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강-신 24장 10-13절(채권자의 한계)1704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10-13절입니다. 구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에 보게 되면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 대해서 율법으로 이렇게 연결시켜놓았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가 되는데, 근데 배역을 한 번 맡았다고 칩시다.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의 역할을 맡았고, 저 사람은 사정이 어려운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내가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이것은 여기서 생각지 못하죠. 역할이 그러하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니가 잘했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둘이 만나서 역할극을 해놓고 그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율법의 정신이 제대로 발휘되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역할을 하려면 부자역할을 했다고 가난한 역할을 한 사람이 부러워해서는 안 되고, 부자역할 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역할을 한 사람을 보고 참 천하게 봐서도 안 돼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우선하냐가 아니라 우리 둘 사이에 어떻게 거미줄로, 율법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이러한 둘의 율법의 관계망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시키는데, 예수님 이후에는, 사도행전에 보면 모든 인류에게 이미 그게 적용이 다 되어 있어요. 모든 인류에게. 따라서 율법대로 심판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은 이미 율법에 대한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왜 너는 인간들끼리 사이사이에 끼어 넣은 그 법의 취지를 몰랐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남과의 관계에서 중요치 않고 내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남한테 동정하거나 이웃사랑이라고 한답시고 할 때는 여유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일본말로 기마에きまえ,선심 쓴다고 하죠. 기마에 쓰면서 도와줄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기마에 쓰고 도와준다면 항상 돌아서서는 자기 자신이 왠지 흐뭇해하는 겁니다.
‘아이구, 내가 이 정도까지 착해졌나?’ 하고 자시 자신에 대해서 흐뭇해해요. 하지만 그 바닥은 뭐냐 하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여유분 가지고 자기 기분 내는 겁니다. 지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돈 가지고 자기가 기분 내고 자기가 영광 받는 거예요. 이것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말씀을 하면서, 사실은 신명기 끝부분 31장, 32장, 이런 데를 보게 되면 앞에서 실컷 하나님께서 율법을 줘놓고 32장 쯤 들어가면, 내가 이 말씀을 아무리 줘도 너희들은 지키지 못한다고 단정지어놓았습니다. 신명기 앞에 보면 마치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너희들에게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희들은 내가 준 이 말씀을 지킬 수는 없어. 왜? 너희들은 마귀만 섬기기 때문에.
이걸 달리 풀이해보면 내가 너희들에게 준 것은 사실은 너희들에게 준 것이 아니고 너희 모든 정신과 생각을 장악하고 있는 배후의 어떤 존재한테 이 율법을 준 거예요. 주니까, 그 악마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쪽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누구를 앞장세워서? 인간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나 힘듭니다.”라는 쪽으로 반응을 보여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니 인간 뒤에 누구야? 니 빨리 나와!”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인간 배후에 “우리 힘으로 못 지키는 분에 넘치는 말씀들을 주었습니다.”라고 불평들을 해대는 그 배후, 그 괴물 나와!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에 끼어있는 인간들은 들러리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로 인간 배후에 악마를 겨냥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줌으로써 인간이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어쨌든 이 말씀에 대해서는, 이걸 가지고 배후에 악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끄집어내는지, 그 과정만 설명하면 이 본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 본문 해석을 하는데, 이 본문 내용은 이래요. 너에게 이웃이 돈 빌리러 오거든 니는 밖에 서있고, “아저씨! 돈 좀 한 백만 원 쯤 빌려주세요. 그리고 한 달 내에 갚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가만히 있어 보자, 집에 뭐가 있을까? 집에 뭐 쓸 만한 것 없을까? 아, 이것 쓸 만하네. 집구석이 하도 가난해가지고 기껏 집에 있는 것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하고 내놓은 것이 있어요.
곡식을 가는 기구인데, 이것이 없으면 굶어죽을 판인데, 마지막 남은 그 맷돌이나 안 그러면 추울 때 덮고 자는 겉옷을 내놓으면서, “제가 이렇게까지 내놓는 것을 보세요. 제가 돈을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돈 좀 빌려주세요.” 라고 나올 때에, 자기 종족한테는 이자는 안 받지만 담보물은 받게 되어 있어요.
