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26강-낫과 그릇(신23;24-25) 1703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26. 15:58
2017-03-26 14:57:23조회 : 7         
   낫과 그릇 17032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낫과 그릇(신명기 23: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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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3-26 15:52 

낫과 그릇 

2017년 3월 26일                        본문 말씀: 신명기 23:24-25 

(23: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23:25)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들을 보면, ‘믿음’이라는 심오한 새로운 정신구조의 개입 없이도 일반 상식으로도 얼마든지 준수하고 실천에 옮길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종종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인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이웃집 포도원에 들어가게 조금 혜택을 보면서 과도한 욕심은 부리지 말라는 이 정도 행위는 지성인이라면 상식선으로 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고 강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지시사항은 따를 수 있는 여지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행함이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기회가 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적혀있는 이 거룩한 계명을 자기 상식선으로 준수했다고 자부하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대견할까요! 

하지만 이게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자신이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자아가 여전히 당당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담배값에 실은 흉칙한 암환자 사진을 보고서 ‘담배 피우는 자신이 미래마저 당당하게 겁내지 않고 도전하는 마초같은 자’인 것을 과시하는 기회가 됩니다.  

즉 “이래도 피울래?”라는 정부의 지침에 대해서 담배 피우는 자는 “그러니까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지. 나는 나의 그 어떤 자유도 타인에 권력에 흔들리지 않겠어!”라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행함의 이러한 집착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행함을 통해 자기 잘남을 수시로 확인한다는 점을 감안하시면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은 곧 진짜 하나님께서 믿음에 합당한 행함은 인간의 노력이나 실천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16 에 나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베들레헴에서 죽은 남자 어린아이들은 결코 그들로 인한 행함을 내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강제성을 띠고 덮쳐진 상황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사태를 유발하게 하시면서 얻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이 세상 출현은  새로운 양상의 ‘관련성’을 남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본인들이 의도하지도 않았던, 즉 “나는 이런 식으로 믿음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지”를 마음 먹지 않더라도 벌써 예수님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낯선 사태가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단지 예수님이 다녀간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실재하는 악은 예수님과 관련해서 횡포를 부리는 반응을 필히 보이게 마련입니다. 

즉 이 세상은 인간은 소박하게 자기 행함에 따르는 보상에 의해서 세상을 곱게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두 살 밑의 남자 자식을 잃은 그 가정에서는 나라를 욕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욕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욕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곱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화근을 남긴 것은 평소의 국가 권력이나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린 예수와 동방박사가 미움겁니다. 바로 이런 현상,
즉 누구든지 나의 평화로움과 고요함과 행복을 깨는 것들은 다 망해라는 식으로 장착된
우리 마음이
예수님과 엮이게 된 사항으로 인하여
그 본색이 노골화되는 것
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한 ‘믿음에 합당한 행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외가 아닙니다. 이웃집 포도원 주인이 배려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변의 이웃 사람에게는 무상으로 포도를 먹게 해주는 혜택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올 때 그릇은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겁니다. 

또한 어떤 밭 주인이 있는데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는 차원에서 이웃 사람에게로 자비를 베푸는데 그 혜택을 받는 이유도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낫을 들고 마치 자기 밭인 양 본격으로 달려들지 말라는 겁니다. 

베풀어주는 그 범위 안에서 혜택 입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의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 있고, 따라서 “행함으로 너의 믿음을 보이라”는 야고보서 2:18의 말씀에 위배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할 것 같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얻어 먹을 형편이 되면 이웃에 감사는 마음이 우선이 아니라 필히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왜 저 옆집 사람은 뭐가 잘나서 포도원 농사가 잘 되어 남들에게 베풀 여력이 있고, 거기에 비해 나는 왜 하나님께서 저주하여서 기껏 이웃 사람들에게 얻어먹는 신세로 전락했는고”하면서 원망하게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된 베들레헴 아기 엄마들이 하늘을 향해 얼마든지 원망을 할 자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편을 이해하는 차원과 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감사보다는 “나는 왜 남들처럼 안정적으로 삶이 보장되지 못하고 추잡스럽게 겨우 얻어먹는 신세자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는가”를 두고두고 원망할 만한 상황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룻기 2:17-18에 나옵니다. 더구나 룻기 3:15에 보면 밭주인 보아스가 여섯 배나 담아서 집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갖다 주도록 했습니다. 이런 대목은 오늘 본문 말씀이 신약에서 그 완성을 볼 때까지 어떤 식으로 의미가 채워지고 본격화되는 가를 말해줍니다. 

