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28강-보호(신24;6-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0. 07:41
2017-04-09 15:00:28조회 : 36         
   보호 17040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보호(신명기 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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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4-09 15:57 
보호 

2017년 4월 9일                      본문 말씀: 신명기 24:6-7 

(24:6) 사람이 맷돌의 전부나 그 윗짝만이나 전집하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집함이니라 

(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의 투입은 법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실천적 현장에서 율법의 취지를 드러내게 합니다. 지킬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못 지키도록 상황이 몰아가게 됩니다. 이럴 때, “나는 지켰다” 혹은 “나는 못지켰다”가 아니라 “아예 내 마음 속까지 율법이 이미 들어와 있구나”라는 사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율법을 순종하겠다는 식으로 율법을 이해하게 되면 그 성과는 필히 자기 공로와 자기 성과로 회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율법 준수하는 실력을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훼손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우리 속까지 들어와서 생성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취지로 발생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가난의 생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늘 한이 맺혀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매달립니다. 

즉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자신이 가난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생산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한은 부자를 쳐다보면서 발생된 겁니다. 이는 곧 부자됨을 항시 노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가난입니다. 이 가난은 하나님께서 지켜주거나 보호해 줄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장차 신약 때에 참으로 오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가난이란 단순히 돈이 없어 가난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서 자체적인 힘으로 남을 공격할 여력이 없는 자들 두고 말합니다.
만약이 부자 못되어서 한을 품고 있다면 이 자체가 부자자들에게는 심리적 공격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맷돌을 빚 대신에 담보물로 잡지 말라는 것은, 최소한의 생계 수단까지 뺏아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 정도로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채무자에게 최소한의 생계수단까지 내어놓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남을 공격한 여력이 있는 자가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을 아이를 잡거나 유괴해서 노예로 팔아먹게 되면, 그 가정은 최소한의 행복을 뺏아가는 바가 됩니다. 만약에 이 율법대로 시행되지 아니하면 필히 피해자가 발생됩니다. 이 발생된 피해자는, 율법으로 야기된 상황이기에 율법제정자이신 하나님께서 율법에 담긴 엄중한 현실성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즉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용납될 수 있는 일이지만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된 법이기에 거기에 따른 징벌과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꼭 ‘가난한 이’들이 만들어지도록 하셔야 할 이유가 뭡니까? 다같이 골고루 살면서 서로 다툴 일도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잠언 25:3에 이런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즉 가난한 자들이 더 무섭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같은 가난한 자를 동정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자되기 위한 집착은 가난하다고 해서 포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없는 서러움은 항상 복수로 이어집니다. 사회 전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해서 참된 ‘가난’을 공격하는 경우를 유발시킵니다. 이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모두 적당하게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잠언 17:5/29:13) 그러니 어차피 누구는 이 가난한 자의 배역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가난을 아는 자들은 ‘가난’의 배역을 맡이신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배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그 너머의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감사하며 살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품으신 가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되는 가난을 실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하실 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6:39)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도 구하셨습니다.(눅 23:34) 

이렇게 되면 예수님 이외의 모든 이스라엘과 사람들은, 제대로 이 가난의 의미를 모르는 채 죄를 범하고 사는 바가 됩니다. 즉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려고 하지만 시행하다보면 ‘자기’라는 장벽에 막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만 있다면 부자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배역보다 자신이 나서서 근사한 배역을 스스로 조성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그 내용과 다릅니다. “오로지 내 뜻대로, 내 뜻대로”만 고집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됩니다. 

율법에 의해서 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식으로 그 완성을 보이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5: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과 관련해서 결론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5:11에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가난한 자이신 예수님의 그 피를 보호하기 위해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감독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행 20:2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이용해서 부자 될 생각보다 주님의 가난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4-10 06:04 
128강-신 24장 6-7절(보호)1704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6-7절입니다. 구약성경 298페이지입니다. 

