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36강-인간의 이중성(신25;13-16) 1706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5. 06:46
2017-06-04 14:54:59조회 : 38         
   인간의 이중성 1706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인간의 이중성(신명기 25:13-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ypxcGJNIMY, Hit:3
 이근호17-06-04 15:38 
인간의 이중성  

2017년 6월 4일                  본문 말씀: 신명기 25:13-16 

(25: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25: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25: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25: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공정해야 될 추에 대해서 ‘이중으로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당부는 인간은 본성이 ‘상술’을 통해서 얼마든지 실제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만나면서 내부적으로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단순히 상인이 이중 추를 사용한다는 것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상인이 아니라 일반 사무직에 종사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상인들이 이중추를 사용하고 싶은 충동과 동일한 심성을 같이 함유하고 있음을 상인들의 관행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상인들이 이중추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대외적으로 자신을 알리면서 자아를 이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보편적입니다. ‘해석하는 자아’와 그리고 ‘해석되는 자아’ 두 개의 자아상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해석을 하면서 자기 생존에 유리하도록 융통성을 활용하게 됩니다. 이 해석 작업에서 ‘해석하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면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재료를 수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와 연결시켜 자기를 위한 소설책을 엮어나갑니다. 문제는 이 소설책에서 십자가를 집어넣을 대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꽂아놓으면 지나온 나날이나 앞으로의 모든 나날이 뭘 해도 죄가 되는 나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관행과 습관으로 삽니다. 

평소에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서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인간들은 유일한 현실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현실에서는, ‘예수님의 다녀가심의 의의’가 빠지게 됩니다. 그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을 집결해서 그것을 현실이라고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현실을 몰고 오시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장렬하게 죽어야만 완성이 그런 현실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거하는 바로 그 현실의 확장이나 개선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본인들이 지금 그대로 합류가 가능한 그런 세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인간에게 대외적으로 자기 유리한 대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다른 추를 끄집어내어 놓는다는 말은 두 가지 원칙을 수시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모르고 하는 짓이 아니고 알고 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자아만큼은 속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속이는 것은 정작 중요한 자아를 계속 살려내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로마서 2:21-23에 보면,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스승들이 남들을 가르치면서, 본인은 가르친 내용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모든 인간들이 으레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고 본성에 합당한 습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원인을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하례란 도려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자체가 도려내어져야 할 정도라면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본인이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인생 소설에 십자가를 언제 집어넣을 수 있느냐 하며는, 본인이 아무리 오래 산다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추악한 죄 뿐임을 알 때, 십자가는 삽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현실이 펼쳐집니다. 십자가 없는 현실이 아니라 십자가가 박힌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기존의 현실은 이 새로운 현실로 인해 박살이 나와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자기를 보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해버립니다. 즉 “나는 ∼을 안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나는 ∼아니라”고 말해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평소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들어왔건 말건 자기 유리한대로 예수님의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으로 자아정립에 나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잘못된 현실관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 23:13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에 본인들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해석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거절할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평가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천국은 인간들이 예상하는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에게 밀고 들어온 그 율법 말씀을 지키는 양에 따라 천국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활짝 열어놓은 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관행적으로 행한 모든 것이 결코 천국문을 여는데 있어 전혀 무관함을 아는 자들만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인간들은 평소에 현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자 애쓴 그 태도에 의하면 천국도 애쓰고 노력해야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공짜로, 아무런 노력없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들의 자아성이나 자존심과 맞지 않는 겁니다.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짓이라서 그런 존재로서는 천국에 들어설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이 소개한 현실의 원칙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그들이 깨달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천국문을 통해 메시야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완성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나오셔서 자기 백성만을 골라서 구원시켜 주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 사랑 앞에서 그 누구나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자만이 자기 인생에 십자가가 꽂힌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인생의 핵심이 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6-05 05:45 
136강-신 25장 13-16절(인간의 이중성)1706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5장 13-16절입니다. 구약성경 300페이지입니다. 

  

“너는 네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 무릇 이같이 하는 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성경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책과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는 중보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개입한 것을 현실로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 인간 속에 이미 파고 들어왔다는 것을 현실로 보는 반면에, 세상의 모든 책들은 인간들끼리만 노는 책들이에요.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고 개입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은 빼버리고 인간들끼리 지혜를 짜내어서 이왕 살아있는 것 한 번 살아보자고 거기서 필요한 지혜와 정보를 나누는 책들이 세상 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만 보면 이해가 되느냐, 성경만 보면 이해가 안 돼요. 

