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강-신 24장 8-9절(문둥병에 대해서)1704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너는 문둥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행하되 곧 내가 그들에게 명한 대로 너희는 주의하여 행하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문둥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둥병을 저주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는 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 자체가 축복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했는데 문둥병이 발생되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에 문둥병이 발생된 것을 제대로 해석해야 됩니다.
잘못 해석한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우리는 복 받은 나라인데, 재수 없게 문둥병이 걸렸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이건 틀린 해석입니다.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복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문둥병이 나오기 전까지의 우리의 선입견이었고, 우리는 자동적으로 복 받은 민족인줄 알았었는데, 우리가 기피하는 문둥병 환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아, 이참에 우리가 복이 뭔지를 수정해야 될 찬스가 왔다,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부여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사실은 사람들은 뭔가 과거의 관념을 하나 쥐고 있으면 그것에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자기가 합격된 사람이라고 자꾸 우기는 버릇이 있어요. 그렇게 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돼버리면 천국이 자기 나라가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연발성, 계속해서 연발, 연발로 건져내기 위해서는 니가 알고 있는 그 구원이라는 개념은 벌써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주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개념을 마련하게 됩니다.
딱 마련하게 되면 내가 예상 못한 기준에 비해서 나는 구원받았다, 복 받았다, 하는 이것도 아, 죄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 같이 복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일체 저주받은 흔적이 없어야 우리 논리에 맞는데, 거기에 불쑥 저주받은 문둥병 환자가 발생되었다, 할 때 사람들은 제일 먼저 가지는 선입견은 뭐냐, “우리 대다수는 복을 받았는데 저 사람이 나쁜 짓해가지고 문둥병에 걸렸구나. 재수 없다. 저 사람 내쫓아!”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 기준이 잘못된 기준이라는 말이죠. 반대로 뒤집어야 돼요. 저 저주받았다는 자가 새롭게 하나님의 고침을 받게 돼버리면 이전의 대다수가 몰랐던 새로운 축복의 개념을 저 문둥병자 혼자 독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문둥병자가 다시 원상복귀 되어서 하나님의 진 안으로 들어오는 그 과정이 바로 제사장 위임식 할 때 하는 그 과정과 똑같아요. 한 가지 빼놓고 똑같습니다.
근데 그 말을 제가 왜 하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데 그 통로가 뭐냐 우리 가운데 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복 받았다, 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런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체제를, 그 시스템을 뜯어고치기 위해서 그들이 싫어하는 문둥병 환자를 발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있음으로 복 받은 거냐, 아니면 저주의 흔적이 발생됨으로 복 받은 거냐를 다시 한 번 니가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재수 없다, 니는 우리 집안사람 아니다, 아이구 니랑 같이 있으면 나까지 전염되어서 오해받겠다, 저리 꺼져라! 그렇게 내침받은 쪽이 하나님의 새로운 작업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복 받을 민족에서 필히 일어나야 될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저주가 없는 곳에는 복이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저주가 없는 곳에는 복이 없어요. 저주가 있어야 복이 있는데, 저주받은 애굽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한 번 복은 영원한 복이라고 해서 쥐고 있으면 어느새 그게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들이 돼버립니다. 제가 오늘 아침 설교에서 악마 사람에 대해서 했죠. 악마가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는 뭘 공격하느냐 하면, 자기 사람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아요. 뭘 공격하느냐 하면 약속을 공격합니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대로 믿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고 보호해주고 지켜줍니다. 그게 행복이라고 했죠. <양화대교>라는 자이언티가 부른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가사에 보면 아버지가 택시드라이버에요. 아들이 만날 전화해서 “아버지 지금 어딘데?”하면 “양화대교” “아버지 지금 어딘데?” “양화대교” 아버지는 양화대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며 자식을 키운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 자식이 아버지한테 기원하고 기도하는 내용은 이겁니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우리 행복하자.”
그럴 때 놓치는 것이 있어요. 행복할만하니까 행복을 달라고 할 경우가 태반인데, 만약에 문둥병 환자라면 행복하자는 소리가 안 나오겠죠. “주님이여, 제가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이래되겠죠. 그 점이 문둥병 환자 쪽이 오히려 하나님의 숨어있는, 은밀한 진정한 영생과 축복이 있는 겁니다. 이 원칙은 사실은 이스라엘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 4절에서 6절에 보게 되면,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만들기 전에, 모세가 애굽에 쳐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일대일로 만나서 미리 일어날 일을 주는데, 세 가지의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그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지팡이와 그리고 그 지팡이를 잡은 모세의 손, 손과 지팡이의 관계가 기적을 얻고, 기적이라고 해서 그걸 지정해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기적이란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기적이에요.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일을 꾸리고 있다. 약속대로, 언약대로, 이 성경말씀대로 잘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합력하여 모든 것이 적합하게 선을 이룬다는 것을, 이게 느껴지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기적의 사람입니다.