여기 전집이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전집(법典,잡을執 저당을 잡히거나 잡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전당포 할 때 쓰는 전이라는 글자에요. 담보물이에요. 근데 그 담보물을 채권자가 “니네 집에 이거 있네? 이거 내가 가져갈게.”라고 이렇게 채권자가 그 집에 들어가서 잡지 말고, 채무자가, 돈 빌리는 사람이 “아저씨! 이것 가져가세요.”라고 내놓는 그것을 채권자가 허용하라는 이 말입니다.
만약에 어떤 기타리스트가 기타를 치는데 너무너무 가난해요. 그런데 돈은 빌려야 되겠고, 끼니를 때워야 하니까, 근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즐겨 치는 기타가 있는 거예요. “기타 이거 받으시고 돈 빌려주세요.” 이렇게 할 때, “이 기타 꼴랑(겨우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얼마인데?”이렇게 하지 말라 이 말이죠. 그쪽에서는 성의를 다하여 목숨 값으로 내놓는 건데, 그걸 “예.”하고 받되, 정말 그거 없으면 밥도 못 먹고 굶어죽는다 싶으면 그 기타를 낮에만 잡아놓고, 성의만 보고, 밤중에는 밤무대 뛰라고 돌려주라 이 말입니다.
근데 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뭐냐 하면 겉옷을 담보로 잡은 거예요. 그 담보물을 니 집에서 덮고 자지 말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아이고, 이거 내가 반드시 갚겠다는 마음만큼은 알아주니, 세상에! 이렇게 착한 어르신네가 어딨노?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고마워 할 것이다.
이게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에요. 별로 어렵지 않죠. 어렵지 않다는 말은 “뭐 내가 이 정도는 지킬 수 있는데?” 라고 할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가 안 나와요. 인간들끼리 해버리면, 만약에 그대로 이렇게 해버리면, 이른바 가진 자의 여유라고 했죠. “뭐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습니다.” 라고 해서 할 수가 있는데, 만약에 그 돈 빌리는 사람이 상습범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그렇게 돈 빌려서 노름해서 날리고 또 빌리고. “신명기 24장에 이런 율법이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겉옷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겉옷은 추워서 안 되죠. 돌려드리겠습니다.” 좋아서 헤헤거리며 돌려받고 또 돈 빌리고. “미안합니다. 갚으려고 했는데 이게 잘 안 땡겨져서(슬롯머신) 못 갚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른 집에서 또 돈 빌리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겁니다. 어떻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배역, 역할이라고 했죠. 하나님께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그 배후에 악마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행동을 하면서 자기 속에서 이런 일이 없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런 일을 실제로 실습할 수 있는 현장이 벌어졌을 때는 그동안 몰랐던 내 죄가 나오는 계기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뭐냐 하면 이런 말씀을 유지하려면 이거는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가 관여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1601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영국에서 구빈법이라는 최초의 사회보장제도가 실시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모든 내용을 그냥 해버리면 상습범이 생길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남들은 되게 열심히 일해서 돈 좀 모아놨는데, 지는 베짱이처럼 만날 놀다가 겨울이 되어가지고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입니다. “어이, 배고픈데 좀 주소!” 이래가지고는 강탈인지, 동냥인지, 협박인지, 상습적으로 모르게 가져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게 돼버리면, 그 사람이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인데도, 이 신명기 24장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담보물을 하나도 못 가져오는 셈이 돼버려요. 담보물을.
“내가 저 담보물을 줘!”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돈 빌려간 사람이 주고 싶은 대로 주는 거예요. “밥그릇 하나 지키고 있어. 나중에 돈 갚아줄게.” 밥그릇 하나 떼먹으면 어떻게 하는데요? 전당포 해가지고 대학생들 책 담보로 했는데 그 책이 지나간 학기 책이면요? 옛날에 대학생들 전당포 많이 이용했잖아요. 학교 앞에서 전당포해서 부자 안 된 사람이 없습니다. 제 친구도 대학교 앞에서 전당포 해가지고 부자 돼서 아무것도 안 하고도 지금 네 식구가 놀고먹습니다. 가만 보니까 누구 아는 사람이 있네요.
