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강-신 23장 17-18절(더러운 돈)1703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17-18절입니다. 구약성경 297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들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의 중심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전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 중심에서 확산되어 나가는 의미와 취지가 주변에 퍼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가 제대로 퍼지고 있다,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면은, 이스라엘 중에서 창기나 미동이나 그런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전의 취지가 제대로 확대되어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중간에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짐처럼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가 퍼지고 있지 않다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성경율법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싫다는 거예요. 우리가 싫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창기와 있는 것이 싫어요.” 그래서 창기를 금지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인 내가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알려면 내가 좋은 것과 주님이 좋은 것과, 내가 싫은 것과 주님이 싫은 것과 이게 일치되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일치되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는데 내가 좋을 경우에는 그것을 은밀하게 계속 방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데 그 이스라엘 속에 창녀가 계속 번창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창녀 탓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너희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이스라엘이 맞나? 그것을 지금 확인해보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 번역에 보면 여기 창기가 있고 미동도 있는데, 여기 창기라는 이 단어가 원래 히브리어로는 두 종류로 나누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어 ‘자나’, 그거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를 흔히 말하는 창녀라고 하고, 여기 17절에 나오는 여자 중에 창기라고 하는 것은 이방신전에 가서 그 신에게 헌신하는 사람. 뭐 기도원 원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 다음에 남자 중에 미동이라고 있는데, 이 미동은 남자지만 아까 같은 창기와 동일하게 그 이방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니는 여호와한테 헌신해라. 나는 이 신에게 헌신할게.” 그것을 가지고 창기, 또는 남자라면 미동이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를 믿으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 같으면 아예 창기나 미동이나 그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조치를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런 창기와 미동이 자꾸 나타나게 되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런 식으로 떼를 쓰는 것처럼,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한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몰라요. 여호와를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아 가도록 하나님이 조치하는 대상이지, 인간이 어떻게 여호와를 압니까? 하나님께서 조치하지 않으면 누구도 여호와를 몰라요.
사도바울이 여호와를 안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지 아니하면 이 사도바울도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찾아오니까 아는 겁니다. 그러나 찾아올 때 그냥 빈손으로 찾아오지 않아요. 신명기 23장 17절~18절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는 겁니다. “너희 가운데 창기를 두지 말라.”이런 모든 말씀 가지고 찾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런 것에 관심두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식으로 다가오게 돼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제가 납득이 되도록 해서 믿겠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다가 “니 주변에 그 꼬락서니가 뭐냐? 니 주변을 봐라.”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이 누구시냐 보다도 자기주변 정리하는데 급급하겠죠. “아니, 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럼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럼 우리가 어찌 살라고 이러십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거봐. 니가 그러니까 나를 모르지. 이 하나님을 모르지.” 이런 쪽으로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 16절에 보면 군대를 앞둔 젊은 장병들한테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논산훈련소를 앞둔 젊은 장정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게 되면, 그들이 제대로 들으면 얼굴이 새파래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총각파티, 총각딱지 뗀다고 군에 가기 전에 우르르 숫총각 객기에 의해서 술 먹고 가가지고 해놓고는, 문제는 창녀와 하룻밤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결혼해야 될 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면 그 창녀와 딴따따딴딴따따~♬ 예식장에서 부케 던지고 결혼식 해야 할 판이에요. 이 말씀이. 왜? 한 몸이니까.
그러면 논산훈련소 앞두고 있는 철없는 젊은 애들이 “하나님, 진즉에 이야기해주지요? 진작 이야기 해주지요?” 그럼 진작 이야기했으면 안 갈 거냐 이 말이죠. 안 갈 거냐? 심지어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해도 간음이라고 했는데요. 진즉에 이야기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쪽에서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내칩니다. “니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건방지게 말씀을 지킨다고? 니가 누군지 알아? 기다려봐. 내가 니가 누군지 알려줄게.” 해서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투입을 하게 돼버리면, 어느 하나라도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이 바닥 자체가,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 자체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버려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이미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죄를 짓고 싶어서 환장을 하고 있습니다. 뭐, 유혹거리가 없는가, 자극적인 것이 없는가, 먹음직한 것이 없는가, TV를 보면 맨날 먹는 것, 3대 천왕 나와서 맛있게 요리하는 것, 냉장고를 부탁해달라고 해서 냉장고를 맡기고, 한 끼 줍쇼 해서 남의 집에 가서 한 끼 얻어먹고. 보다 맛있는 것, 보다 짜릿한 것, 이게 전부야? 더 없어요? 보다 더 더 없어? 이런 것 있잖아요.
