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강-신 25장 11-12절(수치에 관한 법)1705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5장 11-12절입니다. 구약성경 300페이지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남편을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보지 말지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왠지 그냥 넘어가고 싶은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제가 상세하게 설명해야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음낭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근데 거룩한 책이잖아요. 거룩한 책. 음낭이라는 남성의 고환에 대한 표현이 왜 나왔느냐, 왜 당황스럽고 낯 뜨겁게 만드시느냐, 라고 하는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저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믿으면 거기에 간다. 얼마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입니까?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지 가봤나? 니 죽어봤나? 안 그러면 니가 장담 못하지? 그거는 옛날에 그런 소리가 있더라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지. 실제적으로 진짜 천국이 있고 진짜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롭게 되는지, 그거는 뭐 바쁘면 못하고 심심할 때면 말씀 지키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니야?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이 담긴 뜻,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만들어진 사람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이스라엘 사람 중에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한테는 음낭이 달린 것을 어떡하란 말입니까? 대롱대롱. 이게 말씀의 실제화에요. “하나님 믿고 천당 가는 것은 나중에 알아서 할게.”가 아닙니다. 천국은 말씀을 통해서 실제로 신체 자체를 구성을 했다 이 말이죠.
우리의 모든 신체나 신체 조직이나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생리현상 모든 것까지 말씀이 실제로 말씀이라는 것을, 실제로 천국이 있다는 것까지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에요. 여성의 하혈에 대해서, 월경에 대해서 성경이 설명하는 이유가 뭡니까? 뭐 청결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천국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천국 그것은 오늘 본문 끝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했어요. 서로 상대방 남편끼리 싸웠는데, 자기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금슬이 좋은 아내라, 위기에 처해있는 자기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저쪽 남편의 음낭을 의도적으로 딱 잡았을 때에 그걸 포착하거든 아예 그 아줌마의 손을 찍어버려라. 손을. 손을 찍어버리고 니 눈에 불쌍히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불쌍히 여김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이거는 딴 사람은 안 만났어요. 직접 만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직접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 너희들은 못 간다. 너희들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못 가는데, 단 내가 나서서 너희들에게 은혜를 주고 불쌍히 여겨주면 이 천국에 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뭔가 불쌍히 여길 만한 조건과 긍휼히 여길 만한 조건을 인간들 선에서는 찾지를 못해요.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따로. 따로 마련해놓고 너희들 하는 행세를 보니까 더럽고 이렇게 추하지만 내가 따로 마련한 긍휼과 은혜가 나오는 그 탱크, 그 탱크를 근거로 해서 너희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면 너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그 천국에,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 지금 율법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뭐 전설이나 만화나 동화나, 인간이 지어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그 긍휼하심과 긍휼하심을 입지 못하는 것, 긍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 긍휼하심을 입지 못하는가, 하는 예를 지금 음낭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본문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죠. 이게 자세히 주석이 되어야 됩니다.
자, 본문을 보면서 여기에 두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요. 두 남자가 아니고 두 사람이에요. 하여튼 아직까지 두 사람이 싸우는 거예요. 여자는 여기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싸울 때에 갑자기 여기에 뭐가 뛰어드느냐 하면 어떤 여인의 손이 뛰어듭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뛰어들어요. 그럼 이 싸움은 남자 대 남자,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거든요. 여자가 끼어들 입장이 아니라 이 말이죠. 남자 대 남자의 싸움이에요. 여자는 남자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싸움을 결정할 때에, 여성이 결정적으로 그 싸움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자의 승리로 끝나서는 안 돼요. 이 싸움이. 