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2017년 3월 19일 본문 말씀: 신명기 23:21-23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23:22)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23:23)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은 ‘피를 보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피는 ‘죄’와 관련있습니다. 즉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죄를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들 처지에게 이해하는 죄는 규정짓는 것에 대해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는 자꾸만 ‘실수’ 정도로 여깁니다.
‘실수’란 앞으로 그러한 일을 다시 안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죄의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서 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잘못을 저지르므로서 죄의 영향력과 떨어지는 사이가 아님을 압니다.
‘피를 보고 넘어가’는 원리는 한 번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가는 그 원칙으로 항상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죄에서 의로 나아가는 말이 아니라 죄에서 미처 경험하지 못하는 죄로 더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아무리 헤엄 쳐봤자 물 안에서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인생이란 미처 경험하지 못하는 죄를 짓기 위해 새로운 경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맹세를 했거든 반드시 그 맹세한 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실현치 못하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함으로 의롭지 못한 것으로 판정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파악되지 못할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사법을 통해서 전달되는 ‘피를 보고 넘어가는’ 유월절 원리는 또 다시 그 현장에서 새삼스럽게 부각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물의 피로 하나님의 원리가 마감될까요? 아닙니다. 구약은 신약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서원법의 완성은 예수님에게서 달성됩니다. 마태복음 5:33-37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아예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특히 맹세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고 그 맹세를 친히 이루어내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 오늘 본문에서 벌써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맹세’라는 것을 통해서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위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그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들이 가만히 공손하게 있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맹세를 쏟아내면서 자신의 잘남과 의로움을 구축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의 원칙을 자꾸만 질식되듯이 덮여집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질주하면서 인간의 맹세가 인간의 자존감과 관련있음을 드러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사기 11:31입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을 암몬족속으로부터 해방하는데 있어 자신의 역량을 집어놓고 맹세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승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면서 입다는 그 승리의 가치를 훼손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그 고백이 11:34-35에 나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는 사는 동네에는 참으로 큰 기적을 요하는 일을 버릴 때는 신에게 큰 담보물이라도 내어놓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큰 성과에 큰 뇌물을 바치는 식입니다. 하지만 입다에게는 그 무엇보다 더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무남독녀가 있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의 과도한 성과성에 의해서 자기 딸이 관여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자기 성과성에 딸의 죽음만 마주치게 했습니다. 입다는 탄식하면서 자기 맹세의 경솔함에 후회합니다. 하지만 딸이 입다의 기쁨을 탄식으로 바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어떤 맹세성이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고 훼방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이 암몬만 아니었습니다. 입다의 맹세도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즉 입다는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전쟁에 보탬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보다 더 깊게 보여야 될 죄성을 위함입니다. 옛날 개척시대를 말하는 서부영화에 보면, 허허벌판에 기차가 외롭게 다닙니다.