기적의 사람이라는 것은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해서 쓰여 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종으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 2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뭐가 있느냐 하면 손과 지팡이를 주목하라고 했죠.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손에 쥐었습니다. 현재 뭘 지고 있느냐 하면 모세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를 던지니까 지팡이가 땅에서 뭐가 되었느냐 하면 뱀이 되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이적이에요. 세 가지 이적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 이적이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뱀을 다시 집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겁이 나죠. 그러니 이게 모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직도 모자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모세는 처음부터 뱀을 쥐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뱀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모세가 뱀을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가 뱀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저도 뱀 싫어해요. 비록 뱀띠지만 뱀 싫어해요. 하지만 이거는 모세가 싫다, 좋다 할 그런 잽이 못 됩니다.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이스라엘 나라는 모세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그러면 모세는 자기 원수가 아닌 자와 원수가 되어서 싸워야 돼요. 그럼 누구의 원수냐? 애굽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 위대한 직분을 우리가 성령으로 받은 거예요. 내 원수가 아니고, 내가 젊을 때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이 아닙니다. 젊을 때 일해가지고 돈 모아놓았는데, 세상에 집 잘못 얻어가지고 돈 날리는 사기당한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그 사람 만나면 돈 받고 싶어요. 전셋값 몽땅 날렸는데.
사람의 원수라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해코지 한 사람을 원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한테 잘해주면 이거는 천사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바로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교회에 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나의 원수는 없고 주님의 원수만 있는 종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모세가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건들대면서 애굽에 내려가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 니부터 정신 차리라고 기적으로 바꾸어 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은 너는 착하니까 적들은 물리치라는 이게 아니고 너도 문제라는 겁니다. “너도 문제야. 너도. 니가 문제야. 니가 내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니는 모르고 있잖아?” 그렇다면 너는 너의 원수만 상대하려고 하지 진짜 숨어있는 나의 원수를 상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싫든 좋든 이제는 지팡이, 곧 뱀과 관련된 전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였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또 손에 관련된 겁니다. 손인데, 6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습니다. 멀쩡한 손이죠. 그리고 멀쩡한 몸입니다. 멀쩡한 몸에 멀쩡한 손을 넣으라고, 이거는 손을 품에 넣으나 안 넣으나 나라는 몸통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거는 넣으나 안 넣으나 한 통에 달려있기 때문에 멀쩡하면 품에 넣어도 멀쩡한 것이 마땅하거든요.
그런데 바깥에 나와 있어도 멀쩡하고 품에 넣어도 멀쩡하다는 생각은 모세가 지금 자기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멀쩡한 손이 보이네. 멀쩡한 손이 품에 들어가도 멀쩡한 손이겠지.” 근데 품에 넣었습니다.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뭐 꺼내보나마나 했는데 꺼내니까 문둥병 손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원수와 전쟁하는 그 전리품으로, 원래 문둥병 환자로 저주받아야 될 아담의 자손이 그 전쟁에 참여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너희들에게만 그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그 기적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고 나를 소유하신 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기적이에요. 내가 예수님을 소유해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도대체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십니까? 라는 그 경과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세 번째 기적은 뭐냐 하면 이 두 가지를 그들이 이해 못할 때는 물을 좀 떠서 육지에 부으면 그 물이 피가 된다는 것. 이 말은 앞으로 육지에서 피를 보는 사태가 일어났거든 모세의 하나님이 일으킨 줄 알아라. 이것들아! 너희들 눈에는 모세라는 할아버지가 등장한 줄로 보이지? 하지만 모세의 등장이 아니라 여호와의 등장이다. 원수 빨리 나와! 이렇게 뱀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에 모세가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바닥에, 이 기적은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애굽에서 나오는 걸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밑바닥에 쫙 깔려버려요. 깔리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가져서는 안 돼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져야 그게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차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구원이라 말이죠. 이게 바뀌어져야 돼요.
