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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34강-시형제결혼 1705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22. 19:53
2017-05-21 15:03:22조회 : 41         
   시형제 결혼 17052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시형제결혼(신명기 25:5-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NYOWn7jCq8, Hit:2

 이근호17-05-21 15:55 
시형제 결혼 

2017년 5월 21일                     본문 말씀: 신명기 25:5-7 

(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25: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25: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25: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25:9)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25: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운명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은 인간 개인에 관한 운명이 아닙니다. 언약의 대표자의 운명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결코 개인의 행복된 미래를 위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 원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미래를 통해서 구현됩니다. 

곧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이 땅에 와서 벌리게 될 일을 위하여 미리 그 나라의 성격을 이스라엘 내부에 삽입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칙을 보조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원칙은 430년 후, 율법이 투입되므로서 보다 더 깊은 내용을 펼치게 됩니다.(갈 3:17) 

즉 ‘내가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님’을 말해주기 위해 율법이 주어집니다. 율법을 대하면서 인간들은 ‘낯선 중심부’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이 ‘낯선 중심부’는 인간이 왜 망해야 마땅한지를 알려주게 됩니다. 인간이 망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를 ‘중심부’로 간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5절은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맏이를 자식 없는 상태에서 죽게 하시는 걸까요? 죽이시더라도 아들 낳고 죽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대를 이을 아들도 없이 죽이시는가요? 

바로 이런 질문을, 형수와 혼인하기 싫어하는 시동생이 할 자격이 있을까요? 시동생 입장에서, 이미 결혼하기로 마음 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형수하고 결혼을 해야합니까?우리 인간들의 상식은 이러합니다. 결혼이란 사랑해서 한다고 말입니다. 사랑없이 결혼하면 행복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상대 배우자가 악행을 해서라기 보다는 본인이 마음에 꼭 혼인하고 싶은 배우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수에게 아들이 없다고 해서 형수를 대를 잇기 위해 시동생이 자신의 혼인을 폐기하고, 자신의 사랑과 행복도 포기한다는 것은 시동생이 기대한 자신의 미래나 운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동생은 자신의 미래나 운명이나 행복을 가질 자격조차 아예 없다는 것이 율법에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개인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근대 주체사상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 전의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가문이 더 중요한 겁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은, 개인의 행복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율법 완성이 더 중요한 겁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율법 정신을 위한 들러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맏이를 죽일 수 있는 권한 뿐만 아니라 자식없이 죽은 그 맏이를 위해 시동생이 형수와 혼인할 권한도 발휘하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누구네 집의 시동생을 안 태어날 권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네 집에 시동생으로 태어나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배우자와 혼인을 할 권한마저 없게 되는 경우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인의 팔자나 운명이 아니라 율법 안에 담겨서 율법을 전 우주를 펼치는 바로 그 분의 운명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율법에 의해서 죽고 율법에 의해서 사시게 됩니다.  

바로 이 운명을 묘사해야 될 의무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겁니다. 오실 예수님의 윤곽을 미리 이스라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를 통해서 그려내고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황에 대한 인간에게 숨겨진 반발을 유도해냅니다. 이 경우가 바로 마태복음 22:23-28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은 형수를 시동생의 아내라고 착각해서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즉 혼인을 했으면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이 뻔하지 않느냐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가정에서 ‘맏이’만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표자가 되고, 형수는 어디까지 ‘죽은 맏이의 아내’가 됩니다. 

따라서 ‘죽은 자’가 부활이 없다면 형수라는 한 여인을 놓고 서로들 자기 아내라고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을 목표로 해서 맏이가 일찍 자식없이 죽었다면, 시동생들은 ‘형 덕분’에 부활되는 운명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맏이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동생들의 연이은 결혼은 모두 다 맏이 본인의 운명의 반복이 됩니다. 

율법 안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대표적 언약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대표자 외의 모든 자들은 그저 대표자의 모형에 불과합니다.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대표자에 종속됩니다. 예수님은 답변은 이어하십니다. 혼인이란 이 세상 있을 때나 한시적으로 있는 관계랍니다. 

