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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33강-재판관(신25;1-4) 1705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14. 18:37
2017-05-14 14:59:16조회 : 15         
   재판관 17051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재판관(신명기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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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5-14 15:42 
재판장 

2017년 5월 14일                         본문 말씀: 신명기 25:1-4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5: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25: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살면서 재판없이 살 수가 있다면 참 평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곧 ‘법없이’ 잘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비-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법이 있다는 말은, ‘법의 명령자’께서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원래 이스라엘이 만들어질 때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기 앞으로 불러세웠습니다. 이는 곧 “네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인식하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3:5에서 모세는 신 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 된 것입니다. 종이란 본인의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이런 상황을 반기고 감격해야 될 사람입니다. 즉 매사에 내 뜻대로 안되는 것, 그 자체를 반기면서 살아야 될 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지만, 모세를 따르는 그들이 이 세상에 둘 도없는 특수한 국가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나라는 이스라엘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나라는 하나님과 무관한 나라입니다.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매사에 스며들고 개입하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분쟁이요 재판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세상 재판에게 있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익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법이란 “지금 너는 누구 앞에 서 있느냐”는 그 현실성인 인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익과 관련된 게 아닙니다. 세상의 재판은 실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이익과 관련 있기 때문에 정치적입니다. 서로 양보할 것, 양보하고 사적인 복수심과 적당한 선에서 누그려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과도의 개인적 복수심은 전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법은 협상과 타협과 양보로 최종 마감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재판은 그런 식으로 마감되지 않습니다.
1절의 말씀처럼, 의인과 죄인으로 분류시키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수시로 법을 가지고 재판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도를 벗어납니다. 피해 받은 자라고 해서 재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손해봤다고 해서 복수할 권리는 없는 이치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는 누구 앞에서 서 있는가?”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이스라엘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이든지 모두 우선적으로 자기 생존 우선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같은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뒷전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게 됩니다.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피고인 신세가 됩니다. 함께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지 않고 재판을 감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사시대에 등장한 사사입니다. 사사는 재판관입니다. 하지만 사사가 재판에 관여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사 자신들도 남보다 나을 게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잘난 것도 없는 사사가 타인들을 함부로 재판해서 의로운 판정을 받아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함께 관여하십니다. 기드온 아무런 무기도 없이 전쟁에 나섭니다. 이 전쟁에 나서면서 기드온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성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재판을 방해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거룩을 미래로 이동시키십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만나게 되는 재판 중 하나는 바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열왕기상 3:24-26에 보면,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 지혜의 근원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재판하는 목적은, 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하냐를 알려주는 겁니다. 왜 인간에게는 자율적으로 생존할 권리가 없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재판의 목적입니다. 나쁜 여인은 인식의 출발을 자기 소유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자기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식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반면에 아이의 진짜 엄마는, 하나님의 죽이심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여인은 ‘내 소유의 자식’이라는 인식으로 포기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죽음’이라는 근원 앞에서 여인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느냐를 눈여겨 보면서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이 재판을 통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정당함이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바르게 살기에 사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땅히 소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장차 오실 메시야가 품고 있는 구원의 도리가 됩니다. ‘위대한 메시야’가 아니라 ‘초라한 결말’의 메시야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원래 결과를 이끌어내십니다. 로마서 8:33-34를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런 의로움을 끌어낼 결과를 유도해 낼 그 어떤 선택도 해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골라내고 채택하는 모든 변수들은 항상 자신의 잘남과 정당함을 나타내는 근거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땅히 날마다 재판받아 합당합니다. 주님이 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익을 고려하는 식으로 재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3강-신 25장 1-4절(재판관)1705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5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성경말씀을 보고 있는데 우리는 말씀만, 명령만 보지 마시고 명령자를 봐야 돼요. 이 성경을 썼던 모세는 자기가 쓰고 싶어서 쓴 게 아니고, 출애굽기 3장에서 그는 사람 만나기 전에 하나님부터 먼저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니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생각해봐라. 니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 그리고 난 뒤에 사람을 만나라.” 