그것을 위해서 이 사건이 이스라엘의 그 바닥을 유지하는 반복적인 사건으로 딱 깔려져있어야 돼요. 그 깔리고 난 뒤에 드디어 오늘 신명기 본문을 한 번 보게 되면 문둥병 환자에게 주어진 율법에 대해서 지키라는 것이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문둥병 환자에게 지키라는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그 전에, 오늘 신명기 본문 이전에 특별히 문둥병에 대해서 그걸 겨냥해서 율법이 주어진 적이 있어요.
그게 레위기 13장과 14장입니다. 그러면 레위기 14장에 보게 되면 문둥병 환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반복적인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둥병 환자가 생기면 일단은 문둥병 환자를 그 진 밖으로 내보내야 됩니다. 성막에서 진 밖으로 약 7킬로미터쯤 돼요. 7킬로미터 진 밖으로 내보냅니다. 약 20리가 안 돼요. 여기서 대공원쯤 되죠. 이렇게 딱 내놓습니다.
내놓게 되면 백성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아, 역시 하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착했으면 문둥병에 안 걸리게 하시고 저 인간은 마음 씀씀이가 악해서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구나. 아이구, 다행이다.”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나님. 우리 가정과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문둥병을 보면서, 저주받은 표상을 보면서 “나는 저주 안 받았다. 헤헤헤!”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그 땅이 뭐냐 저주 안 받았으니까 자기가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고, 문둥병 환자가 나온 속된 땅은 더러운 땅이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착각입니다. 사람은 본인이 터 잡고 살게 되면 그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특정장소로 고정된다고 생각해요. 그 거룩이란 장소가 사건화 되지 않고 존재적으로 고정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룩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은 문둥병 환자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이 나으면서 이동경로를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이동경로를 보이면서 나타나는 그 사건 속에 새롭게 구성된 거룩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새롭게 구성된 거룩이. 그런데 이동경로는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1단계는 관찰하는 겁니다. 관찰을 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을 낫게 했는가 안 했는가를 관찰해가지고, 이거는 사람 손으로 못 고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병들게 하고 병 낫게 하는 겁니다. 모세가 손을 품에 넣으니까 문둥병 환자가 됐죠. 그러면 모세는 문둥병 환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넣으라고 했죠. 다시 넣으니까 멀쩡하게 되었어요. 그 문둥병 손이 다시 넣어서 다시 뺄 때 멀쩡한 것이 약 3초였다면, 그 3초의 기간을 길게 늘인 것이 바로 문둥병환자 발생사건입니다.
그렇게 늘림으로써 무엇이 거기서 돋보이게 되느냐 하면 1단계, 2단계, 3단계에 투입된 율법이 함유하고 있는, 지니고 있는 그 의미가 문둥병 환자가 소위 더럽다고 하는 곳에서 깨끗한 사람만 사는 곳으로, 다시 마을로, 진 안으로 들어오면서 어떤 율법이 거기에 추가적으로 가미되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문둥병 환자를 낫게 했고, 그런데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기적으로 병 나았네. 그럼 병 나았겠지.” 이래 되는데 그 기적으로 병 나았다는 그 근거가 율법적으로 근거를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기적적으로 병 나은 근거를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펼쳐보는 겁니다. 돌아오는 과정을. 1단계 투입된 율법, 2단계에 투입된 율법, 3단계에 투입된 율법.
이거는 마치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의 피로 우리 죄는 없어집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신났어요. 우리 교인들. 신난 거예요. 문제는 왜? Why? 우리가 죄 지었으면 벌 받는 것이 응당 당연한데, 왜 죄는 우리가 졌는데 왜 벌은 안 받아야 합니까? 헤헤거릴 문제가 아니고, 좋다고 할 문제가 아니고, 왜 그래야 됩니까? 니가 살아가면서, 성경말씀에 준해서 살게 하면서, 성경말씀의 위반사례를 너의 평생 동안 다 노출해보일 거라는 겁니다.
어떤 할머니는, 우리나라 최고령인데, 나이가 117세에요. 117세. 아휴! 본인부터 가족들이 죽어났어요. 117세. 60세 살았으면 반이 약간 넘었어요. 88세 사셨다고요? 지금 30년 남았습니다. 아이구, 시어머니요? 세상에! 88세 된 며느리가 100세 된 시어머니 봉양하다가 자기도 암 걸려버렸어요. 이거 어떡하지? 이럴 때는 어떡하지? 하고 있어요.