  

“사람이 맷돌의 전부나 그 윗짝만이나 전집하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집함이니라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창세기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왔습니다. 아담에게 찾아왔을 때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어요. 아담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일에 쓰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죠. 이스라엘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앞으로 일을 완성시키는 그 내막에 대해서 자기 백성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을 찾아오신 것이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것이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질문. 낯선 질문이죠. 내가 나 잘되기 위해서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고, 원치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쑤셔주는 그 질문.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런 말씀이 들어올 때는, 지키겠다고 하지 마시고 자기의 마음을 찢어서 이 말씀이 그대로 제가 지키지 말고 제 안에 자리 잡아서, 그냥 툭하니 자리 잡으시옵소서. 이렇게 받아들여야 돼요. 말씀을 자꾸 마중 나가서 지키면 안 돼요. 왜 지키지 않아야 되느냐 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한테 회수하게 되어 있거든요. 백날 전해봐야 지 잘났다가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차라리 내 배 째라고 해서 그냥 자기 배를, 마음의 배를 절개해서 이것을 담아버리면 그 사람은 걸어 다니는 말씀이 되겠죠. 걸어 다니는 말씀 책.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켰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말씀이 아니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 아니고, 그냥 말씀에게 주도권을 다 빼앗긴 채 말씀이 현실화 시키는 대로 수단으로 쓰여 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째시고 이 말씀이 우리한테 들어와야 되죠. 방금 오늘 읽었던 말씀 중에 뭐가 들어오느냐, 맷돌이 들어옵니다. 이 맷돌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에서 이 맷돌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레미야 25장 10절에 보면 이래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여기 맷돌 소리와 등불, 신랑이야기, 즐거운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 그러니까 여기서 맷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자기 집안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바탕이 되는 그 집안의 물건. 그 집안의 물건으로 인하여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그 물건이 맷돌입니다. 곡식을 갈고, 곡식으로 떡 해먹고, 곡식으로 전 부쳐 먹고 하는 모든 게 맷돌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맷돌을 가져간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 가져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밑반찬은 냉장고에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맷돌을 가져간다는 것은 냉장고 가져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집안의 행복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다가, 후린다는 뜻은 이것은 유괴한다는 겁니다. 유괴하는 겁니다. 그 유괴해가지고 노예로 팔아먹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음에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맷돌의 의미가 들어오고 그 다음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의 가정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뜻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같이 통합을 해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가난한 자를 이 땅에 계속 두겠다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려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맷돌을 한 열댓 개 되는 집안을 만들 수도 있고, 남한테 유괴당하지 않을 정도로 좀 단단하게 자기방어가 잘 되는 가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허술하게, 그것도 겨우겨우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집안들이 있다는 것. 

  

이 사람들이 맷돌을 왜 가져가느냐 하면 돈 빌렸는데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담보로 잡힌 맷돌을 가져가는 거예요. 마지막인 것까지 내 줄 정도 같으면 이거는 집안에 갚을 길이 전혀 없는 거예요. 가난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이스라엘이 왜 가난한 자가 발생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만들어놓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지 마시고 아예 이스라엘 전체를 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해서 부자 만들어버리면 이러한 귀찮은 말씀도 추가적으로 제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더 간편할 건데, 왜 가난한 자를 이스라엘 속에 만들어놓고 가난한 자에게 너무 심하게 굴지마라, 어렵다고해서 빚진 자의 자식을 데려다가 자기 종 삼고 하지마라, 학대하지 마라는 그 말씀을 왜 주셨는가,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난한 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한 번 이 땅에서 살아보세요.”라고 만약에 우리가 요청한다면 주님은 이 땅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럼 우리는 그 소리 듣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도 가난하게 살아가면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천국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거는 아니에요. 그런 게 이제 어려운 겁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지독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더 돈에 대해서 민감하고 지독해요. 그 이야기가 잠언서 28장에 보면 나옵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가난한 자를 누가 괴롭히느냐 하면 꼭 가난한 자가 괴롭혀요. 왜냐하면 부자들은 따로 강남에 살기 때문에. 서울에 가면 못 사는 동네가 따로 있어요. 신월동 신곡시장 근처. 완전히 60년대 피난 촌 그대로 세트장 같아요. 신정네거리부터 해가지고 매달 가는 그 길. 영등포구 그런 곳. 옛날 구로구. 영등포구 그런 데에 가면 순 옛날 사람이에요. “목사님. 거기에 살지도 않았는데 그 동네를 우에 그렇게 잘 압니까?” 하신다면 제가 그 동네 목욕탕을 가봤거든요. 어디가도 목욕탕에 가보면 그 마을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저분한 목욕탕은 전부 다 좀 못 사는 동네고, 좀 사는 동네는 아주 깔끔해요. 목욕탕 자체부터 아주 깔끔해요. 때 벗기는 그 상황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생산하려고 합니다. 가난한 자가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지금 이 신명기로부터 진짜 오시는 그 신약까지 가난한 자의 대를 이으려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어떻게 하느냐, 가난한 자는,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난한 자는 남을 공격할 여력이 없는 자가 가난한 자에요. “두고 보자!”하면 그거는 절대로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일본말로 요시!(よし!좋아! 결심을 단단히 할 때)라고 하면이거는 가난한 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자기의 인생이 망쳐진 자기 원수에 대해서 보복이나 복수할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부여받지를 못해요.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하다가 죽어버려요. 참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뭔가 자기가 피해를 봤으면 피해자에게, 우리가 보는 드라마에 보면 마지막에는 항상 어렵게 되었어도 잘 되잖아요.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가지고, 출생도 수상하고, 우연히 괜찮은 남자만나가지고, 커피 쏟아가지고 닦아주다가 반해가지고, 갑자기 시험도 안 쳤는데 합격해가지고, 그때부터 막 설쳐대면서 진급 팍팍 해가지고, 왜 그리 재주가 좋은지, 회사 혼자서 다 살리잖아요. 지가 김과장 같아요. 회사 혼자 다 살려버려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진정 가난한 자를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저 남한테 복수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사람은 목적이 뭐냐 하면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언젠가는 부자 되었으면 좋겠다.” 이걸 목표로 인내하고 참는 겁니다. 한이 맺힌 사람들이에요. 그게 더 미워요. 