이 세상은 언약의 대표자가 어떤 인생을 살다 갔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 됩니다. 즉 왜 꼭 부활이 있어야하는 지를 보여주는 동네입니다. 이 세상은 진정은 미래, 진정한 운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언약, 율법을 통해서 언약의 대표자에게 모든 자가 종속되어야 마땅함을 알려주시게 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당연히 반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본인들이 중앙이 된 채 살아가는 삶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형은 형이고, 가문은 가문이요 역시 중요한 것은 자신 뿐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율법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마련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미래를 펼치고 자기 운명을 확정지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곧 자신이 예수님의 모형이고 그림자됨이라는 관계를 모르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운명에 이탈되면 곧 저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 율법이나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4강-신 25장 5-10절(시형제 결혼)1705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5장 5-10절입니다. 구약성경 300페이지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 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악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죄 있는 사람도 못가죠. 근데 악하다, 죄 있다, 라는 결정을 누가하느냐, 그 결정은 본인들이 해서는 안 돼요. 왜 본인들이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본인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구와 욕심이 있어가지고 자기한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자기한테 이익이 안 되면 악이라고 이미 일방적으로 결정을 지어놓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결정지은 죄와 악은 천국이 결정지은 것과 이게 다릅니다. 그럼 다르다는 말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니 맘대로 살았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이미 말씀 줬잖아. 율법 줬잖아. 신명기 25장 줬잖아.” 이미 신명기 25장에서 말씀을 주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을 찾아내야 해요. 발굴해내야 합니다.

 

천국은 죄가 없는 자가 가고 지옥은 죄가 있는 자가 간다면 그 죄 있다, 없다는 것을 뭐로 결정하느냐 말이죠. 시동생이 형수하고 결혼하기 싫으면 죄 있는 거고, 시동생이 형수하고 결혼하면 죄 없는 거고, 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뚱딴지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러니까 이 율법이라는 게,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은 모든 인간에게 마음속으로 양심적으로 다 동의가 되어 있는 그런 양심에 기초해서 보편성을 갖는 거예요. 보편성. 구태여 뭐 이거는 법을 안 정해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잘하고 부부유별하고 형제우애 있고. 이걸 법으로 꼭 정해야 됩니까? 딱 보면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율법은 그게 아니에요. 따라서 인간들이 상식대로 살면 몽땅 다 지옥 갑니다. 상식대로 바르게 산다하면 지옥. 근데 율법에 의해서 내 상식이 천국과 통하지 않는구나 하면 천국. 매일같이 기본적으로 본성상 살아가는 것을 결코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것을 안다면 천국. 그게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거죠. 그걸 아는 거예요. 내 상식대로 살면서 내 상식도 천국에 통한다고 생각하면 지옥.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돼요. 변화가 일어나요. 상식대로 사는 이것이 나를 지옥 보내는 상식이라는 것을 수용해야 됩니다. 인정해야 돼요. 사람이 달라져도 완전히 달라져야 해요. 그러면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율법을 주니까 율법에서는 낯선 내용들이 나오거든요. 근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죠. 이거대로 못 살게 되면 지옥 간다고 하니까, 뭐 천국 갈 수도 없지만, 하여튼 천국 갈 수 있는 수를 나름대로 열심히 해본다고 나온다 이 말이죠.

 

여기 5절에 봅시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이 본문만 딱 보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왜 형제들이 있는 그 형님이 결혼해서 아내하고 사는데, 하나님이여 왜 아들이 없게 하십니까? 그거는 하나님이 책임질 문제고요. 맏이가 있어서 대를 잇는 그 의무는 누가 질 의무냐 하면 이거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해야 할 의무가 되는 거예요. 누구입장에서? 우리입장에서.

 

아니 시동생이 조카 낳지 말라고 자기 형수한테 한약 독한 것 줘서 임신 못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렇게 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아들만 낳는다면 시동생이 죄다 아니다, 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가정은 그냥 원만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우리 형님이 결혼했는데 아들 잘 낳았다. 하나님이 낳게 하셨다.” 이러면 일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거죠. 문젯거리가 없다 이 말이죠.

