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강-신 26장 1-4절(맏물 바침)1706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01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상에 자꾸 흔적을 남깁니다.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은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에 따라서, 그것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되겠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느냐 하면 2절에 보면,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맏물을 취한 거예요.
그럼 그 맏물의 뜻이 뭐냐 하면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을, 티를 어떻게 내느냐 하면 맏물을 거두어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다가 이렇게 안치를 하게 되면, 너희들의 그 행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동행함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맏물이냐,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근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거든요. 아들이 열 명 있다면 다 아들이겠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그 아들 중에서 장자, 맏이, 맏아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상대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럼 맏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맏아들과 그 외의 아들들과의 차이점이 뚜렷이 드러나야 해요. 차이점이 드러나야 해요.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는 맏물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과정을 이스라엘 구약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삭, 벼, 또는 밀 이삭이 어디까지나 이거는 식물이죠. 하나의 곡식이잖아요. 손에 만져지는 물체라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냥 이름이거든요. 실체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의 곡식이라는 이 식물성 실체에서, 이름이라는, 이 실체 없는 이름에 합당한 새로운 실체가 곡식에서 뭐로 변하느냐 하면, 사람으로 변해가지고 하나님의 이름과 결부가 돼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면 곡식 광주리에 담아서 성전에 바치라는 그 앞서 있는 모든 조항들은 어떻게 되느냐, 이게 폐기가 되는 겁니다. 폐기처분이 돼버려요.
점점 더 가까이 가기 때문에, 점점 더 가까이 가면 나중 것은 가까이 간 것에 대해서 양보해야 됩니다. “이제는 내 할 일 다 했다.”하고 자기는 떠나야 돼요. 그 대표적이 것이 바로 사람들은 세례요한 등장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확 끌렸습니다. 선지자 같다, 엘리야 같다, 그렇게 하는데, 세례요한이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나 아니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렇게 하거든요. 나 아니거든,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가 전에 설교하면서 축구이야기 했잖아요. 스크린 장치해가지고 피하면서 진짜 실체가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로 드러나게 하시면 되는데, 앞에 선지자를 보내놓고 뒤에 예수님을 드러내는 이유가, 그 선지자에게 인간들이 쏠릴만한, “아, 저 사람은 진짜 메시아 같아.”라고, 뭔가 쏠릴만한 요소가 그 선지자에게 매력적으로, 매혹적으로 담겨있어요. 인간에게 유인할만한 요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그 선지자에게 올인 합니다. “나 당신 믿습니다.” 그럼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나 아니거든!” 이런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지자가 어떤 유인하는 기능을 하고 빠짐으로써 인간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해서 선지자에게 매력을 갖고 있었는가, 그만큼 인간들은 메시아가 와도 알아볼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전혀 없음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선지자는 진짜 선지자 같은데 메시아는 영 아니야.’ 이런 요소가 인간 속에 그게 들어있어요.
또 하나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도 뭔가 자기가 생각하기에 여호와는 이렇게 일할 것이라고 끌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이 주님 찾아왔을 때는 완전히 자기가 정반대방향으로 잘못된 지옥으로 가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데, 그게 바로 지옥 가는 행동들이었던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죠. 진짜 하나님은 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을 때에 주님의 답변은 이거에요. “나는 너를 포함시킨 하나님이다.” 내 안에 이미 너는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보통 인간들은 자기도 따로 있고 하나님도 저기에 따로 있어가지고 새롭게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은 사이가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어떤 저질의 죄도, 주께서는 이미 그 저질의 죄까지도 다 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차라리 내가 이 땅에서 죄 짓는 것은, 품고 있는 그 죄가 서서히, 마술사가 종잇조각 풀어내듯이, 뭐가 나오듯이, 계속 풀어내는 그 모습이 지금 내가 이 땅에 나와서 뭣도 모르고 살아가는, 죄 짓고 있는 그 모습이에요.