그러면 사람의 노동 의사를 꺾어 버려요.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려운 사람을 구한다. 빈민을 구한다. 구빈법을 하면서 조건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뭐냐 하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않고 능력이 있는데도 노는 사람은 아예 잡아 가두어버려요. 그게 구빈법입니다. “이게 사지가 멀쩡한데 놀아?” 잡아 집어넣어버려요. 그리고 교도소 내에 어떤 공장을 만들어 강제노동을 시켜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가지고 교도소 운영비 밥벌이 해주고 조금 용돈 주고, 그런 식으로 국가에서 강제로 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될 때, 날 때부터 정신병이 있고 날 때부터 뭔가 소경되고 절름발이면 어떻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조건이 있어요. 부모가 이혼해서 혼자 남아 있는 애는 나라에서 지킨다. 이런 세세한 법이 지켜집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국가가 개입이 됐는데, 교회에서 했어요.
그럼 교회는 무슨 돈이 있는가? 기부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기부 받는 것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헌금 조항이 있어가지고 그때는 많은 교인들이 신자기 때문에 헌금을 줘서 돕는 게 돼요.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의 성취,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지상천국, 하나님의 선한 사랑의 결실이라고 이렇게 본 겁니다.
근데 그 작업을 16세기에 영국만 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도 이미 했었어요. 했는데, 그걸 하면서 문제는 그 기금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 기금은 부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럼 그 부자는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됐는가? 가난한 사람 등쳐먹어서 부자가 된 거예요.
이게 하나의 사이클cycle이에요. 순환구조로 이루어집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등쳐먹어서 부자가 된 겁니다. 미가서에 보면 다 나와요. 국가 관료하고 그리고 부자 되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충천한 사람하고 합치되어가지고 어디에 도로가 나서 땅값 오른다고 하면 그 정보가 미리 잘 아는 사람하고 이게 다 연락이 되죠. 지방의회에 의원들하고 연락이 되듯이 전부 다 연락이 되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재산을 많이 늘려놓게 되면 그거는 일단 자기 인생이 성공을 했으니까 기쁘고, 거기다가 뭐냐 하면 생색을 낼 수 있어요. 나는 이른바 가진 자로서 자기가 가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생색을 내게 되면, 그 생색내는 그 모션을 누가 보느냐 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신다 이 말이죠. 신명기 24장에서 보시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는 남보다 더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자기는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하늘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일거양득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방송을 보는데 필리핀에 어려운 애들이 있다는데 후원금 3만원씩 낼까요? 말까요? 묻는 분이 있어요. 만원만 내면 아프리카 서너 명 살린다고 그렇게 안성기 배우가 나와서 광고하잖아요. 유니세프 광고.
그런데 성경에서 이웃사랑은 반드시 자기 죄가 나오는 계기가 되어야 돼요. 선심을 쓰면 안 돼요. 선심을. 지하철 동냥해주고 뭐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하는 것. 그러면 그거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라는 자기 의로움이 만들어져버려요.
따라서 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이사야 같은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오해, 율법에 대한 모독이라고 그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아예 작정을 해버립니다. 그게 이사야에 나오는데,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가 보고 난 뒤에 “이 백성을 위해서 누가 갈꼬?”할 때,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속에서 아무도 이스라엘을 건질 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먼저 찾아와요. 먼저 찾아오는데, 찾아오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뭐냐, 나는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선지자라고 여겼는데 막상 거룩한 하나님 앞에 딱 오니까 망하는 백성 중에 한 사람일 뿐이라고 고백을 하게 돼요. 망하는 백성 중에. “나는 괜찮은데 저쪽은 망해도 싸다.” 이게 아니고, “다 같이 망해도 마땅한데 나는 그 중에 하나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천사를 통해서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 입을 지져버립니다. 지져버리고, 니 죄가 사해졌다고 이야기 하고, 죄가 사해진 상태에서 “자, 이 나라를 위해서 누가 갈꼬?” “제가 가겠나이다.” “가거라!” 가서 죽죠. 가서 죽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모르고 있고 유독 죄를 아는 것은 이사야뿐이고.
그리고 이사야가 죄를 아는 것은 지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평소에 착해서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영광과 맞닥뜨리니까 할 말이 없죠. “아.. 더럽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래 된 겁니다. 제단에서 나온 숯불로 입을 지즌 이 대목은 신약 때, 이사야 이후 700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그 실체가 드러나죠.
