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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27강-이혼과 재혼(신24;1-4) 1704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3. 07:19
2017-04-02 14:53:08조회 : 26         
   이혼과 재혼 17040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이혼과 재혼(신명기 24: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5Jt77eoFEYw, Hit:0
 이근호17-04-02 15:46 

이혼과 재혼 

2017년 4월 2일                           본문 말씀: 신명기 24:1-4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4: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24:3)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24: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결혼해서 이 거룩한 땅에 죄가 발생된다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혼인케 하지 못하게 하시는 그냥 그대로의 숫자를 가지고 천국 구성을 완료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혼인케 하시고 그로 인하여 범죄를 낳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못짓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더 노골화하는 용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혼인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을 본인들의 자아가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아무리 ‘정신적인 사랑’으로 유지하자도 해도 역시 같이 한 집안에 있어 늘 붙어다니지 아니하면 못 견디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말로만이 사랑이 아니라 신체적 결합을 갖도록 유도됩니다. 

참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닙니다. 이 관계를 통해서 자식이 태어나고, 자식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해도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목숨 바치고서라도 자식을 지키고 싶은 심정이 어미의 마음인데 이 어미의 마음으로 인해 자식은 어릴 때 필요한 생존요건들이 자연스럽게 충족되어 자라나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은 왜 자식을 사랑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아무리 자신을 편하게 굴리고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타고난 육체의 욕망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존재들을 하나님의 율법의 망 속에 끌어당겨서 그들은 율법 적용의 대상자가 되도록 ‘주체화’시킵니다. 

말씀 안에서의 주체란 하나님의 주시(注視)하심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말씀에 위배하게 되면 저주의 징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말씀대로 살면 축복이 주어지겠지만 이럴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인간의 대단함이나 정상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정반대로 주어진 겁니다. 

갈라디아서 3:17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3:6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믿음으로 의인됨’이 확정적입니다. 이런 약속을 부각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람케 하는 방법을 수용하셨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즉 어떤 자도 자기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율법의 개입으로 온 세상이 율법의 천지로 만들어서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의 지적에서 벗어날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밝혀지게 됩니다. 

즉 “결혼생활을 죄 안 짓고 바르게 살자”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 비-현실적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가정이 남성 중심으로 정착이 됩니다. 이로서 여성들은 땅 소유에서 배제되면서부터 철저하게 남자 가문에 얶매이게 됩니다. 여자는 일종의 가구처럼 간주되었습니다. 

무주물(無主物), 즉 ‘주인이 없는 물건’처럼 취급당하기 일 수 있습니다. 남성의 욕망은 한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어떤 핑계서 대어서라도 자신의 욕정이 이끄는 대로 살다보니 먼저 혼인한 아내가 거추장스러워서 내어쫓기 일수입니다. 불쌍하게 되는 쪽은 여자쪽입니다. 

남자들의 이 완악함 때문에 범람하는 피해 여성으로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혼증거’를 써주어서 정식으로 전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했음을 나타내게 되면, 이후에 그 어떤 남자를 만나도 그 사회에서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로 인정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이 또 후발주자 남편으로부터 쫓기거나 혹은 남편이 죽게 되는 경우, 여자쪽에서 자기 살기 위해 처음의 남편을 혼인을 요청할 때는, 처음 남편은 이런 여성의 청을 거절해야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이미 다른 남자를 거쳐 왔기에 몸이 더럽혀졌다는 겁니다. 이는 곧 개인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율법의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혼인관계에 동원되는 법이란 부부의 만족을 위한 법이 아니라 남자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그 신비로움을 담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남자나 인간들의 욕정에 의해서 이런 본래의 부부의 취지는 묵살되고 각자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혼인생활을 하면서부터 인간들이 죄성은 결혼과 이혼과 재혼을 통해서 여과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9:6-10에 보면,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혼 원칙을 들은 제자들을 낙담을 하면서 자신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즉 “이럴 같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결혼이 마치 덫에 걸린 제도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만큼 평소에 자기 마음대로 욕정을 정당화시키는 용도로 혼인제도를 다루었다는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열매를 따먹을 때는 줄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듯이, 혼인의 배후에는 복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7:1-4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결혼이란 이미 죽은 남편과의 관계라는 점을 성령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편이 죽은 자에게는 그 어떤 간음법에도 저촉을 받지 않는 것처럼 성령이 남편이 되심은 신부되는 성도로 하여금 더 이상 율법에 얶매이지 않아도 되는 신분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처럼 이 땅의 결혼이란 영원한 족쇄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는 따로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교만을 동원해서 덮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4-03 06:08 
127강-신 24장 1-4절(이혼과 재혼)1704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4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8페이지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오늘 나온 범죄는 어떤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서 남편한테 버림을 받았는데, 그 남자가 “나하고는 헤어지지만 다른 남자 만나서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해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여자를 내보냈는데, 그 여자가 또 다른 남자하고 만났는데, 그걸 여기에서는 나중에 만난 남편이라고 해서 후부라고 해요. 전남편을 전부, 여기서는 후부, 생전 처음 쓰는 단어가 나왔어요. 참 복잡하죠. 