나중에 이것을 감는데, 주의 이름으로 감아버리면 처음부터 우리는 주님 안에 있었고, 잠시 바깥으로 그 주름진 것이 펼쳐지다가, 다시 주님 앞에 소환됨으로써, 우리는 창세전부터 주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라는 이런 공식이, 원칙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구약도, 오늘 본문 곡물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땅이 있고, 땅에 농사를 지었는데 거기에서 뭔가 싹이 나오고 곡식이 나오더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근데 그걸 당연한 걸로 하지 말고 주님이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기능과 니가 결부시켜서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모든 곡식을 가져오라든지, 제일 실한 곡식을 가져오라는 말이 아니고, 맏물, 곡식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맏물을 거두어서 광주리에 담으라고, 이렇게 지시를 한 것은, 그 당시에 농사꾼들이 농사를 짓더라도 우리끼리만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고, 농사짓는 기능의 핵심부위에, 핵심장소에 이미 주의 이름이 거기에 가담되고 있는 거예요. 가입되고 있는 겁니다.
임진왜란 때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진주에 점령한 왜군장수를, 열아홉 살 먹은 새댁이 남편은 죽고, 이겼다고 좋다고 하는 왜군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빠져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강에 가서 그 현장을 보고 싶어요. 여기서 끌어안고, 얼마나 여자가 힘이 셌으면 저 강물 있는 데까지, 남자가 바보 같이, 같이 손잡고 사이좋게 간 것이 아니니까. 남자를 끌어안고 뛰어내렸다는 말은, 그 현장이 실제로 일어난 곳인지 궁금하긴 한데, 하여튼 그렇게 죽었다고 하니까 죽은 줄 알죠. 그 이름이 논개입니다. 논개.
그런데 논개의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와요.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고 연달아 나옵니다. 몸 바쳤다는 거예요. 몸을 바쳐서 같이 뛰어내렸다는 거예요. 이게 맏물의 기능입니다. 맏물의 기능. 몸 바쳐서 뛰어내리기 전에, 결과적으로 몸 바쳐서 그 왜장하고 같이 죽었다면, 뛰어내리기 전에 카메라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 뛰어내리기 전에 먼저 술잔이 오고가고 있겠죠.
그 자리가 오늘 본문의 자리에요. 몸 바친 것은 십자가 자리고, 그 전에 필름을 앞당겨 땡겨 버리면, 지금 왜장은 술 취해서 좋다고 하고 있고, 그 앞에서 “장군님 축하합니다. 한 잔 드세요.” 이럴 때, 왜장은 그 논개가 자기 앞에 살아있다고 보고, 논개도 그 왜장이 자기 앞에 살아있다고 보고, 둘 다 살아있다고 본 거예요. 근데 얼마 지나면 둘 다 죽어있어요. 죽어있다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도 살아있는 존재고, 열두 제자들도 살아있는 존재로 여겼죠. 근데 주님께서 논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거예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는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려고 왔는데, 그냥 죽여 버리면 지옥가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몸 바쳐서 껴안고 이 땅에서 우리를 빼내는 겁니다. 논개처럼.
따라서 장차오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 속에 어떤 주의이름이라는 기능을 이미 작동을 시키고 있었는데, 그게 어디 있나? 하고 살펴보니까, 그게 바로 곡식이 날 때마다 맏물로 나온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모세나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뭐냐, 지금 니 눈에 곡식으로 보이느냐? 내 눈에는 하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인다. 장차오실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그러나 사람의 능력으로 장차오실 그런 일까지 생각한다는 것이 사실은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느냐,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미리 앞서서 온 게 있어요. 십자가 이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기 전에 미리 앞선 것이 있어요. 그게 바로 유월절 양입니다. 양을 잡는데, 집안에서 키운 양을 잡으라는 겁니다. 논개하고 똑같은 원칙이에요. 집안에서 키운 양. 갑자기 돈 주고 사지 말고. 집안에서 키운 양을 잡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양은 유월절 밤이 오기 전까지는 양도 살아있고, 이스라엘 가정도 살아있어요. 살아있는데, 갑자기 양 잡으라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모세에 의해서. 그러면 멀쩡하게 살아있는 양이 유월절 밤에는 안에는 살점만 남기고 뜯기고, 바깥에는 죽은 채로 마중을 나가요. 죽음의 사자 앞에 마중을 나가요.
