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강-신 24장 16절(죄의 이전)1704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이 짧은 16절의 내용을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이 잘해서 구원받고 개인이 못해서 지옥 가는 그러한 원칙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유포되어 있죠.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보상을 획득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보다 더 착했으니까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인간은 요구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럼 그 사람에게 뭐 천국이고 뭐 구원이고 뭐 낫다는 것을 다 떼버리면 달랑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만 달랑 남습니다.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저 어떻게 좀 해주세요.”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근데 출애굽기 33장 19절 끝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한결같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게 여호와의 변치 않는 고집이죠. 니가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고 니가 지옥 보내 달라고 한다고 해서 지옥 보낼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지옥가려고 한다고 해서, “그래. 괘씸하네! 지옥 보내버려야지.”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그건 니가 거기에 대해서 입을 뗄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니 입장이.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개인적으로 뭘 잘못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태어난 것 자체가 징벌 속에 태어나는 겁니다. 산다는 것 자체, 고생한다는 것 자체가 이게 벌이에요. 형벌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게.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숨이나 한 번 쉬어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할 뿐인데, 그러나 그러한 시도에 못지않게, 그러한 노력 자체가 여전히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그래?” “제가요.” 또 자기 구원, 자기 평안, 자기 안정, 자기 무사, 자기 행복, 또 자기에게 쏠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시간요소를 빼버려요. 아버지가 먼저 있고, 아들이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이전되었으니까, 아버지가 죄 지었으면 그 자식도 매 한가지니까 죽여야 된다. 이런 원칙도 인정하지 않고, 또 아들이 잘못했으니까 죽여야 된다는 그러한 관계, 혈육적인 관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혈육이라고 해서 아버지하고 나하고 같이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너는 너다 이 말이죠. 너는 너고 아버지는 아버지다. 아버지가 죄 지은 것 니가 갚을 필요 없고, 니가 죄 지은 것 아버지가 대신 갚아주는 것도 형성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을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상황 속에다가 전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다 묶어버립니다. 예를 들면 계란이 있잖아요. 계란을 끓는 물에 넣으면 맛있는 식재료가 되죠. 삶은 달걀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달걀을 암탉이 품어버리면, 그 달걀은 날아가 버려요. 거기서 새로운 병아리가 되잖아요.
이처럼 인간이 하나의 계란이라면 환경이, 어떤 환경이 주어지냐에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거나, 안 그러면 자기 본래대로 삶은 달걀이 되어서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그 환경은 어디서 주어지는가, 그 환경은 장차오실 예수님 한 분에게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고, 그, 예수님의 구원이 파급이 되어 구원될 자들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에요. 그 여호와께서,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33장에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면, 그 여호와의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넣어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리시고 원치 않는 분을 살리지 않는 분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고 그게 바로 성경의 진수에요. 권한이 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넘어간 겁니다. 전에는 나에게 있었는데 예수님에게 넘어간 게 아니고 원래부터 우리에게는 권한이 없어요. 없는데 태어나면서 이상하게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마치 미래는 내가 결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에게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구원된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이 절 살렸잖아요.”라는 공통점이 나와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건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왜 자꾸 묻습니까? 이미 환경을, 내가 기대한 환경을 주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는 환경 속에, 그 치마폭에, 저를 사랑의 치마폭에 집어넣었잖아요. 아시면서 자꾸 물으시네. 아시면서. 주께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잖아요. 지금 나의 되어진 형편이 내가 원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잖아요.”라는 고백을 되받아서 예수님한테 고백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단일화되게 되면 여기서 죄라는 것이 새롭게 정립되는데, 그 죄가 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가 돼요. 여기서 논리적으로 굉장히 골치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이 죄인 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따먹기 전에는 죄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따먹기 전에는.
아담이 따먹기 전에 죄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아담 후손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럼 이건 무슨 의도가 있느냐 하면 “죄는 우리 조상 아담이 지었지, 내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지은 범죄인이 따로 있는데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어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움에 위배되는 겁니다.”라고 우리 인간들이 생각할 수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해서 처벌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어떤 짓을 해도 처벌대상이 된다면 이것이 우리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겁니다. 뭘 해도 벌을 받으니까. 이게 내일 전도서강의 할 때 하겠지만 전도서강의에 나와 있어요.