 

근데 하나님께서 시비 거리를 만들었어요. 형과 동거하는데 아들이 없이 죽었다. 또 형은 왜 죽이십니까? 아들 낳을 때까지 좀 살게 하면 되지. 그만한 능력이 하나님은 되시잖아요. 그만한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다 이 말이죠. 왜? 전지전능하시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셨는데 아들 하나 못 낳게 만들고. 젊은 사람 일찍 안 죽게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한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가정에 아들도 없이 일찍 죽게 했나, 이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미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사태들을 일으킨 겁니다. 딴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다른 걸. 그 다른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용서 없이는 천국도 없다는 겁니다. 장차 올 하늘나라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에요. 아들이 통치하는 세계. 아버지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통치하는, 아들의 나라. 그 세계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이 우리 상식에 맞는데 

왜 하나님의 통치가 안 되고 아들의 통치로 넘어갔느냐 하면, 

이 인간 세상은 이미 악마가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가 통치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예요. 

악마가 통치함으로써 거기서 아들을 보내어서 아들이 악마한테 못 박혀 죽음으로 말미암아 

과연 이 악마는 존재하고 있고,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게 발꿈치를 물리게 되어 있다는 

이 약속을 약속답게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율법을 준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갈라디아서 3장을 언급했는데요. 뭐 한 주 지났으니까 다시 언급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믿음으로 구원,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으로 쭉 나가면 될 텐데. 믿음으로 의롭다 해놓고 율법을 줘버렸으니까,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또 율법이 들어오니까, 꼭 한국교회 같아요.

 

율법이 들어오니까, “아, 예수도 믿어야 되고 율법도 지켜야 되는구나.”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거예요. 그 뒤쪽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믿어야 되는 것도 해야 되고 율법도 지켜야 되고. 믿고 난 뒤에 못 지킨 나머지기 말씀도 성령에 의해서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주장한다 이 말이죠.

 

그럼 목사 니는 어떻게 살아가는데? 왜 교인들이 목사한테 묻지를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삽니까?” “그런 건 묻는 것이 아니야.” 사도바울은 솔직하게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내 속에 다른 법이 있는데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온다고. 아예 그 다른 법이 나를 죄인으로 전환시킨다고요.

 

그러면 목사들도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나도 말씀 지키려고 했는데 내가 죄인이 되어가지고 말씀 못 지킵니다.”라고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사이다 같은 설교입니까? “아, 아무도 못 지키는구나.” 못 지키라고 준 말씀이에요. 그래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세상에 간단해도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어요.

 

왜 그 간단한 것을 이야기 안 합니까? 교회에 돈 안낼까 싶어서. 십일조 안 할까 싶어서. 주일성수 안 해가지고 광고 못 들을까 싶어서. 설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광고가 중요한 거거든요. “이번에 교육관 새로 대지 매입했습니다.” 설교보다 광고가 더 중요해버려요.

 

관심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세운 교회가 언제까지 유지가 되느냐, 지금 그게 관심이에요. 유지가 안 되니까 집사 빨리 세워가지고 돈 내라! 장립집사 장로 만들어놓고 돈 내라! 그냥 집사를 권사 만들어놓고 돈 내라! 하는 짓이 그거밖에 없어요.

 

근데 사실은 지금 교회 욕 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 내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멀쩡한 가정에 아들이 없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딸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아들에게 유산을 주지 딸에게 유산을 주는 이건 어쩔 수 없는 경우고 기본은 아들이에요. 근데 아들이 없는데 남편이 일찍 죽게 만들고. 그렇게 됐을 때, 그 다음에 주께서 신명기 25장 말씀을 주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원망, 원망들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본문 내용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그랬는데, 그래서 시동생보고 형수하고 결혼하라고 하니까, 여러분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아는 상식은 그래요. 제가 아는 상식은. 어느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좋아함을 평생토록 이어가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 제가 아는 상식은 이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냐, 근대주체사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대주체사상. 옛날 중세 때는 집안을 위해서 결혼해야 돼요. 토지농경사회라서 토지는 대대로 물려주어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문 소속이라는 말은 토지소속이에요. 그럼 토지가 복을 받으려면 조상한테 제사를 드려야 해요. 줄곧 조상들이 토지의 주인공들이니까요. 따라서 제사 잘 드리기 위해서는 딸 낳으면 안 돼요. 아들 낳아야 돼요.