  

그래서 그런 가난한 자들이 같은 인간에 대한 보복과 복수, “하나님 뭐합니까? 우리복수를 안 해주시고?” 이렇게 나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신약 때, 진짜 주님 때까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를 통째로 가난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이스라엘을 통째로. 애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모세가 등장해가지고, 이웃 애굽 사람의 재산을 다 등쳐가지고 부자 되어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부자 되어 나와서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 땅에 오면서부터 그때부터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등쳐먹기 시작하면서 이 신명기 24장이 개입합니다. 신명기 24장이 개입해가지고 이제 부자들을 완전히 통째로, 전부 다 가난하게 만들어서 바벨론에 포로 잡히게 만들어버려요. 잠언서 28장에 보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언급된 것이 몇 군데 더 나와요. 여기 8절에 보면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무 이자를 많이 받아서 부자 된 사람은, 지금 이 말씀은 비꼬는 거예요. 이자를 너무 많이 받아서 갑자기 부자 된 사람은 가난한 사람한테 재산이 다 넘어가기 위해서 대리로, 지가 대신해서 남에게 넘어갈 돈을 지가 저축하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는 다 빼앗긴다고 되어 있어요.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가난한 사람은 이 땅에 제가 없다고 했죠. 없어요. 그러면 목사님 말씀은 뭡니까? 이 땅에 없는 사람인데, 없는 분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늘에서 폭우처럼 막 퍼부어주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 이 이 말씀을 나 좋아라고 주신 말씀이라고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야! 너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니까 나 도와주려고 주신 말씀이야.”라고 이렇게 또 오해해요. 

  

그 오해하는 신학이 남미에서 나왔는데 그걸 해방신학이라고 합니다. 해방신학. 해방신학의 근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부자가 갖고 있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등쳐먹어서, 등쳐가지고 갈취해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가난한 자가 노동해서 얻은 것을 부자가, 자본가가 챙겼기 때문에 자본가가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줌으로써 하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진다는 주기도문의 완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해방신학 신부들이, 기독교 장로 목사들이, 감리교 측에서, 통합 측에서, 그쪽은 촛불 쪽이거든요. 그럼 이쪽은 태극기 쪽이에요. 기독교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어요. 시청 앞에서. 

  

둘 다 한이 맺혀있어요. 한이. 이제는 말한다. 그 한의 내막이 뭐냐 하면 부자 되려고 교회에 왔는데 왜 부자 안 되게 하십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을 했는데 나를 개무시 하십니까? 도대체 기도를 얼마나 해야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나도 오기가 있어서 새벽기도 나오고 그저 부자 되려고 금요철야하고 한 거예요. 대심방하면 목사들이 주로 언급하는 잠언서가 있어요. 대심방할 때 주로 하는, 그것가지고 온 데 다 써먹어요. “오른손은 장수요 왼손은 부귀라” 다 가졌어요. 다 가졌어. 백세인데 부자로 백세로 산다. 이게 봉투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감사헌금이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 챙긴 것이 있으면 주시겠지. 양심이 있으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은 진짜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가난을 보호해요. 참 이 말이 어려워요. 잠언서에서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자냐 하면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게으름뱅이가 가난하게 돼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한테는 어떤 혜택도 기대하지 마세요. 뭐가 집안이 잘 안 돼서, 수저를 물었는데 흙 저라서, 그런 되도 않는 핑계를 대지 말고. 게을러서 가난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가난이다.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이에요. 