우리는 지금 주님이 궁금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행복해진다면 어느 수준까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미 방향을 그 쪽으로 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잊지 않고 창세전부터 자기 백성이라고 지적해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고 사도바울에게 찾아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데 그냥 찾아가지 않고 말씀으로 찾아가는 겁니다. 말씀으로. 니가 생각했던 단편적인 개념의 틀을, 니가 범위를 넓히라는 겁니다.
죄라는 범위에 대해서 니가, 니가 생각했던 죄 말고, 그게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이렇게 판을 더 넓게 키우는 겁니다. 판을 키우다 보면 우리가 죄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점차로 깨닫게 돼요. 주님과 가까이 할 생각부터 하지 말고 니가 우선 죄 아니라고 여겼던 그것에 말씀과 동반해서 깊이 다가가보면 거기에는 거리를 좁히는 동시에 공간은 넓어져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주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새로운 공간생산’이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새로운 공간생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공간이 없이 그냥 보면 가까운 사이 같지만 사실은 멀어도 먼 거리로 뚝 떨어져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뛰어넘을 수 있는 계곡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폴짝 뛰어넘어서 우리와 같이 죄 속에, 시커먼 잉크물속에 들어와 버리신 겁니다.
우리가 기피하는 죄, “내가 더러워서 그 죄는 안 짓습니다.”하는 그 죄에, 그 더러운 그 죄에 주께서는 먼저 와 계셔가지고 이리로 오라고 지금 손짓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그 죄를 더럽다고 기피해? 사실은 너를 위해서 준비된 죄야.”라고 그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잘난 척하지 말고, 깨끗한 척하지 말고, 반듯하게 살았다고 하지 말고, 기품 있게 살았다고 하지 말고, 기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에게 기품 없습니다. 교양 없습니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다 거기에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혹독한 예가 바로, 참을 수 없는 그 예가, 빼도 박도 못하는 그 예가 바로 창세기 38장 21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 믿는 유다가 경건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이방 여인 다말을 내쫓아버리죠. 근데 그 이방 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했어요.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여기 창녀라는 원뜻이 바로 이방신전에서 몸 팔아서 돈 버는 그 창녀를 이야기합니다.
다말이 그 창녀로 위장해가지고 자기 시아버지를 유인하도록 조작해버리죠. 그 순간에 다말의 인생은 없습니다. 다말의 인생은 이미 시아버지의 인생이 확대된 그 인생의 변두리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인생, 아니 시아버지의 인생이라기보다 야곱의 언약이 담겨있는 그 인생을 확대시키는 거예요. 왜? 언약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아버지 유다는 경건한 집안이라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 며느리가 그러한 더러운 짓을 하다니! 그냥 죽이지 말고 불로 태워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야? 어느 놈하고 붙었노?” “이놈하고 붙었습니다.”하고 내놓죠. 이놈이 지놈이거든요. “누구야? 너를 임신시킨 놈이?” “이놈입니다.” 도장, 끈, 지팡이를 증표로 내놓죠. 다말은 더러운 여자의 자리에 서있고, 유다는 자칭 경건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서있는데, 누가 누구를 불러내느냐 하면, 경건에 있는 자리를 더러운 다말이 불러냅니다.
그때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한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니가 진짜로 경건하다. 니가 의롭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기피하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새로운 공간의 자리에요. 새로운 공간의 자리. 창기를 두지 말라, 그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이런 이야기할 즈음에 이미 군데군데, 온 사방에 그런 창녀들이 꽉 깔려있는 그러한 세계를 내가 의도적으로 허락할 것이라는 겁니다.
