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32강-고아와 과부(신24;17-18) 1705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7. 18:44
2017-05-07 15:08:24조회 : 17         
   고아와 과부 17050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고아와 과부(신명기 2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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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5-07 16:01 

고아와 과부 

2017년 5월 7 일                  본문 말씀: 신명기 24:17-22 

(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24: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24: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24: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방식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대로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결코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 말씀 해석에 있어 시작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생이 오로지 자기만 위하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런 존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의문을 갖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동행한다면서 어떻게 살기 힘든 가정을 용납하느냐고 말입니다. 

지지리도 못사는 가정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을 얼마나 내면적으로 깊이 원망하겠습니까? 이러한 불평등을 야기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이 사람들은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가난한 자를 챙기라고 명령하기 보다는 직접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관여해주시기를 원할 겁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시편 94:6-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여기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야곱에서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등장하는 장소는 바로 고아와 과부의 틈 사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을게, 밤중에 귀신 나타나듯이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면 그러면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인정하고 믿을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모르는 바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골라 믿을 제 3의 위치에 있지 않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타남에는 사람들이 자기 고유의 자리에서 골라잡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세에 의해서 벌어진 결과 속에서 나타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타인에 대해 집적거리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잘남에 훼손되지 않는다고 장담하면서 말입니다. 즉 “나는 나의 행동에 문제없음을 장담한다”는 큰소리치는 마음과 더불어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로 건방짐에 의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는 형국을 유발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찾을 것이 아니라 본인의 그 정당성과 마주치는 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이것을 시편 94:7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는 식으로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나타내는 방식은 인간이 요청하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불공평성을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이는 가진 자나 가지지 않는 자나 모두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고아와 과부의 형편이란 더 이상 돈 벌릴만한 일가친척이 더는 없는 처지에 놓인 자들입니다. 의지하고 싶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는 사람은 곧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자를 뜻합니다. 

스스로 가진 것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겠습니까? 아쉬울 때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챙기고, 또 아쉬우면 기도해서 또 챙기고 하는 방식은 마태복음 6:7에 의하면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이미 다 간파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방인 기도가 아니라 참된 기도는 어떻게, 어떤 때 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열왕기하 19:14-16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의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즉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겁니다. 자신의 명예가 모독당하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자신의 욕망에 미흡하다고 여길 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나타남과 관련된 일에 기도하라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하루 밤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몰살했습니다. 사람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몰살당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자신의 명예와 약속하심에 대해서 추호의 사정도 봐주지 않습니다. 앗수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본인들도 놀라야 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힘으로 살려고 마음을 용납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고아와 과부와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주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원칙의 신약적 예는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제 3의 고립된 관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베푸는 여유로운 자나, 베품을 당하는 가난한 자나 모두 ‘갚음이 없다’는 원칙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당히 상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성도는 매일같이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아니된다는 원리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이 매일같이 상해야 마땅함을 수긍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그 어떤 인간에게는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의지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요한복음 2:24-25에 보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더라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심’은 인정하는 자가 곧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이는 이 시대의 고아와 과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쩔 수없는 사회 구조에 함몰되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자립하는 식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17-18절입니다. 구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골고루 살면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 발생되었습니다. 하나님 뭐하시냐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다 같은 사람인데 골고루 살게 해주고, 고아나 과부, 남편죽고 부모가 죽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은 왜 사전에 방비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그 능력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사람들이 그만큼 힘들어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어떤 가정을 파탄에 이르도록 만들고 힘들게 살게 그렇게 조치하느냐 하면 바로 그쪽에서 주님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쪽에서.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 혼자 살지, 주님을 온전하게 의지할 이유가 없어요. 가진 것 있겠다, 재산 있겠다, 건강하겠다, 무엇이 아쉬워서, 무엇이 답답해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냥 하나님과 사귀면 되고, 혹시 장래에 재수 없는 일이 생길까봐 미리 약간의 뇌물성 그런 모션을 취하면서, “봐 주이소. 이것 건드리면 안 됩니데이. 주님이라도 이것 건드리면 저 화낼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알아서 그만 좀 봐 주이소.” 완전히 이쯤 되면 김영란 법에 걸리거든요. 

  

왜 하나님께서는 힘들게 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의지하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더욱더 의지하라. 날이 갈수록. 그런데 사람의 성향은 어떠냐 하면 날이 갈수록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독립하려고 합니다. ‘언제쯤 되면 내가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아보느냐?’ 