  

그럼 뭘 보느냐, 우리들 끼리에, 인간들 끼리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이미 우리가 여기에 포함되어 들어갔어요. 출생할 때부터 모든 사고방식이 우리 인간들끼리가 그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럼 성경에서 예수님은 생명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죽음입니다, 라고. 

  

나는 죽음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그것만 하지 말고 나는 거짓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그러니까 고로 주님만이 진리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 것도 알고 성경책도 알고 다 알아야 됩니다. 

  

그럼 당장에 서점에 가서 책 사야 되느냐? 서점에 가서 책 사는 것이 시간상 좀 유리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지만, 글도 모르고 책도 안 본 사람은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면서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짓이요, 죽음이라는 것을 티를 내는 책들이 자기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저술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은 하나의 장난은 아니지만, 속으로 안 믿는 사람이나 어떤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당신이 하나님이라 치고 당신이 한 번 성경책을 써보세요. 과연 그 속에서 십자가가 나올 것인지? 절대로 못 나옵니다. 절대로 나올 수가 없어요. 

  

십자가라고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거든요. 잘난 의인을 위해서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아이디어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뭐냐 기독교고 천주교고 세상의 모든 종교고 이슬람교고. 착한 사람은 건지시고 못된 사람은 지옥 보낸다. 그건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종교고, 거기에 대한 경전이 나올 수 있지만. 

  

십자가 복음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상상도 못해요. 어떻게 아무것도 안 했는데,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착한 일 한 인간은 지옥 보내고 나쁜 짓 한 인간은 천국 보낸다는 그런 정반대의 아이디어가 성경의 십자가 외에 어디서 나옵니까? 나올 수가 없어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건 일단 또라이입니다. 이건 완전히 돌은 사람이에요. 근데 십자가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돌은 사람은 뭐가 보이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어차피 또라이고 정신병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신병자고 죽을 때까지 정신병자에요.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가짜 허망한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주님이 안 다녀갔다는 거예요.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기이한, 어떻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부르러 옵니까? 거룩한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불러야지. 이게 우리네 상식이고 이게 부합이 되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이미 거룩하게 의인되려고 했던 그런 무리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 오늘날 교인들 많잖아요. 교회가면 그런 사람들을 부어 놨다 이 말이죠. 

  

근데 그렇지 않고 쓸데없는 자를 건지시고, 막사는 자를 구원해주시며, 오직 너는 니가 무슨 행세를 했는가를 니가 측정하거나 니가 처벌하거나 니가 판단하지 마라. 판단을 해도 내가 판단하고 평가를 해도 내가 평가한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리고 이 피는 그 죄인인 자에게만 효력을 보인다. 그렇게 선언하시는 그런 복음. 

  

그걸 바로 이스라엘 말고 이방민족들은 인정을 못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신명기 이전부터 이스라엘 속에 율법의 모습으로 거기에 스며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심심하거든, 뭐 심심할 분이 없지만, 심심하거든 여러분들이 썼던 자기소설이나 여러분들이 한 번 성경을 구상해서 시나리오를 써보세요. 십자가를 어느 대목에 집어넣어야 될지. 

  

아마 십자가를 집어넣고 자기 인생을 쓰거나 성경을 쓰신다면, 어떤 대목이냐 하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너무나 반갑게, “세상에 이것도 모르고 인생 살았냐? 이 바보야!”하고 자기를 치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지. 내가 잘나서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내가 공들여서 살아온 것이 아니다.”하는 그 순간은 십자가가 이렇게 튀어나옵니다. 그게 십자가가 들어가는 대목이에요. 그래서 그걸 자기가 안 쓰더라도 주께서 쓰게 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십자가를 집어넣는, 제자들도 십자가를 몰랐어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알았는데, 왜 그 당시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십자가가 없는 현실을 왜 구상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거는 가짜고 엉터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아까 제가 언급을 했는데, 그럼 왜 가짜고 엉터리냐? 이게 둘로 갈라져서 그래요. 

  

뭐가? 자아가. 나라는 것이 둘로 갈라져있습니다. 둘로 갈라져 있는 대목이 오늘 본문 대목입니다. “너는 네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이래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담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이 중요하고 남은 안 중요해요. 인간은 자기를 굉장히 불쌍히 보고 남들은 아주 개떡같이 보거든요. 니 때문에 내 인생 조져 놨다. 이래 보기 때문에 자기 살아가는 것이 본성적으로 우선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누굴 만날 때 정직하게 해서는 이게 자기 사는데 유리하지 않아요. 그럼 속이는데 어떻게 속이느냐 하면 두 종류의 추를 준비해놨다가 살 때, 팔 때 유리한 다른 추를 해가지고, 살 때는 허름한 값에 사고 팔 때는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 이중추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럼 이중추를 사용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두 개의 추가 있다는 말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두 개의 원리원칙을 가지고 나를 살린다는 것으로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두 개의 원칙으로. 