남자를 제치고 여자가 나서서 이 싸움을 끝내버리는 것은, 그것은 율법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싸움을 끝내는데, 끝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근데 지고 있는 남자 아내의 입장에서는 지금 뭐만 보이느냐 하면 율법이 생각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남편만 어떻게 안 다치고 구할 수 있다면 자기는 언제든지 여기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는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을 가릴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 남자를 치는데 가장 에너지가 적게 들면서 상대방의 남자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바로 그 상대방 남자의 고환을 잡든지 땡기든지 해서 쇼크를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공로자 아닙니까? 전쟁을 끝내는, 자기 남편을 다치지 않게 해주니 얼마나 사랑이 많은, 내조 잘하는, 멋진 내조거든요. 이런 내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상을 줘야 하는데, “니가 니 남편을 희생정신으로 지켰구나.”라고 하면서 상을 줘야 하는데, 뭣에 관심을 두느냐 하면 너는 그 여인의 손, 손을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보고 그 여인의 손이 어디에 접촉되었는가를 주시하라는 겁니다. 그 여인의 손이 어디에 접촉이 되어 있느냐 하면 상대방 남편의 은밀한 곳에 접촉이 된 거예요. 어떤 주석에 보면 되지도 않는 해석이 있어요. 남자의 약점이 거기에 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상대방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뭐 그렇게 하는데 음낭 잡았다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을까요? 그 주석을 보고 생각을 했어요. 그럼 하이힐가지고 고환을 치는 것도 범죄냐? 하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상대방 여성이 상대방 남자의 은밀한 곳,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잡았습니다. 그럼 이 대목을 보조적으로 설명하는 곳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레위기 18장 7절에 나옵니다. 레위기 18장 6절과 7절, 이 본문도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슬쩍 넘어가고 싶은 대목입니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하체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자, 이것은 지금 무엇을 지속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무엇을 지속시키느냐 하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주께서는 그냥 과거일로 넘기지 않고 계속해서 마지막 때까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끌고자 하는 겁니다. 그 취지를 살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 하나의 예가 창세기 2장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겁니다. 정상이에요. 벌거벗었다는 자체를 몰라요. 벌거벗었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뭔가 부끄러움이 왔을 때, 부끄러움과 동반해서 ‘아니, 내가 왜 부끄러워하지? 어? 벌거벗었잖아!’ 근데 전에는 벌거벗은 것이 정상이어서 움찔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벌거벗은 것이 수치가 되었다면 이미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을 가지고 이끌려고 한다면, 인간들에게 무슨 칩을 거기다가 집어넣어야 하냐면, “죄 지었다. 너는 정상이 아니야.”라는 요소를 그 신체 안에 집어넣어야 해요.
그래야 천국이 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이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 안 믿은 사람한테는 “니는 안 믿었으니까 봐줄게.”라는 것이 아니라, 믿든 안 믿는 모든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어떤 부분을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해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자기가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리비도libido, 그게 욕망인데 성기와 관련되어 있고 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유일하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목이 뭐냐, 하체를 가립니다. 제가 전에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부끄럽다고 이마를 가리고 발을 가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부끄럽다고 팔을 가리지 않잖아요. 왜 부끄러운데 하체를 가리느냐 이 말입니다. 왜 하필 그 장소냐, 그 지점이냐 이 말입니다. 왜 하필?
하나님의 복음을 실어 나르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실어 나를 때에, 인간의 신체 바깥에서 그냥 언어로, 문자로 소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니는 니 자신에 대해서 다 모르는 남아있는 부분이 있지?”하고 아예 지적해서 다가오는 거예요. 미지의 베일이 수치와 관련되어서 주어집니다.
그럼 용기 있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 해 입었다고 그걸 닦달내시니까, 그럼 차라리 나는 용기 있게 치마 안 입고 나체족으로 살겠다고 나오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는 니 수치를 모르는구나.”라고 이래 나와요. 그럼 어쩌라고?
“수치를 모르는구나.”라는 말을 딱 들으면, “너에게 수치 부분이 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 수치 있는 게 내가 비정상이니까, 그걸 정상으로 돌려버리면 수치를 수치로 안 느끼면 되잖아.’ 수치를 수치로 안 느끼면 된다고 하면 그럼 주님께서는 에스겔서에서 “니가 창녀같이 수치를 모른다.”라고 또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럼 어쩌라고? 그러면?
수치에 니가 종속돼라! 이 말입니다. 수치에! 니가 아무리 기고 날고 해도, 재벌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뭐 어떻고 저렇고 아무리 해도, 니는 알잖아. 니가 감추고 싶은 어떤 부분이 있다고. 그 말은 뭐냐, 사람이 아무리 난다고 칭찬을 해도 내 손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모든 인간이, 북한이고 남한이고 황인종이고 백인이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라면 그것이 다 거기에 담겨있어요. 그게 가지고 있다고요. 가지고 있어요.