  

근데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목사님은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좋게 여기는데, 제가 기도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거든요. 근데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주님 의지하는 것을 귀찮아했는가를 티를 다 내버렸어요. “제발 혼자 좀 사는 법을 알려 달라. 기도하지 말라고? 아이고, 잘 됐다. 기도 안 할게.” 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제가 기도이야기 나오면 아슬아슬해요. 기도가, 자기 아쉬울 때 기도를 해버리면, 이거는 무슨 말이냐 하면 아쉽지 않을 때는 기도를 건성으로 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건성으로. 뭐 습관이 됐으니까 하기는 하자. 그리고 또 앞일에, 장래에 좋은 일도 있으니까 예방을 위해서 하자. 예방책에서 기도하는 것이지, 답답해서 기도하지 않아요.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름이 모독 받을 때만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이나 모욕 받을 때. 그러나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자기가 모독이나 모욕 받을 때 기도하잖아요. 있는 재산 날아갔을 때, 가정이 어려울 때에, 남들이 수군수군 거릴 때에, 하나님 서럽다고 이래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게 되면 그렇지 않아요. 열왕기상 19장 4절에 보게 되면 히스기야가 언제 기도하느냐 하면 바로 앗수르의 랍사게 라는 장군이 와가지고 마구 히브리말로 욕을 합니다. “내가 열 개의 지역을 전부 다 점령했다. 그들도 다 니들처럼 각자 신을 다 믿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믿는 그 신과 그 종족들은 다 무너졌다. 이제는 열한 번째 너희들 차례야. 너희들이 뭐 쉽게 말해서 니 눈에는 저들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하나님만 보인다는 겁니다. 심지어 엘리사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게하시가 벌여호와를 믿고 여호와가 지켜준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가 나를 보냈다. 너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까붑니다. 까부는데, 거기에 대해서 히스기야의 대처는 놀라워요. 백성들에게 “아무소리도 하지마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도 아닌 것하고, 인간 근처도 안 간 것하고는 상대하지 말자는 거예요. 이 문제는 앗수르 하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하고 우리하고의 문제지, 저 매개체 되는 앗수르 하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믿음이 놀랍죠. 

  
쉽게 말해서 니 눈에는 저들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하나님만 보인다는 겁니다. 심지어 엘리사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게하시가 벌벌 떨면서  “아람군대가 포위했습니다. 우린 죽었습니다.”라고 해요.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주니까 저쪽에 있는 군사보다 우리 쪽에 있는 천사가 더 많아요. 천사의 숫자가 더 많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복음과 무관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하나님 저 빠집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세요.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세요. 하나님의 무슨 뜻으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물리치는 것도 이 성전,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의 무슨 조치가 있을 겁니다.”라고 기도했더니만, 밤에 185,000명이 다 죽었습니다. 몰살당했어요. 다 죽었어요. 

  

이것은 히스기야가 미리 예상 못했어요. 감히 생각도 못했습니다. 뭐, 나가면 우리가 들어가서 물리치는 그런 정도라고만 생각했지. 근데 손가락 까딱도 안 했어요. 저들이 죽는데 손도 안 댔어요. 그렇다면 이 사건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보낸 이유가 유대나라를 다루기 위해서, 한번 식겁하게 해서, 진짜 너희들이 누구 이름으로 살아가느냐를, 아니면 너희들 자신 때문에 존재하느냐를 한 번 시험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앗수르를 보낸 겁니다. 

  

니가 살아가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니 나름대로의 무슨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니 목적을 흐트러지게 할 어떤 계기가 있을 경우에 니 목적을 주님 목적으로 전환시키라는 겁니다. 주님의 목적이 뭐냐 하면 주님은 어디서 출현하는가, 나타나는가,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울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자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을게. 하나님이 어디 구름가운데라도 빼꼼히 얼굴이라도 내밀면 믿을게. 이렇게 나와요. 아니면 우리 가정에 새벽 2시 40분 되어서 나 하나님이다, 나 예수님이다, 하고 나타나면 그때 믿을게. 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나와요. 

