 오른쪽/왼쪽으로 이미 끝장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동안 나는 도대체 뭐하고 살았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정신을 어디에 팔고 살았느냐는 그 말입니다. 도대체가 왜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해야 됩니까? 결혼해놓고 티격태격 싸우고. 그걸 왜 내가 처리해야 돼요? 모든 일이. 도대체 얼마나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야 돼요, 얼마나. 사랑이요? 그거 정입니다. 사랑이란 정이었어요. 전부다 사랑 아니었어요.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인간의 단어, 개별체에서 대조하는 그 정도밖에 안돼요. 오른쪽/왼쪽까지 못나가고 우리가 서로 친하게 지냈으니까 정이 붙은 거예요. 하지만 사랑보다 더 슬픈 것이 정이라고, 고개를 떨구면서 이야기를 했던 분이 있습니다.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 사랑보다 끊기 힘든 것이 정이라고요. 

스물 셋 먹은 아가씨가 어떻게 그런 가사를 지었는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사랑이 없다는 거예요. 내게서 나갔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나, 이 부부가 사랑이 아닙니다. 정입니다. 아멘은 남편 혼자만 아멘하지 말고 부부 두 분이 같이 해줘야지요.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수제비 뜰 때 밀가루가 말랑말랑 하잖아요. 그걸 끓는 물위에 던져요. 그러면 말랑말랑 했던 것이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주변의 뜨거운 물로 인하여 형태가 굳어져요. 쫀쫀하게 굳어져요. 무한한 사랑의 급습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계획 잡습니다. 퇴직하고 뭐 해야지, 어디 놀러가야지,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저도 가 봤습니다. 미국 뉴저지의 ‘우드버리’라는 곳에 가 봤거든요. 갈 때 이거 사야지, 저거 사야지, 하고 간다고요. 가보니까 살게 너무 많아요.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돈이 무한하지 못해서 문제지요. 무한한 사랑의 성령이 와서 급습해 버리면 나라는 인생을 죽기 전부터 이미 사랑으로 쫀득쫀득하게 형태를 다듬어갑니다. 

그러면 누가 모르냐 하면, 저주받은 인간들이 “인간아! 왜 그렇게 사냐. 너 재산 얼마나 있어? 애는 뭐하지? 너 앞으로 계획 있나?” 계속해서 저쪽에서는 저주의 설탕 쏟아내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거 필요 없어. 나는 그냥 무한한 사랑이야.” ‘미쳤구나. 미쳐도 저렇게 미쳤는가.’ 

왜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조립합니까? 왜 내가 조종합니까? 내가 뭘 안다고. 결국 명분에 불과한데. 마귀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놓고 교회 나와서 어디에, 천국 간다고요? 천국은 오른쪽과 왼쪽밖에 없어요. 오른쪽은 양이고 왼쪽은 염소입니다.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주님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결론이 이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이 결정한다. 그리고 결정의 증거물이, 결정했던 증거물이 무한한 사랑과 더불어서 오늘 나는 요따구로 살아가고 있다. 전혀 나에게 책임질 줄도 모르고 나는 내 자식 구원받는 것도 모르고, 내 남편 천당 가든 지옥가든 그것도 내 소관 아니고, 나도 내 맘대로 안 된다, 나도, 나도 내 뜻대로 천국 못 왔다. 그런데 왜 그걸 나에게 물어. 

뭐 중보기도를 안했어요? 대신기도를 안했다고요? 몰라요. 나도 내 맘대로 안 되었어. 쫀득쫀득하게 무한한 사랑으로 굳어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놓쳤습니다. 잊었습니다. 또 내일은 내가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뭐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고 뭐가 아직도 지킬 것이 왜 그리 많습니까? 주여, 아무것도 지키지 말고 주님의 사랑만 줄줄 쏟아내면서, 이런 짓도 주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만 은혜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이쪽은 지옥행이요, 저쪽은 천국행이라는 교차로의 하나의 신호등만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