온통 창기가 넘치는 그런 세계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는 겁니다. 유발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세계에서 우리가 좋다면 그걸 절대로 포기 못할 우리들의 본성이 오늘날 이 시대를 만든 거예요. 똑같은 예가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게 되면 이러한 창기를 이 세상의 핵심적인 중심지로 삼아버립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현재 이 세상에는 230국의 나라가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나라는 뭐냐 하면 섬 하나면 나라에요. 그런 나라들이 많은데 한 230국이 됩니다. 230국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그걸 한 나라로 집결시켜버렸습니다. 그 한 나라가 뭐냐, 음녀입니다. 음녀, 음탕한 여인이에요.
근데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그 외 세상나라를 보면, 특히 이슬람 같은 경우는 아주 창기를 싫어하고, 공자맹자 하는 그 나라도 싫어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명분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나라들이 거의 백퍼센트인데, 어떻게 성경에서는 그걸 일괄적으로 음녀라고 하느냐? 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 17장 6절에 나옵니다.
그 음녀가 왜 음녀냐 하면, 이 여자가, 여자라고 하는 것은 통합된 모든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아~대한민국 하는 세계도 포함이 됩니다. 태극기 흔들고 촛불 흔드는 그 세계도 포함이 됩니다. 그게 왜 음녀냐 하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취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감추고 싶은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건드린 겁니다. 태극기 집회 왜 하고 촛불집회 왜 하느냐, 딱 보니 살기 위해서 해요. 어떻게? 행복하게. 어느 나라에서? 이 나라에서. 이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데모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 음녀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추방시킨 나라고, 그냥 추방시켰습니까? 죽여서 보낸 나라인데? 주님이 죽음으로써 떠난 나라를 우리는 그걸 꽉 쥐고,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사철 내내 보람 있게 살려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독도는 우리 땅, 이러면서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제가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아무리 외국여행 다녀보라고요. 외국여행 다녀봤자 결국은 뭐냐 갈 곳을 잃어요. 최백호에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갈 데가 없어요. 아무리 돌아다녀봤자 갈 곳이 없어요. 그냥 그 테두리 안에서 노는 겁니다. 구름 같은 인생, “주모 국밥하나 말아주소.” 그런 것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오늘은 이거, 내일은 저거, 그 다음에 저거. 갇혀있어요. 갇혀있어. 음녀라는 곳에 갇혀있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미 마귀의 앞잡이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관심사가 내 관심사나 이태리 관심사나 프랑스 관심사나 저 제주도 관심사나 저 부산 관심사나, 관심사는 일반적입니다. 똑같아요. 논산훈련소 가기 전에 꼬셔볼까? 하고 객기부리 듯 창녀촌 찾는 것은, 혼자도 안 가요. 친구들하고 가요. 너나 나나 창기나 생각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요. 니도 돈 벌고 살고 나도 몸 팔아서 돈 벌고 살고. 이걸 가지고 투명사회라고 합니다. 투명사회.
왜, 창기가 더러우냐 하면 이게 투명하기 때문에. 딱 까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무 감각이 없어요. 나무 같아요. 빨리 일 끝내라. 돈 던져주고.
<사이런스>영화에 보면 천주교인을 신고하면 은 100냥을 주고, 모임을 신고하면 은 200냥을 주고, 외국인 신부를 신고하면 은 300냥이에요. 그러니까 배신하는 자가 신부를 신고해서 300냥을 받습니다. 그 모습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거든요.
하나님하고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어떻게 그렇게 딱 맞는지, 누가 다른 사람을 보고 창녀라고 욕을 하겠습니까? 내 노동력 제공하고 돈 받는 것,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오지를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은 뭐냐 하면 내 노동 팔아서 돈을 갖고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돈을 “주께서 주셨죠?”라고 하면서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주님의 피 묻은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이 땅에 살 가치도 없는 이 더러운 목숨을 오늘도 주 앞에 내맡기기 위해서 왔습니다.” 라는 그런 뜻으로 가져오라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이스라엘에 창기를 둔다는, 이 창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성전과 대비가 되는데, 에스겔 16장에 보면 아예 통째로, 이제는 나라, 남북으로 갈라졌거든요. 남쪽, 북쪽 모조리 다 창녀, 음녀라고 합니다. 38절에 보면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이렇게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남쪽, 북쪽 근처에다가 이방신을 믿는 나라들, 민족들을 주께서 아주 착실하게 다 꽂아놓았어요. 그쪽에, 여호와 말고 그쪽 신이 이스라엘 경내에 쑥 들어오게 만듭니다. 이렇게 들어오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척결하도록 작전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꾸민 겁니다.