그러면 보안관 및 총잡이들은 그 열차에 무상으로 올라탑니다. 그러나 앞 기관차 얌전하게 앉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뒤편에 서 있습니다. 그 뒤편에서 보면 지나온 철로가 연이어 뻗어갑니다. 이처럼 열차는 앞으로 달리지만 우리 성도는 인생을 뒤로 보면서 자기에서 뿜어 나오는 각종 죄의 경우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맹세한다는 것은 이처럼 누구보다는 그 당시에 작렬하는 바닥을 체험하라고 것으로 하나님께서 유도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인간들이 다 율법에 따라 죄의 종이 됩니다. 로마서 8:14-16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제 아버지와 같은 식구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야 되는지를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의 원리를 우리의 맹세로 가리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5강-신 23장 21-23절(서원)1703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21-23절입니다. 구약성경 298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우리가 알기에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어린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 서원을, 서원이라는 것은 맹세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들이 맹세를 야무지게 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 온 것이 아니에요. 홍해를 건너온 요소는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어디만 보느냐 하면 피를 봐요. 약속된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간단해도 너무 간단해요. 천국 가는데 이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근데 그 피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 피는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를 살펴서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는가를 살피는 겁니다. 내 안에 내가 만들어낸 것 말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고 들어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쉬운 것을 왜 하느냐,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중, 삼중, 사중, 계속 살아가면서 질식하듯이 이걸 위에서 억눌러버려요. 억눌러버리니까, 어디에 자기가 근심하고 걱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한 실수 때문에 본인이 걱정을 굉장히 해요. ‘아휴! 그때 그런 실수 안 하는 건데? 그때 내가 거기에 투자를 안 했으면, 석산개발에 투자를 안 했으면 사기를 안 당하는데..’ 만날 자기 실수를, 근데 실수하고 죄하고 달라요. 실수는 두 번 다시 안 할 수가 있지만, 죄라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그 전체가 죄라는 범주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죄를 못 다 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미 결론적으로 말해서 피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니가 니 죄를 알렷다! 춘향이는 고개를 들라!” 뭐 이런 게 아니고 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니 죄에 대해서 니가 보상을 한다든지, 보답을 한다든지, 니가 그걸 개선할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주고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그럼 제 말이 맞는다면 오늘 본문 신명기 같으면 이렇게 적을 게 아니라, 신명기 23장 21절 피, 22절 피, 23절 피, 이렇게 피피피피....적어놓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피를 보고 넘어간다면서 뭐 하라, 이것은 하지말라, 그 말씀을 왜 주셨는가? 피를 보고 넘어간다면 간단하게 그렇게 하면 될 건데, 왜 그렇게 하느냐?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피를 생각하게 되면 그 피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우리의 존재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늘 피어나오는 그 죄와 피가 만나야 그 피의 의미를 제대로 규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의 문제가 아니라 죄가 무엇이냐, 죄의 규정문제에요. 죄의 규정문제. 오늘 본문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복잡한데, 간단하게 시작부터 결론까지 압축을 시켜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서원, 니가 입으로 한 것은 다 갚으라고 한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레위기 7장에 나오는 속건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뭐냐 제사에요. 피 있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라는 제사에, 왜 속건제의 규칙이 꼭 있어야 되는가? 그 속건제의 제사에 그 피가 그런 방식으로 흘려져야 할 이유는 인간들이 함부로 서원하면서 그 서원한 결과로, 본인이 그 서원한 행함으로, 의로써 구원받겠다는 이 죄. “나는 이렇게 행했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 더 착해.”라는 그 착함가지고 구원받겠다는, 그 착함이 나오는 바탕이 서원, 맹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사가 진찰 할 때에 가슴 아프다고 하는데, 발 한 번 보자고 하면, 뭐 발톱 깎을 일 있습니까? 왜 그걸 봐요?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가슴 쪽을 봐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가 되는 그 지점에서 시작을 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길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지갑을 찾아준다고 하면서 가로등 밑에서 찾아요. 왜냐하면 거기가 밝거든요. 밝으니까 찾기가 쉽죠. 근데 지갑은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어두운데서 잃어버렸으면 어두운데서 찾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냥 순종하겠나이다. 순종하면 천국 보내주죠?” 이런 마음 가지고 자기가 아는 밝은데서 성경을 찾아요. 