즉 시어머니 나오미나 룻은 얻어먹는 자신의 형편이나 처지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믿음에 합당한 행함입니다. ‘내가 단독적으로 누구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보여주어야 될 입장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서 자신의 우수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속적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의를 통해서 누가 하나님의 이 본문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자인가를 알려줍니다. 즉 나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함이 우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진정한 말씀의 실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웃이 되었는가를 염두에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6강-신 23장 24-25절(낫과 그릇)1703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24-25절입니다. 구약성경 298페이지입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지성에서 나온 말씀처럼 그렇게 느껴지죠. 이웃사람을 배려할 때에 뭐 과한 욕심내지 말고 대충 따고 땅에 떨어진 것까지 촘촘히 끄집어내어서, 말끔하게 다른 사람이 내 것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그런 독한 마음을 가지고 살지 말라, 그런 뜻으로 여겨지신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 불과하죠. 인간의 양심소리가지고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심은 필히 자기 정당성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왜 이렇게 마음씨가 모든 게 착해. 정말 미치겠어. 너무 착해서 미치겠어.”라고 자기 영광을 취하게 되면, 이것은 하늘나라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주께서 상한심령을 원하는데, 상하기는커녕 갈수록 튼튼한 심령 같으면 문제가 크죠. 

  

그렇다면 이 신명기 말씀이 인간의 양심에서 나온 소리도 아니고, 근데 양심에서 나온 소리 같으면 남들이 다 이해가 되죠. 근데 이게 아니고 양심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면 그럼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라고 할 때, 그거는 인간의 양심이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소리를 차단시키는 차단막 구실을 해버려요. 모르면, 무식하면 물을 수도 있죠. 

  

안다고 하니까, “나는 아예 이 말씀 안 들어도 다 알아. 이웃사랑 하라는 거잖아. 나는 이 말씀 안 들어도 벌써 이웃에게 많이 퍼주고 했어.” 이래 나온다면 그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점에서 계속해서 위반하고 있고 어떤 점에서 죄인이고 그리고 죄 값으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접선, 접촉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런 이야기, 남한테 야박하게 하지 말고 대충 흘려가지고 남들에게 곡식을 줘라. 그리고 반대로 이웃의 포도원을 갈 때는 마음대로 배불리 먹어도 되되, 그렇다고 해서 그릇 가져가지고 가서 왕창 따지 말라는 거예요. 그릇 가져가지 말고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물론 여기서 씨름선수나 유도선수를 생각해봐야 해요. 그릇 가져가는 것보다 더 많이 먹을 수가 있습니다. 뱃속에. 뷔페에 씨름선수나 야구선수가 한 열댓 명 들어가게 되면 그날 장사는 끝난 장사죠. 

  

