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강-신 25장 17-19절(아말렉 민족)1706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5장 17-19절입니다. 구약성경 300페이지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악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중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현대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옛날 고대민족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십자가만 알면 되지, 아말렉 알아야 되고, 이것저것 다 알아야 구원받습니까?’라는 약간의 불만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알게 해주시죠.
뭐를요? 옛날 아말렉을요? 아니요. 현대판 아말렉을요. 항상 성경말씀을 그때 그 시절의 현재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문법으로 현재분사라고 이야기해요. 현재분사라는 문법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니가 아는 행동에 나오는 동사 시간은 잊으라는 겁니다.
너 말고 너를 대신하신 분의 동사, 그 분의 동사에서 나오는 시제에 니가 종속 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그 예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 있습니다. 천국에 가니까, 천국에서 대화를 합니다. 장로가 말합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장로가 사도요한에게 묻죠. 14절,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에서 나온다는 동사가 있어요. 나온다는 동사인데, 이 동사가 분사도 되어 있다는 말이죠. 근데 분사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자체의 시간, 과거의 시간은 현재 잊어라, 이 말에요. 그럼 이 사람의 모든 동사와 시제는 누구 것이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어졌다는 주님의 하시는 일의 결과물로 너는 과거에 살았고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그렇게 살 것이라는 그 말입니다.
너의 독보적인, 너 나름대로의 어떤 시제나 그런 동사개념이나 시제개념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게 분사에요. 이걸 헬라어에서 분사용어로 그렇게 설명한 겁니다. 분사용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미 했었느니라.” “했는데”는 이미 과거가 되잖아요. “했는데 쭉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지니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헬라어에서 분사라고 하는데, 이걸 영어로 번역할 때는 to부정사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동사가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한다. 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아말렉이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 아말렉이 있더라도 오늘날 아말렉이 누구냐를 알아야 해요. 예수님만 알면 되지 왜 옛날 신명기를 알아야 하느냐,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신명기에 나오는 이 과거 사실이 예수님을 통해서 계속 우리한테 던져주고 있고 품어내고 있습니다.
그때 구약의 이야기를 네가 남의 일로 여기지를 말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구약적인 용어를 가지고 지금 너한테 적용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17절에 보게 되면 아말렉이 나오기 전에 다른 민족이 나와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말렉만 알면 안 되고 또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애굽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역시 애굽이라는 나라는, 옛날 이집트가 있었지만 지금의 이집트, 지금의 애굽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나라는 카이로라는 수도가 있고 카이로의 인구가 천 육 백만이에요. 지중해 연안에. 엄청나게 많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그럼 그 나라가 애굽이냐? 아니에요. 그 나라 애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만 애굽이 되면 안 돼요. 온 세상 다 포함해서, 온 세상이 다 애굽이 되어야 해요. 그럼 그 대표적인 옛날 애굽이 어떤 나라였느냐 하면, 옛날 애굽 나라는 이렇습니다. 왕 혼자 띵까띵까 놀고 나라 돌아가는 것은 관료들이 다 알아서 일했던, 그런 구조로 되어 있던 나라가 애굽나라입니다.
왕은 그냥 상징적 인물로서 놀기만 하면 돼요. 뭐 여자들과 어울리고 맛있는 거 먹고, 전부 다 그런 것만 하고 있다고요. 나머지기는 밑에 공무원들이 나가서 구석구석 안정되게 하는 그러한 정치구조가 애굽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이게 창세기에 요셉이야기에도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 나라를 뭔가, 누가 대표를 해야 되는데, 국무총리가 대표를 하면 이상하잖아요. 외무부장관이 대표하면 이상하고. “에이! 고만 왕이 대표를 하세요. 그 대신 놀기만 하시면 됩니다.” 이 제도가 애굽의 국가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근데 이게 그렇게 가능했던 것은, 왕제도가 있게 되었던 것은, 왕 제도 전에는 한 사람이 기억해서 나라를 통치하는 범위가 100명에서 150명 정도하면 사람은 헷갈립니다. 페이스북이나 이런데서 100명이나 150명이 넘어가 버리면 누가 누구인줄 몰라요. 이게 인간의 기억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되는데 수천 명이나 수백 명이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기억 가지고는 이게 통치가 안 돼요. “대통령이 저한테 했잖아요?” “누구신데요?”