  

또 그 남자가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혼증서를 써 줘가지고 내보냈다든지, 이렇게 했을 때에 그 여자가 “역시 옛날 그 남자가 좋았어.”하고 다시 처음 남편과 혼인하게 되면 그것이 여호와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되고 여호와의 땅에서 범죄케 하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범죄를 안 저지르려면 아예 애초부터 결혼을 안 하면 대요. 결혼을 안 하게 되면 결혼 자체도 없고, 결혼도 없으면 이혼도 없고, 이혼도 없으면 재혼도 없고 복잡할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에 죄를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결혼하지 말라고 해서 이런 문젯거리가 없는데, 결혼은 결혼대로 하라고 해놓고 이렇게 할 경우에는 범죄거리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약속의 땅에서, 이 땅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가 착하게, 바르게 사느냐를 보여주는 땅이 아니고,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오늘 다루는 신명기 이 말씀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고 해요. 율법. 그러면 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죄를 더욱더 더 죄 되게 들추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줬을 때에 괜히 죄를 들추어내면 죄가 더 많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들추어내기 전에도 죄가 있었었고 다만 율법이 추가돼서 죄가 들춰진다 그 뿐이지, 죄를 들추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그 율법을 그렇게 들추어내서 부끄럽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율법이 죄를 들추어내더라도, 니가 죄인으로 발각되더라도, 그 전에 미리 줬던 것이 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 약속은 나중에 니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니가 나쁜 사람이냐를 아무리 밝히더라도 그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먼저 약속이 뭐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없이 의인이 되었는데, 율법 없이 의인되었으니까 아브라함은 원래부터 의인이고, 그 자손도 원래부터 의인인가? NO!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이죠. 

  

인간이 믿고 난 뒤에 바르게 행하면 되잖아요? 그걸 왜 거부하시는가? 그 이유는 그 뒤에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비로소 아하!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할 위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 원칙은 천국 갈 때까지 요지부동,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너희 죄를 너희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지난 주 낮 설교의 말씀처럼,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그 앞에 어떤 율법이 와도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 본문을 봐야 돼요. 이걸 가지고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합니다. 이미 생명을 가진 자의 여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영생을 가진 자의 여유가 뭐냐 하면, “자, 천국은 왔고 마음껏 찍어봐라!” 요리조리 찍고 MRI찍어서 마음껏 나로 하여금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들추어내면 낼수록 우리는 감사와 감사만 더 짙어질 뿐입니다. 

  

제가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목적을 두지 말라고요. 왜 목적을 두지 말라고 하게 되면, 목적을 두게 되면 감사가 사라져요. 목적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야무지게 산다고, “나중에 감사합시다. 지금은 감사 안 합니다.”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이 목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마귀적이고 악마적입니까? 우리의 목적 필요 없어요. 주의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냥 넘어가는, 유월절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느긋한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취지로 주셨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이유가 나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결혼이라는 것은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한다는 거예요. 

  

욕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인데, 마태복음 19장에서 그런 사람은 천국을 위해서 고자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 따로 있으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나 흉내 내지 마라. 그냥 땡기거든 결혼해라 이 말입니다. 결혼한 것을 잘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 안 하나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이왕 죄인인 거 뺄 거 뭐 있어요. 이왕 죄인인 거. 

  

이혼도 마찬가지고 재혼도 마찬가지에요. 뭐 이거 빼고 자시고 한다고 해서 의인되는 거 없습니다. 재혼을 하든, 졸혼을 하든, 졸혼이라는 의미가 정식 이혼은 아니면서 별거중인 것을, 정서적으로 교류가 끊어진 것을 졸혼이라고 합니다. 정서적으로 “누구세요?”이런 것은 졸혼이죠. “안방에 있는 사람 누구세요?” “밥도 니가 알아서 해먹으세요.” 따로 간섭 안 하고, 서로서로 일체 간섭 안 하고, 그냥 재정적인 문제로 한 집에서는 살되, 내가 아침에 나가서 뭘 하든 일체 간섭 안 하고, 내가 어디 가서 자고 오든지 여행을 가든지 일체 간섭 안 하고, 니도 니 돈 쓰고 내도 내 돈 쓰고. 그러면서도 이혼하려고 하니까 번거롭고. 그게 졸혼입니다. 참, 백일섭씨가 멋진 거 만들어놨어요. 