 

아들이 없다, 그러면 씨받이 들여서 아들을 낳아야 돼요. 유명한 영화 있죠. 칸영화제에서 상 받은 영화 씨받이. 씨받이 낳아서 가문을 이어줘야 해요. 가문이 중요하지 나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근데 인간이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고 무역하면서 생긴 자본금으로 산업을 하게 되고 산업시대가 되게 되면, 하나의 에너지 활용품이 바뀌면 인간의 사상체계도 같이 바뀝니다. 환경이 바뀌면 인간도 같이 바뀌어요.

 

뭐, 인간성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에요. 맹자 엄마가 자식 교육시키기 위해서 왜 이사를 세 번이나 한 줄 압니까? 맹모삼천지교. 맹자 엄마가 자식 교육시키기 위해서 왜 세 번이나 이사 했겠어요? 왜 했느냐? 환경 따라서 인간성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환경 따라서. 강남 갔다가, 강북 갔다가, 칠곡 갔다가 수성구로 이사했다가, 침산동으로 갔다가. 내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한 거예요.

 

만약에 내가 중요한 것을 하나님이 동의해주면 그때는 그 하나님을 아낌없이 사랑해 줄 동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사랑이냐, 평소에 내가 나를 사랑했던 그 사랑이라는 개념을 쭉 이어서 하나님까지 도달되도록 하는 거예요. 북한 미사일입니까? 지가. 대륙 간에 막 쏘게. 내가 쏜 그 사랑의 미사일이 하나님 앞에까지 도달하도록 해놓고 천국 보내달라는 거예요. 왜? 사랑하니까. 미쳤어요. 인간은.

 

율법의 취지도 모르면서 내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천국에 넣어달라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이 율법을 딱 들이대죠. “형수하고 결혼해라.” “사랑 안 해서 결혼 못합니다.” “니 이리와!” 이리 와서 어디에 가느냐, 전례적으로 율법은 그 당시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외워서 하는 거예요. 그 외우는 담당이 누구냐, 장로들입니다.

 

그 시대에 장로들이 모여가지고, “이 인간이 사랑타령하면서 가문에 아들을 낳기를 싫어했습니다. 이 시동생을 어떻게 할까요?”하고 형수가 데려오니까 그 장로들이 “이런 것은 우리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저주받아야 해.”하고 침을 뱉어버립니다. 신발을 벗기고. 신발을 벗긴다는 것은 니는 이 자리에 설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바깥에 있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이스라엘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특수한 종족이라는 것

을 이 범죄한 자 앞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확인하는 겁니다.

 

이것까지는 별로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근데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날 현대주체사상인 우리한테는 이게 먹히지를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자, 그렇다면 형수가 아들이 없다. 시동생은 총각이다. 그럼 총각인 시동생이, 이미 나이가 중고가 된, 이미 물 건너간 형수하고 결혼해서, 자기는 자기 것 주고 얻어진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건 삼촌이라고 불러야 돼요. 자기 자식인데 삼촌이라고 부를 때, 그럼 시동생 입장에서는 나는 뭐야? 내 존재감은 뭐냔 말이죠.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내 미래는 뭐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은 운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운명이냐, 모든 인간을 망하게 하는 운명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운명이 주어졌는데, 그 운명은 성도를 망하게 하는 운명입니다. 망하지 아니하면 구원도 없어요. 망한 자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문제는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망한 사람이 바로 유일하게 이 땅에서 구원되는 사람들이에요.

 

복음 때문에 망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찾아오면 안 돼요. 복음이 찾아오면 내 행복은 찾을 길이 없어요. 복음이 오면 도망가야 돼요. 그렇다고 도망가도 복음의 속도가 더 빨라요. 만화영화 톰과 제리 같아요. 계속해서 도망치는데 어디까지 도망가느냐 절벽 넘어서 허공까지 도망칩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절벽인지, 낭떠러지인지도 모르고 그냥 도망친 거예요. 뒤따라온 그것이 허공에서 잡아채가지고 기어이 예수 그리스도 운명에다가 집어넣고 말아요. “너 이 땅에서 나하고 같이 망하자.” 안 망하려고 하니까 구원도 못 받고 지지리 궁상처럼 살고. 불안 불안하고 초조해서 힘들고. 내일되면 모레 걱정, 모레 되면 또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망한 거예요.