그래서 교회도 150명이 넘어가면 이거는 완전히 남의 동네고 엉터리 동네에요. 150명이 안 되도 마찬가지지만. 그럴 때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문자와 숫자에요. 문자를 그 당시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적어가지고 하게 되면 거기에다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도장을 찍게 되면 공무원들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데, 결국 이거는 띵까띵까 놀고 있는 그 왕이 실시한 거예요.
왕이 아무것도 안 해도 그 나라 자체의 모든 영광은 왕이 홀로 받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왕의 아들 정도가 아니고, 바로가 곧 신이에요. 인간 자체가 신이에요. 이게 보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식입니다. 왕이 있으니까 보는 왕을 왕으로 인정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걸 하나의 왕으로 보죠. 어떤 지도자를 보는 것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이러한 애굽적 속성이 오늘날 신천지고 구천지고 교회에서 목사님 건드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전부 다 애굽적 성향이 파급된 거예요.
애굽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분사에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굳이 험한 일을 안 하더라도 우리가 받들어 모시고 우리는 복종하는데서 마음의 정서적 안정을 찾게 되는 겁니다. 안정을.
대통령이 둘되고 셋 되면 골치 아파요. 뭐 위장 전입한 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 세상에! 아줌마 발목을 잡아가지고. 나라꼴이..뭐 그렇게 복잡하게..아무나 하고.. 정치적 발언이 돼서 미안합니다만. 이것이 하나의 애굽의 예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모든 정치에 대해서는 엘리트들이, 관리들이, 행정관출신들이 다 알아서 해요. 그리고 그냥 나무위에 앉아서 맛있는 거나 먹고 가만히 있으면 돼요. 나대지 말고. 그리고 그냥 왕으로 섬기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통령제나 총리제라고 해서 아무나 시켜서, 또는 왕은 세습제로서 있되, 군주제로 있되, 실제로는 총리가 하듯이. 그래야 나라가 권위가 서고 심리적인 안정을 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이에요. 근데 그 애굽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머리에서, 지혜에서 나올 수 있는 최적의 제도, 200명, 100명 이상의 수백만, 수천만, 수억을 거느릴 수 있는 왕국제도에서는 그거보다 더 좋은 제도가 없는데, 그 없는 제도에서 새로운 나라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이 말이죠. 최고로 좋은 국가 행정제도를 갖춘 나라에서, “그건 아니야!”라고 뛰어나왔다면, “그럼 너는 뭐야?”라고 되겠죠. 원래 서양의 중세는 하나님 믿는 나라라고 자처하고 얼핏 비슷하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중세가 지나고 근세에 오면서 드디어 새로운 사상들이 나왔습니다. 교회가 개신교가 된 뒤에 이제는 교회를 못 믿겠다고 해서, 믿을 것은 우리 인간들 밖에 없다는 새로운 사상이 나왔는데. 그 사상가 중의 하나인 루소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루소가 지은 책, <에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루소는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규칙들을 자연이 남긴 글자에서 찾았다. 성경을 슬슬 밀어놓는 거예요. 성경, 옛날 오류가 많은 책이다. 저리 치워! 자연이 남긴 글자에서 찾았다. 그럼 자연이 뭐냐,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데, 그것은 뭐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오직 나 자신에게만 의논하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오직 나 자신하고만 의논하면 되고, 내가 좋다고 느낀 것은 좋은 것이고 내가 나쁘다고 느낀 것은 나쁜 것이다. 이게 루소의 사상이에요.
지금 교육학자들은 에밀, 이것이 교육의 사상이라고 좋다고 하고 있고. 이 사상을 물려받은 사상가가 존 듀이라는 사상가고, 우리나라 모든 문교부 교육정책은 존 듀이 사상의 바탕을 깔고 있어요. 성경을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립스틱 바르고 학교에 나오는데, 초등학교 2학년 애에요. 쌤이 왜 간섭합니까? 쌤이? 뭐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뭐라고? 내가 좋아서 한다는데? 애가 좀 나중에 커서 책 좀 보게 되면 루소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할 거예요. 루소가.