그게 하체입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브레인, 두뇌가 아니에요. 두뇌 같으면 아이큐 가지고 자랑질 하겠죠. 하체 가지고는 자기 부끄러움을 드러낼 뿐이에요. 몰라, 뭐 하체가지고 크니, 작니, 하는 자랑도 있지만. 그러나 하체는 자랑거리가 아니고 부끄러운 요소에요. 그것은 감추기에 급급한 요소라고요. 감추기에 급급한 요소라 이 말이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치마를 벗겨버리고 그 자리에다 가죽옷을 입혀놨단 말이죠. 주석이나 해석을 보면 아주 이상하게 해놓았어요. “주님께서 인간이 치마를 입은 것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이렇게 가려줬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피를 흘려야 되니까, 예수 피로 그들을 가렸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가죽옷 입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니 선에서 수치를 본격화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선에서 이 수치를 본격화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더욱더 부끄러움으로 도드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 대목은 니가 어떻게 가리거나, 니가 나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렇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니 손으로 손댈 수 없는 그 부분은 이미 하나님이 그 지점을 접수했어요. 그 부분에서 자식들이 나옵니다. 육의 자식이 나와요. 육의 자식.
육의 자식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놓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이게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나 또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아비멜렉 그 집안의 여자들이 해산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아브라함이 딱 다가오니까 갑자기 태가 닫혔어요.
마치 물리학에서 자석이 옆에 있으면 가동이 안 되는 것처럼, 뭐 고장 난 것처럼, 갑자기 강한 전자석에 의해서 멈춰진 시계가 돌아가고 하는 것처럼, 뭔가 이상한 이물질이, 아브라함이 등장하니까 갑자기 태가 닫힌 겁니다. 범죄 하지도 안했어요. 범죄 할 뻔 했지. 범죄 할 뻔했는데, 범죄에 해당되는 벌을 받아버렸으니까.
이 말은 뭐냐, “니들은 범죄 하기 이전에, 범죄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니는 선지자 앞에서 죄인인 것이 처음부터 합당하다. 뭘 하든지 죄인이야.” 이런 뜻이라 이 말이죠. 태가 닫혔어요. 더 중요한 것은 태가 다시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가 기도하니까 태가 열린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자식 하나하나 생산할 때마다, 아이고 내 자식 내가 낳았다가 아닙니다. 주께서 그 자식을 그 가정에 주신 거예요. 왜냐하면 자식을 통해서 니가 죄인인 것을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자식을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 내가 죽을 죄인인 것을 징표로 준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6절에 보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게 모호한 것이 아니에요. 허황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뭐 내 말이 틀렸나?” 이런 뜻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니고데모가 말하기를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까, 니고데모의 발상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육 안의 발상이에요. 내가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육이 있는 한, 비정상인한, 어떤 식으로든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질문 자체가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할 때, 니는 니가 왜 못 간다는 것부터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마치 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런 질문을 해대느냐 이 말입니다. 못 가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육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육 자체가.
그러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면, 우리 같으면 “하늘나라 텅텅 비겠네요? 아무도 갈 수 없겠네요? 다 육이니까 못 가겠네요?”라고 하죠. 지퍼가 채워져 있잖아요. 지퍼 중간을 떼보세요. 안 떨어져요. 지퍼를 여는 방법은 지퍼 제일 위까지 올렸다 제일 밑에까지 내리면 지퍼가 열리잖아요. 육을 그대로 마지막 때까지 끌고 갑니다. 육의 마지막이 뭐냐 하면, 육의 마지막 정체를 가장 그대로 드러내는 지점이 십자가에요. “아, 육이니까 저주받는구나!”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게 되면 죄가 있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벌을 알리기 위해서 없는 죄도 새로 만들어져야 해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될 이유가 징벌, 심판, 예수님만이 심판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받아줘서 육이 되어야 돼요. 그 모든 스케줄이, 계획이 그렇게 돼야 돼요.