평생을 살면서 사는 것이 벌 받는 겁니다. 적당하게 갈 때 가야지, 뭐 호스 여기 꽂고 저기 꽂고, 확 떼고 싶어요. 뒤늦게 효도한답시고, 지 돈 아니니까 형제 돈으로 지가 효도 혼자 다 하고 있어요. 죽고 난 뒤에 3년 상喪 치르지 와? 그저 좀 돌아가실 성 싶으면 “주여, 주를 찬양합니다. 이제 종을 좀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이래 나와야 돼요. 그저 되도 않는 효심 보인다고 있는 돈 다 날리지 말고. 늘 살펴야 돼요. 오늘 가시려나? 본인의 고생이거든요.
그 1단계 율법이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제사장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가 필요합니다. 새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흐르는 물과 함께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죽은 새의 피를 찍어 그 피를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살아 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 보냅니다. 피 찍어 바른 새는 다시 제물이 되지 못하고, 제물이 된 새와 달리 혜택을 입고, 효과를 얻어 창공을 향하여 날아가 버립니다.
이 율법은 이미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린 적이 있었어요. 옛날에 문둥병이었는데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문둥병이 없어졌어요. 그냥 운이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끼어들었답니다. 그 자비가 문둥병 환자가 대표자에요. 집단적 표상이죠.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은 문둥병 환자이어야 되는데, 너희들 가운데 있는 대제사장을 하나님이 친히 세우셔서 제사장이 치르는 그 제사의 효과를 너희들이 톡톡히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문둥병 환자가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2단계에서는 필요한 것이 제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직 진 안에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동안, 7일 동안 문둥병자 되었던 그 사람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일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3단계에서는 제물로서 어린 수양과 1년 된 어린 암양과 고운 밀가루와 기름 섞인 소제물과 기름입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기 8장에 나오는 아론의 대제사장 위임식과 아들에게 행하는 행사와 유사합니다. 어린 수양을 속죄제로 드리면서 피를 받아내어서 제사장이 문둥병 들린 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기름을 가지고 문둥병 들렸던 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편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런데 문둥병은 피 위에 기름을 바르게 되어 있고, 레위기 8장에 보면 제사장은 기름 위에 피를 바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곧 피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써, 기름 위에 피 바르는 대제사장 위임식에 시행한 속죄 제사의 절차와 대조가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지속적인 저주의 표상이 발생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둥병의 효과는 피의 효과로써 기름 발랐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니가 문둥병이 걸렸다는 그 신세타령하지 말고, 너는 피를 위해서 문둥병이 걸리는 배역이 다른 사람한테 안 가고 너한테 갔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배역 맡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맡은 배역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맡은 배역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영생 얻게 하시는 식으로 하루하루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그거는 피 위에서 성령의 기름 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입니다. 성도에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성령이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어디 위에? 화목제물위에. 화목제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수지간 된 관계를 청산하자는 거예요. 이제는 좋은 관계로 바뀌었다는 거거든요. 이 말은 원수지간이었는데 피 때문에 좋은 관계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이렇게 다 깔려있습니다.
이 문둥병이 주어지는 이 법은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산상수훈이 끝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문둥병 환자입니다. 산상수훈이라는 엄청난 율법을 줄 때 사람들은 놀랬어요. “저거 어느 인간이 지키느냐? 어느 인간이 어느 세월에 다 지켜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느냐?” 심지어 내 말과 내 뜻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거는 아주 무너진다고 했으니까 큰일 났어요. 산상설교도 다 지켜야 돼요.
그런데 끝나자마자 문둥병 환자가 나왔는데 문둥병 환자에게 그냥 주님께서 낫게 해줘버렸어요. 그럼 법은 줘놓고 공짜로 낫게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못 지킬, 지킬 수 없는 그 법,
하지만 법이 주어져야 죄는 발생되고, 하지만 그걸 지킬 수 없도록 죄는 더욱더 깊어지고, 그 죄를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대신 지는 겁니다.
법주고 죄 발생시키고, 발생된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가져가시고, 그리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게 바로 기쁜 소식이고, 그걸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배역을 맡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남은 평생은 117세까지, 아이고, 제가 말실수했는데, 하여튼 100세든 언제까지든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그 역할을 맡는 겁니다. 아, 우리는 어느 것 하나도 용서 없이는 안 되는 일, 문둥병 돼야 마땅한 그런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이런 것을 실제로 적용시킬 때, 참 이런 말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아는데 실제로 나가게 되면, 실천에 옮기게 되면 굉장히 예민한 일이 많아요. 그 예민한 일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미리암에게 행한 일이 뭐냐 하면 미리암이 모세의 누나인데, 미리암이 얼마나 모세에게 잘해줬는지,
모세가 죽을 뻔 했어요. 이 누나가 바로의 공주에게 “혹시 유모 구하십니까?” 이런 말을 안 했으면 모세는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어요. 누나가 자기 남동생 모세를 지켜봤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완전히 비선실세 아닙니까? 모세의 비선실세에요. 그 위대한 지도자, 영도자를 자기가 살렸으니까. 얼마나 위선을 떨겠습니까?