  

우리는 사람에게 시달립니다. 매일의 생활이. 사람 때문에 못 살겠어요. 근데 혼자 살면 또 외로워서 못 살아요. 사람이 있어서 못 살고 또 혼자서는 못 살고. 그러면 눈만 꽉 감으면 되지 않느냐, 근데 눈만 꽉 감으면 꿈이 보이죠. 꿈이 나타납니다. 그럼 결국 인간은 살아가면서 꿈이냐, 아니면 인간세상이냐, 둘로 딱 나눠져요. 

  

근데 그 인간세상은 그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복잡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굉장히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그게 뭐냐 시장이에요. 시장. 잠을 자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꿈이 되고 눈만 뜨면 노동시장이 되고. 노동시장에서 남들은 나를 어떤 가치로 보느냐 그게 보이고. 그게 짜증나서 눈 감고 낮잠 자면 꿈이 보이고. 그만큼 이 세상이 냉혹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힘들죠. 그럼 여기에 대한 대책이 뭐냐 하면 협상을 하는 겁니다. 양보를 하고 협상을 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정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25장 본문에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이 나오거든요. 반가운 단어죠. 요즘도 재판이 있으니까. 

  

근데 재판 자체가 이게 정치입니다. 협상과 타협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이래 나와요. 이것은 둘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재판과정을 통해서 너희들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그걸 현실화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세는 주님 앞에 서 있는 반면에 인간 현실은 인간과 인간들끼리 있기 때문에 이거는 시장터입니다. “나 쓸 만하지? 그러면 나 쓰고 돈 도!” 제가 이걸 의존교회 강의에서는 ‘전시적 가치’ 라고 했는데요. 죽 진열해놓고 뽑아가라는 거예요. 나 괜찮잖아? 나를 채용해가지고 부려먹고 내가 필요한 돈을 달라는 겁니다. 

  

이게 노동시장이에요. 전부다 모든 게 시장이에요. 시장이 되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사물화 됩니다. 스스로 물체가 돼요. 물체는 스스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안 돼요. 인간이 생각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외부에서 나를 결정해줘야지, 이걸 내가 결정하게 되면 자기 혼자서 꿈속을 헤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남들에 의해서 시달렸으면, 세상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겠습니까?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이게 뭐냐 하면 ‘나도 명령 좀 해보자. 명령.’ 만날 남을 의식하니까, 그것도 의식 안 하면 노동시장에서 내가 팔리지를 않으니까, 누가 나를 팔리지를 않으니까 계속 굽실거려야 돼요. 이게 한계에 이르니까, 집에서는 제발 명령 좀 해보자가 되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은 개나 고양이 대신 누가 했느냐,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을 했는데, 이제는 여자들이 배우고 난 뒤부터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명령을 하니까, 둘이 못 살겠다는 거죠. 서로가 반려견을 키우는데....., 

  

지난 토요일에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아이고, 결혼식을 불 꺼놓고 하니까 귀신 나오는 것 같아요. 불 좀 켜면 안 돼요? 컴컴해가지고. 속으로 귀신 나올까 싶다 했는데 진짜 귀신 나왔어요. 앞에 가운 입은 귀신이. 전부 다 내가 보니 전시효과에요. 보여주기 위한 것. 이제 복음을 알게 되면, 고만하자 마이 묵었다. 그런 전시적인 것. 스스로 가치를 높이고 싶은 것은 고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에게 분리되어서 깊은 산중에 들어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모세처럼 항상 주님 앞에 서야 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이제는 남들도 하나의 인형 같아요. 인형 같고, 남들만 인형 같은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 앞에 하나의 인형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인형은 반항하지 않습니다. 인형은 대들거나 짜증내면 안 돼요. 

  

그냥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대로 쓰일 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날 때, 주님의 살아계신 그것을 반복해서 나타내는 방법이 바로 재판이라는 겁니다. 말씀 주시고 재판함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포함하고 있는 내용을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재판이 벌어지니까 비로소 숨겨진 의미가 새록새록 나타나는 겁니다. 말씀 안에 이 숨겨진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기에 실패하죠. 왜 실패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어디에 담느냐 하면 인간들끼리, 자기들끼리 모인 질서체제에다가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반복되는 예배와 반복되는 제사가 영원을 담보하고 있다, 영원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한 겁니다. 