내가 좋아서 합니다. 쌤은 쌤이 좋은 거 하세요. 나는 내가 좋은 것 할 테니까. 이게 평화롭고, 아름다고, 행복한 민주적 교실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근데 남한테 피해주잖아? 아니 내가 립스틱 바르는 것이 그게 왜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거예요? 남자가 남자끼리 연애하고 여자가 여자끼리 연애하는 것이 왜 남한테 피해를 줍니까? 내가 좋아서 내가 하는데? 동성애 만세! 이래 나온다 말이죠. 무지개깃발(동성애상징) 들고 나온다 이 말이죠.
자, 이게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왕이 있던 시절에 왕이 있던 자리에다가 우리 인간들끼리 협의하자. 협의체, 촛불집회죠. 우리끼리 협의해서 하자. 그게 민주주의고. 민주주의가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에게 마음이 안 들면 잡아당길 거야. 대통령이고 뭐고 다 잡아당길 거야. 결국 뭐냐 하면 누가 중요하냐면 내가 중요한 거예요. 이게 애굽이에요.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는데, 지금 제가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지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현재 애굽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애굽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이게 똑같다고 느껴지죠. 그래서 나오니까, 애굽에서 떨어져 나와서 좋다고 하니까, 누가 따라 나왔느냐 하면 출애굽기 17장에 광야에서 아말렉이 재 2의 애굽으로 끝까지 갈구려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아말렉이.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아말렉에 관한 이야기에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애굽의 긴 그림자가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은 뭐냐, 어떤 점이 다르냐를 이야기해야 되겠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동행. 사람이 혼자 살면 신되고요, 같이 살면 죄인 돼요.
멀쩡한 사람도 결혼하게 되면 인간성 더러운 사람이 돼버립니다. 상대방 배우자로부터. “나 이정도 니한테 잔소리 듣고 비난받을 입장이 아닌데? 내가 얼마나 총각 때 착실했던 총각이었는데. 왜 결혼해서 니한테 잔소리 들어야 하는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결혼이라는 것을 자기가 마음이 맞는다고 착각하고 결혼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하고 정반대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분과 동행해요. 애굽에서 나오니까, 애굽이라는 그 권력에서 나왔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한 거예요. 드디어 해방이다. 간섭 안 받는 이 상태를 주께서 원했겠지. 천만의 말씀. 이제는 제대로 간섭할 거예요. 이제는 제대로 주님이 동행해서 간섭을 합니다. 그 간섭하는데 필요한 이웃주민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아말렉입니다.
아말렉과 함께 자꾸 부딪히게 만들어가지고 내가 사수하고 지키려고 하는 내가 과연 천국 갈 만한 나인지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붙인 악마적인 아말렉을 통해서 계속 되풀이해서 확인하고 확인케 하는 겁니다. 그 못된 이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 행복을 방해함으로 말미암아 과연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행복 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원래부터 갖추어져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들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동 앞집에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는 평소에 관리비도 안 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공동으로 써야 할 지하공간을 자기가 독점해가지고 거기다가 실을 모아놓고, 실 장사를 하는가 봐요. 몇 년 동안이나 거기다가 해놓고 당연한 것처럼 으스대다가 고만 물이 차서 실이 붕붕 떴어요. 근데 그 할머니가 아주 가관입니다. 공동으로 자기 실을 물어내라는 거예요. 아침에 주님께서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주시네요. 참다 참다 못 참아서 고소하라고 했는데.
또 이런 게 있어요. 그거보다 더 가관인 예가 있어요. 뉴스에 보니까 어떤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이 들어섰어요. 아주 살기 좋고 경치 좋고 쾌적한 곳에 마지막 노후를 전원주택에서 살라고 지어놨는데, 갑자기 어느 날 아스콘(아스팔트콘크리트Asphalt Concrete)공장이 들어왔어요. 아스콘 공장이 들어와 가지고 악취가 온 마을에 퍼져가지고 여름에 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어요. 문 못 여는 것도 문제지만 집값이 내려가게 되면 애들한테 물려줄 상속비가 확 떨어지죠.