사람이 벌 안 받으려고 아무리 착하게 살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은 노력하나 안 하나 결국은 마지막에 똑같이 주어진다는 이 말입니다. 내가 벌 안 받기 위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단독적으로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이냐, 도대체 내가 놓여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기에 내가 노력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결국은 주님 마음대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세계가 되느냐,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과 관련된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에스겔서 18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절,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3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절,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이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이가 시다.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현재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고 아버지에 대해서 뭔가 잘못한 게 있어가지고 그 형벌이 계속 대대로 내려와서 우리가 힘들게 산다는 속담이 에스겔 당시에 유행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에스겔 당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해가지고, 징벌을 받아가지고,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혀가지고 거기에 동승해서, 에스겔도 같이 포로 잡혀서 포로생활하면서 계시하던 그 계시거든요. 근데 그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4절에 보면 모든 영혼은 다 내게 속했다.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이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영혼은 바로 여호와에게 속했다. 이래 되어 있어요. 여호와에게 속했다는 말을 신약적으로 말하게 되면, 모든 영혼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이 땅에 태어났어야 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러면 그 사실을 우리가 “예~예~예~믿습니다. 인정합니다. 잘하셨습니다.”라고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내 평소의 생활이 뭔가 달라져야 되고,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될 텐데, 이걸 아나, 모르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감흥이나 감동이나 변화가 주어지지 않다면,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우리가 지금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이건 마이크라고 뭔가 판단을 할 때, 이 마이크는 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여기 컵에 있는 물은 마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럼 주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로 하여금 마이크는 말하는 것이고, 물은 마시기 위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도록 만든 분은 누구냐? 라고 물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무리지음, 인간들의 공동체, 그 집단에서 자꾸 자기들이 빠지는 거예요. 이것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내가 고생한다. 이런 논리에서 어쨌든 간에 자기백성을 빼내가지고, 예수님 때문에 너가 그러한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새로운 환경 속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냥 옮겨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냥 옮겨가면 우리는 그냥 지식으로만 옮겨갔지, 실제로 우리가 변화된 모습은 못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나는 이것이 마이크고 이건 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누가 믿도록 했느냐?”라고 물어요. “그럼 우리는 빤한 거잖아요? 자꾸 빤한 것을 왜 물으십니까? 그거 뭐 답변하기 뭐하네요. 그건 누가 봐도 다 아는 거잖아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그러니까 니가 모든 의미의 출발점을 너 자신부터 출발한다.”라는 거예요.
만약에 모든 의미를 내 자신부터 출발하게 되면, 나는 마이크를 마이크로 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이게 부정이 안 돼버리면, 마이크를 마이크라고 하는 그것이 형벌 받는 그 형벌의 죄에서 빠져버립니다.
이 세상에 형벌 받는 것은 뭘 해도 죄가 되는데, 이상하게 죄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형벌을 하게 되면, ‘아, 이것까지 죄일까? 그럴 리가 없어. 이거는 정당해. 이거는 옳은 이야기야.’라고 자꾸 자기가 자신만만한 것, 자기가 확실히 안다는 그것만큼은 자꾸 따로 끌어 모으려고, 이거는 안 다치려고 이렇게 해요. “이거는 하나님마저도 벌주면 안 됩니다.”라고 자기 것을 자꾸 굳히게 돼요. 자기 것을 따로 만들게 돼요.
그럼 만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부터 예수님까지 오는 그 경로를 중간에 가로막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번 7월 말부터 여름수련회를 하는데요. 열왕기상을 할 거예요. 열왕기라고 하는 것은 죽 이어져가는 왕들의 이야기를 열왕기, 태정태세문단세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이어가는 거예요.
어떤 다리를 잇듯이 왕들이 이어져가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뭐냐, 예수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는 환경조성에, 그들 왕들이 멋도 모르고 살아가면서 계속 예수님 환경으로 점점 더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그 왕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그 말씀의 진척을 중간 중간 딱딱 끊어버려요. 칸막이 쳐가지고, 이 시대에 이스라엘의 왕은 나다! 칸막이를 쳐버립니다. 칸막이를 치면서 나타나는 본성이 있어요. 그 본성을 오늘날 우리의 본성이 똑 닮았어요.