“말씀을 너에게 준 것은 멸망받기 위해서 준 것이다. 너희들은 지킨다고 지키지만 너희들은 너희 본성을 몰라. 니 본성이 말씀을 지킬 본성이 아니야.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속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내 쪽에서 들어가기에는 주님과 우리사이는 죄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 멀어요. 점프해서 뛰어넘어도 주님 계신 곳에 갈 수 없습니다. 시편 87편 6절에 보면, 성경에서 가장 어렵다고 칠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이게 아주 어려운 대목이에요.
여진족, 뭐 말갈족, 퉁구스족, 필리핀족, 미국 인디언족, 이 세상에 무수히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모든 민족들은 이미 사전에 등록된 민족이라는 겁니다. 등록된 민족이고, 그 민족에서 이방민족이 태어나면 니는 원래 그 민족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이 민족에 등록된 사람으로서 태어나야만 했고 그렇게 지정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시온을 시온답게 거기서 높이기 위해서 한 거예요. 시온, 이스라엘 성전 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다른 여타의 민족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죄를 알아야 하나님의 용서의 값어치가 난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에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성전에서 제사 드립니다.” “아니, 그래가지고는 몰라. 니가 이미 이방민족과 같이 섞여서 살아봐! 살아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제사로 피 흘려서 제사로 용서한다는 그 용서의 의미가, 니가 진짜 내 백성이라면, 진짜 이스라엘이라면 깊이 있게 더 깊이 있게 절감하게 될 거야.”라는 겁니다.
제가 대전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궤에 구체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상자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사는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언약의 핵심을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상자를 덮는 덮개, 뚜껑에 있습니다. 기억나죠? 그 뚜껑에 피를 바릅니다. 피를 바르게 되어 있어요. 아침에 장로님께서 기도한 것처럼 한 사람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용서를 받아요. 소돔고모라에 한 사람의 의인만 있어도 다른 사람이 용서받는다 말이죠. 다른 사람은 덤으로 그냥 용서받는 거예요.
그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대로 달성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나라에요. 예수님 덕분에 덤으로 몽땅 다른 사람이 단체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나라를 추진하신 거예요. 그 추진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인식과 그 상식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오늘 같은 율법을 준 겁니다.
깨끗한 돈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챙기세요. 줄 때 챙기세요. 아무소리하지 말고. 제가 산책하다가 보니까 고사지낸다고 시루떡을 한다라이 놓고 갔어요. 그것을 가지고 왔는데, 워낙 많아서 다 못 먹었어요. 그게 하도 많아서 처갓집에 떡을 주려고 하니까 처갓집은 모태기독교집안이에요. 재수 없어서 안 먹는다고 해요. 그 맛있는 것을 왜 안 먹어요. 처음 맨 위에 것은 향냄새가 나서 좀 그랬는데, 그건 말을 안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주 말끔하게 맛만 있던데요. 구멍 뚫린 찜통까지 다 바치는 거예요. 민족에 등록된 숫자가 나한테.
고린도전서에 보면 뭐든지 먹어라. 뭐든지. 물론 저는 개고기, 곱창, 순대 빼놓고.
뭐든지 먹어라. 뭐든지 감사히 먹어라. 왜?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주신 돈과, 중이 주든지, 여호와증인이 주든지, 안 그러면 신천지가 주든지, 뭐든지 챙기라. 등록된 민족에 의해서.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챙길 것 다 챙겨야 해요.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십자가의 고마움에 영광을 돌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돈밖에 모르면서 돈을 싫어하는 양 여기지 말게 하시고 오히려 그런 세상에 주께서 내몰리고 있음을 깨닫고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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