그래서 항의를 했죠. 아스콘 공장 사장을 당장 불러다가 당신 때문에 집값이 내려가고 우리는 못 살겠다. 조치를 하라고 하니까, 아스콘 공장 사장이 하는 말이 더 가관입니다. 당신은 공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냄새가 그렇게 지독한데 공장에서 매일 일하는 나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라는 거예요. 이거는 뭐. 당신들만 삽니까? 아스콘 공장 사장인 나도 좀 삽시다. 이거 뭐 에밀의 루소정신이에요? 그런 요소들이 은연중에 우리들에게 다 담겨있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데 왜 이 세상을 좋아하고 이 세상에 집착하고,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땅에서 왜 성공하려고 합니까? 뭐낙 우리가 내가 아는 성경 이론하고 몸이 자연스럽게 가는 것하고 이게 방향이 반대방향이에요. 좁은 길로 가면 천국이고 넓은 길로 가면 지옥이라는 것을 뻔히 마태복음 7장을 통해 알면서도, 우리는 넓은 길을 선호하고 있는 육체의 본심에 대해서 스스로 내가 나를 탓하지 않아요.
자, 이리 되면 우리는 애굽한테 발목 잡혀서 아말렉한테 이기지를 못합니다. 이기지를 못할 때 여기서 동행이라는 의미가 등장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는 아쉬운 것만 기도를 해요. 아쉬운 것만. 이럴 때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하나님한테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기도하는 나 자신은 예쁘지요? 참 기특하죠? 라고 여기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 기도를 안 받아요. 중보, 중보, 중보, 백날 붙여도 그 기도는 안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 동행의 가치가 드러나느냐 하면 기도마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 때, 그때 나오는 것을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음이라고 합니다. 부르짖음. 자기가 기도까지 했는데, 그 기도도 부도수표. 내 기도 응답이 안 왔을 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주께서는 아말렉을 옆에 붙여 줘가지고 유도해내죠.
아말렉이 쳐들어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도 없고 대처할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좀 무기 있는 것 가지고 여호수아 장군이 나가서 쨍쨍해봐야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위에 올라가게 해가지고 모세의 지팡이를 들게 합니다. 모세가 지팡이 들었는데 산 밑에 싸우는 여호수아가 갑자기 승리를 해요. 이거는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가 도대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갑니다.
납득이 안 돼야 돼요. 납득이 됐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여전히 나로 인하여 살겠다. 쉽게 말해서 어려울 때면 ‘기도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어려울 때면 기도하면 되고, 기도도 안 되면 금식하면 되지.’ 주께서는 그런 금식과 기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르짖음을 원하는데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안 부르짖어요.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안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과거에 살았던 모든 것이 나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것을, 그걸 인정해줄 때 부르짖음이 나와요. 체면이고 뭐고 위신이고 간에 다 갖다 버리고, “살려 주이소! 살려만 주이소!” 이게 부르짖음이에요.
어려울 때는 누가 이렇게 기도했다. 그런 요령을 가지고는 아직도 멀었어요. 일체의 모든 희망마저 소실될 때, 그때 부르짖는 겁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고. 밑에서 칼싸움 좀 해봐야, 모세가 뭐 좀 되나? 그저 저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혀 하늘나라에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승리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그냥 물러가게 하면 되는데, 주께서는 본래의 의도가 있어가지고 아말렉을 쉽게 물러가게 하지 않고, 물러갔다가도 또 쳐들어오고 물러갔다가 또 쳐들어오고.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것은 모세에요. 모세가 80이 넘어 연세가 많은데 언제까지 벌서듯이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 됩니까? 올렸다가 또 물러가면 내렸다가, 내리면 또 쳐들어오고, “어? 안 물러가네! 아이고, 아파라.” 그때는 아론과 훌이 옆에서 받쳐줘야 해요.
그러니까 모세를 받쳐줘서 지팡이가 돋보이게 한다는 말은, 이번 전쟁에 설치된 설치물들, 아말렉 들어오고, 여호수아 밑에서 칼싸움 하고, 지팡이 들게 하고, 이렇게 하는 이 모든 배치가 순전히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해서 설정한 소재들이었다는 말이죠. 세팅된 하나의 무대에요. 무대. 아말렉마저.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은 누구를 공격했느냐 하면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하나님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아말렉으로 하여금 붙이게 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어려울 때는 도와주지만 숨통이 트이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귀찮아해요.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자꾸 개입하지 마세요.” 귀찮아한단 말이죠.