  

그럼 두 개의 원칙이 왜 필요 하느냐, 하나가 되면 남한테 자기의 실상이 다 공개가 되지만, 두 개가 되면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자기 중요한 자아는 숨기고 거짓 자아는 바깥에 내세울 수가 있는 겁니다. 비자금도 그렇고 이중통장도 그렇고, 이중장부도 그렇고. 

  

전에 지난 시간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교회에서 그렇게 법, 법 지키라고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거든, 당신은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물어보라고 했죠. 유대인들이 그 짓 했습니다.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남은 그렇게 잘 가르쳐요. “십계명 있잖아. 이렇게 하시고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너는 네가 가르친 내용대로 살지 못하고 그걸 위배하느냐? 그것은 니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해서 그렇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도려내는 거예요. 마음을 도려내지 아니하게 되면 우리 외부에서 십계명이나 법이 오게 되면 내 내부에 있는 악마가 마중을 나가서 자기의, 자기정당성을 옹호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인간은 항상 그래요

  

누가 뭐라고 하게 되면 변명이 먼저 나와요. 변명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잘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그러니까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나는 이대 들어 간지도 몰랐다. 엄마가 다 했다.” 뭐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기정당하다는 식으로 다 해버립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해석하는 나’와 ‘해석당하는 나’로 이렇게 둘로 나누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두 개인데 내가 어떻다고 해석하는 나라는 주인공이 따로 있고, 남한테 보여줄 나, 내가 적당하게 해석해가지고 이러면 만족 하겠냐고 내미는 자아. 특히 선 볼 때 그런 것이 많잖아요. “아이고, 나는 술 근처도 안 갑니다.” “저도 술 못 먹습니다.” 그 날 밤에 술이 떡이 되어가지고....., 

  

보여주는 자아와 내 자아가 항상 둘이 되어야 돼요. 둘이 되어야 이게 살아가는데 유리하다는 겁니다. 그 말은 빈틈없이 맞는 말이에요. 왜 맞는 말이냐 하면 내가 살아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내가. 온천지가 다 살아가는데, 골고루 살아가는데 유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자기를 숨겨야 합니다.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는 것이 진리가 돼버려요. 이걸 성경까지 연결해버리면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진리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질문 자체가 나부터 살고보자 하는 식으로 질문이 나와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근데 제가 설교 처음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인간들 세계의 현실은 인간들끼리만 있지만, 나를 포함해서 인간들끼리만 있지만 성경의 현실은 뭐냐 예수님을 그 가운데 내세웠다 했어요. 그러면 현실은, 지렁이가 움직이는 것, 하마가 하품하는 것, 타조가 뛰어다니는 것, 달이 움직이는 것,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창조주기 때문에 피조물이 마땅히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되죠. 이것으로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는 끝났어요. 딱 종쳤어요. 사람의 사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이라. 끝났어요. 성경책은 왜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끝났어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내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겨서 천국 보낸다. 낳기 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끝. ‘아, 그럴만한 권한이 있구나.’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근데 거기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저는요?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것을 집어넣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내가 영원히 천당 가야 그게 현실이라고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나보고 그런 일을 시켰느냐, 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나오게 되면 “이건 나의 본성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너 누구야?”하고 뒤를 돌아봐야 해요. 

  

나에게,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쳐내버리고 내가 중심에 서도록, 누가 그렇게 나를 사주해서 했느냐고 당연히 물어야죠. "너 누구야?" 그걸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원수가 예수님을 엿 먹이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앞장세운 겁니다. 마귀는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편이에요. 항상 우리 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리를 위로해주고 그래요. 

  

그러나 마귀가 가장 마귀다울 때 등장하는 것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십자가 사건이 나의 소설에 갑자기 뛰어들 때, 마귀는 그것을 피하고 그것을 못 들은 척하고 안 들은 걸로 여기라고 우리를 부추기죠. 

  

“니가 스스로 홀로 착해질 수 있고 의로워질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데, 니가 얼마든지 니 스스로 니한테 유리하도록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니 자신이 죄인 됨으로, 쓸데없는 자로 까발려지는 것이 뭐 그렇게 니한테 행복이냐?”라고 우리에게 닦달을 내요. 