  

예배당에 있음으로써, 예배당을 거룩하게, 고상하게 만듦으로써 항상 거룩을 여기서 담아내고 끄집어낼 때마다 반복할 수 있는 장치를 성당에서도 그렇게 만들었고 교회에서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제가 결혼식 때 귀신 나타날 것 같다고 왜 했느냐 하면, ‘나는 보았다. 귀신을.’라고 왜 했느냐 하면 가운을 걸칠 때에, 목사가 가운을 걸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가운을 걸친 것이 아니고 혼자 가운을 걸쳤다는 말은 이게 거룩한 것을 담보한 거예요. 

  

지금부터 내가 한 말과 몸짓과 내가 하는 선언은 전부 다 거룩한 신과 내통되고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계적으로 전달 할 수 있도록, 어떤 문화적인 공간과 문화적인 복장, 스타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패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동체는 문화적인 스타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당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성전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시비가 갈라졌을 때, 옳고 그름으로 드러났을 때, 그때 숨겨진 진짜 거룩의 의미, 진리의 의미가 나타나는 겁니다. 가족 중에서 안 믿는 사람이 있거든 복음을 한 번 전해보세요. 전하게 되면 저쪽에서 갑자기 뭘 확 쑤신 것이 되가지고 좋았던 가족 관계가 완전히 충돌이 벌어질 거예요. 

  

근데 그 방법이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에요. 다른 루트, 다른 통로로 해가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갑자기 여기서 복음이 치고 들어오면 이 좋은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질서체제에 혼란이 일어나죠. 그때 재판관 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관여해버리면 여기서 시비가 결정나버립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당부한 것이 있어요. “평생을 살면서 제발 재판이 일어날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비산동에서 그래도 유지인데 사기당해서 다 날라 갔어요. 서류 잘못해서 다 날라 갔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시면서 한이 맺혔어요. 술을 많이 마셔가지고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유언이 뭐냐, “재판 날 일은 절대로 하지마라.” 

  

이거는 뭐냐 하면 동일성을 담보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옛날 괜찮았던 그 모습을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재판하려고 오신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재판하는 겁니다. 어떻게? 시비를 가르겠다는 겁니다. 뭐로? 의인과 죄인으로.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하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다시 우리 속에 평정을 유지하려는, 안정화를 시도하는 우리 마음에 이 말씀이 다시 풍파를 일으키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보는 순간에. 아, 평화롭고 안정한 게 좋은 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미리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은 재판하면서 정치적인 협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느냐, 그것은 인간은 그 결과에 대해서, 잘 들어보세요. 이런 결과가 빚어낸 여러 가지 요인들을 다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그랬는데 오후에도 지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이 들죠. 하나의 무슨 일을 만들 때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다 들어오는데, 이 일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를 판정하려면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해야 되고 변수를 다 고려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결국은 판정을 내리는 내 판정이 옳다는 쪽으로
그 필요한 요소들을 지 마음대로 잘라내고,
지 마음대로 고려 못하고,
지 맘대로 요구하고,
지가 이익을 얻고,
지가 기대하는 그쪽만 요인으로써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

는 이 말이죠. 


  

교회 나왔다, 교회 나온 요인을 다 따져보는 거예요. 교회 나왔다. 아버지가 장로님이기 때문에 나는 교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근데 다른 사람은 교회 안 나오는데 니는 왜 교회 나오느냐? 그것은 내가 아버지에게 착실하게 하는 효도심이 컸기 때문이다. 자, 아버지가 장로다. 나는 효심이 크다. 이 두 가지죠. 고3 그때 공부한다고 교회 안 나왔는데, 대학 떨어지고 나왔다. 재수한다고 나왔다. 그럼 재수 하나 더해서 세 가지죠. 그렇게 모아봤자 뭐냐 하면 교회 나온 것은 잘한 짓이라는 결론을 자기가 임의적으로 미리 뽑아내는 거예요. 