그러니까 이사야는 그 실체 드러나기 이전에 앞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일부분을 맡아서 자기가 그 시대에 필요한 역할을 한 겁니다. 그 이사야 선지자의 유명한 말씀이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장차 올 메시아를 내다보면서 미리 앞당겨서 멸망해야 될 나라에서 지금 자기는 그 시대의 메시아로서 그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나라는 다 같이 망해도 싸다.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서 기회를 주고, 나름대로의 여유를 주기 위해서 나라가 직접 개입한 것이 뭐가 나쁘냐? 하는 거예요. 개인으로 사바사바 한 것보다 국가적으로 법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일괄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한 그것이 뭐가 나쁘냐? 이 말입니다. 지금도 그걸 몰라요.
17세기 이후에 국가의 법은요, 복지는요, 사후처방이 아니고 사전예방조치로 들어갑니다. 사전예방조치로 들어가서 아예 가난한 자를 없애버리는 쪽으로 국가가 복지정책을 펼치게 돼요. 그 대표적인 것이 4대보험이에요. 국민연금, 건강의료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이거 네 가지 보험이거든요. 이 네 가지 보험이 자유권으로 제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지금 국가의 4대 보험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제일 먼저 기독교 국가부터 생겼거든요. 사회보험은 독일의 비스마르크라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겼어요. 그 제일 먼저 생긴 이유가 비스마르크 자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주의가 발생되니까, 사회주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뿔이나 돈도 없으면서, 여러분 평등하게 다 잘 살게 합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공산사회로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하니까, 그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가로막기 위해서 선수를 친 게 뭐냐 하면 의료보험제도, 사회제도였어요. 공장 옆에는 탁아소 있고, 탁아소에 애를 맡겨서 여성들도 공장에 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칫 주춤했던 영국과 프랑스 이런 나라들이 산업혁명 때, 국가의 발전 속도가 약간 주춤할 때, 왜 주춤했느냐 하면 노동운동이 일어나서 약간 주춤했거든요. 기계의 자동화 때문에.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키고. 그럴 때 독일이 딱 서가지고 독일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 국민을 노동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온 국민을. 이제는 여자도 살림하면 안 돼요. 탁아소 만들어주고 공장에 나오라는 거예요.
취지가 어떻습니까? 이거는 취지가 요즘처럼 개인이 얼마나 잘 사는 취지가 아니고 나라가 잘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나라가 살아야. 나라가 먼저 있어야 국민인 우리가 다 같이 사는 거예요. 그럼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뭘 하느냐,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나라는 회사고 그 사장님은 대통령이고 그 국민들은 대통령이고. 밤 근무, 잔업해가면서 해야 거기서 나눠 먹는 겁니다.
국민들이 4대 보험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뭐냐 하면 사람은 늙잖아요. 늙은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90퍼센트 줄게. 얻었던 “소득의 90퍼센트를 퇴직하면 줄게.” 그리스입니다. “80퍼센트 줄게.” 스페인입니다. “70퍼센트 줄게.” 이태리입니다. “60퍼센트 줄게.”포르투칼입니다. 다 망했어요. 다 망했습니다.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기독교 국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개인적으로 하니까, 개인이 상습적으로 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처단을 못해요.
이러한 폐단을 국가적 차원에서 사전에 조치를 해줘서, 이제는 사람이 나한테 와서 돈 빌려 달라고 하는 것보다도 골고루 다 잘 살면 돈 빌려 달라는 귀찮은 일이 발생 안 되는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평등한 세계입니까? 이게 정의구현이죠. 정의구현. 공동체 정의라고 합니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학자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하버드 교수가 한 주제가 그거에요. 정의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정의다. 이래 본 겁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대행했다고 여기는 이 심보가 뭘 포기하게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 40절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자, 마태복음 5장 40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꾸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죠.
그러니까 여기는 이자 받지 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담보물조차도 기대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내 건데 마치 빌리려고 온 사람이 자기 것처럼 달라고 할 때 줘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말씀이 사기꾼이나 도둑놈한테 들려오게 되면,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라고 소문만 나게 되면 소개비 받을지 싶어요. 어떤 집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어서 돈 빌려가도 이자도 안 받고, 형편 되거든 갚고 안 되면 안 갚아도 된다고 하는 그런 소문 난 사람이 있다고 소개만 해도 소개비 줄 거예요.