여기서 우리는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왜 사람은 안 되는가? 쉽게 말해서 죽음의 사자가 오는데 그 집안에 형제가 다섯 명이 있다. 죽음의 사자 앞에는 형제가 다 죽는다. 그때 아버지가 “맏이를 원한단다. 니가 맏이잖아? 니가 오늘 밤에 대신 죽어서 문 밖에 있다가, 니 하나 죽어 나머지기 나와 네 형제를 살릴 생각해라. 맛있는 거 해줄게. 오늘 밤은 할 수 없다. 니를 잡겠다는데, 니가 바쳐야지 어떻게 하느냐?”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양을 빼가지고 양의 피를 발라요. 문설주에다가 이렇게 바른다고요.
이게 이번 수련회에 하겠습니다만, 기존의 민족하고 이스라엘 민족하고의 차이점이에요. 기존의 민족은 족보상 대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가는 민족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뭐냐 하면, 존재하는 이유가 어떻게 죽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민족입니다. 이걸 나중에 신약에 와서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논개가 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이스라엘 전체가 논개 적인 기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부라도 어떤 부분이 논개 같이 몸 바치는 사건, 요소들이 그 안에 중요 핵심으로 담겨있어야 돼요. 보통 민족은 살기 위해서 사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죽기 위해서 등장한 민족입니다. 근데 문제는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돼요. 그래야 그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요.
아까 한 것을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큰 맏이가 들어가면 되는데, 왜 양이 죽느냐, 갈 인간도 없겠지만, 인간은 안 받아줘요. 인간은 안 받아줍니다. 그럼 양만 잡았다 뿐이지 진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양만 죽었다 뿐이지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안 받지만 누굴 대신하게 되는데 그 대신한 그 희생을 쳐서, 죽은 논개를 앞장 세워서 나머지기를 논개의 자리에 들어온다는 조건하에 그 민족을 살려줍니다.
이게 복잡해요. 그러니까 양을 죽이고 양의 의미를 그 다음부터 그 내부에 확산시키는 겁니다. 확산시키거든요. 이번에 연세대학교 학생이 교수한테 소포를 보내가지고 사제폭탄을 터트리죠. 그 폭탄이 무슨 폭탄이냐 하면 나사폭탄이에요. 뾰족한 나사를 해놓고 기폭제를 터트리면 나사가 온 천지에, 교수 얼굴에, 전부 다 죽으라고 터진 겁니다.
학생이 교수한테 그런 악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뭐냐 하면, 교수가 자기 미래의 희망에 장해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빨리 석사학위 받고 나와 가지고 취직해야 되는데 교수가 자꾸 안 된다고 빠꾸를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질나서 죽으라고 사제폭탄을 만들었죠. 아주 재주가 비상하죠. 그거 만든다고 고생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근데 폭탄 만든 것을 보세요. 주위에는 나사못이 있고, 안쪽에는 기폭장치가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럼 주님께서는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걸로 간주하는 겁니다. 양을 기폭장치로 삼아서, 그 양자리에 이스라엘의 맏이를 주의 이름으로 등록시켜버리면 그 기폭장치가, 맏이가 분명히 살아있으면서도 그 맏이 속에서 어린양이 죽었다는 그 효과가 계속 이게 파급되도록, 폭발하도록 그렇게 하는 장치를 주께서 마련하셨습니다. 이게 언약이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해요. 살아있는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남들 보기에는 우리가 죽은 자 맞는데, 십자가라는 기능이 발휘하게 되면, 십자가 달리신 분이 내 존재를 대신해버려요.