  

이 사람들이 이러한 요구가 잘못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에 자기를 제 3자로 여긴다는 겁니다. 관찰의 자리, 뭘 관찰하고 주목하는 자리를 따로 마련하고 있는 이게 문제에요.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은 우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요. 거기에는 제 3의 자리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움직여요. 좋든 나쁘든 지옥가든 천국가든.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저기에 있는 주님을 믿었다가 아니라, 믿고 보니까 처음부터 내가 주님의 품 안에 있었다는 것을 바보같이 왜 이제 알았느냐? 이제? 이제 왜 알았어? 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인데, 이걸 왜 내가 몰랐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새삼스럽게 이만큼 했으니까 이만큼 내놔라가 아니라, 하나 안 하나 주께서 꾸준히 주셨습니다. 이게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주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태복음 기도제목에는 이방인들은 자기를 제 3자로, 관찰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기도해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해서 내 것 채우고 또 달라고 해서 또 내 것 채우고, 하는 그런 식이지만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다. 

  

주님은 뭐냐, 네게 뭐가 있어야 할 것을 미리 다 아시느니라. 이유가 뭐냐 이 세상에 하나님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슬그머니 앞장세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앞장세우는 그 자세가 뭐냐, 고아와 과부여야 돼요. 아무것도 나에게, 나를 의지할 수 있는 요소는 완전히 박탈되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고아와 과부. 손 내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런 상태. 그게 고아와 과부입니다.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려요. 

  

가족들이 있더라도 나이 들면 손자고 뭐고 다 귀찮아. 지금 손녀가 한돌 지나서 굉장히 이뻐 보여요.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점차 뭘 발견하느냐 하면 이 손녀가 전에는 어른들 의식해서 뭔가 애교떠는 모습을 의도해서 보였다면 지금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당신들이 나에게 애교를 원한다 할지라도 내가 꼭 애교를 피워야 할 권한을 당신들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로 나와요. “노래불러봐라.” “아니요.” “인사해봐.” “아니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을 때 합니다.” 이제는 슬슬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죠. 뽑아낼 게 없는데. 강력한 자의식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제는 재롱은 끝났어요. 옛날 것만 동영상 돌려서만 보면서 아, 옛날이여! 할 수밖에 없죠. 

  

고아와 과부라고 하면 이것이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주님께서는 점점 더 과부와 고아를 만들어버리는데 그건 뭐냐, 내가 그동안 의지했던 것, 믿던 것, 특히 남한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 이제는 시큰둥하게 맛이 가게 만들어요. 

  

자식 자랑 이렇게 하게 되면 처음에는 몇 번 참아줍니다. 이거는 같은 친구도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고마해라. 자랑 밑천이 그게 다이가? 뚝 떨어졌구나. 이제 없나?” 이래 돼요. 그건 뭐냐 하면 옛날에는 내가 잘났다는 자랑거리를 많이 확보했는데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게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그럼 지금 자랑할 것이 있느냐? 있어요. 뭘 자랑하느냐, 자기의 죄 지은 것을 자랑합니다. “내가 개척교회 두 군데 하는 죄를 지었어요. 미치겠어. 그런 큰 죄를 지었어. 선교사 한다고 파키스탄에 가서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한 그런 죄를 지었어.” 이런 것. 자가기 죄 지은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죄 지은 것. 

  

그렇게 죄 지은 것을 자랑하도록 하려면, 그게 바로 주님의 살아계심인데요. 주님의 살아계심이 함께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인데, 그 살아계심의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이 가까이, 가까이 접근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가까이 접근합니다. 이거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시편 94편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6절,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7절,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너희에게 고아와 과부가 있다는 것은, 여기서 약간 어려워지는데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고아와 과부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생산흐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산의 흐름에서, 경제의 흐름에서, 돈의 자본의 흐름에서 그들이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현대사회에서 자본의 흐름에서 소외됐다는 것은 돈 벌 수 있는 정보가 제때,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돈 벌 수 있는 정보가. 

  

만약에 아주 우직하게 가게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서 평생 가게만 하게 되면 시대에 뒤떨어져가지고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점점 더 남보다 생활수준이 격차가 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국민소득이 우리나라가 27,000불이라고 한다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지만, 그럼 27,000불이 되려면 27,000불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앞서가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프로선수하고 아마추어선수하고 마라톤을 할 때에, 아마추어끼리 하게 되면 거리가 차이가 얼마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트선수하고 하게 되면 차이가 확 많이 나요. 근데 평균으로 치면 자기는 27,000불이 안 되는데 그렇게 된대요. 평균으로 치니까. 그만큼 자기가 뒤떨어진 겁니다. 왜 뒤떨어졌을까요? 자기는 착실하게 시장통에서 살았는데. 