지금 구제이야기 하고 가난한 자 이야기하면서 뭐가 빠졌는가 하면, 왜 사람은 돈을 빌리려 하느냐 이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신명기 말씀을 누가 완성했습니까? 예수님이 완성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돈 떨어졌을 때 누구한테 돈 빌렸습니까? 그런 적 없죠. 예수님은 돈 떨어지면 그냥 죽어버려요. 굶어죽어 버린다고요.
그러면 이 신명기 말씀 배후에는 뭐냐 하면 국가가 살아야 국민이 산다. 둘 다 산다가 들어가요. 산다. 국가가 살아야 내가 산다. 산다가 들어갑니다. 이민을 가도 잘 사는 나라에 이민을 가야지, 케냐냐 콩고에 가서 얻어맞아 죽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전부 다 인간의 움직임 하나, 행동 하나, 생각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땅에서 더 살까?
근데 주님은 이 땅을 떠났는데요. 이 땅은 저주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꼴좋다. 이 저주세계에서 오래 살라고? 그래. 저주받아라!” 이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을 준 것은 떠나라는 겁니다. 지킬 자신이 없거든 떠나라는 이 말이죠. 너희들은 이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 20절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오직 누구만 지키는가? 예수님만 지켜요. 그럼 예수님은 베드로나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그냥 돈 줬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뭐냐, 십자가이야기를 해버립니다. “니가 나한테 더 살려고 돈 빌리려고 왔는데, 그 죄를 내가 대신지고 죽을 때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다시 살리라”이겁니다.
그걸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마귀에요. 뒤에 마귀 있습니다. 어느 역할이든 그 역할 하면서 나 잘했죠? 또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권리다. 해방신학에서 주장하거든요. 가난한 자를 동정하지마라, 가난한 자가 부자보고 돈 돌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권리다. 왜? 노동을 착취했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가지고 신학을 결부시켰습니다. 선지자가 이야기했잖아. 땅에 정의가 바다같이 흐른다고. 아모스 5장에서 이야기하거든요. 정의가 바다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뭐냐, 촛불 집회에요.
참,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 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식 하고 또 그때 죽든지 죽어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재림이 좀 보류 돼야 하는가? 다들 전부 다 예수님 나이만큼 다 살았잖아요. 33살 다 넘어서지 않았습니까? 세월호 아이들 아니잖아요. 전부 다. 물에 빠질 뻔 했죠. 차사고 날 뻔 했고. 우리 서너 번씩 다 차사고 나요. 왔다갔다 오죽 까불었습니까?
주께서 살려주신 이유가, 니가 수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그러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 후속편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요. 거기에 붉은 여왕하고 주인공 소녀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무조건 많이 달렸는데, 달리고 달렸는데 똑같은 나무아래에 있어요. 세상은 그런 겁니다. 세상은.
아무리 애써서 많이 한 것 같지만 자기 몸이 망가졌으면 내가 하는 일과 주의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경우든 주님은 자기 고집대로 자기 일을 꾸준하게, 니는 망해야 될 인간이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광주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는 터널을 매일같이 파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만들어진 터널 속에, 어둠 속에 통과하는 겁니다.
통과하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아, 이거 개인적으로 도와주지 말고 나라에서 잘 살게 하면 귀찮게 나한테 돈 빌리러 안 오지. 나라에서 이렇게 안 해주니까 내가 또 어려운 사람 도와줘야지. 에이 귀찮아라.” 안 도와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지켜본다! 니 돈이 니 돈이가?” “예~ 예~ 예~드리겠습니다. 고아와 과부에게 드리겠습니다.” 백날 이래봤자, 그것은 이스라엘 멸망과 동시에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진짜 이 말씀의 성취는, 주님 앞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런 죄인을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 말씀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적인 눈으로 보는 성경에서 나오는 이상세계, 복지국가, 민주주의, 다 같이 평등한 정의가 넘치는 사회, 이 모든 것이 악마의 작당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