그러나 미리암과 모세의 차이는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품에 손을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도자 모세의 누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문둥병 환자라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이 누나는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니들 내 동생 모세 아니었으면 니들 다 죽었어!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데?” 이런 것이 평소에 있었던 겁니다. 수렴청정 하는 것도 아니고 민정왕후도 아니고 이거 뭐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작전을 잘 꾸몄죠. 모세로 하여금 장가를 들게 하는데 구스 여인, 흑인여인과 좋아해가지고 결혼을 딱 하게 하니까, 누나가, 시누이가 강력한 반대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뼈대 있는 집안인데, 어디서 못 배워먹은 것이!”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못 배워먹은 것이 감히 우리 뼈대 있는 집안을 넘봐? 봉투에 섭섭지 않게 넣었으니까 유학이나 갔다 와! 애는 지우고.” “저는 오빠를 사랑합니다.”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랑은 도파민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 3년만 지나면 다 없어져. 그냥 정으로 사는 거야.” 뭐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에 걸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모세와 미리암의 차이점을 온 백성이 다 보게 해요. 보게 해서 온 집안에 우사스럽게 만들어버려요. 모세도 잘난 것 없는데 다만 모세는 온유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보다 온유하다는 말은 요새 말로 하면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볼 줄 안다는 말입니다.
이 이스라엘은 모세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목사가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목사는 단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한다고요. 목사가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면 안 돼요. 주님을 가릴 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문둥병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외형적으로 보게 되면 마치 모세가 지혜가 많아서, 똑똑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일반교인들이 돈 내서 교회 지으면 이거는 절에서 보살이 돈 내서 주지스님이 모시는 것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교회가 그렇고.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면 문둥병 환자 10명이 나옵니다. 열 명이 나오는데, 주님께서 단체로 열 명을 다 문둥병을 낫게 했어요. 아홉 명은 신났지. 신났어. 원래 노리는 자기의 소망, 그 소망을 예수라는 분이 고쳐줬으니까 이제 자기 볼 일은 다 본 거예요. 자기 소망을 달성했으니까.
이런 현상이 교회에서도 지금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처음 나올 때는 11시 예배인데 10시 30분에 나와요. 제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11시 05분에 오고, 이제 언제 오는지 한 번 보자. 3주도 안 지나서 11시 05분에 나와요. 처음에 올 때는 양복 가다마 입고 오거든요. 근데, 이제 한 번 보자. 언제 등산복 입고 오는지. 한 달 쯤 되면 등산복 입고 와요. 그걸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아니고, 왜냐하면 모방이거든요. 보니 다들 그런 것 같은데......,
여기에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드니까 처음 예수님을 원했던 것보다 예수님이 별로 안 귀해요. 귀하지 않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가 귀했는가 하면 본인이 귀했던 거예요. 본인이 문둥병 걸려서 우사스러웠는데 그 수치를 약간 풀어주게 되면, “제가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 제가 헌금은 해드릴게요.”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딱 한 명, 그것도 이방인 문둥병자는 “주여, 이럴 필요까지 없는데, 우리를 낫게 할 필요 없는데요? 제가 병 낫는다는 것은 너무 과분한 사랑이십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왜 이렇게 한 명이 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에요. 이 땅에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세부터 구약 때까지 문둥병이 저주받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문둥병이 나아서 다른 사람과 같은 정상인으로 행세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 행세가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가리게 만드는 그런 일이 돼버려요. 그래서 기도가 위험한 것이 기도가 달성되게 되면 자기가 뭐 잘나서, 믿음이 좋아서 기도가 응답된 줄로 아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교인들은 아주 응답이 잘 돼요. 아무도 응답이 안 되니까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거예요.
기도의 응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뭘 달라, 이걸 달라, 저걸 달라고 할 잽이 못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거예요. 그거 기도 나오기까지 주께서는 답답해서 기도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사태들을 우발적으로 우리에게 발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연발성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게 기도하게 하시는데, 그 기도가 유명한 나훈아가 이야기한 무시로 기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시로 주께서 일하시기에 날마다 우리가 답답해서, 급해서, 아찔해서, 초조해서, 기도부터 먼저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문둥병 환자가 됨이 마땅함을 아는 그런 구원받은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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