예를 들면 르호보암 같은 경우에, 솔로몬 왕국이 끝나고 난 뒤에 그 거대한 왕국을 르호보암이 인수받습니다. 인수받고 난 뒤에 뭐라고 하냐 하면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면 좋겠느냐고 늙은 신하들에게 물어봐요. 조선시대 때하고 똑같이 나옵니다. 늙은 신하에게 물어보니까 신하가 하는 말이 “제 경험상 백성이 주인이기 때문에 왕은 백성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니까 젊은 르호보암 왕이 “알았어. 알았어. 가고 사흘 뒤에 내가 통고할게.”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지하고 똑같이 자라온 젊은 또래한테 “어떻게 하면 되느냐?”라고 물어보니까 “조져야 됩니다. 밟아야 됩니다. 왕이잖아요? 그야말로 신하의 목에다가 입만 열면 당신의 목은 달아난다는 팻말을 붙이든지 해서(연산군처럼 말이죠.), 하여튼 이건 독재 안 하면 백성들은 기어올라서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하니까, 어느 것이 마음에 들었느냐 하면 젊은 또래가 하는 말이 맘에 든 거예요.
왜 맘에 들었느냐 하면, 이거는 다윗 때도 마찬가지지만. 누가 나를 중심으로 이렇게 인정해주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하버지의 후광으로, 아버지의 잘 된 나라를 물려받았지, 라는 욕을 얻어먹기 싫은 거예요. 이 나라는 아버지가 어떻게 했든, 누가 어떻게 했든, 지금 이 나라는 내 나라입니다. 완전히 김정은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보다 내나라는 겁니다. 내 나라. 우리나라 대통령이 앞으로 누가 되든, 하여튼 박근혜하고 거리를 둘 거예요. 내 나라니까. 누가 뭐 욕을 해도, 거기에 누가 합세하느냐, 가족들이 합세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유리할 때, 자기가 잘 하고 있을 때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자기가 뭔가 하고 있을 때는 가족들이 와가지고, “아버지 최고입니다!” “여보 당신이 최고야!” 이렇게 으쌰으쌰 할 때는 ,본인들끼리는 그게 정당하고 죄가 안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저거 슬슬 자기나라로 만드네. 저거 한 번 뒤집어져야 되나?” 이렇게 표적이 되거든요.
그러한 성향을 모든 인간들이 똑같이 다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게 참 어려운 문제인데, 설명하기 곤란한데요. 아담이 범죄를 했잖아요. 아담이 범죄 해서 우리에게 죄가 왔다는 그 말은 잘못된 말이라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아담이 범죄 해서 그 죄가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만이 보여줄 그 죄를 아담이 미리 그것을 시범해보인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필히 그 후손들은 그 탓을 아버지 탓으로 돌린다고요. “저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이래 된다고요. 그런 변명들이 현실을 설명할 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이상하게 나는 왜 내 잘못도 아닌데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 이건 분명히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부모의 가난한 그 징벌을 억울하게 내가 물려받는다는 것은 도대체 용납이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빚진 것은 내가 갚을 필요가 없다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상당히 정당해보이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것이 주님에게 흘러가는 것을 도중에 차단하고 가로막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부터 출발하면 이렇게 됩니다. 설교 다시 할게요. 예수님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에 반대하는 것이 전부 다 뭐가 되느냐, 죄가 돼버려요. 예수님이 구원권을 갖고 있고, 아무리 구원해달라고 해도 예수님이 노NO하면 구원이 안 된다는 이 사실을 방해하고 이 사실을 거부하는 것은 전부 다 죄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죄가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겁니다. 다 죄가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결정해놓은 것에 대해서 동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동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몸뚱아리가 살아있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요. 그리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요.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이렇게 살면 돼요? 저렇게 살면 돼요? 목사님. 바르게 사는 방법 알려주세요. 그렇게 살 테니까.”라고 그렇게 나오거든요. “누가 그렇게 그런 마음이 들도록 했느냐? 누가 그렇게? 누가 너보고 착하게 살라고 누가 이야기하더냐?” 그럼 우리는 “착하게 사는 게 옳잖아요?” “글쎄. 그게 옳은 게 아니고 죄라니까.” “그럼 나쁘게 살까요?” “니는 원래부터 나빠!”