 

이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이 본문이 나옵니다. 23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을 때에 지금 이 사두개인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동생은 동생의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형의 운명이 동생의 운명을 대체할 때, 형도 살고 동생도 산다는 이 신명기의 법칙을 지금 모르고 있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사두개인들은 내 대신 누가 계속해서 언약을 실은, 말씀을 실은 자식들이 계속해서 태어나줘야 내가 산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아까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썩어질 것이 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썩어질 것은 어디에 호소해야 하느냐 하면 영에 호소해야 해요. 영에.

 

나는 썩어질 몸인데 영적 몸에다가 호소할 수밖에 없어요. 영적 몸은 예수님입니다. 왜?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부활의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몸에다가 미래를 맡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운명은 이미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예수님 육에다가, 예수님 신체에다가 자기 운명을 이미 맡긴 사람이 성도입니다. 본인이 맡긴 것이 아니죠. 주께서 강제로 집어넣었으니까.

 

맡기게 되면 내 미래는 끊어버리고, 주님의 미래가 곧 우리의 확정된 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썩을 몸은 빨리 썩어버리고, 망할 몸은 빨리 망해버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혼인잔치에 참석해서 영생을 누리는 그거만 남아있는 거예요. 돈 워리Don't worry! 걱정하지 마! 뭘 더 걱정해요? 뭘 더 걱정 하냐 이 말이죠.

 

그러나 성도라도 사실은 그 걱정 없음을 위해서, 걱정 없는 나의 완료된 운명을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걱정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주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구하고 사귀다가 헤어졌어요. 남자여자 사귀다가 여자 쪽에서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자 쪽에서는 남자니까 쿨하게 잊고 이제는 끝났다고 하고, 남자들은 보통 그렇게 마음을 먹거든요. 먹는데, 헤어지고 난 뒤부터 매일같이 헤어진 것 때문에 고통을 매일 겪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이천 년 역사 동안 신학자들의 고민이 뭐냐 하면 성령이 한 번에 왔는가, 아니면 또 오는가, 하는 문제에요. 이걸 십자가의 단일성과 연속성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연구에 연구를 해대는 거예요. 연구해봤자 소용도 없어요. 그들은 믿음도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연구도 안 돼요. 다만 이상하다는 거예요.

 

아까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인들하고 똑같아요. 어떻게 형이 죽었는데, 동생이 형을 위해서 장가들었는데, 마태복음 22장 25절,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절,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절, “최후에 그 자도 죽었나이다.” 하여튼 다 죽었어요.

 

죽었다고 했을 때에, 28절,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물었어요.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아내라는 말을 시동생한테 붙일 수가 없어요. 내 운명을 대신하는 형님의 아내지 내 아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시동생은 뭐냐 형수하고 동침을 할 때, 자기 자격으로, 자기 입장에서 동침하지 말고, 죽었던 형이 살아서 나하고 합했다는 마음으로 형수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야 해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맏아들만 보고 구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는 인간하고 계약을 한 게 아니고 맏이하고 계약을 한 거예요. 맏이하고. 우리가 맏아들을 본받게 함이라는 그 말이고. 출애굽기 12장에서 바로의 아들부터 해서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가 죽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 대상이 오직 대표자만 뽑지, 각자 각자를 하나님께서는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강의할 때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한다고. 그 소리를 듣고 또 화나가지고 비판의 글을 올린 사람이 있어요. “이근호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 안 한대.”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하면 중보기도 문제가 걸려서 그래요. 제가 가락강의가 있을 때 어떤 분이 중보기도에 대해서 질문을 했어요.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때 스마트 폰으로 녹음까지 했는데. 중보기도를 할 때 중보기도가 왜 문제입니까? 질문 자체가 참 재밌어요. “목사님. 중보기도를 왜 문제로 보십니까?”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죠. 기도가 있는데 중보기도를 왜 끄집어냈을까요? 멀쩡하게 무시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왜 거기에 성이 안 찰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기도하는 어떤 실적을 보장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그냥 기도하면 들어주든 안 들어주든 주의 뜻이 되지만, 내가 중보기도해서 중보자가 되게 되면 이거는 필히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을 해야 돼요. 하나님마저 내 기도에 종속이 돼야 돼요. 왜? 나는 그냥 기도가 아니고 중보기도기 때문에. 내가 중보기도하면 무조건 이루어져야 해요. 내가 교회 안 다니는 딸을 위해서 기도하면 딸은 무조건 교회 나와 줘야 해요.