  

왜냐하면 부한 자와 가난한 자를 주께서 친히 지었다는 것에 대해서 수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도 지었고 부자도 지었거든요. 어차피 그렇게 됐다면, 그 말이 맞는다면 가난한 자의 배역은 누가 맡아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맡긴 배역이 내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면, 배역가지고 틱틱 거리면 그 다음부터는 드라마 배역 안 줍니다. 가난하게 사는 역할을 맡았으면, 가난하게 사는 거기에 충실하게 살아야죠. 그걸 메소드연기라고 합니다. 역에 충실한 연기. 메소드연기(극중 인물에의 동일시를 통한 극사실주의적 연기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 

  

가난한 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은 홀로 감사합니다. 미쳤어요. 남들 보기에는 그거 미친 사람이에요. “주여, 가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옆집이 부한데 그 사람을 부하게 하는 역할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저 역할을 탐내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면 부한 자에 대해서 시기질투를 안 하게 되죠. 분노를 품지 않게 되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복음을 전하다 보면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토를 달았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10년 듣고 20년 들은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화를 내고 있어요. 복음이 더 깊이 있는 감사가 되어야 할 건데,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복음을 알잖아요? 아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복음을 아니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지! 그걸 안 준다는 거예요. 그걸.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무섭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알았는데 더 나올 때, 그게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그걸 보호하시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 그건데, 진짜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의 역할을 보호해요. 

  

만약 어떤 사람이 tv가 없는데 만날 드라마이야기 하면 무서워요. 뭔가 유령인가? tv도 없는데 무슨 드라마가 나오겠어요? 분명히 저 사람에게 나올 것이 저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말고 감사가 나온다든지, 가난한 사람은 입만 툭 튀어나와가지고, 입이라고 안 하고 주둥이라고 하죠. 만날 주둥이만 툭 튀어나와가지고 있어야 정상인데, 감사가 나온다면 사실은 무서워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이 다 무서워요. 칭찬도 이래 하는 방법이 있네요. 

  

인간극장을 보게 되면 어떤 80살 먹은 할머니가 머리가 뛰어나요. 손자하고 청국장 만드는 일을 하는데, 가끔 힘든 일은 아들을 불러다가 해요. 아들은 일하지도 않는데 kbs카메라 기자가 물어보면 “우리 아들 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한다고요.”라고 이야기해 버렸어요. 머리를 쓴 거예요. 열심히 일 하고 난 뒤에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아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땀 삘삘 흘리고 있습니다.”라고 해버렸다 이 말이죠. 기자가 그 말을 곧이들었죠. 나중에 따로 인터뷰하니까 엄마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부를 때마다 힘들어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엄마 본인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가난하게 해놓고 가난에 대해서 험담하지 않는 그러한 백성을 원해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것을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있는 죄를, 그들의 가슴을 열고, 그 말씀이 들어오고, 우리 속에 장착되어 있는 원초적인 죄가 이 말씀과 만나서 원망이 터져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유도를 하시는 겁니다. “시킨 대로 지켰는데 왜 우리 집안이 계속 가난합니까? 가난할 때 이걸 했으면 부자 되게 해주셔야지 왜 끝까지 가난하게 하십니까?”라고 원망이 나올 때, 니는 이 말씀에 부합되지 못한다고 해서 전부 다 멸망을 시킨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지켜주는 이 가난한 사람은 그럼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신약에 나옵니다. 신약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5장이 흔히 말하는 팔복이라고 하잖아요.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담하면 안 되는데 감히 장담한다면 이것에 대해서 이천년 동안 해석을 제대로 한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이게 무슨 뜻인지를. 