그러면, “예수님 어디 갔노? 예수님 없지?” 이 말이나, “나 어디 갔노? 나 없지?” 라는 것하고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나 없다. 영구 없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없는 거예요. 그럼 쿡쿡 쑤시면서, “그럼 지금 니 몸뚱아리, 니 손과 발, 말하는 입은 뭐야?” 라고 하면 “아, 이거는 사라지는 몸이지롱~” 사라지는 거예요. 냉장고 바깥에 바나나를 놓으니까 푸른곰팡이가 펴서 사라지잖아요. 퍼런 곰팡이가 피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계속 이게 쪼그라드는 거예요. 탱탱했던 피부가 나중에는 아무리 보습을 쳐 발라도 뽀송뽀송한 것이 사라지고 점점 더 물기가 빠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이 육십 넘은 여자 분들은 미니스커트를 못 입어요. 지가 봐도 칙칙해요. 그런데 봤습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아침마다 산책하게 되면, 새벽 5시 45분이 되게 되면 위에 분홍색 티에다가 미니스커트를 입었는데 나이가 70넘은 할머니에요. 얼추 자랑할 만하다 이 말이죠. 그 정도 되면 대단하죠.
근데 이게 푸른곰팡이가 핀 바나나를 내밀 수 없듯이, 인간은 나중에 나이 들면 사진도 찍기 싫어하고 내 몸을 어디에다 내놓을 수가 없어요. 사진 찍지 말라고 해요. 지금 이 원리가요, 제가 농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개 이야기가.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는데 나는 뭐만 관찰하면 되는가 하면 이 쪼그라드는 것을 매일같이 관찰하면 돼요. 아, 이래가지고 완전히 망가졌구나! 몸만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동반해서 온 천지가 다 고장이 나요. 귀도 멍멍해. 관절이고 뭐고, 하나 고치면 다른 하나 고장 나고. 그걸 저는 사자성어로 발본색원이라고 해요. 모든 것을 다 빼내는 거예요. 이빨로 하면 발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빼내는 겁니다. 빼내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게 가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있다고 아무리해도 안 믿는 거예요. 이걸 왜 안 믿느냐 하면 자기하고 나하고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어서 이 몸이, 나의 진짜를 가리고 있는 것을 빨리 제키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슨 기능을 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바로 맏물의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맏물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맏물이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맏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평범해 보이는데 뭔가 하나의 기폭장치처럼 삽입시켜놨어요. 그 삽입시켜놓은 것이 뭐냐 하면 주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럼 맏물을 광주리에 담아서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소제를 드린다든지, 제사 드리고 있는 제사장의 양식으로 바쳐버리면, 제사장은 무슨 기능을 하느냐 하면 제물을 잡는 기능을 해요.
그래서 죽음이 죽음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일이 연관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중앙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낯선 죽음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낯선 죽음이. 매일같이 조금씩 죽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살아있는 죽음이에요.
제가 어디서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두 마음이 한 마음이 된다는 겁니다. 아, 그거 참 멋진 이야기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에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했거든요. 어떻게 성경말씀을 잘 이해했는지.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는 것은 뭐냐,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그게 한 마음이 돼야 된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 분이 아주 적절하게 해석을 해줬어요. 두 마음이 한 마음이 되는데 그 한 마음이 뭐냐 하면 세상으로 쏠리는 한 마음이에요. 교회 나오고, 복음 듣는다고 했는데, 갈수록 두 마음이 아니라, 전에는 두 마음으로 갈등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복음을 오래 듣다보니까 갈등도 없어요. 어느새 내 마음은 벌써 세상 적으로 이미 한패가 되어 있어요. 세상 적으로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화장품 새로 살 때, 여성분들은 모르겠는데 남자들은 화장품을 새로 사면 갑자기 좀 짜증이 나요. 언제 이거 다 쓰고 새로 사나, 이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들은 잘 사용을 안 하니까. 아무리 찍어 발라도 맨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다 썼어요. 뭐와 닮았느냐 하면 우리네 인생과 닮았어요.