 

만약에 그게 안 되면 중보기도 자체가 이거는 깨지기 때문에 의미 없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중보기도 의미 없어야 되는데, 그 의미 없음이 왜 안 되죠? 그게 답변이 궁한 거예요. “주님이여, 중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의미 없다고 했습니다. “아, 의미 없구나. 그냥 기도해야 되겠다. 뜻은 주께서 알아서 하고.” 왜 이런 마음이 안 드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이런 마음이.

 

그게 근대주체사상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와 연결시켰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는 믿음으로 줄창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신앙이 아니고 오기에요. 실적이 있어야 믿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실적이 있게 믿어버리면 하늘에 처소가 없습니다. 이게 문제에요.

 

지상에서 신앙생활 너무 좋고, 너무 큰 신앙자고, 중보기도 너무너무 잘하는데 문제는 천국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에요. 마지막 웃는 자가. 중간에 되게 웃었거든요. 나중에 바둑 졌어요. 바둑 두면서 슬슬 웃는 겁니다. 대마 잡고 내 집 좀 봐라. 바둑은 집수 싸움이기 때문에. 내 집 봐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반집으로 패했어요. 끝났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잖아요.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통치하려고 하니까 주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것이 버릇이 돼가지고. 내 인생, 내 미래, 내 운명은, 내가 천당 가는 것은 내가 결정한다. 버릇이 된 데에다가 목사가 중보기도를 집어넣어버렸어요. 지가 중보자인줄 알고. 자기 이름으로 기도해놓고 응답받으려고 하고.

 

사두개인들이 말합니다. 자기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 누가 그의 아내가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라고 하는 겁니다. 오해했다는 겁니다. 왜 오해했느냐, 시집이나 장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임시적이에요. 임시적으로.

 

다시 말해서 맏이에게 아들 없이 죽게 하신 그 분만을 위해서 이 땅에 시집이 있고 장가가 있는 겁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 우리는 그의 아내가 됨, 그걸 하기 위해서 임시 땜빵으로, 임시방편적으로 이 땅에서 시집, 장가 간 거예요.

 

구태여 같이 마음도 안 맞으면서 살 필요 없어요. 그 보다 더 무서운 의미는 복음 없이 평생 해로했다. 해로하고 둘 다 지옥가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백날 해봤자 둘 다 지옥 가는 거예요. 결혼해도 결혼의 의미도 모르면서 근대주체사상 때문에 결혼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복음을 모르거든 헤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아, 이게 정말 무서운 이야기에요. 복음을 모르거든 헤어지라. 십년 알았는데, 십일 년 째 모르거든 헤어지는 거예요. 근데 왜 사느냐, 십사 년 째 혹시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십사 년 째 혹시 알 수도 있잖아요.

 

마태복음 22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니가 오해했도다.” 


이 땅은 하나의 그림자고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아니, 모형을 실체로 보고 모형을 전부로 봐버리면 성경해석 하나도 못합니다. 

운명은, 내 운명 없어요. 내 운명 없습니다. 

오직 이 땅에 있는 운명은 주님의 운명 외에 다른 운명은 없어요.

 

그 운명에 가담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거고. 

그 주님의 운명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저주의 부활로 튀어나올 겁니다. 

이게 듣기 싫든 좋든 간에 오야 맘이에요. 주님이 그렇게 결정 내린 거예요


우리는 이미 결정사항을 보는 겁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난 뒤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비로소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같이 십자가 생각해놓고는, 지금 예배 마치고 돌아서면 또 자기 인생가지고 울고불고, 눈물 뚝뚝 흘리고, 흘러간 옛날 노래 불러가며 청춘을 돌려 다오! 이렇게 하는 그것, 이게 늘 아파야 돼요. 아프니까 인생 아닙니까? 아프니까 인생이거든요. 아프니까 빨리 떠나라 이 말입니다. 포기하라 이 말이죠. 날마다 포기하는 것. 그냥 하면 안 되고.

 

예수님 바라보면서 기쁘게 포기할 수 있어야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운명인줄 알았습니다. 내 미래인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 미래가 아니었고 주님의 미래였고, 주님의 운명이었고 주님이 우리의 맏이였고,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태어난 사실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