그리고 갈 때에 이웃에 낫을 들고 가서,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이웃이 너희에게 이렇게 배려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다는 이유 때문에 과욕을 부려가지고 가난하니까 내놓으라고 하는 이것은 도둑질에 불과한 겁니다. 배불리 먹었으면 족하지, 내일까지 배불리 먹겠다고 이렇게 나오는 것을 저지하는 거죠. 근데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거룩한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생각만 해보면 가져가더라도 너무 과하게 가져가지 마세요, 라고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어려워요. 뭐냐 하면 이렇게 상식적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다는 이것이 믿음을 오히려 막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의 위기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야고보서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혹이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럴 경우에 오늘 본문하고 연결시켜보면 나는 하나님을 믿을 정도가 아니라 믿었으니까, 나는 이웃에 들어갈 때 낫이나 그릇을 들지 나가고, 그리고 그 포도원주인도 떨어진 것은 남이 먹으라고 야박하게 다 담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하나님에게 행함을 보였으니까 신자가 맞지요? 라고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믿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데,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안 믿는 것이 더 어려워요. 안 믿는 것이. 왜냐하면 만약에 자기 행함을 저주하지 않는 한, “나는 내가 어떤 행함을 해도 다 저주야.” 이걸 진정성 있게,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본인의 능력을 능가하는 겁니다. 본인의 능력으로는 그걸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사람이 조금만 행동하게 되면 “아, 이게 내가 믿으니까 행하는구나.”라고 행함과 믿음을 자꾸 결부시켜가지고, “나는 믿는지 안 믿는지 잘 몰랐는데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까 나는 믿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자기가 자부할 수가 있어요. 왜 이렇게 행함 가지고 믿음을 대신하는 이것이 위험 하느냐 하면 사람은 자기 평가를 할 거리를 주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해서 내가 믿는다고 자꾸 우기면서도 한쪽에서는 ‘내가 믿는 것이 맞나?’라는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걸 판정하는 방법은 내가 어떤 행함을 하게 되면 그 행하는 것을 봐서 성경과 비교해볼 때, ‘아! 내가 믿는 것이 맞구나.’하고 차후에 차질 없이 자기 믿음을 증명하는데 있어서는 행함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문장이 길어서 잘 이해가 안 되죠. 좀 쉽게 하겠습니다. 예배당을 넓히는데, 우리교회 이야기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부흥강사를 부르죠. “니가 알아서 예배당 넓히는데 도움을 주면 우리 3대7로 먹자.”해서 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믿고 안 믿고는 야고보서의 행함을 통해서 믿음을 보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아직까지는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함으로 보일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좋은 기회를 주셨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이 돈을 내시고, 그리고 예배당을 지으면 여러분들의 자식 교육에 정말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본받습니다.” 제가 지금 한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는데....., 

  

“여러분들이 세상에다가 과외 시키지 말고 그 돈 가지고 예배당에 바칠 때 자식이 그 부모를 본받고 얼마나 나중에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된 사람이 되겠습니까? 자식 살리는 셈 치고 이번에 하나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목돈 내세요. 푼돈내지 말고, 적금 그런 것 하지 말고, 나중에 적금 깨지면 곤란하니까. 부도나니까. 목돈 딱 생각하고 작정하시고, 물론 기도해보시고, 기도까지 할 것 없고 손들고 나오시고, 특히 벧세메스에 법궤를 메러갈 때 그 암소가 울면서 갔듯이 이 교회는 장로들이 법궤를 메고 가야 합니다. 장로들이 똑바로 서서 교회를 책임져야지, 그래야 하나님의 법궤가 흔들리지 않지, 장로들이 뒤뚱거리면 나중에 법궤가 쏟아지면 안 되니까, 장로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목돈도 내시고, 그 다음에 장립집사 나오면 그 다음에 뒤를 이어서 하시고.....,”이렇게 나가죠.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이 믿는다는 평가를 자신이 할 수 있을 때, 그 뒷부분의 자아가 엉터리 자아입니다. 그게 엉터리 자아에요. 정말 한국교회가 믿음이 있다는 그 행함의 내용을 몰라요. 정말 몰라요. 믿음의 행함을 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이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라고 가르쳐줬지,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그 믿음의 행함이 뭔지를 정말 안 가르쳐줬어요.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꼭 이런 사람 같아요. 마틴 루터 킹 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암살당해서 죽은 사람인데, 저는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 미국에서는 그 사람이 죽은 날이 공휴일로 되어 있어가지고, 뭐 인권을 외쳤다나, 성경에 무슨 인권이 있습니까? 죄인들에게 무슨 인권이 있습니까? 이렇게 유명한데, 그 사람의 무슨 설교로 유명했느냐 하면 I Have a Dream(아이 해브 어 드림), 오늘 영어로 방언한다.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외쳤어요.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I Have a Dream(아이 해브 어 드림), 아바ABBA그룹에도 그런 노래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꿈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맘마미아에 보면 아바그룹, 스웨덴 그룹이 부르는 노래, 드림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나는 마틴 루터 킹이 I Have a Dream(아이 해브 어 드림),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근데 뭐가 웃기느냐 하면 그 꿈이 뭔지를 몰라요. 사람들한테 호소를 하기를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나도 꿈 가져야지, 나도 꿈 가져야지, 그래서 마틴 루터 킹이 위대한 사람, 흑인 인권지도자가 된 거예요. 근데 그 꿈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믿음보다 중요한 건데요,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을 하면서 자꾸 자기 꿈과 믿음 내용을 지연시킵니다. 자꾸 지연시켜요. 꿈은 달성되면 반칙이에요. 꿈은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허무하니까. 계속 꿈을 꾸고 꿈을 꾸고 꿈을 꾸는 거예요. 꿈 자체가 꿈이 된 거예요. 헛방이죠. 헛방믿음. 아무것도 없어요. 꿈 꾼 자체가 그게 희망이 된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노리느냐 하면 구원받고자 하고, 내가 믿는 자 되고, 내가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겠다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들어있어요. 