  

교회 나온 짓이 잘한 짓인지, 지옥 갈 짓이지를 지가 판단하면 안 돼요. 내가 율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판정관이 아니에요. 재판장은 주님 앞에 서 있어야 돼요. 주님 앞에서 내가 말이 많으면 안 된다니까요. 주님이 말 하도록 해야죠. 주님이.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자꾸 자기를 정당화하고 그러는데,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가 판단하고 의미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 의미성은 빼고 저 의미성은 집어넣고 하는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면 뭐냐? 그럼 뭐냔 말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십자가 근거가 되어야 돼요. 십자가가. 십자가 안다고 해놓고 질문을 딱 던져보면 십자가가 안 나와요. 하도 자기 정당화에, 평소에 나는 옳다는 것에 매진하다보니까 또 깜빡깜빡 십자가를 잊어버렸어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심판 벌여놓고 매일같이 임의로 결정해버립니다. 

  

판 벌여놓고, 우리를 죄인 만들어놓고, 그런데 니가 죄가 없거든 내 아들 십자가의 죽음 때문이다. 요런 식으로 우리를 자꾸 몰아가십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아, 이번에 일은 내가 실수한 거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안 해야지.’ 이렇게 돼버리면 내 신체가 나의 거룩함을 담보하고 그걸 확보하는 식이 돼버려요. 그럼 나는 우상이 돼버린다니까요.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내 구원이 결정돼버리면 나는 우상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내 행동 하나하나가 새로운 법을 제조하고 만들어내는 셈이 되는 겁니다.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잘 안 나왔다. 그렇게 되면 ‘내가 두 번 다시 이 미장원에 가나 봐라. 이 근처 미장원에 가는가 봐라.’ 이래 나온다 말이죠. ‘아, 내가 이 미장원에 가는 것을 실수했구나. 다음엔 딴 데 가야지.’라고 했을 때 벌써 그 자체가 나는 옳은 판단을 했다는 그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리잖아요. 그런 근거로 해서. 

  

그게 하나님 앞에서는, 벌써 사람들 앞에 니가 혼자 있지, 니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또 잊어버린 겁니다. 니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어떤 분이 그 예식장을 찾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겠어요. 예식장이 구석에 있어가지고 찾기 힘들어요. 서울 근처에 사는데 그 예식장 찾는데 무려 30분을 지하철을 잘못 타서 헤맸답니다. 비도 오죠, 하여튼 지하철이 이상하게 되어 있어요. 예식 시간이 지났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요. 

  

자, 그렇다면 30분 늦게 왔습니다. 복음의 공식에 적용시켜봅시다. 복음의 공식에 적용시키면 뻔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게 복음의 공식이거든요. 근데 짜증나는데 어떡해? 그거는 복음의 공식이고 그거는 이론인데,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늦었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왜 30분 일찍 와도 되는데, 주께서는 왜 늦게 오게 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늦게 오게 한 이유가 뭐냐, 짜증내게 하신 거예요. 짜증내게. 왜 짜증내야 됩니까? 뭔가 기대한 것이 있을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너무 염려놓으시고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거룩을 담보해서 매일같이 내가 원하기만 하면 거룩이 쏟아지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착함이 쏟아지는 그런 기계장치를 자기가 딱 소유하고 있는 이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주께서는 날마다 재판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럼 재판은 어디까지 가느냐, 근원까지, 밑바닥까지 내려가요. 그 밑바닥에 뭐가 있느냐, 그 밑바닥에 내려가면, 니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바라봐라. 니가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는가를 생각해봐라. 니가 평소에 행동을 반듯하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원천에 깔려있는데 너는 그걸 놓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겨주는 그런 입장에서 재판이 되는 거예요. 

  

이미 재판은 시작됐고 재판의 결말도 끝났죠. 내가 옳으냐, 니가 옳으냐가 아니라가 아니죠. 나는 항상 옳지 않다는 것. 그르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노출시키는 그 재판. 그 재판을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기에 사십대를 맞는 사람이 있죠.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이런 본문의 현실이 있다면 우리는 옆에서 얼마나 고소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내가 피하려고 했는데 잘 됐다. 잘 걸렸다. 제사장에게 걸려가지고 사십대를 맞네.’ 