  

어쨌든 그렇게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향한 목적이 있습니다. 너를 철저하게 요모조모 다루어서 기어이 너 같은 죄인도 구원받았다는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앞장세워서 외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조기 같은 것을 구울 때 그냥 굽는 것이 아니죠. 뜨겁다고 지가 알아서 돌아눕는 것이 아니니까. 자꾸 젓가락 가지고 들춰줘야 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몇 년도까지는 이렇게 누워 있다가, 몇 년도에서 몇 년도까지는 모로 있다가, 몇 년도에는 이렇게 엎어져 살다가, 주께서는 젓가락가지고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죄인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리보고 저리보고 죄인~♬ 죄인~♬ 죄인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젓가락 가지고 설치는데 우리는 거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가? 버리고 싶은데요. 뭐. 여기에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수치 된다는 내용이 뭐냐 이거에요. 수치 된다는 내용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합니다. 남편을 즐겁게 못했다는 거예요. 남편 장단을 어느새 다 맞춰줍니까? 어느새. 남편을 즐겁게 못했다, 즐겁지 못한 니가 잘못이지. 왜 가만히 있는 아내보고 닦달을 냅니까? 

  

그런데 남자는 즐겁게 못했다는 이유로 쫓아내버려요. 이걸 로마시대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주물이라고 해요. 無主物. 주인이 없는 물건을 무주물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바깥에 내놓는 가구 및 아내도 포함이 됩니다. 내놓은 여자는 가구가 되어서 필요한 분은 아무나 가져가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무나. 그냥 가져가면 너무 당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써서 정식으로 이혼했으니까 가져가셔서 아내 삼아도 탈이 없습니다. 중고시장에 내놓은 거예요. 인물 꾸며가지고 11번 홈쇼핑에 내놓는 겁니다. 아랍도 그렇거든요. 인물보고 키보고 스타일 보고 해서 가져가려면 가져가되 월 몇 만원 보장하고. 이래되는 겁니다. 

  

그 당시의 여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건취급 받는 거예요. 지금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농경정착시대에는 힘을 덜 쓰는 쪽은 어떤 주도권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농경시대에는 가부장제도라고 해서. 그런데 이런 시대에 아내가 이런 설움을 당할 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주셨는가 하면 인간이 그냥 이런 말씀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 내가 싫어서 여자를 내보낸 것이 돼요. 

  

이제부터는 약간 어려운데 잘 들으셔야 돼요. 성경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나는 그 여자와 사는 게 조금 지루해진 느낌이 들어. 신품 나왔는데 어느 정도 되면 중고니까 갈아치울 시점이 된 것 같아.” 갈아치우려고 틈을 노리다가 “밥을 왜 이렇게 하느냐? 나가! 이혼증서는 써줄게.”라고 하면서 내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냥 성질 더러운 남자가 참 불쌍한 여자를 객지로 내보낸다는 것으로 이렇게 끝나고 말지만, 성경에서 딱 이렇게 “남자가 여자를 내보내매” 이렇게 돼버리면 그 남자는 주체라는 이름으로 성경 안에 들어오게 돼요. 주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내 성질대로 했더라도 율법의 저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저촉을 받게 되었다는 말은 저주와 징벌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그런 환경 안에 들어오게 돼요. 이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19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상당히 재미나는 대목이 나와요. 19장 3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기에서는 아무 연고 없이, 근데 신명기에서는 수치 되는 일이 있거든 내어보내라고 했고. 이건 사실은요, 이런 핑계대려면 얼마든지 핑계 댈 수 있고, 이런 건더기 끄집어내려면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 있어요. “부부사이는 본인밖에 몰라.” 이래가지고 남들한테 “니는 모르지만 나한테는 수치스러웠어. 남편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나가!” 그럼 친척들이 와가지고 “어떤 면에서 그랬는데?”라고 하면 “몰라도 돼. 너희들은. 내가 수치스러우면 수치스러운 거야.” 이렇게 말 한마디 하면 끝나잖아요. 