그러면 밝은데서 순종, 순종하다보면 자꾸 뭐가 어두워지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진짜 본질은 자꾸 감추어지고 어두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출발을 어디서 하느냐 하면, 속건제로부터, 쉽게 말해서 피 있는 제사로부터 율법을 거쳤다가 다시 어디로 가느냐, 피 있는 제사로 되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가, 어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다 피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시킨 그 피의 효과에 대해서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그 넓은 삼각주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방금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또 잊어버리겠죠. 간단하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피의 취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피의 제사 중에서 속건제가 있는데, 속건제의 취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맹세와 관련된 그런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럼 주셨으면, 그럼 제사도 지키고 맹세도 지키면 그 당시 사람들은 구원받습니까? 제사도 드렸다,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것도 안다, 그 다음에 서원한 것을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해버리면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서원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받게 되면, 이 구원받는 조건이 갑자기 피를 보고 넘어가다가 한 개가 더 추가가 돼버려요. 십자가도 믿어야 되고 바르게도 살아야 되고.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도 다 지켜야 되고. 이렇게 돼버리면 그거는 아까 피에서 시작해서 피로 돌아가는 그 취지가 중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옛날 서부영화에 보게 되면 어떤 특징들이 있냐면, 서부개척지에 기관차가 달리고, 거기 카우보이들이라든지, 보안관들이라든지 나오고 하죠. 근데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쯤 되면 기관차가 달릴 때 꼭 공짜로 타요. 말 타고 가다가 훌쩍 기차에 뛰어들어서 공짜로 타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앞좌석에 곱게 앉아있는 법이 없습니다. 기관차 제일 끝에 칸으로 가요. 폼 나게. 그럼 제일 뒤에서 보게 되면 이미 지나온 기찻길을 계속 보여주죠. 지나간 철로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니가 니 인생에 있어서 니가 얼마나 많은 죄를 방출하고 있는지를 과거를 보면서, 계속 쏟아지는 과거를 보면서 우리는 천국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가기 전에, 오늘 본문은 구약이니까, 그냥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신약 쪽으로 가야 돼요. 신약 쪽으로, 예수님 쪽으로 가서 이제는 모여서 천국 가거든요. 엘리야 모세도 못 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가 완성이 돼야, 모세와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십자가 피를 보고 넘어가는데, 기관차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폼 잡고 카우보이처럼 뒤에서 인디언 말 타고 따라오는 것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공짜로 타면서. 그러면 예수님에게서는, 오늘 본문에서는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되어 있거든요. 맹세한 것은. 참, 이것 때문에 교회에서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새벽기도하면서 말 한 번 잘못해가지고 자식 하나 신학교에 보낸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이 안 되고 가정에 우환이 있으니까, 이거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식으로, “정 그렇다면 제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뭐, 지 아들인가? “신학교 보내겠습니다. 자, 콜!” 보내는 거예요. “정 그렇다면 신학교 보내겠습니다.” 애가 수능이 안 나오면 신학교 보낼 수 있어요. 수능이 서울 어디에 갈 수가 있습니다. 아까워 죽겠어요. 아까워서 신학교 못 보냅니다. “어디 되고 난 뒤에 보내면 안 됩니까?” 어디 되고 난 뒤에 또 못 가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내 입에서 발설한 맹세는 반드시 지키라는 신명기 23장 22절과 23절 말씀 때문에 그런 거예요. 22절 23절 때문에. 기관차가 앞에 탄 거예요. 뒤에 가서 이 말씀에 의해서 죄가 얼마나, 내가 맹세해봐야 못 지킨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라고 이 말씀 줬는데, 기어이 이걸 지켜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말도 안 해요. 이걸 지켜서 아무 죄 없는 내 아들한테 인생에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임하지 않도록, 갑자기 뭐 아토피가 걸린 그런 것이 없도록, 부모가 되어 가지고 헛맹세해서 죄가, 그 저주가 자식한테 덤터기 씌워지게 되면 그 부모가 얼마나 한이 맺히겠습니까? “니가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것은 다 엄마 탓이다. 다 부모 탓이다.” 이러고 다 내 탓이오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거예요. 이거는 자기 꾀에 자기가 그렇게 말려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성경 구약만 보고 앞뒤를 볼 줄을 몰라요. 마태복음 5장 34절에 보면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주께 지키라고 하였다(신명기 23장 22-23)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 지키지도 못할 것을 괜히 맹세를 왜 하느냐?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맹세를 했더라도 그거 취소! 이래라 말입니다. 지워버리라 말입니다. 내 아들 신학교에 보내겠다고 하는 그런 것. 아들 취미가 뭔지도 묻지 않고. 그런 맹세를 자꾸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꾸 맹세를 만드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만큼 자기가 신앙 좋다는 것을 자기가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신앙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아예 없어야 구원받아요. 