  

대구 옛날 미도극장, 신도극장 근처에 가보세요.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한 번 가보세요. 플랜카드에 뭐라고 있느냐 하면 “재래시장을 살려 도!” 경상도 말로. “재래시장을 살려 도! 남문시장 상인 일동.”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재래시장에 있는 사람들 정말 착실해요. 새벽부터 저녁까지 가만히 앉아서 장사했습니다. 표는 계속 새나라당 찍어주면서. 대구니까. 홍준표 찍어주니까. 문재인이 되면 개성공단 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하여튼 홍준표에요. 준표형을 계속 찍어주는데. 

  

그런데 장사가 안 돼요. 도대체 왜 이러나? 세상이라는 것은 자본의 흐름에 따라서 새롭게 장사가 잘 되는 구역들이 일 년, 일 년 사이에 계속해서 마련되는 거예요. 그걸 정보를 입수해서 뒤따라가야죠. 빨리 가게 팔 때 팔고 신도시 합류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뭐 배운 것이 없고 그냥 옛날 사람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다 보니까 어느새 선두하고 거리가 너무 많이 벌어져버린 거예요. 

  

이게 고아와 과부입니다. 세상사는 요령이 없어가지고 자기는 그냥 나름대로의 열심히 깨금발로 쫓아가는데 그 정보가 어두워서 못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신명기거거든요. 출애굽기란 말이죠. 그럼 이사야, 미가, 아모스, 호세아를 보면 선두하고 쭉 떨어졌어요. 이사야 4장이나 5장에 보면 배운 사람들은 어느 정도냐 하면, 이래 되어 있어요. 부동산 하는 사람들이 보면 놀랄 거예요.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8). 집장사하는 거예요.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땅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땅 투기, 부동산 투기가 이게 자본가만이 할 수가 있어요. 없는 사람은 못해요. 왜냐하면 신용이 있어야 돈을 빌려주고 빌려준 돈 갚고 나머지기 이윤 챙겨서 또 사업을 크게 확장하고. 

  

그런데 거기에 땅을 구입하고 가옥을 구입하는 대상자들이 누구냐 하면, 사회는 고정되어 있고 돈은 한쪽으로 몰려있으니까,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는데 돈이 없는 셈이 돼버려요. 돈 가치가 뚝 떨어지니까. 그러면 집도 팔아야 되고 논바닥 땅도 다 팔아야 돼요. 왜 팔아야 되는지를 몰라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몰라요. 그냥 착실하게 농사지었는데 나중에 값이 안 나와. 어디서 그렇게 됐는지 이유를 몰라요. 

  

이걸 선지자는 알아요. 가진 자가 정보에 어두운 사람들을 헐값에 넘겼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아모스, 호세아, 미가에서는 가진 자에 대해서 질타하는 겁니다. 근데 질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뭘 원하느냐 하면,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칙과 법칙을 놓친 이유를 부자들이 나오게 함으로써, 부자가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가운데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언약을 새롭게 더 키워나가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하죠. 쉽게 말하면 가난한 자는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무식한 자가 똑똑해져서 똑똑한 사람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무식하냐? 그러면 가난이 너의 역할이야. 배역이야.”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고난 받는 하나님의 상像이, 이 이스라엘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이거나 부한 자이거나 제 3자는 없어요. 제가 가락강의 공부를 하고 쉬는 시간에 봤는데, 그 근처 원불교 교당이 있어요. 표어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길게 붙어 있는 것은 “다 은혜다.” 이게 기독교 복음인가? 밑에 보니까 “사드반대”라고 있어요. 담당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제가 기웃거렸어요. 자, 그렇다면 사드가 배치된 것도 은혜 아니에요? 이렇게 묻고 싶은 거예요. 