세상 끝이 마지막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이 아버지 앞에 설 순간이 마지막이에요. 아버지 앞에 설 때 그 육은 어떻게 되는가? 저주받았죠. 버림받았어요.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지금 우리 몸은 버림받는 거예요. 그 버림받는다는 것을 뭐 가봐야 알지? 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뭔가 수치스러운 것을 내장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것은 인간이 손대면 안 돼요. 그거는 주님이 손 댈 자리에요. 그게. 육이 육을 위해서 은밀한 곳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손을 찍어버려라.”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은밀한 것을, 주께서 다루어야 할 감추어진 비밀을, 베일을, 그 커튼을, 자기 남편 살리기 위해서 함부로 공개한 그 손길이, 그 손길이 바로 긍휼입지 못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이고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내 몸인데 뭐? 내 남편인데 뭐? 뭘 만져도 괜찮잖아?”
왜 상대방 여자가 남편을 때립니까? 그러면 이쪽 아줌마가 자기 남편을 때리니까 자기도 그쪽 남편 어깨를 쳤다. 그럼 그 손 잘라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발길로 막 찼다. “아저씨 우리 남편한데 그러면 안 되죠?” 막 발길로 찼다. 그러면 그 발 잘라야 돼요.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이 뜻이.
그 손을 지목해요. 손을. 음란, 은밀한 곳, 그것과 매치가 되어야 해요. 해석이 그렇게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남편이 아닌데 다른 남편 아내의 하체를 봤다. 이게 아까 레위기 18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체라는 것은 이미 한 몸이 되지 않는 한 하체를 볼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혹시 봤다면 결혼해야 되죠. 야동 봤다면 결혼 다 해야 해요.
이것을 신앙인은 아니지만 여기에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프로이트 라는 사람인데요. 뭐 프로이트나 프로이드나. 프로이드가 연구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인간의 정신은 정신이 스스로 해명하지를 못하고 한계를 나타내느냐, 하는 겁니다. A에서 B다. 그럼 A는 어디서 나왔는가? A이전에 나왔다. 그 A는 어디서 나왔는가? A이전 이전에 나왔다. 그럼 정신상태가 한계가 없는 이유가 뭐냐, 마음을 보니까 인간의 정신이 뽑아져 나온 지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알 수 없는 성적인 욕구, 그걸 리비도라고 해요. 욕망. 충동이라는 것. 그래서 충동이라는 것이 인간 내부에 작용하고 있는데, 그걸 설명하고 싶어서 하는데, 어설프게 다 설명 못하고 나온 게 뭐냐 하면 언어라는 것입니다.
언어가 나와 가지고 결국 무화과나무 잎을 입은 것처럼 어설프게 자기 수치를 가리는 식으로 언어가 사용이 되고 그렇게 사용된 언어는 결국 정신만은 괜찮다고 지 잘난체하는 외피로써, 하나의 감옥으로써, 핑계로써, 방패막이로써, 정신세계 학문에 열중하고 정신세계 인간의 문명을 이룬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문명을 이루어도 이게 꼴린 것은 꼴린 거란 말이죠. 프로이드가 그 이야기를 해요. 백날 나는 국회의원이고 뭐 트럼프고, 오바마고, 미국 대통령이고 한국 대통령이고 뭐 이렇게 해도 여자에 대한 성욕은 대통령 이름이라고 할지라도 멈출 수가 없어요. 왜? 그건 언어의 세계기 때문에. 문화의 세계기 때문에.
그래서 프로이드가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뜨개질한다는 것은 지금 참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라고. 바람피우는 것을 억지로 참기 위해서 뜨개질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걸 참아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정신병에 걸리는 거예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자기 자리를 갖고자 하는 것은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감추고 싶은 게.
자기 비정상이고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서 적절한 이세상의 사회적 좌표 x, y선 어떤 지점을 차지함으로써 내가 문명적으로, 문화적으로 획득한 내 권력, 내 지점, 근사한 것, 이것을 나로 봐주고. 내가 집구석에서 무슨 짓 하는 것은 좀 안 들은 걸로 해 도! 이 말입니다.