이게 또 무슨 소리냐 하면 어제 어디 갔는데, 어디 갔다고 말은 못하겠고, 나무를 넣는 연통이 있어요. 보통 연통의 연기가 위로 올라가잖아요? 이거는 밑으로 내려갔다가 밑에서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밑으로 갔다가 쭉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미나리 냄새? 아이고! 미나리 냄새가 배이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피를 보고 넘어가거든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냥 잘난 체 피를 보면 그 피의 의미가 아니에요. 잘난 인간이 피까지 챙겼으니까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그런 피 흘림은 없습니다. 그런 피 흘림과 나와 연관 지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깔아놓은 모든 말씀에 대해서 어느 하나도 지킬 수가 없고, 신약에 오게 되면 아서라 말어라 아예 지킬 생각조차 하지 말어라. 니는 니를 몰라. 나는 니를 알거든. 니는 맹세해봤자 안 되니까 아예 처음부터 맹세조차 하지 마라. 그럼 맹세는 누가 하느냐, 내가 할게. 내가. 맹세는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이게 완성단계입니다. 이게 구약의 완성단계에요. 방금 봤잖아요. 니가 신명기를 봤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고, 아예 어떤 것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땅으로도 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고, 니 머리로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오늘 낮 설교 끝에 주례했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가. 제가 이야기하면 욕 얻어먹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면 욕 안 얻어먹고. 이런 반칙이 어디에 있어요? 자, 그러면 신약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내 맹세의 실천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맹세에 의해서 그게 실천에 옮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실천? 기관차 뒤에 가보면 주께서 맹세하셔서 돌아온 인생, 모든 것이 주님이 피 흘려야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죄만 방출된다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전부 다 지 잘난 체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관차는 피 묻어 있고, 피를 가지고 천국으로 돌진하고 있고, 우리는 피 때문에 줄줄 노출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평생 살아온 죄인데, 죄가 죄 되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를 알 수가 없어요. 말씀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우리를 이렇게 몰아넣으니까, 아, 내 힘으로 구원 안 되는 것이 맞구나! 하는 것이 수긍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맞다면, 이제 그 완성에서는 맹세하지 마라. 오늘 본문에서는 맹세하지 하라. 그러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그 장단 중간에 또 괜찮은 장단이 주어져 있어요. 그 괜찮은 장단이 바로 사사기 11장 1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맹세를 한 사람이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조폭대장 입다 입니다. 입다의 이야기가 사사기 11장 3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 이 사람의 출생지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것이 유행하는, 그것으로 신에게 풍습으로 드리는 있는 지역이에요. 유다지역이 아니고 유다에서 약간 벗어난 암몬지역이 그 지역입니다. 몰렉이라고 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입다라는 사사가 기껏 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면 제가 신이 제일 원하는 사람 제물까지 드리는 것이 저는 되는 겁니다.”라고 했죠. 근데 사람제물 드린다고 했지, 딸을 준다고는 말 안 했어요. 왜? 종들이 많으니까. 종은 노예니까. 그렇게 서원을 하고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를 했는데, 과연 승리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거기에 34절 보니까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요새는 무남독녀가 한 두 집이 아니라 다 무남독녀죠. 35절,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딸이 입다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입다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딸이 입다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입다를 괴롭게 해요. 승리케 하신 하나님이 입다를 괴롭게 합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맹세한,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그 말씀에는 장차오실 자기 아들을 집어넣었는데, 입다는 장차오실 예수님을 생각 안 하고 그거는 자기 잘남과 객기, 자기의 뽐냄, 자기 자신의 자존감,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자기 자존감을 섞어 넣는 거예요.“하나님 나 잘했죠?”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 나 참 잘했죠?” 제가 입다 생각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어느 보수 측의 어떤 목사가 맹세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안식일은 철저히 지킬 테니까 그 대신 교회는 부흥시켜주옵소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렇게 나오니까 딸이 사범대를 나와 가지고 임용고시를 치르는데 하필 일요일에 임용고시를 치른 거예요. 4년 동안 공부해가지고. 옛날이야기입니다만, 딸이 임용고시 치르려고 딱 가는데 아버지가 그 딸의 장래를 막잖아요. “니 교사하지 마라.