  

쉽게 말해서 열매를 따먹을 때 우리는 열매를 똑 따먹지만 사람은 똑 따먹을 수가 없어요. 뒤에 줄기가 있어요. 그 뒤 줄기에 여호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명기 말씀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율법 속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의 행동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냐, 축복이냐를 가름하는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아무 연고 없이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 물으니까 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 함이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이자 많이 준다고 해서 남편이 방송해서 번 수십억을 투자해서 다 날려버렸어요. 아내한테 돈 맡겨놓으면 돈이 다 날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혼감이죠. 돈이 수십억이 날아갔는데. 김구라 이야기입니다. 수십억이 날아갔는데 이건 이혼을 해야죠. 그런데 간음한 적은 없어요. 어쩔 건데? 아내가 사기죄로 들어가면 수발들어야 됩니까? 나와서 또 그 행세할 텐데. 인간을 변하지 않고 매 똑같을 텐데. 

이 말이 그 당시 남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이었는가 하면은, 다시 말해서 남자가 여자의 주인인데 주인이 자기 물건을 음행한 연고 외에 못 버린다고 하니까, 이 패를 버리고 싶은데, 못 버린다고 하니까 짜증나는데, 이거는 결혼 자체가 마치 족쇄처럼, 철컥하고 수갑 채워진 느낌이 드니까, 남자로서는 얼마나 인생이 힘들겠어요? 앞으로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기가 찬다 이 말이죠. 저런 여자하고 계속 살라고 하니까 집구석에 들어가기도 싫고, 들어가면 자기가 율법적인 것에 매여 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충격적인 발언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9장 10절에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아! 이게 바로 본심이에요. 이게 본심이다 말이죠. 결혼을 위해서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결혼한 거예요.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갖고 놀고 좋다고 결혼한 거예요. 갖고 놀기 좋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랍남자들한테는 네 명까지도 허용이 돼요. 네 명까지. 또 뭐 아랍으로 이민 간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좋겠네~ 너희 나라는 네 명까지 되니까 좋겠네?”라고 하니까 아랍남자가 하는 말이 “하나도 감당 안 되는데 니도 네 명까지 살아봐라. 서로 싸워 싸서 집구석 가기도 싫다.” 그리고 돈이 되는 남자라야 네 명이지, 하나도 못 먹고 살면서 네 명은 못 건드려요. 여기 여자 네 명 있어보세요. 옛날 임금들이 50대에 다 죽었어요. 왜 죽었을까요? 아내가 많아서 죽은 거예요. 이거는 근거 있는 이야기에요. 설민석이 이야기한 겁니다. 역사 강사가 이야기 다 한 거예요. 

  

그럼 처음부터 결혼 안 한 것이 낫겠네요? 결혼해서 하나의 법에 예속되어가지고 빼도 박도 못할 바에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 때에 바로 고린도전서에서 결혼은 니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고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육신이 결혼을 꼭 해야 되겠다고 너에게 강요를 했기 때문에 너는 결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혼하는 것도, 재혼하는 것도 니가 니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육신이 되는대로 하는 거예요. 젓가락입니다. 젓가락. 

  

주께서 젓가락가지고 하게 하시면 하는 거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일곱 번 했거든요. 여섯 번 하면 그만하고 싶죠. 전 세계 기네스북에 올라간 사람이 서른다섯 번 해서 최고라고 하던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 유퉁이라는 사람도 몽골여자하고 여덟 번째 했어요. 그래서 댓글에 욕해가지고 유퉁이라는 사람은 댓글 쓴 사람을 또 고소한다고 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 일곱 번 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남이 몇 번 하든 가만히 있지 욕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욕을 하는 이유가 자기도 하고 싶었는데 자기는 안 되고 저쪽은 되니까 약이 오른 거예요. 왜 부자를 욕합니까? 지는 부자가 아니라서 욕 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이 말씀은, 만약에 여자를 내보냈는데, 이혼을 했는데 여자가 계속 재혼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때는 자기 원래 있던 남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게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와요. 7장 11절,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렇게 하면 간음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3장 1절에 보면 어떤 여자가 남편하고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해놓고 그 남자가 이혼하거나 죽거나 해서 다시 본 남자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거는 간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하고 똑같아요. “가령 사람에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절대로 받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 율법의 그 뒤 줄기 부분에 뭐가 있느냐, 그 뒤 줄기 부분에 로마서 7장이 있습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로마서 7장 1절에서 4절. 어떤 목사님은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로마서 7장 1절에서 4절을 가지고 주례를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대단한 용기인데요. 도대체 어떤 본문이기에 이 말씀을 하느냐?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결혼식 주례를 했다 이 말이죠. 듣는 사람은 결혼식 주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 듣는 거예요. 복음에 대해서. 