어떤 애한테 물었어요. 한 일곱 살 먹은 애인데, 그 애가 고민이 있어요. 뭐냐 하면 “앞으로 인생을 우에 다 사노?” 그게 고민이랍니다. 일곱 살 먹은 애가. 사람들이 70, 80살들 사니까 지겨워서 그걸 어떻게 다 사느냐 이거죠.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의 마음이 이미 세상 쪽에 있어요. 따라서 그 화장품 안에 뭐가 들어가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겨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기능을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나에 대해서 포기해야 될 인생을 살아야 되죠. 그것을 가지고 통합해서 주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를 증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증인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게 되면 우리는 맏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맏물이 된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해명이 되고 설명이 돼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썩은 고구마하고 썩은 바나나하고 싸운다, 이거는 둘 다 냄새가 나요. 의미 없는 거예요. 니가 예쁘냐 내가 예쁘냐, 니가 빨리 이쁘게 썩느냐 못생기게 썩느냐, 하는 그 차이 일뿐이지 썩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아요. 의학이 요새는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지금은 얼마나 능력을 향상시키는가에 의학이 발달된다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4차 산업에서는 두뇌 빼놓고 나머지는 기계로 다 바꾼다고요.
물론 돈 있는 집안에서만 모든 것을 다 바꿔요. 피부만 바꾸는 것이 아니고 고장 나면 전부 다 기계로 바꿔요. 그냥 기계가 아니고 분자수준의 기계에요. 피부자체가 미세한 원자의 기계로 다 바꾼다 이 말이죠. 근데 이제 뭐까지 가느냐 하면 이 두뇌까지 다 바꿔요. 두뇌까지를 다 바꾸어서, 이제는 내 두뇌는 따로 있고 바깥에 양자 컴퓨터에 내 두뇌를 집어넣고 양자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 나는 움직이는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니까요. 앞으로. 점점 더 그걸 연구하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안에 썩어가는 나밖에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고, 새 언약이고, 맏물이고, 주님의 계시고, 말씀도,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니하고 나하고는 이렇게 분리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맏물을 갖다가 바친다는 것은 다른 이방민족과 차이 나고 분리되는 건데요. 분리라는 말은, 분리라는 말 중에 또 다른 말이 있는데 소외라는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소외라는 말은 원래 하나인데 저쪽에서 나를 강제로 밀칠 때 우리는 소외당했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원래 하나인데. 원래 하나인데 이렇게 밀치는 것, 그건 소외고.
처음부터 뿌리가 다른데 따로 갈라지는 것은 분리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소외시켜요. 나 세상처럼 살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떠밀지만, 뿌리가 하나같으면 결국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분리되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이에요. 나는 주님이 싫은데, 근데 저거는 너무 싫다. 아무것도 없이 왜 사는지도 모르고.....,
아까 설교 전에 장로님께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친구 분이 평생을 잘 나갔는데, 평생을 부부로 반만 살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반이라도 살았네요. 지금은 삼성병원에 입원했는데 부인은 안 찾아옵니다. 찾아올 필요가 어디에 있어요. 자기 인생에 남편이 해준 게 뭐 있다고요. 지는 지 맘대로 살았는데. 안 찾아가죠. 그래서 동생이 돌보고 있답니다. 친구들이 차타고 오면서 하는 말이 인생 참 불쌍하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불쌍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마찬가지에요.
왜 너 안에 이질적인 것이 없느냐? 이 말이죠. 왜 논개가 없어요? 우리의 복이 뭡니까? 복이라는 것은 안 죽는 것이 복이 아니고, 내 안에 이질적인 십자가가 꽂혀있는 것이 복이에요. 이거는 들어왔기 때문에 뺄 수도 없어요.
주님의 폭탄작업이 있어가지고 우리는 늙어죽는 이유를 알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은 인간이 왜 죽는지를 몰라요. 죄 값이 사망인 것을 몰라요. 로마서 3장~6장이야기를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 와서 욕심내지 맙시다. 내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다는 것, 그것 말고는 더 이상 욕심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언약의 원리원칙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죽는 이유를 알려줌으로써 주의 증인되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세상에 주눅 들지 않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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