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니가 내 말에 순종을 하나 안 하나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일요일에 임용고시 치르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시험을 이기면 우리는 복 받는 가정이 되고, 지면 우리는 마귀한테 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교회가 부흥이 안 될 소지가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즘 딸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 사업한다고 내 사업 막습니까?” 이래 나오죠. 그런데 또 옛날이라, “그저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니까 내가 딸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협조해야죠.” 그게 무슨 하나님의 일입니까? 입다의 일이죠.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입다의 일이에요. 성경이 사사기 11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남아 있어요. 근데 입다의 이야기가 왜 있는가? 입다의 죄가 줄줄 새는 거예요. 서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던 죄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입다가 우리를 대표해서 하는 거예요. 맹세하는 자가 마귀로부터 당할 시험거리를 입다가 지금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승리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승리한 거예요. 그래서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예수님 자리에 딴 걸 섞어 넣으면 안 돼요. 자기의 자존감이나 자기가 말씀 순종하는 것이나 이걸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무슨 부흥이 있습니까? 교회는 부흥이 없어요. 교회 안에 부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집사님 삼촌이 있습니까? 없어요? 만약에 삼촌이 있으면 삼촌이 부흥됩니까? 삼촌이 갑자기 세 명, 네 명 돼요? 교회라는 것은 그 존재의 기능, 그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교회를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왔다고 교회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 쓰레기만 오면, 그 쓰레기가 와서, 저는 화투를 못 칩니다마는 피사리만 해가지고 고스톱 이기겠어요? 그 쓰레기 모아가지고 뭐 해요?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죠. 그걸 양적으로 측정하는, 부흥이 됐다, 안 됐다, 거품이 있다, 꺼졌다, 그런 것 없어요. 복음만 전하면, 그리스도만 함께 있으면, 그게 두 세 사람이 모인 것도 교회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참, 사사기 못지않은 더러운 세대에요. 더러운 세대. 자, 그러면 이 서원하지 마라의 제대로 된, 그 당시 이스라엘시대 사사가 이정도니 완전히 개판인데, 개판 같더라도 이 서원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유효할 건데, 유효한 것은 어디에 나옵니까? 그게 바로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와요. 민수기 6장에 보면 거기에 나실인이 나옵니다. 나실인은 서원해야 돼요. 나실인이라고 했는데 나실인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냐 하면 죄를 바닥까지 체험하는 거예요. 남들이 모르는 그 죄를 바닥까지 헤엄쳐서 체험을 하는 그런 임무를 맡은 사람이 나실인입니다. 나실제 괴로움~하는 그 나실인이 아닙니다. ‘실’자가 들어가면 요새 이상해. 순실이. 나실인이라는 것은 도대체 너희들이 죄를 몰라요. 근데 죄를 왜 모르느냐고 하는데, 체험해봤어? 체험? 못 해봤지? 그 당시의 죄를 끝까지 체험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실인인데, 그 사람이 서원이라는 말씀을 갖고 있는, 서원이라는 말씀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완성이 될 때 어떤 죄가 마지막까지 들추어지는가를 실제 체험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목사 되기를 체험했습니다.” 하면 그 목사는 교회 부흥과 관계없이 죄 밑바닥을 체험해야 될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죄의 밑바닥. 그럼 죄의 밑바닥이 어디에 있느냐? 본인이죠. 본인. 우리 십자가마을에, 우리교회에 제가 글을 하나 인용해서 썼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아마존 선교사, 수습선교사가 쓴 글입니다, 돌아가신 허운석 선교사님이 세운 거예요. 엠프부터 마이크 전부 다 허운석 선교사님이 주신 거예요. 거기서 그 글을 읽는 것 자체가 도저히 못 견딜 정도로 힘들어요. 거기에 뭣도 모르고 사명 믿고서 갔죠. 거기서 많이 놀랐나 봐요. 다시 본국에 와서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렇게 수습선교사가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견습 선교사는 아무데로 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어디에서 간다는 것이 의미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는 자리가 아마존자리인데, 아마존 갔다 오고 난 뒤에 아마존이 문제가 아니고, 그 벌레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에요. 아마존에 가서 내 죄를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풍족한 한국 땅에 살면서 내 죄의 깊이가 무엇이냐가 체험이 돼야 돼요. 뭘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아마존에서 벌레만 물린다고 그게 선교사입니까? 아마존에 갈 때 말씀가지고 가야죠. 아마존 보지 말고 주의 말씀과 자기를 비춰보면서 아마존을 가든, 나이지리아를 가든 가야 될 게 아닙니까? 현재 여러분이 있는 이 자리가, 대구가 이게 아마존이에요. 이게 선교지입니다. 여기가.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나실인이고 성도입니다. 거기서 뭘 아느냐, 레위기 6장 소제 번제...나오거든요. 서원하는 이 레위기 이야기가, 제가 좀 쉽게 하려고 합니다. 레위기 7장에 보면 16절에 속건제가 나오는데,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자원과 서원에 대해서 제대로 못 지켰을 경우에는 20퍼센트를 더 추가해서 주고, 그리고 너는 속건제를 드리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 맹세한 자가 하나님 뜻대로 안 될 때는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해서 이 피는 어떤 피냐, 그 속건제에서 나오는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그 하나님의 원칙, 속건제를 통해서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원칙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맹세한 것을 누가 지키는가? 