  

이게 뭐냐 하면 결혼을 해야 될 이유가 사람은 왜 죽고, 사람은 어디에 다시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남편하고 살 동안에, 그 사는 동안에는 그 여자가 다른 남자는 예뻐하면 안 돼요. 그거는 간음죄가 되는 겁니다. 간음죄. 결혼하고 난 뒤에 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간음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을 인간들끼리 남녀 간에 시킨 거예요. 이 간음죄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결혼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하고 아내가 살다가 자꾸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장동건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자꾸 생각한다, 그것도 간음죄에요. 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삽니까? 하는 식으로 성경을 봐서는 안 되고, 자꾸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가진 자의 여유, 느긋한 입장에서. 

  

그렇게 될 때, 남편이 죽었다 하게 되면, 남편이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남자를 골라, 골라잡아서 결혼을 할 수가 있어요. 이거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남편을 골라간다 이 말이죠. 이 말이 뭐냐 하면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 어디에? 법에 의해서. 결혼을 왜 했느냐 하면 결혼 하나 안 하나 천국 가는 것하고는 관계없다는 거예요. 천국 가는 것. 

  

영원한 예수님하고 결혼하는 데에 있어서, 왜 이 세상의 남편은 제대로 된 남편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의 남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 법에 의해서. 사람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서 아예 법에 의해서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 새로운 남편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는 진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성령이 오기 위해서 기존의 남편을 죽은 자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살아도 이거는 사는 것이 아니고, 남편과 결혼을 위해서 사는 것은, 그것은 거짓된 행복이고, 거짓된 행복은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알기 때문에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자청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다. 왜? 자청하느냐? 결혼해서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말이 아니고, 저 사람에게 완전히 몰빵 해야지, 라는 그 짧은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뭐 몰빵 할 가치가 있나? 이런 생각이 도파민 역할에 의해서 6~7년 내지, 2년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도 한 때의 욱하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양쪽 다 같이 느끼는 겁니다. 느끼게 돼요. 그렇다고 일찍 졸혼하지 말고. 

  

사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제외해놓고 사회를 구성해요. 그럼 그동안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 것은 뭐냐, 성경말씀이 아닙니다. “니가 그리 안 하면 나는 너를 딸로 안 여긴다. 아들로 안 여긴다. 니는 쓰레기야! 쓰레기!” 이게 누가 누구보고 한 이야기지만. “니는 쓰레기야! 니가 그런 아내를 버린다는 것은 니는 쓰레기야! 니가 바람을 피워? 니는 인간도 아니야!” 아버지, 엄마, 온 가족들이 개 취급 할 때, 그것을 인간이 견뎌낼 수 없어서, “그럼 잠시 냉각기간 거쳐서 다시 합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옛날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만 사랑해요. “그럼 목사님! 이혼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사랑하거든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거든. 고마운 줄 알거든 하나님의 은혜에요. 나는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그렇다고 하는 이런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 서로 사랑할 마음이 있거든, 그런 것 없지만 하여튼 있다고 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확 낮춘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이니까 건사해서 살려주지.” 어디 가서 저런 여자를 만나느냐? 이 말입니다. 어디 가서? 

  

어디 가서 이런 아내를 만나고 어디 가서 저런 남편을 만나겠는가? 이거는 특이사항입니다. 특이사항이에요. 가정통신표에 특이사항이 있어요. 갑자기 뭐가 이상하다는 것처럼. 우리가 잘 사는 것은 특이사항이에요. 바라기는 이 특이사항이 좀 오래가기를 바라요. 이게 좀 계속되기를. 좀 많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지, 그렇지 않고 뭔가 마음을 딴 데 두거든 이게 본래 우리마음입니다. 

  

주의 은혜로, 주께서 그러십니다. “니 그 딴 생각 하지 마! 가봐야 별 거 없어. 그 남자가 그 남자고 그 여자가 그 여잔데, 니 한 번 살아봤잖아? 별 거 없지? 대충 그냥 살아. 제일 좋은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제일 좋고, 또 땡기거든 하고, 그거는 말리지는 않겠다만.” 항상 그 뒤 줄기는 새로운 남편, 성령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위해서, 율법을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약속을 위해서, 이 땅에 결혼하게 해주신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결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나밖에 모르는, 자기 행복만 챙기는 이기주의인 것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