외무부 장관으로서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가 중요하지 위장전입, 증여세 안 낸 것이 뭐가 중요하냐 이 말입니다. 그거 세금내면 되지 뭐.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위장전입, 세금 안 낸 것이 뭐가 중요해요. 지금 나라가 엉망인데, 외무부 장관이고 국무총리가 누가 하든 해야지, 그걸 발목을 잡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국회의원 이런 것 안 봐줍니다. 국무부 장관이고 뭐 봐주지를 않아요.
하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에 대한 집념, 그 집념이 생식이에요. 내 새끼 많이 퍼트리고, 내 유전자 많이 퍼트리고, 내 DNA이 많이 퍼트리고. 여기에 온 나머지기, 그 은밀한 부분 말고 나머지기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정욕, 욕구, 욕망을 중심으로 해서 전부 다 연결돼서 돌아가는 겁니다.
옛날 조선시대 때 양반이나 선비들이나 지금 이슬람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슬람은 네 명까지 여자를 거느릴 수 있어요.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고 여자 네 명은 먹여 살릴 수 있으면 네 명까지는 봐준다. 필리핀의 대통령 두테르테는 말하기를 “저 IS공격할 때, 군인들한테는 세 명까지는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줄게.”라고 농담이라고 하지만, 프로이드에 의해서는 그 농담이 진담이라고 해요. “니가 원래부터 하고 싶은 것이 있었잖아? 처음부터 하고 싶은 것이 있지? 꾹 참았잖아? 근데 사회적으로 공로와 남에게 보탬을 줬으면 이 정도는 보상으로 눈 감아 줄게.”라는 식으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그러나 율법은 항상 예전으로 돌아가지를 않아요. 율법의 특징은 옛날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니 수치는 기어이 끝까지 까발리겠다는 것이 주님의 의지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은 내 자체가 육이고, 그러니까 나쁜 짓해서, 간음해서 나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구십까지 살면서 한 번도 바람피워 본 적도 없고, 한 번도 야한 동영상 본 적도 없고, 한 번도 어떤 여자나 남자를 보면서 음흉한 생각도 없이, 어떤 여자가 온다 싶으면 눈감고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쳐서 혹이 나고, 그렇게 살아가면 지옥 갑니다. 지옥가요.
왜냐하면 “니는 왜 니 수치를 모르고 살았느냐? 내가 이렇게 말씀 줬잖아. 니가 억지로 니 것도 아닌 몸을 가지고,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억지로 ‘음란하면 안 돼.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안 돼.’라고 니가 무슨 권리로 그걸 감출 수 있는 권한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죠.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주님의 이 모든 내용이, 천국이고 지옥이고 간에 이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으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 몸에서 이미 그런 요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요소가 나오는 것하고 천국과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니 주장이고, 뭐 관련성이 있어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율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율법가지고, 말씀가지고 들이대면, “아, 관련성이 있네.” 여자가 한 달 만에 월경하는 것도 이게 천국, 지옥의 존재와 관련성이 있는 이야기에요. 아들 놓으면 33일, 딸을 놓으면 66일 동안 그 경도가 더럽다는 그 이야기가, 남자 여자 모든 신체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 것이에요. 주님이 율법에 담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전부 다 그렇게 육이라는 표징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취지도 모르고 성경에서 뭐 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욕심내지 마라, 욕심이 죄를 잉태한다고 하니까, 욕심이 욕심을 억누르고, 억누르고 눌러봤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게 더 미워요. 그게 바리새인이 하는 짓거리고 한국교인들이 하는 짓거리가 바로 그거잖아요.
뭐를 하나님께 바칠 생각하지 마세요. 뭘 받았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성경해석은 딱 그거 하나입니다. 뭐 드리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하나님께 뭘 받았는가, 내가 육이고 육 안에서 십자가 끄집어내고, 십자가가 곧 영의 세계고, 생명의 세계고, 영생의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몸을 받았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나에게서 툭툭 터지는 모든 욕정과 욕망이 하나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복음과 관련성이 있도록, 그렇게 작용이 되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힌 것을 감사해야 돼요. 아까 낭독한 시편 126편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았고 웃음이 가득했다는 거예요. 잡혀가야 해요.
우리는 이 죄에,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자기 몸의 욕망에 사로잡혀야 돼요. 그 잡힘을 인정해야 됩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예배가 아니고 상한 심령인 것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험하라고 아직도 남은 인생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겁니다.