이사야 53장 1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일을 속건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맹세 못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주신 맹세를 내가 이렇게 완성했다는 겁니다. 맹세 완성했으면 그거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죠. 53장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제 갈 길로 도망가는 우리를 잡아다가 자기의 속건제 효과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워서 의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까 우리는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되겠느냐? 그게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이제 최종적인 해답이 나옵니다. 이거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옛날에는 우리가 율법의 종이었어요. 근데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러니까 “아휴! 내가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하는데..신학교 간다고 맹세했으면 신학교 가야지. 안 그러면 저주가 있는데?” 이렇게 율법의 종이 되어서, 율법을 못 지켰다고 벌벌 떨지 말고, 십계명 안 지켰다고 벌벌 떨지 말고, 이제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종이 아니고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아들이기 때문에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들이 해야 될 일이 없어요. 아들이 뭐, 뭐 하면 되느냐, “아버지!” 이거만 하면 돼요. 참, 주께서 쉽게 구원받게 했어요. “아부지에!” 경상도 말로. “아부지에~!”이거만 하면 된다니까요. 양자의 영을 받아서. 그럼 아버지라는 말이 진짜 쉬운데요. 그 아버지를 부를 때는 가족의식을 가지고 불러야 돼요. 가족의식. 내가 내 인생 책임자가 아니고 내 인생의 책임자는 따로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아버지라고 불러야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이런 쉬운 것을 안 하느냐 하면, 자기는 누구하고 가족이 되고 싶지 않아 해요. 혼밥이라고, 혼자 밥 먹고, 혼자서 TV보고, 혼자서 영화보고, 혼자서 울고불고..점점 더 혼자서 살고 싶어 해요. 누구하고 대인관계 사귄다는 것 자체가 귀찮아요. 힘들어요. 짜증나요. 그런 혼자 있다는 의식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 생각이 그렇게 썩 좋아지지 않는 거예요. 그냥 타고난 것이 혼자서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혼자서. 삼겹살도 혼자서 구워먹고, 뭐든지 혼자서. 혼자 하는 것이 제일 편해요. 그게 익숙해졌으니까. 근데 “아부지에~”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저 뭐 제가 할 것은 없고 주께서 선하게 인도하시죠?” 말은 좋게 하는데 자기를 돌아보니까 뭐 별로 선한 것도 없고, 갈수록 이게 난감하고, 엘리야 때처럼 오늘 저녁으로 끝이고, 내일 아침이 보장이 없고, 이런 식으로 갈 때 과연 이 아부지가 아부지가 맞는지, 내가 괜히 없는 아부지를 불러보는 것은 아닌지, 이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흔들릴 때는 이를 빼야죠. 뭐. 아재개그. 우리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만큼 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KTX나 기차를 많이 타는데요. 화장실을 꼭 다녀왔다가 기차를 타는데, 제가 예민하기 때문에. 여태껏 남자 화장실 청소를 아가씨가 하는 것을 못 봤어요. 그렇죠? 아줌마가 하죠? 아가씨가 안 하죠? 왜 아줌마는 되는데 아가씨는 안 될까요? 돈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아직도 혼자서 살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아줌마는 뭐 이제는 남자, 여자가 없어요. 지금 오줌 누고 있는데 중간에 대걸레로 밀면서 막 비키라고 해요. 뭐 부끄러운 것도 없고.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지금 주께서 뭘 시켰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뭘 시켰는가? 나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시킨 겁니다.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보잖아요? 아시다시피 안 보는데, 김과장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상당히 인상깊은 사람이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 회장 아들 망나니인데, 이제 슬슬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착한 일에 협조를 하고, 의인을 도와주고, 의로운 일을 막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냥 남들 하는데, 경리부랑 같이 하는데 그냥 도와줄 뿐이죠. 뭐 보지를 않으니 경리부가 나오는지 뭘 아나? 주님이 하는 일에 우리는 그냥 망나니인데, 슬슬 이제 주님이 하는 일에 협조를 하는 식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느껴지는가, 모든 말씀을 통해서 바닥을 치세요. 무슨 바닥?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라는 바닥을 치시게 되면 모든 일은, 내 일은 남아있고, 그 죄에서 피를 보고 넘어가게 하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증거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으로 살지 말고 이제는 하나의 가족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서 일처리를 다 해놓고, 그게 어떻게 피를 보고 넘어가는지를, 평생을 우리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 예수의 십자가 피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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