  

“니가 부족하고 그러면 니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이미 기죽고 들어가느냐? 그렇게 해가지고 인생 살래? 그렇게는 못 살아.” 만약에 면접시험 쳤는데 그 시험관이 “앞으로 이 회사를 위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렵니까?”라고 물어보면 “저는 십자가만 증거 하겠습니다.”이래 가지고서는, “이상한 애가 왔네. 앞으로 서류심사에서 기독교인들은 다 빼!”그렇게 하잖아요. 

  

그럴 때는 요령 있게 해야죠. 이미 묻는 자가 마귀 들린 자가 묻잖아요. 그럼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마귀들린 대답만 요구하는 거예요. 마귀 들린. “저는 이 회사가 저의 모델이었고 꿈이었습니다. 제가 평생 30년 동안 살아온 것이 아마 이 회사를 위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월급을 안 올려줘도 이 회사만 있다면 이게 저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뼈가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해야 돼요. 

  

그리고 그 뒤에는 속으로 해야 합니다. ‘이걸 원했지?’라고. 이건 속으로만 이야기해야 돼요. 속으로만. 그렇지 않으면 입사 못해요.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좀 이쁘고 재벌 3세하고 현관에서 부딪혀서 커피 쏟고 하는 이런 소설. 그런 소설 같으면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재벌회장 부인까지 되지만. 

  

그런데 그런 소설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십자가가 빠져있어요. 그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아예 죄인 되기를 마음먹고 오셨어요. 아주 우리를 편하게 만들죠. 주님도 우리가 죄인으로 취급받는 것을, 예수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무짝도 쓸데없어.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오시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마귀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기 때문에 짐작하고 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성령 받아서, 지금 죽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도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본래의 현실에 부합된 거기서 만들어진 새로운 백성인 것을,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낮에 우리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것, “비가 안 와서 큰일이다.” 뭐 영천만 비가 안 옵니까? 딴 데도 다 안 오는데, 그래도 영천은 충청도 보다 좀 낫거든요. 자, 비가 안 와서 큰일이다, 라고 한다면 왜 비가 안 오느냐 하면 비가 오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는데, 증거 하는 것도 좋지만 계속 안 오게 되면 증거 할 거리도 없어요. 계속 안 오면 그 다음부터는 화날 참이에요. 

  

어제 뉴스를 보니까, 기우제 드린다고 또 도포입고 하는 것이 뉴스에 나왔어요. 영감들이 할 일이 뭐 있습니까? 그거라도 나라에 충성해야지. 기우제 드린다고 욕을 하지만 은연중에 교인들이 유사기우제를 금요철야하면서 할 수가 있어요. 할 수가 있다고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두 개의 추, 두 개의 원칙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고수를 해줘야 합니다. “이제 이 말씀 알았으니까 우리는 진짜 공정하게 하나의 추만 하자.”이러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이 대목이 참 어렵죠. 지금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라고 할 때, “네 믿습니다.” 라고 하면 다 끝나는 게 돼요. 

  

그런데 끝이 아니고 그게 시작이 돼요. 어떤 시작이냐 하면 바로 우리가 바리새인 못지않게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은 좀 있다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주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동안 줄곧 제가 이해 못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 앞을 막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는 것은 이해되는데, 왜 본인은 천국 문으로 안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왜 너희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 말입니다. 이게 찝찝한 거예요. 

  

그들은 율법이 천국 문입니다. 그럼 율법을 해가지고 율법을 지켜서 천국 문으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 문으로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공부하다가 제가 알았습니다.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반드시 열린 문으로는 안 들어가고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열고 가는 문만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냥 열린 문은 자존심 상해서 안 들어가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바리새인 세계에서는 세리와 창기들을 지목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것들 말씀도 안 지키고 십일조 안 하고. 음란하고 토색하고, 저거 뭐야 인간쓰레기지. 왜, 나처럼 말씀을 줬으면 쉐마, 쉐마, 들어라, 들어라 하면 순종해서 들어가야지.” 

  

예수님 보시기에는 천국은 순종하면 못 들어가요.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자기정당화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계획, 내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고, 그 피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는 주님의 숨겨놓은, 따로 챙겨놓은 그 율법을 행사하지 못하게 누가 방해하느냐, 바리새인들이 방해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이런 속성이 완전히 온 교회에 다 퍼져있어요. 그냥 들어가면 내 자존심은 어디서 챙기느냐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사람들이 하는 행세가 있어요. 하는 관행이 있다고요. 그 관행이 뭐냐 하면, 교회오기 전에도 내가 하는 행위로써 남한테 인정받으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해석하는 나에요. 