  

다 은혜다, 라고 했으면서 사드배치 반대. 제 말은 다 은혜라고 했으면 사드반대 빼놓고는 다 은혜다. 이렇게 해야 맞다는 말입니다. 제 의견은. 근데 “다 은혜다” 해놓고는 “사드반대” 은혜라고 했으면서 사드배치에 왜 분노가 일어나느냐 하는 말입니다. 원불교 교단들이 성주에서 사드반대 하는 이유는 자기들 산책길 막는다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그 산책길 막으면 왜 안 되는데요? 산책길 막으면 명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아스팔트길을 걷지 말아야 돼요. 왜? 아스팔트길은 나라에서 세금내서 한 거예요. 아스팔트길을 걷지 말고 자갈길 걸으면서 묵상하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 됩니다. 세상은 남이 안 도와주면 절대로 못 살게 되어 있어요. 산속에 가서 자살하지 않고서는 남의 도움을 받고 살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게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살게 되어 있어요. 혼자 사는 법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혼자서 하나님 말씀 지킨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얽히고설키게 되어 있습니다. 자 얽히고설키는 것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구현하는가? 누가복음 14장 12절에 나옵니다. 참 이 대목을 심방 가서나 설교시간에 읽는 것 자체가 교인들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어요. 성경말씀에 있으니까. 

  

제가 읽습니다.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절,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절,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게 뭐냐 하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가지고 부한 자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고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에게 점심을 대접해버리면 그 대접받는 자리에서 얼마나 화를 내겠어요. “우리가 병신이가?” 이래 나와요. 

  

이게 부자를 화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화내게 만들어요. 이 말씀이 이렇게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지만 성경해석의 첫걸음이 뭐냐, “내가 이대로 살기 싫으면 어쩔래요?”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성경해석은 “주께서 말씀 주셨잖아요.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 성경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우리 본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속마음은 “안 지키겠다고 하면 어쩔래요? 내가 이 말씀을 안 지키겠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 건데요? 내 손모가지 꺾어버릴 거예요? 어디 꺾어봐! 꺾어봐!” 이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을 사랑한 자가 아니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자기가 신이에요. 신인데 마음씨 고와서 성경 봐주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근데 성경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부한 자들을 욕되게 하고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기 위함이 아니고, 갚을 것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남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갚을 것이 없다. 

  

그 대목을 한 번 보면,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차라리 갚을 것이 없다는 그 말이, “당신은 나에게 안 갚아도 돼요.”라는 말이 이게 그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그 사람의 자존심을. 인간은 자존감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왜? 천상천하유아독존이기 때문에. 못 살아도 누가 못 산다고 하면 기분나빠하는 거예요. 

  

“아이고, 당신은 나한테 안 갚아도 돼요. 당신 처지에 나한테 갚을 것이 뭐 있겠어?” 이거는 모독 중에 모독이고 모욕이에요. “당신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이래 된다니까요. 신약 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가 자존감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아와 과부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는가? 많이 가지고,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갚을 것이 없이 주께서 그냥 일방적으로 내 집에 들여놓은 거예요. 그냥 들여놓은 거예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가옥에 가옥을 더하든지 전토에 전토를 더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다시 말해서 갚을 것이 없는 이 불쌍한 존재, 이 병신 같은 존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라니까요. 이것이 언약을 둘둘 감고 있는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입니다. 해석 정말 제대로 해야 돼요. 고아와 과부를 의도적으로 유발시켜놓고,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뭔가 딴 일이 있어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평등하게, 골고루, 충분히 살 수도 있는데 일부러 고아와 과부를 하는 것은 그쪽 속에서 진짜 하나님이 나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그 나오신 분이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믿는다고 하는 그런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아버지만 의지해.” 그러니까 


진짜 고아와 과부는 자존감이 없어요. 

그냥 아버지만 의지하는데, 

이 땅의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감이 하늘을 찌릅니다. 

“니가 없다고 개무시 하는 거야? 니가 좀 있다고 그래?” 

이래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낮아지심, 십자가에서 낮아짐이어야 하느냐 하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그렇게 하도록 주께서 유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안 되죠. 

  

집에 뭐 하나 없어지면 뭐 난리가 나죠. 기도가 부족했나, 헌금을 적게 했나, 헌금 안 했다고 삐져가지고 아이고 쩨쩨하기도 하지. 헌금 좀 안 했다고 그걸 가져가나? 온갖 생각하다가, 가만히 있어보자 주께서 아버지만 의지했잖아. 그럼 나는? 나도 주님만 의지한다면 주시든지 가져가시든지 마음대로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 땅에서 진짜 병신들이고, 가난한 자들이고, 저는 자들이고, 소경된 자들이에요. 바라기는 평균소득이 27,000불이 아니고 한 25억씩 갖고 있는 병신들이고 가난한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우리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오직 아버지만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언제쯤 주님만 의지하겠습니까? 사건을 일으키고 사태를 일으켜서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다 주께서 주셨고 가져가도 무관하고, 그 일을 하는 모습이 주의 증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