그럴 때마다 아말렉을 붙여 줘버리면 아말렉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나서게 됩니다. 자기 선에서. 누가 뭐 사기치게 되면 고소하게 되잖아요. 처음에 말로 했다가 말로 해서 안 되고 합의가 안 될 때는 또 고소해서 재판하고 하잖아요. 그런 과정 하나하나 속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재판하면 되겠지. 이렇게 하면 되겠지.’ 계속 희망을 자체 내에서 생산해냅니다.
그러나 희망을 생산해내면 뭐가 날라 가버리느냐 하면 누가 애굽에서 구원해냈다는,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냈다는 구원의 기쁨, 그 놀라운 능력이 자꾸 삭제가 되고, 그게 우리에게 남아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말렉을 쳐들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처음 구원받은 첫사랑, 그 사랑을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데리고 나왔다. 너희도 애굽하고 똑같아.” 똑같은데, 분리작업으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보내기 위해서 똑같은 인간, 차이나지 않는 인간을 주님이 동행함으로써 새삼스럽게 차이 나는 요소를 만드는데, 그 차이 나는 요소가 뭐냐 하면 애굽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만 의존하지만 이 이스라엘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 교인들은 “주님만 의지합니다.”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아니야. 니가 의지한다는 것을 내가 안 믿고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에, 없는 의지를, 없는 믿음을, 내가 나서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그러한 현장이 담겨있는 데로 너를 이끌고 가겠다.”라는 겁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모세가 지팡이만 들고 지팡이만 쳐다봐야 하듯이 이제는 그런 사건이 안 일어나도 늘 지팡이 같은 위치로서, 주님이 자기의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동행입니다.
동행인데, 좋은 게 좋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정말 사랑은요, 그대만 있으면 나는 지금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게 사랑이에요. 따라서 주님을 사랑할 때가 한 순간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자주 오지는 않지만, 5년마다 오는 사람도 있고 7년 만에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아이고, 죄인으로 사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차라리 지금 지붕이 무너져서 나를 압사시켜 죽여 버리세요. 그럴 때 허허 웃겠습니다.”라는 그 순간만 주님께 영광이 돼요. 그 순간만. 살아있게 해주셨으니까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이거는 입에 발린 소리고요.
“고만 죄인이니까 죽여도 좋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주님이 준비하신 그 사랑입니다. 나는 그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세상사랑은 그냥 그대가 좋다고 하지만, 그거는 언제까지 할지 알 수가 없어요. 니 좋아해줬는데 니 뭐 해줬노? 자꾸 본전 생각나서 안 돼요.
정말 주님을 사랑할 때는 죄인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걸 안다고 해도 돌아서면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주님의 사랑이 동행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우리한테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설교마치겠습니다. 마치겠는데, 근데 이렇게 끝나버리면, ‘아휴, 그러면 안 되는데, 다음에도 또 비 안 온다는 말인가?’라고 이렇게 자꾸 낭패적인 경우를 생각하는데, 제가 경험상 죄인 된 순간이 꼭 낭패만 죄인 된 순간이 아니고, 예상 밖의 행운이 찾아올 때,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 저에게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행운을 주십니까? 나는 더 살고 싶은데, 주님! 이런 행운이 오면 지금 이 현장에서 죽고 싶잖아요?”라는 이런 순간.
난데없이 행운이 찾아오는 이런 순간이 여러분들에게 다 있어요. 언제냐 하면 결혼 안 하고 싶은데 갑자기 맘에 드는 배우자가 나타날 때. “주여 감사합니다.” 이게 절로 나올 때. 바라기는, 이러한 예상 밖의 낯선 기운을 통해서 주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말렉이 우리 주위에 포진되어 있음을 저희는 몰랐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희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어도 그냥 정보인줄 알고 이론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어린양의 피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완료를 드러내기 위한 낯선 것임을 저희들이 정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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