  

“좀 심하게 때려주세요. 저 사람 저 죄 말고 다른 죄도 있거든요.”라고 하니까 재판장이 두 눈을 째려보며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사십대 보다 더 때리지 말라고 했거든.” 3절에 보면 사십대까지만 때리고 그 이후까지 넘어가지 말라 했다 이 말이죠. 이거는 인간의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사십대냐, 인간의 신체가 거기까지 견뎌서 그런가? 숫자를 너무 심하게 언급 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 사십대라고 하는 것은 고난의 극치라고 이해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금식했기 때문에.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세요. 그렇게 되면 사기꾼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재판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게 사사기에 나옵니다. 사사기를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신명기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재판이 일어났지만 사사기로 넘어가서는 이미 이스라엘 국가 자체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개무시 해버립니다. 살기 바쁜데 언제 주님 말씀 챙깁니까?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자체를 피고로 간주해버립니다. 피고로 간주해서 재판장은 주님이 되시고, 주의 이름이 되시고, 주의 이름이 재판할 자격도 없는 자를 임시 판사로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거는 계속 판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판사를 만들어버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사기에 보면 거기에 기드온이 나옵니다. 기드온사사. 그 사람은 방앗간 하던 사람이고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재판할 사람이 아니에요. 본인도 알아요. 안 하겠다고, 안 하겠다고 해도 자꾸 문재인 해가지고 삼수 만에 됐잖아요. 본인이 그렇게 안 하겠다고 했는데, 안철수가 “니가 해라. 다음에 내가 할게.” 양보해가지고 “그러면 내가 할게.”이래 가지고 된거죠. 안철수 응원한 사람은 화내겠다만. 

  

이 기드온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거예요. 아무것도. 제가 안양공부하면서 성도님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다음 중 성도가 해야 될 것은? 1. 바르게 산다. 2. 아무것도 아니다. 몇 번 입니까? 성도는 바르게 사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네 자로, “못합니다.”에요. “못합니다.” “못합니다.” “주님, 저는 감당 안 됩니다. 이거는 할 만한 사람에게 하세요. 제가 믿음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습니까? 사랑이 있습니까? 저는 농사짓는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적합하네. 적합해.” 주님께서는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저렇게 적합할 수가! 딱이야. 딱.” 

  

그럼 다른 사람들도 아주 적합하게 따릅니다. 32,000명 왔는데 22,000명 다 가버리고, 10,000명 중에서 달랑 300명 남죠. 300명은 자기들끼리 둘러봐도 이거 장난도 아니고, 이거 뭐야? 아무것도 아닌 자를 아무것도 아닌 자하고 만나게 해서 이번 전쟁에 대해서는 인간이 관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거기에 뽑혀 나온 기드온과 300명도 재판의 피고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먼저 된 통으로 하나님 앞에 당했다는 거예요. 전쟁하는데 무기 하나 없다는 그 자체가 남들은 모르지만 주님 앞에 성신 받아서, 성령 받아서 불려나온 사람은 그걸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 꼬라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왜?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게 사사기라면, 열왕기상 3장 24절에 보면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의 나옵니다. 이게 어려운데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에 도달되면 재판이 끝입니다. 재판 끝이에요. 두 창녀가 애기를 낳았는데, 밤에 한 아기가 엄마한테 덮쳐죽었어요. 하여튼 먹기는 많이 먹었는지, 애기가 끼어죽었단 말이죠. 제가 만약에 이 솔로몬의 재판할 때 있었다면, 애 하나가 죽고 난 뒤에 엄마가 둘이라면 저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무게 좀 재봅시다.” 무게 재놓고, “둘이 한 번 굴러보세요.” 인형을 놓고 굴러서 어느 쪽이 더 무게가 나가는지를. 