  

사실은 이 해석이 굉장히 간단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이게 되려면 해석이 점점 더 열립니다. 어디서 해석되느냐 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어요. 팔복 중에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보면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 복이 동일한 복이라면 어떤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요. 예수 뺀 가난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없는데 보호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목사들이, 부흥사들이 자꾸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불교신자가 되고 말아요. 불교 진리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해서 고집이 세거든요. ‘고’라고 하는 것은 고생, ‘집’이라고 하는 것은 고생이 되니까 고생 안 하려고 집착한다는 거예요. ‘멸’, 그래도 희망이 있다. 고생을 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도’, 그게 팔정도八正道 지키는 것이다. 그게 고집멸도에요. 불교 그게 전부에요. 그 팔정도가 뭐냐, 바른 마음, 바른 생각...이런 것. 

  

바른 마음, 바른 생각하도록 주위에서 우리를 가만둡니까? 가만두지를 않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팔정도를 행하는, 심령이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너는 결코 심령이 가난하게 될 재주도 능력도 자질도 없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 아니다. 니는 못 돼먹어야 돼요. 우리는 늘 주 앞에 원망해야 되고 배신 때려야 돼요. 왜?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주께서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지, 껍데기 같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제 오랜만에 심방을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놀이 한 거죠. 오랜만에 심방을 하니까 마치 목사 같아요. 성경책 들고 곁에 사모까지 함께 가니까. 가는데 날씨 좋았잖아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막 그래놓으니까 아휴!! 그렇게 심방을 가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뭐를 지키려고, 뭐를 보호하려고 갔느냐?’ 이 말이죠. 

  

끝으로 사도행전 20장 28절입니다. 거기에 목사 나옵니다. 감독자 나옵니다.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 감독자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중심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냥 울타리 치는 거예요. 울타리. 마치 사건 현장에 폴리스라인 치고 “여기 기자들 오시면 안 됩니다. 구경꾼들 가세요. 사건현장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하면서 옆에서 지켜주는 역할이 감독이에요. 

  

왜냐하면 누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해당했거든요. 예수님의 살해현장이에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 이 말입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걸 하면서 목사는 단 한 명도 구원한 적이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옆에 순경이거든요. 그러니까 교회가 뭐냐 하면 누가 죽었는데 이 땅에서 아무도 도와준 적이 없어요. 아무도 도와 준 적이 없는 유일한 가난한 자에요. 왜? 모든 사람은 한恨에 미쳐 환장하고 있으니까. 주님께 만날 구하면서 왜 내 형편이 나아지지 않느냐고 교회 와서 이거 하고 있다고요. 

  

진짜 오늘 본문에 나온 그 가난한 사람, 진짜 하나님이 보호하고 싶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교회 중심은 마련되어 있어요. 소개할 것은 이 피에, 이 피로 사신 교회에 인간의 어떤 행함도 섞이지 않도록 커버하는 역할. 그 커버하는 역할이 바로 감독자에요. 보디가드. 그 피를 감독하는 거예요. 피를. 목사 지가 교인 꼬시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심방하면서 뭘 이야기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관련된, 예수님께서 이미, 아까 기도하신 내용대로, 문성도님 집에 심방 간 거예요. 한 달 됐는데 아무도 가신 분이 없어서 간 겁니다. 그냥 차만 마신다고 했는데, 언제 또 설교시간에 잘 들으셨는지 잡채도 해놓으시고, 그거 들고 와서 한 끼 때웠습니다만. 도대체 이 분에게, tv도 없어요. tv도 없는데, 우리가 아는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그걸 보호해줘야 해요. 그걸 감독해야 돼요. ‘이상하다! 이정도 가난했으면 슬슬 교회 그만 둘 때도 됐는데.....,’ 뭐 이런 것. 이상하게 우리가 아는 것 말고 왜 다른 게 나오느냐 이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구원했기 때문에, 주와 함께 있는 그것, 그게 바로 말씀의 완성, 진짜 가난한 것, 그게 팔복입니다. 나로 인하여 핍박받고 고난 받을 때, “이게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진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천국의 복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오해하고 살았습니까? 이만큼 해주면 저만큼 줄 줄 알았습니다. 이만큼 헌신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줄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고 주님을 이용하는 악마적 행태인 것을 저희들이 지적받는 것을 감사합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주께서 익히 아시고 이미 십자가 피로 주께서 그 죄를 담당하셨사오니 우리의 죄와 십자가를 늘 매치시키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