상대방의 남편의 음낭을 쥘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몸을 함부로 선한 쪽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있는 대로 털어 내놔야 합니다. 뭘 느끼느냐, “아, 이게 육이구나! 이게 어떻게 감출 수 없는 육이구나!” 남편이 싸운다는 그 우연한 사건, 그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에요.
우연한 사건 속에서, 평소에 그 아줌마가 남의 남자 고환 잡는 것이 취미가 아니잖아요. 오늘 두 명 잡았다, 세 명 잡았다, 그게 취미가 아니라고요. 이거는 저 남자 고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궁금한 것도 아니에요. 욕정, 욕망, 성욕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자기 남편 건지기 위해서 아무거나 뭐 잡히는 대로 잡다보니까 잡힌 거예요. “뭐 이런 게 다 있나?”하고 잡은 거예요. 확 잡아 땡기니까 어머나! 하고 기절했다 이 말이죠. 어떤 의도가 없어요. 그냥.
남편을 위해서한 것이지, 상대방 여자가 고환 잡는 것이 취미가 아니라 이 말이죠. 그냥 남편한테 하는 충성심 아닙니까? 그런데 손을 찍어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이것은 여자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던 거예요. 가룟 유다처럼.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에 있어서의 미제요소를 우리가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인간의 근본은 똑똑함이 아니고 지혜로움이 아니에요. 그거는 인공지능이 앞으로 대신할 거예요. 중국의 프로기사 다섯 명, 9단짜리거든요. 45단입니다. 45단이 인공지능하고 바둑 두어서 졌어요. 세계 일등 커제 9단은 지고 난 뒤에 막 울었어요. 인간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고.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자기가 기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인간이 창조자고 기계가 피조물인데, 이 피조물이 창조주를 가르치고 있는 시대. 세상은 퇴보하는 거예요. 점점 더 퇴보합니다. 이 퇴보하는 것에, 미리 앞당겨서 퇴보한다는 사실을 감 잡았다는 것에 우리는 주께 감사해야 됩니다.
젊을 때는 참아야 하느니라, 해서 은장도 가지고 허벅지 찌르고, “혹시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면 “안 됩니다. 나는 과부라서 안 됩니다.” 또 달이 떠야 해요. 달이 떠 있고 선비가 “하룻밤만 신세지고 가도 됩니까?” 할 때 “안 됩니다. 앞에 열녀문이 안 보입니까?”라고 백날 해도 그 남자가 가고 난 뒤에, 아이고,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그냥 우연을 필연으로 만나면 되는데..왜 나는 바보같이..그 선비가 딱 내 타입인데..또 언제 안 오는가 하면서 싸리문을 내다보고. “한 번 튕겨봤는데 그것도 모르고 눈치코치도 없는 인간아! 야속한 이 남자야!”
이거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심해져요. 이게. 나이가 들면. 그동안 단단한 양심이 얽히고설키어 있다가 느슨해지거든요. 다 느슨해져요. 욕도 안 하는 분이 이제는 욕도 막 하고 느슨해진다고요. 엉망진창이라고요. 엉망진창. 육이 누구나 가할 수밖에 없는 육입니다. 주께서는 빙그레 웃습니다. 그래서 바나나 우유가 거기서 나왔거든요. 빙그레 웃으면서 “알겠나? 니 꼬라지를? 뭘 다스려? 다스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수치스러움을 가지고, 도저히 이거 해결이 안 된다는 이걸 그대로 가지세요.
가지고, 욕망덩어리 죄 덩어리를 십자가 앞에 비칠 때에, 주께서 내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의도적으로 너 같은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너 안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더 이상 수치가 없느니라. 니가 그렇게 하나님의 운명처럼 짊어지고 가는 그 많은 수치가, 지금 천국에 왔다고 칩시다. 누가 와 있어요? 전부 다 “죄인입니다.”하는 사람이 와 있고,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하는 사람들만 와 있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저 지옥에 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몸을 봐서 실제적으로 주께서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그동안 몰랐습니까? 죄 짓는 내 몸, 욕망이 쏟아지는 내 몸이 천국의 증거물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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