  

마틴 루터 킹 이라는 사람에게 뭐가 들어 있느냐, 자기 몸뚱아리 들어있어요. 자기 몸이 들어있어요.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이라는 것은 누구도 나에게 간섭할 자격이 없고, 누구도 나를 터치하지 말라는 그게 들어있어요. 그게 마틴 루터 킹이 나는 꿈을 갖고 있다고 하니까, 모든 인간들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가지고, 마귀의 속성을 갖고 있어가지고, 니만 꿈이 있나? 나도 꿈이 있다. 우린 다 꿈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는 한편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등하다는 거죠. 개꿈 같은 꿈들을 갖고 있으니까 평등하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진짜 이웃사람에게 포도 몇 개 주고, 포도원 들어갈 때 낫 들고 안 들어가고 그릇 안 들고 가면 이게 곧 진짜 구원받는 믿음이겠어요? 행함이겠어요? 이것 때문에 신명기가 주어진 것은 아니거든요. 진짜 믿음이라는 합당한 행함이 궁금해요? 신명기 마지막 해답이 신약에서 이루어진다는, 신명기 내용이 신약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궁금해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입니다. 거기에 믿음의 행함이 나옵니다. 어떤 믿음의 행함이 나오는지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거는 세월호에서 애들 죽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학여행 하러 가다 죽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들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인데 누가 태어났느냐 하면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 마을은 재수 되게 없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나니까 예수님 태어난 아래로 다 죽여라. 이것이 헤롯의 권력을 동원해서 경찰군대를 보내서 다 죽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적수, 원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 행함과 관련이 있다고 본 거예요. 이 땅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행함은 뭐냐, 믿음에 합당한 행함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고난을 받았느냐, 그게 복된 거예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이 있죠. 팔복인지 십복인지 누가 지어놨는지, 하도 지 맘대로 팔복이라고 해가지고, 동방박사 세 명이 없는데 세 명이라고 하고 있죠. 오른편에 있는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오른편에 없어요.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는지, 성경에 없는 이야기가 많아요. 루시퍼가 마귀라고 하는데 루시퍼는 마귀가 아니에요. 루시퍼는 그냥 별이름이야기인데. 어쨌든 그런 건데, 마태복음 5장 11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게 복인데, 누가 이런 복을 방해합니까? 상식적인 복, 양심에 준해서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복, 자기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깨어지기 싫은 복, 예수 니는 니고 나는 나다, 라고 우기는 끈질긴 집착. 이거는 행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마의 행함이죠. 우리가 자기 자신의 잘남과 믿음이 있는 신앙이 있다고 자부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요소,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측정할 때에, 이러니까 나는 신앙인이 맞다고 하는 모든 요소가 진짜 예수님에게서 일으킨 사태, 사건에 의해서 생긴 그 복된 증거물들을 덮어버립니다. 망쳐버리는 거예요. 