여기에 대해서 분노를 갖지 않을 수가 없어요. 분발과 분노가 있어요. 비록 조상은 죄를 졌지만 내 대에 와서는 바르게 해보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그게 숨겨진 나쁜 짓이에요. 숨겨진 나쁜 짓. 그게 숨겨진 나쁜 짓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죄의 징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럼 거기서 살 성도는 딱 하나만 알면 됩니다.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내 죄 때문에 벌 받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죄 때문에 벌 받는 것도 아니라면 그럼 이 죄는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만 알면 돼요. 그거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보류돼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보류돼요.
내가 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다 징벌을 받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징벌 받아 합당하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요. 왜?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고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복음이거든요. 이 복음을 가지고 주변에 있는 종교인들, 교회나 성당이나 불교 다니는 사람들하고 혹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이야기 한 번 해보세요.
이걸 명심하고 이야기해야 돼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긴다는 이것을 명심해야 돼요. 이것을 명심하지 않고 예수를 거론하고 십자가를 거론하면 그쪽에서 그걸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는다.
“그래. 나도 예수 믿는다.” 이래 버리면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니까요. “그래. 나는 죄인이야. 예수 믿어.” 이러면 복음을 못 전해요. 아니, 안다는데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안다는데? 십자가 피로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데 무슨 전도를 더 나가요? 그때는 한방 먹여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럼 그쪽에서 본색이 나와요. “그럼 나 어떻게 해서 구원받지?” “글쎄. 구원받겠다고 하는 게 죄인데요.”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도 죄고, 구원 안 받겠다고 하는 것도 죄고, 그럼 인간이 뭐야?” 이래 나오죠. 진즉에 듣고 싶은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는 거예요. “내가 뭐야? 인간이 뭐야? 이렇게 나올 때, 그냥 창세기 1장이 기본입니다.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종교인들끼리 대화하고, 뭐 기독교방송 듣고, 온갖 것을 이야기해도 이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이 이야기하면 기독교방송 무너집니다. 기독교방송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부산 역 앞에 할아버지 전도한다고, 더우면 더 좋아. 고난 받는 것이 돼요. 전도할 때 그 할아버지한테 “그게 죄입니다.”라고 해보세요. 그 사람이 할 말이 없어요.
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죄 지은 적이 없는데 형벌을 받는 것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김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도대체 인간 쪽에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겁니다.
기껏 하는 것이 “니 잘못 했나? 내가 니 자리에 있었으면 나도 잘못했을 테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우리 아버지가 잘못해서 내가 못했다.” “아니, 그러지 마라니까.” “내 보석금 댄다고 비싼 것 다 팔아가지고 내 죄 때문에 아버지가 다 갚았어.”그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 아버지 동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동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앞에서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 뭐,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 애 낳아가지고 같이 사니, 마니, 하여튼 아버지가 이상해. 안 웃는 것 보니까 드라마 안 보는 모양이라. 아버지가 이상해, 라는 드라마를.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바로 내가 뭣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까?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그 자체가 예수님만이 중심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 자체도 죄로 전환시킨 겁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김을 베푼다는 것이 될 때에 이걸 아는 고백은, 인간은 뭐냐 “인간은 예수님의 그 선택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겨난 결과물입니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줘야 두 시간, 세 시간 종교인들끼리 싸워도 그게 결론이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은 만들어진 겁니다.
에스겔이 하는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멸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상숭배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지만, 우상숭배를 믿어야 되고 그것 때문에 멸망해야 돼요. 그래야 이게 징검다리가 되어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대기하는 이스라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간단한데, 골치 아픈 게 없는데, 주께서는 건질 자는 건지고 버릴 자는 버리는, 이것이 너무나 간단한데. 그동안 우리는 왜 그렇게 거역했는지, 그걸 반발했는지, 우리가 무슨 마음으로 그것을 싫어했는지, 이제는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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