  

나는 해석할 때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본인이 해석하되 자료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남들이 나를 이랬다 카더라~ 이렇다고 하더라~ 그런 게 있다고요.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는 말이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그것을 자료를 수집해서 자기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나는 이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다, 인간이다. 나는 남들이 이렇게 인정해주는 인간이다. 이걸 쓰다보니까 뭐가 빠졌다? 십자가라는 제대로 된 현실,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배척받는 그것을 집어넣어야 온전한 창조의 완성인데, 그거 없으면 마귀가 만든 현실이죠. 

  

마귀현실에서는 마귀는 예수님이 원수입니다. 예수님의 원수가 만든 현실이 오직 유일한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 증거가 뭐냐, 내 인생에 십자가는 없다. 나도 염치가 있고 나도 자존심이 있지, 나는 내가 행한 만큼 착한소리 듣고 싶은 것이 살아온 관행이고 관습이다. 관습이 그렇다 이 말이죠. 

  

우리가 이 바리새인들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런 차원에서 마태복음 23장 15절,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지옥이라는 것이 있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사람이 착해야 천국 간다는 그러한 거짓선지자들이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교회에서나 모든 것에 필요해요. 

  

필요하다면, 거기에 앉아있는 교인들이 이중자아 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목사가 이야기하니까, 목사는 자기의 타인이잖아요.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만, 유리한 것만 뽑아서 내가 그걸 재해석해버리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 목사님이 나를 칭찬하더라~” 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중 잣대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을 본적도 없잖아요. 본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보고 믿는 것은 믿음도 아니에요. 예수님을 본적도 없고 봐도 소용없고. 

  

따라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니까 평소의 관행대로 내가 괜찮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겸손한 식으로 나가면 그 겸손을 받은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좋게 생각하느냐? 뭔가 보이지 않는 은밀한 거래처럼,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 챙긴다는 식으로 예수를 해석해버립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이렇게 나는 의인입니다.”라는 식으로 나와 버려요.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주님은 뭐하십니까? 주님이 자기 몸을 화끈하게 들이밀든지, 혁명을 일으키든지, 다 부수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진짜 교회를 만들어야지. 그게 옳다면, 목사님 말씀대로 옳다면 왜 그런 교회를 방치하시고 오히려 그런 교회가 더 크고 더 부흥되게 만드시는 이유가 뭐냐?”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에요. 그리스도 몸에 해당되는 자기백성 만드는 방법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방식을 피해간다니까요. 왜? 내가 원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 나는 피해자고 저쪽은 가해자니까, 가해자한테는 거대한 합당한 복수로 다 부수고, 그래서 나는 주님 앞에 한 패입니다, 라는 것을 티내게 만듦으로써 나는 그동안 억울하게 인생 살았다는 그런 자아상을 내가 해석하고 있다니까요. 아이고, 길어라. 문장이 굉장히 길게 만들어졌는데.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나 빼놓고 다 조지세요.”라는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잘못된 해석이다 이 말이죠.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그런데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내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마음의 할례입니다. 니부터 도려내야 된다. 그야말로 임플란트 하듯이 이빨 다 뽑아내잖아요. 

  

나부터, 뭔가 내 안에 늘 생산되고 있는,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나부터 십자가가 나를 도려낼 때, 우리는 십자가 중심의 새로운 드라마, 소설이 주님 중심으로 전개가 되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추를 가지고 있다, 니는 두 개의 원칙으로 산다고 할 때에, "제가 그러합니다." 라고 하면 돼요. 그럼 천국 문은 어떻게 들어가느냐, 천국 문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 문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한테 나오는 문이 천국 문이에요. 들어가는 문이 아니고. 문들아 들릴지어다, 라고 시편 24편에서. 

  

주님의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고 용서고 긍휼이거든요. 사랑할 자를 사랑한다고요. 율법의 덩어리가, 그 들어가고자 하는 율법을 통해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쏟아져버렸어요. 쏟아져서, 우리를 함몰해서 덮쳐버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또라이 돼버렸어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 간다.” “니가 미쳤구나.” “주여! 이렇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인생을 그냥 사세요. 앞에 ‘막’자 붙여서. 요새 막국수 철이니까. 그냥 막사시면 주님이 나를 찾아와서, 죄인 만드는 작업과 병행해서 예수님 증거 하는 작업을 할 때, 이게 남들이 모르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을 많이 지켜서, 마일리지 쌓아서, 그것으로 상급 따내려고, 구원은 기본이요, 상급 추가하려고 얼마나 살아왔었습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본성상, 또 우리는 자기위주로 살아갑니다. 현실이 아닌 것을 자꾸만 현실로 만드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로 찔러주시고, 그 피가, 살아있는 그 세계가 바로 제대로 된 현실인 것을,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