  

마틴 루터 킹은 인간의 출발점을 거부했어요. 인간은 죄인인데 그걸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고 얼마든지 이 땅에서 신이 될 수 있는 자격자라고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이름이 부끄러워요. 마틴 루터 킹. 루터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요. 루터는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이에요. 자기 아버지가 희한하게도 이름을 지어놨어요. 

  

이게 그 행함을, 성경에서 말하는 그 행함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것이 아니고, 진짜 주께서 일으키는 행함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야 해요. 내 속에 어떤 요소가 주님이 주신 복된 증거물들을 무시하고 모독하고 그걸 덮어버리려고 하는 그 행함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 행함에 대한 좋은 예가 담뱃갑에 나와요. 사실 저는 담뱃값이 얼마인지, 막걸리 값이 얼마인지, 소주 값이 얼마인지 몰라요. 막걸리 값이 1,800원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헐값이에요? 제가 대통령이 되면 막걸리 값을 한 25만원이나 18만원으로 하겠어요. 제 2의 허경영. 허경영이 여기에서 강연한다고 해요. 포스터 막 붙여놨어요. “반갑다 허경영!” 그렇게 헐값이에요? 그러니까 마구 마시죠. 음료수처럼. 코가콜라도 1,800원이 넘겠다. 

  

담뱃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런 것이 있어요. 담배를 피울 시에 이렇게 험한 꼴이 됩니다. 암 경고문구가 들어있어요. 세상에! 담배회사가 담배를 피우면 이런 험한 꼴이 난다는 경고를 붙여놨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인간의 용기를 자극하는 겁니다. 적어도 이런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이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격려가 돼버렸어요. 내가 얼마나 마초 같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까짓것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용기를 북돋아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진짜 행함을 가리는 악마적인 행함입니다. 나는 포도원에 갈 때 절대로 낫 들고 가지 않고 그릇을 들고 가지 않겠다.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이 정도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합치된 행함으로 내가 믿는 자임을 과시하리라.” 이게 진짜 주신 주님의 행함을 훼방하는 겁니다. 야고보서 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에 대한 증거는 놀랍게도 그것이 인간의 양심에 준해서 나온, 인간의 상식적인 것에서 나온 그런 행함이 아닙니다. 무슨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요, 어떻게 거짓말 하는 기생 라합이 칭찬을 받는, 이런 낯설기 짝이 없는, 저런 것도 어떻게 행함에 포함이 돼? 라고 할 정도의 그런 행함으로 보이라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신 행함은 니가 노리는 행함을 비켜서, 그것을 비켜서, 그것에 동조하지 않고, 합치되지 않고, 엉뚱하게 새롭게 나올 때 그게 행함이 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에 있는 나무보고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빠질 것이요, 라는 말씀이 나와요. 그럼 그걸 보는 인간은 일단 뭘 기다리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뒷산에 있는 나무를 뽑아서 저 동해바다에 빠트릴 것인가? 그걸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염력이라는 것이 있어요. 염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 있는 테이블 같은 것에 정신 집중을 하게 되면 알파베타파가 나와 가지고 가만히 있는 테이블이 움직일 때, 자기는 진짜 신기한 믿음의 염력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거죠. 안수하는 권사들 보면 염력처럼 그냥 해도 되는데 벌벌 떠는 거예요. 안마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내가 이렇게 애를 쓰면 니가 대충 반응을 나타내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합당하게 선을 이루자.” 이런 식으로. “아이구, 그렇게 하니까 믿습니다.”하는 것 있잖아요. 

  

전에 이야기했듯이 점쟁이가 사람을 몰라요. 점쟁이한테 찾아오는 고객이 호응을 보여주게 되면 아주 좋은 관계, 우호적인 관계로 그 점집을 떠날 수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가정에 어려움이 있네?” 그러면 “아이구, 맞아요.” 하면서 발설을 다 해요. 돈도 지가 내고, 내용도 지가 다 이야기하고, 점쟁이는 용한 점쟁이로 떠받치고요. 그거하고 똑같은 것이 뭐냐 하면 “기도하면 응답받씁니다. 믿씁니까?” 똑같은 거예요. 그럼 응답을 지가 다 끄집어내. 뭐 짜고 치는 정도가 아니죠. 