  

그렇게 할 건데,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 똑같은 죄인 입장에서 누가 잘했든, 누가 못했든, 그거는 둘 다 천국 가는 문제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6에 나오죠.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은 재판하지 마라. 안 믿는 사람은 재판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말해서 인간 같지도 않는 것하고 말도 섞지 말라는 뜻이에요. 오전에 말씀드렸듯이 가려가면서 사귀세요. 가려가면서. 아무나 사귀지마시고. 뭐 나올 게 있어야 나오죠.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의 재판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둘이 다투니까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너희들이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생각하라.” 둘 다 잘못은 나는 아기를 가졌다는 것. 나는 소유했다는 것. 나는 아기를 소유해서 키워야 될 그런 입장에 있으니까 나는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둘 다 주장합니다. 둘 다 똑같은 주장을 하니까 분쟁이 생긴 거예요. 둘 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분쟁생길 일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애기에 대해서 둘 다 손 떼게 만들어요. 그러면 손 떼는 방법은 그냥 손 떼게 하지 않습니다. 애기 줘놓고 빼앗아 가버려요. 줬다. 살아있네. 빼앗아 가면 죽었네. 애를 죽은 애로 만들어버립니다. 칼 가져오너라. 그리고 도마 가져오너라. 애를 놓고 두 토막 냅니다. 

  

이 장면이 마치 뭐와 같으나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냥 바치게 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뒤 장면, 수풀에 양이 있다는 그건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생각하면 신앙이 안 됩니다. 그거는 미리 커닝하는 것이라서 신앙이 아닙니다. 솔로몬 애가 살았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애를 딱 하게 되면, 솔로몬의 지혜는 뭐냐 하면 이 애만 아예 없애버리면 문제될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쪽은 자기 아기가 아니니까 죽든 말든 그냥 있고. 한쪽은 그 아기가 죽음에 끌려갈 때, 내 아기이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는 희생의 마음이 발생돼요. 그 가운데서. 지금 솔로몬은 두 엄마의 눈빛을 보면서 누가 가슴아파하는가? 누가? 여기 24절에 보면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이렇게 하니까, 가슴 아픈 엄마가 “차라리 이 산 애를 다른 엄마에게 주고 애를 살리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 눈빛, 그거는 엄마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눈빛을 솔로몬이 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이 주는 아픔을 누가 갖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님이 주시는 죽음의 아픔의 감각을 갖고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나부터, 내 것 있다고 출발하는 사람은 내 것만 없으면 상관이 없게 되겠죠. 원천적으로 따져서 이 두 아들의 존재와 두어미의 존재는 하나님의 지혜와 또는 하나님의 재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전형. 

  

그래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파야 돼요. 빼앗겨야 되고, 아파야 되고, 억울해야 되고, 이 세상에서 뭔가 살아가려고 애쓰다가 실패로 끝나야 되고, 그렇게 돼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데, 이론상 하나님의 그 뜻이 되더라도 거기에 대한 방해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살고자 하는 나 자신이 매일같이 방해가 될 때, 주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칼로 쪼개냅니다. “니 죽어야 되겠다.” 여기에 덤벼들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옵소서.” 뭐 예식장에 30분 늦고 일이 꼬이더라도 “주의 뜻이면 죽여주옵소서.” 물론 예식장 30분 늦었다고 죽이지는 않지만, 나의 모든 위신과 체면과, 나는 착실하다, 나는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칼로 죽일 판입니다.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 로마서 8장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5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주님께서는 우리가 밥 먹고 사는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뭘 보느냐 하면, 너는 죄가 있었는데 너는 정죄함이 없다는 그런 재료로, 우리의 몸을 놓고 우리의 인생을 놓고 지금 활용중이고 사용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는 내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은 다 부질없는 거예요. 다 소용없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달리 사용하는데, 그 달리 사용하는 것을 순간순간 우리가 감 잡아야 돼요. 

  

이게 주님이 매일같이 재판하시고 매일같이 살려내시는 취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결국 인간들 모여 봐야 정치적 협상과 양보와 타협 그것으로 끝나지만, 주님께서 벌이시는 재판 속에서 주께서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를 깨닫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설사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하신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