  

마태복음에서 베들레헴의 아이들은 정말 생판 내가 귀하게 키운 자식들이 죽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다녀가신 것도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애가 죽어야 될 이유가 그 예수 때문이에요. 그럼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헤롯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원망하지 않아요. 경찰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구를 원망하느냐? 바로 예수 원망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믿음에 합당한 행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 믿기로 작심하는 그 행함, 내가 안 믿기로 작심하는 그 노력, 그 노력이 이미 믿는 자이기 때문에 발생되는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죠. 내가 안 믿기로 노력한다는 자체가 내 힘으로 빼낼 수 없는 믿음이 왔다는 증거에요.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같은 본문 말씀을 “그냥 그대로 지키면 되지. 내가 믿는 자 맞네.” 이렇게 된다면 오해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그대로 실습에 옮기는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룻기 2장에 보면 나옵니다. 나오미 이야기 나오고 룻 이야기 나와요. 그때 나오미가 뭘 했는가? 나오미가 아들 둘 다 죽고 다시 모압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온 것을 여러분이 아시죠? 그래서 살 길이 막막하니까, 땅이 있어야 살아요. 과부 둘이 살 길이 막막하니까 유력한 자 보아스 집에 가서 일을 하는데, 시어미니가 며느리에게 시킵니다. 뭐냐 하면 따먹기만 해라가 아닙니다. 많이 주워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 말씀에 위배돼요. 뭔가 떨어진 것을 따먹기만 하되, 따먹은 것은 집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했는데, 룻기 2장과 그 뒤에 나오는 보아스는 아예 그냥 빈손으로 집으로 가지 말고 여기다가 여섯 번 되를 주어 가로되, 그러니까 뭐냐 하면 룻기 3장 16절에 보면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니” 17절,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면 이르기를 빈손으로 내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그릇에 여섯 번이나 담아서 니 시어미니한테 잘해주라고 한 거예요. 

  

오늘 본문과 정면으로 충돌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웃에게 뭘 할 때, 우리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물건과 물체와 돈을 가지느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왜 나 같은 인간을 살리고자 옆집에 포도원이 꼭 있어야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왜 옆집의 포도원은 잘 되고 내 포도원은 말아먹어가지고 겨우 옆집에 가서 떨어진 포도나 주워 먹을 신세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야만 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떠나서 누구십니까? 도대체 안 믿고자 하는데 왜 자꾸 믿게 합니까? 당신은 누구세요? 라는 것에 선이 닿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 교회 안 갈래.” “그래, 가지마!”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래, 믿지 마! 누가 믿으랬어?” 그 이야기를 실제로 믿는 사람한테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부탁해요. 믿지 마세요. 십자가 믿지 마시고 예수 믿지 마세요. 

  

그래도 못 견디거든, 내가 믿어서 믿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이 애 먹일 때 어떻게 합니까? “너는 내 자식 아니다.” 무슨 뜻이에요? “내 자식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니가 나가 죽어도 니 안 찾을 거야. 나는 니가 교도소에 가도 안 찾아 갈 거야.” 무슨 뜻입니까? 나는 그 정도로 신경 많이 쓴다는 소리거든요. 이미 내 자식이거든요. 참, 미국에서 여기까지 자식이 왔네요. “에이, 니 몰라. 나는 니 몰라.”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니 사랑해. 니는 I Have a Dream(아이 해브 어 드림), 나의 꿈이야.” 

  

주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줬다고 했잖아요. 그걸 허투루 듣지 마세요. 그 선물이 선물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안 믿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아는 모든 상식을 통해서 그 예수를 안 믿기로 작심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주께서는 우리를 예상 못할 환난과 고난을 예수님 때문에 당하게 만들어요. 아, 이것이 내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니는 나하고 한통속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행함이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믿는 자,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교회 다니면 다 천국 가는 줄 알았습니다. 주여, 천국은 주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